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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서 5, 6장에 나오는 메대사람 다리오의 정체

영국신사77 2006. 9. 19. 09:27
 
      
 
              
         다니엘서 5, 6장에 나오는 메대사람 다리오의 정체 
메대 제국의 역사적 배경과 다리오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 이세였더라. 다리오가 자기의 심원대로 방백 일백 이십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 (단 5:31, 6:1).

   

 메대 제국의 다리오 왕은 페르샤 제국의 고레스 대왕과 함께 6장의 배경을 이루고 있어, 이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다니엘의 경험과 연관짓기 전에, 메대와 다리오 왕, 그리고 이들과 불가분한 페르샤의 초기 역사와 고레스와의 관계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가.메대 제국과 페르샤의 초기 역사

   메대(the Medes)는 민족 이름이고, 메디아(Media)는 그들이 세운 나라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메대는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하나인 야벳의 아들 마대(Madai)의 자손들이 세운 나라로(창 10:2, 대상 1:5), 페르샤와 함께 인도-유럽족(Indo-European)에 속한다.

 

  이들은 페르샤와 함께 메소포타미아와 인도 사이에 놓인 이란고원(高原) 지대에 살았다. 그들은 자신들은 "아리아누"(Arianu) 즉 "귀족들"(nobles)이라고 불렀으며, 그들의 나라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되어 "아리아나"(Ariana) 혹은 지금의 이란(Iran)으로 1935년부터 불려지고 있다.

 

   이들 메대 족속에 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기원전 9세기 중엽인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III세(859-824 BC) 때부터인데, 그후로는 계속 역사에 등장한다. 이들은 앗시리아의 여러 왕들에 의해 거듭거듭 정복되어 조공을 바쳤고, 북방 이스라엘이 망한 후 포로된 백성들이 앗시리아에 의해 메대의 여러 도시들로 강제로 이주되기도 했다(왕하 17:6, 18:11).

 

   헤로도터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 후 기원전 7세기 초에 데이코스(Deikos·혹은 c. 700 - c. 647 BC)가 일어나 메대 족속들을 통일하여 왕국을 세우고, 엑바타나(Ecbatana)를 수도로 정하였다.

 

   데이코스 다음에는 그의 아들 파라오르테스(Pharaortes)가 22 년간(c.647 - 625)다스렸는데, 이때 그들 남쪽에 있던 페르샤족을 복종시켰다고 한다. 그 후 파라오르테스의 아들인 시악사레스(Cyaxares I)가 즉위하여 약 40년간(c. 625 - c.585) 다스렸는데, 그는 앗시리아를 넘어뜨리기 위해 느브갓네살의 아버지인 바벨론의 나보포랏살과 동맹을 맺어, 기원전 612년 니느웨를 함락시켰다.

 

 정복한 앗시리아의 영토는 양분하여 티그리스강 동쪽과 북쪽은 메대가 차지하고, 바벨론은 이 자연적인 경계선의 서쪽과 남쪽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러한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왕실(王室)혼인이 이루어져, 시악사레스(1세)의 아들인 아스티아게스(Astyages)의 딸 아미티스(Amytis)가 나보포랏살의 아들 느브갓네살에게 시집가게 되었다. 그 후 시악사레스는 소아시아의 스키디아(Scythians)족을 정복하여, 그 영토를 병합하였으며, 기원전 585년에는 리디아와도 접전했으나, 그해 5월 28일 일식(日飾)이 일어나자 서로 전투를 중지하고 강화(講和)하였다.

 

   시악사레스 1세 다음에는 그의 아들 아스티아게스(Astyages)가 즉위하여 약 35년간(c. 585 - c. 550) 다스렸는데, 그가 바로 고레스의 외조부라고 전한다.

 

 역사가 헤로도터스에 의하면, 아스티아게스는 꿈에 자기의 딸 만다네(Mandane)에게서 강물이 흘러나와 아시아 전역에 넘치는 것을 보고, 이를 경계하여 딸을 메대의 귀족에게 시집 보내지 않고, 안산(Anshan)에 있는 그의 페르샤의 봉신왕(封臣王)인 캄비세스 I세(Cambyses I c.600 - 559)에게 멀찍이 시집 보냈다.

 이렇게 이루어진 결혼 관계를 통하여 태어난 것이 바로 페르샤의 국부(國父)인 고레스 대왕(Cyrus II 558-530 BC)인 것이다.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의 기록에 의하면, 고레스가 12세 되었을 때, 외조부인 아스티아게스는 딸과 외손자를 불러들였는데, 어머니가 페르시아로 귀국한 뒤에도 고레스는 메대에 남아서 외조부에 의해 양육되었다.

 고레스의 비범한 재간과 통솔력은 그가 장차 위대한 통치자가 될 것임을 분명히 드러냈다. 한 때 외조부에 의해 고레스를 죽이려는 시도까지 착수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고레스에 의하여 도전받게 되었다.

 

   기원전 553년 고레스는 종주국(宗主國)인 메대에 대해 반기를 들고, 외조부 아스티아게스에 도전했다. 처음 두번은 패했지만, 세번째 싸움에서 메대의 주장(主將) 하르파구스(Harpagus)가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550년 고레스는 수도 엑바타나를 점령하는데 성공해서 외조부 아스티아게스도 사로잡았으나, 선대(善待)하여 저 멀리 카스피해 남쪽의 히르카니아(Hyrcania)의 지방 장관으로 보낸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본래 메대와 페르샤는 종족도 같고, 두 왕가가 왕실 결혼으로 긴밀히 관련되어 한 나라 같았기 때문에, 급격한 정변(政變)이 없이 한 왕가에서 다른 왕가로 정권이 교체된데 불과했다.

 

   단지 페르샤의 귀족들이 정부 요직(要職)에 대거 진출한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역시 유능한 메대 사람들은 여전히 기용되었다.

 고레스는 메대 사람들에게 유화(宥和)정책을 써서, 아스티아게스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시악사레스 2세(Cyaxares II)를 즉위시켜, 메대의 상징적인 왕으로 남아 있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메대와 페르샤의 연합군은 바벨론을 침공하여, 기원전 539년 10월 13일 고레스의 장군인 구바루(Gubaru), 혹은 희랍어로 고브리아스(Gobryas)가 바벨론에 진입(進入)했고, 고레스는

10월 29일에 입성했다.

                                   나.다리오의 신원

   그렇다면 바벨론이 함락된 후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고 나서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62세"라 하였고(단 5:31), "자기의 심원(心願)대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다니엘을 총리로 기용한 그 다리오는 누구인가(단 6:1)?

 

   다리오의 신원에 관하여, 그 동안 여러 가지 추론이 있어 왔다. 다음과 같은 윤곽을 기초로 그의 신분을 확인해 보자.


                                a 성경상의 진술
[아하수에로의 아들]이었다(단 9:1).
벨사살이 죽던 밤에 나라를 "얻었"으며(단 5:31),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었"다(단 9:1).

가계(家系)는 메대족이었다(단 5:31, 9:1, 11:1).

바벨론이 멸망하던 기원전 539년에 그의 나이는 약 62세였다(단 5:31).

그의 통치 첫 해에 관해서만 언급되어 있다(단 9:1, 2, 11:1).

전국에 120명의 방백을 세우고 다니엘을 세 총리 중 수석총리로 임명했다.

 

                                b. 고대 역사의 기록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아래와 같이 썼다.
"페르샤 왕 고레스와 메대 왕 다리오(Darius)는 그(나보니더스)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다리오와 그의 친척인 고레스와 함께 바벨론을 함락시켜 바벨론의 통치를 끝냈을 때 그의 나이는 62세였다. 그는 아스티아게스(Astyages)의 아들이었으며, 희랍 사람들 가운데서 그는 다른 이름을 가졌다."

 

   희랍의 역사가 크세노폰의 기록에 의하면, 메대에서는 아스티아게스가 죽은 후 시악사레스(2세)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고레스의 어머니 만다네와 남매 관계이기 때문에, 고레스에게는 숙부가 된다.

 고레스는 어린 시절 외조부인 메대 왕 아스티아게스의 궁전에서 자랐기 때문에, 숙부인 시악사레스(2세)와는 친숙하였다.

 후에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한 뒤, 그는 숙부인 시악사레스(2세)의 딸 카산다네(Kasandane)와 결혼하였으며, 장인은 결혼선물(dowry)로 나라(메대)를 사위에게 주었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레스는 자신이 메대를 정복하였을지라도, 메대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명목상, 숙부인 시악사레스(2세)를 메대 왕으로 세웠다.

 바벨론을 함락한 다음에는 그를 장인으로 삼아 ,당시 나이가 약 40세 안팎인 자기에 비해, 이미 노년에 접어든 62세의 장인을 잠시 바벨론의 명예 왕으로 앉힐 수 있었다.

 

 

 

그런데,

 

   메대 사람 다리오의 조카였다.

   고레스는 메대와 페르샤 연합군의 총 사령관이었다.

   다리오는 메대의 군주였다.

   다리오는 바벨론이 함락된지 약 2년 이내에 죽고, 고레스가 계승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비추어 볼 때, 5장 31절과 6장의 다리오는, 시악사레스 2세 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왜 그의 이름을 다리오(Darius)라고 하였을까?

   이에 대한 설명 가운데 하나는, 다리오(Darius)는 그 자체가 고유명사인 이름이 아니라, 여러 왕들에 의해 채택된 통칭(通稱)인 보통 명사로 "정복자"(Subduer)를 뜻하는 말이요, 보좌 명칭(Throne name)이라고 한다.

   또한 다리오를 아하수에로(Ahasuerus)의 아들이라고 했는데(9:1), 이 곳의 아들은 손자나 더 먼 자손을 의미할 수 있으므로, 고레스의 외조부인 아스티아게스가 아하수에로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웠음이 밝혀졌다.

 

   지금까지의 모든 자료를 종합해 볼 때, 6장의 다리오는 고레스의 숙부요, 장인인 시악사레스 2세(Cyaxares II)일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다. 메대 사람 다리오 왕의 신원에 관한 견해들

   다니엘서 5장 31절, 9장 1절, 11장 1절에 나오는 "메대 사람 다리오"가 누구인가에 대하여는 그 동안 많은 견해들이 있어 왔다.

   물론 잘 알려진 페르샤의 세번 째 왕인 다리우스 1세(Darius I, 522-486 BC)와는 다른 사람이다.

   언급된 이름들로는 고레스가 정복한 메대의 왕이요 외조부인 아스티아게스(Astyages), 아스티아게스의 아들이요 고레스의 숙부이며 장인이기도 한 시악사레스 2세(Cyaxares II), 고레스(Cyrus) 자신, 고레스의 아들인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고레스의 장군으로 그보다 두 주일 반 앞서 바벨론에 입성한 구바루(Gubaru, 혹은 Ugbaru, 헬라어 표기로 Gobryas로도 부름) 등이다.

 

   이 여러 후보 가운데, 성경의 기사를 모두 충족시키는 역사적 인물이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지금까지 시악사레스 2세와 구바루로 압축되어 왔었다.

 

   실제로 기원전 539년 10월 바벨론을 함락시킨 고레스의 장군인 구바루가 유망하여, 윌리암 쉐이(William H. Shea)나 맥스웰(C. Mervyn Maxwell)은 그 가능성을 택했다.그러나 맥스웰의 다니엘서 연구가 출판된 이후, 다시 연구된 대영 박물관의 쐐기문자 본문에 의하면, 당시 고레스와 그의 아들 캄비세스의 섭정 연대 해석에 차질이 있음과 함께, 구바루의 사망 날짜도 잘못 이해되었음이 발견되어, 윌리암 쉐이 자신이 자신의 견해를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몇 가지 새로운 이해를 곁들여, 그는 다니엘서의 "메대 사람 다리오"를 다름 아닌 고레스 자신이라 하고, "다리오"는 물려진 "보좌 명"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변동 가운데서, 본서는 이 문제에 관한 크세노폰의 기술에 몇 가지 미흡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악사레스 2세가 다리오의 신원에 보다 적합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리오가 이들 가운데 누구인가 하는 것은, 다니엘서의 신빙성이나 중요성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과, 계속하여 더 확실한 사실이 밝혀지리라는 기대이다.

 

 

                                          http://blog.naver.com/nick74/140015507066

 

        출처 = http://ilovejesu.net/board/view.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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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리우스: 의문에 둘러쌓인 왕 

   역사속의 어디에서도 그사람의 이름이 언급된적이 없으며, 오직 성경과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만 언급할뿐, 어디에도 없는 인물이 있다. 그사람이 바로 다리우스이다.

   기원전 539년 10월 5일에서 6일로 넘어가던 날 밤, 바빌로니아제국의 수도였던 바벨론을 포위하던 일단의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시각 바벨론의 젖줄이자 해자노릇을 하던 유프라테스 강물의 수위가 낮아지고 있었다.

   바로 그 시각 페르시아와 메디아간의 연합군중에 공병대들이, 바벨론성으로부터 30Km지점 상류에 있던 인공호수(바빌로니아 1대 왕이었던 나보폴리사르가 바벨론성을 구축하기위해 만들었다.)로 유프라테스 강물을 돌려놓았던 것이다.

   페르시아 연합군은 바벨론성에 진입하였으나, 그들을 막는 바빌로니아 병사는 소수에 불과할뿐, 대체적으로 평화로운 행진이었다.

   그날밤 바벨론의 차기 왕이자 당시 바벨론의 왕, 나보니두스의 장남이자 대리섭정자였던 벨사살이 페르시아의 군인에 손에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6일에서 11일까지 반란세력을 제어하게된다. 때는 기원전 539년 10월 11일 페르시아군의 총사령관이자 페르시아의 왕인 키루스가 바벨론성에 입성한다. 그리고는 자신과 함께 싸웠던 다리우스를 바벨론의 왕으로 임명한다.

다리우스는 그후 120여명의 관료를 임명한다. 성경과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 언급된 내용은 이러하다.

   하지만 세속역사에서는 그 이름에 대한 언급을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었다. 다만 밝견할수 있는 것은, 몇몇 자료에서의 그의 일생에 관련된 부분적인 것들이 보여지고있다. 

   하지만 바벨론 정복과 관련되어 중요한 금석문이 밝견되면서, 다리우스를 피력할 인물을 찾을수가 있다.

    '나보니두스연대기'라는 점토판이 밝견되면서, 다리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금 전해지는데 과거 어디에서 밝견할수 없었던 인물을 만나게 된것이다. 나보니두스 연대기의 내용은 이러하다.

'키루스가 티그리스 강변 오피스에 있는 아카드의 군대를 공격하였을 때인 타슈리투[티시리(9~10월)]월 14일에, 시파르는 전투없이 함락되었다. 나보니두스는 도망하였다.

  같은 달 16일[기원전 539년 10월 5일]에 구티움을 총괄하던 총독 고브리아스(구바루)와 키루스의 군대가, 전투없이 바벨론에 진입하였다. 그의 앞에는 푸른 나뭇가지들이 펼쳐져 있었다. 바로 술무(평화)의 상태가 그 성에 임한 것이다.

   키루스는 바벨론 전역에 인사말을 보냈다. 그의 총독인 고브리아스는 바벨론에 부총독들을 임명하였다.'

일단의 역사학자들은 이 '고브리아스(구바루)'를 다리우스라고 말한다. 그의 활동에 대한 기록들이 우리가 알려고 하던 다리우스와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며, 나보니두스 연대기 이후 그의 이름에 대한 언급이 다른 어디에도 찾아볼수 없다는데 중점을 두고 보고있다.
 
   특히 나보니두스의 장자였던 '벨사살(벨사쟈르)'에 대한 오보적인 기록(다니엘서에서 나왔던 벨사살이 실존인물이 아니었다고 말한것)때문이었을까? 사학자들은 구바루에대해 보다 더 신중에 신중을 기한 결과, '그가 다리우스 였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피력한다.

   그렇다면 다리우스란 사람이 왜 역사속으로 사라졌으며, 그의 일생에 걸친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을 파해쳐보아야 할것이다.
 
 '짐은 바빌론(바벨론)의 영토 동편에, 튼튼한 성벽으로 울타리를 만들고 해자를 팠으며... 역청과 벽돌로 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을 거대한 성벽을 쌓았다.'
 
   앗시리아를 무너뜨리고 신바빌로니아의 2대 군주로 활약하던 왕 네부카네자르 2세(느부갓네살)는, 자신이 건축한 바벨론성을 자신의 역대기에 기록하였다. 그는 자신이 건축한 바벨론성을 어느 누구도 무너뜨릴수 없을 것이라 단언하였다. 그처럼 그가 지은 바벨론성은 어느 누구도 제압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견고하게 지었다고 그는 자부했다. 하지만 그 성은 그가 생각했던것 만큼 난공불락은 아니었다.
 
   때는 기원전 539년 10월 5일 밤, 페르시아의 왕이었던 키루스는 대군을 이끌고 바벨론 성을 함락시킨다. 그에게는 훌륭한 다른왕이 옆에 있었다. 그가 바로 다리우스이다. 다리우스라면, 흔히들 다리우스 대왕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었던 사람으로 별개의 사람이었다.
 
   키루스는 이 사람을 어떻게 얻었을까? 그점은
'로버트 콜린스' 라는 사람의 저서에서 살펴볼수 있겠다. 그의 저서「메디아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The Medes and Persians)에서 이렇게 말한다.
  
   '메디아 사람들은 평화로운 가운데, 페르시아 사람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메디아 사람들은 종종 행정부의 고위직이나 페르시아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외국인들은 메디아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할 때, 피정복자와 정복자 간의 구분을 하지 않았다.'
 
   이처럼 메디아는 페르시아에 합병되어, 페르시아 제국과 급속도로 친화적으로 변모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수의 메디아 사람들이 페르시아의 주요 관직에 앉았다는것 또한 알수있었다. 그렇다면 다리우스는 어떠할까?

 

   다리우스에 대한 기록은 "메디아의 왕이었던 아하수에로의 아들이었다"는것, 그리고 "페르시아의 메디아 정복 과정 중에 아하수에로는 페르시아와 동맹에 가까운 합병"에 이르게 되었다는것이다.

   이 당시 그의 아들이었던 다리우스는 왕자로 있었으며, 페르시아와 메디아간의 평화를 주장한 사람이었다. 선왕 아하수에로의 평화적인 합병에 대한 유지를 이어,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 그는 페르시아의 키루스를 도울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페르시아와 연합한 메디아 사람들은 바빌론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주된 역할을 하였는데, 이들(메디아 병사들)의 지도자가 바로 다리우스였던것을 비추어 볼 때, 메디아의 군사들이 얼마나 페르시아에게 협조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겠다.
 
   키루스가 바벨론성을 함락시키고, 얼마후에 "바벨론왕"의 호칭을 당시 "메디아의 왕"이었던 다리우스에게 넘긴다. 당시 바벨론은 상업적으로 절대 필요한곳이었기 때문에, 페르시아가 신임하는 왕이 필요했을 것이었고, 페르시아의 왕으로서의 정무때문에 스스로가 왕의 자리에는 오르지 않았다.

 

   키루스가 바벨론 왕의 자리에 오른것은, 바벨론성의 함락후 7년후인 B.C. 530년에 자신의 아들이었던 캄비세스 2세와 공동통치자로써 등장했을 때였다. 그것은 결국 7년이란 시간동안 바벨론을 통치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다리우스는 키루스대왕의 이러한 신임을 받고, 바벨론의 왕으로 오르게 된다.  그에 대해 성경에서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메대(메디아)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다리우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다리우스)는 육십 이세였더라..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방백 일백 이십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또 그들위에 총리 셋을 두었으니 다니엘이 그 중에 하나였다.'
 
   다리우스는 어지러운 정부를 개편할 필요에 의해 과감한 정치개편을 단행하여, 페르시아식의 법규를 제정하게된다. 키루스대왕의 군사참모로서, 메디아의 왕으로써 그의 능력은 이를데 없이 화려하기만 하였다. 하지만 그의 생존기록은 미미하기만 할 밖에 없다..

   왜 그에 대한 기록이 사라진 것일까? 우리가 알수있는 범위는 적다고 볼수있지만,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내용이 있다. 바로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와 '성경 다니엘서'에서 조금이나마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리우스가 바벨론의 총독이 된 후 그는 120명의 관리를 임명하게된다. 이들중에 3명을 더욱 비중있는 지위를 맡기게 되었는데, 그들중의 한명이 바로 다니엘이었고, 나머지는 바벨론에 있던 관리들이었다.

   다니엘 이외의 나머지 관리들은 당시 바벨론에 있던 관행(어느정도의 부패가 있던것으로 추정됨)대로 일처리를 하였고, 다니엘만큼은 정도에 맞게 정치를 하려고 하였던것 같다. 그러자 다니엘의 행정실무를 보고 자신에게 불리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관리들은 그를 제거할 방법을 모색하게된다.

   그것이 '30일간 왕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것과, 타 종교에 대한 믿음을 단절한다. 법을 어기는 사람은 사자굴에 넣는다'는 내용을 담고있었다. 다리우스는 자신에게 충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허락을 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역사 기록에서는 고대로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은 신으로 간주되었으며 또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숭배하게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주석가들은, 다리우스의 칙령에 나오는 “청원”에 대한 제재 규정은 순전히 종교적인 성격의 청원과 관련이 있는 것이며, 일반적인 종류의 간청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있다.

 

   또한 바빌론에 “사자 굴”이 있었다는 사실은 오리엔트 지역 통치자들에게는 흔히 야생 동물원이 있었음을 알려 주는 고대 비문들의 증거와 일맥상통하는데, "손시노 성서 책들"라는 책에서는 말하기를  

 

“페르시아 사람들은 그러한 동물들을 동물원에서 키우는 관습을, 아시리아의 왕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리우스는 그 포고령에 서명하였으며, 오래지 않아 그 결과를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그 결과를 통해 이 칙령을 만든 숨은 의도를 깨달았을 것이다.

   다니엘은 그 법에 저촉이 되었다. 다리우스는 법을 고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것으로 보여지지만, 당시 페르시아의 법은 왕의 권력으로도 법을 함부로 고치지못한다는 법령때문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다리우스는 그만큼 다니엘을 신임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다니엘은 사자굴속에서 살아남게된후 다리우스의 개혁이 보여지는데, 당시 바벨론의 신을 물리치고 유대의 신인 '여호와'를 주신으로 할 것을 공표한 것이 주목할만하다.

   이러한 문제가 발단이 되어, 당시의 바벨론 신관계급들은 상당한 반발을 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역사를 기록하고 남기는 일을 하였던 사람들 즉 서기관들 또한 ,신관들의 영향력 아래에서 왜곡된 기록이나 기록을 제거하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는 자신 혹은 자국의 이익에 대한 부분만 끌어 올려주고, 문제가 되는 부분은 지워서 소멸시키던가, 아니면 과장되게 기록하는 일이 있었다.

   힉소스에 대한 견해를 제시한 '마네토'라는 역사가 역시, 신관계급이란 점을, 또한 이스라엘인을 그 누구보다 증오하고 싫어했다는것, 신관으로서 자신에게 수치스러운 일을 결코 기록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 등을 통해, 그는 결국 "힉소스"라는 가상의 민족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을 이야기하고있다.

 

   바빌론 신관들의 관련문서 삭제를 통해, 결국 그의 모든 기록들은 소멸되었다. 기록이 완료된 모든 문서들 또한 소멸시켜버렸다.

   특히 다리우스의 바벨론 통치가 그리 길지가 않았던 것은, 신관들의 영향력이 줄지 않았다는것을 증명하는것이 되겠는데, B.C.530년에 그는 바벨론의 왕이라는 칭호가 사라진 것이다.

   그의 후임자로 키루스의 맏아들이었던 캄비세스 2세가 바빌론과 페르시아의 왕으로서, 키루스와 공동 섭정자로 앉게된것이다. 

   이시기에 그가 죽었는지 혹은 좌천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다만 그의 바벨론통치는 7년간이었다는것은 확실하다는것이다.

   이 기간동안 기록된 모든 기록물들은 소멸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사참모이자, 한 나라의 왕, 그리고 함락된 바빌로니아의 왕으로 화려한 일생을 살아간 사람의 일대기는, 어느사이 이기적인 욕심을 품었던 사람들에 의해 사라져 버렸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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