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Bible말씀敎會예배 * 선교사

축복의 복음 / 조용기 목사

영국신사77 2020. 4. 22. 17:55



1 성경의 축복관



구약의 복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먼저 생산의 능력 곧 자손의 번창(창 1:22,28)과 물질적 번창(창 13:2;24:35), 원수를 무찌르는 능력(창 24:60,27:29; 민 24:17- 19), 삶을 성공시키는 능력으로서의 지혜(출 35:35; 왕상 4:29; 단 9:22) 등이다. 이와 같이 구약에 나타난 복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 즉 영적인 복 뿐 아니라 육적, 현세적인 복도 포함하고 있다.

신약의 복은 구약의 복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이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야웨의 복이 온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의 복으로 바뀌어진 것과 신령한 영적 복이 더욱더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2 물결세계에 대한 바른 이해

1) 물질 세계를 먼저 지으신 하나님

하나님의 복 주심은 천지 창조 때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시기 전에 이 세상의 물질 세계를 먼저 지으셨다. 모든 물질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당신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주셔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말씀하셨다. 아울러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그들의 식물로 풍성히 주셨다(창 1:29).

더욱이 인간이 창조되어 맞은 첫날은 바로 야웨 하나님의 안식일이었다(창 2:2). 그러므로 인간은 인생의 첫날을 하나님과 함께 풍성한 물질 세계를 즐기며 안식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근본 의도였던 것이다.

2) 물질적 복의 상실

범사에 부족함이 없던 세계가 파괴된 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물질 세계의 모든 것을 그들에게 다 허락하셨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하셨다(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다. 그럼으로써 물질 세계도 당신의 주권 아래 있음을 분명히 선포하셨다.

그런데 사단이 아담과 하와에게 다가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도록 꾀었다(창 3:1-5).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게 되었고, 이렇게 죄를 지음으로 타락하고 말았던 것이다(창 3:6). 그 결과 우주의 질서가 파괴되었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의 형벌과 저주가 임하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그들은 에덴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인간에게 임한 저주는 잉태의 고통과, 종신토록 수고를 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는 것과,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죽음이었다(창 3:16-19). 그러나 이러한 저주와 고통의 삶은 결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래의 뜻이 아니었던 것이다.


3 십자가의 대속과 축복

1) 예수님의 가난과 우리의 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사신 이유가 밝혀져 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사신 것은 바로 우리에게 부요를 주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에서뿐만 아니라 가난에서도 이미 대속받았다. 만일 우리가 이 말씀의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사신 것을 헛되게 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어 주신 부요를 누리며 살아야 하며, 받은 바 축복을 나누어주며 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인 하나님의 뜻이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길인 것이다.

2) 예수님의 저주와 우리의 축복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가난만 대속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저주도 속량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다가온 모든 저주가 예수님의 몸 위에 옮겨졌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저주를 받으신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는 데 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갈 3:14).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이미 저주에서 속량된 자들이요, 아브라함의 복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복을 누려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요, 그리스도의 원하시는 바이다.

3) 대속의 은총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무조건 부자로 만들어 주시겠다고는 하지 않으셨지만, '부족함이 없는 삶'을 약속하셨다(시 23:1). 또한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통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공급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쳐 주셨다(마 6:11). 바울도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고 증거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심으로 우리가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착한 일을 넘치게 하는 것을 원하고 계신다(고후 9:8).

또한 성경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말씀하고 있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생활 이념은 이와 같이 '주는 것'이다.

사랑을, 소망을, 기도를, 물질을 나누어 줄 때 진정한 복을 누리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4 성경적인 축복신앙과 기복신앙의 비교

1) 축복신앙과 기복신앙의 비교

(1) 유사점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현실적인 복은 물질의 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물질의 복에는 자손의 번성, 가축의 번식, 그리고 토지 소산의 증가도 포함된다. 구약의 이스라엘 족장들에게 약속된 복을 살펴보면 특히 자손 번성의 복이 강조되고 있으며 질병이나 다른 것으로부터 해를 받지 않도록 보호받는 복도 포함되고 있다(신 28:1-14).

무속에서도 물질적인 복을 강조한다. 부락제나 집안의 고사를 지낼 때에는 구체적으로 물질에 대한 축원이 포함되고 있다. 무교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신봉되며 중요한 비중을 갖는 것이 가신(家臣)인데, 이 가신이 제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신의 역할은 그 집에 물질적인 풍요를 보장하고 안전을 지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물질적인 풍요를 축원한다는 것이 기복 신앙과 기독교의 축복 신앙의 유사점이라고 할 수 있다.

(2) 차이점

① 구원의 유무

기복 신앙과 축복 신앙의 차이점 중 가장 중요한 점은 구원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기복 신앙에 있어서는 그 복이 구원을 전제로 하여 받는 복이 아니다. 기복 신앙에는 구원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축복 신앙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복은 그 구원이 현실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열매이다. 전통적인 기복 신앙에는 기독교와 같은 대속의 교리가 없으며 죄의 용서가 없다. 그들은 근원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이 없이 그저 막연하게 물질적 복 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② 이기적인 기복과 윤리적인 축복

기복 신앙은 구원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내세적이거나 윤리적인 면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복 신앙은 현세적이며 살아 있는 사람의 이기적인 복이 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기독교의 축복은 윤리적이다.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은 인간이 지녀야 하는 종말적이고 절대적인 윤리를 말씀하셨다. 초대 교회의 순교 역사에서도 현세적 부귀 영화와 재물의 획득보다는 내세를 향한 현세의 고난을 통하여 예수님의 절대적인 윤리를 계승 정립하려고 애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축복 신앙은 전통적인 기복 신앙이 추구하는 부귀 영화, 무병 장수보 다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가지고 윤리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내세의 부활과 영생의 복락을 더 귀하게 여기며 소망한다.

③ 요행적 기복과 계약적 축복

샤머니즘의 기복 신앙은 윤리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요행성이 따른다. 복을 받고 못받는 것은 귀신의 마음 먹기에 달려 있기 때문에 사람은 그저 귀신의 비위를 맞추어 귀신의 진노를 풀고 복을 많이 내려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므로 기복 신앙에서는 복을 받을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없는 셈이다. 오직 인생 만사는 자기의 사주 팔자 때문이라고 체념하고 한탄만 하는 운명주의 신앙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축복 신앙은 하나님의 계약과 그 약속에 축복의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약 속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말씀, 즉 축복의 언약이 있기 때문이다(갈 3:13,14). 개인의 순종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④ 주술적 기복과 신앙적 축복

기복 신앙의 대표적인 무속 신앙을 보면, 복을 주는 귀신을 부를 때 무당이 주문을 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무당은 영계와 인간 사이에서 주문을 통해 귀신들을 부르고 그 귀신들로 하여금 치성(致誠)을 드리는 사람에게 복을 내리도록 중간에서 연결시키는 중재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기복 신앙은 어떤 미신적인 주술이나 주문으로 복을 기원한다.

이에 비해 기독교의 축복은 신앙적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단순히 어떤 주문을 외우거나 술법을 행함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불러내거나 부릴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따라 아름답고 선한 삶을 살 때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2) 성경적인 축복 신앙

우리가 '복 받았다'고 할 때, 거기에는 상당히 다양한 의미와 내용이 담겨져 있다. 영적인 복, 즉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받아 천국 백성이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물질적인 복, 지혜의 복, 마음과 생활의 평안, 심지어는 우리의 삶에 다가오는 고난조차도 하나님의 복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시 119:71). 또한 성경은 하나님께 복을 받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 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때 진정한 복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복을 받으면 그에 따른 관리자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생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은 샤머니즘적인 기복 신앙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받아 가난하고 고난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고 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독교의 축복 신앙과 샤머니즘의 기복 신앙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독교의 축복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구해야 하는 뚜렷한 근거가 있고, 또한 복을 받아야 할 분명한 목표가 있는 것이다.

축복 신앙은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고 삶의 원천이시다. 그 하나님께 복을 구하고 그 복을 받아 누리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문제는 우선권(Priority)의 문제요, 사용 방법의 문제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성경적인 복은 영의 구원뿐 아니라 육신의 제반사와도 관계가 있다. 성경은 그것이 영적이든,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복'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복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며, 오늘날 인간은 전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의 복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은 서로 깊은 관계를 갖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에 대해 분명히 이해하고, 아울러 복에 대한 개념을 올바르게 가르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축복의 복음을 널리 전하여야 할 것이다.


축복 : http://davidcho.fgtv.com/c1/C1_34.asp(조용기 목사 [Rev. Yonggi 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