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다리오 1세 [베이스툰 석비] -성경과 페르시아 -

영국신사77 2006. 9. 19. 12:05
             다리오 1세 [베이스툰 석비] -성경과 페르시아 -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알고 있는 다리오(주전 522~486년)는 흔히

‘대제’라는 수식어를 붙여 부른다. 그는 파르티아의 분봉왕

히스타스페스의 아들로, 주전 522년 왕좌에 올랐다.

 

  그는 왕좌에 오르기 전, 캄비스스(Cambysrs) 2세의 이집트 정벌때

에는 그 유명한 ‘불멸의 방위대’(the Immortal Guard)의 장군으로

활약했다.

   이전까지는 다리오 대제를 알기 위해서 해로도투스의 『역사』와

『성서』의 자료를 통하여 재구성하였지만, 약 150년 전부터는 쐐기

문자가 판독이 되면서, 동시대나 후대의 학자 · 서기관들에 의해

구성된 다리오 대왕에 대한 기록이 아닌, 다리오 대제 자신이 자신

기술한 자료들에 의해 다리오 대왕의 자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페르시아 제국의 비문들은 대개 3가지 쐐기문자들로 쓰여졌다. 즉,

당시의 패르시아인들이 고안한 인도-유럽어의 하나인 고대

페르시사어, 수사를 중심으로 주전 3100년경부터 쓰여져 오던

엘람어,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바빌론 제국과 앗시리아

제국의 언어였으며 셈어의 아주 오래된 형태였던 아카드어로

쓰여졌다.

   아카드어는 주전 2600년부터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쓰이던

쐐기문자로서 페르시아 제국이 바빌론 제국을 멸망시킨 후,

자연스럽게 물려 받은 당시의 ‘고전어’였다. 엘람어는 수사를 중심

으로 특별히 궁중문서와 경제문서를 기록하기 위해 차용되었다.

지난 100년 동안 코코스(Caucaus)언어, 또는 인도 남부의

드라비다어(Dravidian)와 연결시키려는 학자들의 주장이 있으나,

아직 결론 내지지 못한 상태이고, 오히려 수메르어(Sumerian)처럼

고립어(Languageisolate)라는 것이 더 정설이다.


 

   이와 비교하여 고대 페르시아어가 인도-이란어(Indo-Iranian)의

한 분파라는 언어 구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고대 페르시아

문자의 출현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월티 힌쯔(Walter Hinz)나 프란쯔 바이쓰바흐

(Franz H. Weissabach) 등 독일 진영 학자들은, 다리오 대제 당시에

페르시아 문자가 고안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3개의

쐐기문자들로 쓰여진 베히스툰 비문(뒤에 자세히 다루겠음)에서,

고대 페르시아 비문은 가장 나중에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들의 주장에 따르면, 베히스툰 비문의 70번째 단락은 새로운

문자의 고안, 즉 고대 페르시아어를 고안한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견해는 그 후에 많은 인도-유럽어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지만, 이골 디아코노프(Igor M.Diakonoff),

일야 거세비취(Ilya Gershevitch) 등 러시아계 학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글자 형태는 아람어를 지칭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여튼 고대 페르시아어가 그 제국 당시에만 왕조기록을 위해서

쓰여졌기 때문에, 다리오 대왕 시절에 급히 고안된 문자 체계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다리오 왕에 대한 고대 페르시아 비문을 60개 정도 가지고

있고, 이 분량은 나머지 모든 고대 피르시아 제국의 왕들의 문서를

다 합친 것보다 많은 숫자이다. 이 다리오의 문서 중 가장 중요한

문서가 바로 베히스툰 비문(Behistun Inscription)이다.

 

 

  다리오 대왕의 베히스툰 비문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비문 중

가장 길고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이 비문은 바빌론, 하마단,

수사를 이으면서, 동으로는 중앙 아시아와 인도와 통하고, 서쪽

으로는 터키와 그리스를 잇는 ‘비단길(Silk Road)’의 원형이 되었던

‘왕의 대로(Royal Road)' 였던 아주 오래된 낙타 행상의 길 위에

위치해 있다.

  
   이란의 허리를 이루는 자그로스 산맥(Zagros)의 한 지산으로,

500m 정도의 편편한 산이 오르게 되었는가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주전 521년 지상으로부터 깍은 듯한 절벽인 곳에 ,지상 69m위로,

가로 7m 와 세로 18m 의 비문과, 가로 3m 와 세로 55m 의 부조석상

비문을 새겨 놓았다.

 

   다리오 왕이 이곳을 고른 이유는 우연이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첫째로,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즉 비문과 부조석상을 새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평평한

바위가 필요했다. ‘왕의 대로’를 따라 있는 여느 자그로스 산맥의

산들과는 달리, 베히스툰산은 메데 왕국의 목초지를 포함하기도 한

매우 평평한 절벽을 지닌 산이었다.

 

   둘째로, 베히스툰산 아래에 메소포타미아나 이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몇 개의 샘터들이 있다.

 

    이 ‘왕의 대로’를 지나간 수많은 행상들과 병사들이 지친 몸을

달래던 쉼터였기에, 고대 근동 당시 유명했던 곳이 틀림없다.

 

   셋째로, 디오도러스의 작품(Diodorus Siculus 2.13.2)에

의하면, 이 산을 표기하는데 이 단어는 고대 페르시아어의

'Bagastana'를 음역한 것이다.

 

    Bagastana은 직역하면 ‘신들의 장소’ 즉, 이곳은 오래 전부터

성스러운 곳으로, 이 근처에서 가로 10m, 세로 10m의 제단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네 번째로, 다리오 대제가 그가 등극할 때, 최고의 정적

가우마타(Gaumata)를 잡아 처형한 곳이 바로 이 베히스툰산

근처이다.

 

   베이스툰 비문안에서는 그 곳을 ‘메데지방, 나사야 지바의

시카유바티(Sikayubati)'라고 말하는데, 그곳이 바로 베히스툰산

뒤로 100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그러므로 베히스툰산

은, 다리오 왕이 자신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이처럼 실제적, 종교적,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장소에, 다리오 왕은

자기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베히스툰 석비’를 새기게 되었는데,

후일에 이 비문이 ‘고대 근동 비문의 여왕(Empress of

Oriental Inscriptions)'이라 불리우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베히스툰 비문과 부조상의 구성은, 고대 근동의 아주 오래된

예술사적 표현의 결정체였다. 부조상과 그 구성 그리고 비문들은

이라크와 이란의 국경 지역인 ‘사리-폴리-주합’(Sar-i Pol-i Zuhab)

에서 발견되는 룰루비(Lullubi)의 왕 아누바니니(Anu-banini)의

부조물과 아키드 왕족의 나람신 왕의 비문(Naram-Sin Stele)에서

그 영향을 받았다.

  

   사실 이것은, 파르티아(Parthia)의 왕 히스타스페스(Hystapes)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고레스와 캠비시스처럼 아케미니드왕조의

정통성이 결여되었던 다리오 왕이, 이 성산 베히스툰에 조로아스터의

가장 위대한 신 아후라마즈다(Ahuramazda)로부터 인정받아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자기의 정통성을 천명하게 될 때, 당시 고대 근동

서 가장 유명한 예술사적 자료를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아누바니니 비문은, 아누바니니 왕이 새벽별의 여신 이난나

(Inanna)로부터 왕권을 상징한 원형을 받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 부조에서 이난나는 2명의 발가벗은 포로를 포승줄로 묶고

있다. 아누바니니 왕은 헬맷을 쓰고 왼손에는 활과 화살을, 오른손

에는 칼을 들고 있다. 이 비문의 배열은 베히스툰 비문의 배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이 없다.

 

   베히스툰 비문에서 다리오 왕은 2명의 신하들과 서 있다. 왼쪽의

신하는 고브리야스(Gobryas)로서 페르시아 창을 들고 서 있고,

오른쪽 신하는 인타페르네스(Intaphernes)로 활을 들고 있다.

 

  아누바니니처럼 다리오 왕은 왼발로 그의 정적 가우마타(Gaumata)

를 밟고 있고, 그 뒤로 8명의 포로를 포승줄로 목을 감은 채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다리오 대제는 스키타이 정벌에서 ‘스쿤카’(Skunkha)

라는 고깔모자를 쓴 반란군을 잡은 후에, 본래 새겼던 글씨 부분을

삭제하고 스쿤카의 부조상을 첨가하였다.

 

  

   이 모든 일이 아후라마즈다의 허락으로 이루어짐을 강조하기

위해서, 날개 달린 아후라마즈다가 손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원형을

달고 다리오 왕을 강복하고 있다. 이처럼 다리오 왕은 그의 부조물과

비문들을 이 성스러운 산에 새겼다. 다리오 왕의 왕권 정통성

세우기 위해, 베히스툰 비문이 계속해서 새겨지게 되었고, 같은 내용

이 당시의 국제 공용어인 아람어로 쓰여져 23개의 페르시아 제국의

각각 속곡에 보내지게 되었다.

 

  베히스툰 비문에서, 다리오 대제는 캄비시스를 둘러싼 정치 혼란기

설명하고 있다.

 

  다리오 대제는 캄비시스가 그의 친동생 바르디야(Bardiya :

그리스어로는 스메르디스 Smerdis)를 살해했지만,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말한다. 그 때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

(a Magian priest : Magi 는 신약에서 동방 박사로 알려져 있음.)인

가우마타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자신이 바르디야

라고 속여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추대 받기에 이르렀다.

   그 때에 캄비시스는, 이집트 정벌 중 가우마타가 반란을 일으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페르시아로 돌아오다가

자기가 찬 칼에 찔려 실수로 죽게 된다.

 

  이 모든 사건을 감지했던 다리오는, 자기가 페르시아 제국의 패권을

잡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6명의 경호대원과 함께 신속히

가우마타와 그의 군대에 대한 정벌에 나선다. 그는 곧 가우마타를

죽이고, 6명의 경호대원의 추대로 페르시아의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러한 기록이 베히스툰 이외의 사료에서 증빌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캄비시스가 죽은 후 반란이 일어나 페르시아가 혼란에

빠졌고, 다리오는 그것을 이용하여 왕이 되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페르시아에서의 반란은 도화선처럼 번져, 페르시아제국의 모든

나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다리오 대제는 그의 즉위 1년

동안 이런 반란들을 진압하는데 전력투구하였다.

 

  그의 첫해의 전쟁에서, 9번의 전쟁으로 9명의 반란군 대장들을 처형

하였다. 이들 반란군들의 이름과 그들의 나라명이, 베히스툰 부조물의

하단에 세가지 쇄기문자들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가 체포하여

처형한 마지막 반란군 대장은, 이 부조물의 맨 뒤에 서있는 스쿤카

이다. 그는 이란의 북동쪽에 위치한 스키타이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

켰을 때 그들의 대장이었는데, 그는 비문에서 ‘고깔 모자를 쓴 사람

(tigra xauda)' 으로 묘사된다.


 

 

 

 

 

                                 출처 http://www.theorich.com/  한국창조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