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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펫, 리빙스턴 그리고 아프리카 선교기지 쿠루만

영국신사77 2007. 1. 9. 21:35
   

Moffat,

 

Livingstone,

Kuruman

 
 

 

Moffat, Livingstone, 그리고 Kuruman

 정양운 전문인선교사

 

      방학을 맞아 가능하면 지역과 종족 리서치를 하려고 계획을 세웠으

    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못하다가 이번에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

    로 불리는 로버트 모펫(Robert Moffat 1795-1883)이 선교기지로 개척했고

    그리고 너무나 유명한 그의 사위 데이비드 리빙스턴(Dr. David LIVINGSTONE

    1813-1873)등이 2년 이상 머물며, 내륙 깊숙이 탐험을 시도하게 된

    쿠루만을 리서치하기로 했다. 로버트 모펫은 53년 동안 SOUTH

    AFRICA 선교사로 사역한 MISSIONARY HERO 이다.

 

      19세기 중반 남부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케이프지역(CAPE COLONY)

     매우 큰 땅이 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SOUTH AFRICA는 9개의

    (州, PROVINCE)로 나뉘어 있는데, 절반정도의 땅이 케이프타운을

    중심으로 한 웨스턴 케이프(WESTERN CAPE), 포트 엘리자베스, 이스트

    런던 등이 위치한 이스턴 케이프(EASTERN CAPE), 케이프타운과

    남미비아 사이의 NAMAQUA LAND(Little NAMAQUA land) 그리고 이번에

    가게 된 업핑턴(UPINGTON)을 중심으로 한 노던 케이프(NORTHERN CAPE)

    등이다.

     

      당시 기록을 보면 해안을 중심으로 선교캠프가 발달 되어 있을 때,

    선교사들 간에 다툼과 질시가 많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어

    오늘날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음을 알 수 있고, 때문에 내지선교로 눈을

    돌리게 된 배경이 된다.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중국 내지선교회

    (CIM), 수단오지선교회(SIM) 후에 아프리카 내지선교회(AIM)등이 생겨

    나, 선교의 전략과 접근방법의 한 분수령이 되기도 한다.

     

      모펫은 이들을 뒤로하고 내륙 깊숙이 들어가는데, 케이프타운

    에서부터 호텐토트(케이프거주 원주민, 혹은 khoi khoi. 그러나 백인들에게

    밀려 내륙으로 이동 함)부족이 사는 NAMAQUA LAND (케이프타운에서

    북쪽방향으로 이 지역은 현재 사라져가는 종족 중에 있는 BUSH족이 주로 거주/

    남미비아와 남아공 그리고 보츠와나 국경지역에 주로 분포)에서 잠시 지낸 후

    GRIQUA LAND(남아공의 종족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 백인과 이들 원주민

    부족간의 혼혈족은 말을 타고 다니며 강도질이나 도둑질을 일삼는데 heroes,

    coloureds, Hottentots, blacks, giants로 백인들은 때때로 종으로 부리기도

    했으며 오렌지강을 따라 킴벌리와 ORANGE FREE STATE까지 진출,

    그리콰랜드는 이들의 주요 거주지 임)의 중심도시인 GRIQUA TOWN에서

    약 9개월을 (UPINGTON에서 남쪽으로 약 200KM, 그곳에서 리빙스턴의 부인이 된

    모펫의 장녀 MARRY Moffat Jr. 출생) 지낸 후, 칼라하리 사막 지역의

    Bechuana Land(현 보츠와나) Kuruman (UPINGTON에서 동북방향 약 250KM)

    에서 SOUTH AFRICA 선교사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사역을 한다.

     

      또한 그는 자녀교육 때문에 GRAHAMSTOWN까지 여행을 하기도

    했으며, 자신이 직접 번역한 천로역정, 찬송가와 원주민 언어 성경

    인쇄를 위해, 인쇄기를 배로 케이프타운에서 ALGOA BAY(현 PORT

    ELIZABETH )까지 운반 그곳에서 육로로(COW WAGON, 우마차) 쿠루만

    까지 운반하기도 했다. Bethelsdorp (현 PORT ELIZABETH 외곽)에서 가끔

    물건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거나, 신임선교사를 만나는 장소였던 것

    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펫이 쿠루만 에서 성공적인 정착을 한 후, 영국을 방문해서 여러

    곳을 돌며 강연과 설교를 하면서 아프리카 선교의 필요성에 대해,

    “아침에 태양이 솟아오를 때 선교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수천 개의 마을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라고 역설을 할 그때, 중국선교를 꿈꾸며 준비하던 리빙스턴이  중국과

    영국간의 아편전쟁의 발발로 다른 선교지를 모색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리빙스턴은 모펫을 만나게 되어 아프리카 선교를 결심하게

    된다.

     

      Kuruman에 도착한 리빙스턴은 수 천 개의 마을은 없고 몇 채 안

    되는 원주민 마을들, 그것도 띄엄띄엄 있는 것을 보고 실망을 하는데

    (필자가 확인하기는 모팻의 선교기지에서 북쪽으로 보면 멀리 야트막한 언덕 아래로

    쿠루만강이 흐르는데 강줄기를 따라 마을들이 있었으며 아마 추측하기는 아침에 집집마다

    음식 준비하는 모습이었을 것임) 2년 반 정도를 같이 사역을 하면서 계속

    북쪽지역을 탐험하여 쿠루만과 같은 베이스캠프 정착지를 찾으면서

    사역지를 넓혀 나간다. 그 이면에는 동료선교사와의 심각한 갈등이,

    다른 사역지를 개척하게 하는 요인이었음을 발견한다. 그는

    남아프리카(South Africa), 보츠와나(Botswana), 잠비아(Zambia),

    탄자니아(Tanzania), 말라위(Malawi), 앙골라(Angola), 모잠비크

    (Mozambique)등을 광범위하게 탐험했으며, 특히 잠베지 강을 따라

    동쪽으로는 모잠비크의 �리마네까지, 서쪽으로는 앙골라의

    루안다까지 탐험하였다. 그것은 그의 사역의 포인트를 선교와

    무역에 두었기 때문이며, 당시만 해도 노예사냥꾼들이 도처에

    있었고 종족 간에 싸움이 일어나 포로를 잡게 되면 역시 노예

    상들에게 팔아버리는 것을 보고, 리빙스턴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역선이 내륙으로 들어 올 수 있는 뱃길이 꼭 필요

    하다고 판단이 되어, 강을 따라 탐험을 한 것이다.

    모펫의 선교초점이 “선교와 경작(농업)”이라면, 리빙스턴은

    “선교와 무역”이라고 할 수 있다.

     

      나와 아내를 비롯하여 두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떠난 지 5일째

    되는 날 아침6시, 우리는 UPINGTON을 뒤로하고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Kuruman을 향해 출발했다. 역시

    주변 풍경은 다른 내륙과 별 차이 없이 비가오지 않은 대지에

    듬성듬성 누렇게 말라버린 풀들, 가끔 나타나는 야트막한 언덕,

    전주위에 지은 거대한 새집들, 반듯한 도로는 약간 오르막이

    있거나 내리막이 있는 그런 길을 따가운 아침햇살을 안고 시속

    120km로 달린다.

    10시 정도에 Kuruman입구에 있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보충하면서

    Moffat church 가 어디냐고 물으니 주유원이 친절히 가르쳐 준다.

    시내에서 약 5km정도 북쪽 내륙으로 더 들어가서 "Kuruman Moffat

    Mission"이라는 안내판을 발견한다.

     

    Kuruman Moffat Mission   ball_green.gif

      14 ha에  그의 집이 있고, 교회와 그리고 가까이에 리빙스턴이

    거처했던 방, 건너편에 해밀턴 선교사숙소와 최초로 새웠던 교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reception으로 사용하는 4채의 건물이 있다.

    그의 집 내부에는 모펫의 사역에 관해서 전시되어 있고 당시 사용

    했던 의자들, 책장 안에는 오래된 책과 조금 옆 작은 탁자에는 방명록

    이 있으며, 주방으로 사용했던 공간, 통나무를 깎아 트러스를 만든

    집은 돌멩이와 세멘을 이용해 지어서 튼튼해 보이며, 아프리카 전통의

    야생풀로 이은 지붕은 우리나라의 초가지붕과 흡사하다. 메리가 사용

    했던 주방은 벽난로 비슷한 곳에 불을 지펴서 음식을 만드는 공간이

    있었다.

     

    메리의 정원    ball_green.gif

      맞은편에는 조그만 수로가 가로질러 가고 그 수로와 정원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장치가 달려 있어서 정원사로 일했던 그의 주특기

    를 살려 섬세하게 만든 흔적이 엿보인다. 지금은 관리를 하지 않아

    잡풀이 우거진 곳에 군데군데 벤치가 놓여 있어 그들의 과거를

    추억하게 한다. 좀 더 돌아가면, 불에 타서 죽은 듯 한 밑

    동만 조금 남은 검은 ALMOND TREE에 “LIVINGSTONE TREE”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다.  리빙스턴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원주민들과

    사자사냥을 하러 다니곤 했는데 사자의 공격을 받아 큰 부상을

    당했다. 그때 모펫의 큰딸 메리(그녀의 어머니 이름과 동일)가 리빙스턴을

    간호해 주었고, 그는 그 나무 밑에서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한다.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때 메리는 리빙스턴의 청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 듯 한데, 그러나 얼마 뒤 이들은 이곳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Hamilton house    ball_green.gif

      모펫의 집에서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또 다른 집이 나오는데 이곳

    Robert Hamilton의 집이다. 모펫보다 4년 먼저 Kuruman에 도착

    했으며 오렌지 강을 넘어 정착한 첫 번째 백인인 그는 다재다능한

    선교사여서 목수일이나 여러 가지들을 손수 만들었다고 한다. 벽

    두께가 45cm정도로 매우 튼튼한 집을 지었는데, Northern Cape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며, 한때 리빙스턴이 거주하기도 했다.

     

    First school room   ball_green.gif

      해밀턴의 집 뒤로 돌아가면 원주민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지은 아담한 건물이 나온다. 이 역시 오렌지 강 북쪽에서 첫 번째

    학교이다. 안내 글에는 1829년에 Joseph Arends라는 도망 나온

    종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라는 것과 내부에는 과거의 흔적은

    별로 없고 오래된 인쇄기와 함께 정치적인 내용에서부터 성경

    기록의 역사 등을 게시판 형식으로 전시해 놓았다. 밖에는

    당시 사용하던 책상인 듯 한 것들이 방치되어 있었고 조금

    옆에는 모펫의 동상이 태어난 해와 죽은 년도가 새겨져 있는데,

    그 아래 안내판에는 “1795년에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1820년

    25살 되는 해에 Kuruman으로 와서 1870년에 은퇴한 후 1887년

    런던에서 죽었다”라고 간단하게 적혀있다. 50년을 이곳 Kuruman

    에서 선교사역을 한 후 영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계속 이곳

    저곳을 돌며 선교에 동참을 호소하며 다녔다고 한다.

     

    Moffat church    ball_green.gif

      800석 규모의 T자 형태로 지어진 이교회는, 1829년에 시작을

    해서 1838년에 완공이 되었다. 선교사역을 시작한지 9년 만에

    교회를 건축하기 시작했고 약 10년에 걸려 완공한 셈이다.

    바닥은 소똥을 붉은 진흙에 이겨서 정성스럽게 발라, 아직까지도

    원형이 보존될 정도로 상태가 좋았다. 건축자재나 환경 등을 고려할

    때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건물구조이다. 돌 벽돌로 구성된 벽과

    소똥바닥, 그리고 통나무를 깎아 만든 트러스들, 야생풀로 덮은

    지붕, 지금은 돌과 돌 사이에 세멘을 발라 튼튼하게 복구를 해

    놓았지만, 처음에는 돌과 돌 사이를 흙으로 쌓았고 벽을 세운 후

    7년여를 기다리며 트러스로 사용할 큰 나무들이 준비되길 기다렸다.

    서까래로 사용할 나무를 마타벨레 추장으로부터 선물 받아 약

    400km 정도를 우마차를 이용해 싣고 오기도 했다. T자의 중앙

    삼각점 부분에 강대상이 돌로 만들어 져 있고, 한쪽 벽에는

    검은 돌에 런던선교회(LMS/ London Missionary Society)에서 Kuruman

    으로 파송한 역대 선교사명단과 함께 사역기간이 새겨져 있는데,

    약150년에 걸쳐 30명의 선교사를 Kuruman지역에 파송을 했고,

    1981년까지 선교사가 사역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이름, 리빙스턴과 모펫의 아들 존(John Smith Moffat)

    그곳에 있다.

     

      이 기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선교 100주년을

    넘긴 우리나라는, 이런 역사적인 안목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하며

    노력해야함을 시사한다. 교회가 지어지는 동안에, 주변에 다른

    건물들도 건축을 한듯하다. 1960년대에는 아파테이트 정책으로

    교회가 문을 닫기도 했으며, 지금은 공식 주일예배는 드려지지

    않으며 가끔 결혼식이나 단체 모임이 있을 때 유료로 빌려 준다.

     

    LIVINGSTONE ROOM    ball_green.gif

      교회를 돌아 내려가면 모펫의 집 뒤쪽에 작은 별채가 하나 있고,

    방의 크기는 대략 3평이 채 안 되는 듯 한 리빙스턴의 방이 나온다.

    신임선교사 리빙스턴이 이 방에서 기거를 했으며, 중부 아프리카

    를 탐험할 때도 가끔 이곳을 들러 이방에 머물곤 했다. 벽에는

    리빙스턴의 가족사진, 신문기사와 그가 생전에 탐험했던 지역의

    지도들, 빅토리아 폭포의 스케치, 그리고 그가 죽은 후 그를

    사랑하는 흑인들이 그의 심장을 꺼내 묻었다는 치탐보 나무의

    사진, 그리고 그의 시체를 바짝 말려서 접어 �리마네(어떤 기록은

    잔지바로 되어 있음) 영국군 기지까지 9개월 동안 운반한 수지(suzi)와

    추미(chumi)의 얼굴도 있다. 국장으로 거행된 웨스트민스터 사원

    에서의 리빙스턴의 관과 안내 팸플릿 사진도 있다. 한쪽 벽에는

    자전거를 옆에 두고 웃으면서 사진을 찍은 두 젊은 남녀

    있는데, 이들은 약 5개월간 영국에서부터 리빙스턴의 탐험로를

    자전거로 일주하면서 이곳에 들러 사진을 찍었단다. 리빙스턴의

    죽음과 함께 아프리카에서의 노예무역은 사실상 끝나게 된다.

     

      모펫이 은퇴하고 영국으로 돌아간 3년 후에, 리빙스턴의 시체가

    영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침에 태양이 솟아 오를 때 선교사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수천 개의 마을”의 비전을 따라 왔던

    리빙스턴, 은퇴한 노 선교사가 자신의 선교전선에 뛰어들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위이자 후배 선교사 리빙스턴의

    관을 보며,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며, 우리 일행은

    최근에 지은 듯 한 컨퍼런스 장소로 발길을 옮긴다.

     

    Conference hall    ball_green.gif

    현대식 건물에 도서관까지 갖추고 소그룹 룸과 야외 부라이 시설

    까지 부족한 것이 없이 잘 갖추어져 있다. 관리인이 거주하면서

    시설관리를 하고 있으며, 게시판에는 시설 사용료에 대한 안내지가

    붙어 있다.

    입구로 돌아 나오는데 몇몇 방문객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마지막

    으로 우리는 기념촬영을 하고 시내로 나와 information 센터에

    들러 다음 여행지인 GRIQUATOWN에 대한 정보를 얻고 서둘러

    출발을 했다.

     

    Marry Moffat Museum, GRIQUATOWN    ball_green.gif

      쿠루만 에서 postmasburg까지 약 150km로 비교적 도로 상태는

    좋은 편이며, 지나는 자동차 역시 아주 가끔 만나는 정도이다.

    postmasburg에 도착했으나 GRIQUATOWN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여 시내를 한 바퀴 돌았으나 도로 표지판도 없고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지나는 백인에게 지도를 들고 길을 물으니

    아프리칸스어로 뭐라고 하는데 친절히 칸보이를 해준다.

    동네를 빠져 나와 비포장 입구에서 손을 흔들며 그들은

    되돌아가고 덜텅거리는 자동차와 여러 가지 소음은

    칼라하리의 비포장을 생각하게 하며 조바심이 났다.

    GRIQUATOWN까지 65km이상을 가야하는데 넉넉잡아도

    1시간 이상을 가야한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당겨보려고

    속도를 냈다. 우리는 차가 몇 대나 마주치나 맞히기를 하며

    가는데 순식간에 차가 자갈길에 미끄러지면서 지그재그로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고 만다. 왼쪽 철조망을 뚫고 들어가

    가시나무를 치면서 다시 철조망을 돌아 나오면서 겨우

    멈춘다. 시동을 걸어보니 다행히 시동이 걸린다. 바퀴에

    걸린 철조망을 끊고서 차는 도로로 다시 나왔으나 유리창은

    가시나무에 부딪히면서 금이 가고 앞뒤 범퍼와 왼쪽 뒤

    패널이 찌그러졌다. 그러나 다친 사람이 하나도 없음에

    하나님께 감사를 하며 다시 한 번 조심운전을 다짐하며

    GRIQUATOWN에 도착하였다.

     

      너무 기대를 했던 때문인지, 아니면 사고의 후유증인지 알 수

    없으나, 메리 모펫의 박물관의 첫인상은 실망이다. 허름하고

    조그만 옛 건물에 마치 골동품상과 비슷하며 관리하는 백인

    할머니 역시 그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모펫이 쿠루만으로

    가기 전에 이곳에서 약 9개월간 머물 때, 첫딸이자 리빙스턴의

    아내가 된 메리모팻 주니어를 이곳에서 낳게 된다. 그 후 모펫은

    쿠루만으로 옮기고, 다른 선교사(런던 선교회 DIRECTOR Rev. John

    Campbell/ GRIQUATOWN은 런던 선교회에서 일찍이 자리를 잡은 듯하며

    모팻이 이곳을 들른 것은 당연한 코스였을 것으로 추측)에 의해

    GRIQUATOWN에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지금의 박물관 자리는

    당시 교회였으며, 그 후 은행(FNB)이 매입을 했으나 역사적인

    장소임을 이유로 박물관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번 여행을 통해 선교 영웅들의 사역을 가까이에서 보고

    느끼면서 각오를 새롭게 한다. 40대 중반에 뛰어든 선교사역,

    인생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데 과연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을는지 자문을 해본다.

    한편 Kuruman과 같은 선교기지가 있었기에 런던 선교회에서

    장기사역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으며, 좋은 선교기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이것은 당시 식민제국들이

    그들의 거점 도시건설과 비슷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아쉬움은 당시의 열정적인 선교사들의 피땀으로

    세워진 훌륭한 교회들이, 지금은 역사적인 관광지나 박물관

    등지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어떤 요인이 교회의

    존속을 가로 막았나? 연구의 가치가 없지 않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위임명령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선교사가 세운 교회 역시 선교 지향적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쯤 어디엔가는 제2, 제3,

    제4…….의 Moffat CHURCH들이 또 그들의 소명대로 또 다른

    교회들을 세워 갈 것이다.

     

    못 다한 이야기들    ball_green.gif

    5박6일간 약3500km의 긴 여행이었다. UPINGTON을 비롯하여,

     Kuruman등지를 GREEN KALAHARI 라고 불린다. 필자는 출발

    전 준비과정에서 ORANGE강을 보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어 CRADOCK을 지나 MIDDELBURG에서 N9을 따라

    우측으로 오렌지 강 최대의 댐인 GARIEP DAM으로 갔다.

    굉장한 규모와 깨끗하게 다듬어진 주변 환경들, 휴양시설등이

    인상적이었으며 세찬 바람과 짙은 흙탕물, 가뭄 탓인지 수위가

    많이 내려가 있었다. 가는 중간 중간에 오렌지 강을 지나노라면

    진한 초록빛의 포도농장들이 즐비했다. 강 주위를 제외한

    다른 곳은 누런 갈색의 벌판이지만 강 유역은 관개시설을

    통해 강물을 이용 포도를 재배하는데 남아공 최대 규모이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WINE CELLARS가 이지역이라고 한다.

    몇 시간을 달려도 나무도 잘 자라지 않는 허허벌판은 물문제만

    해결한다면, 그래서 저 땅들을 이용한다면 굉장한 나라가

    되겠구나를 생각하며 과거 우리나라에서 시행했던 4대강

    유역개발을 머리에 떠올렸다. 현재 남아공은 ORP

    (Orange River Project)계획이 수립되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Kgalagadi Transfrontier Park"은 남아공 쪽 칼라하리 국립공원

    이름이고 보츠와나(19세기의 Bechuana Land는 현 업핑턴과 쿠루만등이

    모두 포함 됨)에서는 "Gemsbok Park" 이라 불리며 Nossob river를

    중심으로 남아공과 보츠와나가 나뉜다. 그런데 이 강이

    공원으로 가는 비포장도로이고 강폭이 50m는 더 되어 보이는데

    사막 특유의 가시나무인 camel thorn tree(사막 유일의 나무이며

    부시족이나 야생동물들 특히 새들에게 매우 중요한 나무)가 여기저기 있어서

    강이라고 생각이 안 들 정도이고 또, 공원입구까지는 얕은

    철조망으로 국경이 표시되어 있으나, 공원 내에서는 남아공과

    보츠와간에 국경표시 경계석이(남아공 쪽에는 “RSA" 보츠와나 쪽은 ”RB")

    가끔 있다. 이 사막은 붉은 모래로 매우 특이하며 석회와 작은

    돌들이 굳어진 하얀 돌이 건축 재료로 또는 외장 마감 재료로

    쓰인다. 붉은 모래는 기념품점에서 엄지 손가락만한 작은 병에

    20랜드이(약3800원)나 길가에서 어린 부시은 작은 콜라병에

    담아 판다. 2006년에는 두 나라 간에 공동 사무실(border)을 지을

    거라고 한다. 국경을 흐르는 이 강은 100년에 두 번 정도 물이

    흐른다고 한다. 엎핑턴에서 칼라하리 공원까지 약 250km여서

    자동차 연료보충을 걱정했는데 약170km지점 ASKHAM에 주유소가

    있고 또, 공원 내에도 주유소가 있어서 오고가는데 문제가 없고

    단지 사막 먼 곳까지 여행하려면 보조 연료탱크를 충분히

    준비해야한다. 어떤 여행팀은 4륜구동 랜드로버에 20L들이

    보조연료 8통을 싣고 가는 것을 보았다.

     

    UPINGTON 박물관 앞에 주차를 한 후에 내부구경을 하고 다음 건물로

    이동하는 중에 흑인 두 명이 내차의 문을 열기위해  철사로 열심히

    쑤시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큰 소리를 질렀다. 한 팀인 듯 둘은

    망을 보고 다른 두 명은 문을 열려고 했으나 슬금슬금 도망을 친다.

    이 박물관은 오렌지 강 언덕 아름다운 곳으로 옛날엔 교회였는데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긴 의자와 강대상등이

    그대로 있고 사택과 교육관 홀도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륙으로 갈수록 영어보다는 아프리칸스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듯하며 BACKPACKER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CLARENCE”라는

    백인(미국인)은 혼자 여행을 하는데 차림새는 매우 지저분해  

    보이며 눈 부위는 선글라스 자국이 선명하게 날 정도로 볕에

    그을렸고 배낭은 비에 탈색이 된 듯 한 누르스름하여 누가 봐도

    불쌍해 보이도록 하고 다녔다. 그런데 여행계획은 남미비아,

    빅토리아 폭포, 모잠비크 등을 돌아 볼 거라고 했다. 이

    BACKPACKER 주인은 우리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휴가를 떠나

    버리고 열쇠는 앞집에 맡겼다고 한다. 열쇠를 맡은 아가씨가

    시내에 나가고 없어 우리 일행은 다른 일정을 진행하며 저녁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이 백인노인 역시 주인이 차량서비스를 해

    주어야 하는데 걱정을 하고 있었다.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데 이들은 여유를 가지고 자신들의 휴가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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