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

영국신사77 2007. 1. 23. 15:2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Antoninus, 121.4.26~180.3.17]

 

    요약

  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재위 161~180)로 5현제()의 마지막 황제이며 후기 스토아파의 철학자로 《명상록》을 남겼다. 당시 경제적·군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였고 페스트의 유행으로 제국이 피폐하여 그가 죽은 후 로마제국은 쇠퇴하였다.

 

 

   한자명 안돈(). 121년 로마에서 출생하였다. 5현제()의 마지막 황제로, 후기 스토아파()의 철학자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가 된 후 140년 로마의 콘술(집정관)이 되었고, 145년 안토니누스의 딸(사촌누이)과 결혼, 161년 안토니누스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로 즉위하였다.

  당시의
로마제국은 경제적·군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여서 변방에는 외적의 침입이 잦았으며, 특히 도나우강() 쪽에서는 마르코만니족 및 쿠아디족이 자주 침입하여 그 방비에 힘썼다. 그동안 페스트가 유행하여 제국은 피폐하고, 게르만족과의 전쟁에 시달리면서 발칸 북방의 시리아 및 이집트 등의 진영()에서 병을 얻어 도나우 강변의 진중에서 죽었다.

 

  유명한 《명상록()》은 이 진중에서 쓴 것으로, 스토아적 철인의 정관()과 황제의 격무라는 모순에 고민하는 인간의 애조(調)가 담겨 있다. 여기서 그의 철학은 본질적으로는 반 세기 전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한층 내면적으로 침잠해 들어오는 철학을 이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것은 불이며, 신적()인 세계 영혼으로 관통되고 살려지게 되고 지배받고 있으며, 인간의 영혼도 세계 영혼의 한 유출물에 불과하여 죽으면 자연히 세계 영혼에 귀일하게 된다.

물질적·육체적인 세계의 모든 것은 이 신적인 이성에 의하여 운명적·자연필연적으로, 그러면서도 신적·합법칙적으로 끊임없이 생멸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개물()·개인()은 그 이름도 기억도 이 필연의 운동 속에서 소멸되고, 망각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자연필연의 이법()을 확인하여 이를 신의 섭리라 믿고, 외적인 어느 것에도 마음을 괴롭히는 일이 없이 주어진 운명을 감수하며, 내적으로 자유롭고 명랑하고 조용하고 경건하게 그의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있어서는 철학자와 황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그가 죽은 후 로마제국은 쇠퇴하였다. 로마시에는 ‘마르코만니전쟁’을 부조()한 기념주()와 그의 기마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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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정식 이름은 Caesar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 본명은 Marcus Annius Verus(~161).

121. 4. 26 로마~180. 3. 17 판노니아 빈도보나(지금의 빈) 또는 시르미움.

로마의 황제(161~180 재위).

 

 

                                                        개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4두마차를 타고 로마에 입성하는 모습을 묘사한 ...
스토아 철학이 담긴 〈명상록〉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서양에서 로마 제국의 황금시대를 상징해온 인물이다.

 

                              초기생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는 이미 로마의 콘술(집정관)을 연임하는 중이었고 프라이펙투스(장관)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것은 원로원에 들 수 있는 특권을 뜻하는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고모는 황제에 즉위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과 결혼했고, 언젠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제위를 계승하기로 정해져 있었다. 그의 외할머니는 로마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집안의 상속녀였다.

 

  이처럼 마르쿠스는 플라비아누스 황제(69~96)를 구심점으로 하여 사회·정치 권력이 집결되어 있던 새로운 로마 체제에서 가장 이름난 몇몇 집안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이 체제의 기풍은 그의 태도와 행동에 배어들었다. 로마 제국을 처음으로 지배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공화국 말기의 지배계급과는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지방사람을 경멸하고, 거만하며, 냉소적이고,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도회지 로마인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로마 체제는 도시와 지방출신의 황제들이 고루 다스렸으며, 진지함과 훌륭한 일을 개발하고 경건과 신앙심을 더욱 진작시켰다.

 

  어린 마르쿠스가 장차 특출한 정치적 인물이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황제에 즉위하게 되었는가는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다.

 

  136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이때부터 L.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라 불림)가 제위를 계승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같은 해 어린 마르쿠스는 콤모두스의 딸 케이오니아 파비아와 약혼했다. 그러나 138년초 콤모두스가 죽고, 그후 하드리아누스 황제마저 세상을 떠나자 파혼했다. 콤모두스가 죽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마르쿠스의 고모부였던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맞아들여, 나중에 자신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도록 하고(나중에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됨), 대신에 안토니누스에게 콤모두스의 아들과 마르쿠스 두 젊은이를 양자로 삼으라고 명령했다. 이때 마르쿠스의 이름은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로 바뀌었다.

 

  이리하여 마르쿠스는 17세 이전에 공동 황제에 즉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40세가 되어서야 황제에 즉위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속으로 콤모두스와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장차 황제가 될 한 젊은이 또는 두 젊은이 모두를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안토니누스 황제 아래에서 마르쿠스가 쌓은 오랜 기간의 예비황제 교육은, 스승이었던 프론토와 주고받은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는 프론토가 당시 사회의 주요문인이었지만, 수사(修辭)가 몸에 밴 음울한 현학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프론토가 편지에 나타난 것만큼 생기없는 인물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두 젊은이와 주고받은 편지 속에는 천재적인 감수성과 진솔한 교류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꾸준하고 진지하며 지적인 마르쿠스는 스승의 한결같은 고급 그리스어와 라틴어 낭독방식에 점차 싫증을 느꼈으며, 대신 한때 노예였으나 스토아 학파의 주요 도덕철학자인 신앙심 깊은 에픽테토스〈담론 Diatribai〉을 탐독했다. 이때부터 마르쿠스는 주로 철학에서 지적 흥미와 정신의 영양분을 구했다.

 

  한편 마르쿠스는 정력적인 황제 안토니누스 곁에서 통치술을 배웠으며 공직을 맡기도 했다. 마르쿠스는 140, 145, 161년에 콘술이 되었다. 145년 사촌이었던 황제의 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와 결혼했으며, 147년에는 공식상 황제직의 주요 권력형태였던 '임페리움'(황제권)과 '트리부니카 포테스타스'(호민관의 권한)를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르쿠스는 일종의 연하의 공동 황제가 되어, 안토니누스와 긴밀한 협의를 통해 주요국정을 결정했다(그보다 10세 가량 어렸던 양동생도 적당한 시기에 주요공직을 맡았음). 161년 3월 7일 안토니누스가 사망하던 날, 두 형제는 함께 콘술이 되었다.

 

                                          로마 황제 시기

 

  마르쿠스가 황제에 즉위하는 과정은 순탄했다. 그는 이미 합법적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완전한 황제자리에 올랐다(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됨). 양동생도 마르쿠스의 강한 요청으로 공동 황제가 되었다(이때부터 그는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받음). 루키우스 베루스가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는 증거는 없다. 이렇게 하여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는 동등한 법률상 지위와 권력을 갖는 공동 황제가 탄생했다. 그러나 루키우스 베루스의 업적은 뛰어난 황제 마르쿠스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대부분의 재위 기간 동안, 변방지역에서 전쟁을 치르고 큰 전염병, 도덕의 타락에 맞서 싸우는 등 중요한 국정은 철저히 마르쿠스가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마르쿠스는 국내정치에서 건설적으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고 독창적인 기풍을 세우느라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틈이 없었다. 그가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분야는 법률분야였던 듯하다(→ 로마법). 수많은 법령을 공포하고 사법판결을 확정했으며, 민사법의 비정상적이고 가혹한 조항을 제거하고, 노예·과부·소수민족같이 국가의 혜택을 적게 받는 계층의 비율을 줄였으며, 상속 분야에서 혈연을 인정한 것 등을 업적으로 들 수 있다.

 

  그러나 마르쿠스의 개인적 공헌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법령 개선의 유형은 혁신적이기보다는 전통에 따른 것이었고, 법령은 단지 사회와 법구조를 세련되게 만들었을 뿐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아니었다. 마르쿠스는 위대한 입법가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를 보호한 헌신적인 실천가였다. 더욱이 이러한 법률적 활동에는 특별히 스토아적인 요소는 없었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 보면,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의 시대는 법과 사회의 관계가, 이전보다 오히려 퇴보하기 시작한 때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통치기에는 형법에 따른 처벌에서 차별 적용을 받는 '호네스티오레'(honestiore:상류층)와 '휴밀리오레'(humiliore:하류층)라는 두 계급이 서로 구분되기 시작했거나, 더욱 뚜렷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휴밀리오레는 형법에서도 언제나 가혹하게 처벌받았다.

 

 

  정치가로서 마르쿠스의 자격을 문제 삼는 논란은 아주 다양하게 제기되어왔다. 그중 한 예가 그리스도교도박해와 관련된 문제이다. 마르쿠스는 그리스도교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재위기간 동안 어떠한 조직적인 박해도 가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도의 법률상 지위는 트라야누스 황제나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도는 얼마든지 처벌될 수 있었지만 실제로 수배당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불안정한 그리스도교도의 지위는 제국의 안정기와 번성기에는 아무런 해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위기시에 지역 주민은 그리스도교도를 고발하고 행정관은 중앙권력의 명령에 따라 법대로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 177년에 리옹에서 일어난 순교도 바로 이런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도가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의 재위기간 동안 그전보다 많은 피를 뿌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신은 결코 박해를 주도하지 않았다.

 

  161년 동방의 중심세력 파르티아가 시리아 지역을 침략했다. 162~166년의 전쟁은 명목상으로는 베루스가 지휘하여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함으로써 승리했지만, 실은 황제 휘하의 유명한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이 결정적인 공을 세운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군대가 퍼뜨린 전염병은 수년 동안 로마 제국 전역을 휩쓸었으며, 게르만족의 침입과 함께 제국의 안정기에 익숙했던 시민들의 도덕의식을 약화시켰다.

 

  167년 혹은 168년에 마르쿠스와 베루스는 도나우 강을 건너 게르만족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의 등 뒤에서 게르만 유목민족이 엄청난 기세로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아드리아 해의 요충지였던 아퀼레이아를 점령했다.

 

  위급한 사태에 직면하자 제국의 군사적 취약함과 재정구조의 경직성이 드러났다. 군대를 재편성하기 위한 절망적인 조치들이 취해졌으며,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제국의 재산이 경매되었다. 마르쿠스와 베루스는 게르만족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169년 베루스는 질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도나우 강 국경선을 되찾기 위해 마르쿠스는 온 힘을 기울여 3년간 더 싸워야 했으며, 또다시 3년간 보헤미아 지방에서 싸운 끝에, 잠시나마 도나우 강 건너 부족들을 평정할 수 있었다.

 

                                                             〈명상록〉

  마르쿠스가 골치 아픈 국정 수행기간 동안 추구한 사상과, 비록 역사적으로 매우 값진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일상 정치사상을 좀더 자세히 알려면 〈명상록〉을 읽으면 된다. 그가 이 책을 쓰면서 어느 정도로 타인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명상록〉은 전쟁을 수행하고 통치하는 동안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단편적으로 기록한 책으로, 논증적인 글과 경구가 번갈아 나타난다. 어떤 면에서 이 글은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쓴 것으로 보인다. 〈명상록〉은 로마인의 가장 내밀한 사상을 다 모아놓은 것이지만 놀랍게도 그리스어로 씌어졌는데, 이는 당시에 여러 문화들이 통합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마르쿠스의 사상을 찬탄해왔지만,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지나친 까다로움과 히스테리가 뒤섞인 마르쿠스 사상의 병리학적 측면이 더 눈에 띈다. 마르쿠스는 항상 이룰 수 없는 행동목표를 추구하고 있었으며, 사색 속에서 그 자신을 포함한 인간 일반과 물질 세계가 덧없고 야만스럽고 보잘것 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세상을 믿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는 어떤 희망도, 심지어 영원한 명성에 대한 희망도 없이 의무와 직책에 얽매여 있었다. 평생 동안 병고에 시달렸으며, 만성 위경련으로 고통받으면서 매일 많은 약을 복용했던 것 같다. 〈명상록〉의 책갈피 속에서 풍기는 종말론적 분위기는 약물중독자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더 확실하고 중요한 점은 마르쿠스의 불안이 다소 과장된 형태이긴 해도 그 시대의 풍조를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철인왕(哲人王)의 사상이 담겨 있는 〈명상록〉은 오랜 세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왔다. 그 사상은 마르쿠스 자신의 것이긴 하지만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스토아주의의 도덕철학이고,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우주는 지성이 지배하는 하나의 통일체이며, 인간의 영혼은 신이 가진 지성의 일부이기 때문에, 혼돈과 변화의 한가운데 홀로 내던져진다 하더라도 더럽혀지지 않고 순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정확한 이해의 부족 탓이겠지만, 마르쿠스 사상의 한두 측면은 스토아 철학을 벗어나 플라톤주의에 가까웠다. 플라톤주의는 당시 에피쿠로스주의를 제외한 모든 이단 철학을 다 끌어안아 신플라톤주의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종류의 영혼불멸의 위안을 받아들일 정도로 스토아주의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마르쿠스가 도나우 강을 가로지르는 국경지역을 평정하고 있는 바로 그때, 이집트·스페인·영국 등은 반란과 침공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전에 베루스 아래에서 일했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은, 175년에 이르러 로마 제국의 동방지역과 이집트까지 사실상 통치하게 되었다.

 

  그해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은 마르쿠스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을 우연히 듣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마르쿠스는 북부 지역의 미정복 부족들과 평화조약을 맺고 아비디우스의 반란군을 진압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반란 장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부하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마르쿠스는 그 기회에 동방지역을 평정하고 시찰할 목적으로 로마를 떠났다. 그는 안티오크·알렉산드리아·아테네를 방문했으며, 아테네에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엘레우시스 제전을 참관했다. 그러나 이 비의적(秘儀的) 제전은 그의 철학관점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것 같다. 도나우 강 지역 원정에도 동반했던 황비 파우스티나는 이 여행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도 전 로마 시민은 극진한 경의를 표했으며, 마르쿠스도 〈명상록〉에서 사랑과 존경의 글을 그녀에게 바치고 있다. 어떤 고대 사료는 그녀가 정직하지 못하고 충성심이 없었다(즉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와 함께 모반을 꾀했다고)고 쓰고 있지만, 이러한 비난은 아무 설득력이 없다.

 

  177년 마르쿠스는 16세의 아들 콤모두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했다. 그들은 협력하여 도나우 강 전쟁을 다시 시작했다. 마르쿠스는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제국의 북쪽 국경선을 확장·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180년 마르쿠스가 아들 콤모두스를 국정의 최고 조언자로 임명하고 난 직후, 군대 사령부에서 숨을 거두었을 무렵 거의 결실을 맺고 있었다.

 

                                        평가

 

  마르쿠스가 단 하나 살아남은 아들을 후계자로 선택한 것은 비극적 역설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콤모두스는 뛰어나지 못한 황제임이 나중에 드러났다. 그러나 다음의 2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첫째, 고대 사료를 보면 황제란 원로원의 지배계급을 만족시켰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에 따라, 훌륭한 황제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황제가 되기도 한다. 둘째, 콤모두스가 북부지역의 전쟁을 서둘러 마무리한 것은, 아버지처럼 고집스럽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팽창주의를 추구한 일보다 현명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들이 대를 이어 황제가 되도록 결정한 점을 들어 마르쿠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개 마르쿠스가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유능한 '철학자'의 길을 걸은 뒤, 다시 노골적으로 세습왕조를 고수하는 쪽으로 돌아섰다고 잘못 생각한다. 이것은 역사학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는 주장이다. 사실상 마르쿠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마르쿠스가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삼지 않았다면, 이것은 그에게 죽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는 정치가였다고 할 수도 있지만, 도량이 아주 넓은 정치가는 결코 아니었으며, 현자(賢者)도 물론 아니었다. 한마디로 그는 역사적으로 과대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이미 몰락의 징조가 숱하게 드러난 제국의 금빛 휘장 아래서, 혼란스런 방식으로 대제국을 통치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 어떤 혹독한 평가일지라도, 그의 고귀한 품성과 헌신성을 가리지는 못한다. 말하자면 그는 매우 꼼꼼하게 비용을 따지면서도, 또한 서슴지 않고 그 비용을 치른 인물이었다.

 

J.A. Crook 글 | 洪健寧 참조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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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1087>(2004.4.20. 한국일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서기 121년 4월20일 로마제국 제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가 로마에서 태어났다. 스토아파 철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180년 서게르만의 한 부족 마르코만니의 침입을 직접 격퇴하다 빈도보나(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병사했다.

 

  중국 한나라에는 안돈(安敦)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기 이전의 네 군주 곧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피우스와 함께, 5현제(五賢帝)로 꼽힌다. 이 시대의 제위는 세습되지 않고, 원로원 의원 가운데 가장 유능한 인물이 황제로 지명되었다. 5현제 시대의 로마는 제국의 최전성기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세는, 그러나 게르만인을 비롯한 이방인들의 거듭된 국경 침탈과 경제난, 돌림병으로 얼룩졌다. 이런 내우외환을 황제는 견인주의자다운 마음의 다스림으로 견뎌냈던 듯하다. 만년에 진중에서 쓴 ‘명상록’은 고대 스토아철학의 마지막 증언으로 읽힌다.

 

  19세기 영국 비평가 월터 페이터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한 청년의 정신적 편력을 그린 장편소설 ‘쾌락주의자 마리우스’(1885)에서, ‘명상록’의 몇 구절을 가필해 황제의 연설로 인용한 바 있는데, 그 일부가 영문학자 이양하의 번역으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한국 청소년들에게도 널리 읽혔다.

 

   “세상은 한 큰 도시. 너는 이 도시의 한 시민으로 이 때까지 살아왔다. 아, 온 날을 세지 말며, 그 날의 짧음을 한탄하지 말라. 너를 여기서 내보내는 것은 부정한 판관이나 폭군이 아니요, 너를 여기 데려온 자연이다. 그러니 가라. 배우가, 그를 고용한 감독이 명령하는 대로 무대에서 나가듯이. 아직 5막을 다 끝내지 못하였다고 하려느냐?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는 3막으로 극 전체가 끝나는 수가 있다. 그것은 작자의 상관할 일이요,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한 평가

seskanghang (2003-06-21)


  일단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세는 불행의 연속입니다...
자연재해, 시대의 변화에 미대처, 26녀간 묵혀둔 문제들의 돌출등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죠

  오현제를 네르바,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인데, 전황제 피우스는 선대황제들이 워낙에 정치를 잘해서 한 것이 26년간 그저 그체제를 유지한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평화가 이어지면 시대는 변화하고 다른 체제를 요구하고 각성을 요구하지만 그러한 점에 둔하게 되는것이지요..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물려받은 황제는, 초기부터 가뭄과 홍수라는 어려움에 직면합니다..161년 이집트와 시칠리아섬과 사르데냐섬이 수백년간 로마의 밀 공급지였는데 그곳에 동시에 가뭄이 들어버립니다...즉 식량안보가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렴움에 직면하고 있는중에, 동방의 파르티아라는 곳이 불순한 움직임을 보입니다...볼가세스3세가 로마가 방호벽으로 생각하는 나라인 아르메니아를 침공해서 자신의 동생을 왕위에 앉혀버립니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까지는 모든 황제들이 군단에서 군대 경험을 쌓습니다...
이것은로마의 지도층이 거쳐야할 과정이었고 경험인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러한 경험이 전무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실수를 합니다...

시리아 군단장이 대처를 하다가 패배를 책임지고 자결을 하자...이곳 총독에는
한시가 급한 사안이라, 자국에서 파견하거나 그곳의 제3자를 등용해야 하는데,
저멀리 브리타니아에서 총독을 임명하자, 그 공백이 2달이나 생기면서 로마의 어려움은 가중되고,  주변국들마저 로마를 불신하면서 돌아섭니다...

  게다가 자신이 직접 가지 않고 공동황제 루키우스를 파견하느데, 그사람이 워낙 혀영심이 많아서 또 동방으로 파견가는데 가는곳마다 놀면서 가느라 2개월이 걸리면서 인사에 문제점이 드러나고 맙니다..
어쨌건 마무리가 됐는데 전쟁에서 돌아온 군사들이 역병을 옮깁니다..
오늘날 페스트라고 불리는 병이지요...

또한 게르마니아 군단을 동방에 진출시키면서 게르만고지가 허약해지자, 게르만족들이 아피아 가도를 따라서 로마의 근교까지 와서 약탈을 하고 전멸당합니다...하지만 로마인들은 방위선이 뚫린 것에 따른 황제에 대한 불신을하게 되니다...뒤늦게 수도수비대를 창설하지만 사후 약방문이고요...

  절대적인 실책을 저지릅니다, 바로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파르티아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바람에, 북방 민족의 바람막이 역할을 하는
파르티아의 붕괴를 자초한 것입니다..이것은 후세 연구자들이 가장 악평이 높은 조치이죠...

  또 북아프리카 마우리아 왕조가 쳐들어오고, 다시 도나우전선에서 전운이 감도는 등, 동시에 일이터지는 바람에 군사적 경험이 전무한 아우렐리우스는 고전을 면치못하며, 사후 약방문만 조치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불행한 사람이었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피살?

 

tsujisuki

 

영화 글레디에이터를 보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황제자리를 막시무스에게 물려주겠다'라고 해서 아들 코모두스가 죽이잖아요

정말로 아들에게 죽임을 당했나요??

re: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정말로 아들에게 살해당했나요?

 

 

raifen (2005-04-16 )

  영화에서 아버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살해한  것으로 나오는 코모두스. 영화에서는 제위 계승에 불만을 품고 아버지를 살해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는 이와 매우 다릅니다.

 

  코모두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생존 당시에, 아버지와 함께 공동 황제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왕위 계승자가 아니라 동격의 황제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코모두스에게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죽일 동기가 없습니다.

 

  177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15세의 코모두스를 공동 통치의 파트너로 선언하게 됩니다. 황제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 중에서 전통적으로 한 사람만이 맡던 '최고 제사장'의 직위를 제외하고, '최고 통수권', '호민관 특권', '병사들에게 임페라토르라고 불리울 수 있는 특권' 등이 주어졌습니다. 또한 제위 계승에 있어서 장애가 되는 다른 경쟁자도 없었기 때문에, 코모두스의 자리는 매우 탄탄한 것이었습니다.

 

  실제 후대의 역사서에서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죽음이 타살이었다는 이야기는 언급되어있지 않습니다. 유일한 예외라면 디오 카시우스의 저술이지만, 이 경우에도 황제의 시의가 코모두스의 총애를 받으려고 황제를 독살한 것 같다는 소문을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영화에서는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해 픽션을 첨가한 것입니다.

 

 

 

 

 

업데이트 : 2007.01.16 18:06:57

[이진곤 칼럼] 때론 남의 말도 들어가며

 

                                                               [국민일보]

 

  로마 5현제(賢帝)중 다섯 번 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를 상징하는 이름 가운데 하나. 그렇지만 인류사를 통해 그가 더 유명해진 것은 철학하는 황제였기 때문이다. 전장에서도 철학서를 읽었다는 스토아 철학자. 역사를 관통해 스토아 철학자들이 사표(師表)로 삼았던 소크라테스가 일찍이 구상했던 철인정치의 한 본보기(정치의 내용에서 그것을 구현해내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이런 이유만으로도 그는 후대 통치자들의 모범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친구들,그 많은 탁월한 이들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많은 탁월한 친구들이 내 개인의 의지를 따르는 것 보다 낫다.”(그리스·로마 인간경영학,토머스 J 피게이라 外, 오숙은 역) 철학자 황제의 진면목을 이 한 마디로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친구들’이라는 표현! 그것이 로마를 로마이게 한 인식과 사고의 바탕이다. 그가 많은 지인(아마도 모든 로마시민을)을 친구라고 불렀듯이, 로마는 영역내의 모든 인민을 같은 시민으로 받아들였다. 스토아적 세계 시민주의가 로마에 속하는 모든 구성원에게 신분의 동질성을 부여함으로써, 이후로도 수백년 ‘로마인’으로서의 결속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저절로 흥하는 나라가 없다는 것을, 또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위업은 없다는 것을 다시 로마를 통해 깨닫게 된다...

 

 

 

 

* 상류층 여성이 거친 남성에게 끌리는 일도 다반사였던 것 같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황제의 부인인 파우스티나는 한 검투사를 좋아하게 돼 그것을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황제는 즉시 그 검투사를 죽이게 해서 왕비와 잠자리를 갖기 전 그의 피로 목욕을 하도록 했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현제(賢帝)임에도 불구하고 쇠퇴의 조짐을 보였다고 썼는데, 유능한 지도자와 국가의 흥망은 비례관계에 있나?

 

   “마키아벨리가 이렇게 말했다. 리더에게 필요한 세 가지의 요건이 있다. 하나는 비르투, 즉 능력이다. 두 번째는 포르투나, 즉 운이다. 세 번째는 그 리더가 시대에 맞는지 안 맞는지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시대에 태어나지 않으면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로마인 이야기’ 15권 완간한 시오노 나나미와 조선일보 인터뷰[2006.12.19.]-

 

 

 

 

 

  팍스 로마나의 마지막 왕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출처 블로그 > kzkz102님의 블로그
원본 http://blog.naver.com/kzkz102/150011076092

 

 

 

목 차

 영화속의역사읽기-로마.hwp
# 주제 선정의 이유
# 영화 ‘글레디에이터’의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
# 어린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Marcus Annius Verus)
# 황태자 마르쿠스
#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숱한 난제들
# 두 번째 공동 황제, 세습 확립
# 명상록
# 죽음
# 마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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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캠퍼스 자료관리팀>
본 문

9   “로마에 견줄 나라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 다” 그리스출신의 로마 역사가인 폴리비우스는 이렇게 말했 다. 로마는 역사적으로 가장 넓은 영토-세계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도 있듯이-와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1천년 혹은 그 이상 지중해세계만이 아니라 유럽을 지배하면서 찬란한 문화를 창조했다. 로마는 역사상 어느 민족보다 관대한 영토, 강력한 국력,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서양세계의 ‘영원한 도시’가 되었고 명실공히 세계를 제패한 국가로 남았다.

 

  이 유구한 역사 중 단연 번영의 절정기는 트라야누스(98~117), 하드리아누스(117~138),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 그리고 앞으로 언급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의 5현제시대라고 하며,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고도 부른다. 이 시대의 제위는 세습되지 않았고 원로원 의원 가운데 가장 유능한 인물이 황제로 지명되었다.

 

  5현제 시대의 로마는 제국의 최전성기였다.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로마인도 그리스인도 모두 그 100년을 ‘황금시대(saeculum aureum)’라고 불렀다.

  이 중 앞으로 다룰 황제는 5현제의 마지막 왕으로, 로마 번영의 정점에 있으면서도, 쇠락과도 맞닿아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이다.

 

  왜 하필이면 이 왕을 주제로 삼을 생각을 했을까? 역시 쇠락 직전의 마지막 왕이기 때문일까? 거기다 쇠락 직전이면서도 평가가 무지 높아서? 또한 영화 ‘글레디에이터’에도 등장했기 때문에? 모두 맞다.

 

  사실 영화 ‘글레디에이터’의 내용과 실제 역사의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에 자극받기도 했다. 확실히 영화적인 상상력을 역사적 사실로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만큼 평판이 좋은 로마 황제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 5현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물이고 철인(哲人)황제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 그는, 동시대인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거의 2천 년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에도 줄곧 높은 평가를 누려왔다. 통치자로서의 역량만 따진다면,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보다 뛰어난 지도자가 로마역사에는 여럿 있을 것이나, 그 철인 황제는 노예 철학자 에픽테토스와 함께 ,기원 후 백년 경의 두 사람의 대(大) 스토아 철학자중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의 저서 ‘명상록’은 제목 그대로 그의 철학적 사색을 적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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