偉人*人物

원 숭 환 (袁 崇 煥)

영국신사77 2007. 1. 26. 13:07
         원 숭 환 (袁 崇 煥)
                               원   숭   환 (袁 崇 煥) 

                                                                                   집필자 : aeonirene  (2003-10-10 12:54)

                                      원숭환 평전


  원숭환(袁崇煥), 그는 누구인가? 



                         * 중국 역사 중의 뛰어난 인물

  홍콩(香港)에서 150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과거 삼백여 년간 중국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 두 명이나 배출되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당연히 손문(孫文)선생이고, 다른 한 분은 광동(廣東) 동완현(東莞縣)에서 태어난 원숭환(袁崇煥)이다.

 나는 원숭환이 쓴 상주문과 싯귀 및 그와 관계되는 역사적 사료 등을 탐독하였는데, 읽을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마치 고대 희랍 극작가 유리피데스나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하였기 때문이었다.

 

  원숭환은 고대 희랍의 비극에 나오는 영웅들처럼, 힘과 지혜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의 용솟음 치는 정열과 불의에 굴복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격은, 명말(明末)의 부패할 대로 부패한 조정과 더욱 강하게 충돌되었다.



 원숭환의 자(字는) 원소(元素)이고, 호(號)는 자여(自如)이다. <환(煥)>은 불같이 밝다, 밝게 빛나다, 찬란하게 광채를 띠다 라는 뜻이고, <소(素)>는 솔직하고 질박한 자연의 본성을 뜻하는 것이다. 그 이름 한 자만으로도 그의 위대한 일생과 장대한 작품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충분히 그의 곧은 성격은, 그가 불우한 시대에 태어나 성장하면서 심한 모순과 충돌하여 더 강직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느 면에서 보면, 시대는 곧 개인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원숭환은 희랍시와 비극에 등장하는 영웅들과 같이, 비극적 종말을 피하기 위해 각 전투마다 전력을 다해 용감히 싸웠다.

 희람의 서사시 <일리어드>에 등장하는 아킬레스는 신으로부터 영웅적 운명을 받고 태어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신이 그를 전쟁에 패하고 죽게 하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라 느꼈었다.

 원숭환에 관한 책을 대할 때도, 그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만청(滿淸)의 황태극(皇太極)이 어떻게 이간책을 꾀했는지, 숭정(崇禎)과 간신들이 어떻게 원숭환을 죽였는가 하는 책을 읽을 때도 똑같은 비극적 참담함을 느꼈다.

 역사학자들이 원숭환을 평할 때는 그의 공적과 후세에 미친 영향, 그리고 명청(明淸) 양대의 패망과 부흥에 대한 작용 등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근래

10여 년 동안 나는 거의 매일 소설과 신문의 사설을 쓰고 있다. 그래서인지 역사와 정치소설 등 어느 것 할 것 없이 똑같이 흥미있는 분야다. 게다가 원숭환의 일생을 연구하고나서부터 그의 업적도 위대했지만, 그의 강렬한 성격이 내게는 더욱 큰 관심사였다.

 근래에 만주인(滿洲人)의 중국 유입(流入)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원숭환의 공적도 점점 그 빛을 잃고 있다. 하지만 그의 영웅적 기개와 호방한 성격은 시대적 요구와는 무관하게 빛나고, 그와 같은 예로 칠국분쟁의 시비(是非)와 성패가 오늘날 이미 그 의의를 잃어버렸지만, 형가(荊軻), 굴원(屈原), 린상여(藺相如), 염파(廉頗), 신릉군(信陵君) 등과 같은 인물들은 역사와 정치를 초월하여 그 명성을 평가받고 있다.

 <벽혈검(碧血劍)> 중의 원승지도 유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도 한때 좌절하여 해외로 도피하려 했지만 결국 난세를 걱정, 정의를 외치며 떠나지 않았다.

 그에 못지 않게 원숭환도 진정한 영웅이었다. 단지 그의 결점을 지적하자면, 그 혼자만의 방식대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는 것 뿐이다. 그는 소설상의 허구적 인물보다 더 영웅적 기개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명말(明末)의 불행한 시대, 어느 누가 불행하지 않았겠는가! 군주가 이름을 달리할 때마다 실패와 굴욕과 함께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야 했다. 숭정, 청태조(淸太祖) 누르하치, 청태종(淸太宗) 황태극, 몽고인의 우두머리 임단한(林丹汗), 조선국왕 이종(李倧) 등이 모두 장군과 간신들의 모함 속에서 그렇게 사라져 갔다.

 이러한 악순환에 의병들과 유구(流寇), 굶주린 백성들 및 재능과 용기가 있는 영웅들 - 양련(楊漣), 웅정필(熊廷弼), 손승종(孫承宗), 이자성(李自成), 원숭환 등은 분노를 폭로하고 난을 일으켰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태평연월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커다란 고통을 겪었다.

 산동(山東)의 대 기아 중에는 남편이 아내의 시체를 먹었고, 어머니가 어린아이의 시체를 먹었다. 그때 영웅들은 참사와 고통을 보고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대적 불행을 운명이라 여기며 묵묵히 참고 받아들였지만, 영웅들은 용감히 전장으로 뛰어들어 역사를 바꾸어 놓기도 했다. 그러한 점으로 볼 때 위대함과 장렬함은 시간적인 거리감을 초월하여 우리들의 가슴 속에 오래 기억될 것이다.


                           * 소수 민족 폭동 평정의 주역

  이 불행한 시대는 수십 년 동안 누적되어 온 정치적 부패가 극에 달하여 터진 것이다.

 나의 서가에는 영국 역사학자 제임스가 쓴 <로마제국 멸망사>의 주석본 3권이 꽂혀 있다. 그 겉표지는 로마 건축양식의 대리석 기둥이 그려져 있는데, 의미심장한 그림이다. 1권에서는 약간 파손된 기둥의 그림이, 2권은 그보다 더 많이 파손된 그림이 그려져 있다. 3권은 기둥이 완전히 소멸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붕괴가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전개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명나라의 멸망도 이와 유사하다. 명나라의 쇠퇴는 신종(神宗) 때부터 시작되었다. 신종의 연호는 만력(萬曆)으로 명나라 왕 중 가장 오랫동안 제위에 있었다. 그는 무려 48년간 황제로 군림해 있었다. 그가 황제의 자리에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에, 국가와 백성들에게 끼친 피해는 글로 형용키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52세에 세상을 달리했다. 그의 조상에 비해 오래 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조상 태조(太祖)는 71세까지, 성조(成祖)는 65세까지, 세종(世宗)은 60세까지 살았다.

 

  그러나 신종은 젊어서부터 아편을 애용하기 시작했다. 아편은 그의 생명을 단축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그의 탐욕은 천성적인 것이었지만, 게으르고 나태한 것은 바로 아편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력 초기는 중국 역사상 가장 찬란한 한 때였다. 근대의 자기(瓷器) 및 기타 수공예품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국력이 가장 부강했을 때 제작된 자기가 가장 훌륭하다는 것이다. 굳이 학자들의 견해를 빌리지 않더라도, 국력이 융성할 때 문화가 빛남은 당연한 이치이다. 만력 연간에 만들어진 자기와 법랑기는, 그 어느 때와 비교해도 가장 수려하고 정교하여 보기드문 걸작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것은 만력 초년에, 중국 역사상 뛰어난 인물 장거정(張居正)을 등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히 똑똑하고 재능있는 정치가였다.

 신종은 10세에 왕위에 올라, 모든 일을 그의 어머니의 말에 따라 처리했다. 신종이 장거정을 재상으로 등용하니, 만력 원년부터 10년까지 장거정의 업적은 실로 주목할 만하였다. 그는 명장 이성량(李成梁), 척계광(戚繼光), 왕숭고(王崇古) 등을 등용하여 몽고인의 북방 침입을 막고, 오히려 평화무역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남방의 소수 민족의 폭동도 모두 평정하였다. 나라는 점점 부강하게 되어 식량과 국고도 쌓이게 되었다. 도로정비도 활발히 추진되었다. 농토를 정비하여 과세도 공평하게 거두어 들이는 한편, 관료제도를 엄격하게 정하여 탐관오리들의 출현을 막았다.

 그때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대국이었다. 유럽의 인문학자들은 그때의 중국문화를 일컬어 가장 찬란한 문화라고 칭하고 있다. 그들은 중국의 문화, 정치와 문관 제도, 4통 8달의 도로와 백성들의 유복한 생활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다.

 만력 10년은 서력 기원으로 1582년이다. 이로부터 6년 후에 영국은 에스파니아의 무적함대에 대패하였고, 30년 후에는 영국의 청교도들이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하였다. 그 후 61년이 지나 루이 14세가 프랑스의 왕좌에 군림했고, 83년 후에는 런던이 공포의 오염 도가니에 빠졌다. 만력 초년의 북경, 남경, 양수, 항주 등의 대 도시에서는 화려한 자기 문화가 성시를 이루어 외국인의 주목을 끌었다.

 중국의 경제도 신속히 발전하였는데, 특히 수공업과 기술면에서 대단한 진보가 있었다. 15세기경 중국은 세계 최대의 면화 산지였었다. 정덕(正德)연간에 월남의 우량품종을 들여와 널리 보급하였으며, 광동 때에는 중국일대가 최대 면화 산지였다.

 

  그러나 군주 집권의 절대 군주제도는 날이 갈수록 부패하여, 부강한 대국을 고통의 늪으로 빠뜨리게 하였다.

 황제가 약관(弱冠)이 되었을 때 (만력 10년), 장거정이 세상을 뜨자 황제는 스스로 집권하였다. 그후, 황제가 장거정의 관직을 박탈하고 재산을 모두 빼앗자 그의 아들은 자결하고 말았다.

 신종은 역대 임금 중에서 상당히 총명한 편이었다. 중국 역사상 횡포한 임금 중에서 총명한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수 양제(煬帝), 송 휘종(徽宗), 이후주(李後主) 등이 모두 그러한 인물들이었다. 더군다나 명 신종은 나태함과 탐욕스럽기까지 하였다. 황제의 탐욕을 채우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신종은 국고를 위해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고(內庫)>라고 칭하는 자기 개인의 금고에 돈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그는 상세(商稅) 이외에도 서적 및 농기구를 빌려주고 받는 세금 등 일체의 상품 교역에도 세금을 부과하였다. 그는 일종의 <광세( 稅)>를 발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극악하고 압제적인 통치하에서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하여져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청나라 공격에 대패

  이러한 때에 청나라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만력 45년 누르하치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에는 요동을 무자비하게 점령하였다. 명군은 크게 패하여 총대장 장승음(張承蔭)이 전사하고, 만여 명의 군사들이 패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47년에 양호(楊鎬)가 군사 18만, 엽혁군(葉赫軍) 2만, 조선군 2만 명을 이끌고 4길로 나누어 명나라를 공격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약 6만 명의 군사들이 집중적으로 서로(西路)를 방어하였다. 서로군의 총대장은 두송(杜松)이었다.

 명, 청 양군대가 서로 맞붙어 싸울 때, 갑자기 온 천지가 깜깜해지며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두송은 이때 어서 불을 밝히라고 명령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커다란 실수였다. 명군은 스스로 불을 밝혀 청군의 공격을 자청하였던 것이다. 누르하치는 맹공을 퍼부어 6만 병사를 몰살시켰다.

 누르하치는 <집중주력(集中主力), 각개격파(各個擊破)>라는 전략을 내세우고 하나하나 패퇴시켜 나갔다. 명군 북로의 대장 마림(馬林), 동로의 대장 유정(劉鋌)도 모두 패하였다.

 유정은 당시 명나라 제일의 장군으로, 일찌기 일본을 침임하여 무찌른 적도 있고,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의 명성은 온천지에 유명하였다.

 그가 사용한 <빈철도( 鐵刀)>의 무게는 120근으로 천하의 <유대도(劉大刀)>라고 불리워졌다. 그의 대도는 관우(關羽)의 81근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보다도 무려 38근이나 더 무거웠다. 두송이나 유정 같은 명장들이 모두 청군에게 크게 패하자, 명군 군사들은 심리적으로 타격을 받고 자연히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이 대전은 명, 청 양조 흥망을 가늠하는 역사적 대결이었다.

  명군이 패하게 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명군의 원수 양호는 문관이어서 군사 전략에 대해서는 서툴렀다.

 

  둘째, 명조는 이미 부패하여 군대의 기강을 상실하였을 뿐 아니라,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양호가 패하자, 다시 조정에서는 웅정필을 파견하여 요동을 지키게 하였다.

 만력 46년 7월, 웅정필은 산해관(山海關)으로 출발했으나 철령(鐵嶺)은 이미 함몰되었고, 심양(瀋陽) 및 그 부근을 지키던 군사들도 이미 흩어져 달아난 후였다. 군대의 기강은 무너지고 병사들은 싸울 투지를 잃었으며, 기마병들은 고의로 말을 죽여 출전을 피하는 소동까지 부렸다. 이때 청병이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자, 웅정필의 군사들은 미리 도망쳐 버렸다. 웅정필은 실로 난감할 뿐이었다. 군량미는 이미 바닥이 났는데도, 황제는 여전히 군량미를 더이상 내주지 않았다.

 신종은 변방의 정세가 급박해지는 것을 보고도, 백성들에게 더욱 무거운 세금을 징수하여, 자신의 내고만을 채울 뿐 군량미를 보내지 않았다.

 변방에서 연일 비보만이 전해오자, 군신들은 전략을 세워 대처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황제는 태감(太監)을 파견하여, '황제는 병환 중이시다'라는 글을 보냈을 뿐이다. 이부 상서 조환(趙煥)이 참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다.

   "적은 북경으로 가까이 오고 있는데, 황제께서는 궁중에 숨어 병이 났다고 하시니, 도대체 누가 적을 물리치겠습니까?"

 신종은 이 글을 보고 욕을 했으나 ,마음속으로는 걱정을 하여 일차 국방회의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후 신종은 끝내 병들어 서거하였다. 물론 그렇게 탐욕스럽게 모으던 돈은 한 푼도 손에 쥐지 못한 채로......


                            * 대신들 분파 분쟁 일삼아

  신종의 서거 후, 그의 아들 광종(光宗)이 왕위에 올랐으나, 약을 잘못 복용하여 한달 만에 그만 죽고 말았다. 광종의 아들 주유교(朱由校)가 이어서 욍위에 오르니, 왕명은 희종(熹宗)이었고, 연호는 천계(天啓)라 하였다.

 광종의 재위 시기는 한달 밖에 되지 않는 극히 짧은 시기였지만, 그가 남겨 놓은 사후(死後) 문제는 당쟁을 야기시켰다. 명말의 3대 대신인 정격( 擊), 홍환(紅丸), 이궁(移宮)은 모두 광종의 왕위 및 생사와 관계있는 인물이었다. 대신들은 2개의 파로 나뉘어 분쟁을 그치지 않았다.

 희종은 16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어린 나이로 아직 유모 객씨(客氏)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 객씨는 상당한 권력을 쥐고 있었고, 태감 위중현(일명 충현)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희종은 어려서부터 나무 토막으로 만드는 일을 좋아하였고 손재주도 대단하였다. 위중현은 희종이 목공예에 몰두하고 있을 때를 노려서 나라의 중대사를 논의, 간청하였다. 희종은 하던 일에 눈도 떼지 않고 "대신이 알아서 처리하구료"하고 국사를 미루곤 했다. 자연히 위중현은 방자하게 되고 간신배들이 그를 받들게 되었으니, 조정의 실권은 위중현이 장악하고 있었다. 희종은 <만세(萬歲)>라고 칭했는데, 비해 위중현을 <구천세(九千勢)>라고 불렀으니 그의 권력이 어떠했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위중현은 본래 의지할 데 없는 떠돌이였다. 젊었을 때는 도적질까지 했던 망나니였다. 무슨 야심에서였는지 스스로 거세를 하고 궁궐로 들어와 태감이 되었다. 그는 글자를 알지 못했으나, 기억력 하나만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교육을 받지 못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당시 제일의 대국인 중국의 군정 권력이 이런 사람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으니......

 웅정필이 요동을 지키고 있을 때도, 위중현의 제지로 무기와 식량이 보내지지 않아 감히 출전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모두들 웅정필이 무능하다고 하여 그를 내쫓고 다시 원응태(袁應泰)를 원수로 삼았다.

 원응태는 수리공정에 능한 인재로, 치수와 난민 구제에 공로가 큰 사람이었다. 그는 인자하고 근면하였으나, 전략에 대해서는 치밀하지 못했었다.

 

  청의 누르하치는 웅정필이 물러났다는 것을 알고, 즉각 병사를 파견하였다. 원응태는 7만의 병사를 보내 싸웠으나, 여지없이 패하고 말았다. 청군은 이미 심양을 점령하고, 다시 요양(遼陽)을 공격하였다. 명군은 또 크게 패하니, 마침내 군사적 요충지인 요양마저 청군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명군이 계속 궁지에 몰리게 되자, 조정에서도 속수무책인 채로 있을 수 없어, 다시 웅정필에게 출전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병부상서 장학명(張鶴鳴)과 의견이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순무(巡撫) 왕화정(王化貞)도 웅정필의 지휘에 복종하지 않았다.

 왕화정은 6만의 병사만 있으면, 그가 나서서 청군을 완전히 소탕할 수 있다고 입빠른 장담을 하였다. 난국에 처한 조정은 호언장담하는 그를 믿었고, 병부상서도 왕화정을 지지하였다. 결국 왕화정은 14만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출전하였다가 완전히 몰살당하였다. 조정에서는 시비도 가리지 않고, 왕화정과 웅정필을 노예로 삼고 장학명을 파면시켜 버렸다.

 이리하여 청과 명은 세 번을 싸웠는데, 모두 명군이 대패하였다. 명군은 숫적으로는 청군의 몇 배나 되고 무기도 훨씬 진보되었고 화기도 있었다. 그런데도 실패만 거듭한 주원인은 군대의 준비가 없었고, 훈련의 결함 및 지휘의 착오였다. 게다가 사기도 저하되어 있었다. 조정이 시끄러운데 어찌 청군을 이길 수 있었겠는가.

 중국은 문관이 전쟁을 지휘하는 모순된 제도가 있었다. 이 제도의 근원은 황제가 무관을 믿지 않는데 있었다. 명 황제들은 무관들이 무력을 행사하여 그들의 왕위를 빼앗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문관으로 하여금 무관을 장악하게 하였다. 나중에는 무관을 지휘하는 문관도 믿지 못하여, 태감을 보내 감시하게 하였다. 당시 태감 신분은 왕의 심복이기도 하였지만, 그들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기 때문에 왕위를 빼앗을 가능성이 희박했었다.

 명나라 때는 어사(御史)의 권한이 매우 커서 행정 각부를 감찰하였다. 대학사(大學士) 대신 황제의 성지를 결정하였고, 육부상서의 결정 또한 어사의 비평이 항상 효력을 발생하였다. 황제는 <총독(總督)>, <순무(巡撫)>를 파견하여 감독케 하였는데, 본래는 <도찰원(都察院)> 소속의 감찰관이었으나 행정관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감찰관의 권한은 매우 커서 후에는 총사령(總司令), 총지휘(總指揮)로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사가 되어도 진사(進士)가 될 수는 없었다. 진사가 되려면 반드시 사서오경을 독파해야 했고, 서법도 뛰어나야 했으며, 팔고문(八股文)에도 능통해야 했다. 명나라에서 대군을 지휘하기 위해 파견했던 사람들이, 모두 시를 읊고 팔고문에 능숙한 진사들이었던 것이다.

 명말, 청에 대항했던 명장으로 웅정필, 손승종, 원숭환이 있었다. 웅정필은 만력 26년에 진사가 되었고, 손승종은 만력 32년에, 원숭환은 만력 47년에 각각 진사가 되었다. 이들 세 명은 모두 문관이었지만, 다행히도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재능도 있었다. 진사 중에서 3명의 군사 전문가가 나타나자, 명황제는 위험인물로 여겨 그 중 한 명을 면책하고, 다른 두 명은 죽여버렸다.

 그래서 청에 대항하는 대장은 팔고문을 하는 문인 중에서도 군사적 재능이 없는 사람을 골랐던 것이다. 양호는 만력 8년에 진사가 되어 대군을 지휘하다가 전몰되었다. 원응태는 만력 23년에 진사가 되어 또 패전하였으며, 왕정화도 만력 41년에 진사가 되어 대군을 전멸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원숭환은 이러한 정치, 경제, 군사적인 배경 아래서 요동의 어려운 국면에 대응해야 했다. 그러나 당연히 더 어려운 것은, 북경 조정의 국면에 대응하는 것이다.

 정치,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서 군사의 천재 누르하치가 나타난 것이다. 누르하치는 엄밀한
군사적 제도와 기율(紀律)로, 이후 이백 년간 전세계에 이름을 떨쳤다.

 누르하치는 어렸을 때, 명나라 장군 이성량 집안의 노비였다. 어깨 너머로 한문을 배워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수호전(水滸傳)>을 즐겨 읽었다. 그의 자략은 천성적인 면도 있지만, 이 두 소설에서 얻은 것도 많았다.

 누르하치 자신도 지혜와 용기를 모두 갖춘 인물이었지만, 그에게 총명하고 용감한 아들과 조카도 있었다.

 원숭환은 서생(書生)이었다. 그는 시를 지을 줄 알았고,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진사가 되었으니 당연히 팔고문에도 능통했다. 원숭환은 영원(寧遠) 2차 대전 때 자청하여 선두에 섰다.

 누르하치와 원숭환이 정면으로 맞섰을 때, 청의 병사들은 기세가 등등한 상태였고, 명나라는 정치와 군사의 부패가 절정에 이른 상태였다.

 이렇게 약한 일개 서생이, 불리한 국면을 타파하고 천하무적의 대영웅을 대항하여 결연하게 무찔렀으니, 원숭환의 영웅적 기대 또한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문 일이었다.

 

 

                                 전략이 뛰어난 명장

  원숭환은 광동 동완현 사람이다. 조상들의 원적은 광서(廣西) 오주등현(梧州藤縣)이다.

 그는 강개하고 지략이 뛰어났으며, 사람들과 군사전략에 대한 논변을 좋아했으며, 퇴진하는 군사들을 만나면 변방의 정세를 묻기도 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 <호사(豪士)>라고 불렸으며, 여행 또한 좋아하였다. 그는 기회있을 때마다 여행을 하여, 거의 중국의 반을 돌아다닌 셈이었다. 그는 친한 친구와 군사전략의 이야기를 나눌 때면, 밤이 새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

 명나라에서는 3년에 한번씩 진사시험이 있었는데, 2월 9일에 시작하여 2월 15일에 끝났다. 그리고 3월 1일에 또 한번의 정시(廷試)가 있었다. 원숭환은 만력 47년 정시와 진사시험을 보기 위해 북경으로 갔다. 그해 2월 양호는 요양에서 대패하였다. 원숭환은 자연히 요동의 군사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고, 더욱 변방의 어려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진사에 합격한 후 복건소무(福建邵武)로 파견되었다.

 천계 2년, 그는 북경에 직무를 보고하러 와서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요동군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어사 후순(侯恂)의 주의를 끌어, 그의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병부(兵部) 직방사주사(職方司主事)로 승진되었다.

 명나라의 관제는 병부 상서(尙書) 1명과 좌우시랑(左右侍郞) 각 1명, 그 밑에 4개의 사(司)로서 무선(武選), 직방(職方), 차가(車駕), 무고(武庫)가 있었다. 직방사의 등급은 현재의 총참모부로 낭중(郎中) 1명, 원외랑(員外郞) 2명, 주사(主事) 2명이 있었다. 주사는 총참모부에서 문직중 교부처장(文職中校副處長)에 해당된다.

 원숭환의 병부주사의 임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왕화정의 대군이 광령(廣寧)에서 전몰하자 조정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청군은 파죽지세로 4년 만에 명군 수십 만을 전몰시키고 무순(撫順), 개원(開原), 철령(鐵嶺), 요양을 점령하여 산해관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산해관을 지키지 못하면, 북경은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북경에는 계엄이 선포되고 초긴장 상태로 돌입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원숭환은 말을 타고 홀로 산해관으로 갔다. 미리 지형과 정세를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병부에서는 그가 보이지 않자 이상하게 생각하였고, 집안에서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온 후 상세한 보고를 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청했다.

 "군사와 식량을 주시면, 혼자 산해관을 지키겠습니다."

 만약 평상시 같았으면 그는 파면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조정의 정세가 워낙 급박하여, 그를 병비검사(兵備檢事)로 승진시키고 산해관으로 파견하였다. 원숭환은 웅지의 꿈을 실현시킬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그는 조정의 지지를 받아 그의 고향으로 병사를 모집하러 갔다. 당시 산해관을 지키는 주요 병사는 새로 도착한 절강병(浙江兵)이었다. 이외에도 3천 명의 광동 수병(水兵)이, 원숭환이 고향으로 간 후에 도착하였다. 원숭환은 광동 보병(步兵)이 민첩하고 싸움을 잘하는 것을 알고, 그의 숙부 원옥패(袁玉佩)의 추천으로 3천 명을 모집하였는데, 그 중에는 원숭환과 죽음을 맹세한 사상정(謝尙政)과 홍안란(洪安蘭) 등도 끼어 있었다.

 원숭환은 산해관에 도착한 후에, 요동경략(遼東經略) 왕재진(王在晉)의 소속하에 있었다. 왕재진은 그가 책임감도 있고 일도 잘 처리하는 것을 보고, 전둔위(前屯衛)로 보내어 난민들을 수습하도록 하였다. 원숭환은 그 명령을 받자마자 아침을 불사하고 밤새 달렸다. 그가 도착할 때는 이미 날이 밝기 시작하였다. 전둔성에는 존경할 만한 장수가 없었는데, 원숭환이 도착하자 모두 그를 따르고 존경하였다.

 왕재진은 정식으로 그를 영전병비검사(寧煎兵備檢事)로 임명해 줄 것을 청했다. 그래서 원숭환은 영원과 전둔위 개성을 지키게 되었다. 방사령부 정치위원(防司令部政治委員)으로 산해관 밖의 청병을 방어하는 제 1차 방어선이 된 셈이었다. 영원은 최전방이었고, 전둔위가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원에는 성벽도 없었고, 방어공사도 되어 있지 않아, 성을 지키기에는 무리였다. 그래도 원숭환은 전둔위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명군은 일체의 방어시설을 산해관에 집중시켰다. 산해관은 방어의 제 1 요새로,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북경의 위험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반드시 더 북쪽에 성을 쌓아 방어를 해야 산해관도 안전하고 북경도 안전하였다.

 원숭환은 이런 관건을 상사에게 제의했다. 왕재진은 만력 20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강소(江蘇) 태창(太創)출신의 문약한 서생으로 군사에 대해서는 식견이 없었다. 안목도 낮아 산해관 밖 8리에 성을 쌓자는 원숭환의 건의를 반대하였다. 원숭환은 다시 제일 높은 상사인 엽향고(葉向高)에게 간청했으나, 그도 역시 거부하였다. 그러나 원숭환은 완강하게 계속 재차 상소를 올렸다. 이것은 그의 불굴의 집념을 나타내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영원 북쪽 십삼산(十三山)에, 패잔병과 난민 10여 만 명이 청군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조정에서는 대학사 손승종에게 그들을 구출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원숭환은 병사 5천 명을 데리고 가서 도와줄 것을 청했으나, 왕재진은 무모한 일이라 생각하여 거절하였다. 그 결과 10여 만 명의 패잔병과 난민들은 모두 청의 포로가 되고, 단지 도망쳐온 사람은 6천여 명에 불과했다.

 청은 이때 노예제도를 실행하고 있었다. 포로로 잡은 한인(漢人)과 조선인(朝鮮人)들을 매매했는데, 건장한 한인은 그 당시 가격으로 은화 약 18냥, 혹은 소 한마리와 바꾸었다. 십삼산의 10여 만 명의 한인들은 포로로 붙잡혀 모두 노예가 되었으니, 그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것은 청의 경제력 향상에 도움을 준 셈이었다.

 원숭환은 영원에 성을 쌓자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렸다. 조정의 대신들은 영원은 너무 멀어 방비를 할 수 없다고 모두 반대하였다. 그러나 대학사 손승종은 견식이 있는 사람이라 ,구체적인 사정을 이해하고는 원숭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 후, 원숭환은 왕재진을 대신하여 요동의 원수가 되었다. 천계 2년 9월, 손승종은 원숭환과 부대장 만계(滿桂)에게 영원을 수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원숭환이 이끄는 군대의 시작이었다.

 만계는 몽고인으로 용감하고 싸움에 능했다. 이때부터 그와 원숭환의 운명은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몽고 무장(武將)과 광동 원수는 모두 성질이 강직하고 기백이 넘쳤다. 두 사람은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격렬한 언쟁을 한 적도 있었지만, 속으로는 서로를 존경하고 있었다.

 영원은 산해관에서 200여 리나 떨어져 있어, 전략상으로도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영원은 지금의 흥성(興城)으로 금주(錦州)와 산해관의 중간 지점에 있다.

 천계 3년 9월, 원숭환은 드디어 영원에 도착하였다. 그전에 손승종은 조대수(祖大壽)를 파견하여 영원에 성을 쌓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대수는 명군이 성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대강대강 엉성하게 짓고 있었다.

 원숭환은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독려하여, 이듬해에 성을 완성하였다. 이 성은 원숭환 일대 사업의 기초가 되었다.

 이렇게 영원지방이 안전하게 되자, 요동과 요서의 한인들이 들어와 인구가 증가하게 되었다. 영원성의 축성은 명나라의 국방 한계선을 북쪽으로 200여 리나 연장시킨 결과가 된 것이었다.

 원숭환은 이와 동시에 군기를 정비하다가 교관(校官) 하나가 군량미를 착복하는 것을 발견하고, 당장 죽여버린 일도 있었다.

 그것은 군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손승종도 화가 나서 그를 책했다. 원숭환이 백배 사죄하였다.

 손승종은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어서, 청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24만 냥을 비축해 두자고 조정에 상소하였다. 손승종은 천계황제의 독서선생으로 그의 신임을 얻고 있으므로 황제는 즉시 허락하였다.

 그러나 병부상서와 공부상서가 반대를 하여 손승종의 전략은 실행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손승종은 둔전정책(屯田政策)을 실시하여 오히려 큰 효과를 거두었다.

 천계 4년, 원숭환은 대장 마세용(馬世龍)과 왕세흠(王世欽) 등 군사 1만 4천 명을 이끌고 광녕(廣寧)을 순시하였다. 광녕은 금주 이북에 있는 곳으로 청나라의 진지가 있는 심양과도 가까운 거리였다. 원숭환은 아직 청군과 싸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 순시는 도전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군은 응전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원숭환은 한 부대를 십삼산으로 보내 보았다. 그러나 이때 청군은 이미 그 산에서 퇴각하고 없었다.

 3, 4년 동안 이만큼 전세를 회복시켜 놓은 것은 원숭환의 노력도 노력이었지만, 손승종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숭환도 많은 공헌을 세워 병비부사(兵備副使)로 승진했다. 다시 우참정(右參正)으로 승진되었다.

 천계 5년 여름,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어 손승종은 원숭환의 계획에 따라 여러 장군들을 금주, 송산(松山), 행산(杏山), 우둔(右屯), 대릉하(大凌河), 소릉하(小凌河) 등의 요새로 파견하였고 다시 200여 리를 북진하여 요하(遼河) 서쪽의 옛날 영토를 거의 회복하였다.

 그러나 시국은 점점 어지러워졌다. 천계황제 휘종은 더욱 목공의 일에 집착하였고, 그에 따라 위중현의 권력 또한 방자하여, 무지하고 법도 모르는 그의 손에서 조정은 휘둘리게 되었다.

 천계 5년, 위중현은 정인군자(正人君子)를 교살했다는 죄목으로 양연(楊連)을 투옥시키고, 좌광두(左光斗), 위대중(魏大中), 원화중(袁化中) 등을 탐관오리라고 모함하여 역시 투옥시켰다.

 분통을 터뜨린 백성들이 북경의 거리로 몰려나와 고함과 울음으로 무고함을 증명했으나, 위중현은 정식 심판도 하지 않고 옥중에서 그 대신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위중현은 또 뇌물 받기를 대단히 좋아하였다. 그런데 손승종은 그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서 미움을 샀다. 위중현은 당장 손승종 대신 고제(高第)를 요동경략에 임명하였다. 그는 임명되자마자 ,각 성에서 철수하여 모든 부대를 산해관으로 집결해야 한다고 했다. 이 전략은 요새 방비를 그르치는 일인지라 원숭환은 당연히 반대를 했다

 원숭환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금주, 우둔, 대소릉하, 송산, 행산 등에서 군사들을 모두 철수시키고, 10여만 석이나 되는 양식을 거두어 들였다. 백성들과 장수들은 모두 분함을 참지 못하였고, 그 원성이 천지를 진동시킬 정도였다.

 

 

                                * 요하 공격서 대승

  청은 명나라의 허실과 경략의 무용함, 게다가 원숭환의 지지자가 없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천계 6년 정월 요하를 건너 2월 3일에는 영원을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급박한 정세에 놓이자 ,원숭환은 영웅의 기지를 발휘하여 적에게 대항할 것을 결심했다. 그와 대장 만계, 부장 좌보(左輔), 주매(朱梅), 참장 조대수, 하가강(何可綱) 등과 죽음으로써 성을 지키기로 맹세하였다.

 그는 또 전둔 수장 조솔교(趙率敎), 산해관 수장 양기(楊麒)에게, 만약 영원에서 도망쳐 오는 병사들이 있으면, 잡는 즉시 참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산해관은 그의 상사 요동경략 고제의 소관이었고, 원숭환의 권한은 영원과 전둔 밖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이때는 권한이나 상사를 따질 겨를도 없었다.

 청군의 선봉 부대는 철갑군으로 모두 2겹으로 된 철갑을 입고 있어 <철두자(鐵頭子)라고 불렀다. 또 청군의 견차(堅車) 끝에는 생 소가죽을 씌워, 돌에 맞아도 다치지 않게 되어 있었다.

 청군의 철갑차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밀고 들어와 성곽을 에워쌌다. 사방을 둘러싼 청군에게는 대포도 소용없었다. 이렇게 위급한 때, 명군은 한가지 묘책을 생각해 내었다. 그것은 계단의 연석을 파내어, 성 아래로 굴러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묘책을 실행에 옮겼다. 연석의 무게에 청군 철갑차는 짓눌렸다. 목판은 당해낼 수도 없었고 사람들은 모두 압사당했다.

 이렇게 하기를 만 5일, 청군의 맹공을 원숭환이 잠재웠던 것이다. 청 태조 누르하치는 부상을 입었고, 청병의 손실이 대단하여 마침내 퇴각하고 말았다.

 누르하치가 문무대신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내가 25세 이후로 이기지 못한 전투가 없었는데, 어째서 영원만은 점령할 수 없단 말인가?"

 그 후 누르하치는 평소에 앓던 병세가 더욱 깊어졌다. 7월에는 청하온천(淸河溫泉)으로 요양하였으나 ,다시 심양으로 옮겨 오던 중 심양에서 40여리 떨어진 애계보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 황제의 모함에 곤궁을 겪다.

  누르하치가 세상을 떠난 후, 8번째 아들 황태극(皇太極)이 왕위에 올랐다.

 황태극의 지략과 뛰어난 전략은, 실로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도 가장 우수했다. 중국 역사가들은 ,그가 종족이 다른 청의 황제이기 때문에 그리 높은 평가를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황제로 군림할 만한 훌륭한 그릇이었다. 신하 거느리는 지혜, 책임감있는 통솔력, 명쾌한 결단력 등은 정말 훌륭한 것이었다.

 누르하치도 군사적인 천재였지만, 황태극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지략이 뛰어났던 것이다. 더군다나 황태극의 정치적 수완은 오히려 누르하치를 능가했으니, 원숭환이 받는 압박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명과 청, 쌍방은 이 일단의 휴식기간 동안 자기들의 계획을 진행시키기에 바빴다. 명나라는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성을 쌓고 논을 넓혔으며, 청나라는 조선을 침략하여 통치를 확고히 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서서히 협상의 기세가 나타나게 되었다. 명나라 쪽에서는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요동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는 것이고, 청나라 쪽에서는 이미 획득한 땅을 확고히 지키면서, 명나라의 승인을 얻고 평화적으로 무역을 진행하는 거시었다.

 원숭환은 단기간의 화평의 필요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누르하치가 세상을 떠난 것은 원숭환에게 다시없는 좋은 기회였다. 이때 마침 오대산(五台山)의 이랄마(李剌麻)가 영원에 왔다. 만주인들은 불교를 신봉하고 있어서 랄마를 존경하였다. 원숭환은 이랄마가 영원에 머무르는 기간에, 2명의 사자를 심양으로 파견하여 누르하치를 조문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화평의 탐색을 위한 제 1 단계였다.

 원숭환이 이렇게 화평을 주장하자,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반대하였다. 특히 요동경략 왕지신(王之臣)은 원숭환의 주장이 송나라와 금나라의 화평처럼 어리석고 무모한 것이라고 탄핵하였다.

 원숭환은 이러한 반대 의견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안위는 접어둔 채 나라의 어려움과 존망만을 걱정하였다. 조정의 중신들은 <외국과 내통하는 배신자>라고 모함했으니, 원숭환에게 그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이 기간중 황태극은 조선을 점령하고 식량과 물품을 조공할 것을 요구했고, 원숭환은 금주, 중좌(中左), 대릉하를 더욱 튼튼히 하여 방어공사를 마치고 수사를 보내어 피도(皮島)의 모문룡(毛文龍)을 지원하게 했다.

 원숭환은 정치상으로 위중현의 적대파 계열에 속했다. 당연히 뇌물도 바치지 않았고 그의 생사당(生祠堂)을 짓는데 협조하지 않았다. 위중현은 여기에 불만을 품고 원숭환이 영원대첩을 승리로 이끌었음에도 1계급 승진 이외에 다른 보상을 내리지 않았다. 위중현은 오히려 강보에 싸여 있는 어린아이에게 백작(伯爵)의 칭호를 내렸다. 위중현은 태감으로 슬하게 자식이 없으며 그의 조카와 조카의 아들에게까지도 관직을 하사하였던 것이었다.

게다가 위중현은 원숭환에게 <원기가 쇠하여 금주를 지킬 수 없다>고 비방하였다. 원숭환은 이런 압력을 견디다 못해,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관직을 사퇴하였다.

 

 

                                * 총사령관에 임명

천계 황제 휘종이 마침내 천계 7년, 8월에 2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휘종의 아들은 모두 요절하였다. 그래서 그의 친동생 유검(由檢)이 왕위에 오르고 연호를 숭정(崇禎)이라 하였다.

 18세의 어린 숭정황제는 위중현의 손아귀에도 흔들리지 않고, 먼저 그의 당우들을 천천히 수습하면서 자살하도록 압박하였다. 그래서 길고 지루했던 권력투쟁을 깨끗하게 처리하였다.

 위중현이 죽은 후에, 그에 의해 면직되었던 대신들이 다시 기용되고 원숭환도 숭정 원년 4월에 병부상서로 승진되면서 우부도어사, 계료( 遼) 독사를 겸하게 되었다. 병부상서는 정 2푼의 관직으로 군부를 관할하고, 직례(直隷) 이북과 산동 북부 연해(沿海)의 청나라를 막는 총사령관이었다. 그리고 계주( 州), 천율(天律), 등래(登萊) 등의 술무를 책임지는 사실상 산해관과 금령의 방어도 원숭환의 소관이었다.

 이러한 원숭환이 숭정의 미움을 받게 된 원인은 <청발내노사건(請發內努事件)> 때문이었다. 게다가 모문룡 살인사건까지 겸하여 더욱 숭정황제의 불만과 미움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원숭환은 마침내 투옥되었다.

 그러나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그의 무죄를 알고 있었다. 대학사 주연유(周延儒)와 성기명(成基命), 이부상서 왕영광(王永光) 등은 원숭환을 풀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원숭환의 부하 하지벽(何之壁)은 40여 명의 동료들과 궁밖에 와서 원숭환 대신 감옥에 들어가기를 청했으나, 숭정 이하 그의 측근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숭정은 양태감의 말만 듣고 원숭환을 가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체면 때문에 다시 번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사 조영조(曹永祚)가 갑자기 첩자 유문서(劉文瑞) 등 7명을 붙잡아, 원숭환과 짜고 청군과 내통했다고 주장하였다.

 이 7명의 첩자들은 금의위(錦衣衛)에게 호송하라고 했다. 그런데 금의위는 7명을 모두 도망시켜 버렸다. 대신들은 아연실색하였고, 황제는 원숭환을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병부 직방사 주관의 군령과 군정들은 비교적 군무의 내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직방사 낭중 여대성(餘大成)은 원숭환의 무죄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병부상서 양정동(梁廷棟)과 거의 매일 투쟁을 벌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원숭환에게 2가지 죄명을 씌웠다. 첫째는 '반역'이었고, 둘째는 '마음대로 화평을 제기했다'는 것이었다. 소위 반역죄의 증거는 모문룡을 살해했다는 것인데 그 후에 원숭환이 모문룡의 참상을 공포하자 숭정도 원숭환에게 상을 내렸으니, 이것은 원숭환의 죄명이 될 수 없었다.

 '마음대로 화평을 맺다'라는 죄명도 화평을 찾기 위해 탐색을 했을 뿐이지 결코 완전히 조약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원숭환이 건의한 당시에 응당의 처벌을 내렸어야 했다. 그런데 그의 태자 태보(太保)의 직위를 종 2품에서 1품으로 올려주고 관복과 옥대, 그리고 은화를 하사했으니 '화평을 맺다'라는 죄명도 해당하지 않았다.

 이때 성 밖에서는 선비나 평민 할 것없이 모두 총독 손승종의 관청으로 찾아가 원숭환의 무죄를 호소했다. 손승종은 원숭환의 무죄를 믿고 있었으므로 숭정에게 상소를 올렸으나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대학사 한광(韓 )은 원숭환의 진사시험을 주관한 사람이었다. 그는 원숭환의 무죄를 주장하여 관직을 사퇴해 버렸다. 어사 모우건(毛羽健)도 원숭환의 무고함을 자세하게 적어 상소를 올리고 관직을 사퇴했다.

 당시 조정 대신들 중에서도 약 70%가 원숭환에게 동정을 했고, 나머지 30%가 황제의 뜻에 따랐다. 그 중 원숭환을 죽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사람이 수보(首輔) 온체인(溫體仁)과 병부상서 양정동이었다.

 온체인은 절강 오정(烏程) 사람으로 모문룡과는 동향이어서 내심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양정동과 원숭환은 만력 17년, 같은 해에 진사에 합격하여 요동에서도 같이 일하였다. 그 당시 원숭환은 그의 상사였는데 그때 나빴던 감정에 앙심을 품고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다. 이외에도 어사 고첩(高捷), 원홍훈(袁弘勳) 등이 원숭환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들도 모두 사사로운 일로 감정을 상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인 반감, 시기, 당파의 충돌, 풍문 등이 서로 뒤엉켜 원숭환이 모함의 그물에 걸려 들었지만, 그를 가장 비통하게 만든 사실은 사상정의 배반이었다. 사상정은 동완 사람으로 원숭환과는 죽음으로 맺어진 친구 사이였다. 그는 원숭환의 추천을 받아 참장(參將)에까지 올랐으나, 모문룡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병부상서 양정동에게 원숭환을 모함하여 복건 총병으로 승진되었다. 사상정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평생 은인을 모함한 것이었다.



                  원숭환의 죄명이 드디어 확정되었다.

 사실과는 무관한 죄명인 <모반(謀叛)>이라는 것이었다.

 증거가 불충분하였으나 숭정은 처음부터 이유 따위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처벌 내용은 <삼족을 멸한다>로 원숭환의 집안과 외가와 처의 집안을 모두 멸족시키는 것이었다. 여대성은 병부상서 양정동에게 원숭환은 죄도 없이 너무 과한 벌을 받으니 다시 한번 심사숙고할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자 양정동은 온체인과 상의하고 벌을 조금 경감하여 원숭환은 능지처참을 시키고 70세의 노모와 동생, 처, 어린 아들은 3천리 밖으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외가와 처가의 사람들은 구속하지 않았다.

 원숭환은 밧줄로 묶여 꼼짝도 못하고 사형장에 서 있었다. 북경의 백성들이 그의 고기와 내장을 떼어 가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드디어 사형집행인이 절차에 따라 그의 피부와 근육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부으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가 가장 참지 못할 욕은 <첩자!>라는 것으로, 그의 가슴을 도려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워다.

 군중들은 확실히 냉정했다. 게다가 그들이 속임을 당했다고 오해했을 때는 거의 맹목적이었다.

 북경의 백성들이 원숭환에 의해 기만당하지 않은 것은 천하가 다 아는데.....

 조선의 군신과 백성들조차도 원숭환의 억울함을 알고 불평을 토로할 정도였다.

 원숭환이 죽은 후, 어느 누구도 감히 그의 유골을 거두려 하지 않았다. 원숭환에게는 여(餘)씨 성을 가진 하인이 있었다. 그는 순덕(順德) 마강(馬江) 사람이었다. 그는 밤에 몰래 유골을 가져다가 광거문(廣渠門)내의 광동의원(廣東義園)에 묻었다. 성벽을 하나 건너 광문 밖의 넓은 광장은 8개월전 원숭환이 장사들을 거느리고 전쟁을 치르던 곳이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10배나 넘는 적군과 싸우면서, 황제와 북경의 백성들을 보호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호했던 황제와 백성들이 그를 능지처참했던 것이다.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그 충성스러운 여씨는 평생토록 원숭환의 묘를 지키다가, 죽은 후에도 그의 묘 옆에 묻혔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여씨의 자손대대로 원숭환의 묘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민국(民國) 5년까지도 여씨의 자손들이 원숭환의 묘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이 그렇게 충성스럽게 지키는 것은 그들의 조상들의 유언을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원숭환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힘쓴 사람들과 하인 여씨 같은 인물은 인간의 고귀한 일면을 나타내고, 사상정과 같은 행동은 인간의 비열한 일면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숭환을 능지처참시킨 것에서, 사람들이 이성을 잃으면 얼마나 광폭해지고 잔인해지는가를 엿볼 수 있다. 원숭환의 영혼은 고귀한 불꽃으로 영원히 타오를 것이다.

 원숭환이 죽은 후, 조대수와 하가강은 군사를 이끌고 계속 금주, 영원, 해등하의 요새에 주둔했다. 황태극은 드디어 대군을 이끌고 금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장장 1년의 사투 끝에 숭정 15년 3월, 홍승주(洪承疇)의 14만 대군의 전몰을 서두로 계속 침략당하기 시작했다. 조대수도 사력을 다해 방어했으나, 식량의 지원이 끊어져 투항할 수 밖에 없었다. 잇달아 만계, 조솔교, 하가강, 손조수 등도 투항을 하여 전쟁의 승리는 청군에게 돌아왔다.

  만약 원숭환이 전투를 이끌었으면 사태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원숭환이 무고하게 죽음을 당하자, 명군 군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잇달아 청군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요동 장사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원독사께서 그렇게 충성을 다해 나라를 지켜도 죽음을 면치 못했는데, 우리들이라고 여기서 무사하겠는가?"

  원숭환은 고단한 철학자도 아니요, 능숙한 정치가도 아니다. 엄격한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한신(韓信), 악비(岳飛), 서달(徐達)처럼 훌륭한 군사 대가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끊임없이 불타는 정열과 호방한 기개로 장사들을 격려하고, 굽힐 줄 모르는 강한 정신력으로 부하들을 이끌었다. 그의 지기(知己) 정본직(程本直)은 그를 칭하여 <공상가>라 하였고, 한 나라를 책임질만한 믿을 수 있는 사내라 하였다. 원숭환은 자기 자신을 명나라의 망명도(亡命徒)라 칭하였다. 망명도는 가정의 행복도 잊은 채, 매일 밤을 나라의 안위만을 생각항며 편히 자지도 못했다. 그의 생애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이 오로지 한 뜻을 위한 정열로 점철되었다.

 

 

 

                                                  * 원숭환 장군의 최후

  숭정이 원숭환을 죽인 것은, 그가 황태극의 이간책(離間策)에 말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삼국지연의> 중에서도 조조(曹操)가 주유(周瑜)의 이간책에 걸려 수군도독(水軍都督) 채모(蔡瑁)와 장윤(張允)을 죽이고 나서야 스스로 "내가 술수에 걸려 들었구나!"하고 깨달은 내용이 나온다. 숭정은 12월 초, 원숭환을 하옥시켰고, 다음해 8월 사형에 처할 때까지 8개월동안 남몰래 고민했었다. 그는 몇 번이나 원숭환을 풀어줄까 하고 생각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숭정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 싫었고, 당시 이간책으로 인한 자신의 우둔함이 노출된다면, 황제로서의 체면을 상실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숭환은 결코 반역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고, 북경 백성들을 기만하지도 않았다. 결국 숭정의 일시적 우둔함이 영원한 실책으로 남게 된 것이다.

 숭정은 재위 17년 동안 5명의 대학사와 14명의 병부상서를 교체했다. 또 그가 죽이거나 자살을 강요한 독사 및 총독이 원숭환 외에도 10명이나 되었다. 14명의 병부상서 중에서 왕흡(王洽)은 옥중에서 죽었고, 장봉익(張鳳翼)과 양정동은 독살당했으며, 양사창(楊嗣昌)은 스스로,목을 매달았고, 진신갑(陣新甲)은 참수형에, 전종룡(傳宗龍), 장국유(張國維), 왕재진(王在晉), 웅명우(熊明遇) 등은 면직당한 후 투옥되었다. 실로 극악무도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1950년 가을, 나는 북경에 머물 기회가 있어 매산(煤山)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숭정을 조문하기 위함이었다. 멀리 바라 보이는 황궁의 황금색 유리 기와는, 가을의 햇빛을 찬란하게 반사하고 있었다. 그 지붕을 응시하며 세월의 무상함을 회상하니, 그렇게 폭악하던 숭정에게서 오히려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였을까?

 그는 오로지 혼자였다. 주위에 마음을 터놓고 상의할 사람도 없었지만, 어떤 누구도 믿지 않았다. 숭정 17년 3월 17일, 이자성(李自成)도 맹공을 퍼붓는 청군을 막아내지 못하자, 그는 문무대신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거듭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군신들을 모두 죽여라>하고 써서 옆에 있던 태감에게 보여 주고는 즉시 지워 버렸다. 그가 자살하기 전, 피로 쓴 조서(詔書)를 남겼는데, 이자성에게 말하길 "이 모든 것은 군신들이 나로 하여금 잘못하게 한 것이니, 너는 나의 시체를 조각내도 좋고, 문무대신들을 모두 죽여도 좋다"라고 하였다. 그는 시종 칠에의 과실을 모두 문무대신들의 탓으로 돌렸다. 그만큼 나약했던 것이다.

 그의 형 천계는 오로지 목공예의 일에서만 기쁨을 찾았고, 유모에게 의지했으며, 위중현의 말은 모두 옳다고 믿고 그에 따랐다. 오히려 그렇게 누군가를 의지했던 황제들이 편안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숭정은 줄곧 우울, 번민, 초조, 의심으로 일관하여, 그의 17년의 재위 생활은 온통 고통의 날들이었다. 황제라는 지위는 사퇴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의 주위에는 정말로 믿을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는 서광계(徐光啓)의 권유로 천주교를 믿다가, 그의 아들 탁영왕(倬靈王)이 병이 들자 천주교로 아들의 병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것마저 멀리하게 되었다.

 중국 수천 년의 역사 중 군주가 적에 의해 포로가 되거나 죽음을 당한 경우는 많다. 정변 중에는 그런 경우가 허다 하였다. 그러나 나라가 위급하다고 해서, 자살을 한 왕은 숭정 단 한 사람 뿐이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자실에 대해서는 실제보다는 더 좋게 평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주색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일체의 나쁜 일은 모두 군신들이 처리하고 자신은 백성들을 사랑한 것으로 후세인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일체의 권력을 장악하고, 훌륭한 신하들을 죽이고 면직시켜 망국의 조건들을 하나하나 만들어 나갔다.

 명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전제적이고, 가장 부패했으며, 통치자가 가장 잔혹했던 시기였다. 명나라의 멸망은 당연한 귀결이었으며, 중국 사람들도 명나라보다는 청나라를 더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원숭환이 청의 침입에 항거한 것은 당연한 과업이었다. 당시 청은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민족이었고, 외국이었으며, 또 수십 만의 한인을 포로로 잡아가서 노예나 농노로 부렸기 때문이다. 청군은 중국의 토지와 성을 점령하고 약탈과 방화를 일삼고 한인들을 잔혹하게 학대했다. 후대에 청나라가 명조를 누르고 중국을 통치하게 되자, 지금은 만주족도 중화민족의 일부가 되어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당시 원숭환이 청의 침입을 방어한 것은 당연하고 또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후세 평론가들은 만약 원숭환이 죽지 않았다면 ,청이 중국을 정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당시 숭정이 황제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원숭환이 받아들여야 할 근본적인 운명은 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원숭환이 죽은 후 236년의 세월이 흘러 청조 말기도 역시 정치, 사회, 모든 것이 부패한 상태였다. 그리고 원숭환의 고향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손문(孫文)선생이 태어나셨다. 손문 선생은 고명한 견식과 탁월한 재능과 고상한 품격을 갖춘 사람이 국가의 대사를 맡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원숭환 시대의 고결하고 용감한 사람들은, 적의 침입에 항거하고 백성들을 보호하였다. 손문선생 시대의 고결하고 용감한 사람들은, 전제정치에 반대하고 민주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 이렇게 각 시대마다, 용감한 사람들은 정의를 위하여 자기의 일생을 바쳤던 것이다.

 

  시대는 끊임없이 변하며, 도덕관념도, 역사를 보는 관점, 업적의 평가도 변하고 있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들의 고결한 성품은, 아름다운 빛을 발하며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내용출처 : [인터넷]http://kimyong.new21.org/history/other/wonsunghwa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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