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문왕/주나라 창시자 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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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왕(文王)은 이름이 희창(姬昌)이고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상(商) 주왕(紂王) 때 서백(西伯: 서방 제후의 장)에 책봉되었으며 서주(西周)의 건설에 기초를 확립하였다. 50년간 주족(周族)의 장을 지낸 후 97세에 병으로 죽었다. 장지는 필원(畢原: 지금의 섬서성 함양시<咸陽市> 서북 18리 지점)에 있다. 희창(姬昌)은 주족(周族)의 장으로 상(商) 주왕 때 서백(西伯)에 책봉되었으며, 백창(伯昌)이라고도 한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 의하면, 그는 용의 얼굴에 범의 어깨를 하고 신장이 10척이었으며 가슴에 4개의 젖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서백에 임명된 후에는 어진 사람을 예로써 대하고 사람들에게 관대하여 많은 민심을 얻었다. 상 주왕은 강성해진 그의 세력에 위협을 느끼고 그를 유(羑: 지금의 하남성 탕음현<湯陰縣> 서북)에 가두었지만, 희창은 고통을 참으면서 조금도 원망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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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곳에서 한적한 생활을 보내면서 팔괘(八卦)를 깊이 연구하여 64효(爻)로 발전시키고, 천하의 이치를 탐구하여 중국 최초의 경서인 ≪주역(周易)≫을 만들었다. 그리고 칠현금(七弦琴)을 발명하여 <구유조(拘幽操)>라는 금곡(琴曲)을 창작하고 항상 그것을 연주하였다. 그의 신하들은 그를 석방시키기 위하여 많은 미녀와 명마, 진귀한 보석 등을 모아서 주왕에게 바치고 주왕의 측신들을 뇌물로 매수하였다. 주왕은 희창이 구금 중에도 전혀 원망의 빛이 없고, 또 이렇게 미녀와 보석들을 보내오자 만면에 희색이 가득하여 그를 석방하고 다시 서백에 임명하였다.
희창은 석방된 후에 주족(周族)을 강성하게 만든 다음, 때를 기다렸다가 주왕을 공격하여 치욕을 갚을 것이라고 결심하였다. 그에게는 많은 신하와 장수들이 있었지만, 전체를 통괄할 수 있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가 없어, 그러한 사람을 백방으로 찾았다.
한번은 희창이 사냥을 갔다가, 위수(渭水)의 지류 반계반(磻溪畔)에 이르러, 수염과 머리가 반백인 70~80세의 노인이 낚시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노인은 곧은 낚시 바늘로 낚시하면서, 입으로는 "원하는 놈은 걸려라! 원하는 놈은 걸려라!"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매우 이상하게 여기고는 앞으로 다가가서 그 노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노인은 천문과 지리에 통달하고 천하의 형세를 훤히 꿰뚫고 있었으며, 가슴에는 웅대한 뜻을 품고 있었다. 희창은 그가 바로 문무를 겸비한 인재라는 것을 알아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그를 도성으로 데려와 국사(國師)에 임명하였다. 그 후 노인은 다시 국상(國想)에 임명되어 정치와 군사를 통괄하였다. 이 노인이 바로 강태공(姜太公), 또는 강자아(姜子牙), 강상(姜尙), 여상(呂尙), 여망(呂望), 태공망(太公望), 사상부(師尙父)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강태공의 노력으로 주족(周族)은 안정 속에 발전을 거듭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후 견융(犬戎), 밀수(密須) 등의 부족을 공격한 다음, 상의 지지 세력인 려(黎: 지금의 산서성 장치시<長治市> 서남), 한(邗: 지금의 하남성 심양현<泌陽縣> 서북), 숭(崇: 지금의 하남성 숭현<嵩縣> 북쪽) 등을 멸망시키고, 숭에 도성인 풍읍(豊邑)을 세워 상나라를 공략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삼았다. 희창은 만년에 이르러, 이미 천하의 3분의 2를 장악하여, 그 영토가 서로는 지금의 섬서, 감숙 일대, 동북으로는 지금의 산서 여성(黎城), 동으로는 지금의 하남 필양(泌陽), 남으로는 장강(長江), 한수(漢水), 여수(女水) 유역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상의 도읍 조가(朝歌)에 바싹 다가감으로써 상을 멸망시킬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을 멸망시킬 계획만 남겨놓고, 희창은 큰 병에 걸렸다. 그는 자신이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아들 희발(姬發: 후세의 무왕)을 불러 그에게 세 가지를 부탁했다.
첫째, 좋은 일을 보면 게을리하지 말고 즉시 가서 해야 한다. 둘째, 기회가 오면 머뭇거리지 말고 재빨리 잡아야 한다. 셋째, 나쁜 일을 보면 급히 피해야 한다.
이 세 가지 부탁을 남기고, 희창은 며칠 후 세상을 떠났다. 희창이 죽은 후, 그의 시호를 추존하여 문왕(文王)이라 하였다. |
탕(湯)이 하(夏)의 폭군 걸왕(桀王)을 타도하고 세운 은(殷) 왕조는, 그후 수백년 동안 태평성대를 누렸다. 그러나 강성하던 은나라도 주왕(紂王)이라는 난폭한 임금에 이르러 마침내 망국의 길로 접어들고야 말았다.
폭군 주는 거구에다 기운이 장사여서 맹수와 격투를 할 정도였다 한다. 게다가 그는 총명하고 말재간까지 있었다 하니 어떻게 보면 문무(文武)를 겸비한 뛰어난 인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교만한 주는 스스로를 하느님에 비겨 천왕(天王)이라 자칭하고 능력을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쾌락을 위해 발휘하였다.
대개 폭군들이 나라를 망치고자 벌이는 일 중에서 으뜸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궁궐을 건축하는 것이다. 한(漢) 나라 때의 학자 가의(賈誼)가 쓴 ‘신서(新書)’라는 책에 의하면 주는 녹대(鹿臺)라는 궁궐을 7년간 지었는데 건물 길이가 3리(1,300m)에다 높이가 1,000자(300m)를 넘어 구름이 내려다 보일 정도였다 한다.
주는 이외에도 경실(瓊室)과 요대(瑤臺)라는, 옥으로 치장한 궁궐을 더 지었고 사구(沙丘)라는 넓은 정원을 조성하여 그곳에 온갖 진기한 짐승들을 수집해 넣었다.
주가 이러한 궁궐과 정원 속에서 어떻게 생활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 자세한 기록이 있다. 주는 사연(師涓)이라는 악사를 시켜 미미지악(靡靡之樂)이라는 아주 음탕한 노래를 작곡하게 하였고 그것에 걸맞는 북리지무(北里之舞)라는 음란한 춤도 개발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구에 술로 채운 연못과 고기를 열매처럼 매단 숲, 곧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든 다음 벌거벗은 남녀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광란의 파티를 벌이게 하였다.
폭군의 향락에는 꼭 그것을 조장하는 미녀가 있다. 걸에게 말희( 喜)가 있었다면, 주에게는 달기( 己)가 있었다. 달기는 원래 유소씨(有蘇氏)라는 제후의 딸이었는데, 은 나라의 공격을 받은 유소씨가 달기를 후궁으로 바쳤다 한다.
그런데 명(明) 나라 때에 지어진 ‘봉신연의(封神演義)’라는 소설에서는 달기를 구미호(九尾狐)가 둔갑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언젠가 주가 사냥을 갔다 오는 길에 여신 여와(女蝸)의 사당을 참배하게 되었다.
이 때 여신의 아름다운 화상(畵像)을 보고 주는 음탕한 생각에 잠겼다. 천상에서 여신이 이것을 알고 주를 벌할 결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구미호를 보내 유소씨의 딸을 잡아먹고 그 모습으로 둔갑해서 주에게로 가 그를 망치게 한 것이라고 한다.
달기는 주의 퇴폐적인 행위에 동참했을 뿐만 아니라, 주보다 더 잔인한 행위를 즐겼다. 주는 자신에게 충고를 하는 신하나 불만을 품은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 포락( 烙)이라는 형벌을 고안해냈다.
이 형벌은 죄인으로 하여금 숯불 위에 가로놓여진 기름칠한 구리기둥을 걷게 하는 것인데, 죄인이 뜨겁고 미끄러움을 견디지 못해 숯불에 떨어져 죽는 모습을 보고 달기는 깔깔대며 즐거워 했다 한다.
달기는 또한 당시 비간(比干)이라는 왕족이 자꾸 주에게 충고를 드리자 주를 이렇게 부추겼다. “듣건대 비간은 성인이라 하는데 성인의 심장은 구멍이 일곱 개가 있다 합니다. 한번 확인해 보시옵소서.” 호기심이 동한 주는 마침내 비간을 죽여 심장을 꺼내 보고야 말았다.
그러나 말희와 달기 등 이러한 폭군의 애첩들이 지닌 향락성이나 잔인성에 대한 설화는 과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지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즉 이들 설화 속에는 망국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함으로써 여성의 정치 참여를 금지시키고 여성의 역할을 가정 내적인 일에만 고착시키려는 가부장적 관념의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주가 이렇게 민심을 잃어가고 있을 때 황하의 상류, 서쪽 변경 지대에서는 이 어지러운 세상을 구원할 성인이 출현하고 있었다. 그가 곧 후일의 주문왕(周文王)이다. 주문왕은 성은 희(姬) 이름은 창(昌)으로 당시 은의 주요 제후국이었던 주(周)의 임금이었다. 그는 서쪽 지역 제후들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서백(西伯)이라고도 불리웠다.
주문왕은 모든 성군들이 그러하듯이, 천성이 인자하고 백성을 사랑하기를 내 몸 같이 하였다. 그래서 폭군 주에게 실망한 선비들이나 폭정 때문에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이 문왕이 다스리는 주 나라로 구름 같이 모여들었다.
이러한 주문왕의 인기를 폭군 곁의 간신들이 곱게 보았을 리가 없다. 마침내 주문왕은 참소를 받아 유리( 里)라는 성에 감금되어, 언제 풀려날 지 모르는 신세가 되었다.
이 때 주는 인질로 도성에 와 있던 주문왕의 아들 백읍고(伯邑考)를 죽여 그 고기로 장조림을 만들어 주문왕에게 보냈다. 주문왕이 정녕 성인이라면, 자식의 살인 것을 알고 안 먹을 테니까 죽여버리고, 만일 먹는다면 평범한 인간이니까 두려울 것 없으니 살려주자는 방침이었다.
주문왕은 자식의 살인 것을 알면서도,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그것을 먹었다. 이렇게 해서 유리에서 풀려난 후, 주문왕은 처절했던 상황을 되씹으며 국력을 키워 은나라를 정벌할 결심을 굳혔다.
그는 정치와 군사 일을 잘 맡아서 주 나라를 강국으로 만들 인재를 널리 찾았고, 결국 위수(渭水)의 지류인 반계(蟠溪)라는 시냇물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강태공(姜太公)을 만나 재상으로 삼게 된다. 강태공을 등용한 후 주 나라는 날로 발전하여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주문왕은 노쇠하여 얼마 후 세상을 떠나고, 은 나라 정벌의 과업은 아들인 주무왕(周武王)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마침내 주무왕은 군사를 일으켜 은 나라를 공격하였다. 주 나라의 군대는 은 나라의 성들을 파죽지세로 함락시켰고, 수도로 가는 길목인 맹진(孟津)이라는 황하의 나루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눈이 오고 비바람이 쳐서 행군에 지장을 받고 있을 때, 홀연히 사해(四海)의 해신(海神)들과 황하의 신인 하백(河伯) 등이 나타나 하늘의 뜻이 주 나라에 있음을 말하고 도와줄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자 날이 개고 물결이 잔잔해져서 주무왕의 대군은 무사히 황하를 건널 수 있었다.
폭군 주도 가만히 앉아서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주무왕의 군대가 수도 근처에 이르자 그도 대군을 동원하였고, 양군은 목야(牧野)라는 들에서 대치하였다. 치열한 공방전이 이 들판에서 벌어졌는데 ,당시 어찌나 전투가 참혹했던지 피가 강물이 되어 흘렀고 그 위로 절구공이가 둥둥 떠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민심을 잃었던 폭군 주의 군대가 패배하였다.
주는 녹대로 도망쳐 와 그곳에서 분신자살했다고도 하고 숲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고도 한다. 달기 역시 주무왕에 의해 참수를 당했다고도 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도 한다. 은 나라는 멸망하고 주 나라에게 왕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폭군 주와 성군 주문왕의 이야기는 국가의 흥망성쇠를 중국식,또는 유교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논리나 이론보다도 훨씬 더 실감나게 사건의 전모를 각인시켜 교육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우리는 승자의 입장에서 만들어지고 유포된 이러한 이야기들이 얼마만큼 패자의 실상을 반영했는지에 대해서도 한번 의심해 보아야 한다.
은은 고대 중국에서의 동방 세력을 대변하였으며, 주는 서방 세력의 대표로서 오늘날 중국 민족의 직접 조상이 된다. 은 문화는 샤머니즘을 바탕으로 종교적, 신비적인 경향이 강했으며, 주 문화는 이에 비해 현실적 이성적인 성향이 농후하였다.
따라서 은과 주의 왕조 교체는 단순한 왕조 교체의 의미를 넘어 심각하게 음미될 필요가 있다.
첫째, 정치ㆍ문화적으로 다원주의에서, 중심주의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주 왕조가 성립된 이후 중국은 한족(漢族) 중심의 정치, 문화를 추구해나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중화주의(中華主義)이다.
둘째, 주 왕조의 등장은 중국에서 나름의 인문주의 및 합리주의적인 관념이 대두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념은 결국 인간 중심의 실천 윤리인 유교를 성립시키게 된다.
그렇다면 주에 의해 억압된 은의 무속적, 반인문주의적 문화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암암리에 ‘산해경(山海經)’ 등을 통해 계승되어, 후일 도교로 되살아나서 동아시아적 상상력과 잠재의식의 내용을 구성하게 된다. 결국 폭군 주와 성군 주문왕의 이야기는, 중국 고대 역사상 가장 무겁게 보아야 할 변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글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은(殷)은 현재까지 역사적으로 그 실체가 입증된 가장 오래된 나라이다.
근대 초기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일대에서 거북이 등껍질이나 소뼈 등에 점괘를 기록한 갑골편(甲骨片)이 발견되면서, 은의 수도가 발굴되고 은 문화의 전모가 드러났던 것이다.
오늘날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은은 고도의 청동기 문명을 이룩했던 나라로 유목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이행, 정착하는 단계에 있었다.
은 종족은 중국의 동북방에서 황하 유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되고 샤머니즘이 성행했던 것으로 미루어, 우리와 비슷한 알타이어 계통의 종족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입력시간 2002/09/03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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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폭군 주(紂)와 성군 주 문왕(周文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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