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부터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중인 국립창극단의 ‘춘향’. 무대 옆에 마련된 스크린에는 배우들의 대사와 노랫말을 번역한 영어 자막이 이어진다. 극중 변학도의 수청을 거부하는 춘향의 노랫말을 보자.
“이부불경 이 내 심상/ 이도령만 생각헌다/ 이제 박살 내치셔도 가망 없고 안 되지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이 대목은 이렇게 쓰여졌다. “I don’t serve two husbands/I think only about my husband/ Even if you break me into two pieces/ That is not a possibility and it is out of the question”. 영어 자막은 깔끔하고, 직관적이다.
국립극장, 국립극단 등 공공 극장은 공연을 올릴 때마다 한국어와 전통문화를 모르는 외국인을 위해 영어 자막을 제공하고 있다. 고어(古語)나 한자어에 익숙지 않은 한국 관객도 영어 자막을 보고 이해하기도 한다. 젊은 층일수록 영어에 익숙해서다. 하지만 창극 등 전통을 토대로 한 공연은 현대적 작품보다 번역하기가 어렵다. 옛말이나 고사성어가 많고, 운율을 위한 의성어·의태어 사용도 잦아서 훨씬 품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창극 자막 번역의 과정은 일반적인 연극과 비슷하다. 전체 서사를 바탕으로 연출과 진행 속도를 이해한 뒤 번역 작업에 들어간다. 리허설에 참여하는 등 연출가와의 긴밀한 호흡은 필수다. 국립창극단 ‘춘향’의 경우 일반 번역가가 1차 번역을 한 뒤 공연 자막 번역 경험이 많은 이단비 번역가가 2차 번역인 윤문을 맡았다. 이 번역가는 “극 분위기와 장단에 따라 말의 템포가 빠르고 느려진다. 이 속도에 따라 문장 길이를 조절하고, 연출가와 협의해 일부는 또 과감히 덜어내야 간결한 자막이 된다”고 설명했다.
창극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건 판소리 등 고전 원작에 대한 이해다. 원문 뉘앙스를 살릴 수 있는 직관적인 표현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자어나 옛말, 추임새 등은 빠른 이해를 위해 축약하거나 자르기도 한다. 이번에 ‘춘향’에 나오는 합창 “내 사랑 내 알뜰 내 간간이지야/ 어허 둥둥 내 사랑이야”는 ‘어허 둥둥’이란 추임새가 생략된 채 “Oh my love, oh my sweet love/ Oh you are my love”로 번역됐다.
일각에선 짧은 번역이 고전의 무게감을 없앤다는 비판적 시각도 나온다. 대개 대사의 70% 정도만 자막에 들어간다. 하지만 번역가들은 ‘간결함’이 자막 번역의 핵심이라고 입을 모은다. 문장이 2개를 넘으면 채 다 읽기도 전에 스크린이 넘어가기 때문이다. 국립창극단 ‘흥보씨’ ‘오르페오전’ 등을 번역했던 이재은 번역가는 “오랜 시간 들여다보는 책과 달리 공연은 ‘가시성’과 ‘가독성’의 조율이 중요하다”며 “예를 들면 중국 ‘양귀비’를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단 ‘The most beautiful woman’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