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3. 하드리아누스[[Hadrianus]

영국신사77 2007. 1. 23. 00:24
하드리아누스 [Hadrianus, Publius Aelius, 76.1.24~138.7.10]

                                                    요약
  로마제국 황제(재위 117∼138, 21년간). 오현제()의 한 사람. 브리타니아에는 장성()을 구축(하드리아누스 성벽)하고 게르마니아의 방벽()을 강화하는 등 방위를 강화하고 국력의 충실에 힘썼다. 제국 제반 제도의 기초를 닦았으며 로마법의 학문연구를 촉진시키고 문예 ·회화 ·산술을 애호하였다.
   오현()의 한 사람. 로마 출생. 트라야누스 황제의 조카. 군사 ·정치의 요직을 거쳐,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때는 시리아 지사()로 있었는데, 트라야누스가 임종시에 그를 양자로 삼자, 현지에서 즉위하였다. 선제()의 대외 적극정책에서 수세()로 전환하여, 방위를 강화하는 한편, 국력의 충실에 힘썼다.

 

  치세의 반쯤을 속주()의 순유()시찰에 소비하고, 브리타니아에는 장성()을 구축(하드리아누스 성벽), 게르마니아의 방벽()을 강화하였으며, 파르티아와 화의를 체결, 아르메니아보호국 지위로 되돌려놓았다. 또한, 속주 여러 도시의 건설 ·육성, 공공시설의 충실에도 진력하고, 아테네와 로마에 각종 신전을 건조하였다.

 

  이렇듯 속주 통치조직, 제국 행정제도, 관료제도, 군사제도의 정비에 힘써, 이후 제국 제반 제도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로마법의 학문연구도 촉진시키고, 문예 ·회화 ·산술을 애호하고, 학자들을 우대하였다. 안토니누스피우스를 양자로 삼았는데, 사후에는 그에 의하여 신격화()되었다.

하드리아누스방벽

 

 

 

                       하드리아누스 [Hadrianus]

 
(영)Hadrian. 정식 이름은 Caesar Traianus Hadrianus Augustus, 본명은 Publius Aelius Hadrianus(~117). Adrianus라고도 씀.

76. 1. 24 바이티카 이탈리카(?)~138. 7. 10 나폴리 근처 바이아이(바이아).

로마의 황제(117~138 재위).

 

                                                               개요

하드리아누스, 흉상, 나폴리에 있는 Museo Archeologico Nazionale 소장
  트라야누스 황제의 조카이며 후계자로 교양 있는 그리스 문명의 예찬자였으며, 광대한 로마 제국을 통합하고 공고하게 만들었다.

 

                                       초기생애

  하드리아누스의 가문은 남부 스페인 출신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본토박이가 아니라 정착민의 후예였다. 하드리아누스의 선조들은 그가 태어나기 약 250년 전에 이탈리아의 피케눔을 떠나 스페인으로 갔다. 하드리아누스 자신은 로마에서 태어났을 수도 있다. 그에게서 별다른 스페인적 특징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세계적인 도시 로마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다.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는 85년에 죽었고 그는 두 사람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다. 한 사람은 아버지의 사촌으로 나중에 황제가 된 트라야누스였고, 다른 한 사람은 하드리아누스의 재위 초기에 황실근위대장을 지낸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였다. 90년에 하드리아누스는 아마도 최초로 스페인을 방문했다. 이탈리카에서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이후 평생 동안 사냥이 취미였다. 하드리아누스는 이탈리카에서의 생활에 애착이 없었던 것 같다. 몇 년 간 그곳에 머물렀을 뿐이며 나중에 황제가 되어 스페인에 돌아왔을 때도 전혀 그곳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권력의 장악

  91년에 트라야누스가 콘술(집정관)이었을 때 하드리아누스는 로마 원로원 의원의 전통적인 경력을 밟기 시작하여 관례적인 일련의 직책을 거쳤다. 그는 로마의 3개 군단(레기온)을 지휘하는 군단장을 지냈다. 95년경에 도나우 강변의 상(上)모이시아 속주에서 제2보충군단에 복무하다가 이듬해에 하(下)모이시아의 마케도니카 제5군단으로 옮겨갔다. 97년말경에 하드리아누스는 고령의 네르바 황제가 막 양자로 맞아들여 후계자로 삼은 트라야누스에게 보내는 축하사절로 뽑혀 서쪽의 갈리아로 갔다. 트라야누스의 피보호자였던 그는 로마 제국의 지배집단에 속하게 되었다. 98년에 그의 매부인 율리우스 세르비아누스는 그가 트라야누스에게 네르바의 죽음을 제일 먼저 알려주지 못하게 방해하려다 실패했다. 이후로 두 사람은 평생 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세르비아누스는 끊임없이 하드리아누스의 지위를 위협했다.

 

  트라야누스 황제를 배후에서 움직인 가장 유력한 정치가는 그가 황제 자리에 오르도록 계획을 꾸민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수라라고 하는 인물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수라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출세가도를 달렸다. 트라야누스의 부인 플로티나도 수라와 친했으며 하드리아누스의 편을 들었던 것 같다. 한동안 세르비아누스는 아무런 해도 끼칠 수가 없었다. 폴로티나의 총애에 힘입어, 하드리아누스는 100년에 트라야누스의 종손녀인 비비아 사비나와 결혼했다.

 

  101년에 하드리아누스는 콰이스토르(재무관)가 되었으며 102년에 도나우 강변의 다키아에서 벌인 트라야누스의 첫번째 전쟁에 황제를 호위하여 참가했다. 105년에 하드리아누스는 호민관이 되었고, 이례적으로 106년에 프라이토르(법무관)로 승진했다. 승진 속도에 못지않게 이례적인 점은 하드리아누스가 황제와 함께 제2차 다키아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에 프라이토르로 재직했다는 사실이었다. 107년에는 잠시 하(下)판노니아의 총독을 지냈다. 이어서 108년에 하드리아누스는 누구나 선망하는 원로원 의원이 도달할 수 있는 최정상의 지위인 콘술직에 올랐다. 107년에 리키니우스 수라가 3번째로 그 자리를 차지했는데 그런 영예를 누린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드리아누스가 콘술이 된 직후 불분명한 시기에 수라가 죽은 것은 그에게 잔인한 타격을 주었다. 하드리아누스의 출세는 이후 거의 10년간 외견상으로 정지상태에 있었다. 대략 같은 시기에 다른 유망한 로마 청년들도 비슷하게 정체를 겪었다. 수라가 죽은 이후 수라·플로티나·하드리아누스에게 대립되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트라야누스의 궁정을 지배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세르비아누스가 모종의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드리아누스의 생애에서 불분명한 채로 있는 이 시기에 한 가지 분명하게 알려진 사실이 있다. 그는 112년에 아테네에서 아르콘(집정관)을 지냈으며 이 직책을 기념하는 비석이 디오니소스 극장에 세워졌다. 이 비석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하드리아누스가 그 직책을 맡은 것은 그의 재위기간을 특징짓는 그리스 애호경향의 전조였으며, 정치활동이 가로막힌 때에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그리스 민족과 그들의 문화에 열정을 쏟았으리라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는 황제가 죽기 전에 다시 총애를 받게 되었다(→ 헬레니즘).

 

  한 자료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재위 말년에 파르티아 전쟁을 벌일 때 황제 휘하의 지휘관이었다고 한다. 117년에 트라야누스가 서방으로 떠났을 때 하드리아누스는 시리아에 남아 주력부대의 지휘를 맡았다. 출세가 중단되었던 하드리아누스의 친구들도 이 시기에 중요한 지휘관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아마도 플로티나와 그 일파가 다시 트라야누스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8월 9일에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가 자신을 양자로 맞이해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11일에 트라야누스가 로마로 가던 도중에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대는 즉각 하드리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사건이 벌어진 일련의 과정으로 보아 플로티나 쪽에서 모종의 음모를 꾸민 듯한 혐의가 느껴지지만 진상은 알 길이 없다. 실상 시리아 주둔군의 지휘를 하드리아누스에게 위임하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한 사람은 바로 트라야누스 자신이었던 것이다.

 

                                                 황제로서 펼친 정책

  하드리아누스는 원로원에 자신의 양아버지에 대한 예우와 군대의 선포에 대한 승인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의 요청은 모두 수락되었다. 새 황제는 여유 있게 이탈리아 귀환 길에 올랐다. 그는 중요한 속주들의 지휘권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으며, 또한 일부 불만세력들이 그의 귀환 전에 본거지에 결집하여 누군가의 지령에 따라 움직인다는 주장을 내세울 수 있었다.

 

  트라야누스가 추진하던 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 정복사업은 이내 포기되었다(→ 이라크).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는 황실근위대 사령관으로서 하드리아누스가 귀환하기 전에 로마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주도했다.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안녕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보이는 고위 콘술직의 원로원 의원 4명에 대해 즉결처형을 명령했다. 새 체제의 출발과 더불어 벌어진 이러한 유혈사태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하드리아누스는 그것이 자기 의사와 어긋나는 짓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아티아누스에게 비난을 돌렸으며, 그와 비슷하게 다른 인기 없는 행동들에 대해서도 종종 죽은 트라야누스의 지시 탓으로 돌렸다.

 

  118년 여름 하드리아누스가 로마에 당도했을 때 그의 지위는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다. 그는 공적인 시혜조치와 검투사 경기, 국가에 대한 채무의 공식적인 취소 등을 통해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아티아누스는 교체되고 그의 동료 사령관인 술피쿠스 시밀리스도 해임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에게 공로가 많은 유명한 장군 마르키우스 투르보와 전기작가 수에토니우스의 후원자인 셉티키우스 클라루스를 새로운 사령관에 앉혔다. 여러 해가 지나지 않아서 이 두 사람은 모두 불명예스러운 지위로 전락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신하들에게 총애를 베풀 때 변덕스러웠거나 철저하게 타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새 황제는 3년간 로마에 머물렀다. 121년에 그는 동서를 망라한 제국 순방길에 올라 부대를 시찰하고 변방의 방위태세를 점검했다. 그는 갈리아와 게르마니아로 갔다가 이어서 122년에 브리타니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스페인으로 가서 타라코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마우레타니아(모로코)에서 일어난 봉기에 대응할 조치를 강구했다. 다음에 그는 동방으로 나아가 육로로 발칸 반도를 통과한 뒤 에게 해안의 소아시아(아나톨리아)로 갔다. 그는 파르티아인과 협상을 통해 신속하게 몇 가지 문제를 타결지은 뒤 소아시아 서북부를 방문했다. 124년에 서해안으로 돌아와 배를 타고 아테네로 갔고 마침내 125년에 로마로 돌아왔다.

 

  그가 이처럼 오랫동안 제국의 수도를 비운 것은 행정상의 이유가 있었다. 몇몇 속주에 말썽이 있었고 파르티아인들 문제도 처리해야 했으며 제국의 행정 전반을 시찰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순방여행에는 한편으로 또다른 동기가 작용했다. 그것은 곧 모든 사물과 사람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교 문필가인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를 "흥미로운 모든 일에 관심을 갖는 탐구자"(omnium curiositatum explorator)라고 했다. 그같은 호기심은 예민한 지성과 불안한 정신의 산물이었다. 이 2가지가 결합하여 그로 하여금 동방의 그리스로 향하게 만들었다. 123년초에 스페인을 떠난 뒤 다시는 서방 속주에 들린 적이 없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내 자신의 재위기간을 새로운 아우구스투스 시대로 간주하게 되었다. 123년에 그는 하드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사용, 의식적으로 위대한 선임자의 기억을 환기하고자 했다. 또한 주화에 황금시대라고 명기하게 했다. 그가 이룩한 평화는 아우구스투스 시대 평화의 재현이었으며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것을 모방해 공식적인 공훈록을 남겼다.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에서 또 3년을 보내고 나서 128년에 다시 순방을 떠났다. 북아프리카를 방문한 이후 아테네로 갔다가 그곳에서 배를 타고 소아시아로 건너가 멀리 동쪽으로 시리아와 아라비아까지 들어갔다. 이집트로 가서 낭리 강을 탐사하고 이어서 3번째로 아테네로 갔다. 하드리아누스가 132년에 로마로 돌아왔는지 조금 더 늦게 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134년 5월에 분명히 로마에 있었으나 그당시 유대에서 일어난 반란 때문에 또다시 해외로 나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순찰관이 아니라 지휘관으로서 팔레스타인에 갔다. 이것이 하드리아누스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황제의 여행을 살펴보면 다른 어떤 일에서보다 그 인물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여행중에 가장 기념할 만한 몇 가지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북부 브리타니아에서 그는 월젠드온타인으로부터 바우니스온솔웨이에 이르기까지 하드리아누스 성벽이라고 하는 거대한 변방성벽의 건립을 추진했다. 알제리아의 람바이시스에서 그가 행한 엄격한 부대시찰과 혹독한 훈련규정은 128년에 그가 병사들에게 한 연설을 담고 있는 장문의 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아테네에서 황제가 베푼 시혜는 무수하게 많았다. 아테네인들의 요청에 따라 그들의 법률을 전문적으로 다시 기초했으며 5세기도 전에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의 참주들이 시작했던 올림포스 신 제우스의 대신전 공사를 완성시켰다. 그는 아테네를 근거지로 하여 그리스인들의 동맹인 판헬레니온을 창설했다. 이 동맹은 모든 그리스 도시들에 동등한 대표권을 부여했으며 이후 로마 치하 그리스의 역사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델포이 신전에서 하드리아누스는 건축의 부흥을 지원했다. 이 모든 일이 하드리아누스 개인에게 미친 영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선임자인 아우구스투스처럼 그는 그리스의 신비종교인 엘레우시스교(敎)에 입문했으며 올림포스 신 제우스의 신전이 봉헌되고 난 뒤에는 올림피우스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하드리아누스에게서 비합리적인 요소는 큰 비중을 차지했다. 당대의 많은 로마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점성술에 정통했다. 또한 단지 일출을 구경할 목적으로 시칠리아의 에트나 산과 시리아의 안티오크 부근의 자발아그라 산을 올라간 탐미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과거에 대한 생생한 감식안을 지녔으며 옛날 작가들을 최근의 작가들보다 선호하고 고문체(古文體) 자체를 좋아했다. 그는 턱수염을 길러 수세대에 걸친 황제들에게 선례를 남김으로써 로마 제국의 스타일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소아시아 서북부의 비시니움콜라우디오폴리스(지금의 볼루)에서 하드리아누스는 110년경에 출생한 안티노우스라는 유약한 소년을 만났다. 하드리아누스는 그에게 매료되어 그를 길동무로 삼았다. 130년에 그들이 나일 강을 따라 함께 여행하던 중에 그 소년은 강에 떨어져 익사했다. 하드리아누스는 비탄에 빠져 드러내놓고 울음을 터뜨렸다. 널리 전해진 이야기에 따르면 안티노우스는 의도적으로 신성한 제물의 일환으로 자신을 강물에 던졌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 자신은 그 사실을 부인했지만 3세기의 진지한 사가 디오카시우스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하드리아누스와 그 소년이 종교적인 성격의 관계를 맺었는지는 전혀 불확실하다. 그러나 둘 사이의 애정적인 관계는 매우 분명하다. 하드리아누스가 슬퍼하는 것을 보고 그리스인들은 그에게 적절한 위안을 주고 사자(死者)의 명예를 기릴 수 있는 방도를 모색했다. 안티노우스 숭배의식이 동방의 곳곳에서 생겨나 서방으로 전파되었다. 그 소년의 동상이 가는 곳마다 흔하게 눈에 띄게 되었다. 이집트에서는 그의 죽음을 기리는 뜻으로 안티노오폴리스라는 도시가 생겨났다.

 

                                               예술적 업적

  하드리아누스의 예술적 기질은 그의 시와 건축 디자인, 그리고 생활양식 자체에서 나타났다. 그가 지은 완전한 시 4편이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온다. 그 시들은 표현방식이 종종 작위적이고 주제가 가벼운 단점은 있지만 탁월하게 숙련된 운문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운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그가 죽음의 자리에서 읊조렸다고 하는 자신의 영혼에 바친 시들이다. 건축과 관련하여 황제는 당대의 일류 건축가인 다마스쿠스 사람 아폴로도로스와 악명 높은 논쟁을 벌였다. 일설에는 하드리아누스는 그를 죽게 만들었다고도 한다. 하드리아누스가 남긴 최종적인 예술적 성과물은 그가 로마 교외의 티볼리에 자신의 별장으로 지은 건축물을 꼽을 수 있다(→ 하드리아누스 빌라). 이 건물을 지으면서 황제는 자기가 다닌 여행지들을 환기시켜주는 우아한 조형물들로 주위를 둘러쌌다. 조경(造景)과 탁월한 복제품들을 이용하여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광경들을 재현함으로써 말년에는 이탈리아의 해안을 떠나지 않고도 여행의 만족을 맛볼 수가 있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최상의 예술 후원자는 아니었다. 라틴 문학은 그의 재위중에 별로 진보를 이룩하지 못했다.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작가들인 전기작가 수에토니우스, 풍자가 유베날리스, 역사가 타키투스 등은 모든 어떤 의미에서는 트라야누스 시대의 잔존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문학적 후계자들은 없었다. 수에토니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재위 초기에 궁정에서 '아브에피스툴리스'(ab epistulis)라고 하는 중요한 문필가 직책으로 승격되기는 했지만 122년경에 해임되었다. 아마도 당시에 벌어졌던 어떤 문학적 논쟁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탁월한 웅변가들인 밀레토스인 디오니시오스와 아렐라테(아를)인 파보리누스 중에서 하드리아누스는 공공연하게 전자를 총애하고 높은 지위를 주었다가 이후에는 그를 몰락시키려고 했다. 파보리누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재위 말경에 유배생활을 했다. 황제의 변덕스러운 취미가 온 세상을 지배했다. 로마에서 지낸 짧은 체류기간중에 하드리아누스는 그곳에 있는 몇 군데 웅장한 건물에 자신의 기념비를 남겼다. 그는 선임자의 재위중에 화재로 파손된 판테온 신전을 완전히 다시 지었다. 그 자신의 거대한 능묘(지금의 카스텔산탄젤로)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선례에서 착상을 얻은 것으로 로마에 있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가의 능묘를 본뜬 것이다.

 

                                                     말년

  134년에 하드리아누스가 마지막 해외여행길에 올라 로마를 떠났을 때의 목적은 유대에서 발생한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었다. 바르 코크바(바르 코지바)의 주도 아래 유대인들은 공공연한 반란을 일으킨 상태였다. 무엇 때문에 반란이 일어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랍비 문헌에서는 하드리아누스의 박해로 인해 두려움과 배교행위가 일어났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런 언급에 합당한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130년대초에 하드리아누스가 공표한 것으로 보이는 할례 금지령일 것이다. 황제는 신체를 잘라내는 행위에 대해 혐오증이 있어서 거세(去勢)는 살인에 못지 않은 범죄라고 공언할 정도였다(→ 신체변형과 절단). 똑같은 취지에서 그는 할례도 신체 절제 행위나 마찬가지라고 보고 비난하는 한편 금지령을 내렸다. 하드리아누스가 이 조치로 유대인을 벌주거나 도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봉기는 신속하게 일어났다. 하드리아누스가 131~132년에 아테네를 방문하고 134년 여름까지 로마에 머문 것을 보면 그는 유대에서 일어난 소요사태를 처리하기가 싫었던 것 같다. 그는 유능한 장군 섹스투스 율리우스 세베루스에게 그 문제의 처리를 맡겼다. 하드리아누스가 근동지역에 도착한 그 해에 반란은 끝났다. 최근에 발견된 사실에 따르면 반란의 진압과 관련하여 로마 제국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예로 거론되는 몇 가지 조치들이 취해진 시기는 최소한 6년 정도 앞당겨 잡아야 하며 따라서 그보다 훨씬 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드리아누스는 135년에 어떤 야만적인 처벌도 내린 적이 없었던 것이다.

 

  134년에 하드리아누스의 숙적인 율리우스 세르비아누스가 3번째로 콘술직에 올랐다. 그 직책은 지나치게 나이가 든 그에게는 커다란 영예이기는 하지만 실속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르비아누스와 그 일파는 그의 젊은 손자인 페다니우스 푸스쿠스를 하드리아누스의 후계자로 세우려는 기대를 품었던 것 같다. 136년에 세르비아누스와 푸스쿠스는 모두 처형당했다. 황제는 후계 문제를 결론지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푸스쿠스를 제거하고 나서 하드리아누스는 나이가 36세가량 된 난봉꾼인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나중에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라고 개명한 케이오니우스의 방탕한 생활은 장차 파국적인 통치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2년 뒤에 그가 죽자 자신도 죽을 때가 다 된 하드리아누스는 다시 후계자를 뽑아야 했다. 그는 안니우스 베루스라고 하는 18세 소년을 골랐는데, 이 인물이 바로 장래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였다.

 

  138년에 하드리아누스는 현명하게 젊은 베루스에게 후계권이 넘어가도록 조치했다. 평판 높고 나이든 원로원 의원인 안토니누스가 하드리아누스의 양자로 입양되어 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안토니누스에게 젊은 베루스와 죽은 케이오니우스의 8세 된 아들을 모두 양자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최초에 선택한 가문이 계속 기억되는 한편 더 나이 많은 소년에게 처음의 후계권이 보장되게 한 것이다. 안토니누스가 오래 살 것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직접적 계승자에게 양자 2명을 들이도록 한 하드리아누스의 책략은, 티베리우스에게 비슷한 요구를 했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를 또다시 본뜬 것으로 보인다. 운명의 장난으로 하드리아누스가 구상한 미래의 설계는 혼란을 겪었다. 안토니누스는 티베리우스가 그러했듯이 사람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그는 161년까지도 죽지 않았다. 바이아이 해변 별장에서 죽을 때 하드리아누스는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그는 한 편지에서 죽음을 기다리지만 죽음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가를 이야기했다. 죽은 황제는 많은 사람들의 애도를 받지 못했다. 그를 알았던 어떤 사람이 쓴 글에 따르면 그는 신과 같이 떠받들고 비위를 맞추어야 할 인물이었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애정을 느끼게 만드는 인물은 되지 못했다고 한다.

 

G.W. Bowersock 글


브리태니커 백과 > 인물 > 왕·귀족 > 황제 > 로마
브리태니커 백과 > 사회과학 > 정치 > 정치 일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