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관포지교(管鮑之交)

영국신사77 2007. 1. 6. 20:13

 

                       管 鮑之交(관포지교)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에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은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었답니다. 후에 관중은 명재상(名宰相)으로 명성을
얻게 되는데, 그가 명재상이 되기까지는 친구였던 포숙의 공이 지대했답니다.

  관중은 말년에  다음과 같은
포숙에 대한 칭송의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어릴 적 곤궁할 적에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할 때, 이익의 분배를
내가 포숙보다 더 많이 가져갔는데, 포숙은 나를 탐욕스럽다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아주었기 때문이었고, 벼슬길에
올라 많은 실수가 있어 사람들은 나를 어리석다고 했지만,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 하지 않고, 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알아주었다.

  또한 내가 포숙아와 함께 전쟁터에 나갔을 때, 내가 세 번이나 도망을
치자 사람들은 나를 비겁하다고 욕했지만, 포숙아는 내가 집에 연로한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알아주었고, 또 나와 포숙아가 제나라의
두 공자인 규(糾)와 소백(小伯)의 사부가 되었다가, 내란에서 공자 규를
모시던 내가, 공자 소백에게 패하여 참수형의 위기에 처했으나, 포숙아의 설득으로 목숨을 구하고, 오히려 재상의 자리까지 나에게 물려주어, 내가 이 자리
까지 올 수 있도록 나를 알아 주었다.

  결국 나를 나아주신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진정으로 알아준 이는
포숙아이다.

管仲 曰 吾始困時 嘗與鮑叔賈 分財利 多自與, 鮑叔 不以我爲貪
知我貧也.  吾嘗爲鮑叔 謨事 而更窮困, 鮑叔 不以我爲愚 知時有利

不利也.  吾嘗三仕 三見逐於君, 鮑叔 不以我爲不肖 知我不遭時也.  
吾嘗三戰三走, 鮑叔 不以我爲怯 知我有老母也.  公子糾敗 召忽 死之

吾幽囚受辱, 鮑叔 不以我爲無恥 知我不羞小節 而恥功名 不顯於天下也.
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史記, 管晏列傳)

 

 

 

 

                       관포지교(管鮑之交)

 

 

   중국의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 같은 친교라는 뜻으로, 친구 사이의 다정한 교제를 일컬음. 《出典》'史記' 列子

 

  춘추시대 초엽, 제(齊)나라에 관중(管仲 : ?∼B.C 645)과 포숙아(鮑叔牙)라는 두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죽마고우(竹馬故友)로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다.
관중은 한때 소백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그가 먼저 귀국하여 환공(桓公 : B.C 685-643)이라 일컫고, 노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아울러 관중의 압송(押送)을 요구했다.

 

  환공이 압송된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제(齊) 한 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臣)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시려면 관중을 기용하시옵소서."

  도량이 넓고 식견이 높은 환공은 신뢰하는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로 중용(重用)하고 정사를 맡겼다 한다.

  관중은 훗날 포숙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젊어서 포숙아와 장사를 할 때 늘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차지했었으나 그는 나를 욕심장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용렬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일에는 성패(成敗)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벼슬길에 나갔다가는 물러나곤 했었지만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운이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싸움터에서도 도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老母)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