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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왕조(淸王祖)와 풍수지리(風水地理) [@중국을 알아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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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장비사(孝庄秘史) - 대옥아 전기
◆ 주연 : 마경도, 녕정, 유덕개
◆ 방영 년도 : 2001年 ◆ 간략 줄거리
몽고왕족인 대옥아와 청고조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 다이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대옥아가 황태극(다이곤의 이복형)의 측실로 가게 되면서 서로 헤어지게 된다.
이복형에게 황위와 어머니, 사랑하는 여인까지 빼앗기게 된 다이곤은...
북경의 風水吉地
신 중국이 건설된 후 풍수는 많이 없어졌지만 홍콩 등 비지니스 중심에는 아직도 사무실이며 주택 구입 시 반드시 풍수전문가(地官)를 대동하고 다닌다.
아파트인 경우에는 침대의 방향이며 사무실 경우에는 책상의 위치 등도 풍수에 맞추어 바꾸어 놓기도 한다.
홍콩의 비지니스가 대륙에 진출하면서 베이징, 상하이 등에서도 풍수가 일부 다시 유행하기도 한다. 北京시내에서 풍수가 가장 좋은 곳은 두 말할 것 없이 자금성이다.
과거 황제가 살던 곳이라 이보다 더 좋은 風水吉地가 따로 없다.
북경 주변은 어떤가?
북경 주변의 풍수길지는 역대 황제릉이다.
최고 길지가 일반인에게 돌아갈 수 없다.
明의 3대 황제 영락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 조카를 몰아내고 쿠테타로 황제가 된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 주원장이 건설한 南京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南京의 보수세력은 쿠테타로 집권한 영락을 환영할 리 없었다.
그리고 그의 조카였던 당시 어린 황제(건문제)가 정변 속에서도 죽지 않고 몸을 피하였다 하여 民心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南京을 버리고 그가 변방군 총사령관으로 근무하던 北京으로 돌아왔다.
北京은 파괴된 과거 몽고 元의 수도(大都)였다.
그는 北京을 수도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풍수대가를 대동하고 자신이 묻히고 대대손손 明의 황제가 묻힐 수 있는 황릉의 적격지를 찾아다녔다.
결국 창평의 북쪽 지금의 明 13릉 지역을 발견한다.
黃土山 아래 금란알지의 분지가 형성되어 있으나 입구는 좁아지면서 좌청룡 우백호의 형상이 되어있다.
영락은 크게 만족하여, 그곳에 황릉의 건조를 명령하였다.
黃土山을 天壽山으로 개명토록 했는데, 明 王朝가 천년의 수를 다하도록 하겠다는 기원이 숨어있었다.
영락 7년에 建陵하여 4년 후에 준공한 것이 지금 明 13陵의 首陵 이라고 할 수 있는 長陵이다.
李自成과 吳三桂
그로부터 260년후 풍수길지의 효력도 다 되었는지 明은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조선에서의 전쟁(임진왜란) 지원으로 인한 국고피폐와 국내정치의 불안으로 지방에는 농민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중 李自成군이 가장 막강하여 수도 北京을 점령한다.
明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이 景山에서 목을 매고 자살한 것이 그때였다.
李自成 농민군이 주인없는 자금성을 차지하였지만 明의 유력 장군들을 포섭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특히 국방요지 山海關을 지키고 있는 吳三桂와 李自成 부하와의 여자를 사이에둔 불화는 중국 역사를 바꾸어 놓게 된다.
吳三桂에게는 陳元元이라는 애첩이 있었다.
陳은 당대 최고의 미인으로 미인 배출로 유명한 소주(蘇州) 출신이다.
吳장군이 소주에 근무할 때 알게 되어 애첩이 되었다.
吳장군은 숭정황제의 명령으로 山海關을 지키는 중책을 맡는다.
吳장군이 산해관을 지키는 사이 李自成이 반란에 성공한다.
吳장군은 수도 北京의 왕조 교체에 줄을 잡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李自成의 회유에 따라 반란군에 가담한다.
그러나 곧이어 이자성의 부하들이 北京 吳장군 본가의 陳元元을 농락하였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자성 부하들이 陳의 미색에 홀려 적과 동지를 구분 못한 셈이다.
만주족 淸과 대치하고 있는 吳三桂가 홧김에 오히려 청과 내통하여 산해관 城門을 활짝 열어 주어버린다.
기다렸다는 듯이 淸軍이 물밀 듯 하북평야로 들어와 北京을 점령하고 李自成 농민군을 쫓아낸다.
이른바 만주족 淸이 중국을 지배하게 되는 순간(1644년)이었다.
龍飛鳳舞
만주족 淸은 風水地理說 신봉으로 유명하다.
백두산 산록에 유목 생활을 하던 만주족이 풍수길지에 맞추어 조상의 무덤을 잘 쓴 후 국운이 흥하였다고 믿고 있었다.
지금의 심양에는 뚱링(東陵)과 베이링(北陵)이 유명하다.
청의 초대황제 누루하치와 2대 황제 황타이지(皇太極)의 陵이다.
모두 關(山海關)外 중국 풍수의 최고길지라고 알려져 있다.
明의 장군 吳三桂의 배신으로 중원을 차지 지금의 심양에서 北京으로 수도를 옮긴 淸의 順治 황제는 겨우 6살의 어린 아이였다.
삼촌들의 힘으로 잔존 明의 세력을 남쪽으로 쫓아내고 청조의 기반을 다지기는 하였지만 ,역시 청의 국운을 계속 이어줄 풍수길지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北京 주변에서 가장 좋은 풍수길지는 창평의 明 13릉이었다.
사냥을 좋아한 젊은 황제 순치는 더 멀리 길지를 찾아다녔다.
결국 天下 제일 명당을 찾아냈다.
그곳이 바로 지금 淸 東陵으로 불리워지고 있는 河北省 遵化市이다.
그곳은 용이 떠오르고 봉황이 춤추는(龍飛鳳舞) 모습이었다.
燕山의 남쪽으로 北으로는 昌端山이 있고, 남쪽으로는 金星山이 병풍처럼 둘러있다.
풍수길지의 교과서 그대로였다.
너무 기뻐한 順治 황제는 자신의 皇陵(孝陵)으로 정하고, 그후 4名의 청황제가 묻히게 하므로서 淸朝의 초기 기운을 다지게 한다.
그러나 그 자신은 사랑하는 부인이 일찍 죽음에 마음의 병을 얻어 24세의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 왜 이렇게 절묘한 풍수길지를 明시대는 몰랐을까?
사실은 明의 마지막 황제로 농민반란군에 자금성을 내주고 33세의 젊은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숭정은, 昌平의 13릉이 이미 만원이라 새로운 황릉을 찾고 있었다.
마침 준화시의 馬谷 현재 청東陵 위치가 최대 길지임을 알고, 자신의 皇陵을 건조할 것을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國運이 일찍 끝났다. 숭정이 미리 건릉을 했더라면 李自成 반란이 성공하지 못하고, 淸이 山海關으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이는 풍수설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효장문(孝庄文) 태후
순치 황제가 건릉하기 시작한 北京 근교 淸 東陵은, 그 자신과 그의 아들 강희, 손자 건륭의 황릉이 있다. 청말의 함풍황제와 그의 두 부인 동태후와 서태후, 그리고 그의 아들 동치황제의 능도 청 동릉에 있다. 모두 5명의 황제와 15명의 황후가 안치되어있다.
중국의 역사 속에 여걸 황후, 황태후가 많은데, 淸朝의 경우 효장문 태후와 서태후 두 사람이 여걸 황태후로 손꼽힌다.
효장문 태후의 능은 청 동릉에 있는 昭西陵이다. 그의 남편은 청의 2대 황제 황타이지(皇太極)이므로, 원칙대로라면 그의 남편 황타이지 陵(심양에 있는 北陵으로 정식 명칭은 昭陵)에 같이 합장되어야 한다. 昭西陵은 昭陵의 서쪽 즉 심양에서 서쪽 分陵의 의미가 있다.
청초의 효장문 태후는 청말의 서태후와 달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녀의 정치적 센스와 용기가,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만들고, 淸의 초기 기운을 다졌다고 볼 수 있다.
황타이지의 총애를 받은 몽고귀족 출신인 효장문 태후에게는, 복림(福臨)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황타이지가 오래 살았다면, 총비의 아들 복림이 자연스럽게 황태자가 되고, 황위를 이어 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황타이지가 이러한 준비도 없이 갑자기 죽는다.
황타이지가 죽자, 황타이지의 큰아들 호격과 황타이지의 동생 다얼콘 사이에 황위 쟁탈이 시작된다. 두 세력이 우열을 가릴수 없어, 국가가 분단 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때 효장문 태후가 정치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아들 복림을 황위를 계승토록하는 절충안을 낸다.
복림이라는 대안에 양 세력이 설득되어, 결굴 6살의 어린아이 복림이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이 어린 황제가 순치 황제이다.
숙부와 형님의 양보로 어부지리를 얻은 복림이 황제가 되었지만, 숙부 다얼콘은 야심가였다. 효장문 태후는 아들 복림의 황위를 다시 뺏을지도 모르는 다얼콘과 결혼, 그를 섭정왕이 되게 하여 아들을 지킨다.
父奪子位
섭정왕 다얼콘은 오삼계의 항복을 받아 北京으로 진격(1644.4), 北京을 청의 수도로 정한다.(1644.10) 北京으로 들어온 다얼콘의 본심이 들어난다. 복림을 없애고, 자신 스스로가 황제가 되고자 한 것이다.
효장문 태후는 다얼콘의 야심을 꺾기 위해, 복림이 이미 다얼콘의 아들이 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아들의 황위를 아버지가 빼앗았다(父奪子位)는 오명보다는, 황제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순리라면서 복림의 황위를 끝까지 지켜줄 것을 호소한다.
그후 섭정왕 다얼콘이 사냥터에서 사고로 죽게 된다. 당시 14세의 순치황제는 어머니 효장문 태후의 도움으로 재빠르게 친정체제로 전환, 황실의 기반을 구축한다.
효장문 태후는 자신이 죽어 묻힐 盛京(심양)의 昭陵을 생각했다.
이미 시동생 다얼콘과 결혼하여 몸을 더럽힌 자신이, 옛날 남편 皇太極 옆에 묻힐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아꼈던 아들(순치) 옆에 묻히고자, 심양의 陵보다 淸 동릉을 택하였다.
그후 효장문 태후는 아들(순치)을 도와, 明의 잔존세력을 제거하는데 힘쓴다. 아들 순치황제가 일찍 죽자, 8살 손자(강희)를 제위에 오르게 하고, 생모가 없는 손자 강희의 교육도 맡는다.
강희 황제가 청조 가장 위대한 황제가 된 것도, 할머니 효장문 태후의 숨은 지도가 있었다고 한다.
효장문 태후가 청 東陵에 들어간 것은, 아들 순치보다 27년이나 지나서였다.
서태후(慈禧)
청의 두 번째 여걸 서태후의 무덤은 청 동릉에서 가장 찬란하다.
서태후의 능을 보면, 황후의 능이지만 황제의 능을 능가하여, 당시 누가 실제 황제였음을 확실히 알게 해주고 있다.
황릉으로 진입하는 돌계단인 丹陛石의 조각이, 龍이 중심이 되어있음에 불만을 품고, 그의 능의 단폐석은 鳳이 龍의 위에 조각되어 있다. 서태후 (봉)자신이 황제(용)보다 상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서태후는 효장문 태후와 달리, 남편(함풍)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 함풍황제는 영불연합군에 쫓겨 열하(승덕)에서 죽을 때(1861), 신하들이 서태후의 말을 듣지 말도록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서태후는 함풍의 동생 공친왕과 공모하여, 함풍의 충신 8명을 체포하고 실권을 잡는다. 그후 서태후는 청말 격동기의 43년간(1865-1908) 최고 통치자로서 지위를 갖는다. 서태후는 본래 몰락한 귀족의 딸로, 17세에 궁녀로 입궁하였다.
야심이 많은 어린 궁녀는, 경극을 좋아하는 함풍 황제의 관심을 끌기 위해, 황제의 산책로에서, 미리 준비한 황제가 좋아하는 경극을 노래한다.
그후 황제의 눈에 들게 되고, 함풍의 첫 아들(후에 同治 황제)을 낳게 된다.
황제가 죽고, 아들이 황위에 오르자 太后가 된다. 함풍의 첫부인 동태후와 함께 6살의 어린 황제의 섭정을 맡았으나, 정치에 관심이 없는 동태후를 제치고 정치에 깊히 관여한다.
후에 자신의 아들인 동치 황제가 죽자, 자신의 여동생 아들을 광서황제로 앉히고 섭정을 계속하여, 청말의 정국을 농단한다. 청일전쟁을 대비한 해군예산을 빼내서, 北京의 이화원을 짓기도 하였다. 중남해에 중국 최초의 철로를 놓고 기차를 타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 등 서양문물을 적극적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나, 전화를 가설하는 것은 극력 반대하였다고 한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고할 때는 반드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데, 전화로는 도저히 이러한 예를 올리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傳位于四子
옹정제 재위 기간(1772~1735)
明의 경우에는 황릉이 13릉에 모여 있으나, 청의 경우에는 현 청 東陵만이 아니고, 또 한 곳의 황제의 릉이 따로 있다. 바로 청西陵인데, 따라서 북경을 동서로 황제의 陵(emperor's valley)이 갈라져 있는 모습이다.
청西陵은 북경에서 서남쪽으로 10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지역 이름은 易현이다. 이곳에 또 하나의 풍수길지가 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청의 옹정황제다. 그는 강희의 넷째 아들이고, 건륭의 아버지이다.
옹정은 성격이 사납고 음모를 좋아해, 처음부터 아버지 강희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강희는 자신이 동서남북으로 수많은 정복 전쟁으로 국토를 넓혔지만, 다음 황제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선비형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에 꼭 맞는 아들이 14번째 아들이었다.
그가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겼다. “傳位十四子” 즉 14번째 아들에게 황위를 넘긴다는 것이다. 당시 청나라는 황태자를 미리 정하지 않았다. 황태자를 정하면, 서로 시기하고 싸워 오히려 나라가 시끄러워 진다는 이유에서다. 반드시 先帝가 죽기 전에 유언을 남기는 것이다.
황제가 붕어하자마자 ,옹정은 누구보다 먼저 강희의 유언장을 찾아내었다.
그는 자신에게 황위를 넘겨 주는 유언장을 기대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14번째 동생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는 하나 뿐인 유언장을 위작하기로 하였다. “傳位十四子”의 十에 획을 아래위로 가하면 우(于)가 된다. 이는 전치사 “에게”라는 의미가 있다. “傳位于四子” 즉 4번째 아들에게 황위를 물러 준다는 뜻이 된다. 자신의 무력으로 대신들의 입을 이미 막아 놓고 있었으니, 설령 위작을 안다고 해도 말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신하는 힘으로 입을 막으면 되지만, 돌아가신 선제 아버지를 배신한 것은 용납되기 어려웠다. 옹정은 자신이 죽어서 아버지 강희 황제 곁으로 가는 것이 겁이 났다. 아버지로부터 질책을 받을 게 두려웠다. 그래서 아버지 능과 멀찌감치 떨이진 곳에 자신의 능을 새로이 만들 것을 결심하고, 새로운 풍수길지를 찾아 나선 것이다.
北京의 서쪽은 산서성과 하북성을 가르고 있는 태행산맥이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이 태행산맥의 지맥으로 북으로 白王山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으며, 남쪽으로는 九龍山이 뻗어있고, 그 사이로 易水가 흘러나오는 천하 길지를 찾아냈다. 그곳에 자신의 능(태릉)을 만들었다.
그후 아버지보다 할아버지를 더욱 좋아한 그의 아들 건륭은 할아버지가 있는 東陵으로 갔지만, 손자 가경(嘉慶) 도광, 광서 등 4명의 황제의 능은 淸西陵에 만들어지게 된다.
서안의 진시황 릉이 중국 최초의 황제의 능이라고 한다면, 淸 西陵의 광서 황제의 능은 중국 최후의 황제의 능이다.
광세 황제의 숭릉은 1909년에 건릉을 시작하여 1915년 완공하였다.
그때는 이미 수천년 황제가 지배한 중화제국이 막을 내리고, 대통령(총통)의 중화민국이 시작된지 3년이 지난 후였다.
by 코리아닷컴 이룸(eRo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