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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시시각각] 점 보는 젊은이들에게

영국신사77 2007. 1. 2. 15:34
            [이훈범시시각각] 점 보는 젊은이들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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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번 점집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노총각 선배 하나가 언제 장가가게 될지 궁금하다 해서 함께 미아리를 찾았지요. 골목 양쪽으로 늘어선 점집 중에 그럴싸해 보이는 한 곳을 골라 들어갔습니다. 사랑방으로 안내되고 잠시 후 시각장애인 역술가와 탁자 앞에 마주 앉았습니다. 생년월일시 사주를 일러주고 점쟁이가 점자 책을 짚어 읽는데 공연히 머쓱해 키득거렸습니다. 그것이 거슬렸는지 아니면 정말 인연이 아니었는지 점쟁이는 "오늘은 때가 맞지 않으니 다음에 다시 오라"며 우리를 내쳤습니다.

그 후 20년 가까이 지난 요즘은 다른 곳에서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놀랍게도 금싸라기땅 압구정동이 사주카페의 메카가 됐지요. 고객 대부분은 여러분 같은 20대에서 30대 초반의 젊은이입니다. 그들은 20년 전의 젊은이들처럼 점 보는 걸 쑥스러워하지도 않습니다. 당당하게 사주.관상을 묻고 연인끼리 함께 와 궁합을 봅니다. 타로 카드나 별자리 등 서양 점술도 인기라지요. 압구정동의 한 도사는 "예전 손님들은 점쟁이가 얼마나 신통한지 시험하려고 일부러 숨기고 말을 안 했지만 요즘 젊은 층은 있는 거 없는 거 다 털어놔 점치기도 편하다"고 귀띔하더군요.

좋게 보면 여러분이 점괘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기보다 가벼운 인생 상담을 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밝고 산뜻한 사주카페 분위기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20년 전에 비해 훨씬 두터워진 미래의 불투명성 앞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망감의 표현인 것 같아 가슴이 묵직합니다. 여러분이 즐기는 인터넷 포털이나 휴대전화 서비스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게 '운세 보기'라는 것도 분명 정상은 아닌 걸요.

거북 등껍데기로 길흉화복을 점치던 때부터 인간의 삶이 언제 확실한 적이 있었습니까. 인터넷에 온갖 정보가 넘쳐나고 인공위성 수천 개가 지구 궤도를 돌며 별 대신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시대지만 여전히 손금이나 수정구슬로 앞날을 읽어 보려는 게 인간의 심성이지요. 취업난.경제난이라는 겹겹 안개 속에 있는 여러분은 더욱 그럴 겁니다.

그러나 어설픈 점쟁이한테 인생을 내맡기기에는 젊음이 너무 아깝지 않을까요. 패기와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목표 대신 손금에, 얼굴 생김새에 미래가 예정돼 있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말입니다.

여러분보다 훨씬 덜 과학적 사고를 했을 조선시대의 젊은이들도 그런 삶을 거부했습니다. 세종 때 얘기 하나 할까요. 임금이 병이 나 자리에 눕자 궁중 나인들이 굿을 벌였는데 성균관 유생들이 득달같이 달려가 무녀를 쫓아냈습니다. 이런 불경이 있나요. 놀란 내시가 왕에게 일러바쳤지만 세종은 일어나 앉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일찍이 선비를 기르지 못할까 염려했는데 사기(士氣)가 이러하니 무슨 걱정을 하리오. 그 말을 들으니 내 병이 낫는 것 같구나."

하긴 이런 어진 정치가 있으니 점 따위에 의존할 필요도 없었는지 모릅니다. 갈팡질팡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현실을 사는 여러분과는 다르지요. 그렇다고 점집으로 달려가진 마십시오.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실력을 키워야지요. 그래도 궁금하다면 차라리 제가 점을 쳐드리지요. 여러분에게 탄탄대로를 열어주지 못한 선배 세대의 책임을 통감하며 말입니다.

여러분의 앞날을 생각하며 주역(周易)으로 점을 쳐봅니다. 아, '진위뢰(震爲雷)' 괘가 나오는군요. '위와 아래서 천둥이 진동하니 막힌 일이 트일 괘'입니다. 천둥 칠 때는 겁나 떨다가 그치고 나면 웃지요.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근신하며 노력한다면 마침내 행운이 온다는 얘기입니다. 자, 힘내십시오. 노력하는 자에게는 분명 단 열매가 기다립니다. 그런데 어째 우리나라의 점괘 같기도 합니다. 당연하지요. 여러분의 앞날이 대한민국의 미래니까요.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지만 여러분이 흔들리지 않고 정진한다면 대한민국의 앞날은 붕정만리(鵬程萬里)일 것입니다.



                                                                                                                 이훈범 논설위원

                                                                                      [cielbleu@joongang.co.kr]   
2007.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