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민 원어 통해 阿 복음전파 물꼬선…
남아프리카선교회 창시자 로버트 모펫
[국민일보 2004-06-20 15:45]
남아프리카선교회(SAM)의 창시자 로버트 모펫(1795∼1883) 선교사
는, 데이비드 리빙스턴 선교사의 장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하
지만 그는 복음전파자, 성경번역가, 교육자, 외교관, 탐험가 등의
역할을 잘 조화시켜, 아프리카 선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기록돼 있다.
모펫은 스코틀랜드 오미스톤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난했기 때문
에 14세부터 정원사 기술을 배워야 했다. 1814년 그는 영국의 한
감리교 모임에 나가면서 성령세례를 체험했다. 스코틀랜드의 엄격
한 칼뱅주의에 감리교적인 열정이 접목됐다.
이듬해 그는 런던선교회 회장인 윌리엄 로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선교사로 자원했다. 런던선교회는 1795년에 설립된 초교파 선교단
체다. 선교회는 선뜻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모펫은 로비 목사의 집 근처에 일자리를 얻은 뒤, 로비 목사에게
개인적으로 신학을 공부했다. 1년 뒤 다시 런던선교회에 지원,선
교사로 허입됐다.
1819년 그는 4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85일간의 항해 끝에, 아프리
카 케냐의 케이프타운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아프리카의 문
화와 선교 실상을 깨닫게 됐다. 특히 영국과 네덜란드의 식민지 정
부 관계자들은 선교사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방
해를 감수해야 했다. 아울러 선교사들의 비도덕성과 불화에 크게
실망했다.
1819년 메리 스미스와 결혼한 뒤, 모펫 선교사는 쿠루만(Kuruman)에
선교베이스를 구축했다. 정원사 이력을 살려 그는 관개수로를 신설,
과수와 채소를 재배하고 정원을 만들었다. 베쿠아나족에게 경작과 추
수를 맡겼다. 하지만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우리 일꾼들이 도
둑질하는 노력을 농사일에 기울였다면, 대리석과 같은 땅이라도
옥토로 바꿔놓을 수 있을 텐데…” 모펫 선교사의 집은 여러 차례
털렸다.
베쿠아나족과 만타티족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수완을 발휘했지만,
복음사역의 열매는 극히 미약했다. 이는 모펫 선교사가 베쿠아나
족의 신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며, 원주민 언어를 구사하지 못
한 데 따른 것이다.
이에 모펫은 1827년부터 원주민 언어를 집중적으로 배웠다. 이어
누가복음 등 성경번역에 착수했다. 원주민 언어로 복음을 전하자,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1829년 첫번째 세례식을 거행했으며,
1838년 석조예배당을 헌당했다. 수백㎞ 떨어진 곳에서 원주민들
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찾아올 정로도 명성이 높아갔다.
53년간의 사역을 마친 모펫은 은퇴를 준비했다. 쿠루만의 원주민
사역자들과, 그의 아들인 존 모펫이 모든 사역을 떠맡았다. 대신
모펫 선교사는 영국으로 돌아온 뒤, 13년 동안 전국을 순회하면서
아프리카 선교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선교 부흥사로서의 삶을 살았
다.
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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