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늙은 말과 개미에서 지혜를 얻은 제의 명재상 관중

영국신사77 2007. 1. 7. 22:21

         늙은 말과 개미에서 지혜를 얻은 제의 명재상 관중

 

 

 

  춘추 시대, 오패(五覇)의 한 사람이었던 제(齊)나라 환공(桓公:재위 B.C.685∼643) 때의 일이다. 어느 해 봄, 환공은 명재상 관중(管仲:?∼B.C.645)과 대부 습붕(柝朋)을 데리고 고죽국[孤竹國:하북성(河北省) 내]을 정벌하러 나섰다. 그런데 전쟁이 의외로 길어지는 바람에 그 해 겨울에야 끝이 났다. 그래서 혹한 속에 지름길을 찾아 귀국하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전군(全軍)이 진퇴 양난(進退兩難)에 빠져 떨고 있을 때 관중이 말했다.

 

  "이런 때 '늙은 말의 지혜[老馬之智]'가 필요하다."며 즉시 늙은 말 한 마리를 풀어놓았다. 그리고 전군이 그 뒤를 따라 행군한 지 얼마 안 되어 큰길이 나타났다.

 

 또 한번은 산길을 행군하다가 식수가 떨어져 전군(全軍)이 갈증에 시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습붕이 말했다.

 

 "개미란 원래 여름엔 산 북쪽에 집을 짓지만 겨울엔 산 남쪽 양지 바른 곳에 집을 짓고 산다. 흙이 한 치[一寸]쯤 쌓인 개미집이 있으면 그 땅 속 일곱 자쯤 되는 곳에 물이 있는 법이다." 군사들이 산을 뒤져 개미집을 찾은 다음 그곳을 파 내려가자 과연 샘물이 솟아났다.

 

 이 이야기에 이어 한비자(韓非子:韓非, ?∼B.C.233)는 그의 저서《한비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관중의 총명과 습붕의 지혜로도, 모르는 것은 늙은 말과 개미를 스승으로 삼아 배웠다. 그러나 그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어리석음에도, 성현의 지혜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 아닌가."

 

  [주] '노마지지(老馬之智)'란 여기서 나온 말인데, 요즈음에도 '경험을 쌓은 사람이 갖춘 지혜'란 뜻으로 흔히 쓰이고 있는 말로, 여기서 '늙은 쥐의 꾀' 이야기도 노마지지(老馬之智)의 이야기처럼, '오랜 경험을 가진 이의 지혜'의 말에 귀 기울이라는 속뜻이 담긴 글이다.

 

 

 

 

                           늙은 쥐의 꾀/효빈잡기(效嚬雜記)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옛날에 음식을 훔쳐먹는데 귀신이 다된 쥐가 있었다. 그러나 늙으면서부터 차츰 눈이 침침해지고 힘이 부쳐서 더 이상 제 힘으로는 무엇을 훔쳐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 젊은 쥐들이 찾아와서 그에게서 훔치는 기술을 배워 그 기술로 훔친 음식물을 나누어 늙은 쥐를 먹여 살렸다. 그렇게 꽤 많은 세월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쥐들이 말했다.

"이제는 저 늙은 쥐의 기술도 바닥이 나서 우리에게 더 가르쳐 줄 것이 없다."

그리고는 그 뒤로 다시는 음식을 나누어주지 않았다.

늙은 쥐는 몹시 분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 동안을 그렇게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그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이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서 솥 속에 넣은 다음 무거운 돌로 뚜껑을 눌러 놓고 밖으로 나갔다. 쥐들은 그 음식을 훔쳐먹고 싶어 안달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때 한 쥐가 말했다.

"늙은 쥐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

모두가 "그게 좋겠다"고 하고는 함께 가서 묘안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늙은 쥐는 화를 발끈 내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나에게서 기술을 배워서 항상 배불리 먹고살면서도 지금까지 나를 본체만체했으니 괘씸해서라도 말해 줄 수 없다."

쥐들은 모두 절하며 사죄하고 간청했다.

"저희들이 죽을 죄를 졌습니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고 앞으로는 잘 모실테니 방법만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늙은 쥐가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일러주마. 솥에 발이 세 개 있지? 그 중 하나가 얹혀 있는 곳을 모두 합쳐서 파내거라. 몇 치 파내려가지 않아 솥은 자연히 그쪽으로 기울어질 것이고 그러면 솥뚜껑은 저절로 벗겨질 것이다."

쥐들이 달려가서 파내려가자 과연 늙은 쥐의 말대로 되었다. 쥐들은 배불리 먹고 돌아오면서도 남은 음식을 가져다가 늙은 쥐를 대접했다.

아, 쥐와 같은 미물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 있어서겠는가! 이신의 계책이 노장 왕전의 심사숙고함에 미치지 못했고, 무현의 지모가 충국만 못했으니,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보다 사리 판단이 낫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치는 다만 전쟁터에서 병사를 부리는 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도 젊은이가 어른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진나라 목공이 "어른에게 자문을 구하면 잘못되는 일이 없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나라가 되어 가는 꼴을 보면 국권은 경험도 없는 어린 아이에게만 맡기고 늙은이들은 수수방관하며 입을 꼭 다문 채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어쩌다 요긴한 말을 했다 하더라도 도리어 견책이나 당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일을 앞에 말한 쥐의 일과 견주어 보면, 사람이 하는 짓이 쥐가 하는 짓보다 못하니,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요점 정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지은이 : 고상안 / 편역 손광성, 임종대, 김경수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갈래 : 고수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성격 : 교훈적, 우화적, 풍자적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문체 : 역어체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주제 : 경륜에 대한 존경심과 배려를 당부, 노인의 지혜로움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원제 : 효빈잡기(效嚬雜記)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출전 : 태촌집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내용 연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신의 계책 : 진나라의 젊은 장수 이신이 용기만 믿고 60만 대군을 요청한 왕전을 겁쟁이라고 비웃으며, 20만 대군을 이끌고 적진으로 진격했다가 패한 고사가 있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이해와 감상

 하찮은 인간이라도 나름대로의 장점과 특징이 있다는 '노마지지(老馬之智)'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노마지지(老馬之智)'라는 말의 출전은'韓非子'의 '說林篇'에 나오는 말로 '늙은 말의 지혜'란 뜻으로,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저마다 장기나 장점을 지니고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춘추 시대, 오패(五覇)의 한 사람이었던 제(齊)나라 환공(桓公:재위 B.C.685∼643) 때의 일이다. 어느 해 봄, 환공은 명재상 관중(管仲:?∼B.C.645)과 대부 습붕(柝朋)을 데리고 고죽국[孤竹國:하북성(河北省) 내]을 정벌하러 나섰다. 그런데 전쟁이 의외로 길어지는 바람에 그 해 겨울에야 끝이 났다. 그래서 혹한 속에 지름길을 찾아 귀국하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전군(全軍)이 진퇴 양난(進退兩難)에 빠져 떨고 있을 때 관중이 말했다.

  "이런 때 '늙은 말의 지혜[老馬之智]'가 필요하다."며 즉시 늙은 말 한 마리를 풀어놓았다. 그리고 전군이 그 뒤를 따라 행군한 지 얼마 안 되어 큰길이 나타났다.

 

 또 한번은 산길을 행군하다가 식수가 떨어져 전군(全軍)이 갈증에 시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습붕이 말했다.

 "개미란 원래 여름엔 산 북쪽에 집을 짓지만 겨울엔 산 남쪽 양지 바른 곳에 집을 짓고 산다. 흙이 한 치[一寸]쯤 쌓인 개미집이 있으면 그 땅 속 일곱 자쯤 되는 곳에 물이 있는 법이다." 군사들이 산을 뒤져 개미집을 찾은 다음 그곳을 파 내려가자 과연 샘물이 솟아났다.

 이 이야기에 이어 한비자(韓非子:韓非, ?∼B.C.233)는 그의 저서《한비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관중의 총명과 습붕의 지혜로도 모르는 것은 늙은 말과 개미를 스승으로 삼아 배웠다. 그러나 그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어리석음에도 성현의 지혜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 아닌가." [주] '노마지지(老馬之智)'란 여기서 나온 말인데 요즈음에도 '경험을 쌓은 사람이 갖춘 지혜'란 뜻으로 흔히 쓰이고 있는 말로 여기서 '늙은 쥐의 꾀' 이야기도 노마지지(老馬之智)의 이야기처럼 '오랜 경험을 가진 이의 지혜'의 말에 귀 기울이라는 속뜻이 담긴 글이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심화 자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고상안(高尙顔)

  1553(명종 8)∼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사물(思勿), 호는 태촌(泰村). 할아버지는 충순위증판결사 극공(克恭)이며, 아버지는 증 한성우윤 천우(天佑)다. 어머니는 신천 강씨(信川康氏) 습독 희언(希彦)의 딸이다.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고, 1576년에 문과에 올라 함창현감·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40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침입하자, 향리인 상주 함창에서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어 큰 공을 세웠다.

49세 이후 지례현감·함양군수를 지냈고, 이덕형(李德馨)·이순신(李舜臣) 등과의 서사 기록(書事記錄)도 남긴 바 있다. 그 뒤 울산판관을 지낸 후,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 생활을 하였다.

문집으로 1898년에 간행한 목판본 6권 3책이 전한다. 그 가운데 행장(行狀)에 보면 농사에 밝고 문장이 능하며, 농군을 가르치고 농사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하여 학계에서는 현전하는 〈농가월령가 農家月令歌〉를 그의 소작이라고도 본다.

이는 문집인 ≪태촌집≫에 〈농가월령〉이라는 기록을 볼 수 있고 또 행장에 적힌 치사 후의 농사와 관련된 생활을 볼 때, 〈농가월령가〉는 고상안과 관련이 깊었으리라는 짐작에서 연유된 것이다.

그 밖에 그의 문집에는 총화(叢話)·여화(餘話)에 해당되는 〈효빈잡기 茸嬪雜記〉를 비롯, 임진왜란 때 유성룡(柳成龍)에게 올린 팔책(八策)과 유합(類合), ≪해동운부군옥 海東韻府群玉≫에 대한 기록과 풍속·전설에 관한 기록 등이 전해지고 있어 일반 문집에 비해 이색적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점을 종합해 볼 때, 〈농가월령가〉에 나타난 계절 감각, 영농 내용 등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문집으로 태촌집(泰村集)이 있다.

≪참고문헌≫ 泰村集, 讀泰村集後(方鍾鉉, 한글 101, 1947), 農家月令歌解題(朴晟義, 韓國古典文學大系 7, 民衆書館, 1974), 農家月令攷(洪在烋, 東洋文化 6·7合倂號, 嶺南大學校, 1968).(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농가월령(農家月令(고상안))

 조선 중기에 고상안(高尙顔)이 지은 농사 교본(農事敎本). 1책. 필사본. 편차는 서(序)와 농사에 관한 제반사(諸般事), 정월령(正月令)부터 12월령까지의 농가월령, 이에 누락된 농사짓는 법, 농가의 행사, 약방(藥方)에 관한 것 등을 보유(補遺)한 잡령(雜令)으로 되어 있다. 산문체의 한문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1령(令)을 2절(節)씩 나누어 지었다. 원문 다음의 주는 이두와 한글을 혼용한 것도 있다.

이 작품의 제작 연대는 고상안의 문집인 ≪태촌집 泰村集≫에 실려 있는 〈농가월령서 農家月令序〉와 필사본 ≪농가월령≫의 서를 종합해 볼 때, 작자가 광해군 때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해서 학문과 농사에만 정진하던 1619년이라 할 수 있다.

내용은 서두에서 농사에 주력할 것을 주장했으며, 정월령부터 12월령까지 12월 순별, 24절후 순별로 농가에서 진행해야 할 농사일과 농사짓는 법 등을 작자의 체험을 토대로 체계적이고도 구체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이 작품은 작자의 상농사상(尙農思想)을 체험과 실증적 방법으로 펴 보인 것이다. 또한, 박세당(朴世堂)의 〈전가월령 田家月令〉이나 정학유(丁學游)의 〈농가월령가〉 등에 영향을 주었으며, 작자가 직접 농사에 종사하면서 농사의 묘리를 체득하고 견문한 바를 종합해 실제로 관찰하면서 쓴 것이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이 작품과 〈농가월령가〉의 내용을 대비해 보면, 전자는 후자보다 농사법과 농가 행사가 훨씬 구체적이고 실증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반면, 후자에 많이 나타나는 농가 습속이나 농가 풍속 등은 거의 기술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작품은 농민들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실용적인 농사 교본이라 할 수 있다. 개성 고씨(開城高氏) 문중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農家月令歌의 作者에 대한 瞥見(洪在烋, 어문학 4, 1959), 高麗歌謠와 口傳民謠(林基中, 高麗時代의 歌謠文學, 새문社, 1982).(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교훈적 수필

 필자의 오랜 체험이나 깊은 사색을 바탕으로 하는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수필로 그 내용이라든가 문체가 다 같이 중후하며, 필자 자신의 인생관이라고 할 수 있는 신념과 삶의 태도 등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교훈적 수필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은 독자에게 쾌락보다는 교훈을 주려는 의도로 창작된다고 보는 일종의 공리설(功利說)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시나 소설에서처럼 수필에 있어서도 이런 교훈적인 경향이 지나치면 자칫 예술성을 소홀히 하게 되는 교훈주의로 흐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