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은 GEO(2003년 12월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1871년 아프리카의 산림 속. 어느 저널리스트 한 명이 실종된 탐험가를 찾아냈다. 세계를 술렁이게 만든 이 저널리스트의 이름은 헨리 M. 스텐리. 그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일생 최고의 기사였지만, 정작 기사의 주인공인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그 모든 것을 등진 채,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자신의 목표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전설적인 나일강의 원류를 향해서 말이다.
1871년 가을, 중앙아프리카의 탕가니카 호수. 빽빽하게 둘러선 숲의 갈라진 틈 사이로 이글거리며 파고드는 정오의 햇살을 받은 호수 모습이 마치 거대한 은쟁반 같다. 호숫가에서 우지지란 도시로 향하고 있던 한 남자가, 조용히 물 위를 미끄러져 가고 있는 아랍배 한 척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낡은 양복을 입고 있는 이 남자는 유럽 사람이었다. 그의 얼굴은 25년도 넘게 아프리카의 태양 아래 검게 그을려 있었고, 주름으로 가득했다. 거의 이가 남아 있지 않아, 그의 얼굴은 마치 '하마가 웃는 것' 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가 쓰고 있는 영사관 모자는 실밥이 헤어져 나와 있고, 관직을 나타내는 휘장도 모양만 남은 채 푸르스름하게 색이 바랜 상태였다.
이 남자가 바로 탐험가이자 의사인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이었다. 그는 열두어 명 되는 원주민 짐꾼들과 함께 우지지에 도착했다. 야자수로 둘러싸인 이 번잡한 항구는, 탕가니카 호의 동쪽에 위치해 있어, 아프리카 내륙에서 오는 수많은 아랍 대상들이, 노예와 상아 등을 풀어놓고 동쪽의 해안으로 떠나기 전에 쉬어 가는 중간 정거장이었다. 그곳에서는, 아랍인들의 진흙집과 원주민들의 단촐한 움막들 사이로 짐꾼과 상인들의 부지런한 발걸음이 오가고, 그들이 풀어놓은 동물들이 부산하게 돌아다녀 생생한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리빙스턴에게 있어서 우지지는 희망을 의미하는 곳이었다. 5년 전부터 그가 원시림과 중앙아프리카의 사바나를 헤쳐가며 고생을 한 것은, 두 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그 중 하나는 나일강의 전설적인 원류를 찾아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혼자의 힘으로 아랍의 노예장사를 근절시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사람으로서 견디기 힘든, 거의 초인적인 고생을 했어도 그의 목적들은 어느 것도 이렇다할 진척을 이뤄내지 못한 상태였다.
우지지에서 리빙스턴은 급한 물자들을 조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한 그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3년 전 잔지바르에 있는 영국 영사관에 요청한 물품들이, 그 때쯤이면 우지지에 도착해 있어야 할 물건들 중 약품, 커피, 차, 밀가루, 옷가지 그리고 무기와 탄약 등은 아랍 상인 몇몇이 일찌감치 빼돌린 상태였던 것이다. 리빙스턴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상심한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이 장사꾼들은 모두 성공적이기만 한데, 나 혼자서만 실패자다."
우지지와 잔지바르 사이에는 대략 1100킬로미터에 달하는 원시림과 사막지대가 자리하고 있다. 그곳은 분노한 원주민들, 그 중에서도 힘있는 부족들이 노예 장사꾼들과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는 지역이다. 병들고 이제는 가진 것도 없는 리빙스턴에게, 이 지역은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곳이었다. 그는 우지지에 발이 묶인 채, 더 이상 빠져 나올 수 없는 거대한 늪에 빠진 듯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이때, 리빙스턴에게는 운명의 대전환이 일어난다. 그가 우지지에 도착한 이틀 뒤, 어느 백인 남자가 동쪽에서부터 마을들을 거쳐 오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에 전해진 것이다. 리빙스턴은 바로 이 남자가 훗날 자신의 명성을 널리 알릴 사람이라는 것을, 이때는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더 지난 어느 날, 멀리서 총소리가 들려와 외지인들이 우지지로 다가오고 있음을 알렸다. 리빙스턴의 일기에는 이 날이 1871년 10월 28일로 적혀있으나, 이때는 아마도 11월 초 아니면 중순이었을 것이다. 몇 해 동안 앓았던 심한 열병 때문에, 리빙스턴은 1~2주 정도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인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우지지 전체에 퍼지자, 호기심에 찬 아랍인들과 원주민들은 리빙스턴이 거처로 삼고 있는 움막 앞에 모여들었다. 그런데도 정작 리빙스턴은 그 소식을 애써 무시하며 들은 척만 했다. 그때 그가 가장 믿는 하인 중 하나인 수시가 뛰어 들어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소리를 질렀다. "영국인입니다! 제 눈으로 보았어요!"
밖으로 나온 리빙스턴은, 빨간 옷을 입고 머리에 터번을 두른 45명의 짐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봤던 대상들 중 가장 부유한 축에 속했다. 총들로 무장한 남자들이 운반해 온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보급품이 아니었다. 짐꾼들은 커다란 솥, 분해된 보트, 말안장과 거대한 텐트, 검은 색 곰 가죽, 페르시아 산 양탄자에, 심지어 주석으로 만들어진 욕조까지 짊어지고 있었다. 한 사람 당 짊어진 짐이 족히 30킬로그램은 되어 보였다.
리빙스턴은 우지지로 오는 백인이 영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대열의 선두에 선 아프리카 남자가, 높이 치켜들고 있는 것은 여러 개의 별과, 줄이 그려져 있는 커다란 깃발이었던 것이다. 그 무리의 한가운데에서, 작은 체구에 정성껏 다듬은 수염이 있는 젊은 백인이 앞으로 나서서 리빙스턴 곁으로 다가왔다. 이 낯선 젊은이는 마치 런던 한복판의 신사들이 중절모를 들어올리며 인사하듯, 열대에서 쓰는 모자를 들어올리며 평범하지만 침착하게 인사말을 건네었다.
"제 추측이 맞는다면, 리빙스턴 박사님이시지요?"
사라진 센세이션을 찾아서
우스꽝스럽지만, 동시에 19세기 가장 위대한 특종 기사거리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만남은, 사실 그보다 2년 앞서 이미 준비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1869년 10월 17일, 파리 그랜드 호텔의 어느 방에서였다. 국제 뉴스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스캔들, 폭로 기사들까지도 다루던 <<뉴욕 헤럴드>>의 발행인 제임스 고든 베넷은, 자신이 즐겨 머물던 파리에서 전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킬 특종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기사 거리란, 바로 아프리카에서 실종된 리빙스턴 찾아내기. 그는 이 일의 적임자로 <<뉴욕 헤럴드>>의 특파원, 헨리 모턴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라는 기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리빙스턴의 유명세는 한 때 빛났으나, 그 당시에 이르러서는 이미 녹이 슨 상태였다. 1813년에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이 탐험가는 선교사이자 동시에 의사였고, 1854년에서 1856년 사이 오늘날 앙골라의 수도인 루안다에서부터 모잠비크의 킬리마네까지의 탐험에 성공하여, 검은 대륙 아프리카 최초의 횡단이란 기록을 세웠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고향사람들은 열광하며 크게 잔치를 벌였고, 그의 여행기는 당대 가장 성공적인 베스트셀러로 꼽혔다. 그의 책에는 사실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 대목들도 있었지만, 독자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선교를 위해 아프리카로 뛰어든 리빙스턴이었지만, 1차 탐험의 성공 이후 영국정부는 그를 킬리마네의 영사로 임명하여 동아프리카 지역에 원정을 보냈다. 덕분에 몇 해 뒤 출발한 리빙스턴의 2차 탐험대는 규모가 크고 재정적으로도 풍족했으며, 여러 명의 탐험가들과 선교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극성을 부리는 말라리아와 원주민들끼리의 전쟁, 그리고 우기까지 겹쳐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실패는 괴팍하고 고집불통인 리빙스턴의 성격 탓이기도 했다. 리빙스턴은 큰 규모의 탐험대를 이끄는 인솔자로서는, 전혀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1865년 시작된 3차 탐험의 목적은 나일강의 원류를 찾는 것이었는데, 리빙스턴은 그 당시 발견된지 얼마 되지 않은 빅토리아 호수의 남서쪽에 그 원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때의 상황은 그가 맨 처음 탐험을 떠났던 십 년 전과 비슷한 조건이었다. 탐험대에서 리빙스턴은 유일한 백인이었고, 짐꾼들과 장비를 위해 쓸 돈은 조금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 이 탐험가가 실종되었으며,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영국에 퍼졌다. 언론에서는 이를 단신으로 처리해버렸고, 이후 더 이상 리빙스턴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뉴욕 헤럴드>>의 공동대표이기도 했던 베넷은, 바로 그날 저녁 늦은 시간 자신의 전부를 건 도박을 시작했다. 베넷이 보낸 전보를 받고 헨리 모턴 스탠리가 그의 방을 찾아왔던 것이다. 스탠리는 1868년 영국의 에디오피아 침략을 취재할 당시, 다른 경쟁자들을 모두 제치고 2주일이나 먼저 기사를 썼던 인물이었다. 그는 베넷이 생각하기에, 중앙 아프리카의 내륙을 뚫고 들어갔다가 다시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당신 생각에 리빙스턴이 어디에 있을 것 같소?" 베넷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갔다. 스탠리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저는 정말이지 모릅니다." "그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럴 수도 있지만,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베넷은 그 정도로 만족했다.
그래서 실종자를 찾기 위해 28살의 젊은 기자를 보내면서, 그 목숨을 건 탐험의 비용으로 막대한 재산을 내놓았다. 이 탐험은 정복이나 포교 또는 약탈이나 단순한 모험심이 아닌, 순전히 센세이셔널한 특종만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야말로 정보 사회로의 돌입을 상징하는 이정표였던 셈이다.
1871년 봄, 마침내 스탠리가 잔지바르에서 내륙을 향해 길을 나섰을 때, 베넷이 그때까지 탐험에 투자한 돈만 4,000파운드였다. 오늘날의 물가로 환산하면 3억원 이상에 해당하는 엄청난 취재비였다. 그 덕분에 무려 192명의 짐꾼들이 총 6톤 분량의 물자들과 장비들을 짊어지고 잔지바르를 출발했다. 이 정도 규모는 그때까지의 아프리카 탐험대 중에서 대규모에 속했지만, 말라리아로 죽고 또 도망가는 짐꾼들도 많아 우지지에 이르렀을 때에는 처음의 1/4로 줄어들어 있었다.
스탠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끈질긴 성격의 인솔자였고, 일행을 신속하게 이동시켰다. 그는 또 걸음이 더딘 짐꾼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채찍을 휘둘러댈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채찍은 짐꾼들의 등을 때리기에 안성맞춤이어서, 그들을 건강한 짐꾼으로 만들고 때로는 과도한 일도 할 수 있게 만든다." 탐험대를 통솔하는 그의 모습은, 기자라기보다도 소수의 정예들만 이끌고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러 나섰던 스페인 정복자들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그는 리빙스턴이 3차 탐험으로 택했던 루트를 따라, 내륙 한 가운데로 계속해서 들어갔다. 마을이나 대상들을 만날 때에는 리빙스턴의 행방을 수소문했는데, 덕분에 스탠리는 아랍 사람들은 물론이요, 원주민들 사이에서도 곧 유명해져 버렸다. 다만 그것은 존경 어린 유명세라기보다는 경멸 어린 것이었다.
어쨌거나 리빙스턴의 행방을 추측 가능케 하는 단서를 따라, 스탠리는 우지지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방향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이 머릿속을 내내 맴돌았다. 사실 그보다 더 심한 걱정거리는, 사람 사귀는 걸 기피하며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라는 리빙스턴이, 자신에 대한 소문을 듣고 숨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또 리빙스턴이 센세이션만을 �는 기자인 자신을 만나게 되었을 때, 적대감을 갖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도 안고 있었다.
그런데 스탠리의 이런 걱정은 공연한 것이었다. 탐험에 대해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던 리빙스턴에게 ,스탠리의 보급품들은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스탠리의 짐꾼들이 짐을 내리는 동안, 두 남자는 리빙스턴의 움막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고향으로부터 온 편지들과 함께, 5년이 넘는 동안의 세상 소식들이 리빙스턴 앞에 쏟아졌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이며 수에즈 운하의 개통소식도 그제야 처음 접한 것이었다.
다음 며칠 동안 아랍사람들과 원주민들은, 두 백인이 몇 시간씩 움막 안에서 페르시아 양탄자와 곰 가죽을 깔고 앉아서 차를 마시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또 오래도록 함께 산책하기도 했는데, 언제나 활발한 대화가 끊이지 않았고, 그때마다 손짓을 써가며 성급하게 이야기하는 쪽은 대개 리빙스턴 쪽이었다.
모든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비극적인 '재주'를 가진 리빙스턴이었지만. 교양이나 종교적 신념도 없고 짐꾼들에게 잔혹하며 무모하게 덤비는 성격의 이 젊은 미국 기자에게만은, 이상하게도 대단한 호감을 느꼈다. 빅토리아 여왕은 후에 스탠리를 두고 "단호하지만 키 작고 추한 남자"라고 말할 정도였지만, 리빙스턴에게는 마치 아들처럼 여겨졌다.
스탠리 역시 감동을 받았다. 어쩌면 이러한 서로간의 호감은, 두 남자 모두 힘든 어린 시절의 악몽을 이겨내고 자라야만 했던 경험과도 결부될 수 있을지 모른다. 리빙스턴은 열 살 때부터 면사방직 공장에서 하루 12시간 반, 주당 6일의 고역을 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야간 학교에 다녔고, 끈질기고 집요한 노력으로 마침내 대학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1841년 웨일즈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스탠리도, 5살에 이미 작업장에서 혹독하게 일을 해야 했다. 17살이 되어 스탠리는 미국으로 도망쳤고, 남북전쟁의 와중에 행운과 나름의 재주를 통해 신문보도와 관련한 공을 세워 미국인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닮은 과거가 아니라면, 두 사람이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서로간에 느끼게 된 고마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뜻밖에 찾아온 도움이 리빙스턴에게는 다시 한번 평생의 숙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주었다. 한편 스탠리에게 있어서 리빙스턴과 함께 한 시간들은 그의 경력에 있어서 결정적이었고, 게다가 소문과는 달리 리빙스턴이 그를 무뚝뚝하게 대하거나 배격하지도 않았고, 도리어 지나칠 정도로 상냥했던 것이다.
리빙스턴은 스탠리의 요청으로 온 힘을 기울여 아프리카에서 겪은 많은 경험들을 기록했다. 그 중에는 아랍 노예상이 원주민들에게 가한 잔인무도한 대량학살에 대한 목격담도 들어 있었다. 그야말로 사람을 사고 파는 일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이었다. "인간으로서는 더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마음은 천사와도 같았다," 감격한 어조로 스탠리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때론 그와 온갖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지만, 훗날 기사에서 스탠리는 리빙스턴의 편협함과 고집스러움 그리고 심한 복수심 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많은 노력과 비용을 들여 아프리카 내륙까지 들어온 것이, 고작 잔소리 심한 노인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게 무슨 스토리가 될 수 있겠는가? 대신 혈혈단신으로 아랍인 노예상들이며 호전적인 원주민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는, 성인과 비견될 만한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기사가 될 터였다.
게다가 평소 냉소적인 성격의 스탠리도, 실종된 리빙스턴을 찾는 일을 시간이 지날수록 신비한 임무, 그러니까 '순례'와 같은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이는 동시에 자신을 순례자로 미화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순례를 하는 사람은 힘든 고생을 치르더라도, 그 순례의 끝에서 이상적인 인물을 만나길 원한다. 세속적인 단점이며 흠이 전혀 없는 그런 완전한 인물을...
스탠리가 도착하고 나서 약 1주일 동안, 두 사람은 탕가니카 호수의 북쪽 기슭으로 탐험길에 나섰다. 이들은 커다란 통나무배를 타고 호숫가에서 가까운 물길을 따라 점차 북쪽으로 몰아갔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들은 1871년 12월 초 호수의 북쪽 기슭에 닿았다. 그곳에서 호수로 흘러드는 물줄기는 있으나 반대로 흘러나가는 물은 없음을 확인하고, 탕가니카 호수가 보다 북측에 위치한 알베르토 호나 빅토리아 호와 직접 연결되지 않았음을 밝혀냈다.
떠난 지 거의 한 달만에 그들은 다시 우지지로 돌아왔고, 리빙스턴에게 있어서 이번 탐험은 그야말로 소풍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스탠리에게는 이 탐험이 무척 힘들었고, 게다가 폭력적으로 공격해올 듯한 원주민들과 마주치는 일도 적지 않아서 대단히 극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또 탐험 도중 스탠리는 말라리아에 걸려 고생을 하는가하면, 리빙스턴이 쉴 새 없는 설사에 시달리는 모습마저 지켜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스탠리는 몇 주일 뒤 함께 영국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리빙스턴이 받아들이지 않자 당혹감 마저 들었다. 스탠리는 마침내 자기 일생일대의 스토리를 마무리지어 영국으로 보낸 상태였고, 장본인인 리빙스턴과 함께 돌아간다면 기사의 효과는 극대화될 것이었다. 그는 이 고집스러운 영국인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을 하면서, 고향에서 푹 쉬며 힘을 회복한 다음에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오자고 말했다.
그렇지만 리빙스턴은 승리자로서 금의환향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예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없는 동안에 그가 개척해 놓은 길을 따라 누군가가 나일강의 근원을 찾아내어 그의 명예를 가로채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불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 스탠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짐꾼들에게 새로운 보급품을 실어보내겠다는 약속뿐이었다. 리빙스턴은 스탠리에게 열 두어 통의 편지들과, 다섯 겹으로 봉하고 또 봉한 일지, 지금까지 거쳤던 탐험의 경로와 지극히 사적인 것까지 포함한 기록들도 함께 보냈다. 그 동안 리빙스턴은 손으로 기록한 메모들과 지도들을 상자에 담아, 함께 가지고 다녔던 것이다.
이별의 순간 두 사람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스탠리는 이 마지막 순간을 영원히 기억에 남기고자 리빙스턴의 얼굴 표정 세세한 부분까지 찬찬히 되새겼다. 그러나 그는 이 영국인을 다시는 못 보게 되리라 예감했다. 1872년 3월 14일의 일이었다.
나일강, 그 집착의 원류
나일강의 근원은, 지리학적으로 가장 거대한 수수께끼 중 하나였다. 이를 둘러싼 의문들은 1858년 존 스피크가 빅토리아호를 발견한 뒤, 여기서 나일강의 근원을 찾아냈노라 주장하면서 풀려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할 길이 없었고, 이에 대한 진실은 결국 훗날 탐험가가 된 스탠리가 19년 뒤에야 밝혀낼 수 있었다. 리빙스턴을 '발견'하여 크게 성공한 그는, 다시금 언론사들의 후원으로 아프리카로 돌아가 여러 탐험가들의 실패를 발판 삼아 여러 가지 활약을 펼치게 된다.
한편 리빙스턴은 나일강의 근원이 어딘가 다른 곳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의 세 번째 탐험 도중에 원주민들이 이야기했던 방웨울루 호수 근처일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것은, 그가 중앙아프리카에 있는 거대한 물줄기인 루알라바에서 나일강을 보았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콩고강의 상류였다.
1870년 7월 그는 두 다리가 곪아, 어느 작은 마을에서 여러 달 동안 머물러야 했다. 그때 그는 그곳을 지나가던 아랍 대상들로부터, 네 개의 물줄기 뿌리가 방웨울루 호수 남쪽 어딘가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었다. 그 물줄기로부터 커다란 강줄기들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출발하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했으나, 열과 통증, 과다한 출혈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리빙스턴은, 그 소문에 자기 이론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그는 성경을 네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고, 출애굽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읽었다. 모세는 이집트 남쪽 어딘가에 살았던 게 분명했다. 모세의 도시가 혹시 이 근처가 아니었을까하는 의문은, 처음에는 반 농담 삼아 '백일몽'이라고 스스로도 치부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것은 '성스러운 모세의 땅을 증명하겠다는' 종교적인 강박관념으로 굳어져갔다.
그후 그는 네 개의 원천에 대한 헤로도투스의 보고를 기억해냈다. 이 그리스의 역사 서술가가 기원전 5세기경에 기록한 한 전설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내륙 어느 곳에 끝도 없이 깊은 네 개의 물구멍이 있는데, 그 중 두개는 남쪽으로 흐르고, 나머지 둘은 북쪽으로 흐르는 것이 바로 나일강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병이 깊어진 리빙스턴은, 이 새로운 이론에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강하게 집착했다. 말하자면 그의 이론은 루알라바가 실제로 나일강이며, 헤로도투스가 말한 네 개의 전설적인 근원으로부터 물이 공급된다는 것이었다. 깊이 도취해 있던 자신의 이론을, 리빙스턴은 스탠리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중앙 아프리카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스탠리는 애초 성서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헤로도투스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었으며, 지리학에 대해서도 그때까지는 아무 흥미가 없었다. 그런 처지에 새로 사귄 소중한 친구가 성서며 고대의 전설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해서, 이렇다 할 반박의 여지도 없었지만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스탠리가 리빙스턴에게 제대로 장비를 갖춘 짐꾼들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은, 병에 시달리고 있는 이 영국인이 전대미문의 일을 벌이려 하나보다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즉 중앙 아프리카 남쪽의 방웨울루로부터 루알라바, 혹은 나일강까지 검은 대륙을 가르는, 아프리카 종단이라는 대탐험을 하려나 보다고 추측했던 것이다.
스탠리가 떠나고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리빙스턴은 쉰 아홉 번째 생일을 맞았다. 이날 그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3월 19일 - 생일. 나의 왕이요 생명이며 저의 모든 것인 예수님. 이제 다시금 온전히 저를 바치겠나이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제 기도를 들어주시어, 이 해가 가기 전에 제 임무를 끝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얼마 후 그에게로 파견될 예정이었던 영국 탐험대가, 스탠리의 배신으로 인해 취소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9일, 탐험대 취소로 인한 리빙스턴의 모든 언짢은 생각들은 단숨에 사라질 수 있었다. 마침내 약속대로 스탠리의 보급대가 도착한 것이다. 2년 동안의 임금을 선불로 받은
56명은, 저마다 총을 가지고있었고 장비들도 훌륭했다. 특히 화약과 탄약, 밀가루와 설탕, 커피와 차, 장기 저장식품, 신형 나침반, 그리고 리빙스턴의 일지를 실은 새로운 잡지와 의약품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껏 리빙스턴도 이처럼 장비를 제대로 갖춘 탐험대와 함께 해본 적이 없었다.
1872년 8월 25일 리빙스턴은 다시금 힘차게 길을 나섰다. 짐꾼들의 인솔자들이 소리쳤다. "길 떠난다. 오늘 떠날 준비를 하라!" 조금은 피곤한 듯 구부정한 자세로 앞서는 영국인 탐험가의 뒤를 그의 가장 충직한 하인들인 제임스 추마와 압둘라 수시가 따랐다.
9월과 10월에 걸쳐 그들은 탕가니카 호수 남동쪽에, 경사지고 험한 아예 길도 나지 않은 지역을 헤매고 다녔다. 억세고 키가 큰 풀과 가시넝쿨이 있는 평지에, 엄청난 크기의 바오밥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리고 타마린드나무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었다. 태양은 사바나의 땅바닥을 너무나 뜨겁게 달궈, 심지어 맨발의 짐꾼들 중에는 화상을 입는 이들도 있었다.
이 엄청난 더위에 말라리아와 설사가 더해져, 리빙스턴의 몸은 더욱 쇠약해졌다. 11월 9일. 그는 항문 출혈 증세가 도진 것을 확인했다. 오래 된 그의 고질병이었다. 그때부터 피를 흘리지 않고 보내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몸은 말이 아닐 정도로 엉망이었지만, 그의 이론에 대한 신념만은 흔들림 없는 날들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의 탐험대는 탕가니카 호수와 방웨울루 호수 사이의 지점에서 우기를 만나게 되었다.
추적추적 보슬비가 내리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순식간에 집중호우가 쏟아지곤 했다. 또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시간이 몇 시간쯤 지나면, 이글거리는 열대의 태양으로 수증기가 차오르기도 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모기와 체체파리가 극성을 부렸다. 탐험대를 더욱 지치게 만드는 것은, 어디를 보아도 똑같은 경치였다. 마치 사방천지가 끝없이 펼쳐진 늪으로 변해버린 것처럼 보였다. 여기 저기 웅덩이들이며 급 물살의 여울 그리고 거대한 호수와 도도한 강물 등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사실 당시 그가 향한 방향은 큰 오차의 결과물이었다. 1872년 12월 리빙스턴은 그 지역 출신의 남자 하나를 안내인 삼아 방웨울루 호수 북서쪽 기슭을 향하고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계속해서 남서쪽 방향으로 가기만 하면 네 개의 원천이 있다는 그 지역에 이르리라는 게 그의 계산이었다.
그렇지만 리빙스턴은 그 원주민을 곧 쫓아 버리고 말았다. 원주민의 생각으로는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이 호수의 동쪽 기슭이었던 것이다. 리빙스턴을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그저 끝도 없이 똑같게 보이는 수렁 때문만은 아니었다. 안내인이 말한 내용들은 그가 1868년 처음 방웨울루 호를 방문했을 때, 그 리고 그 당시 약식으로나마 그려두었던 지도들과 어긋났다. 그는 자기 발로 남동쪽 방향으로 크게 원을 그리면서 그 호수를 빗겨갈 작정이었지만, 곧 일행은 폭이 200킬로미터가 넘는 늪지대로 접어들고 말았다. 그렇지만 언제나처럼 고집스럽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리빙스턴은, 자기가 실수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다. 사실은 이미 1867년 초, 그러니까 그의 세 번째 탐험이 시작될 때, 그의 나침반을 나르던 짐꾼이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리빙스턴은 그 정교한 기구를 새로 조절해 맞추어야만 했었다. 그렇지만 아프리카 대륙의 한 복판에서 그 조정은 세밀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 연유로 그때부터 위치를 잡을 때, 그는 어느 지점에서나 동쪽으로 약 30킬로미터 정도 치우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6개월 후, 가벼운 지진이 그 계기에 영향을 주어 다시 재조정해야 했다. 그때부터 리빙스턴의 위치계산은, 서쪽으로 80킬로미터 정도 치우치게 되었다. 따라서 방웨울루 호수 주변을 그린 그의 지도에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100킬로미터 이상의 호숫가 지역이 그려져 있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 그 지역을 방문하는 동안, 그가 그렸던 것 중 특히 부정확했던 것은 바로 호수의 너비였다. 그는 그 너비가 240킬로미터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는데, 실제로는 40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고, 거기에 늪지대가 조금 더 연장되어 있는 정도였다. 리빙스턴은 이후 스탠리가 보낸 새로운 나침반으로 다시 위치 설정 작업을 벌였지만, 그는 그 결과를 믿지 않았다. 실제로는 정확한 그 관찰결과가, 그 동안 그가 옳다고 생각해온 자료들과 맞아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리빙스턴 일행이 애초 있던 곳은 호수의 북서쪽 기슭이었으나, 틀린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힌 채 리빙스턴은 대원들에게 방향을 돌리게 하여, 동쪽으로 이어진 길을 가도록 했던 것이다. 그 뒤 몇 달 동안,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마른 옷을 걸쳐볼 수 없었다. 늪이 깊어 물이 입까지 닿는 곳도 많았다. 그럴 때면 생필품과 무기들을 머리 위로 치켜올려 들고 갔다. 지나기 힘든 곳이 나타날 때마다, 수시와 추마 또는 대원들 중 어느 하나가 리빙스턴을 어깨 위에 태우고 가야만 했다. 그 사이 리빙스턴은 제 발로 그런 곳을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혹 어느 누가 발을 헛디뎌 코끼리가 밟고 지나간 곳에 빠지기라도 하면, 혼자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하루 종일 이동하는 거리는 겨우 2 킬로미터 반 정도에 불과했다.
늪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손가락 두께의 거머리들이 수렁 속에 도사리고 있어, 저녁마다 대원들은 몸에 붙어 피를 빨고 있는 놈들을 10여 마리씩 떼어내야만 했다. 리빙스턴은 축축한 야전침대에 누워 자다가, 붉은 개미군단의 습격을 받아 온몸이 부어오르는 일도 있었다. 아무리 그가 태연하고 강인한 모습을 내비치고 있어도, 출혈에 내장과 등허리의 심한 통증까지 겹쳐, 그는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갔다. 비단, 몸만 지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고통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의 무기력증과 방향 상실은 그만큼 더 심각해져갔고, 역설적으로 나일강의 기원을 밝힐 날이 머지 않았다는 그의 믿음은 더욱 강해져갔다.
"영광스럽게도 각하에게 보고 드립니다. 마침내 _월 _일에 각기 큰 강물들의 기원이 되는 원천들을 발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영국의 외무부 장관에게 보낼 편지 초안을 이렇게 써놓고 있었다. 날짜와 정확한 위치만 써놓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이 편지는 끝내 보내지 못했다.
화려한 영웅의 초라한 최후
1873년 4월 중순이 되어서야, 탐험대는 겨우 늪지대의 가장 힘든 지점을 벗어났다. 그렇긴 해도, 리빙스턴은 이제 체력이 거의 완전히 고갈된 상태였다. 나중에 확인되었지만, 그의 내장에는 어른 주먹만한 크기로 피가 뭉쳐 응고되어 있었다. 이제 그는 짐꾼들의 어깨 위에 앉아 가야만 했고, 나중에는 들것에 실려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걷지도 못할 만큼 쇠약해진 상태에서도, 여전히 닳아 해진 영사관 모자를 마치 추장의 상징이라도 되는 듯 쓰고 있는 이 남자를, 짐꾼들이 어떤 식으로 바라봤는지에 대해서는 오늘날 알 도리가 없다. 분명한 것은, 무슨 까닭에 그 먼 고향을 떠나서, 고작 강의 근원을 찾아낸다고 자기 스스로, 그리고 대원들까지 고생시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죽어 가는 리빙스턴은, 혈기왕성하던 그 어느 때보다도 대원들의 기강을 오히려 더 확고하게 장악했다. 달아난 짐꾼도 거의 없었으며, 반란을 꾀하거나 물건을 훔치는 경우는 한 건도 없었던 것이다. 마치 그들 모두 아무도 벗어날 생각조차 할수 없는 어떤 마술의 힘에 빠지기라도 한 듯했다.
"낙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런 탐험이었다." 4월 19일 리빙스턴은 그렇게 기록했다. 그 사이 그는 더욱더 쇠약해져서 씁쓸한 내용의 이런 글을 쓰기 위해, 연필조차 들고 있기 힘이 들 정도였다. 6일 뒤 이들은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리빙스턴은 마을의 남자들 몇을 모이게 해서, 결정적인 질문을 던졌다. 네 개의 원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서쪽으로 며칠정도만 더 가면 되는가? 고통을 이겨내며 간신히 던진 이 질문들에, 그 남자들은 고개를 저었다. 리빙스턴은 절망했다. 방웨울루 호수 남서쪽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헤로도투스가 기록했던 전설이, 잘못된 것임을 처음으로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에게 닥친 그 모든 고통들이 모조리 쓸모가 없는 것이 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4월 27일. 그는 힘을 모아 간신히 다음과 같은 메모를 하였다. "27일. 기력이 거의 다 해서 머물러 있다. 쉬고 있다. 염소젖을 사오라고 보냈다. 우리가 있는 곳은 모리아모 강의 기슭이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기록이었다.
리빙스턴은 물이나 죽 외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삼키지 못했고, 들것에 타기 위해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몇 걸음 옮기는 것조차 힘들어 할 정도로 쇠약해졌다. 그런데도 그는 한사코 계속 가기를 고집했다. 결국 수시와 추마가 움막을 헐어내어, 리빙스턴의 침상에 직접 들것을 가져다 대었다. 마치 값진 물건을 들어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은 자기들의 우두머리를 들어올렸다.
한 발짝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리고 흔들릴 때마다, 죽어 가는 그에게는 가늠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고, 잠시 통증이 물러난 동안에는 의식을 잃어버리곤 하였다. 4월 29일 충성스런 그의 대원들은, 그를 이라라라는 마을로 옮겨서 거기서 움막을 세웠다.
1873년 4월의 마지막 날, 리빙스턴은 누워있었다. 몇 시간 동안 그는 오락가락하며 의식이 불분명한 상태였다. 그저 이따금씩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나곤 할뿐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리빙스턴은 루아풀라 강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아야겠다고 고집했다. "사흘 걸음입니다." 그를 지켜보던 대원이 대답했다.
저녁이 되자 리빙스턴은 시중을 들던 수시를 움막 밖으로 내몰았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젊은 짐꾼 중 한 명이 환자의 침상을 지키기 위해 움막 안에 남아있었지만, 그 또한 곧 잠들고 말았다. 그로부터 얼마 있지 않아서, 리빙스턴은 마지막 힘을 다해 움직이려고 했다. 아마도 기도를 하기 위해서였으리라. 혹은 침대에서 죽음에 꺾이는 것이 싫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마지막 순간을 맞아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깨자마자, 그 짐꾼은 허둥지둥 수시와 추마에게 달려왔다. 그들이 달려가자, 침상 옆에 떨어져 무릎을 꿇은 채로 죽어 있는 리빙스턴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기도에 몰두해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뒤로 며칠 동안 수시와 추마는 마을 사람들에게 리빙스턴의 죽음을 숨겼다. 원주민들이 죽은 시체에 대한 미신적인 두려움을 가지고있다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수시는 단호히 그의 시신을 영국으로 옮겨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충복들은 다른 사람들의 움막에서 떨어져 있는 곳에 부분적으로 지붕이 트인 임시 움막 하나를 세웠다.
이들은 서둘러 죽은 시신의 내장들을 끄집어내어 땅에 묻었다. 시신은 소금에 재고 임시 움막 안에 두어 햇빛에 말렸다. 우기가 끝나자 리빙스턴의 충복들은 시신을 매일 조금씩 돌려서 2주일 후 완전히 건조시킬 수 있었다. 얼굴은 브랜디로 씻기고 시신은 타르를 바른 범포에 싸서 꿰매었다. 리빙스턴의 짐꾼들은 죽은 시신을 해안까지 들고 왔고, 거기서 영국 선박에 넘겨주었다.
이 탐험가의 시신은 영국으로 돌아와, 화려한 장례식과 함께 웨스트민스터에 매장되었다. 리빙스턴은 이미 오래 전부터 탐험가의 상징이요, 인도주의의 표상이 되어 있었다. 특히 리빙스턴이 죽기 9개월 전에 발행된 스탠리의 기사들은, 그 이전에 나온 어떤 신문기사들보다 훨씬 더 큰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기사들은 미국의 신문뿐 아니라, 전 유럽의 신문들에 실렸다.
베넷은 모든 것을 건 도박에서 이긴 셈이었다. 실종되었던 선교사였고 나일강의 원류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푼 영웅이요, 비록 때때로 노예를 거래하는 대상들과 함께 여행하기는 했지만, 굳은 의지로 사람을 사고 파는 노예장사에 맞서 싸운 그런 영웅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외로운 죽음으로부터 2년이 지난 뒤, 리빙스턴은 빅토리아 왕조시대의 이상형으로 자리를 잡았다. 꺾이지 않는 의지로,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고 혼자 힘으로 영국을 위해 아프리카 전체를 개척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로서는 검은 아프리카의 내륙에 기독교의 빛을 전한 인물이 되었다.
그의 기록들과 더불어, 이제 그 자신도 저명한 탐험가가 된 스탠리의 기록들은, 끝을 알 수 없이 다양한 아프리카 자연의 풍요를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들은 다른 많은 선교사들처럼 아프리카 사람들을 잔인한 야만인이라거나 원시적이고 구원을 필요로 하는 그런 가련한 사람들로 그리는 일이 없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정신은, 독일 사람들보다 더 철학적이다."라고 리빙스턴은 쓰고 있다.
그렇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이 영국인은 검은 대륙 아프리카가 반드시 기독교화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아프리카 내륙 한복판에 커다란 영국의 식민지를 세움으로써, 그런 기독교화가 가능하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훗날 많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 식민지화를 '백인의 책임'이라며 도덕적 의무감과 결부시키려고 끌어들인 것이 바로 리빙스턴이었던 것이다.
사실 영국 사람들이 아프리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은,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리빙스턴의 감격과 열광이 널리 알려지고 나서의 일이었다. 아울러 리빙스턴의 기록과 보고에 대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열띤 토론이 없었더라면, 그 뒤 수십 년 안에 우간다, 탕가니카, 케냐, 로디지아(짐바브웨) 및 그밖에 다른 지역들을 런던이 반환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영국제국의 관심을 중앙아프리카로 이끌었던 것은, 다름 아닌 리빙스턴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또 하나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리빙스턴이 노예제도 반대자들에게 엄청난 힘을 실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반대자들은 벌써 몇십 년 전부터 런던에 대해 동아프리카에서의 인신매매를 중단시키라고 촉구했다. 1865년까지만 해도 잔지바르에서는 2만 명의 사람들이 시장에 팔려나갔었다. 리빙스턴의 보고를 통해 일반대중들의 분노가 커져갔고, 마침내 행정당국은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873년 영국은 잔지바르의 술탄에게 군사적 압력을 넣어, 사람을 사고 파는 악덕 행위를 종식시켰다.
이 모든 것이, 방향을 잃은 채로 헤로도토스의 나일강의 원류가 아예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에 빠져, 방웨울루 호수 남쪽 지역에서 죽어가던 리빙스턴으로서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던 그런 일들이었다. 오히려 그는 그 자신이 실패자로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다만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사회 전반에 미친 그의 엄청난 영향력은, 그의 실제 모습 혹은 그가 이룩한 업적에서 비롯 되었다기보다는, 어쩌면 스탠리와 그밖에 다른 이들이 그로부터 만들어낸 결과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몸을 혹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앞으로만 나아갔던 리빙스턴의 정열은, 결국 타인의 손에 의해서 완성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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