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리빙스턴(1813∼73년) 선교사는 ‘검은 대륙의 성자’ ‘아프리카 선교의 개척자’로 불린다. 여성 선교사학자 루스 A 터커는 그를 가리켜 “선교 역사에서 결코 빠뜨려서는 안되는 사람으로,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가 꼭 필요로 했던 영웅이었다. 아프리카 선교에 불을 댕긴 사람”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리빙스턴 선교사는 선교지도자, 탐험개척자, 박애주의자로서 가히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는 1813년 스코틀랜드 남서부 글래스고에서 남쪽으로 10㎞쯤 떨어진 블랜타이레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대대로 기독인이었다. 그는 윌버포스의 ‘실천적 기독교’라는 책을 읽지 않으려 해서 아버지에게 매를 맞기도 했다. 과학서적과 여행기를 즐겨 읽었지만, 종교서적에는 관심이 없었다.
학구열은 대단했다. 10세 때부터 방직공작에서 일했지만, 밤 8시부터 10시까지 야간학교에 다니며 열심히 공부했다. 토머스 딕 박사의 ‘종교철학’ ‘미래국가의 철학’을 읽고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
그때의 영적 변화를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이 변화는 색맹환자가 치료될 수 있다면, 그 색맹환자가 치료받을 때 겪게 될 변화와 같은 것이다. 그후 언제나 내 행실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리빙스턴은 커즈래프 박사가 쓴 중국을 위한 ‘호소문’과 ‘영국 및 미국의 교회에 고한다’를 읽고 중국선교사를 꿈꿨다. 중국선교를 위해 의학공부를 하기도 했다.
1839년 그는 런던선교회 회원이 됐다. 선교사가 되기 위한 과정에서 8차례나 낙제했다. 가까스로 선교회원이 된 뒤, 로버트 모펫 선교사를 만나면서 아프리카 선교의 비전을 갖게 됐다. 1840년 의료면허를 취득한 그는, 아프리카 대륙으로 향했다.
그는 3차례 아프리카 선교탐험을 감행, 수많은 선교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2만9000여마일을 여행하며, 탕가니카호 빅토리아폭포 등 지리학적으로도 매우 가치있는 발견을 했다. 하지만 그가 수집한 정보는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이용됐다.
그는 글래스고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옥스퍼드 대학에서 민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857년 케임브리지대에서 행한 연설은 많은 학생에게 감동을 주었다. 첫번째 저서인 ‘선교여행과 남아프리카 탐험’을 통해 노예매매의 진상을 폭로하기도 했다. 그는 아프리카인들을 존중했으며 의료선교 활성화에 기여했다.
말년에 리빙스턴 선교사는 내출혈 폐결핵으로 고통을 받았다. 1873년 5월1일 그는 기도하는 자세로 임종을 맞이했다. 아프리카인들은 이 위대한 인물을 아프리카에서 장사지낼 수 없다며, 유해를 영국으로 보냈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크롬웰 밀튼 넬슨 웰링턴 등과 함께 묻혔다.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리빙스턴선교회 등 수많은 선교단체가 세워졌다.
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