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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기 [李正己(고구려후예)]

영국신사77 2007. 1. 26. 12:54
                  이정기 [李正己(고구려후예)]

 

  생몰년 미상. 당나라에서 활동한 고구려의 후예. 본명은 회옥(懷玉)이며, 평로(平盧)에서 태어났다. 778년(대력 13) 중국의 속적(屬籍)으로 바꿨다.

그의 선조가 언제 이 곳에 들어와서 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758년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의 군인들과 함께 희일(希逸)을 군사(軍師)로 추천하는 일에 관여하였다. 이 사건은 평로절도사 왕충지(王充志)가 죽자 후임을 그의 아들로 삼으려는 기미를 알아차리고 두려워한 나머지 먼저 거사를 일으킨 것이다. 그가 희일을 군사로 추천한 이유는 희일의 어머니가 고모이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희일의 외제(外弟)가 된다.

 

  그 뒤, 희일과 함께 청주(靑州)로 가서 군공을 세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762년에는 전군(全軍)이 안록산(安祿山)의 잔당인 사조의(史朝義)를 토벌하게 되자 그도 정주(鄭州)로 갔다. 이 때 당나라의 조정을 돕기 위해 참전한 위글(Uighur, 廻紇)의 횡포가 심하자, 그는 그들의 수령을 붙들어 기를 꺾음으로써 이후부터는 방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후, 희일이 꺼려했지만 의연한 자세와 용맹으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마침내 희일이 도망을 가자 다시 군사에 올랐다. 조정에서는 평로치청절도관찰사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 검교공부상서 어사대부 청주자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檢校工部尙書御史大夫靑州刺史)의 관직과 ‘정기(正己)’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 후, 다시 검교사공 동중서문하평장사 상서우복야(檢校司空同中書門下平章事尙書右僕射)에 가수되고, 요양군왕(饒陽郡王)으로 봉해졌다.

 

  이것은 아마도 하남(河南)이나 다른 지역이 소요에 빠졌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번진은 당시 여러 번진 중에서 최대로 강성했으며, 중앙정부에 대해서는 거의 독립적인 태도를 취해 마치 소왕국과 같은 존재로 군림하였다.

 

  얼마 뒤 황달로 죽으니 나이 49세였다. 아들 이납이 강제로 병권과 정권을 모두 총괄해 상을 치뤘다. 태위(太尉)로 증직받고, 아들 이납에게는 조정으로부터 평로군절도치청주관찰사(平盧軍節度淄靑州觀察使)가 가수되었다.

 

≪참고문헌≫ 舊唐書
≪참고문헌≫ 資治通鑑
≪참고문헌≫ 新唐書
≪참고문헌≫ 唐代 藩鎭의 한 硏究-高句麗遺民 李正己一家를 中心으로-(金文經, 省谷論叢 6, 1975 ; 唐 高句麗遺民과 新羅僑民, 日新社,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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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기 왕국

                                           내용요약

1. 이정기의 등장-안록산의 난(亂) 토벌로 입신


  이정기(본명 懷玉)는 영주(營州) 땅에서 고구려가 패망(668년)한 지 64년이 지난 732년에 태어났다. 그의 선대(先代)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고구려 패망 당시 당으로 끌려간 20여만명의 유민들 중 일부였거나, 이전부터 영주에 정착해온 고구려인 것으로 보인다.

 

  당의 최대 혼란기로 꼽히는 「안록산의 난」 때 그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 외모에 관한 기사는 그의 신체가 건장하고 담대한 용력을 가졌다고만 쓰여 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신당서』의 기사내용.

 

  안록산 난 당시 반군 토벌에 동원되었던 위글(군의 대장)이 자신의 전공과 완력을 앞세워 포악하게 날뛰어 다른 절도사들까지도 그를 제어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이를 보다 못한 이정기가 그를 격투 끝에 제압하자 군사들이 이정기를 추종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정기는 당시 영주를 근거지로 하고 있던 평로군의 비장(裨將)으로 자신과 내외종간이었던 후일(侯希逸)과 평로군에서 함께 복무했다. 후희일은 이정기의 고모 아들로 그보다는 손위였다. 이러한 후희일이 난이 한창일 때, 안동도호(安東都護) 왕현지(王玄志)와 공모해 안록산의 친장(親將)으로 평로절도사로 부임한 서귀도(徐歸道)를 죽이고 왕현지를 평로군사로 옹립한다. 그런 왕현지는 곧 병사하고(758년), 당조정이 그 아들에게 절도사직을 세습시키려 하자 이정기는 왕현지의 아들을 죽이고 후희일을 평로군사(平盧軍使)로 추대했다.
후희일은 이전부터 반군 합류를 종용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안록산의 사신(使臣)를 참수해버리는 등 철저히 반 안록산 노선을 견지해 왔다. 하지만 평로군은 안록산 군대로부터 쫓기고, 북방으로부터는 「해족」(奚族)의 침공까지 받아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다. 761년 부장(副將) 이정기와 함께 후희일은 근왕군(勤王軍) 2만명을 데리고 발해만의 묘도열도(廟島列島)를 건너 등주(登州)로 상륙한다. 평로군은 인근 청주(靑州)에서 관군과 합류했는데, 당조정은 이를 가상히 여겨 후희일에게 치주(淄州)·청주(靑州) 등 6개주를


목 차

1.이정기의 등장-안록산의 난(亂) 토벌로 입신

2.이정기 왕국의성립-동아시아 외교창구와 무역요지를 점령

3.이정기왕국의 발전-한반도 보다 더 넓은 영토를 통치다.

4.이정기왕국의 몰락-장보고 해상왕국의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