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최초의 선교사
1-12절, 최초의 선교사 파송
[1절]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헤롯과 함께 자랐던](KJV, NASB, NIV)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 교회에는 다섯 명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성경 지식이 많은 자들이었을 것이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주께서는 교회에 가르치는 자들을 주신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주께서]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했다(엡 4:11-12).
교회에는 성경에 정통한 목사들과 교사들이 많이 필요하고 그런 자들의 양성도 필요하다. 말씀의 일꾼들은 성경에 정통할 뿐 아니라 그 말씀대로 믿고 살며 충성하는 자이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말했고, 또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교훈하였다(딤후 2:1-2, 15).
또 주님의 제자가 되어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자는 고난을 각오하며 주를 따라야 한다.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고(마 16:24), 또 바울도 디모데에게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딤후 2:3-4).
[2-3절]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본문이 그 다섯 명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무엇을 위해 금식했는지 말하지 않으나, 그들은 아마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일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 간절히 기도하며 금식했을 것이다. 본문은 금식이라는 말을 두 번 언급한다. 금식은 기도의 간절한 형태이다. 그때 성령께서는 그 일을 위해 바나바와 사울을 구별할 것을 지시하셨다. 그는 한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지시하셨을 것이다. 사도 시대에 ‘예언’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은 간절한 기도로 준비되고 시작되었다. 그들은 기도 중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였고 지교회의 유익만 생각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누군가가 주의 일을 위해 헌신해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었다.
전도는 하나님의 뜻이며 세계복음화도 그러하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말씀하셨고(막 1:38),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하셨다(마 9:37-38). 또 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28:18-20; 막 16:15).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지시대로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보내기 위해 그들에게 안수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부탁하였다. 안수는 직무를 위탁하는 뜻이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안디옥 교회는 최초로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함으로써 세계 선교의 일을 시작한 교회가 되었다. 그 일은 성령의 지시로 이루어졌다.
주께서는 자신이 친히 신약교회를 세우실 것을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6:18,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재건하는 스룹바벨에게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말씀하셨었다(슥 4:6). 복음 전도와 교회의 건립은 주의 영 곧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질 것이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4-5절]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안디옥 교회가 그들을 파송하였지만, 실제로는 성령께서 그들을 세우셨고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전도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준비시키시고 그들을 보내신다. 바나바와 사울은 구브로의 살라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구브로는 바나바의 출생지이다(행 4:36). 사도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전도는 사람의 사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것은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를 믿으라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전하는 말을 부끄러워 말고 또 우리의 부족과 무능만 생각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과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히 전해야 한다.
바나바와 사울이 수종자로 둔 요한은 마가라 하는 요한으로서(행 12:25) 바나바의 사촌이다(골 4:10).34) 전도 사역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동역자와 수종자가 필요하다. 주께서도 친히 제자들을 불러 전도의 일에 참여케 하셨다. 오늘날에도 복음 사역을 위해 신실한 동역자와 수종자들이 많이 필요하다.
[6-8절]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마술사]를 만나니 그가 총독35)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이 박수[마술사]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바예수라는 거짓 선지자는 분명히 마귀의 종이었다. 사탄은 항상 사람들에게 거짓된 것들을 믿게 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방해한다. 이 마술사 엘루마는 바나바와 사울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썼다. 하나님의 바른 종들을 대적하는 것은 큰 죄가 된다. 또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거나 다른 사람을 바른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는 것도 큰 죄악이다. 하나님의 일에는 언제나 이렇게 방해하는 일이 있다. 선교 활동에는 언제나 난관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니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것은 없다. 디모데후서 1:7-8,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후서 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디모데후서 4:3-5,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9-12절]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義)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사울은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이름이고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친숙한 이름이라고 한다. 바울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지혜와 능력과 큰 담력을 얻었다. 그가 바예수에게 선포한 하나님의 징벌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전도에는 난관이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 큰 능력으로 일하셨다. 마술사를 벌하신 일도 그러하지만, 그보다 로마 제국의 한 총독을 믿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본
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전도자를 부르시며 훈련시키시고 교회로 하여금 그를 파송게 하시고 후원케 하신다. 또 전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교회는 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일은 기도와 금식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다. 구약의 성전은 사람의 힘으로가 아니고 성령으로 건립된다. 주께서는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에도 전도와 교회의 건립은 기도와 금식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전도 활동에 사탄의 방해가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 활동은 마술사 바예수의 방해와 대적이 있었다. 사탄과 악령들은 항상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일을 당연하게 여기며 성령의 지혜와 능력으로 잘 대처하고 충성하자.
13-52절,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전도
[13-15절]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요한은 전도자로서 사명감과 인내심이 부족했던 것 같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수리아 안디옥과 구별되는 도시이다. 바울 일행은 회당 예배에 참석하여 전도의 기회를 삼았다. 당시 유대인들의 회당 예배의 순서에는 성경을 읽는 시간이 있었다. 매주 얼마큼씩 읽어 일년에 일회씩 구약 전체를 읽게 하는 관습이었다. 예배를 주관하는 회당장들은 바울 일행에게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고 요청하였다. 바울에게는 말할 좋은 기회가 왔다.
[16-20절]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광야에서 약 40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약 450년간)36)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이방인들 중에서 유대교로 개종하였거나 하나님에 대해 알기 원하는 자들을 통틀어 말한다. 바울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언급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택하셨다. 야곱의 자손들이 애굽 땅에 거주한 지 430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큰 권능으로 애굽에서 인도해내셨다. 그는 그들이 광야 40년간 많은 범죄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으셨다. 가나안 족속들의 심한 우상숭배와 음란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하시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다. 그 후,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다. 사사 시대는 반복된 실패의 역사이었다.
[21-23절]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구원을 주셨도다](전통사본).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순종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다윗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구주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는 예레미야 23:5에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라”고 하셨다.
[24-31절]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너희에게](전통본문)37) 보내셨거늘 [이는](원문, KJV, NASB)38)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하였음이라].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메시아께서 오시기 전에 세례 요한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전함으로 그의 길을 준비하였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며 그 앞에서 종이 될 자격도 없다고 말하며 자기의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전하신 말씀들과 행하신 기적들을 깨닫지 못했고 그들이 안식일마다 외우는 선지자들의 말씀들도 알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아를 십자가에 죽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정죄한 것은 지극히 큰 악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성경의 예언을 이룬 것이었다(사 53:3-6).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셨고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제자들에게 여러 날 곧 40일간 보이셨다(행 1:3). 그들은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들이다. 그들의 증언들은 신약성경에 기록되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에 대한 사실들은 증인들의 증언들인 신약성경을 통해 지금까지 전달되어 내려오는 것이다.
[32-41절]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그들의 자녀들인 우리에게](전통본문)(KJV, NIV)39)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확실한 자비](KJV)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에 약속된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구주로 이 세상에 보내실 것과 다윗을 통해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과 그 구주는 몸이 썩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셨다(시 2:7; 사 55:3; 시 16:10). 다윗은 죽어 무덤에 묻혔고 그 몸이 썩었으나, 그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그 몸이 썩지 않으셨다.
바울은 이어서 복음의 요점을 전했다. 복음의 요점은 죄인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 사람의 근본 문제는 죄 문제이며 하나님의 구원은 바로 죄 문제의 해결이다. 죄가 죽음과 불행의 원인이었므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이 영생과 영원한 행복의 길이 된다. 사람이 자신의 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율법을 다 지킴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것이 로마서에 증거된 기독교 복음의 요점이다. 로마서 3:21-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복음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소식이다.
사도 바울은 혹시라도 그들 속에 있을지도 모를 불신앙에 대해서도 경고하였다. 복음은 값싼 구원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을 멸시하는 자에게는 멸망의 소식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도 이 구원의 소식이 어떤 이에게는 멸망이 됨을 증거하셨다(요 3:17-21).
[42-49절] 저희가 [유대인의 회당에서](전통본문) 나갈새 사람들이[이방인들이](전통본문)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그들이](원문)40)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주의]41)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테타그메노이)(완료시제)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바울의 전도는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는 권면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라는 권면이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온 성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셔서 말씀에 대한 관심과 갈급함을 갖게 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많은 무리가 모인 것을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비방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비방하는 것은 큰 죄이었다.
유대인들의 나쁜 반응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한 태도를 가졌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 때문에 너무 낙심할 것이 없다. 우리가 복음을 충분히 증거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또 다른 전도 대상을 찾아 나서야 한다. 교회의 사명은 오직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다. 작정된 자들은 다 믿을 것이다. 믿음은 예정의 결과요 증거이다.
[50-52절]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계속] 충만하니라(에플레룬토)(미완료 과거시제).
악한 자들은 혼자서는 용감하게 행치 못하는 것 같다. 그들은 당을 지어서 악을 행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신 복을 스스로 차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해롭게 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복음을 전할 때 어려움이 있었으나 전도자들은 낙심하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그들은 거절하는 자들을 향해 발의 티끌을 떨어버림으로 교제의 선을 분명히 했다. 그들은 그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게 된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계속 충만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주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의 글들에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하실 구주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 그가 오시기 얼마 전에 세례 요한이 나타나 회개의 세례를 전함으로 그의 길을 예비하였다. 그는 죽을 죄를 짓지 않으셨으나 유대인들의 시기로 십자가에 처형되셨다. 그러나 그는 다시 살아나셨고 그의 제자들은 이 일에 대한 증인들이다. 그들의 증언들은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인류의 유일한 구주이심을 증거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보내주신 인류의 유일한 구주이시다.
둘째로, 하나님의 복음의 요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한 복음의 요점이 그것이었다. 기독교가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의 요점이 이것이며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빼거나 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밝히 증거되어 있다. 사람들의 근본적 문제, 세상의 근본적 문제는 죄 문제이며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길은 그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이다. 사람의 모든 불행의 근본적 원인은 죄이다. 모든 사람은 죄 때문에 늙고 병약하고 죽는다. 사람이 참 평안과 영생을 사모하지만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많은 죄를 지었고 또 현재도 간혹 짓고 있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버리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셋째로, 우리는 복음을 거절하는 저 무지한 유대인들처럼 되지 말고 마음을 활짝 열고 복음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무지한 자들은 시기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비방하며 사람들을 선동하여 전도자들을 배척하고 핍박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은 다 이 복음을 믿을 것이다. 우리는 죄 가운데서 멸망하는 자가 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자가 되자.
14장: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전도함
[1-2절]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그들이](원문)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으로 갔다. 이고니온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직선거리로 약 120킬로미터 동쪽에 위치한 도시이다.42) 그들은 그곳의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말했다. 거기에서 그들의 전도는 결실을 맺었다.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 곧 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전도자들을 사용하셨다.
그러나 거기에도 복음을 믿지 않고 순종치 않는 유대인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될 때 믿는 자도 있지만, 믿지 않는 자도 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복음 앞에는 항상 두 가지 반응과 두 부류가 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해 그 전도자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였다. 악인들은 자신들만 악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이들도 악하게 만든다. 그것이 악의 본성이다.
[3절] 두 사도가[그들이](원문)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바울과 바나바는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오래 머물며 담대히 전도하였다. 전도자들에게는 핍박 중에도 인내와 용기가 필요하다. 주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에게 힘과 담력을 주셨다. 그는 세상 끝날까지 전도자들과 동행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바울과 바나바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심으로 그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셨다. 사도 시대에는 기적들이 널리 나타났다. 스데반 같은 집사도 기적을 행했지만, 기적은 특히 사도들을 통해 많이 행해졌다(행 2:43; 5:12). 기적을 행함은 사도의 표였다(고후 12:12). 오늘날에도 살아계신 주께서는 친히 복음을 증거하시지만, 기적들을 통하지 않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 하신다. 주께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그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셨다. 복음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다. 사람에게 선행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사람은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4-7절]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그 사도들을](원문) 좇는 자도 있는지라.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그들을](원문)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사도행전에서 본절과 본장 14절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그 사도들’이라고 불리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열두 사도들과 바울 이외의 사람에게 ‘사도’라는 명칭이 사용된 특별한 경우이다.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들은 그 성의 사람들은 둘로 나뉘어 유대인들을 좇는 자도 있고 그 사도들을 좇는 자도 있었다.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항상 그런 현상이 생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순종하는 자와 순종치 않는 자, 택자와 불택자가 나뉘는 것이다. 그 성의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뉘었을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과 관원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학대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이 자기들을 돌로 치려 함을 알고 그곳을 피하였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전도자로 파송하실 때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23). 그들은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피하여 거기에서도 복음을 전했다. 그들의 전도 여정에 고난과 핍박이 있었으나, 그들은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추거니 쉬지 않았다.
[8-10절]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그 앉은뱅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을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긴다(롬 10:17). 그는 그 믿음으로 그의 병든 몸까지 고침을 받았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었다.
[11-13절]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성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花冠)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쓰스는 헬라 신화의 최고신인 제우스(Zeus)를 가리킨다. 허메(Hermes)는 제우스의 아들로서 상업과 웅변의 신이라고 생각한 신이었다. 쓰스 신당의 제사장은 소와 화관(花冠)들을 가지고 성문 앞에 와서 그들에게 제사하고자 했다. 참 신앙은 바른 지식이 필요하다. 복음은 바른 지식이다. 하나님의 기적은 그 복음을 확증하는 데 필요할 뿐이다. 복음이 없는 기적은 구원을 주지 못한다.
[14-15절] 두 사도[그 사도들](원문)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그들은 자신들이 그들과 같은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다. 사람은 하나님과 달리 지식과 능력이 유한하고 심신이 연약하고 또 심령이 죄악되다. 그들은 또 그들에게 이런 헛된 일들을 버리라고 말했다. ‘헛된 일들’(마타이아)이란 ‘우상들, 우상숭배’를 가리킨다. 그들은 또 그들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살아계신 참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했다. 이것이 복음의 중요한 내용이다. 전도는 사람이 헛된 우상들을 버리고 참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초청이다.
[16-18절]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우상숭배가 어느 시대나 큰 죄악이지만, 하나님께서 지나간 세대에는 이방인들이 헛된 우상숭배를 하는 것을 내버려두셨다. 물론 그들의 우상숭배는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 회개하고 구원을 얻으라는 하나님의 초청이 있다.
이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증거하셨다. 그는 하늘에서 비를 내려 곡식과 열매를 맺게 하시고 음식과 기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시는 선한 일들을 행하셨다. 이런 일들은 다 하나님의 존재와 선하심을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이방인들도, 비록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했고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겼지만, 하나님을 느꼈고 찾고 사모했고 재난을 당했을 때에는 하늘을 향해 양심에 거리끼는 죄를 회개하였고 또 하늘의 뜻(天命)을 거스르지 않고 그 뜻에 순응하며 살려 하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이 자기들에게 제사 드리려는 것을 겨우 말렸다.
[19절]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招引)[설득]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온 유대인들은 약 12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왔다. 그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치 않는 자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이었다. 구약교회에는 그런 자들이 많이 있었다. 말세에 혼탁한 교회들에도 그런 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교인들을 분별하고 그런 자들과 상종치 말아야 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돌로 쳤고 그가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끌어 내쳤다. 바울은 죽었다고 여겨질 정도로 돌에 맞았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길은 고난과 핍박의 길이었다.
[20-22절]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제자들은 수가 적고 힘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바울을 보호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바울을 둘러섰을 때,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났고 다시 힘을 내어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갔다. 더베는 루스드라에서 동쪽으로 약 9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43) 바울은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고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 그가 전도하는 길에 고난은 있었으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役事)도 있었다. 사탄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환경과 처지를 사용하여 그의 뜻을 이루어 가셨다.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돌아오며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였다. 전도자들의 사역은 복음을 전하는 일뿐 아니라, 이미 믿은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도 필요하다. 바울은 이미 믿은 자들에게 “이 믿음에 거하라”고 권하였다. 이미 믿은 자들은 그들이 가진 그 믿음을 굳게 붙들고 그 믿음 안에 거하며 그 믿음 안에서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구원의 목적지는 하나님의 나라 곧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나라이다. 천국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소망하는 의와 평안과 영광의 나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이며 모든 성도의 소망이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이 세상에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다. 성도의 세상 생활의 한 특징은 고난이다. 그것은 우리의 부족과 연약 때문에도 올 것이지만, 사탄의 시험으로 인해서도 올 것이다.
[23-28절]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그들이](원문)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택한다’는 원어(케이로토네오)는 본래 ‘손을 내밀다, 투표하여 선출하다’는 뜻이며 단순히 ‘선택하다, 임명하다’는 뜻도 가진다(BDAG, Thayer). 장로들은 말씀의 바른 지식과 모범으로 교회를 지켜야 할 자들로서 교회에 꼭 필요한 직분자들이다. 사도행전 20:28은 그들이 교회의 감독자이며 양들을 돌보는 자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이들을 목자 없는 양들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을 돌아볼 감독자들을 세우기를 원하셨다.
바울과 바나바는 금식 기도하면서 장로들을 택하였다. 이런 중대한 일이 있을 때 그들이 금식 기도하며 그 일을 행한 것은 후대의 교회에 본이 될 것이다. 또 그들은 세운 장로들을 그들이 믿은 주님께 부탁하였다. 교회의 머리되신 주께서 그들을 도우실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이 일차 전도의 목표로 계획하였던 바를 다 이루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이룬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이며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이었다.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이다. 구원은 그가 친히 이루시는 일이다. 그가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고, 그가 허락하시면 많은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복음은 핍박 중에도 증거되어야 한다. 복음이 전해질 때 믿고 따르는 자도 있지만, 믿지 않고 도리어 대적하는 자도 있다. 때때로 핍박과 죽음의 위협도 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핍박 중에라도 복음은 결실을 얻는다. 1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1절,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그러므로 우리는 핍박 중에라도 낙심치 말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둘째로, 신자들은 환난을 각오하고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거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 22절,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셋째로, 주께서는 각 교회에 세우신 장로들을 붙드시고 교회를 세우실 것이다. 장로들은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교훈으로 지키는 책임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성도들을 가르치며 돌보며 모든 교인들에게 본이 되어야 할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목사들과 장로들을 통해 그의 교회들을 바른 교리와 윤리적 교훈 안에서 견고케 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목사들과 장로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넷째로,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27절,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고자 하시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지만, 죄 가운데 버려두시는 자들을 강퍅케 하신다(롬 9:18).
15장: 예루살렘 회의
[1-2절]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교회에는 교훈이 중요하다. 교회는 바른 교리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잘못된 교리가 들어오면 교회를 어지럽히고 무너뜨린다. 그런데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 잘못된 교훈을 하는 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신자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할례를 받는 것은 구약의 율법을 지킨다는 약속의 뜻이 있다. 그들은 사람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이런 사상을 율법주의라고 부른다.
그들의 잘못된 교훈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 교회 안에서 교리적 논쟁은 필요하다. 그것은 회피할 일이 아니다. 교리적 논쟁은 주로 잘못된 교훈 때문에 생긴다. 잘못된 교훈은 사탄의 끊임없는 활동과 우리의 지식과 이해력의 부족 때문에 지상 교회 내에서 항상 있을 것이다. 교리적 논쟁은 실상 진리에 대한 관심과 충성심에서 나온다. 교리적 오류가 있는 데도 논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관심과 충성심이 없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지키려 할 것이고 교리적 오류를 비평하고 배격하려 할 것이다.
안디옥 교회의 형제들은 율법주의 오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와 그 교회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했다. 그것은 사도들과 장로들의 권위와 지식이 더 나아서라기보다 교회의 교리적 순결과 일치를 지키려 함이었다. 중요한 교훈에서의 이탈과 불일치는 교회의 순결과 일치를 손상시킬 수밖에 없다. 교회는 바른 교리에 있어서 하나이어야 한다.
[3-11절]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바리새파에 속했던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신 속죄사역이 율법을 완성하였다는 것은 모든 신자가 처음부터 이해한 문제가 아니었다.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모였다. 그것은 교리적 문제로 모인 최초의 교회 회의이었다. 그 교회 회의에서는 많은 변론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로 선포하게 하시는 대신에 많은 변론을 통해 깨닫도록 하셨다. 사람의 무지와 이해력의 부족은 토론을 통해 서서히 극복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방법이었다.
그 회의에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셨고 또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그들과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셨고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마음의 깨끗함을 얻게 하셨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과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으며 따라서 우리 조상과 우리도 감당할 수 없었던 율법의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지우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12-18절]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奇事) 고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하나님께는 그의 모든 일들이 만세 전부터 알려져 있느니라].44)
예수님의 동생이며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이었던 야고보는 일어나 베드로의 증거가 선지자들의 말씀과 일치한다고 말하면서 아모스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였다(암 9:11-12). 그것은 메시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 즉 멸망한 유대 나라를 회복시키실 것과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것에 대한 예언이었다.
[19-21절]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야고보는 이방인들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몇 가지 점들만 조심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었다. 그가 말한 몇 가지 점들이란 첫째로 우상의 더러운 것과 둘째로 음행과 셋째로 목매어 죽인 것과 피이다. 우상의 더러운 것이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가리킨다(29절). 그것은 우상제물 자체가 죄악된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연약한 자들의 마음을 더럽히고 우상숭배에 떨어지게 하기 때문이었다(고전 8:9-10; 10:23-28). 음행은 우상숭배와 더불어 인간 사회의 대표적 죄악이다. 오늘날과 같이 옛날의 이방 사회는 너무 음란해서 음행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또 목매어 죽인 것은 피를 빼지 않은 고기를 가리킨다. 피는 생명이므로 율법은 피 먹는 것을 금하기 때문에(레 3:17; 7:26-27; 17:10, 14; 19:26 등) 목매어 죽인 것과 피는 유대인들에게 큰 거리낌이 되었다.
야고보의 제안은 영속적 성격을 가진 내용은 아니라고 본다. 우상숭배와 음행은 어느 시대에나 큰 죄이지만,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은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의 교회생활을 위해 일시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만일 이방인 신자들이 율법에 금지된 그런 것들을 용납한다면, 옛날부터 율법을 지켜왔던 유대인 신자들은 마음에 큰 거리낌을 가졌을 것이며 교회생활에서 마음의 상당한 불편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 신자들은 이런 점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모세의 율법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이방인 신자들도 이런 문제점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22-29절]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장로들과 형제들]45)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너희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면서](전통본문)46)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예루살렘 회의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 유다와 실라를 선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같이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였다. 바울과 원사도들 간에는 아무런 불일치가 없었다. 야고보의 제안으로 그 회의는 일치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여러 시간의 교리적 변론은 하나님의 은혜로 마침내 일치된 좋은 결론을 가져왔다. 그들이 특히 ‘일치 가결’이라는 말(호모뒤마돈)을 쓴 것은 교회들의 하나 됨을 보여주는 기쁜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교리적 변론은 마침내 사도 시대 교회들의 사상적 일치를 드러내었다. 얼마 동안의 혼란과 심적 고통은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다.
사도들과 장로들과 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였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라고 쓸 수 있었다. 이로써, 이방인들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와 구약 율법과의 관계에 관해, 바른 깨달음과 생각이 정리되었다.
[30-35절]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사도들](전통본문)에게로 돌아가되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多數)한[여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그 편지를 읽고 그 권면과 격려의 말을 인해 기뻐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유하며 여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에 일꾼들을 주셔서 서로 권면하고 덕을 세우기를 원하신다.
[36-41절]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하나님의]47)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본문은 교회에서의 심방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말이다. 믿는 자들은 서로 방문하고 권면하고 격려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히브리서 3:13,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주일학교 교사들과 구역 권찰들의 심방은 매우 필요하고 귀한 사역이다.
그때에 바울과 바나바는 심방 동반자 문제로 다투었다. 바나바의 생각은 온건했으나, 바울의 생각은 강경했다. 그들은 심히 다투었으며 그 결과 그들은 피차 갈라서서 각자 자기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 둘의 신앙 사상이 다른 것은 아니었으나, 일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이 달랐다. 그들이 서로 심히 다투고 나뉜 것은 사역자들의 연약을 보이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동역(同役)의 중요한 원리를 보여준다. 주의 일을 함께할 자들은 생각과 뜻이 같아야 한다. 아모스 3: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 또 본문은 말씀의 사역자들이 주를 사랑하고 주를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칠 각오가 되어야 하며 심령이 굳세게 단련된 자이어야 할 것을 보인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본문은 율법주의가 잘못임을 분명히 증거한다. 사람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사상은 잘못이다(1, 5절).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 사람의 선행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누더기 옷같이 부족할 뿐이다. 율법은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를 정죄하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둔다. 교회 역사상, 죄의 고백, 선행, 구제, 헌금, 십계명 준수 등이 구원의 필수적 조건인 것처럼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서 이탈한 잘못된 교훈이다.
둘째로, 본문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증거한다. 11절,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물론 바르고 선한 행위가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도덕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상도 잘못이다. 도덕법을 지키는 바르고 선한 행위는 당연히 필요하지만, 그것은 단지 믿음으로 구원받은 증거와 열매로서 필요할 뿐이다.
셋째로, 교회는 교리적 순결과 일치를 가져야 한다. 교리적 순결과 일치는 교회의 정상적 모습이다. 고린도전서 1:10,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최초의 예루살렘 회의는 일치된 마음으로 결론을 내렸다. 26절, “일치가결하였노라.” 그것은 오랫동안의 교리적 변론을 통해 왔다. 그것은 힘든 과정이지만 필요하며 말씀의 묵상과 기도, 겸손과 사랑과 인내로 이루어져야 할 과제이다. 교회는 일치된 바른 교리와 교훈을 가져야 한다.
16장: 빌립보에서 전도함
[1-3절]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바울이 디모데를 동역자로 얻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었다. 디모데는 믿음이 진실했고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도 그러했다(딤후 1:3-5). 그는 후에 바울에게 좋은 동역자가 되었다(빌 2:22).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준 것은 디모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거리낌을 주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고린도전서 9:20에서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 . .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라고 말했다. 영혼 구원의 열정과 지혜와 겸손함을 가진 자만 그렇게 처신할 수 있을 것이다.
[4-5절]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으로 교회들은 영적으로 수적으로 성장했다.
[6-7절]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성령께서]48)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본문에 나오는 지역 이름들은 오늘날 터어키 땅으로 아시아는 그 서쪽 지방을, 무시아는 서북쪽 끝을, 비두니아는 북쪽 지역을 가리킨다. 즉 바울은 소아시아 지방의 북쪽으로 나아가 전도하려 했으나 성령께서 그것을 막으셨고 그들의 걸음을 서쪽의 바다 건너 마게도냐 지방, 곧 유럽으로 인도하셨다. 이것은 바울의 전도 지역의 놀라운 진전이다. 유럽 전도가 시작된 것이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의 삶을 인도하시며(롬 8:14) 특히 교회와 전도자들의 길을 인도하신다.
[8-10절]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주께서](전통본문)49)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본문에 ‘우리가’라는 표현(행 16:10-17; 20:5-21:18; 27:1-28:16 등)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 전도단의 일행이었음을 보인다. 바울이 마게도냐로 떠나려 한 것은 주께서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그들을 부르신 줄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환상은 사도시대에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성경이 완성된 이후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눅 16:29, 31).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필요하며 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성령의 감동과 깨닫게 하심을 얻는 것이 필요하다.
[11-13절]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기도처가 있곤 했던]50) 문밖[성밖](전통사본)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첫 성’이라는 말은 ‘중요한 도시’라는 뜻일 것이다. 당시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는 데살로니가이었지만, 빌립보도 매우 중요한 도시이었다. ‘로마의 식민지’라는 말은 로마 제국의 수도와 동등한 통치제도와 법들과 상당한 특권을 가진 도시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 성에 며칠 머물면서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아 나갔다. 그는 성밖 강가의 기도처로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했다. 전도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해야 할 일이다. 주께서는 너희는 만민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그들을 교회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14-15절]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바울이 가서 전도할 때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준비시켜 두신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곧 경건한 여인이었다. 주께서는 그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듣게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택하시고 구속(救贖)하신 자들의 마음 속에 회개와 믿음을 주셔서 그들을 구원하신다.
루디아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믿었고 그와 그의 가족들은 그 밤에 세례를 받았다. 만일 그에게 어린아이가 있었다면 그도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가족 세례는 당시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의 풍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 구원을 주신다. 구원은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지만, 가정에서 한 사람이 구원을 얻으면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구원이 가깝다. 먼저 믿은 이가 다른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며 본을 보이는 것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16-18절]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利)하게 하는 자라.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점치는 일은 귀신의 활동이므로 하나님을 믿는 자는 호기심으로라도 점을 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큰 죄이다(신 18:9-12). 귀신도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귀신에게는 구원 얻을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 바울이 그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낸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으로만 가능한 기적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능력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 기독교는 기적주의가 아니다. 바울은 기적을 전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다(고전 1:22-24).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성경을 바로 믿고 죄악된 말들과 행위들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것이다.
[19-22절]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상관들(스트라테고이)[행정장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귀신 들린 여종이 고침을 받았으나 그 일로 인해 여종의 주인들은 바울에게 감사하기는커녕 그를 핍박했다. 그들은 여종을 단지 그들의 이익의 도구로 사용했다. 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만 위한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도리이다. 더욱이,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준 선한 일이 정죄거리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의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서 시장으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갔다. 시장(아고라)은 토론이나 재판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바울과 실라는 옷이 찢기고 벗겼고 매를 맞았다.
[23-25절]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바울과 실라는 변명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억울하게 고난을 당해야 했다. 그 감옥은 춥고 어두웠을 것이며 그들의 온몸은 심히 쑤시고 아팠을 것이다. 그들은 그 밤에 갑갑하고 부자유스런 그 감옥 속 어둡고 찬 바닥에 그렇게 던져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낙심치 않았다. 그들은 진실한 믿음이 있었다. 자정쯤 되어 그들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다. 한밤중에 드린 기도와 찬송이었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힘과 위로를 주시고 하나님께 찬송할 수 있게 하신다. 그들의 찬송은 하나님의 응답과도 같았다.
[26-30절]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하나님께서 그 밤에 지진으로 옥문을 여시고 바울과 실라의 차꼬가 벗어지게 하신 것은 그들을 통하여 그 간수에게 육신의 생명과 영혼의 구원을 주시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 간수는 평소에 죄책으로 고민하며 구원의 길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자살하려던 자리에서 건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영혼도 구원을 받게 되었다.
[31-34절] 가로되 주 예수 [그리스도]51)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사람이 구원을 얻는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다. 믿는 자는 죄씻음과 영생의 구원을 얻는다. 또 구원은 가정적 구원이다. 가장(家長)의 구원은 가족들에게 구원의 문을 여는 일이 된다. 그 밤의 바울과 실라의 전도와 설교는 열매를 맺었다. 그 간수와 온 가족들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다 세례를 받았다. 한밤중의 세례식과 기쁨의 식탁 교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많은 매와 옥에 갇히는 고난을 받았으나 그 간수와 가족들의 귀한 영혼들을 구원했다. 그것은 고난보다 귀한 일이었다.
[35-40절] 날이 새매 상관들이 아전(衙前)(랍두코스)[하급관리 lictor]을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간수가 이 말대로 바울에게 고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아전들이 이 말로 상관들에게 고하니 저희가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아마 간수는 그 밤의 일을 보고하며 그들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간청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말과 처신은 자신들이 위법하지 않고 정당하게 놓여남을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써 복음의 진리성을 나타내려 함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다. 위로를 받아야 했을 그들이 오히려 형제들을 위로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육신적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위로를 이미 받았고 그 위로로써 다른 형제들을 위로한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바울이 전한 복음은 분명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물론 준비된 자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죄인이라 하더라도, 사람은 자신의 도덕적 행위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며 스스로 그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의 죄를 씻는 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것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이것은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죄인들, 무거운 죄짐을 지고 사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다.
둘째로, 전도와 복음 사역과 교회의 개척과 건립은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디모데 같은 좋은 동역자를 주셨다. 디모데는 진실하고 충성된 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시아에서의 바울의 전도 사역을 막으시고 마게도냐로 그의 길을 인도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기도 하고 서기도 해야 한다. 우리의 생은 하나님의 작정된 바를 이루는 생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고집대로 행치 말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루디아의 마음을 여셨고 그와 그 가족들을 구원하셨다. 그는 또 고난과 기적을 통해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들을 구원하셨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며 우리는 도구로 쓰임 받을 뿐이다.
셋째로, 전도자의 길은 고난의 길이지만, 구원의 열매를 봄으로써 위로와 기쁨도 얻는 길이다. 사도 바울이 부득이 어떤 귀신들린 여종의 병을 고쳐준 일이 도리어 매 맞고 옥에 갇히는 고난으로 돌아왔었다. 그러나 그 고난이 아니었다면 빌립보 간수와 그 가족들은 구원을 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신기할 뿐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어떤 환경 여건에서도 낙망치 말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믿음으로 행하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오직 힘써 복음을 전해야 한다.
17장: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에서 전도함
[1-3절]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규례[습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이었다. 유대인들은 나라가 멸망한 후 온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각 곳에 회당을 세웠다. 그 회당은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발판이 되었다. 유대 나라의 멸망이 세계복음화의 발판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실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도 사용하셔서 그의 선한 뜻을 이루신다.
안식일에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바울의 어릴 때부터의 습관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경건하고 좋은 습관이다. 바울은 회당 예배를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성경을 가지고 세 안식일에 강론했다. ‘강론하다’는 원어(디아레고마이)는 ‘조리 있게 전하다’는 뜻이다. 전도자는 복음을 조리 있게 전해야 한다. 바울은 세 안식일에 계속 강론하였다. 우리는 전도할 때 하나님께서 힘 주시는 대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최선을 다해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증거해야 한다.
바울은 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할 것을 증명하였다. 그것은 짐승 제물의 죽음, 피흘림, 불태움과, 이사야서와 시편의 구절들에 근거한 설명이었을 것이다(사 53:5-6; 시 16:10). 그런 후, 그는 그가 전하는 예수께서 바로 그 그리스도시라고 증거하였다. 의로우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구약에 예언된 자이심이 증거되셨다.
[4-9절]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믿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그러나 [믿지 않는](전통사본)52) 유대인들은 [시기하여]53)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保)[보석금]를 받고 놓으니라.
‘귀부인들’은 사회적 신분과 재산이 있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에서의 전도는 큰 결실을 거두었다. 그들은 다 사도 바울의 전하는 복음을 믿었고 사도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 믿음은 순종을 동반한다. 그러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을 대적하며 소란을 피웠다. 하나님의 진리가 전파될 때 일어나는 분쟁은 불가피하다.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에 검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마 10:34).
[10-12절]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유게네스 eujgevnh")[마음이 고상하여서] 간절한 마음으로(메타 파세스 프로뒤미아스 meta; pavsh" proqumiva")[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詳考)[연구]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그 밤에 도피하는 긴 여행을 해야 했다. 그들은 베뢰아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 베뢰아 사람들은 편견이나 선입견, 닫힌 마음, 부정적이고 비뚤어진 마음을 가지지 않았고 소박한 마음, 열린 마음, 모든 준비된 마음,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성경을 자세히 읽고 연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베뢰아에서 전도에 많은 열매를 주셨다.
[13-14절]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하나님의 일이 힘있게 이루어질 때에 사탄의 방해도 계속되었다. 하나님의 종들의 열심도 컸지만, 악한 자들의 열심도 대단하였다. 교회 사역은 영적 전쟁과도 같다. 베뢰아에서 많은 결신자들을 얻었다고 기뻐한 것은 잠깐이었고 바울은 또다시 피신하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23). 전도자들은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15절]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베뢰아에서 아덴까지는 바닷길로 400 내지 500킬로미터 가야 했다. 바닷길은 항상 풍랑의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고후 11:23-27).
[16-22절]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시장]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비구레오[에피큐러스]와 스도이고[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NASB, NIV).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우상숭배를 보고 마음에 분노하였다. 그들은 종교와 철학에 관심이 많았고 그들의 우상숭배는 그런 관심에서 나왔다고 보인다. 종교와 철학의 문제들은 비현실적이게 보이지만, 실상 매우 중요한 문제들이다. 우주와 인간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선과 악은 무엇이며 죽음은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들은 옛날부터 종교와 철학의 주제이었다.
[23절]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아덴 사람들은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지만,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없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을 만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지식의 한계를 인정한 것이다. 사람은 최선의 지혜로도 참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전 1:21). 하나님을 어렴풋이 알지만 그가 누구이시며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바르게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모든 종교적, 철학적 질문들에 대한 완전한 대답이다.
[24-25절]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참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창조주이신 그는 피조세계에 제한되지 않는 자, 곧 초월자이시다. 그는 사람이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고 무엇이 부족하여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시다. 그는 완전하시고 아무 부족이 없으시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피조물 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섬기는 것이나, 그의 초월성과 완전성과 충족성을 알지 못하는 신 개념과 그를 섬기는 방식은 큰 잘못이다.
[26-29절]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그 안에서](KJV, NASB, NIV) 살며 기동하며[움직이며] 있느니라[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와 거주 환경 속에서 그의 손길을 어느 정도 깨닫게 하셨다. 그는 사람들과 멀리 떠나 계시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실상 하나님 안에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세계 안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비현실적이거나 사치스런 무엇이 아니고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생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이다.
[30-31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제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신다. 회개는 하나님 없이 살았던 불경건하고 죄악된 삶을 청산하는 것이다. 사람이 회개치 않으면 자신의 죄 때문에 영원한 멸망을 받을 것이지만, 회개하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또 심판은 사람이 회개해야 할 이유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날에 사람들에게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고 공의의 보응을 내리실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세우셨고 그를 부활시킴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가 되게 하셨다. 그의 부활은 그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다.
[32-34절]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아덴에서의 전도의 결과는 크지 않았으나, 우리는 그 수를 귀히 여겨야 한다. 우리의 전도로 몇 명, 아니, 단 한 사람이 구원받는다 할지라도 그 한 영혼은 주의 말씀대로 천하보다 귀하다(마 16:26).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모든 우상을 버리고 창조자시며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이방신들과 우상들은 사람이 만든 헛된 것들이다. 그것들은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 아니다.
둘째로,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야 한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심판자이심을 확증한다.
셋째로,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성경에 밝히 증거되어 있고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거나 조롱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베뢰아 사람들처럼 말씀을 진지하게 받고 과연 그것이 그러한지 성경을 자세히 읽고 연구함으로써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11-12절,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고상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니.”
18장: 고린도에서 전도함
[1-3절]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아가야 지방의 수도인 고린도는 고대 헬라의 상업의 중심지이었고 매우 음란했던 도시이었다. 글라우디오는 주후 41-54년경 통치한 로마의 황제이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굴라라 하는 유대인을 만났다. 그는 황제의 명령 때문에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를 떠나 고린도에 새로 온 자이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갔는데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했다.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었다. 바울은 전도하기 위해 스스로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4-5절]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성령에]54)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바울은 안식일마다 말씀을 강론했다. ‘강론하다’는 원어(디아레고마이)는 조리 있게 변론하다는 뜻이고, ‘밝히 증거하다’는 원어(디아마르튀로마이)는 ‘열심히 증거하다’는 뜻이다. 또 그는 성령에 붙잡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오늘날에도 말씀을 전하는 자는 전하는 말씀을 조리 있게 증거해야 하고 또 말씀과 성령에 붙잡힌 바 되어 열심히 전해야 한다.
[6절]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사도 바울이 전도할 때 유대인들의 대적과 훼방이 있었다. 사탄은 영혼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며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싫어하며 방해한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고 비방하자, 바울은 옷을 떨어버리고 그들과의 단절을 분명히 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14).
[7-8절]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의 말을 믿고 따르는 자들도 많이 있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 가족들, 그리고 많은 고린도인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 하나님의 복음은 항상 상반된 반응을 가져온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다가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있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일은 항상 있는 것이나, 구원의 열매들도 또한 있을 것이다.
[9절]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예수께서는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물론 그 자신은 천국에 계시지만, 신성(神性)의 영으로 환상 중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환상은 사도시대에 하나님의 계시의 한 방법이었다. 하나님의 뜻이 성경에 충족히 기록되고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실 필요가 없다고 우리는 믿는다. 환상 중에 나타나신 주께서는 바울에게 두려워 말고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후시대의 모든 전도자들에게 교훈이 된다. 오늘날 전도자들은 두려워 말고 잠잠하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10-11절]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년 6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었다(마 28:20). 이 위로와 격려의 말씀은 사도 바울에게도 주신 말씀이다. 주께서 그와 늘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는 그를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또 그 성에는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이 많이 있었다. 전도자는 구원의 도구이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전도자는 담대히 말씀을 전해야 하고, 택자들을 다 구원해내어야 한다.
[12-17절]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주후 51년 혹은 52년경)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재판 자리로 데리고 와서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고 저희를 재판 자리에서 쫓아내니 모든 사람[헬라인들](전통본문)55)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 자리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치 아니하니라.
유대인들은 율법을 이루러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여 그를 미워하였고 그를 믿는 제자들을 핍박하였다. 갈리오가 그들을 재판 자리에서 쫓아낸 것은 그 일이 도덕적 사건이 아니고 종교적 사건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전도 사역을 막으려는 유대인들의 고소를 이렇게 막으셨다. 순교의 잔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주어질 것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17절은 사람들이 소란을 피운 유대인 회당장 소스데네를 구타하였다는 뜻 같다.
[18절]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브리스길라는 아내이고 아굴라는 남편인데, 성경 다른 곳에서 그 부부의 이름이 언급될 때 두 번 더(롬 16:3; 딤후 4:19) 아내의 이름이 남편보다 앞에 나온다. 그것은 그 아내가 남편보다 더 성경 지식과 믿음이 있었음을 보이는 것 같다. 그 부부는 바울에게 그를 위해 자신들의 목이라도 내어놓을 만한 좋은 동역자가 되었다(롬 16:3-4).
바울은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 겐그레아는 고린도의 동쪽에 있는 항구 도시이다. 서원은 하나님께 맹세하며 약속하는 기도이다. 바울은 고난과 위험 중에서 하나님께 서원했던 것 같다. 머리를 깎는 것은 일정 기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것을 나타낸다. 서원은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하고 사모할 때 한다. 서원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믿음의 행위이다.
[19절]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에베소는 애게 해 건너편에 있던 도시로서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이었다. 사도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았지만, 먼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다. 그에게는 분명히 동족의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었고 복음 전도에 대한 불붙는 사명감이 있었다.
[20-23절]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작별하여 가로되 [나는 다가오는 이 절기를 예루살렘에서 꼭 지켜야 하겠노라. 그러나](전통본문)56)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다 맡기며 항상 그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바울은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그의 2차 전도여행이 끝났다. 복음이 마게도냐 지방과 아가야 지방에 전해졌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 등 중요한 도시들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또 다시 전도한 지역을 돌아보며 제자들을 굳게 하였다. 이것이 그의 3차 전도여행이었다. 전도는 씨를 심는 것이고, 심방은 돋아난 싹에게 물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는 전도도 필요하고 목회도 필요하다.
[24-25절]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로기오스 lovgio")[달변이며](KJV, NASB)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주](전통사본)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애굽의 수도이었고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이었다. 그 도시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주전 3세기에는 거기에서 구약성경의 헬라어역(70인역, LXX)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아볼로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랐고 공부를 하였고 성경을 배웠다. 그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고 그를 통해 예수님을 안 것 같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못했던 것 같고 성령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26절]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아굴라와 브리스길라](전통본문)57)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道)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아볼로에게 개인적으로 복음을 더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 내용은 그들이 사도 바울에게서 배운 것들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의 대속(代贖)적 의미, 죄사함 받음과 의롭다 하심 얻음 등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말미암은 지식이었다. 천막 만드는 자인 일반 신자 아굴라 부부라도 성경에 능한 아볼로보다 더 복음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있었다. 참된 복음 지식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27-28절]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성경에 능한 아볼로가 복음의 도를 바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끼치는 일꾼이 되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다. 그것은 그의 기적들과 부활을 통해 확증된다. 그는 나병, 중풍병, 소경, 벙어리, 열병, 손마른 자 등의 병자들을 고치셨고 죽은 야이로의 외동딸, 나이성 과부의 외아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고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셨다. 그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둘째로, 자신이 죄인이라고 깨닫는 자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구원을 얻어야 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 사도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다.
셋째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끝날까지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고 아직도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많이 남아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직장 동료들에게, 이웃들에게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이심을 담대히 전파해야 한다.
19장: 에베소에서 전도함
[1-2절]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은 전에 에베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말했었다(행 18:21). 그는 이제 에베소로 돌아와서 어떤 제자들이 믿을 때 성령을 받지 못했고 성령께서 계심도 듣지 못한 것을 알았다. ‘제자’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보통 가리키지만, 바울이 만난 자들은 예수님을 믿은 것 같지 않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도 받지 않았고 성령을 알지도 받지도 못했다.
[3-5절]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그 제자들은 확실히 신앙 지식에 있어서 부족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아볼로의 가르침으로 예수님을 알았는지는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도리를 확실히 알지 못한 자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만 받았고 아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말했고 그가 곧 예수라고 전했다. 그러자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6-7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 위에 오셨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사마리아 신자들에게 안수할 때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과 같았다(행 8:17). 하나님께서는 두 경우에 다 사도들을 통해 새 신자들이 성령을 받게 하셨다. 그 에베소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증거로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신약시대에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성령을 받는 것은 특권이며 큰 복이다(갈 3:2). 그들의 수는 약 열두 명이었다.
[8-10절]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바울은 에베소 회당에서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강론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킨다. 사람은 하나님 없이 살던 불경건한 삶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에게 복종하는 삶이다. ‘강론하다’는 원어(디아레고마이)는 ‘조리 있게 말하다’는 뜻이고, ‘권면하다’는 원어(페이도)는 ‘권하며 설득하다’는 뜻이다. 전도자는 사람들을 조리 있게 설득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그 말씀을 비방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 바울은 그런 자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의 모임이다. 믿지 않는 자들이 많이 섞여 있는 교회는 무기력해진다. 교회는, 비록 수가 적어도, 진실하고 순종하는 자들이 모여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 사랑하고 주를 섬기며 목사는 바른 말씀을 열심히 전하며 회중은 그 말씀을 열심히 받을 때 교회다운 모습을 가진다.
바울은 두 해 동안 말씀을 전했다. 두 해 동안은 안식일이 100번 이상이다. 만일 일주일에 두 번씩 전했다면 그는 200번 이상 설교할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가르치는 일이 중요하다. 기독교는 단순한 어떤 삶이나 체험이 아니고 바른 진리 사상에 근거한 삶과 체험이다. 2년 동안의 바울의 말씀 사역을 통해 당시 로마의 한 행정구역인 아시아 지방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널리 전파되었다.
[11-16절]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행한 기적을 통해 그가 전한 말씀이 진리임을 능력으로 증거하셨다. 사도들이 기적을 행한 것은 그들이 전한 복음이 진리임을 확증하는 표이었다. 히브리서 2:3-4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고 말하였다.
[17-19절]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5만이나 되더라.
은 5만은 당시 보통 노동자가 5만 일 동안, 즉 약 137년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매우 큰 금액이었다. 이 사건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어떻게 철저하게 회개했으며 죄악된 일들을 청산했는가를 보여준다. 구원은 회개를 동반한다. 죄의 청산은 회개의 열매이다. 구원받은 자들은 죄악된 일을 버리고 선을 행해야 한다.
[20절]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전도의 역사이다. 사도들이 전한 말씀은 힘이 있었고 흥왕하고 세력을 얻었다(행 6:7; 12:24). 하나님의 말씀의 힘은 곧 하나님의 힘이다. 전도는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사람의 힘으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의 힘, 하나님의 힘, 곧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사도행전은 말씀 행전(行傳)이며 성령 행전이다.
[21-22절]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심령으로](원문)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
로마는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이다. 바울은 그 즈음에 쓴 고린도전서에서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고 말하였다(고전 16:8-9). 그의 2년 3개월의 에베소 전도 사역은 많은 결실을 맺었다.
[23절] 그때쯤 되어 이 도(道)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던 그때에, 이 말씀으로 인해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다. 진리 운동에는 언제나 갈등과 싸움이 있다. 주께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셨다(마 10:34). 사람들의 무지함과 사탄과 악령들의 역사로 인해 이런 갈등과 싸움이 일어난다. 우리는 그런 소동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24-27절]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이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아데미’는 에베소 사람들이 섬기던 신이며 ‘은감실’이란 은으로 만든 신주 궤를 가리킨다. 데메드리오가 바울을 대적하여 사람들을 선동한 내용은 두 가지이었다. 첫째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는 바울이 전하는 말 때문에 그들의 영업만 천해지고 아데미의 전각이 경홀히 여김이 되고 그의 위엄도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들에게 적지 않은 돈벌이가 되고 자기들의 유족한 생활의 기반이 되는 은감실 만드는 일이 쇠잔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소득 감소의 위험, 즉 그들의 이익 문제가 선동의 중요한 동기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물질적 이익에 손실이 되면 싸우려 한다.
[28-34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 가는지라.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또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발명하려 하나 저희는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 동안이나 하더니.
에베소 성의 사람들은 데메드리오의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였다. 그의 말은 군중을 분노케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소동은 확실히 감정적이었다. 사람들 중에는 자기들이 왜 모였는지 알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다. 군중 심리는 항상 그런 것 같다.
[35-41절] 서기장이 무리를 안돈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성이 큰 아데미와 및 쓰스[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전각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훼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잡아 왔으니 만일 데메드리오와 및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송사할 것이 있거든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거든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단할지라.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騷擾)의 사건으로 책망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가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재료가 없다 하고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서기장은 무리들을 안돈시키며 그들이 전각의 물건을 훔쳤거나 아데미 여신을 비방하지 않은 자를 잡아온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어떤 송사할 일이 있으면 정식 재판 절차를 밟아서 해야 할 것이며 이 불법 집회에 대해 책망받을 위험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였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오늘날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바울은 에베소 회당에서 석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강론했다. 또 그는 거기서 나와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날마다 말씀을 전했다. 오늘날도 설교자는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고 모든 성도들도 담대히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복음을 믿지 않고 비방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예상하자. 어떤 순종치 않는 자들은 바울을 비방했고 또 그의 전도로 인해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서기장의 중재로 그 소요가 진정되었다. 우리는 바른 말씀에 대한 비방과 소요를 늘 예상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자. 바울의 사역에는 병이 낫고 악귀가 나가는 일이 있었고 마술사들의 회개가 있었다. 기적은 사도 시대 이후에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이 아니지만, 오늘날에도 말씀의 능력은 동일하다. 우리는 인간의 철학이나 기적을 전하지 않고 십자가에 죽으신 구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지만, 그 복음의 말씀이 죄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됨을 믿자(고전 1:21-25).
20장: 에베소 장로들에게 권면함
[1-2절]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전통사본에는 없음) 작별하고(아스파조마이 )[인사하며 포옹하고](Thayer)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마게도냐는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성이 있는 지역이다. 사도 바울은 그 지역을 지나며 여러 말로 제자들을 권면했고 헬라에 이르렀다. 헬라는 고린도 성이 있는 곳이다. 바울은 자기가 전도했던 곳들을 방문하여 신자들을 권면하였다. 권면은 신앙생활에 유익하다.
[3절]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하나님의 종들은 사탄과 악한 자들의 대적을 두려워하거나 위축될 것이 없다. 그러나 핍박을 피할 수 있을 때는 피하는 것도 좋다.
[4-6절]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전통사본에는 없음)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어렵고 힘든 길이었지만, 사도 바울과 함께 동행하며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일곱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에 아마 바울의 첫 번째 동역자인 실라가 있고 또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누가도 있었다. 그들은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이렇게 바울 전도단은 바울을 포함해 적어도 열 명이었다. 드로아는 아시아 지방의 항구이었다.
[7-8절] 안식 후 첫날에[주간의 첫날에](원문) 우리가[제자들은](전통사본)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본문은 예수님 믿는 신자들이 사도 시대에 안식 후 첫날 곧 주일에 공적 모임을 가졌음을 보인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구약시대의 토요 안식일은 신약시대의 주일로 변경되고 있었다. 토요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완성되었고(골 2:16-17),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그의 부활의 날인 주일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지키기 시작하였다. 주일은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지켜지게 되었다.
[9절]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깊은 잠에 떨어졌는데](원문)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樓)[다락]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하나님의 충만한 말씀의 잔치 시간에 큰 시험이 생겼다. 그것은 믿음 없는 한 청년에 의해 일어났다. 그는 귀한 사도의 설교 시간에 깊은 잠에 떨어졌다가 삼층 다락에서 떨어진 자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잠자는 젊은이 때문에 그의 성경 강론을 줄이지 않았다.
[10-12절]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그 젊은이가 죽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었다. 바울은 다시 올라가 설교를 마치고 날이 새기까지 그들과 이야기한 후 그곳을 떠났다. 제자들 속에는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13-16절]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리고 [트로길리움에 머물고](전통사본)58) 또 그 다음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통과하여]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17-21절]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59)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자신이 에베소에서 어떻게 전도의 일을 했는지에 대해 증거하였다. 특히 그가 전한 내용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회개와 믿음을 전한 것이었다. 참 믿음은 죄를 회개함을 전제하며 그것을 동반한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오늘날도 교회가 전해야 할 내용이다.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22-24절]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는 그것을 문제로 여기지 않고 기쁨으로](전통사본)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디아코니아 diakoniva)[직무]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마치도록]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심령에서 나온 굳은 결심 때문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강권하심 속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는 죽을 각오로 복음사역에 임하고 있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9:23-24). 바울의 전도 사역은 모든 전도자들에게 본이 된다.
[25-27절]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모든 뜻을 거리낌 없이 전했기 때문에 그들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파수꾼이 악인들에게 경고해야 할 직무를 다했는데도 악인들이 회개치 않고 멸망하면, 그가 그 피에 대해 깨끗하다고 말씀하셨다.
[28절] [그러므로](전통사본)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주 하나님께서](전통사본)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교회는 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이다. 그의 핏값은 계산할 수 없이 크다. 여기에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크심과 그가 보화로 여기시는 성도들의 가치의 큼이 있다. 교회는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시고 구원하신 교회이며 하나님께서 설립하시고 소유하시고 다스리시는 교회이다.
또 장로들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양들인 구원받은 성도들을 먹이고 돌보는 감독자로 세움을 입은 자들이다. 여기에 ‘장로’는 목사와 장로를 다 포함한다. 양들을 먹이고 돌보는 것은 교인들에게 설교하고 교훈하며 심방하고 권면하고 위로하고 책망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자신을 위해 그리고 온 양떼를 위해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말씀의 바른 지식과 믿음과, 바른 인격과 삶을 소유해야 한다. 그들은 양들에게 본이 되어야 그들을 잘 돌아볼 수 있다. 자신들이 범죄하면 양들을 바르게 가르치고 인도할 수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권면하였다(벧전 5:3).
[29-30절] [이는]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앎이니라].
장로들이 조심해야 할 이유는 이단 사설들이 교회에 들어올 것이며 양들을 타락시키며 바른 교훈에서 떠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의 교훈, 즉 성경적 설교가 중요하다. 우리는 사도들로부터 전달되어 온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를 잘 파악하고 지켜야 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말했다(딤후 1:13-14). 우리가 그렇게 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바른 말씀 즉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를 잘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개혁신학에 잘 나타나 있다고 본다.
[31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사탄의 역사로 교회가 부패되고 변질되기 쉬우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을 때 그들에게 밤낮 쉬지 않고 부지런히 가르치고 권면했고 눈물로 진지하고 간절하게 각 사람을 훈계하였다. 이제 그는 장로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기억하면서 조심하라고 말한다. 바울은 모범적인 사역자이었다. 오늘날 목사들도 바울을 본받아 부지런하고 간절하게 말씀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훈계해야 할 것이다.
[32절] [형제들아](전통사본)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하나님과]60)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그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바울은 그들과 교회를 하나님께 부탁한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며 그는 가장 좋은 교사요 권면자요 책망자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에게 의탁하는 것은 가장 좋은 방책이다. 또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게 부탁한다. 성경의 요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말씀이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든든히 세우며 우리로 거룩케 하심을 입은 자들의 회, 즉 현재 참 교회와 미래에 영광의 천국에 속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경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33-35절]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바울은 물질적 탐심을 가지고 일하지 않았다. 그는 교인들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일함으로 자신의 필요를 충당했다. 그는 교인들에게 물질적 부담을 주지 않았다. 바울은 그렇게 본을 보임으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도 궁핍한 자들을 돕는 자들이 되게 하려 했다. 주 예수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6:38). 우리는 물질적 탐심을 버리고 일해야 한다.
[36-38절]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과 그곳의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피차 뜨겁고 진실한 사랑이 있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본장은 전도자들에게 교훈이 된다. 사도 바울은 때때로 밤 늦도록 말씀을 강론하였다. 그는 모든 겸손과 눈물로 사역하였다. 그는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전하였다. 그는 복음의 핵심인 회개와 믿음을 전했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며 사역하였다. 전도자들은 사도 바울의 이런 점들을 본받아야 한다.
둘째로, 본장은 목사들과 장로들에게 교훈이 된다. 목사들과 장로들은 성령께서 목양자와 감독자로 세우셔서 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피로 사신 교회를 가르치고 돌보게 하신 그 사명과 직무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자신과 양떼를 위하여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특히 이단사설들이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부패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사도적 교훈 곧 신구약성경의 교훈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성경 많이 읽고 연구하고 기도 많이 하며 하나님과 교통하고 동행해야 한다. 또 그들은 하나님과 복음 진리만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그들이 목양하는 교회를 지켜 주실 것이며 또 신구약성경과 복음 진리는 그들과 그들이 목양하는 교회를 지켜 줄 것이다. 또 그들은 물질적 이익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본장은 교인들에게도 교훈이 된다. 우리는 무엇보다 복음 신앙에 굳게 서야 한다. 복음 신앙이란 하나님 없이 살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속죄만을 굳게 믿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속죄신앙이며 구원 신앙이다. 또 우리는 죽음을 각오한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본받아 죽음을 각오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는 마음으로 성경말씀을 규칙적으로 읽고 또 배우기를 힘써야 하고 죽음을 각오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기를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이단사설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사랑해야 하고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또 우리는 물질적 이익을 구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다. 사람은 조금이라도 자기 양식을 자기가 벌어서 해결하고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부모에게 의존하지 말고 국가에도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자녀들에게도 그런 독립심을 키워주어야 한다.
21장: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잡힘
[1-6절]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
바울 일행은 에베소 장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두로에 상륙하였다. 그는 거기서 제자들을 찾아 7일간 머물렀고 그들과 교제를 나누었다. 두로의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핍박받을 것을 예감하면서 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했다.
바울 일행은 두로에서 여러 날을 지난 후 그곳의 제자들과 작별하고 떠나갈 때에 그들이 다 그 아내들과 자녀들과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했고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했다. 바울은 두로의 제자들의 평안과 영적 성장을 위해 기도했을 것이고, 두로의 제자들은 바울 일행의 예루살렘 방문과 그곳에서의 안전과 계속되는 그의 전도사역을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성도의 교제는 사랑과 위로와 권면의 교제일 뿐 아니라, 서로를 위한 기도의 교제이다.
[7-9절] 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바울과 함께한 자들은](전통사본)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바울 일행은 두로를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했다. 빌립은 예루살렘 교회가 구제와 봉사의 일을 위해 세웠던 일곱 집사들 중 한 사람이었다(행 6장).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마리아에 최초로 복음을 전했고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전도자이었다(행 8장). 그에게는 예언하는 네 딸들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남자를 세워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을 삼으셨고 신약시대에도 남자를 사도와 목사와 장로와 집사로 세우셨고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교훈하셨지만(고전 14:34-38; 딤전 2:11-14), 비상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여자에게도 예언의 은사를 주셨다. 구약시대에 미리암과 드보라가 그러하였고, 신약시대에 빌립의 딸들이 그러하였다.
[10-11절]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사도 시대에는 사도들 외에도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있었다. 선지자 아가보도 그 중의 하나이었다. 아가보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과 발을 잡아매고 성령으로 말하기를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도 에베소 장로들에게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였다”고 말했었다(행 20:23).
[12-14절]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바울 일행과 가이사랴의 성도들은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했다. 그들의 권함은 진지하였고 간곡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올라가려는 바울의 결심은 확고하였다.61) 그는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대답하였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한 것은, 예루살렘을 사모한 이유 외에도, 아시아와 마게도냐에서 더 이상 그가 전도할 곳이 없었고 예루살렘 방문 후 로마와 서바나까지 가기를 소원했기 때문인 것 같다(행 19:21; 롬 15:23-26). 로마와 서바나[스페인]는 당시에 땅끝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굳게 결심하고 그곳에서 결박받을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고 있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려고 했다. 사람이 어떤 결심을 하든지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15-19절] 이 여러 날 후에 행장[짐]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바울은 예루살렘에 와서 일행과 함께 야고보와 장로들에게 문안했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갈 1:19)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 특히 야고보에게 문안한 것은 좋은 본이 된다. 교회는 주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서로 교제하고 문안해야 한다. 성도의 교제는 항상 즐겁고 복된 일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다.
바울은 또 하나님께서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인들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보고하였다. 그것은 물론 의무사항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의 사역자들이 자신들을 통해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서로 나누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바울은 보고할 때 하나님께서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하셨고 이루셨다고 말했다. 그렇다. 전도자들의 사역은 순전히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한 명도 구원할 수 없으나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사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해내신다.
[20-22절]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주께](전통본문)62)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관습]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들으므로 무리가 필연 모이리니](전통본문)63).
바울의 전도 보고를 들은 야고보와 장로들은 주께 영광을 돌렸다. 우리의 최선의 봉사라 할지라도 그 봉사의 결과로 인한 영광을 우리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한 선한 일들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무런 선한 일을 행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은 바울에게 한가지 근심된 일을 말하였다. 그것은 믿는 유대인들의 문제이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은 수만명에 달하였다. 그들은 다 율법에 열심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고 또 빈번히 잘못되기 일쑤이다.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들 세계에서 유대인들을 가르치기를,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치 말고 유대인들의 전통적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잘못된 정보이었다. 그들은 이 잘못된 정보 때문에 바울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들 것이 분명하였다.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핍박은 예견되는 일이었다.
[23-26절]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피할 것 외에는 그런 것을 지키지 않도록](전통본문)64)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된 것을 고하니라.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은 바울로 결례를 행하게 함으로써 그가 율법과 유대인들의 전통을 지키는 자임을 사람들에게 알리려 했다. 바울은 준비된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 각 사람을 위해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된 것을 고하였다. 사도시대에 예수님 믿은 유대인들은 여전히 율법의 규례를 지키고 있었다. 그것은 과도기적 현상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총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에게는 단지 네 가지만 조심하도록 결의하였었다.
[27-30절]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은 바울을 비난하고 해치려 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율법이나 예루살렘 성전을 비방하지 않았으나 그들은 바울을 그렇게 생각했고 또 바울이 헬라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렇게 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잘못된 생각에서 거짓되고 악한 비난과 선동의 말이 나왔다. 사람의 말은 영향력이 있다. 좋은 말은 좋은 영향을 끼치지만, 나쁜 말은 나쁜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바른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선동하는 말에 바른 생각과 판단 없이 따라다녀서는 안 될 것이다.
[31-32절]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바울은 잡혀죽을 위험에 처했으나, 치안을 맡은 로마 군인인 천부장이 소동의 소식을 듣고 급히 군사들을 거느리고 왔다.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사람의 죽음은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이 되어야 온다. 하나님께서는 천부장을 보내심으로 바울에게 피할 길을 주셨다.
[33-36절]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 말로, 어떤 이는 저 말로 부르짖거늘 천부장이 소동을 인하여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폭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감이러라.
바울은 두 쇠사슬에 결박되어 끌려갔고 사람들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갔다. 이것이 어두움이 지배하는 세상의 현실이다. 예수께서 정죄를 받으실 때도 그러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다. 그는 사람들의 선행과 악행을 다 보시고 헤아리시고 판단하시고 보응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그의 정하신 때에 나타날 것이고 또 마지막 날에 완전하게 드러날 것이다.
[37-40절] 바울을 데리고 영문으로 들어가려 할 그때에 바울이 천부장더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 가로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그러면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4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바울이 가로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히 한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여 가로되.
바울은 자신을 결박하여 끌고가는 천부장에게 자신이 사람들에게 변명할 시간을 요청하였다. 그는 헬라 말을 할 줄 아는 자이었다. 그는 천부장의 허락을 받은 후 층대 위에 서서 무리들에게 손짓하여 크게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였다.
바울은 두로에서도(4절) 또 가이사랴에서도(10-12절)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는 간곡한 권면을 받았었으나 그의 각오는 견고하였다. 13절,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붙잡혔고(27, 30절), 무리들은 그를 폭행했고 죽이고 없이하려고 했다(31, 32, 35, 36절).
주 예수께서는 ‘나를 인해 핍박을 받는 자는 복되다’고 말씀하셨고(마 5:11), 또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마 10:28), 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25). 이것이 주의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이며 참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는 우리의 구주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난과 죽음도 각오하며 따라가야 한다.
22장: 무리들 앞에서 증거함
[1-3절]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났으나]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천부장에게 발언권을 얻은 바울은 유대인들 무리 앞에서 말했다. 그는 자신이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그들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해 열심히 있었던 자라고 말하였다. 가말리엘은 당시의 율법학자로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이었다(행 5:34). 이와 같이 바울은 경건한 보수적 율법 교육을 받았고 그가 배운 율법의 지식대로 열심을 품고 하나님을 섬겼던 자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단순히 종교적 열심만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른 지식을 가진 열심이 필요하였다.
[4-5절]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장로들의 회]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바울은 열심이 있었으나 그 열심이 잘못된 데 사용되었다. 그는 잘못된 지식 때문에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였고 남자든지 여자든지 잡아 결박하여 옥에 넘기는 일을 했고 예수 믿는 도를 박멸하려 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전에 사울이라고 불리었다. 사도행전 앞부분에 보면,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죽였을 때 증인들은 옷을 벗어 청년 사울의 발 앞에 두었었다(행 7:58). 사울은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고(행 8:3), 주의 제자들을 대해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행 9:1). 그는 심지어 멀리 다메섹 성에까지 가 예수님 믿는 자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와 형벌을 받게 하려 했다.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기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다”고 하였다(갈 1:13-14). 잘못된 지식에서 나온 열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거슬렀다.
[6-8절]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친히 그에게 나타나셨다. 홀연히 하늘에서 비추인 큰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광채 곧 그의 신성(神性)의 광채이었다. 요한계시록 21:23에 보면,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양의 빛 때문에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다고 증거되었다. 사울은 그 광채 앞에 엎드러졌다. 나사렛 예수, 즉 나사렛에서 자라셨고 30여년간 세상에 계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3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 그가 자기를 핍박하던 사울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그를 굴복시키셨던 것이다.
[9-11절]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빛을 보고 두려워했으나](전통본문)65)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은 빛을 보고 두려워했으나 그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도행전 9:7은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고 증거한다. 우리는 이 두 구절들을 조화시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바울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비친 큰 빛은 보았으나 말씀하신 예수님의 형상을 보지 못했고, 어떤 음성과 소리는 들었으나 그 내용을 알아듣지는 못했던 것 같다.
주께서는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고 말씀하셨다. ‘정한 바’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향해 만세 전에 작정하신 바를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끝날까지의 모든 일들을 다 작정하셨고 때가 될 때 다 이루신다. 이사야 46: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계획,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작정자이시며 주권적 섭리자, 통치자이시다. 그 큰 빛 때문에 앞을 볼 수 없게 된 사울은 함께 있던 자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그 핍박자를 한 순간에 꺾으셨다.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고서는 아무도 핍박자 사울을 꺾을 수 없었을 것이다.
[12-16절]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바울은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통해 시력의 회복을 얻었다. 그것은 아나니아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따라 된 것이었다. 바울은 육신의 시력뿐 아니라, 영의 눈도 열렸다. 아나니아는 또 그에게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셔서 자기의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시고 그의 친 음성을 듣게 하심으로 모든 사람 앞에서 그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죄를 씻으라고 말하였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구별되었지만 다른 기원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는 오히려 유대교의 본래의 뿌리를 참으로 계승한 진리이었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께서 오셨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신 것은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과 사도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이었다.
[17-21절]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마르튀스)[혹은 ‘순교자’(KJV, NIV)]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바울은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에서 기도할 때 환상을 보았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자들은 때때로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특별한 상태에 있었고 바울도 그러했다. 그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는 오늘날도 신성(神性)의 영으로 활동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신다.
비몽사몽간에 나타나신 주께서는 바울에게 유대인 동족들이 그가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할 것이니 속히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자신이 주를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각 회당에서 때렸고 주의 증인 스데반이 돌에 맞아 피흘려 죽을 때 그의 곁에 서서 그를 죽이는 일을 찬성하였고 죽이는 자들의 옷을 지켰음을 주께 고백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들에게로 보내리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을 향하신 주의 뜻은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그의 사도들을 거절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으나 바른 지식에서 난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신들의 행위의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았다(롬 10:2-3).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로 보냄을 받았다. 베드로가 할례자들의 사도이었던 것같이, 바울은 무할례자들의 사도 즉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롬 15:16; 엡 3:7-8; 딤전 2:7; 딤후 4:17).
[22-23절]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하자. 살려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당시의 상황은 살벌하였다. 그들의 무지함은 하나님의 종을 핍박하고 살해하려는 데까지 나아갔다. 사형시킬 큰 죄인도 그의 죄를 확정하지 않고 죽여서는 안 된다. 재판은 공정해야 한다. 구약성경에 사형을 집행할 죄에 대한 규정이 있고 특히 이단자들에 대해 그러하지만(신 13장), 그런 경우에도 그 죄에 대해 두세 증인에 의해 사실을 확인하고 그것이 율법에 저촉되는 큰 범죄인지를 확증한 후에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의 계시와 환상을 증거한 바울을 죽이려 했다. 그들은 단지 무지와 오해와 시기심 때문에 그를 죽이려 하였고 무리를 선동하였던 것이다.
[24-30절]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고 저희가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나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한대 가죽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가로되 어찌하려 하느뇨?[행하는 바를 조심하소서]66) 이는 로마 사람이라 하니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사람이냐? 내게 말하라. 가로되 그러하다.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하니 신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사람인 줄 알고 또는 그 결박한 것을 인하여 두려워하니라. 이튿날 천부장이 무슨 일로 유대인들이 그를 송사하는지 실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저희 앞에 세우니라.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나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할 때 바울은 곁에 섰는 백부장에게 “너희가 로마 사람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라고 말했다. 바울은 채찍과 학대를 받을 위험 중에서 로마 시민의 특권을 사용하였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도 로마 시민권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행 16:37-39). 로마 제국에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들에게는 특별한 혜택들이 있었다. 특히 그들은 재판에 있어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로마 시민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편이 되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기적으로 그를 건져내실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의 방식은 그렇지 않았다. 기적주의는 하나님의 일반적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천부장과 군사들을 사용하셔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지 못하게 막으셨고 이 경우에 그의 로마 시민권을 사용하셔서 그가 너무 부당한 학대와 채찍질을 당하지 않게 하셨던 것이다. 그는 또 바울의 성경 지식이나 지적 능력을 사용하셔서 그로 하여금 여러 권의 서신들을 쓰게 하셨고 또 쓰게 하실 것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셨는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만에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신다. 그는, 다메섹 성에까지 가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오려고 가던 핍박자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굴복시켜 자기의 증인과 일꾼을 삼으셨다. 그는 사울에게 나타나심으로 한번 더 자신의 살아계심을 증거하셨다. 그는 오늘날에도 그런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으시지만, 사도 시대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는 오늘날 보통 신구약성경을 통하여 성령으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시고 그들의 심령을 구원하시고 변화시키신다. 여러분은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셨는가?
둘째로,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으셨는가? 예수님을 몰랐던 바울은 그가 의인이시며 구주이신 것을 믿었다. 십자가는 사형수의 형틀이다. 예수님은 사형을 당할 죄인이 아니셨다. 그는 의인이셨다. 그러므로 그의 십자가 죽음은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증거하였다(고후 5:21). 바울은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고 죄씻음 받음을 확증하였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으셨고 의롭다 하심을 얻으셨고(롬 3:21-24) 구원을 받으셨는가?(엡 2:8).
셋째로,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증거하자. 주께서는 바울을 불러 그의 증인이 되게 하셨다. 오늘날도 그는 전도자들을 불러 그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게 하신다. 주께서는 오늘날도 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드리기를 원하신다. 그는 모든 신자들에게 어느 정도 이 사명을 주셨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다(벧전 2:9).
23장: 공회 앞에서 증거함
[1-3절]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사도 바울은 유대인 공회 앞에서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했다. 양심은 선악을 분별하여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다. 사람이 욕심을 따라 행하거나 숨은 죄가 있으면 양심을 거스르게 되지만, 성도의 정상적인 신앙생활은 양심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평소에 모든 일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양심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사실을 말했을 뿐이나, 공회 의장인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고 명했다. 그러자 바울은 그에게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고 대답했다. ‘회칠한 담’이라는 말은 속으로는 불의하면서 겉으로 의로운 척하는 외식자를 가리킨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외식자들의 외식과 숨겨진 불의와 악을 언젠가는 반드시 징벌하실 것이다.
[4-5절]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바울은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는 법을 말하면서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했다. 사람이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아야 하는 까닭은 사회의 질서와 덕을 위해서이다. 어느 단체나 사회의 지도자를 비방하는 것은 그 단체나 사회를 혼란시키고 파괴시키는 악이다. 건설적인 조언은 선한 것이지만, 파괴적인 비방은 악한 것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들을 함부로 비방하지 말고 세상의 이웃 사람들에게라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6-8절]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이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바리새파는 신앙사상에 있어서 보수적인 입장을 가졌고, 사두개파는 자유적인 입장을 가졌다. 사두개파는 예수님 당시에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사두개파는 죽은 자의 부활도, 천사도, 영도 다 부정했으나 바리새파는 그것들을 다 인정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는 바리새파가 옳았다.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바리새인들이었고 대제사장들은 사두개인들이었다. 사람이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믿지 못할 일이 아니었다. 또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바로 알 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다(행 2:36; 17:31; 롬 1:4). 바울의 말로 인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뉘었다.
[9-10절] 크게 훤화[시끄러움]가 일어날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뇨[하나님과 다투지 말자](전통사본)67) 하여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이 바울이 저희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사를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문으로 들어가라 하니라.
천부장이 군사들을 명하여 바울을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문으로 들어가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천부장과 군사들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보호하시는 한 수단이었다.
[11절]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바울아](전통본문)68)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소요와 위협을 모면하고 심신으로 피곤했을 그 날 밤에 주께서는 바울을 격려하셨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시다. 그는 신성(神性)의 영으로 우리와 늘 함께하신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또 주께서는 바울에게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이전부터 로마 방문을 사모하였고 심지어 서바나(스페인)까지 가서 전도하기를 소원하였었다(행 19:21; 롬 15:23).
[12-15절]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40여명이더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알아볼 양으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유대인들은 형식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종을 죽이려는 악한 계획을 한 것은 확실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일이었다. 심령이 거듭나 선한 마음을 가지지 않은 자, 평소에 진지함이 없는 형식적 교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무리가 될 수 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바울을 죽일 계획을 말하였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마땅히 그 악한 자들의 거짓된 계획을 거절하고 그들을 책망했어야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실상 그들은 다 한 부류이었다.
[16-21절] 바울의 생질[누이의 아들]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문에 들어가 바울에게 고한지라. 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가로되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로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 하니 천부장에게로 데리고 가서 가로되 죄수 바울이 나를 불러 이 청년이 당신께 할 말이 있다 하여 데리고 가기를 청하더이다 하매 천부장이 그 손을 잡고 물러가서 종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共謀)하기를 저희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당신은 저희 청함을 좇지 마옵소서. 저희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40여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그 위험에서 건지시기 위해 기적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고 그의 누이의 아들을 사용하셨다. 사실, 바울의 누이의 아들이 그 일을 알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개인적인 일이나 단체적인 일이나 우연하게 보이는 일까지도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되어진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되어진다(마 10:29).
[22-24절] 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고하였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3시[오후 9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200명과 마병 70명과 창군 200명을 준비하라 하고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40여명으로 결사대를 만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의 안전한 피신을 위해 천부장의 빠른 조치와 470명의 호위병들을 준비하셨다. 하나님의 섭리가 놀라울 뿐이다.
[25-30절] 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에게 문안하노이다.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송사하는지 알고자 하여 저희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송사하는 것이 저희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건이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유대인들의](전통본문)69)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게 하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송사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를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안녕히 계시옵소서](전통본문).70)
천부장은 총독 벨릭스에게 문안하며 바울에 대한 송사 사건과 그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간계에 대해 말했다. 이방인이 죽일 죄가 없다고 판단하는 자를 유대인들은 정죄했다. 사람은 참으로 악하다.
[31-35절]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이튿날 마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문으로 돌아가니라. 저희가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가로되 너를 송사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바울은 보병의 보호를 받으며 안디바드리로 갔고 거기서 마병의 호송을 받으며 총독이 있었던 가이사랴에 도착하였다. 바울은 총독 앞에 섰고 송사하는 사람들이 올 때까지 헤롯 궁에 갇히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자. 양심은 선과 악을 분별하고 선을 택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바르고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하고 범사에 양심을 따라 살고 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말하였다(딤전 1:18-19). 우리는 양심이 깨끗하게 유지되고 더러워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양심에 거리끼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해야 한다. 그 당시에 유대인 공회는 매우 해이해져서 죽은 자의 부활과 천사와 영을 믿지 않는 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대로 믿었으나 사두개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사두개인들은 자유주의자들이었다. 부활과 천사와 영을 믿지 않는 것은 죄이다. 바울은 벨릭스 총독 앞에서 “[나는]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고 말했다(행 24:14-15). 히브리서 6:1-2는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 . .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고 또 예수님의 부활도 확신해야 한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증거인 동시에 기독교가 참되며 확실한 구원의 진리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을 뿐 아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과 기독교의 참됨을 확신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위기도 주시지만 그것을 모면케도 하신다. 40여명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맹세했으나, 그 일이 바울의 누이의 아들에게 알려졌고 그가 그것을 옥에 있는 바울에게 전했고 그것이 천부장에게 알려져 천부장은 바울을 많은 군사들로 호위하여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에게 보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죽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재앙 중에서 지키시고 건지실 수 있다(시 91편).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성도의 모든 일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24장: 벨릭스 총독 앞에서 증거함
[1-5절]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송사하여 가로되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형통한 것](전통사본)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무지하옵나이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더둘로의 말은 아첨하는 기운이 역력했다. 아첨은 반쯤 거짓말이다. 성도는 세상 위정자들을 존중해야 하지만, 그들에게 아첨해서는 안 된다. 그는 바울에 대해서는 ‘염병에 걸린 자’ ‘천하에 퍼진 유대인들을 소요케 하는 자’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모욕적인 말을 했다. 하나님의 종 바울은 하나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또 구원의 복음 때문에 그런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런 비난은 복음이 바울을 통해 온 세상에 힘있게 전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6-9절]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우리가 잡아 우리의 법에 따라 재판하려 하였으나 천부장 루시아가 우리에게 와서 강압적으로 우리 손에서 그를 취하여 갔고 고소자들에게 당신께 오라고 명하였나이다.](전통사본의 일부)71)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의 송사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더둘로는 바울이 성전을 더럽게 하려 했다고 말하나 그것은 사실과 달랐다. 바울은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한 적이 없었다. 더욱이, 그들은 바울을 살해하려고 했던 자신들의 악한 계획을 숨겼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음모를 좌절시키셨고 바울을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셨고 그의 전도 사역이 차질을 빚지 않도록 섭리하셨다.
[10-13절]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 이틀밖에 못되었고 저희는 내가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과 또는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바울은 자신을 변호할 때 총독 앞에 비굴하게 아첨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담대하고 정정당당하게 자신을 변호하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일을 오직 하나님께 맡기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정직하게 사는 자는 사람들 앞에서 담대할 수 있다.
[14-16절]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받아들이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죽은 자들의](전통사본)72)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힘쓰나이다].
바울은 자신이 그들이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도(道)를 좇아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유대인들이 소망하는 의인과 악인의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놀라운 신앙고백이며 증거이었다. 사도 바울은 구약성경을 다 믿고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고 소망하였다. 성경을 믿고 부활을 믿는 것은 성도의 기본적 믿음이다.
[17-21절] 여러 해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원문에 없음)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원문에 없음) 저희가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송사하였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내게서](전통본문)73)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바울은 공회 앞에서 정죄받은 죄가 없었다.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그를 송사할 일이 있으면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단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하여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죽은 자들의 부활은 바리새인들을 포함해 전통적 유대인들이 믿고 소망한 바이었다. 그것은 정죄받을 죄가 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핍박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정당성이 없었다.
[22-23절]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하는[수종하고 접근하는](전통사본)74)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
벨릭스는 바울의 죄가 심각한 것이 아님을 알았고 그에 대해 매우 너그러운 처리를 했다. 하나님께서는 억울하게 결박되어 고난 당하는 바울을 이만큼 위로하셨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
[24-25절]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75)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의는 하나님의 복음의 중심 주제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사람들에게 의를 요구하신다. 복음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의가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가 속죄사역으로 이루신 의로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는다는 소식이다.
절제는 돈, 명예, 권세, 육신의 쾌락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덕이며 특히 권세자들이나 부자들에게 매우 요긴한 덕이다. 그것은 자신의 욕심과 죄성과 이 세상의 악의 풍조와 싸워 이기기를 원하는 자마다 유념해야 할 덕이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한다(고전 9:25). 기독교는 인간의 모든 욕구를 금하는 금욕주의를 가르치지 않지만, 성도는 육신적 쾌락을 절제할 때 승리적 생활을 할 수 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이다(갈 5:23).
또 심판은 기독교 복음의 대전제이다. 그것은 죄인인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한 이유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도 악인들에게 시시때때로 징벌하시고 또 인류 역사의 마지막 날에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기 죄를 회개치 않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최종적 벌은 지옥이다.
[26-27절]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받고 놓아주기를](전통사본)76)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벨릭스는 뇌물을 바라는 욕심을 가졌고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바울을 구류해 두었다. 그는 바울의 사건에 대해 바른 판단을 했고 바울에게 호의를 베풀었지만, 정의롭고 용기 있는 재판관은 아니었다. 그는 정의보다 사람들의 여론을 의식했고 돈에 대한 욕심을 품었다. 민심과 여론이 반드시 정의는 아니다. 진리와 의는 때때로 소수편에 있다. 다수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성경과 이성에 근거하여 진리와 의를 주장하고 지킬 수 있는 자가 진정으로 용기 있는 자이다. 바울은 용기 있는 사람이었으나 벨릭스는 아니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성경을 다 믿자. 사도 바울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들을 다 믿는다고 증거했다(14절).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믿음은 정통 유대교와 예수님과 사도들의 믿음이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일들을 진실한 증인들이 증거한 증거의 책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하나님의 권위로 인쳐졌다(딤후 3:16).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고 그 모든 말씀을 다 귀히 여기고 다 믿자.
둘째로, 우리는 바울처럼 죽은 자의 부활을 믿고 소망하자. 바울은 의인과 악인의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었다(15절). 주 예수께서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 생명과 심판의 부활을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죽은 자의 부활은 성경의 근본적 진리들 중의 하나이다(히 6:1-2). 우리는 이 죄 많고 허무한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의인들의 영광스런 부활과 복된 영생에 소망을 두자.
셋째로,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대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또 성경의 교훈대로 의롭고 선하고 절제 있게 살자.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은 이미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것이 구원이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모든 죄를 고백하고 버리기를 굳게 결심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것이 구원이다. 또 이렇게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죄에서 구원받은 자들로 죄를 멀리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고 또 육신적 쾌락에 빠지지 않도록 모든 일에 절제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오직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의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롬 6:12-13).
25장: 가이사 황제에게 호소함
[1-5절] 베스도(주후 59-61년)가 도임(到任)한 지 삼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미구에 떠나갈 것을 말하고 또 가로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송사하라 하니라.
베스도가 벨릭스 후임으로 총독이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은 바울을 고소하며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였는데, 그것은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려 함이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기독교 박멸을 위해 특별한 열심을 보였다. 악한 자들은 악한 일에 열심이 있다. 갓 부임한 총독이 그들의 청을 들어줄 수도 있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베스도는 신중하게 답변하였다. 그는 바울이 지금 가이사랴에 구류되어 있고 자신도 곧 내려갈 것이기 때문에 그들 중에 유력한 자들이 그와 함께 가서 그에게 옳지 않은 일이 있으면 송사하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베스도의 생각과 답변을 통해 유대인들의 살해 음모로부터 바울을 지켜주셨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호함을 얻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기 전에는 결코 사람들의 살해 음모 같은 일에 희생되지 않을 것이다.
[6-8절]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8일 혹 10일을 지낸 후[10일 이상 지낸 후](전통사본)77)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 능히 증명하지 못한지라. 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베스도는 가이사랴로 내려가자 이튿날 재판 자리를 마련하였고 바울을 데려오게 했으나,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그에 대해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지만, 능히 증명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오히려 바울은 총독 앞에서 “나는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로마 황제에게나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범죄치 말고 떳떳해야 한다. 우리는 종교적 문제뿐 아니라 세속적 문제에서도 범죄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서도 도덕적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한다.
[9-12절]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바울이 가로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死罪)[죽을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줄 수 없삽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한대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가로되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베스도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에게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해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고 묻자 바울은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불의를 행한 일이 없고 그들이 그를 송사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진대 그를 그들에게 내어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고 말했다. 베스도는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바울을 가이사에게 보내도록 결정하였다.
가이사 황제 앞에서 재판받기를 호소하는 것은 당시에 로마 시민이 가진 특권이었다. 이것은 옛시대에 죄수의 인권을 존중한 좋은 일이었다. 옛시대에도 이러했는데 하물며 오늘날에 지구상에 사람의 인권을 짓밟는 재판이 있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재판은 매우 엄숙한 일이다. 재판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입법자와 재판자이시다. 재판은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야 할 일이다.
[13-22절]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멸하도록](전통본문)78) 내어주는 것이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그러므로 저희가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원고들이 서서 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전통본문에는 생략됨) 사건은 하나도 제출치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뿐이라. 내가 이 일을 어떻게 사실(査實)할는지 의심이 있어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가로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바울에 대한 재판이 있은 지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79)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여러 날을 있었다. 베스도는 바울의 일에 대해 왕에게 고하였다. 아그립바 왕은 자기도 그 일에 대해 듣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재판할 때에 원고와 피고의 주장을 다 들은 후 판결하는 것은 공정한 재판의 기본적 요소이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그런 기본을 무시하고 바울을 정죄하고 죽이려 했으나, 로마 총독은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멸하도록 내어주는 것이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고 말했다. 잠언도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고 말했다(잠 18:17). 재판하는 이들은 원고와 피고의 말을 충분히 듣고 공정하게 판결해야 한다.
또 베스도가 가이사랴로 돌아온 후 지체치 않고 재판을 연 것은 자기 직무에 충실한 이방인 총독의 양심적이고 바른 모습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재판에서 원고들이 서서 그의 짐작하던 것 같은 사건은 하나도 제출치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뿐이며 바울의 죄가 사형시킬 만한 죄가 아님을 알았다.
[23-27절]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의(威儀)를 베풀고 와서 천부장들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신문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저가 황제에게 호소한 고로 보내기를 작정하였나이다. 그에게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어 세웠나이다. 그 죄목을 베풀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 있는 복장을 하고 천부장들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신문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왔다.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에게 이 사람이 유대의 모든 무리가 살려 두지 못할 자라고 고소했으나 그가 살피니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었다는 것과, 그가 황제에게 호소한 고로 보내기를 작정했으나 그 죄목을 베풀지 않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알아 혹시 심문한 후 무슨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 이 시간을 마련했다는 것을 말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유대 지도자들이 죽이려 했던 죄수 바울에 대해 이방인 총독 베스도는 그가 죽을죄를 범한 일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종교인이 타락하면 일반인보다 더 악해지는 것 같다. 사람은 기본적 양심과 이성을 가지고 도덕적 시시비비를 판단해야 하고, 항상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해야 한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악을 행하지 말자. 이유가 있는 경우도 정당한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이유 없이 바울을 죽이려 하고 그것도 은밀히 살해하려는 저 유대인들, 총독 앞에서 죄를 증명하지도 못하며 이방인 총독이 죽일 죄가 없다고 판단한 바울을 살려두지 못할 자라고 주장하는 저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악한 자들이다. 우리는 그런 유대인들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공정한 재판을 원하신다. 로마인의 법은 하나님께서 세속사회에 주신 은혜이었다. 그 법은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변명할 기회를 가지게 했다. 재판은 공정해야 한다. 교회의 재판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의 재판도 공명정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거리낌 없이 바르게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총독 앞에서 자신이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죄를 범치 않았다고 증거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 앞에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었다. 이제 우리는 죄를 멀리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롬 6:22). 베드로는 우리가 주 앞에서 흠 없이 평안 중에 나타나기를 힘써야 한다고 교훈했고(벧후 3:14),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고 의를 행하며 믿는 형제들을 사랑한다고 말했다(요일 3:9-10). 우리는 참 성도가 되어야 한다.
26장: 아그립바 왕 앞에서 증거함
[1-3절]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손을 들거나 손짓하는 동작은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시선을 모으거나 시끄러운 무리를 조용하게 하는 동작이었던 것 같다(행 12:17; 13:16; 19:33; 21:40; 26:1).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담대하게 그리고 아첨하지 않고 차근히 자신을 변명하기 시작하였다.
[4-8절]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바울은 자신이 젊었을 때 예루살렘에서 유대교의 가장 엄한 파인 바리새파의 생활을 했다고 증거했다. 바리새파는 그 당시에 유대인 사회에서 구약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믿는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파이었다. 그와 반대되는 파는 사두개파이었다. 그들은 당시에 천사도 영(靈)도 부활도 믿지 않는 자유주의파이었다. 바울은 바리새파에 속했다. 성경을 그대로 다 믿는 것은 올바른 태도이다. 신명기 4:2에서, 모세는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라”고 말했다. 성경의 모든 내용들을 다 믿는 보수신앙은 바른 신앙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파의 문제점은 단지 신앙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은 데 있었다. 바른 신앙은 바른 인격과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형식주의와 외식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특히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 즉 메시아께서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믿었다. 그는 자신이 심문받는 까닭은 부활하신 메시아에 대한 문제 때문이며 근본적으로 말하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문제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부활시키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믿어야 하고 죽은 자의 부활도 믿어야 한다.
[9-12절]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예수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선입견 때문에 예수와 그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고 그 일에 열심을 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예수 믿는 많은 성도들을 옥에 가두었고 또 죽일 때 찬성했고 모독하는 말을 하게 했고 외국 성에도 가서 믿는 자들을 잡아오려 했다. 그것은 다 잘못된 지식 때문에 잘못 행한 것들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려면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모든 말씀, 특히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바르게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잘못된 지식은 오히려 큰 악을 범하게 할 수 있다.
[13-18절]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일꾼]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정오쯤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살아계셨다. 만일 그가 살아계시지 않았다면 그는 바울에게 나타나 말할 수 없으셨을 것이다. 그는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그에게 비추셨다. 그는 바울을 구원하여 일꾼과 증인 삼기를 원하셨다. 바울의 사역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역, 즉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그들에게 죄씻음을 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룩하게 된 자들, 즉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 가운데 속하게 하는 사역이다. 그들은 장차 천국 기업을 상속받을 것이다. 그것이 구원 사역이다.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이다.
[19-23절]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거스르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죽이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하늘에서 보이신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증거하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신 일을 가리킨다.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에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온 유대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전하였다. 회개는 자신의 죄악됨을 뉘우치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즉 하나님 없이 사는 데서 돌이켜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수님 믿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전하는 것뿐 아니라 회개를 전하는 것이다. 바울은 또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전하였다. 회개에 합당한 일이란 다시는 죄짓지 않고 의와 선을 행하려고 애쓰는 것을 가리킨다. 참된 회개는 회개에 합당한 일을 동반한다. 복음 신앙이 중요하듯이, 선한 행위도 중요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을 잡아죽이고자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주,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고 그가 불러 세우신 종 바울을 죽이려 하였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죽지 않고 그때까지 전도하였다.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였다. 그것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이었는데, 곧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이 되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빛은 의와 생명과 기쁨을 상징한다. 이 세상은 무지와 부도덕으로 어두워져 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의(義)를 이루셨고 그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셨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셨고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주셨다.
[24-29절]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지식]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말하자, 베스도는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다. 네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외쳤다. 세상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부활을 부정하고 천국을 부정하고 구원을 부정한다. 이것이 세상이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상이다. 거기엔 육신의 삶의 끝인 죽음과 허무만 남아 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상당히 알고 계실 줄 믿는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문은 갈릴리뿐 아니라, 유대와 사마리아와 그 주위의 지역들에 널리 퍼졌을 것이다. 아그립바 왕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들을 듣고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그가 유대인일진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성경말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그립바 왕은 바울에게 “네가 적은 말로(혹은 짧은 시간에)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바울은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바울은 짧은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듣는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소원하였다.
[30-32절]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아그립바 왕과 총독과 또 그들과 함께한 자들은 바울이 사형이나 결박당할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고 아그립바 왕은 그가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않았다면 놓을 수 있을 뻔했다고 말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한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유대 지도자들은 부패되어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고 판단할 힘을 잃어버렸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심령이 밝아질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정직하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본장의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두운 세상에 빛이시다(23절). 세상은 죄와 슬픔과 죽음으로 어두워져 있다. 이 어두운 세상을 밝혀줄 수 있는 빛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그는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를 믿는 자들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올 수 있다. 죄인이 의인이 될 수 있고, 슬픔과 근심이 많은 자들이 기쁨과 평안을 얻을 수 있고, 죽은 자들, 즉 영적으로 죽었고 육신도 죽을 존재이며 장차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자들이 영생하는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둘째로,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구원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구원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대속 사역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는 것이며 거룩하게 된 무리들 가운데서 기업을 얻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들이 교회이며 장차 천국을 기업으로 상속받을 자들이다. 이 구원의 복음을 만백성에게 전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사명이며 사도들의 사명이며 신약교회가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이다. 우리는 영적 어두움, 무지와 죄와 슬픔 가운데 있는 세상 사람들, 사탄과 악령들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을 빛의 세계로, 하나님의 나라로 구원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만인에게 전하자.
셋째로,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살전 4:3). 즉 우리가 죄를 멀리하고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다. 선한 행위가 중요하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57:21).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힘을 당할 것이다(마 3:10). 죄의 값은 죽음이다(롬 6:23). 우리가 몸의 죄성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롬 8:13). 중생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요일 3:9). 사람은 그의 행위의 열매로 그가 바른 사람인지 알 수 있다(마 7:16). 죄를 회개하고 믿은 자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27장: 로마로 호송됨
[1-2절]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隊)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하니라.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서 전도하기를 원했는데, 이제 죄수의 몸으로 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때 때때로 우리가 예상치 못하는 방식으로 들어주신다. 아리스다고는 바울과 함께 로마 옥에 갇혔던 자요 그의 동역자이었다(골 4:10; 몬 24).
[3-8절]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음을 허락하더니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거스름]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성에 이르러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美港)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성에서 가깝더라.
시돈에서 율리오는 바울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바울이 친구들의 대접을 받는 것을 허락했다. 율리오는 바울의 경건하고 정직한 인품에 감동을 받았거나, 혹은 같은 지역의 이탈리아대(隊)의 백부장인 고넬료에게서 바울에 대한 좋은 소개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시돈에서 미항에 이르기까지는 약 1,000킬로미터 이상 되는 긴 여정이었고 거기서 이탈리야까지는 그 두 배를 더 가야 하는 먼 길이었다.
[9-11절]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짐]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금식하는 절기는 유대인의 속죄일인 9월말 즈음을 가리킨다. 가을에는 바람이 많이 불어서 항해하기에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견지명이 있었지만,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船主)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다. 그것이 이성적으로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선장과 선주는 항해에 관한 전문가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밀접히 교제하는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때때로 현실을 더 정확히 보는 눈과 바른 통찰력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견지명도 있다.
[12-14절] 그 항구가 과동(過冬)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북을(카타 리바)[남서로](KJV, NASB, NIV), 한편은 동남을(카타 코론)[북서로](KJV, NASB, NIV) 향하였더라.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유로클뤼돈)(전통본문)80)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그들은 처음에 자기들의 계획대로 잘 되는 줄 알고 출발하였으나 얼마 못되어 유로클뤼돈이라는 큰 광풍이 일어났다. 우리는 인생의 여정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어렵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인도하시면 어렵게 보이는 것도 쉽게 해결되고 하나님께서 버려두시면 쉬워 보이는 것도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한다. 잠언 3:6은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하였다.
[15-20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 가우다[클라우덴](전통본문)81)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작은 배]를 잡아 끌어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빨아들이는 모래, quick-sand)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버리니라.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종 바울에게 이 어려운 일을 주셨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고 있고 세상의 고난을 어느 정도 함께 당한다. 그것은 물론 마귀의 장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만 이루어짐을 믿으며 극심한 고난까지도 성도를 단련시키는 유익한 일임을 믿는다. 로마서 8:28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했다.
[21-26절]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하나님께서는 그 풍랑 속에서도 바울을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하셨고 그를 위로하셨고 그를 통해 그 배에 있던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셨고 또 그를 통해 이루실 일을 착오 없이 이루고 계셨다.
[27-32절] 열 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저리 쫓겨가더니 밤중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와지는[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물을 재어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배 끝부분]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뱃머리]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작은 배]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에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버리니라.
아드리아 바다는 마게도냐-아가야 지방과 이탈리아 사이의 바다이다. 바울은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사공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주권적 하나님이시며 기적을 행하신 자이시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연 법칙과 수단들을 사용하신다. 배를 운전하는 데는 사공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다 해서 우리는 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거나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의무를 다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자연적 수단들을 다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결코 소극적이고 책임 회피적 태도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을 다해야 한다.
[33-34절]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 나흘인즉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음식을 먹고 육신의 건강과 힘을 회복해야 했다. 바울은 그들 중 한 사람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하나님의 섭리의 일반적 방식은 자연적 수단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는 음식 먹는 것이 필요하다. 음식을 먹지 않고 건강한 것은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 방식이 아니다. 기적은 비상한 때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특별한 행위일 뿐이다.
[35-41절]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저희도 다 안심하고[기꺼이] 받아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276인이러라.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자신들을 (혹은 배를) 바다에 맡기는](KJV) 동시에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배를 걸매 이물[뱃머리]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배 끝부분]은 큰 물결에 깨어져가니.
바울의 마음에는 굳센 믿음과 평안이 있었다. 환난과 고통 중에서도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감사하며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그의 믿음의 행위를 본 사람들은 다 기꺼이 음식을 취하였다. 바울은 고난 중에서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기회를 가졌다.
[42-44절]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백부장은 한 번 더 바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죽음의 위험에서 지키시기 위해 백부장을 사용하셨다. 여기에 다시 한번 더 하나님의 섭리의 일이 증거된다. 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헤엄을 치거나 널조각이나 배 물건을 의지해 다 구원을 얻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자. 백부장과 선장과 선주가 그레데섬의 미항이라는 곳에서 뵈닉스라는 좀더 큰 항구로 가서 겨울을 나기를 원했을 때, 바울이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고 말했으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순탄할 듯하게 출발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큰 어려움을 당했다. 우리는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할 때 우리 자신의 뜻과 생각을 앞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앞세워야 한다. 잠언 3:6은,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했다. 우리는 무슨 일이나 먼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이며 우리의 행할 바가 무엇인지 묻고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을 구하며 그 일에 대한 평안한 마음과 확신을 얻은 후 행하는 것이 좋다.
둘째로, 성도의 삶에는 간혹 유로클뤼돈 같은 광풍이 있지만, 그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향하신 그의 뜻은 착오 없이 하나씩 이루어져 간다. 세상은 수고로운 세상이고 환난이 많은 세상이다. 게다가 성도에게는 특별한 고난도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했다(빌 1:29).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28:20). 또 그는 우리 속에 오실 성령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4:16).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영원히 거하신다. 바울은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하실지어다”라고 말했다(살후 3:16). 히브리서 13:5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 방식을 알고 우리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기적은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하고자 하실 때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 사용하신 방법이었다. 성경이 다 기록된 후에 하나님께서 기적을 사용하시는 것은 일반적 섭리 방법이 아니다. 기적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바울은 유로클리돈 광풍을 인해 배에 탄 276명의 사람들과 함께 14일 동안 고난을 당해야 했다. 뱃사공들은 그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했다.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는 것도 그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했다. 그들은 헤엄을 치거나 널조각이나 배 물건을 사용하여 구원을 얻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주권적 섭리를 믿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지 말고 도리어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28장: 로마에서도 전도함
[1-2절]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멜리데는 말타(Malta)라는 섬으로 이탈리아 남단에 있는 시실리아 섬 남쪽의 작은 섬이다. 멜리데 섬 원주민들은 바울 일행에게 특별한 동정과 친절을 베풀었다. 비가 오고 날이 찬 때이었으므로 그들은 불을 피워 바울 일행을 영접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남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 속에 두신 선한 마음이다. 문명의 발달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데는 부족하고 오히려 사람의 사람다움을 메마르게 하고 사람을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이고 심지어 기계적이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친절히 여기는 사람다움을 가져야 한다.
[3-6절] 바울이 한 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카답토)[그의 손에 꼭 달라붙어 있는지라](KJV, NASB, NIV).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하더니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神)이라 하더라.
한 뭇은 한 짐보다 작고 한 줌보다 큰 단위를 뜻한다. 열 줌은 한 뭇이고 열 뭇은 한 짐이다. 원주민들에게는 살인한 자가 비록 바다에서 구원을 얻었어도 반드시 죽는다는 의식, 즉 악한 자가 천벌 곧 공의의 형벌을 받는다는 의식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본성 속에 심어주신 도덕 의식이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또 그 원주민들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가 능력이 많으시다는 생각이 있었다. 종교가 없는 민족은 없다고 한다. 사람의 본성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생각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신 증거이기도 하다.
멜리데 섬 원주민들의 도덕성과 종교성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주신 은혜이다. 모든 사람에게 종교성과 도덕성이 있고, 그것은 전도의 접촉점과 발판이 된다. 사실 이 일반 은혜 때문에 세상은 극도로 악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는 이 세상이 극악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멸망당할 마지막 세상의 중심 도시를 사치와 음란으로 더러워진 바벨론이라 불렀다(계 17-18장). 하나님께서는 그때 그 일반 은혜까지도 거두어 가실 것이다.
[7-10절]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더니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뒤센테리아)(dysentery 전문적 의학용어)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올리더라.
그 섬의 추장 보블리오의 사흘 간의 친절과 호의는 어려움 속에서도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위로이었다. 세상에는 아직도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의 친절과 호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보블리오의 부친의 열병과 이질을 치료해주셨고 또 그 외에 다른 여러 병자들도 고침을 받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선행을 갚아주신다(마 6:3-4).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도 전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바울 일행에게는 큰 위로와 기쁨이었을 것이다.
[11-15절] 석달 후에 그 섬에서 과동(過冬)한[겨울을 지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우리가 타고 떠나니 그 배 기호는 디오스구로(Diovskouroi)[‘제우스의 (쌍둥이) 아들들’이라는 뜻)라. 수라구사[시라큐스]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난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거기서 형제를 만나 저희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유하다가 로마로 가니라.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시장]와 삼관[세 채의 여관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수라구사[시라규스]는 시실리아 섬 동쪽 항구이며 레기온은 시실리아 섬 건너편 이탈리아 반도 최남단 항구이었다. 바울을 맞으러 나온 이들은 주의 진실한 제자들이었음에 틀림없다. 주께서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10:40).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종 바울에게 큰 위로를 주셨다.
[16절]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백부장은 죄수들을 시위대장에게 넘겼으나](전통사본)82)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백부장 율리오는 죄수 바울에게 특별한 배려를 하였다. 다른 죄수들은 시위대장에게 넘겨졌으나, 바울은 그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되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과 함께 로마에 도착하여 바울 곁에 계속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은 ‘그의 우거하는 집’(23절) 혹은 ‘자기 셋집’(30절)에서 2년 동안 유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때는 주후 62년경이며, 그가 그 재판에서 풀려났다가 두 번째로 투옥되어 순교한 때가 주후 68년 봄이라고 본다.
[17-19절]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관습에 대해 잘못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 바 되었으니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바울은 유대인들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자신이 조상의 관습에 대해 잘못한 일이 없는데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 바 되었으므로 부득이 가이사에게 호소한 것이요 자기 민족을 송사하려 한 것이 아니었음을 변명하였다. 그는 그들이 자신에 대해 오해하거나 잘못된 선입견을 갖지 않기를 원하였다. 바울의 처신은 지혜롭고 정당했다. 전도자에게는 행동의 정당함과 인격의 신임성이 중요하다. 전도자가 거짓되다면 어떻게 진리를 선포할 수 있으며 그가 악을 행하거나 사리사욕에 따라 행동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라 할 수 있겠는가? 주의 종들에게는 거짓되다거나 불법하다는 말보다 더 심각한 비난은 없다. 그러므로 비록 마귀의 방해 때문에, 또 사람들의 무지와 미움, 이기심과 열등감 등의 연약성 때문에 전도자가 사람들의 오해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을지라도, 그가 그의 결백함과 신임성을 변호하는 일은 필요하고 지혜롭고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20-22절]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이스라엘의 소망’은 메시아의 오심과 그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켰다고 본다. 그것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기도 하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때문에, 또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생의 소망 때문에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다.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는 신자들이 사람들의 반대를 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23절]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의 주요 주제이며 복음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며 죄인이 하나님 없이 사는 상태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앞에 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영광스런 천국으로 완성될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처음 복음을 전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4:17). 하나님의 나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심령에서 시작된다. 바울은 이 복음을 구약성경에 근거해 증거하고 권하였다.
[24-29절]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그가 이 말을 마칠 때 유대인들은 서로 큰 쟁론을 하며 물러갔더라](전통사본).83)
복음이 증거될 때에 믿는 자도 있으나 믿지 않는 자도 있다. 복음은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 항상 그런 현상이 있었다. 이사야의 예언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적절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의 가르침을 들었으나 그를 알지 못했고 오히려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바울이 곳곳에 다니며 복음을 전했을 때에도 다수의 유대인들은 그가 전한 구원의 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대적하였다. 그것은 이상한 영적 어두움이었다. 참으로, 구원은 전도자에게나 죄인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롬 9:16). 하나님께서는 구주이시다. 물론 죄인 자신이 회개하고 믿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회개치 못하고 믿지 못할 것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30-31절]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그 2년은 재판받는 기간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가 보내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복음을 담대히 전하였다. 복음은 그 후에도 계속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 전파될 것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멜리데 섬의 원주민들에게는 인간애가 있었고 도덕 의식과 종교심이 있었다. 남을 배려하고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은 인간다운 모습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요 그것이 실상 구원의 목표이기도 하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계명에 순종하자. 하나님의 왕 되심을 부정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속에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이제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다.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며 그들만이 장차 주의 재림의 날에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전도할 때 듣는 회중의 반응이 어떠하든지 낙심치 말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자. 전도에는 항상 두 가지 반응이 있다. 사람은 영적으로 심히 어두워져 있고 무능하여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복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지 못할 것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또 구원받은 자들의 성화를 위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것밖에 없고 오직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할 것밖에 없다.
미주
1) 부활하신 지 40일 후에 승천하심, 120명이 모임, 사도 한 명의 보선(補選),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았던 15개 지역명, 고침받은 앉은뱅이의 나이 40여세, 스데반의 설교 내용,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에 대한 언급, 천부장 루시아과 총독들 벨릭스와 드루실라와 베스도과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의 이름, 사건의 연대적 서술, 백부장의 이름과 소속 부대 이름, 로마로 가는 배 이름들, 경유한 지명, 유라굴로 광풍, 배에 탄 인원수 276명, 멜리데 섬, 보블리오 등 여러 인명들과 지명들.
2) 주님의 부활에 대해, 마태복음은 4가지, 마가복음은 5가지, 누가복음은 7가지, 요한복음은 6가지, 고린도전서 15장은 5가지를 증거한다.
3)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갈 수 있는 거리를 약 1.2km로 보았다고 한다.
4) Byz D syr it copmeg Cyprian 등이 그러함.
5) Byz (D itd) syrp (copmeg) geo 등에 있음.
6) S. Wesley Ariaraja, The Bible and People of Other Faiths (WCC, 1985), pp. 9-11, 56.
7) 기독교 사상, 제27권 제5호 (1983. 5), 155쪽.
8) Byz D ite vgmss syrp copsa Irenaeuslat 등이 그러함.
9) Byz p45 א* (A B) D 등에 있음.
10) 사도행전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라는 말씀에서 ‘택하다’는 원어(케이로토네오)는 본래 ‘손을 내밀어 뽑다’는 뜻이다. 이 말은 거수 투표를 암시하는 것 같다.
11) 야곱이 애굽에 내려갔던 때가 130세이었으므로 대략 주전 1876년경이었다. 그때 요셉은 총리가 된 지 9년이 지났다(창 41:47; 45:6; 47:9).
12) 모세의 출생은 주전 1527년경이다.
13) Byz C 등에 있음.
14) M(Byz의 다수)이 그러함.
15) 유다 멸망의 시기, 즉 므낫세나 예레미야 시대에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비롯하여 일월성신을 숭배하였다(렘 44:17; 왕하 21:3).
16) 레판은 렘판, 라이판 등 사본들의 본문이 다양하다.
17) 토성은 태양계의 9개의 행성 중 목성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별이다. 그 크기는 지구의 거의 10배이다. 오늘날 천체 망원경으로 보면, 토성은 빛나는 7개의 고리를 두르고 있는 매우 아름다운 별이다.
18) Byz A C lat syr 등이 그러함.
19) ‘악독이 가득하며’라는 원어(콜레 피크리아스)는 ‘쓴 담즙’이라는 말로서 ‘심히 악하다’는 뜻이다(Thayer).
20) 옛날 영어성경(KJV)에는 “빌립이 가로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들인 줄 믿노라”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헬라어 전통적 다수사본(Byz)과 대다수의 고대 사본들(p45 א A B C)과 역본들(vgww st syrp copsa bo)에는 없고, 어떤 초대 교부들(Irenaeus Tertullian Cyprian)의 인용문들과 어떤 고대 역본들([ite] vgcl copmeg arm geo)에만 나타난다.
21) TR과 KJV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그가 떨며 놀라며 말하되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라는 말이 더 있으나, 이 본문은 전통적 헬라어 다수사본의 지지를 가지지 못한다.
22) Byz C 등이 그러함.
23) Byz B C copbo-mss meg arm geo 등에 있음.
24) Byz vgcl syr 등이 그러함.
25) Byz ite copbo-mss 등이 그러함.
26) Byz D itd 등이 그러함.
27) Byz p50 D itd e syrp copsa 등에 있음.
28) Byz C itd e syrp copsa arm 등에 있음.
29) Byz D itd syrp copsa 등이 그러함.
30) Byz B 등이 그러하며 it vg syr cop 등도 그런 뜻을 가질 수 있음.
31) 전치사 에크 ejk나 아포 ajpov가 사용되었다. TR A D vg (syrp) copsa-mss bo copmeg 등이 그러함. KJV NASB NIV 등이 그 본문을 택함.
32) 전치사 에이스 eij"가 사용되었다. Byz א B copsa-ms copmae 등이 그러함. Majority Text2 UBS4 Nestle27 등이 그 본문을 택함.
33) ‘마쳤다,’ ‘취하였다’는 원어는 단순과거(aorist) 분사이다. 과거분사는 보통 본동사보다 이전의 행위를 나타내지만 사도행전을 포함하여 많은 구절들에서 동시적 행위도 나타내므로 본문과 같은 번역이 가능하다. A. T. Robertson, A Grammar of the Greek New Testament, p. 1113.
34) ‘생질’이라는 원어(아넵시오스)의 뜻은 ‘사촌’이다.
35) ‘총독’이라는 말(안뒤파토스)은 로마 제국의 원로원이 관할하는 도(道, province)들을 다스리는 총독(proconsul)을 가리킨다.
36) 전통사본에는 450년이라는 말이 20절의 ‘그 후에’라는 말 다음에 나온다.450년은 사사 시대에 이방 나라들로 인해 당한 고통의 기간과 사사들을 통한 구원과 평안의 기간을 마지막 사사 엘리의 40년 사역 기간까지 합산한 것 같다. 열왕기상 6:1은 출애굽부터 솔로몬 통치 4년까지의 기간을 480년이라고 말하며, 그 기간은, 광야 생활 40년, 여호수아의 통치 기간 약 15년, 사울의 통치 기간 약 40년, 다윗의 통치 기간 40년, 솔로몬 통치 기간 4년 등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면 사사 시대는 실제로 약 340년 정도 된다.
37) Byz p45 C vg syrp copbo arm geo 등이 그러함.
38)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이 예수를 정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말씀을 너희에게 먼저 보내셨다는 뜻이든지,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이 예수를 정죄했고 십자가에 죽게 한 후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으므로 이제 이 구원의 말씀을 너희에게 보내셨다는 뜻일 것이다.
39) Byz syrp copsa arm geo 등이 그러함.
40) 사도행전 13:43; 14:1, 3, 5, 26의 ‘두 사도’라는 원문은 단순히 ‘그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14:4, 14에는 바나바와 바울이 ‘그 사도들’이라고 불린다. 바나바가 사도라고 불린 것은 특별한 경우이다.
41) Byz p45 א A C itd vg copsa-mss arm 등이 그러함.
42) 대략,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직선거리임.
43) 대략, 서울에서 원주까지나, 서울에서 천안까지의 직선거리임.
44) Byz (A D) (itd vg) syrp Irenaeus 등이 그러함.
45) Byz syrp copbo-mss armmss geo 등이 그러함.
46) Byz C syrp arm (geo Irenaeuslat) 등에 있음.
47) Byz p45 C vgcl syrp copbo arm 등이 그러함.
48) Byz copsa armms 등이 그러함.
49) Byz D syr copsa 등이 그러함.
50) Byz (א D itd vg syrp) 등이 그러함.
51) Byz C D syr copsa 등에 있음.
52) Byz D 등에 있음.
53) 전통본문에는 없음.
54) Byz arm geo 등. 본문은 א B A D vg itd syrp copsa bo 등에 있음.
55) Byz D itd syrp copsa arm 등이 그러함.
56) Byz D* (ite) vgmss syrp 등에 있음.
57) Byz D syr 등이 그러함.
58) Byz D itd syrp copsa 등에 있음.
59) 밀레도에서 에베소까지는 지도상으로 약 50킬로미터는 넘어보인다.
60) Byz א A C D vg syrp copsa-mss arm 등이 그러함.
61) 바울은 예루살렘 회의(주후 49년경) 이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못했던 것 같고 예루살렘을 사모했던 것 같다. 그는 제2차 전도여행(51년경)에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서 전도했고, 제3차 전도여행(53년경)에서는 소아시아 지역과 특히 에베소에서 전도했고 그 후 마게도냐와 아가야(헬라) 지방을 거쳐 밀레도를 경유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했던 것이다.
62) Byz D vgmss copsa 등이 그러함.
63) Byz א A D itd vg 등이 그러함.
64) Byz C D itd arm 등이 그러함.
65) Byz D copsa 등에 있음.
66) Byz D vgms copsa 등이 그러함.
67) Byz copsa 등에 있음.
68) Byz vgmss 등에 있음.
69) Byz (syrp) copsa 등에 있음.
70) Byz א vgcl syrp arm 등에 있음.
71) Byzpt TR it vgcl syrp arm 등에 있음.
72) Byz syrp 등에 있음.
73) Byz C vg syrp copbo arm 등에 있음.
74) Byz copsa 등이 그러함.
75) 야고보를 죽였던(행 12:1-2)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둘째 딸이었음.
76) Byz copsa bo 등이 그러함.
77) Byz이 그러함.
78) Byz syrp copsa 등에 있음.
79) 이 아그립바 왕은 헤롯 아그립바 2세로 야고보를 죽였던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었다. 그는 주후 48년부터 70년까지 팔레스틴 북부와 북동부를 다스렸다. 버니게는 그의 고모 즉 아그립바 1세의 큰 딸이었다. 작은 딸은 앞에서 나온 벨릭스의 아내인 두루실라이었다.
80) Byz syrp 등. ‘유라굴로’는 북동풍을 가리키나 ‘유로클뤼돈’은 강한 파도를 일으키는 남동풍을 가리킨다고 한다.
81) Byz vgmss 등이 그러함.
82) Byz vgmss copsa 등에 있음.
83) Byz vgcl armms 등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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