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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선교사 (2)

영국신사77 2007. 1. 9. 00:39
   

 

 

 

 

 

        -「하나님께 목숨 건 사람들」/ 헤럴드 살라 -  

                                                            

 

                             데이빗 리빙스턴

 

 

                                                                                                kdh50176027  (2005-05-13)

      '아프리카를 사랑한 개척 선교의 시조'   데이빗 리빙스턴


  데이빗 리빙스턴은 일반인들에게 지리학자요 탐험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선교에 헌신한 선교사였고,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의학과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 1855년 11월 15일, 리빙스턴이 처음 발견한 "빅토리아 폭포"

 그는 스코들랜드의 불란타이어에서 1813년 3월 19일, 낮은 신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고 매우 가난했다. 그는 디크의 '종교철학과 미래국가의 철학'이란 책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됐다.

  데이빗 리빙스턴은 자기 직업의 장래성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방직공장에서 방직공이 되어, 어느 정도 많은 돈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중국에 의료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말에 마음이 끌렸다. 그는 자신이 할 일은 그러한 일이라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이런 목표를 마음에 품고서, 그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글래스고에 있는 앤더슨 대학에 들어갔다. 의학공부를 시작하면서, 한편으로 그는 런던 선교회에도 지원을 신청해 놓았다. 그는 수습생으로 받아들여져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등을 배울 수 있었다.

  1840년 27세 때 리빙스턴은 의학공부를 마치고, 핀스베리의 알빈 교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그 때는 이미 영국과 중국 사이에 아편전쟁이 발발해 있었고, 런던선교회는 전쟁이 끝나기까지는 더 이상 선교사를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스도를 만난 열정은 곧 다른 영혼의 구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버트 모펫 만난 것을 계기로, 남아프리카를 위한 선교사로 헌신하게 됐다.

  리빙스턴은 12월 조오지호에 승선해 남 아프리카를 향해 떠났다. 리빙스턴은 세츠와나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자신의 선교를 시작하기에 적합한 곳을 찾기 위해 곧 케이크를 떠났다. 그는 북쪽으로 길을 떠나 쿠루만과 츠와나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쿠루만을 건설한 로버트 모펫은 20년 동안 선교에 힘써왔다.

  도착한 리빙스턴은 인구가 많고, 회심자가 많은 번영하는 마을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실망하고 말았다.
그 땅은 거의 황무지였으며, 한발의 피해를 입고 있었고, 관목에 덮인 땅이었다. 종교적 상황도 완전히 엉망이었다.

  리빙스턴은 많은 현지인들이, 기독교를 먹고 마실 수 있는 음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립된 부족들에게 유럽인들은 이상하게 보였고, 설교자들은 초자연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졌다. 그들은 종종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곤 했다.

  사람들에게 그가 믿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라는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리빙스턴은 머리를 낮추고 기도했는데, 이것을 본 그들은 그의 신이 땅속에 있다고 생각해서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12년 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회심자 밖에 얻지 못한 데이빗 리빙스턴은, 점점 더 정규적인 선교사역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프리카 대륙의 문호가 열려서, 유럽인들이 여행할 수 있고 쉽게 정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자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아프리카인들은 먼저 유럽의 방식이 우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자신들의 관습을 버리고 서구의 신앙을 받아들이기를 더욱 바라게 될 것이다. 
그는 “기독교, 무역, 개화”를 불가불리의 것으로 보게 되었다. 리빙스턴은 가족들을 배에 태워 영국으로 보냈다.

  잠베시강은 오늘날의 잠비아에서 발원하여 앙골라 동부를 통과한다. 그리고 남동쪽으로 잠비아와 모잠비크를 가로질러, 아프리카 남동 해안으로 빠져나간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프리카를 관통하는 고속도로를 준비해두셨으며,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 때부터 리빙스턴의 삶은, 아프리카를 기독교 선교에 개방시켜야 한다는 집념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그는 4년 간 탐험되지 않은 지역으로 4,000마일을 여행했다. 짐베시 북방 탐험에서 말라리아에 걸린 그는, 거의 항상 질병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의 의지력은, 많은 그의 동료들을 앗아간 질병이나 불편함에 굴하지 않았다.

  4년 간의 아프리카 횡단을 마친 리빙스턴은, 고향에 돌아가 영웅대접을 받았다. 그가 받은 수많은 영예가운데에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받은 법학 박사학위도 들어있다. 그는 곧이어「선교여행과 남아프리카 탐험」(1857)이란 책을 썼는데,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데이빗 리빙스턴은 여러 얼굴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의 일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칼빈주의적인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확신했고, 한마음으로 그것을 추구해 나갔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극심한 고통과 불편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내 봉사를 받으셨다면, 내 인생은 나의 사역이 끝나는 날까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 하에 있게 될 것이다.”


  리빙스턴은 자신의 노력의 결과를 항상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계획은, 한 사람의 인생보다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본래 소명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길을 닦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영국이 아프리카에 대해 “신성한 소명”이 있다는 그의 말은, 그가 원했던 대로 선교사들과 제국주의 양자에게 도전을 주었다.


  아프리카에서 그의 선교적 자세는 적극적이고 개척자적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그는 "아직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수천의 마을들"에 대한 부담을 가진 개척 선교사였다. 이에 대한 유명한 예화로, 어느 날 영국에 있는 몇몇 친구들이 리빙스턴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겠다는 생각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리빙스턴, 낯선 땅에서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자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네. 먼 나라에서 고생하고 있는 자네를
생각하면, 여기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네. 그래서 자네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우리가 자네를 도와줄 사람을 몇 명 그곳으로 보내려 하네. 그러니 그곳까지 가는 길을 상세히 적어, 다음 편지에 보내 주면 좋겠네."

  하지만 편지를 받은 리빙스턴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답장을 보내 정중하게 그 제의를 거절했다.

  "성의는 고마우나, 이곳까지 오는 길이 있어야만 오겠다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네. 이곳에서 진정 필요한 사람은, 길이 없어도 스스로 찾아오겠다는 사람이거든."

  선교사로서 그가 주로 한 일은 아프리카의 길을 연 것이다. 그가 만든 지도를 따라,  많은 선교사들이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1873년 5월 1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개척자적인 삶은, 지금의 아프리카에 위대한 복음의 업적을 이루게 되는 결과를 낳게 한 위대한 인물로서 평가되고 있다.

                                                                                 내용출처 : [기타] http://aspire7.net/

 

 

 

      최초의 아프리카 대륙 횡단 - 데이비드 리빙스턴

 

      최초의 아프리카 대륙 횡단 - 데이비드 리빙스턴

 

 

 

2004/11/05 12:50 | 선교사 열전

    최초의 아프리카 대륙 횡단 - 데이비드 리빙스턴   
   
    어느 미전도 종족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과정을 보면,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들(World Christians)의 기도, 물질 그리고 영광스러운 선교사의 삶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이 있으려면, 그 민족에 대한 정보가 필수적이었다. 리빙스턴이 위대한 선교사로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은, 바로 이 정보를 제공하는 개척 선교사였다는 것이다. 그가 제공한 정보에 반응한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면서, 아프리카 선교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리빙스턴은 1852년 3월 39세 때 케이프타운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영국으로 떠나보내야만 했다. 아프리카를 횡단하며 탐험하는 것은 생명을 걸고 하는 일인데, 이 일을 가족과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횡단 탐험은 수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선교의 발판을 놓는 일이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는 아픔을 감수할 수 있었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 들어 온 처음 11년 동안은 두각을 나타낼 수 없었다. 리빙스턴은 개종자를 내지도 못했고, 선교기지를 세우거나 교회를 세우는 일에서도 아무런 업적이 없었다. 다만 그는 가족과 환경에 속박되어, 좌절당한 탐험가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는 탐험을 구속할 만한 조건이 없었다. 아프리카 내륙이 그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초로 아프리카 대륙 횡단

  가족들을 케이프타운에서 전송한 후, 그는 북쪽으로 돌아가 쿠루만에서 머문 다음, 그에게 우호적인 마콜롤로 부족(Makololos)에게 가서 탐험에 동행할 일꾼들을 뽑았다. 그들은 아프리카 중앙에서 탐험을 시작하여 잠베지(Zambezi) 강을 따라 북서쪽으로 향해 루안다(Luanda) 해안에 이르렀다.

  적대적인 부족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었고, 치명적인 아프리카의 열병이 언제 덮쳐올지 모르는 위험한 여행이었으나, 리빙스턴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첫 번째 임무는 탐험이었지만, 복음 전파에 대한 사명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는 성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과 '매직 렌턴'(Magic Lantern), 환등기를 이용해 미래의 선교사들을 위해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6개월간의 지겨운 여행을 마치고 루안다(Luanda) 서부 해안에 무사히 도착함으로써, 리빙스턴과 그의 동행들은 역사적인 대탐험을 성취했다.

 

  루안다 해안에서 리빙스턴의 탐험대를 만난 어떤 선장은 그를 영국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제의를 했지만, 리빙스턴은 동행했던 마콜롤로 부족들을 그들의 고향까지 무사히 도로 데려다 주기 위해, 잠베지 강을 따라 동부해안으로 가기로 했다.

  그들은 또 다시, 수많은 적대부족과 질병과 싸우면서 횡단했다. 갈 때는 6개월 걸렸던 그 길을, 12개월이 걸려서야 처음 출발했던 린얀티(Lynyanti)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동쪽으로 다시 탐험을 계속했다. 이 탐험 때 발견한 거대한 폭포를, 당시 여왕의 이름을 따라 빅토리아(Victoria) 폭포라고 이름 붙였다.  


 

                                     국가적 영웅이 된 리빙스턴

  아프리카에 온 지 15년이 지나 1856년 12월 영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국가적 영웅 대접을 받았다. 겨우 3일 동안만 가족과 함께 지낸 후, 그는 런던으로 가서 국가적으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근 1년 동안, 그를 열렬히 따르는 군중들을 위한 강연을 다녔다.

  그리고 영국에 있는 동안에 그의 첫 번째 저서인 『선교여행과 남아프리카 탐험』(Missioanry Travels and Researches in South Africa)이라는 책을 썼으며, 새로운 선교회의 설립을 준비하였다. 그때야 말로 그의 전성기였다.

 

  그는 1858년 45세 때 아프리카로 돌아가기 전에 런던 선교회에서 탈퇴해, 보다 많은 재정과 장비를 후원하겠다는 정부의 위임을 받아들였다.

 

                            

 

                                  그의 마지막 탐험과 죽음

  1865년 52새 때 리빙스턴은 아프리카로 건너가서 나일 강의 근원을 밝혀내기 위해 세 번째이자 마지막 탐험을 시작했다. 단 한명의 유럽인도 동행하지 않았는데, 리빙스턴은 그 후 7년 동안 유럽인을 구경할 수 없었다. 그의 육체는 영양부족과 열병, 빈혈 등으로 쇠약해졌으며, 때때로 아랍인과 노예 무역상들이 그의 탐험 장비를 훔쳐갔다. 그렇다고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나일 강의 근원은 찾아내지 못했지만, 다른 여러 가지 중대한 사실들을 발견했으며, 자신과 주위 환경에 대한 평온함을 회복했다. 아프리카 사람들도 수염이 무성하고 이빨이 다 빠진 이 여윈 노인에게 친밀감을 느끼며, 그가 들려주는 구세주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1873년 5월 1일 그와 함께 일했던 아프리카 사람이, 그가 침대 옆에서 기도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숨져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이 노인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시체와 개인적인 서류들을, 그가 이전에 소속한 선교회가 있는 해안까지 옮겨다 주는 것으로 그들의 존경심을 표현했다.

  리빙스턴의 사랑을 받았던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의 심장을 꺼내 무푼두 나무 밑에다 묻고, 시체는 아프리카의 뜨거운 햇볕 아래 말려 미라로 만들어, 2,400 Km가 넘는 해안까지 운반해주었던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의 장례식

 로버트 모펫

 

   영국에서 리빙스턴의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영국 각처에서 많은 고관대작들과 저명인사들이 참석하였다. 그 날은 아버지가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르는 그의 자식들이, 마지막 작별을 고한 슬픔의 날이었다. 

 

  누구보다도 리빙스턴의 사망 3년전에 아프리카에서 은퇴한, 아프리카 개척 선교사 로버트 모펫의 슬픔이 가장 컸다. 그는 천천히 통로로 걸어서, 사위의 관 앞에 서서 과거를 회상했다. 수십 년 전 바로 이 도시에서, 그는 “선교사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수많은 종족이 살고 있는 마을”의 비전을 리빙스턴에게 주었던 것이다. 
 

 

 

 

 

                 리빙스턴과 스텐리 그리고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

                                                                        

 리빙스턴과 스텐리 그리고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

 

 

 rladbsrms2  (2004-03-03)

   선교사였던 리빙스턴의 아프리카 탐험은 3회에 걸쳐서 이루어졌습니다(1차: 1841-56, 2차: 1858-64, 3차: 1866-73). 1차 탐험은 잠베지강(Zambezi River)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2차 탐험에서는 니아사호(Lake Nyasa)를 발견했으며, 3차 원정에서는 나일강의 발원지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중부내륙지방에 들어가서 루알라바강(Lualaba River)을 발견했습니다(1871). 

  1871년 11월 58세 때에 그는 식량이 떨어져서 곤란을 겪고 있었는데, 뉴욕 헤럴드의 통신원이었던 스텐리가 그를 찾아내서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주어 탐험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텐리는 물론 그를 찾아내서 독점취재를 함으로써, 신문기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됩니다. 

  1873년 60세 되던 해에 리빙스턴은 치탐보(Chitambo) 근처에서 병사하게 되었는데, 일반적인 관례와는 달리 그의 시신은 현지에 매장되지 않고 아프리카 동해안의 섬인 잔지바르(Znzibar)로 옮겨진 후 영국으로 이송되어(1874년 4월), 웨스트민스터 애비(Westminster Abbey)에서 성대한 장례식이 치루어집니다. 당시 잔지바르에는 회교도인 술탄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곳은 노예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리빙스턴의 탐험도 사실은 잔지바르의 노예상인들의 보호와 협조를 얻어서 이루어졌던 것인데, 그는 회교도 노예상인들이 원주민 부락을 습격해 학살을 일삼고 그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목격하고는, 아프리카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노예제도를 폐지시켜야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리빙스턴의 죽음으로, 영국에서는 그의 지론을 지지하는 여론이 크게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리빙스턴이 발견한 루알라바강은, 그 후 스텐리의 탐험(1874-77)에 의해서 나일강의 상류가 아니라 콩고강의 상류라는 것이 증명됩니다.
  스텐리는 성장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아서 성격에 과격한 측면이 있었는데, 노예로 끌려가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보고 가슴아파했던 리빙스턴과는 달리, 스텐리는 필요에 따라서 원주민들을 학살하기도하고 그들을 노예로 부리기도하여, 불라마타리(Bula Matari: 스와힐리어로 Breaker of Rocks라는 의미임)라는 별명을 얻게됩니다.

  한마디로 '하면 된다'는 정신의 소유자였던것 같습니다. 콩고강 탐험이 동에서 서로 이루어진 것은, 콩고강에 폭포가 워낙 많아서 하류 쪽에서 상류 쪽으로는 배가 들어가기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콩고강 탐험이후 스텐리는 탐험가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는데, 전부터 콩고강 유역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벨기에 왕인 레오폴드 2세가 ,1878년에 스텐리를 고용하여 콩고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중부 내륙진출을 도모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하류에서 시작하여 동진하는 코스였습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브라자(Brazza)라는 탐험가가, 콩고강 하류의 북쪽에 있는 오고웨강(Ogowe River)을 거쳐서 콩고강을 선점하려고해서 스텐리와 경쟁이 붙었습니다. 세계지도를 살펴보면, 콩고강 하류어귀에 브라자빌(Brazzaville)이라는 도시가 있고, 강 바로 건너편에는 원래 레오폴드빌(Leopoldville)이 있었는데, 이것은 오늘날에는 킨샤사(Kinshasa)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 바로 위쪽에 있는 호수가 스텐리풀(Stanley Pool)입니다.

  레오폴드 2세는 부왕으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아서, 개인재산으로 콩고강 일대를 손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즉 처음에는 벨기에 정부는 이 문제와 관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콩고강 유역 개발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간 반면에 이익은 신통치 않아서, 벨기에 정부가 레오폴드 2세에게 금융지원을 해주게 되고, 후일에 흑자로 전환되고나서는 레오폴드 2세가 세계여론의 공격을 받게 되면서, 결국 정부가 콩고자유국(Congo Free State)를 인수하게 됩니다(1907).

  레오폴드가 처음 콩고자유국을 건설할 때에는 다른 모든 열강들이 자유롭게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콩고를 개방하겠노라고 약속했었고, 이 때문에 콩고자유국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지만, 그 실상은 레오폴드 2세가 그 지역의 이권을 독점했습니다. 그러고서도 초반에는 적자의 연속이어서 다른 나라들은 그다지 신경쓰지도 않았습니다.

  1888년에 던롭(Dunlop)이 자전거용 공기 타이어를 개발했고 이로인해 고무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자, 이를 계기로 적자가 흑자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레오폴드 2세는 고무농장에 원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착취하였는데, 그 정도가 당시의 기준으로도 심한 편이어서 스캔들이 되기도했습니다.

  무모해보였던 그의 계획도 고무에 대한 수요급증으로 순탄하게 진행되어, 1907년에 콩고자유국이 벨기에에 합병될 때까지 레오폴드 2세는 막대한 수익을 거두었지만, 회계부정이 심했던 관계로 정확한 이득금의 액수는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http://my.dreamwiz.com/puxley/

 

 

 

 

 

                 
            리 빙 스 턴(1813~1873) 

사람은 대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행복의 주체가 반드시 자기 자신이 되어야만 행복하다고 느끼는 범인(凡人)들과는 달리, ‘내’가 아닌 불행한 이웃이 행복해지는 데에 참된 행복의 의미를 찾은 위대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미개한 토인들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하며 암흑의 세계에 빛을 던져준 ‘아프리카의 아버지’라고 불린 위대한 탐험가 리빙스턴의 사랑과 신앙의 정신을 옮기면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들이 진정 추구해야할 행복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 봅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 첫발을 들여 놓았을 무렵, 1840년대의 아프리카 대륙은 외부와의 접촉이 거의 없고 문명이 전파되지 않은 대륙이었습니다.

해안지방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륙 내부를 성공적으로 탐험한 사람도 없었고, 대륙 자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상아와 황금과 흑인으로 상징되던 이 미지의 대륙을 최초로 탐험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한 사람이 바로 리빙스턴입니다.

리빙스턴은 1813년 영국 스코틀랜드의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열 살 때부터 낮에는 방직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니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한 리빙스턴은 이웃들의 불행한 모습을 충분히 알 수 있었고, 자라나면서 점점 이들에 대한 동정심이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불행한 인류를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리빙스턴이 스무 살 되던 해, 그는 중국의 기독교 전도에 관한 책을 읽고 중국 전도를 결심하고, 선교사 자격을 획득하여 중국으로 출발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840년의 아편전쟁으로 중국행이 불가능해진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미개지 전도를 결정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중국 등 아시아 지역에는 선교사들이 더러 파견되었으나, 아프리카의 미개지 전도는 리빙스턴이 처음이었습니다.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토인들이 다른 마을이나 다른 종족을 습격하여 포로로 사로잡아 온 토인들을 가축처럼 부리거나 노예 상인에게 팔아버리는 것이 흔한 일이었고, 이렇게 팔린 노예들은 항구로 끌려가 노예선에 실려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운명이 되곤 하였습니다.

1840년 12월, 리빙스턴은 아프리카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5개월 동안의 항해 끝에 아프리카에 도착한 리빙스턴은 곧 토인들의 말을 배웠고, 밀림 속에 있는 토인 마을을 찾아다니며 병든 사람을 치료해 주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들려주었습니다.

이곳에 발을 들여 놓은지 얼마 되지 않아, 사자에게 불의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빼앗길 뻔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한밤중, 한 토인이 문을 두드리며 급한 왕진을 청했습니다. 밀림의 맹수들의 습격을 두려워한 일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리빙스턴은 “병이란 때가 늦으면 고칠 수 없는 법이오. 옳은 일을 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니 아무 일 없을 것이오.”라고 하면서 오히려 사람들을 위로하며 토인과 함께 캄캄한 밀림 길을 담대하게 걸어 나갔습니다.

이처럼 그는 언제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토인들의 병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토인들은 리빙스턴이 말하는 친절한 하나님이 바로 리빙스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프리카의 오지(奧地)에는 미개한 생활을 하는 토인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안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곳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서 그들을 깨우치리라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성질이 나쁜 토인들이 살고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위험한 오지로 간다는 리빙스턴의 결심에 반대했습니다.

“나는 이 아프리카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왔습니다. 토인들은 병이 들어도 의사가 없어서 그대로 죽어갑니다. 상처를 입어도 치료할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더욱 비참한 것은 토인들이 노예로 매매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나쁜 환경과 습관을 내가 가서 바로잡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것이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나 혼자서라도 오지로 가서 우리의 의무를 완수하겠습니다.” 그의 결심은 굳건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만나서 결혼한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오지를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목적지는 죽음의 사막이라는 칼라하리 사막 북쪽에 있는 느기미라는 호수 부근입니다. 30명의 토인들이 30마리나 되는 소를 끌고 뒤를 따랐습니다. 가도가도 끝없는 사막, 무서운 사막의 맹수들,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모래바람, 타는 듯한 갈증, 이 모든 악조건으로 인해 사막 기후에 익숙한 토인들마저 기운을 잃고 쓰러져 갔습니다.

리빙스턴 일행은 온갖 고생 끝에 2개월만에 칼라하리 토인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일행은 그곳에서 저마다 타조알 한 개씩 받아들고 그 속에 있는 물을 마시고는 기운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칼라하리 토인들은 물이 없는 곳에 살고 있었으므로 물을 가장 소중하게 간수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적의 습격으로부터 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물을 타조알에 채워 땅 속에 묻어둡니다.

이 마을의 여자들은 타조알에 물을 채우는 것이 가장 큰일이었습니다. 축축한 땅을 찾아 보릿대처럼 생긴 풀줄기를 땅에 꽂고는 입으로 물을 빨아 올려서 타조알 속에 채워 넣는 데 세 시간이나 걸립니다. 리빙스턴은 이런 불편한 생활을 조금이라도 개선시켜 주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에게 신앙심을 갖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천막을 치고 곧 환자를 치료하면서, 토인들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도 금방 토인들과 사귈 수 있어서 그들을 의심하던 토인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들이 열병에 걸렸을 때 토인들이 다 함께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모습을 본 리빙스턴은, 하나님의 존재조차 몰랐던 야만적인 토인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을 보고, 고생을 무릅쓰고 온 보람을 느끼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착한 마음을 그들 마음 속에 간직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 후, 리빙스턴은 목숨보다 사랑하는 딸을 열병으로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많은 그는 슬픔을 몰아내고 다시 일어나서 칼라하리 사막을 지나 더 북쪽에 있는 마콜롤로라는 마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는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아프리카의 진기한 식물이나 동물, 토산물 등에 대하여 자세히 관찰, 조사하면서 갖은 고생 끝에 마침내 마콜롤로에 도착했습니다. 리빙스턴 일행은 그곳에 짐을 풀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하며 탐험을 계속했습니다.

1851년, 그는 백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잠베지 강을 발견하여 강의 모양과 너비, 깊이 등을 기록하여 영국으로 보냄으로써, 당시 아프리카의 지도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공으로 영국 지리학 협회로부터 금시계를 상으로 받았습니다.

그 당시 아프리카 어디에든지 노예 상인들의 손이 뻗쳐 있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리빙스턴이 거주하고 있는 마콜롤로에도 노예 상인들의 손이 뻗쳐 있었습니다. 토인들은 포로로 잡아온 노예를 팔아서 그 돈으로 총을 사들였습니다. ‘노예 매매를 그만두게 하려면, 먼저 문명국의 물건을 손쉽게 얻도록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오지에서 해안으로 바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뚫어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의 생활 수준도 높아질 것이고, 또 편해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리빙스턴은 오지에서 해안으로 직접 나갈 수 있는 지름길을 탐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길만이 아프리카를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자, 그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아프리카 서해안으로 나가는 길을 찾기 위해 탐험길에 올랐습니다. 이번 여행은 도중에 야만인이나 맹수에게 습격을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는 유언장을 써 놓고 떠났습니다. 서해안을 향해 나아가던 리빙스턴은 도중에 말라리아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고열이 계속되어 음식을 삼킬 수 없었기에, 그는 눈에 띄게 야위어 갔습니다. 그는 소 잔등에 엎드려 비를 맞으면서도 “서해안, 서해안으로!” 하고 계속 일행을 재촉했습니다.

  리빙스턴 일행이 치보크 마을을 지나가려 할 때, 그 마을의 토인들이 일제히 창을 들고 나와서 일행을 막아섰습니다. 마을을 지나가려면 두 사람의 토인을 두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리빙스턴이 강경하게 거절하자, 토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창을 쳐들었습니다.

  리빙스턴은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는, 토인 대신 소 한 마리를 주겠다고 제안하여 다행히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러나 리빙스턴을 따라온 토인들은 소가 아까워서 차라리 자신들이 노예로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리빙스턴은 “너희들의 목숨을 잃고 싶지 않다. 너희들 모두의 목숨과 자유를 지켜야 한다”라고 말하며 그들을 끝까지 지켜주었습니다. 그러한 리빙스턴이었기에 토인들은 그를 ‘빠빠(:추장에 대한 경칭)’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에도 사나운 토인들의 많은 방해와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모든 것을 이겨내고 드디어 바다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오지에서 서해안으로 나가는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리빙스턴이 마콜롤로를 떠난 지 반년만인 1854년에야 포르투갈의 식민지 항구 루안다에 도착했습니다. 쇠약해진 리빙스턴은 영국 군함으로 옮겨져 간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몸이 완쾌되자, 그는 여행 중에 조사해온 지리, 동물, 식물, 그리고 각 지방의 토산물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영국으로 보냈고, 빅토리아 여왕에게 노예매매를 금지하도록 힘을 써 달라고 편지도 써 보냈습니다.

  다시 마콜롤로 마을로 돌아온 리빙스턴은 이번엔 동해안으로 가는 길을 찾아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서해안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고 사나운 종족들이 있기에, 토인들의 안정된 생활을 위하여 다시 여행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토인들은 그들의 빠빠가 이토록 자신들을 위해 걱정해 주는 것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리빙스턴은 “행복의 빛은 동쪽에서 비친다는 말을 굳게 믿고 탐험을 할 것이오” 라며 동해안을 향해 몇 명의 일행과 함께 출발했습니다.

  도중에 일행은 토인들이 일컫는 ‘소리내는 연기’가 나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토인들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연기 가까이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무서운 요술쟁이가 살고 있어서 가까이 가면 연기가 되고 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연기의 정체는, 바로 너비가 1700미터나 되는 엄청나게 큰 폭포였습니다.

  리빙스턴은 이 폭포에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폭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일행은 다시 강을 내려가 5개월 후에는 동해안에 도착하여, 마침내 아프리카 대륙 횡단에 성공하였습니다.

  리빙스턴은 다음 탐험 준비를 위하여 일단 영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의 영웅이며 아프리카의 성자이신 리빙스턴 만세!” 영국 국민들은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듯 그를 환영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그를 불러서 칭찬의 말과 함께 명예훈장을 내렸습니다.

  이후, 나일강의 수원지를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탐험하던 리빙스턴은, 폐병[이질]을 얻어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리빙스턴이 나일강 수원의 탐험에서 최후를 맞았을 때, 토인들은 사랑하는 빠빠 리빙스턴의 주검을 미이라로 만들어, 9개월 동안의 험난한 모험길을 무릅쓰고 동해안의 영국 영사관으로 운반하였습니다.

  이 일을 통해 세상은 아프리카에 뿌려진 리빙스턴의 인류애가 아름답게 열매맺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일생을 바쳐 미개한 토인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아끼지 않았던 아프리카의 아버지 리빙스턴! 미개한 토인들에게 그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모습이었고, 그들의 목숨을 아끼고 보호했던 인자한 아버지였습니다.

  무지했기에 야만스러웠고 그래서 죄악으로 어두웠던 암흑의 아프리카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무지를 일깨우며, 노예매매라는 비인도적인 죄악과 용감히 싸우면서, 사랑과 희생의 길을 걸어간 그의 숭고한 삶을 대하면서, 온 천하를 꾀는 자 마귀의 올무 속에서,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도 모른 채 죽음을 향해 달려가던 우리들에게, 생명의 등불을 들고 오신 성령과 신부의 참사랑을 가슴에 새겨 봅니다.

  하나님을 몰랐던 미개한 토인들이 리빙스턴의 전도와 사랑의 실천으로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던 것처럼, 무지했던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깨어나, 비로소 우리들이 추구하며 살아가야 될 참된 삶의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의 생명과 참된 행복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는 희생과 봉사의 길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의 가치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

 
  
  
     

 

 

 

 

                리빙스턴 박사가 아니신가요?    
 
출처 : 하~ 하~ 즐겁냐??

 

   아프리카 탐험가 리빙스턴(1813-1873)은 스코틀란드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해서 독학으로 기초 교육을 마친 뒤에, 글래스고 대학에 들어가 의학과 신학을 전공했다. 그는 졸업 후에 런던 전도교회의 의료 전도사가 되어, 1841년에 남아프리카로 건너갔다.

 

  1846년에는 칼라하리 사막을 넘어서 느가미를 발견했으며, 1851년에는 잠베지 강을 발견했다. 그는 이어서 1855년에 잠베지 강 상류를 발견한 다음, 1856년에 영국으로 돌아가 <남아프리카 전도 여행기>를 저술하였다. 그는 1858년에서 1863년까지 다시금 아프리카 탐험을 한 뒤, 1864년에 귀국해서 <잠베지 강와 그 지류 탐험기>를 저술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865년 세 번째로 다시 아프리카에 건너갔다. 리고는 나일 강의 수원(水源) 탐험에 나섰으나, 그 후 5년 간 전혀 소식이 끊어진 채 생사불명이 되었다.

 

  그 당시 영국 태생으로서 미국에 건너가 신문기자가 되어 <뉴욕 헤럴드> 지에서 활약하던 스탠리(1841-1904)기자는, 뭇사람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리빙스턴을 찾아서 아프리카 탐험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스탠리는 만난을 극복하며 수색에 나선 다음, 1871년에 이윽고 죽은 줄로만 알았던 리빙스턴을 우지지에서 찾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 리빙스턴 박사는 열병에 걸려 몹시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노쇠한 몸으로 아프리카 오지의 흑인들을 위해서 의료 봉사와 포교에 몸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스탠리 기자는 리빙스턴 박사에게 다가갔을 때, 혹시나 해서 조심스러운 질문을 했다.

 

      "리빙스턴 박사가 아니신가요?(Dr. Livingstone, I presume?"

 

   리빙스턴 박사는 고개를 나직하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험한 요지를 찾아 온 스탠리 기자와 손을 맞잡고는, 기쁨의 눈물을 글썽거리며 음식을 준비시켰다.

그 때 노소를 막론하고 선량한 토인들은, 모두들 기쁜 듯이 찬송가를 부르면서 스탠리 일행에게 감격적인 장면을 보여 주었다.

 

  스탠리 기자는 열병으로 시달리는 리빙스턴 박사에게 함께 귀국할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리빙스턴 박사는 토인들과 함께 살면서 그 곳에 묻히겠다고 거절했다. 어쩔수없이 스탠리 기자는 석별의 정을 나누고 귀국의 길에 올라야만 했다. 그 후 2년 만인 1873년에 리빙스턴은 북로디지어의 방겔루 호반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영국 정부에서는, 암흑 대륙에서 봉사와 포교를 위해서 그 생애를 값지게 바친 리빙스턴 박사의 공격을 높이 평가해서, 그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이장시켰다.

 

   그는 토인들의 교화에 힘썼고 또한 노예 매매 방지에 공헌하는 등, 암흑 대륙과 접촉한 초기의 유럽인으로서 가장 인도적인 봉사를 한 위인이었다. 그는 결코 백인의 우월성을 내세우지 않았고, 기독교적 인도주의에 입각해서 원주민의 구제를 위해 거룩한 헌신을 했던 것이다.

 

 

                                   열정의 탐험가 리빙스턴 
 
출처카페 : 역사 Cafe-어울림(Har.. / 북극여우

                          다음의 글은 GEO(2003년 12월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1871년 아프리카의 산림 속. 어느 저널리스트 한 명이 실종된 탐험가를 찾아냈다. 세계를 술렁이게 만든 이 저널리스트의 이름은 헨리 M. 스텐리. 그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일생 최고의 기사였지만, 정작 기사의 주인공인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그 모든 것을 등진 채,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자신의 목표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전설적인 나일강의 원류를 향해서 말이다.


 

   1871년 가을, 중앙아프리카의 탕가니카 호수. 빽빽하게 둘러선 숲의 갈라진 틈 사이로 이글거리며 파고드는 정오의 햇살을 받은 호수 모습이 마치 거대한 은쟁반 같다. 호숫가에서 우지지란 도시로 향하고 있던 한 남자가, 조용히 물 위를 미끄러져 가고 있는 아랍배 한 척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낡은 양복을 입고 있는 이 남자는 유럽 사람이었다. 그의 얼굴은 25년도 넘게 아프리카의 태양 아래 검게 그을려 있었고, 주름으로 가득했다. 거의 이가 남아 있지 않아, 그의 얼굴은 마치 '하마가 웃는 것' 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가 쓰고 있는 영사관 모자는 실밥이 헤어져 나와 있고, 관직을 나타내는 휘장도 모양만 남은 채 푸르스름하게 색이 바랜 상태였다.


 

   이 남자가 바로 탐험가이자 의사인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이었다. 그는 열두어 명 되는 원주민 짐꾼들과 함께 우지지에 도착했다. 야자수로 둘러싸인 이 번잡한 항구는, 탕가니카 호의 동쪽에 위치해 있어, 아프리카 내륙에서 오는 수많은 아랍 대상들이, 노예와 상아 등을 풀어놓고 동쪽의 해안으로 떠나기 전에 쉬어 가는 중간 정거장이었다. 그곳에서는, 아랍인들의 진흙집과 원주민들의 단촐한 움막들 사이로 짐꾼과 상인들의 부지런한 발걸음이 오가고, 그들이 풀어놓은 동물들이 부산하게 돌아다녀 생생한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리빙스턴에게 있어서 우지지는 희망을 의미하는 곳이었다. 5년 전부터 그가 원시림과 중앙아프리카의 사바나를 헤쳐가며 고생을 한 것은, 두 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그 중 하나는 나일강의 전설적인 원류를 찾아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혼자의 힘으로 아랍의 노예장사를 근절시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사람으로서 견디기 힘든, 거의 초인적인 고생을 했어도 그의 목적들은 어느 것도 이렇다할 진척을 이뤄내지 못한 상태였다.


 

   우지지에서 리빙스턴은 급한 물자들을 조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한 그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3년 전 잔지바르에 있는 영국 영사관에 요청한 물품들이, 그 때쯤이면 우지지에 도착해 있어야 할 물건들 중 약품, 커피, 차, 밀가루, 옷가지 그리고 무기와 탄약 등은 아랍 상인 몇몇이 일찌감치 빼돌린 상태였던 것이다. 리빙스턴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상심한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이 장사꾼들은 모두 성공적이기만 한데, 나 혼자서만 실패자다."

   우지지와 잔지바르 사이에는 대략 1100킬로미터에 달하는 원시림과 사막지대가 자리하고 있다. 그곳은 분노한 원주민들, 그 중에서도 힘있는 부족들이 노예 장사꾼들과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는 지역이다. 병들고 이제는 가진 것도 없는 리빙스턴에게, 이 지역은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곳이었다. 그는 우지지에 발이 묶인 채, 더 이상 빠져 나올 수 없는 거대한 늪에 빠진 듯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이때, 리빙스턴에게는 운명의 대전환이 일어난다. 그가 우지지에 도착한 이틀 뒤, 어느 백인 남자가 동쪽에서부터 마을들을 거쳐 오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에 전해진 것이다. 리빙스턴은 바로 이 남자가 훗날 자신의 명성을 널리 알릴 사람이라는 것을, 이때는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더 지난 어느 날, 멀리서 총소리가 들려와 외지인들이 우지지로 다가오고 있음을 알렸다. 리빙스턴의 일기에는 이 날이 1871년 10월 28일로 적혀있으나, 이때는 아마도 11월 초 아니면 중순이었을 것이다. 몇 해 동안 앓았던 심한 열병 때문에, 리빙스턴은 1~2주 정도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인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우지지 전체에 퍼지자, 호기심에 찬 아랍인들과 원주민들은 리빙스턴이 거처로 삼고 있는 움막 앞에 모여들었다. 그런데도 정작 리빙스턴은 그 소식을 애써 무시하며 들은 척만 했다. 그때 그가 가장 믿는 하인 중 하나인 수시가 뛰어 들어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소리를 질렀다. "영국인입니다! 제 눈으로 보았어요!"


 

   밖으로 나온 리빙스턴은, 빨간 옷을 입고 머리에 터번을 두른 45명의 짐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봤던 대상들 중 가장 부유한 축에 속했다. 총들로 무장한 남자들이 운반해 온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보급품이 아니었다. 짐꾼들은 커다란 솥, 분해된 보트, 말안장과 거대한 텐트, 검은 색 곰 가죽, 페르시아 산 양탄자에, 심지어 주석으로 만들어진 욕조까지 짊어지고 있었다. 한 사람 당 짊어진 짐이 족히 30킬로그램은 되어 보였다.


 

   리빙스턴은 우지지로 오는 백인이 영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대열의 선두에 선 아프리카 남자가, 높이 치켜들고 있는 것은 여러 개의 별과, 줄이 그려져 있는 커다란 깃발이었던 것이다. 그 무리의 한가운데에서, 작은 체구에 정성껏 다듬은 수염이 있는 젊은 백인이 앞으로 나서서 리빙스턴 곁으로 다가왔다. 이 낯선 젊은이는 마치 런던 한복판의 신사들이 중절모를 들어올리며 인사하듯, 열대에서 쓰는 모자를 들어올리며 평범하지만 침착하게 인사말을 건네었다.

 

      "제 추측이 맞는다면, 리빙스턴 박사님이시지요?"



                     사라진 센세이션을 찾아서

   우스꽝스럽지만, 동시에 19세기 가장 위대한 특종 기사거리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만남은, 사실 그보다 2년 앞서 이미 준비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1869년 10월 17일, 파리 그랜드 호텔의 어느 방에서였다. 국제 뉴스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스캔들, 폭로 기사들까지도 다루던 <<뉴욕 헤럴드>>의 발행인 제임스 고든 베넷은, 자신이 즐겨 머물던 파리에서 전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킬 특종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기사 거리란, 바로 아프리카에서 실종된 리빙스턴 찾아내기. 그는 이 일의 적임자로 <<뉴욕 헤럴드>>의 특파원, 헨리 모턴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라는 기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리빙스턴의 유명세는 한 때 빛났으나, 그 당시에 이르러서는 이미 녹이 슨 상태였다. 1813년에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이 탐험가는 선교사이자 동시에 의사였고, 1854년에서 1856년 사이 오늘날 앙골라의 수도인 루안다에서부터 모잠비크의 킬리마네까지의 탐험에 성공하여, 검은 대륙 아프리카 최초의 횡단이란 기록을 세웠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고향사람들은 열광하며 크게 잔치를 벌였고, 그의 여행기는 당대 가장 성공적인 베스트셀러로 꼽혔다. 그의 책에는 사실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 대목들도 있었지만, 독자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선교를 위해 아프리카로 뛰어든 리빙스턴이었지만, 1차 탐험의 성공 이후 영국정부는 그를 킬리마네의 영사로 임명하여 동아프리카 지역에 원정을 보냈다. 덕분에 몇 해 뒤 출발한 리빙스턴의 2차 탐험대는 규모가 크고 재정적으로도 풍족했으며, 여러 명의 탐험가들과 선교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극성을 부리는 말라리아와 원주민들끼리의 전쟁, 그리고 우기까지 겹쳐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실패는 괴팍하고 고집불통인 리빙스턴의 성격 탓이기도 했다. 리빙스턴은 큰 규모의 탐험대를 이끄는 인솔자로서는, 전혀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1865년 시작된 3차 탐험의 목적은 나일강의 원류를 찾는 것이었는데, 리빙스턴은 그 당시 발견된지 얼마 되지 않은 빅토리아 호수의 남서쪽에 그 원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때의 상황은 그가 맨 처음 탐험을 떠났던 십 년 전과 비슷한 조건이었다. 탐험대에서 리빙스턴은 유일한 백인이었고, 짐꾼들과 장비를 위해 쓸 돈은 조금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 이 탐험가가 실종되었으며,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영국에 퍼졌다. 언론에서는 이를 단신으로 처리해버렸고, 이후 더 이상 리빙스턴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뉴욕 헤럴드>>의 공동대표이기도 했던 베넷은, 바로 그날 저녁 늦은 시간 자신의 전부를 건 도박을 시작했다. 베넷이 보낸 전보를 받고 헨리 모턴 스탠리가 그의 방을 찾아왔던 것이다. 스탠리는 1868년 영국의 에디오피아 침략을 취재할 당시, 다른 경쟁자들을 모두 제치고 2주일이나 먼저 기사를 썼던 인물이었다. 그는 베넷이 생각하기에, 중앙 아프리카의 내륙을 뚫고 들어갔다가 다시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당신 생각에 리빙스턴이 어디에 있을 것 같소?" 베넷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갔다. 스탠리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저는 정말이지 모릅니다." "그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럴 수도 있지만,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베넷은 그 정도로 만족했다.

 

   그래서 실종자를 찾기 위해 28살의 젊은 기자를 보내면서, 그 목숨을 건 탐험의 비용으로 막대한 재산을 내놓았다. 이 탐험은 정복이나 포교 또는 약탈이나 단순한 모험심이 아닌, 순전히 센세이셔널한 특종만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야말로 정보 사회로의 돌입을 상징하는 이정표였던 셈이다.


 

   1871년 봄, 마침내 스탠리가 잔지바르에서 내륙을 향해 길을 나섰을 때, 베넷이 그때까지 탐험에 투자한 돈만 4,000파운드였다. 오늘날의 물가로 환산하면 3억원 이상에 해당하는 엄청난 취재비였다. 그 덕분에 무려 192명의 짐꾼들이 총 6톤 분량의 물자들과 장비들을 짊어지고 잔지바르를 출발했다. 이 정도 규모는 그때까지의 아프리카 탐험대 중에서 대규모에 속했지만, 말라리아로 죽고 또 도망가는 짐꾼들도 많아 우지지에 이르렀을 때에는 처음의 1/4로 줄어들어 있었다.


 

   스탠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끈질긴 성격의 인솔자였고, 일행을 신속하게 이동시켰다. 그는 또 걸음이 더딘 짐꾼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채찍을 휘둘러댈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채찍은 짐꾼들의 등을 때리기에 안성맞춤이어서, 그들을 건강한 짐꾼으로 만들고 때로는 과도한 일도 할 수 있게 만든다." 탐험대를 통솔하는 그의 모습은, 기자라기보다도 소수의 정예들만 이끌고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러 나섰던 스페인 정복자들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그는 리빙스턴이 3차 탐험으로 택했던 루트를 따라, 내륙 한 가운데로 계속해서 들어갔다. 마을이나 대상들을 만날 때에는 리빙스턴의 행방을 수소문했는데, 덕분에 스탠리는 아랍 사람들은 물론이요, 원주민들 사이에서도 곧 유명해져 버렸다. 다만 그것은 존경 어린 유명세라기보다는 경멸 어린 것이었다.

 

   어쨌거나 리빙스턴의 행방을 추측 가능케 하는 단서를 따라, 스탠리는 우지지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방향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이 머릿속을 내내 맴돌았다. 사실 그보다 더 심한 걱정거리는, 사람 사귀는 걸 기피하며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라는 리빙스턴이, 자신에 대한 소문을 듣고 숨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또 리빙스턴이 센세이션만을 �는 기자인 자신을 만나게 되었을 때, 적대감을 갖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도 안고 있었다.

   그런데 스탠리의 이런 걱정은 공연한 것이었다. 탐험에 대해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던 리빙스턴에게 ,스탠리의 보급품들은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스탠리의 짐꾼들이 짐을 내리는 동안, 두 남자는 리빙스턴의 움막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고향으로부터 온 편지들과 함께, 5년이 넘는 동안의 세상 소식들이 리빙스턴 앞에 쏟아졌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이며 수에즈 운하의 개통소식도 그제야 처음 접한 것이었다.

 

  다음 며칠 동안 아랍사람들과 원주민들은, 두 백인이 몇 시간씩 움막 안에서 페르시아 양탄자와 곰 가죽을 깔고 앉아서 차를 마시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또 오래도록 함께 산책하기도 했는데, 언제나 활발한 대화가 끊이지 않았고, 그때마다 손짓을 써가며 성급하게 이야기하는 쪽은 대개 리빙스턴 쪽이었다.

   모든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비극적인 '재주'를 가진 리빙스턴이었지만. 교양이나 종교적 신념도 없고 짐꾼들에게 잔혹하며 무모하게 덤비는 성격의 이 젊은 미국 기자에게만은, 이상하게도 대단한 호감을 느꼈다. 빅토리아 여왕은 후에 스탠리를 두고 "단호하지만 키 작고 추한 남자"라고 말할 정도였지만, 리빙스턴에게는 마치 아들처럼 여겨졌다.


 

   스탠리 역시 감동을 받았다. 어쩌면 이러한 서로간의 호감은, 두 남자 모두 힘든 어린 시절의 악몽을 이겨내고 자라야만 했던 경험과도 결부될 수 있을지 모른다. 리빙스턴은 열 살 때부터 면사방직 공장에서 하루 12시간 반, 주당 6일의 고역을 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야간 학교에 다녔고, 끈질기고 집요한 노력으로 마침내 대학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1841년 웨일즈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스탠리도, 5살에 이미 작업장에서 혹독하게 일을 해야 했다. 17살이 되어 스탠리는 미국으로 도망쳤고, 남북전쟁의 와중에 행운과 나름의 재주를 통해 신문보도와 관련한 공을 세워 미국인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닮은 과거가 아니라면, 두 사람이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서로간에 느끼게 된 고마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뜻밖에 찾아온 도움이 리빙스턴에게는 다시 한번 평생의 숙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주었다. 한편 스탠리에게 있어서 리빙스턴과 함께 한 시간들은 그의 경력에 있어서 결정적이었고, 게다가 소문과는 달리 리빙스턴이 그를 무뚝뚝하게 대하거나 배격하지도 않았고, 도리어 지나칠 정도로 상냥했던 것이다.


 

   리빙스턴은 스탠리의 요청으로 온 힘을 기울여 아프리카에서 겪은 많은 경험들을 기록했다. 그 중에는 아랍 노예상이 원주민들에게 가한 잔인무도한 대량학살에 대한 목격담도 들어 있었다. 그야말로 사람을 사고 파는 일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이었다. "인간으로서는 더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마음은 천사와도 같았다," 감격한 어조로 스탠리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때론 그와 온갖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지만, 훗날 기사에서 스탠리는 리빙스턴의 편협함과 고집스러움 그리고 심한 복수심 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많은 노력과 비용을 들여 아프리카 내륙까지 들어온 것이, 고작 잔소리 심한 노인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게 무슨 스토리가 될 수 있겠는가? 대신 혈혈단신으로 아랍인 노예상들이며 호전적인 원주민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는, 성인과 비견될 만한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기사가 될 터였다.


 

   게다가 평소 냉소적인 성격의 스탠리도, 실종된 리빙스턴을 찾는 일을 시간이 지날수록 신비한 임무, 그러니까 '순례'와 같은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이는 동시에 자신을 순례자로 미화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순례를 하는 사람은 힘든 고생을 치르더라도, 그 순례의 끝에서 이상적인 인물을 만나길 원한다. 세속적인 단점이며 흠이 전혀 없는 그런 완전한 인물을...


 

   스탠리가 도착하고 나서 약 1주일 동안, 두 사람은 탕가니카 호수의 북쪽 기슭으로 탐험길에 나섰다. 이들은 커다란 통나무배를 타고 호숫가에서 가까운 물길을 따라 점차 북쪽으로 몰아갔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들은 1871년 12월 초 호수의 북쪽 기슭에 닿았다. 그곳에서 호수로 흘러드는 물줄기는 있으나 반대로 흘러나가는 물은 없음을 확인하고, 탕가니카 호수가 보다 북측에 위치한 알베르토 호나 빅토리아 호와 직접 연결되지 않았음을 밝혀냈다.


 

   떠난 지 거의 한 달만에 그들은 다시 우지지로 돌아왔고, 리빙스턴에게 있어서 이번 탐험은 그야말로 소풍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스탠리에게는 이 탐험이 무척 힘들었고, 게다가 폭력적으로 공격해올 듯한 원주민들과 마주치는 일도 적지 않아서 대단히 극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또 탐험 도중 스탠리는 말라리아에 걸려 고생을 하는가하면, 리빙스턴이 쉴 새 없는 설사에 시달리는 모습마저 지켜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스탠리는 몇 주일 뒤 함께 영국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리빙스턴이 받아들이지 않자 당혹감 마저 들었다. 스탠리는 마침내 자기 일생일대의 스토리를 마무리지어 영국으로 보낸 상태였고, 장본인인 리빙스턴과 함께 돌아간다면 기사의 효과는 극대화될 것이었다. 그는 이 고집스러운 영국인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을 하면서, 고향에서 푹 쉬며 힘을 회복한 다음에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오자고 말했다.

 

  그렇지만 리빙스턴은 승리자로서 금의환향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예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없는 동안에 그가 개척해 놓은 길을 따라 누군가가 나일강의 근원을 찾아내어 그의 명예를 가로채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불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 스탠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짐꾼들에게 새로운 보급품을 실어보내겠다는 약속뿐이었다. 리빙스턴은 스탠리에게 열 두어 통의 편지들과, 다섯 겹으로 봉하고 또 봉한 일지, 지금까지 거쳤던 탐험의 경로와 지극히 사적인 것까지 포함한 기록들도 함께 보냈다. 그 동안 리빙스턴은 손으로 기록한 메모들과 지도들을 상자에 담아, 함께 가지고 다녔던 것이다.

 

  이별의 순간 두 사람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스탠리는 이 마지막 순간을 영원히 기억에 남기고자 리빙스턴의 얼굴 표정 세세한 부분까지 찬찬히 되새겼다. 그러나 그는 이 영국인을 다시는 못 보게 되리라 예감했다. 1872년 3월 14일의 일이었다.



                               나일강, 그 집착의 원류

   나일강의 근원은, 지리학적으로 가장 거대한 수수께끼 중 하나였다. 이를 둘러싼 의문들은 1858년 존 스피크가 빅토리아호를 발견한 뒤, 여기서 나일강의 근원을 찾아냈노라 주장하면서 풀려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할 길이 없었고, 이에 대한 진실은 결국 훗날 탐험가가 된 스탠리가 19년 뒤에야 밝혀낼 수 있었다. 리빙스턴을 '발견'하여 크게 성공한 그는, 다시금 언론사들의 후원으로 아프리카로 돌아가 여러 탐험가들의 실패를 발판 삼아 여러 가지 활약을 펼치게 된다.

   한편 리빙스턴은 나일강의 근원이 어딘가 다른 곳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의 세 번째 탐험 도중에 원주민들이 이야기했던 방웨울루 호수 근처일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것은, 그가 중앙아프리카에 있는 거대한 물줄기인 루알라바에서 나일강을 보았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콩고강의 상류였다.


 

   1870년 7월 그는 두 다리가 곪아, 어느 작은 마을에서 여러 달 동안 머물러야 했다. 그때 그는 그곳을 지나가던 아랍 대상들로부터, 네 개의 물줄기 뿌리가 방웨울루 호수 남쪽 어딘가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었다. 그 물줄기로부터 커다란 강줄기들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출발하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했으나, 열과 통증, 과다한 출혈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리빙스턴은, 그 소문에 자기 이론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그는 성경을 네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고, 출애굽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읽었다. 모세는 이집트 남쪽 어딘가에 살았던 게 분명했다. 모세의 도시가 혹시 이 근처가 아니었을까하는 의문은, 처음에는 반 농담 삼아 '백일몽'이라고 스스로도 치부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것은 '성스러운 모세의 땅을 증명하겠다는' 종교적인 강박관념으로 굳어져갔다.


 

   그후 그는 네 개의 원천에 대한 헤로도투스의 보고를 기억해냈다. 이 그리스의 역사 서술가가 기원전 5세기경에 기록한 한 전설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내륙 어느 곳에 끝도 없이 깊은 네 개의 물구멍이 있는데, 그 중 두개는 남쪽으로 흐르고, 나머지 둘은 북쪽으로 흐르는 것이 바로 나일강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병이 깊어진 리빙스턴은, 이 새로운 이론에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강하게 집착했다. 말하자면 그의 이론은 루알라바가 실제로 나일강이며, 헤로도투스가 말한 네 개의 전설적인 근원으로부터 물이 공급된다는 것이었다. 깊이 도취해 있던 자신의 이론을, 리빙스턴은 스탠리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중앙 아프리카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스탠리는 애초 성서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헤로도투스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었으며, 지리학에 대해서도 그때까지는 아무 흥미가 없었다. 그런 처지에 새로 사귄 소중한 친구가 성서며 고대의 전설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해서, 이렇다 할 반박의 여지도 없었지만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스탠리가 리빙스턴에게 제대로 장비를 갖춘 짐꾼들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은, 병에 시달리고 있는 이 영국인이 전대미문의 일을 벌이려 하나보다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즉 중앙 아프리카 남쪽의 방웨울루로부터 루알라바, 혹은 나일강까지 검은 대륙을 가르는, 아프리카 종단이라는 대탐험을 하려나 보다고 추측했던 것이다.


 

   스탠리가 떠나고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리빙스턴은 쉰 아홉 번째 생일을 맞았다. 이날 그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3월 19일 - 생일. 나의 왕이요 생명이며 저의 모든 것인 예수님. 이제 다시금 온전히 저를 바치겠나이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제 기도를 들어주시어, 이 해가 가기 전에 제 임무를 끝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얼마 후 그에게로 파견될 예정이었던 영국 탐험대가, 스탠리의 배신으로 인해 취소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9일, 탐험대 취소로 인한 리빙스턴의 모든 언짢은 생각들은 단숨에 사라질 수 있었다. 마침내 약속대로 스탠리의 보급대가 도착한 것이다. 2년 동안의 임금을 선불로 받은

56명은, 저마다 총을 가지고있었고 장비들도 훌륭했다. 특히 화약과 탄약, 밀가루와 설탕, 커피와 차, 장기 저장식품, 신형 나침반, 그리고 리빙스턴의 일지를 실은 새로운 잡지와 의약품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껏 리빙스턴도 이처럼 장비를 제대로 갖춘 탐험대와 함께 해본 적이 없었다.


 

   1872년 8월 25일 리빙스턴은 다시금 힘차게 길을 나섰다. 짐꾼들의 인솔자들이 소리쳤다. "길 떠난다. 오늘 떠날 준비를 하라!" 조금은 피곤한 듯 구부정한 자세로 앞서는 영국인 탐험가의 뒤를 그의 가장 충직한 하인들인 제임스 추마와 압둘라 수시가 따랐다.


 

   9월과 10월에 걸쳐 그들은 탕가니카 호수 남동쪽에, 경사지고 험한 아예 길도 나지 않은 지역을 헤매고 다녔다. 억세고 키가 큰 풀과 가시넝쿨이 있는 평지에, 엄청난 크기의 바오밥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리고 타마린드나무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었다. 태양은 사바나의 땅바닥을 너무나 뜨겁게 달궈, 심지어 맨발의 짐꾼들 중에는 화상을 입는 이들도 있었다.


 

   이 엄청난 더위에 말라리아와 설사가 더해져, 리빙스턴의 몸은 더욱 쇠약해졌다. 11월 9일. 그는 항문 출혈 증세가 도진 것을 확인했다. 오래 된 그의 고질병이었다. 그때부터 피를 흘리지 않고 보내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몸은 말이 아닐 정도로 엉망이었지만, 그의 이론에 대한 신념만은 흔들림 없는 날들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의 탐험대는 탕가니카 호수와 방웨울루 호수 사이의 지점에서 우기를 만나게 되었다.


 

   추적추적 보슬비가 내리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순식간에 집중호우가 쏟아지곤 했다. 또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시간이 몇 시간쯤 지나면, 이글거리는 열대의 태양으로 수증기가 차오르기도 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모기와 체체파리가 극성을 부렸다. 탐험대를 더욱 지치게 만드는 것은, 어디를 보아도 똑같은 경치였다. 마치 사방천지가 끝없이 펼쳐진 늪으로 변해버린 것처럼 보였다. 여기 저기 웅덩이들이며 급 물살의 여울 그리고 거대한 호수와 도도한 강물 등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사실 당시 그가 향한 방향은 큰 오차의 결과물이었다. 1872년 12월 리빙스턴은 그 지역 출신의 남자 하나를 안내인 삼아 방웨울루 호수 북서쪽 기슭을 향하고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계속해서 남서쪽 방향으로 가기만 하면 네 개의 원천이 있다는 그 지역에 이르리라는 게 그의 계산이었다.


 

   그렇지만 리빙스턴은 그 원주민을 곧 쫓아 버리고 말았다. 원주민의 생각으로는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이 호수의 동쪽 기슭이었던 것이다. 리빙스턴을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그저 끝도 없이 똑같게 보이는 수렁 때문만은 아니었다. 안내인이 말한 내용들은 그가 1868년 처음 방웨울루 호를 방문했을 때, 그 리고 그 당시 약식으로나마 그려두었던 지도들과 어긋났다. 그는 자기 발로 남동쪽 방향으로 크게 원을 그리면서 그 호수를 빗겨갈 작정이었지만, 곧 일행은 폭이 200킬로미터가 넘는 늪지대로 접어들고 말았다. 그렇지만 언제나처럼 고집스럽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리빙스턴은, 자기가 실수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다. 사실은 이미 1867년 초, 그러니까 그의 세 번째 탐험이 시작될 때, 그의 나침반을 나르던 짐꾼이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리빙스턴은 그 정교한 기구를 새로 조절해 맞추어야만 했었다. 그렇지만 아프리카 대륙의 한 복판에서 그 조정은 세밀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 연유로 그때부터 위치를 잡을 때, 그는 어느 지점에서나 동쪽으로 약 30킬로미터 정도 치우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6개월 후, 가벼운 지진이 그 계기에 영향을 주어 다시 재조정해야 했다. 그때부터 리빙스턴의 위치계산은, 서쪽으로 80킬로미터 정도 치우치게 되었다. 따라서 방웨울루 호수 주변을 그린 그의 지도에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100킬로미터 이상의 호숫가 지역이 그려져 있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 그 지역을 방문하는 동안, 그가 그렸던 것 중 특히 부정확했던 것은 바로 호수의 너비였다. 그는 그 너비가 240킬로미터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는데, 실제로는 40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고, 거기에 늪지대가 조금 더 연장되어 있는 정도였다. 리빙스턴은 이후 스탠리가 보낸 새로운 나침반으로 다시 위치 설정 작업을 벌였지만, 그는 그 결과를 믿지 않았다. 실제로는 정확한 그 관찰결과가, 그 동안 그가 옳다고 생각해온 자료들과 맞아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리빙스턴 일행이 애초 있던 곳은 호수의 북서쪽 기슭이었으나, 틀린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힌 채 리빙스턴은 대원들에게 방향을 돌리게 하여, 동쪽으로 이어진 길을 가도록 했던 것이다. 그 뒤 몇 달 동안,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마른 옷을 걸쳐볼 수 없었다. 늪이 깊어 물이 입까지 닿는 곳도 많았다. 그럴 때면 생필품과 무기들을 머리 위로 치켜올려 들고 갔다. 지나기 힘든 곳이 나타날 때마다, 수시와 추마 또는 대원들 중 어느 하나가 리빙스턴을 어깨 위에 태우고 가야만 했다. 그 사이 리빙스턴은 제 발로 그런 곳을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혹 어느 누가 발을 헛디뎌 코끼리가 밟고 지나간 곳에 빠지기라도 하면, 혼자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하루 종일 이동하는 거리는 겨우 2 킬로미터 반 정도에 불과했다.


 

   늪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손가락 두께의 거머리들이 수렁 속에 도사리고 있어, 저녁마다 대원들은 몸에 붙어 피를 빨고 있는 놈들을 10여 마리씩 떼어내야만 했다. 리빙스턴은 축축한 야전침대에 누워 자다가, 붉은 개미군단의 습격을 받아 온몸이 부어오르는 일도 있었다. 아무리 그가 태연하고 강인한 모습을 내비치고 있어도, 출혈에 내장과 등허리의 심한 통증까지 겹쳐, 그는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갔다. 비단, 몸만 지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고통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의 무기력증과 방향 상실은 그만큼 더 심각해져갔고, 역설적으로 나일강의 기원을 밝힐 날이 머지 않았다는 그의 믿음은 더욱 강해져갔다.


 

      "영광스럽게도 각하에게 보고 드립니다. 마침내 _월 _일에 각기 큰 강물들의 기원이 되는 원천들을 발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영국의 외무부 장관에게 보낼 편지 초안을 이렇게 써놓고 있었다. 날짜와 정확한 위치만 써놓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이 편지는 끝내 보내지 못했다.



                                       
화려한 영웅의 초라한 최후

   1873년 4월 중순이 되어서야, 탐험대는 겨우 늪지대의 가장 힘든 지점을 벗어났다. 그렇긴 해도, 리빙스턴은 이제 체력이 거의 완전히 고갈된 상태였다. 나중에 확인되었지만, 그의 내장에는 어른 주먹만한 크기로 피가 뭉쳐 응고되어 있었다. 이제 그는 짐꾼들의 어깨 위에 앉아 가야만 했고, 나중에는 들것에 실려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걷지도 못할 만큼 쇠약해진 상태에서도, 여전히 닳아 해진 영사관 모자를 마치 추장의 상징이라도 되는 듯 쓰고 있는 이 남자를, 짐꾼들이 어떤 식으로 바라봤는지에 대해서는 오늘날 알 도리가 없다. 분명한 것은, 무슨 까닭에 그 먼 고향을 떠나서, 고작 강의 근원을 찾아낸다고 자기 스스로, 그리고 대원들까지 고생시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죽어 가는 리빙스턴은, 혈기왕성하던 그 어느 때보다도 대원들의 기강을 오히려 더 확고하게 장악했다. 달아난 짐꾼도 거의 없었으며, 반란을 꾀하거나 물건을 훔치는 경우는 한 건도 없었던 것이다. 마치 그들 모두 아무도 벗어날 생각조차 할수 없는 어떤 마술의 힘에 빠지기라도 한 듯했다.


 

      "낙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런 탐험이었다." 4월 19일 리빙스턴은 그렇게 기록했다. 그 사이 그는 더욱더 쇠약해져서 씁쓸한 내용의 이런 글을 쓰기 위해, 연필조차 들고 있기 힘이 들 정도였다. 6일 뒤 이들은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리빙스턴은 마을의 남자들 몇을 모이게 해서, 결정적인 질문을 던졌다. 네 개의 원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서쪽으로 며칠정도만 더 가면 되는가? 고통을 이겨내며 간신히 던진 이 질문들에, 그 남자들은 고개를 저었다. 리빙스턴은 절망했다. 방웨울루 호수 남서쪽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헤로도투스가 기록했던 전설이, 잘못된 것임을 처음으로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에게 닥친 그 모든 고통들이 모조리 쓸모가 없는 것이 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4월 27일. 그는 힘을 모아 간신히 다음과 같은 메모를 하였다. "27일. 기력이 거의 다 해서 머물러 있다. 쉬고 있다. 염소젖을 사오라고 보냈다. 우리가 있는 곳은 모리아모 강의 기슭이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기록이었다.


 

   리빙스턴은 물이나 죽 외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삼키지 못했고, 들것에 타기 위해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몇 걸음 옮기는 것조차 힘들어 할 정도로 쇠약해졌다. 그런데도 그는 한사코 계속 가기를 고집했다. 결국 수시와 추마가 움막을 헐어내어, 리빙스턴의 침상에 직접 들것을 가져다 대었다. 마치 값진 물건을 들어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은 자기들의 우두머리를 들어올렸다.


 

   한 발짝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리고 흔들릴 때마다, 죽어 가는 그에게는 가늠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고, 잠시 통증이 물러난 동안에는 의식을 잃어버리곤 하였다. 4월 29일 충성스런 그의 대원들은, 그를 이라라라는 마을로 옮겨서 거기서 움막을 세웠다.


 

   1873년 4월의 마지막 날, 리빙스턴은 누워있었다. 몇 시간 동안 그는 오락가락하며 의식이 불분명한 상태였다. 그저 이따금씩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나곤 할뿐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리빙스턴은 루아풀라 강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아야겠다고 고집했다. "사흘 걸음입니다." 그를 지켜보던 대원이 대답했다.


 

   저녁이 되자 리빙스턴은 시중을 들던 수시를 움막 밖으로 내몰았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젊은 짐꾼 중 한 명이 환자의 침상을 지키기 위해 움막 안에 남아있었지만, 그 또한 곧 잠들고 말았다. 그로부터 얼마 있지 않아서, 리빙스턴은 마지막 힘을 다해 움직이려고 했다. 아마도 기도를 하기 위해서였으리라. 혹은 침대에서 죽음에 꺾이는 것이 싫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마지막 순간을 맞아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깨자마자, 그 짐꾼은 허둥지둥 수시와 추마에게 달려왔다. 그들이 달려가자, 침상 옆에 떨어져 무릎을 꿇은 채로 죽어 있는 리빙스턴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기도에 몰두해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뒤로 며칠 동안 수시와 추마는 마을 사람들에게 리빙스턴의 죽음을 숨겼다. 원주민들이 죽은 시체에 대한 미신적인 두려움을 가지고있다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수시는 단호히 그의 시신을 영국으로 옮겨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충복들은 다른 사람들의 움막에서 떨어져 있는 곳에 부분적으로 지붕이 트인 임시 움막 하나를 세웠다.

   이들은 서둘러 죽은 시신의 내장들을 끄집어내어 땅에 묻었다. 시신은 소금에 재고 임시 움막 안에 두어 햇빛에 말렸다. 우기가 끝나자 리빙스턴의 충복들은 시신을 매일 조금씩 돌려서 2주일 후 완전히 건조시킬 수 있었다. 얼굴은 브랜디로 씻기고 시신은 타르를 바른 범포에 싸서 꿰매었다. 리빙스턴의 짐꾼들은 죽은 시신을 해안까지 들고 왔고, 거기서 영국 선박에 넘겨주었다.


 

   이 탐험가의 시신은 영국으로 돌아와, 화려한 장례식과 함께 웨스트민스터에 매장되었다. 리빙스턴은 이미 오래 전부터 탐험가의 상징이요, 인도주의의 표상이 되어 있었다. 특히 리빙스턴이 죽기 9개월 전에 발행된 스탠리의 기사들은, 그 이전에 나온 어떤 신문기사들보다 훨씬 더 큰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기사들은 미국의 신문뿐 아니라, 전 유럽의 신문들에 실렸다.


 

   베넷은 모든 것을 건 도박에서 이긴 셈이었다. 실종되었던 선교사였고 나일강의 원류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푼 영웅이요, 비록 때때로 노예를 거래하는 대상들과 함께 여행하기는 했지만, 굳은 의지로 사람을 사고 파는 노예장사에 맞서 싸운 그런 영웅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외로운 죽음으로부터 2년이 지난 뒤, 리빙스턴은 빅토리아 왕조시대의 이상형으로 자리를 잡았다. 꺾이지 않는 의지로,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고 혼자 힘으로 영국을 위해 아프리카 전체를 개척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로서는 검은 아프리카의 내륙에 기독교의 빛을 전한 인물이 되었다.


 

    그의 기록들과 더불어, 이제 그 자신도 저명한 탐험가가 된 스탠리의 기록들은, 끝을 알 수 없이 다양한 아프리카 자연의 풍요를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들은 다른 많은 선교사들처럼 아프리카 사람들을 잔인한 야만인이라거나 원시적이고 구원을 필요로 하는 그런 가련한 사람들로 그리는 일이 없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정신은, 독일 사람들보다 더 철학적이다."라고 리빙스턴은 쓰고 있다.


 

   그렇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이 영국인은 검은 대륙 아프리카가 반드시 기독교화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아프리카 내륙 한복판에 커다란 영국의 식민지를 세움으로써, 그런 기독교화가 가능하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훗날 많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 식민지화를 '백인의 책임'이라며 도덕적 의무감과 결부시키려고 끌어들인 것이 바로 리빙스턴이었던 것이다.


 

   사실 영국 사람들이 아프리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은,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리빙스턴의 감격과 열광이 널리 알려지고 나서의 일이었다. 아울러 리빙스턴의 기록과 보고에 대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열띤 토론이 없었더라면, 그 뒤 수십 년 안에 우간다, 탕가니카, 케냐, 로디지아(짐바브웨) 및 그밖에 다른 지역들을 런던이 반환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영국제국의 관심을 중앙아프리카로 이끌었던 것은, 다름 아닌 리빙스턴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또 하나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리빙스턴이 노예제도 반대자들에게 엄청난 힘을 실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반대자들은 벌써 몇십 년 전부터 런던에 대해 동아프리카에서의 인신매매를 중단시키라고 촉구했다. 1865년까지만 해도 잔지바르에서는 2만 명의 사람들이 시장에 팔려나갔었다. 리빙스턴의 보고를 통해 일반대중들의 분노가 커져갔고, 마침내 행정당국은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873년 영국은 잔지바르의 술탄에게 군사적 압력을 넣어, 사람을 사고 파는 악덕 행위를 종식시켰다.


 

   이 모든 것이, 방향을 잃은 채로 헤로도토스의 나일강의 원류가 아예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에 빠져, 방웨울루 호수 남쪽 지역에서 죽어가던 리빙스턴으로서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던 그런 일들이었다. 오히려 그는 그 자신이 실패자로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다만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사회 전반에 미친 그의 엄청난 영향력은, 그의 실제 모습 혹은 그가 이룩한 업적에서 비롯 되었다기보다는, 어쩌면 스탠리와 그밖에 다른 이들이 그로부터 만들어낸 결과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몸을 혹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앞으로만 나아갔던 리빙스턴의 정열은, 결국 타인의 손에 의해서 완성되었던 것이다.

 

 

  
제목 리빙스턴
설명 영국 아프리카 탐험가. 스코틀랜드 출생. 산업혁명 후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영국과 아프리카의 관계를 전형적으로 제시한 탐험가다. 가난한 노동자집안에서 태어나, 근면·경건한 그리스도교인인 양친의 영향으로 의료 선교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중국행을 원하였으나 아편전쟁으로 단념하고, 런던 전도협회 파견원으로 1841∼49년 남아프리카에 부임했다.
출처 야후! 백과사전

 

 

                                                 야후 엡 이미지

 

 

 

 
제목 빅토리아 폭포
설명 옛날부터 ‘천둥소리가 나는 연기’라고 불렸는데 1855년 영국 탐험가 D.리빙스턴이 발견하여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폭포라고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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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폭포
350 * 235

빅토리아 폭포
600 * 450

빅토리아 폭포
874 * 498
 

 

 

 

 

            * 스탠리 [Stanley, Sir Henry Morton,

                                       1841.1.28~1904.5.10]

 

   영국의 아프리카 탐험가, 언론인.

   본명 John Rowland. 북웨일스의 벽촌에서 출생하여 소년 시절을 구빈원()에서 보냈다.

 

   17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리라는 상인의 양자가 되어 그 이름을 계승하고 시민권도 얻었다.    남북전쟁에 종군한 뒤, 1865년 신문 통신원이 되어 에티오피아 등지에 주재하였으며, 능력을 인정받아 뉴욕의 《헤럴드》지의 기자가 되었다.

 

   1869년 《헤럴드》의 사장 J.G.베네트로부터 아프리카에서 소식이 끊긴 리빙스턴의 행방을 찾으라는 밀령을 받고, 1871년 (30세) 3월에 출발, 8개월 후인 11월 탕가니카 호반에서 병에 걸린 리빙스턴과 극적으로 만났다.

 

   1874년 리빙스턴 구출을 위해 재차 아프리카로 갔으나, 리빙스턴의 죽음만을 확인한 후, 나일강원천 빅토리아호를 발견하고, 콩고강 유역을 답사하였다.

 

   1877∼1884년 벨기에 국왕의 후원을 얻어 콩고지방을 탐험, 콩고 자유국 건설의 기초를 닦았다.

 

   1887∼1889년(48세) 중앙 아프리카 탐험 중, 현지 반란에 휘말려 있던 독일 탐험가 에민 파샤를 구출하는 등 아프리카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만년에 영국 국적으로 복귀하였고, 1895년 하원의원이 되었다.

 

   저서로는 《암흑대륙 횡단기》(2권, 1878) 《암흑의 아프리카》(189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