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사복음서·사도행전강해·김효성목사

요한복음 13장: 새 계명을 주심 - 21장: 세 번째 나타나심

영국신사77 2020. 4. 18. 17:33


13장: 새 계명을 주심

1-17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1-2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49)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이 유월절은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네 번째 유월절이다. 본장에 나오는 식탁은 공관복음들에 나오는 유월절 식탁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 곧 자신의 승천 시간이 가까웠음을 아셨고,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또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마귀는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람들을 범죄케 하여 멸망케 하는 자이다. 마귀는 악한 생각을 일으킨다. 택자들과 불택자들, 구원받은 자들과 멸망당할 자들은 생각부터가 다르고 또 말과 행동도 다르다.

[3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맡기셨고, 아들 예수께서는 그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시기 위해(요 6:39)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다. 그는 그 일을 이루신 후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이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요 3:13), ‘하늘로서 오시는 이’로서(요 3:31) 하나님께서 계신 영광의 천국으로부터 오셨다가 이제 천국으로 돌아가실 것이다.

[4-8절]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남의 발을 씻기는 것은 당시에 종들이 하는 일이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자신을 낮추시고 겸손히 남을 섬기시는 행동이셨을 뿐 아니라, 10절이 암시하듯이, 특히 죄를 씻어준다는 뜻이 있었다. 시몬 베드로는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감히 천한 죄인의 발을 씻길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자기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신다고 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단순한 섬김의 행동이 아니고 더 깊은 상징적 의미가 있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죄사함의 상징이었음에 틀림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해주지 않으시면, 베드로뿐 아니라 우리 모두도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도, 천국 백성도 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셨고 날마다 우리의 부족을 씻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끝까지 은혜 안에 거하다가 확실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9-11절]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시몬 베드로는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라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주님과 상관없는 자가 된다는 말씀에 놀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셨기 때문이다. 온 몸을 깨끗케 하는 목욕은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받고 거룩케 된 사실을 상징한다. 그것이 바로 중생(重生, 거듭남)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으시고 새 생명과 새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한 자도 때때로 범죄한다. 그러므로 목욕한 자들이 발을 씻듯이, 중생한 자들은 자신의 연약과 부족을 용서받는 것이 필요하다.

주께서 다 깨끗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든 제자들이 다 중생한 것이 아님을 보인다. 열두 제자들 중에는 불택자가 한 사람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죄사함을 받지 못했고 중생하지 못한 자이었다. 그는 주님을 배반하고 유대 지도자들에게 그를 넘겨줄 자이었다. 이것은 교회 안에 가라지나 쭉정이가 있는 것을 보여준다. 불택자들은, 비록 현재 교회 안에 있어 믿는 자와 비슷하게 보일지라도, 중생치 못했고 죄사함을 받지 못한 자이기 때문에 죄 가운데 살다가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진리를 배반하고 떠나갈 것이다.

[12-17절]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본을 보임으로써 제자들도 서로의 발을 씻기게 하기를 원하셨다. 이것은, 겸손히 서로를 섬기며 특히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할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남을 용서하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마 18:21-35). 사도 바울도 “[너희는]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교훈하였다(엡 4:31-32).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제자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이며 성령의 역사로 중생한 자들이며 또 진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종하는 자들이다. 주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 이 세상에는 환난과 핍박, 가난과 질병, 자연 재해와 사고와 전쟁 등이 있지만, 하나님과 주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둘째로,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 남의 발을 씻기는 것은 종이 하는 일이었다. 주 예수께서는 종의 일을 하셨다. 그것은 그의 겸손과 남을 섬김과 함께 죄 용서하심을 보여주신다. 자기의 온 몸을 씻은 사람이라도 조금 무슨 일을 하고 나면 다시 발을 씻을 필요가 있다. 목욕은 중생(重生)을, 발 씻음은 중생한 후 짓는 죄에 대한 씻음을 상징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 받아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난 중생의 은혜를 받은 후에도 이런 저런 크고 작은 죄를 짓는데, 그 죄들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야 한다.

셋째로, 주께서는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친히 모범을 보이심으로 제자들도 그것을 본받기를 원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부족과 잘못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의 잘못은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주의 피로 죄씻음을 받지만, 사람 앞에서의 잘못은 자신의 부족을 말하며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그때 우리는 서로를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의 교훈이다. 우리는 우리의 편협한 마음이나 부족한 사랑과 이해심을 극복하고 주의 교훈과 본을 따라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자.

18-38절, 서로 사랑하라

[18-20절]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나와 함께 떡](전통본문)50)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시 41:9)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께서는 본장 10절에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셨기 때문이었다(11절). 본문에서도 그는 자신을 팔 자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가 친히 택하신 자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이 있다. 이 말씀은 그를 배신할 가룟 유다가 택하심을 받지 못한 자임을 뜻한다. 유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면서도 그를 배신하였다.

또 예수께서는 그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가 그를 영접하는 것이듯이, 그를 영접하는 자가 그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나타내며, 그것이 곧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인가 아닌가를 나타낸다. 사람이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는가 여부는 그가 구주와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는가로 판단된다.

[21-30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괴로우셔서]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시몬의 (아들) 가룟인 유다](전통본문)51)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주여, 누구오니이까?”라고 물었던 그 제자는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었다(요 21:20, 24). 예수께서는 빵 한 조각을 가룟 유다에게 주셨고 그가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요 6:64), 돈에 대한 욕심도 있었던 것 같고(마 26:14-15), 무엇보다 사탄의 역사로 예수님을 배신하는 큰 악을 범하였다. 본장 2절은 사탄이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말했다. 이제 사탄이 직접 그 속에 들어가 그로 하여금 이런 큰 악을 행하게 할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주님을 배신하고 유대 지도자들에게 넘겨주려는 그의 악한 계획을 속히 행하라는 뜻이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었다. 유다의 영적 세계나 영원한 미래도 캄캄한 밤이었다.

[31-33절]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人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人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지금 인자(人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人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라는 말씀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라고 본다. 그는 그 밤에 잡히셔서 날이 새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모든 죄를 대속(代贖)하시는 죽음이요 그 일이 완성되면 그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내다보시면서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의 제자들은 지금 주님과 함께 그의 죽음과 그의 영광에 동참할 수 없으나, 후에는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다. 그 내용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옛날 모세 시대에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과 대조된다. 옛 계명도 그 요점은 사랑이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었다(마 22:37-39). 그러나 이제 주께서는 단순하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다.

주께서는 천국으로 돌아가실 것이나 세상에 남아 있는 제자들 곧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제자들은 믿음으로 주를 섬기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본장 앞부분에서 교훈하신 대로 용서와 연관된다. 서로 용서해야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서로 사랑해야 서로 용서할 수 있다. 사랑은 형제의 잘못과 부족을 오래 참고 용서하고 상대를 배려하며 선을 베푸는 것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행 2:44-45). 사랑은 모든 계명을 완성하는 아름다운 덕이며 교회의 일치의 덕이기도 하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는 주께서 친히 십자가로 본을 보이셨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으로 명하셨기 때문이다. 주께서 먼저 희생적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5:1-2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하였다.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표가 된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이단과 적그리스도에 대해 경계할 것을 교훈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형제들에 대해 참된 형제 사랑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 서신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빛 가운데 있는 증거이며 생명에 들어간 증거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가 된다고 강조하였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36-38절]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가 되면 그는 주님을 따라 그가 가신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를 위해 그의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를 가지고 있음을 고백하였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사랑하였고 죽기까지 그를 따르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진실한 결심이 그렇게 강하지 못하다. 그는 그 날 밤에 닭이 울기 전에 주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다. 그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인간의 결심이 얼마나 보잘것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가슴 아프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인지 아닌지 스스로 묻고 대답해 보아야 한다. 주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이 목욕한 자와 같이 죄사함을 받았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그것은 그를 팔 자, 곧 그를 배신할 자를 가리킨 말씀이다.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요 6:64) 돈을 사랑했다(마 26:14-15). 그는 마침내 사탄의 도구가 되었다(요 6:70; 13:2, 27).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과 순종의 삶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구원하셨음을 확증하자. 데살로니가전서 1:2-4,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둘째로, 우리는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을 힘써 실천함으로 주의 제자임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도 그 중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었다. 주께서는 친히 본을 보이시며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는 특히 우리가 서로 사랑할 대상이 제한된 수의 택자들임을 암시하셨다. 주님께서는 천국으로 돌아가실 것이나 세상에 남아 있는 제자들은 믿음으로 주를 섬기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앞에서 교훈하신 대로 용서와 연관된다. 서로 용서해야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서로 사랑해야 서로 용서할 수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선을 베푸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계명을 완성하는 아름다운 덕이며 교회의 일치의 덕이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라면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며 그것이 그의 제자된 표이며 참된 교회의 표이다.

14장: 성령을 약속하심

1-14절, 제자들을 위로하심

[1-2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가 떠나신다는 말씀 때문에(요 13:36) 근심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근심을 이기기 위해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했다. 또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천국의 소망과 위로를 주셨다. ‘내 아버지 집’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천국을 가리킨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단지 영들만의 세계가 아니고 새로워진 물질 세계일 것이다. 주의 말씀대로 천국에서 우리는 새 포도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마 26:29). 주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그 아름답고 복된 천국을 준비하시러 가실 것이다.

[3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천국이 다 준비되면 주 예수께서는 다시 오실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성령 강림의 일로 보고 주께서 있는 곳에 있게 된다는 말씀은 성도가 죽은 후에 주께서 계신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았지만,52) 그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53) 성도가 죽은 후에 그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과도기적 상태이고 마지막 날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나타날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성도의 참 소망이며 위로이다. 에녹과 엘리야도 거기에 들어갔고 승천하신 예수님도 거기에 들어가셨다. 예수께서는 단지 영이 아니시고 신령한 몸 즉 변화된 몸을 가지고 계신다. 그 몸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몸이시지만 자유롭게,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몸이셨다. 지금 주 예수께서 계신 곳은 단순히 영들만의 세계가 아니고 영육으로 복된 세계이다.

[4-5절] 내가 가는 곳에[어디로 가는지 너희가 알고 또](전통본문)54)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제자들은 천국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으나 천국 가는 길은 모른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믿는다면 그들은 그가 영생의 길이요 천국 가는 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도마는 천국에 대해서도, 천국 가는 길에 대해서도 무지하였다.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곧 천국 가는 길임을 증거하셨다. 죄인들은 그를 통해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또 그는 자신이 진리라고 말씀하셨다. 죄인들은 그를 통해 하나님과 구원을 안다. 또 그는 자신이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의(義)로 말미암아 죄인들은 영생을 얻는다. 천국 가는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께로, 곧 천국으로 갈 수 있다. 그는 죄인들을 위한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했고(행 4:12), 또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증거하였다(딤전 2:5).

[7-9절]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기노스케테)[알고 있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주님의 말씀대로,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복된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이시다. 히브리서 1:3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증거하였다. 빌립이 그의 말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보여 주시기를 구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자신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증거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신성(神性) 즉 신적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시다.

[10-12절]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주의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본질적 일체성을 나타낸다. 그것은 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神性)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스스로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이것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인격적 구별은 있으나 본질적으로 하나이시다. 또 그는 만일 그의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그의 행하시는 일을 인해 그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행하신 기적들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의 기적들은 그의 참된 신성(神性)을 증거하였다.

주께서는 또한 제자들에게 그들이 그의 행한 일도 행할 것이라는 놀라운 약속도 주셨고, 또 제자들이 그가 행하신 일보다 더 큰 것도 행할 것이라는 더욱 놀라운 말씀도 하셨다. 과연 제자들은 주께서 승천하신 후 나아가 복음을 전할 때 많은 기적을 행하였고, 심지어 베드로는 한 번 설교할 때 3천명의 영혼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행하신 일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들은 다 주께서 하늘에서 보내주신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 일이었다. 그러한 일들은 주의 말씀의 성취일 뿐 아니라, 그의 신성을 더욱 확증하는 일들이었다.

[13-14절]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주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중보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그러면 주께서는 응답하실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의 십자가의 공로와 의(義),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얻게 된 하나님 자녀의 특권 등으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대하여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자이시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 아들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주의 재림과 천국 소망으로 위로를 받자. 본문은 주께서 그들을 떠나신다는 말씀을 듣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위로의 말씀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거처를 준비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실 것과 다 준비되면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하늘로부터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재림은 끝이 아니고 천국을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그는 구원받은 우리 모두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둘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이 천국 가는 유일한 길이 되신다. 그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죄인들은 그를 통해, 오직 그를 통해서만, 즉 그를 영접하고 믿음으로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이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시며 구원의 진리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다.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하였고(행 4:12), 바울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했다(딤전 2:5).

셋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적 구주이시다. 주께서는 사람들에게 친히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는 그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자신과 아버지를 동일시하셨다. 그는 그의 행하신 기적들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신적 구주이시다. 신적 구주 예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신다.

넷째로, 신적 구주이신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셨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것은 항상 잔고가 충분한 직불카드와 같다. 기도는 구원받은 성도의 특권이다.

15-31절, 성령을 약속하심

[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지키라].55)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가리킨다. 제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할 것이다(21, 23, 24절).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큰 관심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신약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16-17절] [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파라클레토스)[위로자(KJV), 돕는 자(NASB)]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거하게](전통본문)56)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파르 par!)[혹은 ‘곁에’]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주 예수께서는 또 다른 보혜사께서 오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제자들의 위로를 위해 또 그들의 사랑 실천하는 일을 돕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보혜사이시다. 그러나 이제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이며 ‘다른 보혜사’ 곧 성령께서 오실 것이다. 그는 영원토록 제자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다. 그것은 신약 성도들에게 놀라운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다. 그는 진리만 말씀하실 것이며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으실 것이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거하시고 그들 속에 계실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를 알 것이다. 그가 “저는 너희 곁에 거하심이요”라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 듯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은 성령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시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성령께서는 이미 그들 곁에 계신 것과 같다. 그러나 그는 장차 그들 속에 계실 것이다.

[18-19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예수께서는 과연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들에게 오셨고 승천하신 후에도 성령으로 오셨고(매튜 풀) 장차 재림하심으로 오실 것이다(어거스틴, J. C. 라일). 문맥적으로, 이 말씀은 성령의 오심에 가장 맞는 것 같다. 주께서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후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신 것이 아니고 오직 제자들에게 보이셨다(행 10:41). 또 그가 승천하신 후에 세상은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지만, 성도들은 죽은 후에도 천국에서 주를 뵈올 것이다.

[20절]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께서 부활하시는 날에, 제자들은 그가 아버지 안에 계심, 즉 그의 신성(神性)을 깨닫게 될 것이며, 성령께서 오시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또 그들은 주의 신성에 대한 지식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연합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예수님과 성도들의 연합은 하나님과 사람의 본질적 연합이 아니고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되고 그의 풍성한 은혜를 받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성도들은 전지전능한 신이 될 수 없으나,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안에 살 것이며 장차 천국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21-24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그런 자를 하나님께서는 더욱 사랑하실 것이요 주께서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주님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우리가 그를 거역하고 있었을 때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우리가 그를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행할 때 우리를 얼마나 더 사랑하시겠는가?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은 성령께서 오셔서 함께하심을 가리킨다고 본다. 주를 사랑하며 순종하는 자는 성령 충만의 복을 누릴 것이다.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신자 속에 오셔서 거하심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25-26절]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께서는 얼마 후 제자들을 떠나실 것이지만 또 다른 보혜사께서 그들에게 오실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롬 8:9)이시며 ‘아들의 영’(갈 4:6)이시다. 또 성령(프뉴마 pneu'ma--중성명사)을 가리키는 ‘그가’(에케이노스)라는 남성 지시대명사는 성령의 인격성을 증거한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치시며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그는 성경을 잘 이해하도록 가르치시는 가장 좋은 선생님이 되실 것이다.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신다. 주 예수님은 ‘평안의 주’이시다(살후 3:16). 하나님의 나라는 평안의 나라이다(롬 14:17). 주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세상의 평안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하지만, 주님의 평안은 영속적이고 완전하다. 성도는 이 평안으로 죄와 마귀의 시험과 고난의 현실을 이길 수 있다.

[28절]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간다는 말을 인해](전통사본)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이 말씀은, 그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이요 또 제자들에게 유익한 일이기 때문에 그들이 기뻐해야 한다는 뜻이다. 과연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것은 자신에게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이요 그의 제자된 우리들에게는 유익한 일이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는 말씀은 신적 본질에 있어서가 아니고, 인성(人性)을 취하신 중보자로서 자신보다 크시다는 뜻일 것이다(매튜 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적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동일하시고 동등하시다.

[29-31절]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이 세상 임금’은 사탄을 가리킨다. 욥기 1-2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온 세상의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깊으신 뜻 가운데 사탄에게 어느 정도의 권한을 주셨다. 그래서 사탄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활동하는 것이 현실이다. 사탄이 와서 악인들을 격동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할 것이다. 이제 그때가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사랑하며 그의 뜻대로 택자(擇者)들의 대속(代贖)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다.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지만 그는 위축하지 않고 아버지의 명하신 바를 묵묵히 다 행하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주께서는 이 점을 네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셨다(15, 21, 23, 24절). 그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해야 하고 그러므로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 속에 오신 성령께서 누구이신지 알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주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주님 대신 ‘다른 보혜사’로 오셨다. ‘보혜사’는 ‘위로자’ ‘돕는 자’라는 뜻이다. 또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다. 거짓말과 이단 사설이 가득한 세상에서 그는 우리를 진리의 지식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또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성령의 오심을 암시했다고 본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시는 영이라고 불리었다. 또 그는 다른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롬 8:9)과 ‘아들의 영’(갈 4:6)으로 불리신다. 우리는 다시 삼위일체의 신비를 본다. 우리가 성령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이와 같은 깊은 뜻이 있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큰 유익을 날마다 체험해야 한다. 그는 우리 안에 항상 거하신다. 그는 죄와 마귀의 시험과 환난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고 힘을 주시고 우리의 길을 지도하신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거하며 동행하며 그의 도우심으로 성화를 이룬다. 로마서 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또 주께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에게 날마다 평안을 주신다. 데살로니가후서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하실지어다.” 우리는 이런 큰 유익들을 날마다 체험하자.

15장: 포도나무의 비유

1-8절, 포도나무의 비유

[1-2절]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백성을 ‘극상품 포도나무’로 표현하셨다(사 5:2).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신약교회인 우리들을 ‘그 가지들’로, 하나님을 ‘그 농부’로 비유하셨다. 그는 이 비유에서 열매에 대해 강조하셨다. 포도나무의 가치는 열매에 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쓸모가 없고 제거될 것이다. 주께서는 열매를 강조하신다.

예수께서는 포도나무 가지들을 두 종류로 나누신다. 하나는 열매를 맺는 가지요, 다른 하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이다. 그것은 그가 곡식 비유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신 것과 같고, 또 가라지 비유에서 곡식과 가라지를 나누신 것과도 같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를 농부가 잘라버리듯이,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 열매를 맺지 않는 자들을 제해버리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잔가지를 치듯이 깨끗케 하실 것이다.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열매는 선한 인격과 행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선행과 서로 사랑하는 삶을 가리킨다.

[3-4절]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그의 사랑과 그의 의(義)와 그의 생명 안에 거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는 말씀은 한마디로 연합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이다. 이것은 성도들이 거듭날 때 이루어진다. ‘거하라’는 원어(메이나테 단순과거 명령법) 는 반복적, 계속적 행위보다 어떤 단순한 행위를 가리킨다. 성도의 중생(重生)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은 단번에 이루어진다. 우리가 선한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할 수 있는 것은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깨끗케 하셨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죄사함을 받았다.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중생은 죄씻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으로 죄씻음을 받아 새 생명이 시작될 때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성도가 열매를 맺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죽어버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듯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못하면 죽은 가지에 불과하고 결코 거룩하고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그래서 주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고 중생한 자들 곧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만 거룩하고 선한 인격과 삶의 열매, 곧 거룩과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5-6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말씀은 예수님 믿는 자들에게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예수님 믿는 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중생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 그러나 주께서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메논 mevnwn)(현재분사)”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현재 주님과의 교제를 강조하신 것 같다. 성도가 열매를 맺으려면 과거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만족하지 말고 현재 주님과 밀접한 교제를 힘써야 한다. 과거에 포도나무의 가지이었어도, 현재 끊어진 가지라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면 현재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 성도가 거룩하고 선한 열매를 맺으려면 현재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히 교통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연합과 교통은 날마다 말씀의 묵상과 기도, 성령의 감동과 인도, 믿음과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주님과 밀접히 교제하는 성도는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가 우리의 의와 생명이 되며 또 선행을 위한 힘과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즉 그가 중생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으면, 그는 죽은 가지처럼 말라지고 버린 바 되고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께서는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그의 말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으로 표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는 자는 그 복음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자이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되어 그의 영이 그 속에 계시고 그의 말씀이 그 속에 있는 자들에게는 복된 약속이 있다. 그것은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이다. 기도 응답은 구원받은 성도의 특권이다(요 14:13-14). 그러나 성도도 죄 가운데 있으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사야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라.”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밀접히 교제하며 선한 열매를 맺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을 때 기도 응답의 특권은 더욱 효력을 나타낼 것이다. 요한일서 3:21-22,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8절]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많이 맺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그런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주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표현하시면서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16). 성도들이 세상에서 행하는 선한 행위들, 사랑의 행위들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또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그렇게 좋은 열매들이 많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이 증명될 것이다(NASB, NIV). 주께서는 앞에서도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3:35).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참 포도나무이시며 우리는 그 가지라고 말씀하시면서,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듯이 우리가 그 안에, 그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킨다. 이것은 두 가지 뜻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중생(重生) 곧 거듭남이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과 분리되었었다. 그러나 사람이 주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새 생명을 얻었을 때, 하나님과 연합하게 된다. 중생은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람은 회개하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또 하나는 현재의 믿음과 순종이다. 성도는 믿음 없이 행하지 말고 또 말씀을 거역하지 말고 항상 믿음과 순종으로 삶으로 주님과 연합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이다.

둘째로, 주께서는 우리가 주 안에 거할 때 몇 가지 약속을 주셨다. 첫째, 그는 우리에게 열매를 많이 맺게 하실 것이다. 열매는 선한 행위를 가리킨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이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디도서 3:14,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열매를 많이 맺는 길은 중생하여 주님과 연합하고 믿음과 순종으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둘째, 주께서는 우리에게 기도 응답을 약속하신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체험할 것이다.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일서 3:21-22,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셋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표를 가질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우리가 그의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요 13:35). 선한 행실은 주 예수의 제자된 표이다.

9-27절,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9-11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는 그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베푸신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거절하지 말고 받고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면 그의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 또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그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할 것이다. 불순종은 슬픔을 가져오지만, 순종은 풍성한 기쁨을 가져온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이다(갈 5:22).

[12-15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주의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종으로 여기지 않고 친구로 여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놀라운 말씀이다.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다니! 종은 주인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지만, 친구는 안다. 예수께서는 친히 희생적 사랑을 보이실 친구이시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이다. 이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때이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일진대, 우리는 그의 명령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6-17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주께서 그들을 택하신 목적은 서로 사랑하는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많이 맺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바울도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 우리로 선한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증거했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선한 일은 서로 사랑하는 것을 포함한다. 또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실 것이다.

[18-21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고 핍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실상 세상은 그들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미워하고 핍박하였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고 핍박한 까닭은 그들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택함을 받아 구별된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핍박했던 그들은 예수께 속한 제자들도 미워하고 핍박할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는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듯이,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크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주께서 받으신 것과 같은 미움과 핍박을 받을 것이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은, 결국, 그들이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2-25절]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세상은 까닭 없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하였는데, 바로 이 일에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고 그것을 핑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씀하셨고 아무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확실하고 풍성한 증거가 드러났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핍박한 것은 큰 잘못이며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었다.

[26-27절]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미워하고 핍박하지만, 그를 증거할 자들이 있다. 첫째는 주 예수께서 보내실 성령이시다. 보혜사 즉 위로자와 변호자로 오신 진리의 영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하였다(고전 12:3). 둘째는 예수께서 세우신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것이다. 그들은 주께서 전도 활동을 시작하실 때부터 그와 함께 지냄으로써 그의 은혜로운 말씀들을 다 들었고 그의 능력의 기적들을 친히 다 본 자들이다. 또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은 자들이다. 이제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증인들이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들로서 서로 사랑하라는 그의 계명을 힘써 지키자.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는 그의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 우리는 확실히 그의 사랑을 받은 자들, 그의 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백성임이 분명해질 것이다. 또 그때 우리는 주께서 주시는 기쁨을 충만히 누릴 것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가 될 것이며, 또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때 낙심치 말아야 한다. 악한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세상이 주님을 미워하고 핍박했다면, 우리도 미워하고 핍박할 것이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때 낙심치 말고 끝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자.

셋째로,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성령님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이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또한 진리의 영이시다. 그는 친히 하나님의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신다. 또 사도들은 처음부터 주 예수를 따랐던 자들, 곧 증인들이다. 그들의 글들이 오늘 우리 손에 있는 신약성경이다. 성령님과 신구약성경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이다.

16장: 성령의 사역

1-15절, 성령의 사역

[1-4절]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핍박과 성령 강림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낙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을 포기하거나 변절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셨다. 사람들은 그들을 출교시키고 심지어 죽일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면 제자들을 핍박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낙심치 말고 범죄치 말고 믿음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길에는 고난이 있지만,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것이다.

[5-7절]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신다는 말 때문에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을 떠나시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러해야 보혜사 성령께서 그들에게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리우시면 그는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실 것이다.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권위를 나타낸다. 주께서는 성령을 보내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성령 강림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하시는 일이요 예수께서 영으로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계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이제 제자들을 떠나시고 성령께서 오시는 것은 그들에게 유익한 일이다.

[8-11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깨우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성령께서는 오셔서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깨우치실 것이다. 성령께서 죄에 대해 깨우치시는 것은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이다. 성령께서 의에 대해 세상을 깨우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셨던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셨고 또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의가 되셨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구주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한다. 성령께서 심판에 대해 세상을 깨우치시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으로 이 세상 임금인 마귀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죄인들은 그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죄와 마귀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 성령의 사역은 죄인들을 깨우치셔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시는 것이다.

[12-13절]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自意)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영적 깨달음의 정도만큼 진리를 가르쳐주셨고 아직도 많은 부분을 남겨두셨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그는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모든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요 5:39). 성경 진리의 요점은 예수님과 그의 속죄사역이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그의 속죄사역을 증거하실 것이다. 또 그는 장래의 일, 즉 종말 사건들에 대한 예언도 주실 것이다. 그 모든 내용이 신약성경의 내용이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로 구원을 받았다.

[14-15절]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나를 영화롭게 하리니](KJV, NASB)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알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일을 하지 않으실 것이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 아버지께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神性)을 보인다. 하나님의 것은 피조물의 것이 될 수 없다.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소유물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뿐이시다. 또 예수께서는 7절에서 “내가 그를[성령을] 너희에게로 보내리라”고 이미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영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그가 바로 사도시대에 교회에 오신 성령이시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증거하셨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세 구별된 인격은 한 하나님이시다. 완전한 신성(神性)을 가지신 세 구별된 인격이 본질과 본체에 있어서 한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성경에 밝히 계시된, 그래서 정통 교회가 역사적으로 믿고 고백해온,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 고난과 핍박이 있고 심지어 순교를 당하는 일이 있겠으나 그는 그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범죄치 말고 변절치 말아야 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미리 교훈하신 목적이며 성령을 보내주신 한 목적이기도 하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행 14:22). 또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했고(빌 1:29), 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하였다(딤후 3:12). 우리는 고난과 핍박과 순교를 각오하며 살자.

둘째로, 우리는 성령님께 감사하고 그를 의지하며 고난을 이겨야 한다. 성령께서는 이미 세상에 오셨다. 그는 지금 교회 가운데, 성도들의 육체 속에 함께 계신다.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성도가 지상에서 누리는 놀라운 복과 특권이며 고난과 핍박을 이기는 힘이 된다.

셋째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한다. 성령께서는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세상 사람들을 깨우치시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사역을 증거하실 것이다. 또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며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장래 일도 알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며 그를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즉 그는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시고 적용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다. 오늘날에도 구원받을 자들은 성령의 역사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 그는 우리 속에 영원히 거주하시는 보혜사로 오셨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구원을 받았으므로 이제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성경을 읽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죄성을 극복하고 성화를 이루며 성령의 위로와 힘으로 고난을 이기자.

16-33절, 주께서 떠나시지만

[16-19절]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전통본문)57) 하신대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성령 강림, 혹은 그의 승천과 재림, 또는 그 후반절을 그의 부활과 성령 강림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보지만, 이 말씀은 문맥상 그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58) 그렇다면,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는 말씀은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한다”는 말씀의 이유를 보이며, 주께서 죽으심으로 잠시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올라가실 것을 의미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의 옆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면서 회개했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24:43).

[20-22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그러나](전통본문)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제자들이 애통하며 근심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것이며 그들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뀐 것은 그의 부활로 인함일 것이다. 복음서들은 주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크게 기뻐했음을 증거한다. 마태복음 28: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요한복음 20:20,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누가복음 24: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제자들은 주님의 죽음으로 인해 잠시 슬퍼할 것이나 그의 부활로 인해 다시 기뻐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기쁨은 성령의 강림으로 더욱 풍성해지고 또 장차 주의 재림 때에 절정을 이룰 것이다.

[23-24절]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혹은 ‘구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KJV, NIV)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을 가리키는 것 같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은 더 이상 그와 함께 지내면서 무엇을 구할 수 없을 것이지만,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와 동행하는 자의 특권이 될 것이다. 또 제자들은 기도 응답을 받음으로 기쁨 충만을 경험할 것이다. 그것이 신약 성도들에게 주신 복된 약속이다(요 15:11; 17:13). 그가 승천하신 후 예수께서는 더 이상 우리 곁에 계시지 않으나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는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의 응답을 받으므로 기쁨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25-27절] 이것을 비사(比辭)로[비유적인 말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비유적인 말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신약 성도들에게 주신 기도 응답의 약속과 특권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는 까닭은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가 예수께로 나올 수 있었고 그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으나, 우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그를 참으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도 응답을 주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확실히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며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28-33절]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比辭)[비유]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제자들은 주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이 세상에 오셨다가 이제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믿었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은 보잘것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참된 믿음조차도 내세우지 말고 오직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야 할 것이다. 특히, 세상에는 환난이 많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에게 미움과 핍박과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 안에서 또 기도 응답으로 평안과 담대함을 얻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길을 통과하며 승리하셨듯이, 우리도 그의 은혜로 그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의 길을 통과하며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주 예수께서 이제 제자들을 떠나실 것이다. 그는 제자들을 떠나시고 이 세상을 떠나셔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그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면서 몇 가지 교훈을 다시 주셨다.

첫째로, 그는 제자들에게 기도 응답의 약속을 다시 주셨다. 23-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그는 요한복음 14:13-14에서도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기도 응답을 약속하셨다.

둘째로, 그는 또 기쁨 충만도 약속하셨다. 24절,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한복음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성도가 성령의 열매인 기쁨을 누리는 것은 복된 약속이다.

셋째로, 그는 또 평안을 약속하셨다. 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평안의 주께서는 우리에게 친히 때마다 일마다 평안을 주실 것이다(살후 3:16).

넷째로, 우리는 환난 중에 담대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고난의 세상을 이기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것을 믿고 두려워 말고 담대해야 한다(사 41:10; 43:1-2; 마 28:20). 우리는 특히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그래야 한다.

17장: 제자들을 위한 기도

1-12절, 제자들을 위한 기도

[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당신의](원문)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당신의](전통본문)59)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저녁식사 후에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과 성령의 약속 등의 말씀으로 교훈하신 후(요 14-16장)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모든 일들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다(전 3:1).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택한 백성들의 죄를 속(贖)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함이었다. 이제 그때가 다가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죄인들을 위해 죽은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영화롭게 될 것을 내다보셨다. 그것이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또 자신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다 이루시고 세상의 모든 택자들을 구원하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2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이다. 그것은 구원할 자를 구원하고 버릴 자를 버릴 수 있는 권세이다.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롬 9:18).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이런 권세를 주신 목적은 그가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데도카스 완료시제)60) 자들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를 증거하며 선택된 자들의 수가 확정적임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영생으로 예정하셨다(엡 1:4-5). 영생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이다. 아담의 죄는 인류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적 긍휼로 택한 자들을 영생에 이르게 구원하신다.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영생은 이것이니 이는 그들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당신과 당신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게 되고 또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단절된 채로 사는 것이 영적 사망이며 그를 바로 아는 것이 영생이다.

[4-5절]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하라고 주신 일은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과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명하신 일을 이루셨고 다 이루실 것이며 이제 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것이다. 그는 탄생하기 전에 선재(先在)하셨던 자, 아니 창세 전, 곧 영원 전에 이미 존재하셨던 분이시다. 그는 신성(神性)을 가진 분이시다. 그는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가지셨다. 그 영광은 그가창세 전부터 가지셨던 신적 영광이다. 아버지께서는 창세 전부터 아들을 사랑하셨다(24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영원한 사랑의 관계이셨다. 이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나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의 신적 영광을 다시 얻으실 것이다.

[6-8절]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셨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을 주셨다. 또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셨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이시며 그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가 행하시는 일들이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임을 알았고 믿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지식과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표시이다.

[9-10절]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예수께서는 막연히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고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 곧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여기에 선택의 진리가 있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라는 말씀은 선택의 진리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인류 중 일부를 선택하셨다는 진리는 성경적 진리이며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택자들만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택자들은 빠짐이 없이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 ‘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 곧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을 가리킨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神性)을 나타낸다. 신성을 가진 자가 아니고서는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없다.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다”는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께서 신적 구주이심을 알고 그를 인정하고 믿고 경배함으로 그가 영광을 받았다는 뜻이다.

[11절]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내게 주신 저희를 아버지의 이름으로](전통본문)(KJV)61)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께서는 자신의 승천을 앞두시고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그의 이름으로 구원하신 제자들을 보전하셔서 하나가 되게 하시기를 기도하셨다. 제자들의 연합의 본보기는 하나님과 아들의 연합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은 영적, 본질적 연합이다. 이와 같이 택자들의 모임인 교회의 연합은 영적, 정신적 연합이어야 한다.

교회 분열의 문제는 단지 외형적 조직의 분열 문제만이 아니다. 실상 교리적, 정신적 분열이 더 큰 문제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다룬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교인들의 마음의 분열이었다. 고린도전서 1:10,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에베소서 4:2-3,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교회의 연합에 대해 몇 가지 원칙들이 있다고 본다. 첫째로, 교회는 성경의 근본교리들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성경의 근본교리들은 교회 연합의 기초이다. 어떤 교회연합체이든지 성경에 계시된 기독교 근본교리들 위에 조직되어야 한다. 성경의 근본교리에서 이탈하는 것이 이단이다. 기독교 근본교리들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기적 행하심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 등의 사실들이 있고 그 핵심은 그의 십자가 대속(代贖) 사역이다. 또 이 모든 진리들의 기초가 되는 것은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성에 대한 믿음이다.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성을 부정하는 자는 확실히 이단이다.

둘째로, 교회는 중요한 교리들에서도 가급적 하나가 되어야 한다. 성경의 중요한 교리들에서 탈선하는 것은 큰 오류들이며 그런 오류들을 양심적으로 포용하기는 힘들다. 여기에 교파들의 이유가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잘못된 교리가 구원에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교회는 그런 자들 혹은 그런 교회를 정죄하지 말고 한 교회의 지체로 여기며 서로에 대해 긍휼과 인내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셋째로, 교회는 중요하지 않은, 지엽적 교리들에 있어서는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을 포용해야 하며 그런 문제로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 성도들은 이런 저런 지식에 있어서 부족함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 잘 깨닫지 못하는 신자들의 영혼을 귀히 여기고 사랑과 인내로 그들을 포용하며 그런 문제에 대하여 함께 연구하고 토의함으로써 다같이 일치된 지식에 이르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12절]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구원하셨고 지키셨고 그러므로 멸망의 자식 외에는 하나도 멸망치 않았다. ‘멸망의 자식’은 불택자인 가룟 유다를 가리킨다.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이었고(요 6:64) 죄씻음을 받지 못한 자이었다(요 13:10).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으면 좋았을 뻔한 자이었다(눅 26:24). 그는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시려고 멸하기로 준비하신 진노의 그릇이었다(롬 9:22).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다 구원을 받을 것이며 그들은 세상 끝날까지 보전될 것이다. 그러나 불택자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며 가룟 유다처럼 외형적으로 구원의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교회의 직분을 가졌을지라도 결국 멸망을 당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를 다시 한번 더 마음에 새기자.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자들이 있다. 그는 그들을 아들 예수께 주셨다. 그들의 수는 확정되어 있다. 그들은 다 영생에 이를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참된 믿음과 순종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자임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막연히 세상을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고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또 모든 사람에게 전도하여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다 구원해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고 순종하자. 그것이 선택받은 표이다. 택자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고 순종할 것이며 다 구원받을 것이다. 요한복음 10:26-27,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믿음과 순종으로만 살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대로 교회의 일체성 지키기를 힘써야 한다. 교회의 일체는 단순히 조직체적 일체가 아니고 교리적, 사상적 일체이다. 교회는 성경의 근본교리들에 있어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기본적 사실들과 그의 속죄 사역에 대한 교리에 있어서 일치해야 한다. 또 교회는 성경의 중요한 교리들에 있어서도 일치해야 한다고 본다. 장로교회는 장로교 교리들을 중요하게 여긴다. 또 교회는 그 외의 지엽적 교리들에 있어서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본다. 교회는 그런 문제들로 분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잘 깨닫지 못하는 자들의 영혼들도 귀히 여기고 사랑과 인내로 그들을 포용하며 그런 문제들에 대해 함께 연구하고 토의함으로써 일치된 지식에 이르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근본교리를 믿는 다른 교파를 한 교회의 지체로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본다.

13-26절, 제자들을 위한 기도 (계속)

[13절]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교훈하시는 목적은 그의 기쁨을 그들 속에 충만케 하려 하심이었다. 그가 가지고 계신 기쁨은 하나님의 기쁨이며 인간의 육신적 조건이나 외적 환경을 초월하는 기쁨이었다. 그는 자신이 떠난다는 말로 근심하며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그 기쁨을 충만히 주기를 원하셨다.

[14절]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구원하셨으나 그들은 세상에서 미움과 핍박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주께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심같이 그들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속한다’는 원어(에이미 에크)는 근원과 소속을 나타낸다. 중생은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일이다(요 1:13; 3:5). 제자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께 속하는 자가 되었지만, 바로 그 일 때문에 이 세상에서 미움과 핍박을 받을 것이다.

[15-16절]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제자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내용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속히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다가 가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일터이다.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 짓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는 것, 즉 거룩함과 온전함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고 우리는 우리가 받은 거룩과 의를 잘 유지하며 죄를 짓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17-19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악에 빠지지 않고 거룩함을 유지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함의 방편이다. 시편 119:9, 11,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에베소서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택하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제자들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자신의 인격과 말씀을 거룩하게 하셨고 제자들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거룩함을 얻는다. 그것이 구원이다. 성경은 성도들의 구원과 거룩함을 위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방법이다. 성경책을 주야로 읽고 배우고 묵상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점점 더 거룩해지고 온전하게 될 것이다.

[20-21절]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께서는 단지 당시의 제자들을 위해서만 기도하지 않으셨고 또한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곧 오늘날 신약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는 오늘날도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신다(롬 8:34).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 곧 신약교회가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다. 주께서 말씀하신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의 하나 되심 같은 하나이다. 그것은 단지 외적 일치가 아니고 사상적 일치이다. 사상적인 일치가 없는 외적 일치의 추구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고 인류 초기의 바벨탑 쌓기(창 11:4)와 같은 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일치된 증거를 해야 한다. 과연 그렇게 되었다. 역사상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이탈한 이단들도 있었으나, 그들을 제외한 모든 교회들과 성도들은 비록 교파가 달라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속죄사역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 등을 고백하였다.

[22-23절]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내게 주신 영광’은 주께서 본래부터 가지고 계신 신적 영광을 가리킨 것 같다. 제자들은 신적 구주께서 이루신 의와 사랑을 은혜로 받은 자들이다. 이제 그들은 그 의와 사랑을 가지고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주께서 그의 제자들 속에 계심은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 되게 하려 하심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가 주신 의와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룸으로 세상에 증거가 되어야 한다.

[24-26절]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천국에 들어가 주의 신적 영광을 보게 되기를 기도하셨다. 또 그는 자신의 영광이 창세 전에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므로 그에게 주신 영광임을 말씀하셨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볼 것이다. 천국은 성도에게 기쁨을 주는 소망의 나라이다. 본문에는 ‘안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줄 알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았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 속에 머물고 주께서도 친히 영으로 그들 속에 계실 것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알고 그와 교제하며 동행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의 기쁨을 충만히 가지게 되기를 기도하셨다. 우리는 그를 믿고 구원을 받음으로써 그의 충만한 기쁨을 받게 되었고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로,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되기를 기도하셨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 짓지 않는 것을 조심해야 하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곧 성경말씀으로 우리의 거룩함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셋째로, 주 예수께서는 신약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다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 교회가 사분오열되는 것은 좋지 않다. 교회는 바른 진리 안에서 사랑으로 일치단합함으로 세상에 구주 예수를 증거해야 한다.

넷째로,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장차 천국에서 그의 영광을 보게 되기를 기도하셨다. 이 세상과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나 천국은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영원한 곳이며 성도들의 소망과 기쁨의 이유이다.

18장: 심문받으심

1-27절, 잡히시고 심문 당하심

[1-6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횃불]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예수께서는 유월절 식사와 그 후에 제자들에게 주신 여러 교훈과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셨다.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 북쪽에서 시작하여 사해로 이어지는 골짜기를 가리킨다. 이 시내는 평소에는 물이 없고 겨울의 우기(雨期)에 물이 흐르는 ‘와디’라는 시내이다. 그는 거기에 있는 동산에 들어가셨다. 그것은 감람산, 좀더 좁게는 겟세마네 동산이다. 다른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그 밤에 거기서 약 3시간 기도하셨다고 증거하는 것 같다(마 26:40, 44; 막 14:37, 41). 사람이신 예수께서는 그 밤에 간절한 기도로 그의 연약한 마음을 굳세게 하셨던 것 같다.

다른 복음서들은 사람들이 강도라도 잡을 자들처럼 ‘검과 몽둥이’를 가지고 왔다고 증거한다. 그 상황은 누구나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당할 일을 다 아셨다. 그러나 그에게는 마음의 안정과 담대함이 있으셨다. 그것은 기도로 준비된 담대함이었을 것이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자신을 증거하셨다. 의인에게는 담대함이 있다(잠 28:1). 의로우신 예수께는 담대함이 있으셨다.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왔다. 예수께서 자신을 알리실 때 그들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다.

[7-11절]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아셨고 제자들이 잡히거나 다치거나 죽게 되지 않기를 원하셨다. 주께서는 과연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아끼셨다(요 13:1).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시몬 베드로는 검을 빼어 말고라는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좀더 용기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는 또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약 72,000명]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는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신 후 그 귀를 만져 낫게 해주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악인들의 악행에 대해 악으로 보복해서는 안 된다고 교훈하셨었다(마 5:39-40). 더욱이, 그가 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12-14절]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결박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을 결박한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거꾸로 된 일이다. 온 세상의 심판자이신 그가 죄인들에게 결박을 당하시는 일이 역사상 실제로 일어났다. 이것이 악한 세상의 모습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 다른 복음서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끌고 갔고 대제사장은 공회 앞에서 그를 심문했다고 증거했으나, 요한은 그들이 그를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고 보충적으로 증거했다.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은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이었으나 부패되어 있었다. 그들은 항상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과 교통하므로 백성들보다 더 경건해야 했으나 부패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고 공모하였다. 젊은이들은 혹 믿음과 인격이 부족해서 잘못을 범할지라도 노인들이 바른 조언을 해야 할 터인데, 안나스는 오히려 이 모든 일을 조종하였던 것 같다.

[15-18절]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베드로와 함께 다른 한 제자가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잡히시는 때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고 베드로는 비록 멀찍이이었지만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증거했다(마 26:56, 58). 대제사장과 아는 한 제자가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해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런데 그 밤에 베드로는 문 지키는 여종 앞에서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 밤은 추운 밤이었다. 시험은 종종 성도가 예상치 못한 때에 닥친다. 사탄은 우리를 주목하며 틈을 노린다. 여종의 갑작스런 질문에 베드로는 실수를 했다. 그 밤에 깨어 기도하지 않았던 베드로는 주님의 염려대로 크게 실수하고 말았다(마 26:41).

[19-24절]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예수께서는 안나스의 질문에 직접 대답지 않으시고 자신이 회당과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 가르쳤으니 그들에게 물어보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대답하신 까닭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않기 위해서이실 것이다(마 7:6). 안나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마음은 이미 예수님을 정죄하였고 단지 그 정죄의 정당성을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셨고 그 앞에 비굴하게 육신의 목숨을 구걸하려 하지도 않으셨다.

이 말씀을 하시자, 곁에 선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님을 쳤다. 그때 예수께서는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을 정죄하려면 먼저 그의 죄를 확증해야 한다. 죄를 확증하지 않고 남을 정죄하는 것은 그 자체가 큰 잘못이며 큰 악이다. 안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채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었다. 공관복음은 가야바 앞에서 되어진 일만 증거하지만, 요한은 그 내용을 생략하고 안나스 앞에서 되어진 일만 보충해 증거한다.

[25-27절]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가로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그 밤에 시몬 베드로는 세 번이나 자신이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다른 복음서들에 보면, 그는 두 번째는 맹세하며 부정하였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정했다. 인간은 참 약하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자신보다 남을 배려하자. 주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말했던 제자들이 그 밤에 그를 보호하지 못하고 다 도망쳐 버릴 것이지만, 주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배려하셨다.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고 자신보다 남을 배려한다.

둘째로,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자. 시몬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지만,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검을 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는 말고의 귀를 고쳐주셨다(눅 22:51). 그는 자신을 잡으러 온 자에게도 선을 베푸셨다. 우리는 그의 교훈과 모범대로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끝까지 선을 베풀자.

셋째로, 우리는 친구가 우리를 버려도 낙심치 말자. 시몬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우리는 사람들을 신뢰치 말고 그들이 우리를 배신하거나 떠나갈 때라도 크게 낙심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또 끝까지 신실하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신뢰하며 섬기며 사랑하며 순종하자.

넷째로, 우리는 항상 담대하고 당당하게 살자. 예수께서는 악한 자들에게 잡히시고 심문을 받으셨고 구타를 당하셨다. 그러나 그는 세상 권세 앞에서 비굴하지 않으셨고 육신의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으셨다. 우리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 때 항상 담대할 수 있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다(잠 28:1). 우리는 항상 담대하고 당당하게 살자.

28-40절, 빌라도의 심문

[28-32절]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서 로마 총독의 관정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총독으로 예수를 정죄케 함으로 백성의 반발을 최소화하려 한 것 같다. 시간은 새벽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정죄하고 죽이는 일에 열심이 있었다. 그것은 무지하고 악한 열심이었다. 그들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는 악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열심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밤에 공회를 소집하여 그를 심문했고 그 새벽에 그를 로마 총독에게로 데려간 것이다.

그 날이 무교절의 첫날, 즉 절기 안식일이므로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않고 유월절 음식을 먹고자 하여 이방인인 총독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정죄하고 죽이려는 것보다 자신들을 더럽히는 더 큰 악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은 무지한 자들이었거나 자신들의 이성과 양심을 억누르는 위선자들이었다.

빌라도는 밖으로 그들에게 나가서 말하였다.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그는 유대 지도자들이 끌고 온 예수의 정확한 죄목을 알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대답하였다.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들은 예수를 행악자라고 말했다. 예수께서 무슨 악한 일을 하셨는가? 그가 자신의 신분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 악한 일인가? 빌라도가 말했다.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빌라도는 그 재판에 관여하려 하지 않았으나, 유대인들은 말했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이렇게 예수께서 자신이 어떤 죽음으로 죽을 것을 미리 말씀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33-36절]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께서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즉시 대답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와 다르다. 세상 나라는 세상에서 나와서 세상에 속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나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나라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나라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나라의 왕이시다. 예수 믿는 우리는 세상 나라인 대한민국에 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천국 백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신다. 그는 대적자들과 싸우지 않으신다. 세계를 정복하시되 칼과 창으로가 아니고 말씀과 성령의 역사와 성도들의 사랑으로 하신다. 

[37-40절]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예수께서는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는 빌라도의 두 번째 질문에는 대답하셨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세상 나라는 거짓된 악인들이 다스리는 나라이므로 불경건하고 부도덕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가 법이며 진리가 지배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나라의 왕이시며 진리를 위해 세상에 오셨고 진리에 대해 증거하셨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은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믿고 따를 것이나, 세상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진리에 대해 무관심하고 진리를 듣지 않고 받지 않고 도리어 배척한다.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말했다. 그가 진리를 알았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無罪)를 선고하고 그를 곧 풀어주며 그 자신이 그를 믿고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리에 대한 진지한 갈망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지나가는 말로 “진리가 무엇이냐?”고 말했던 것 같다. 그는 예수님의 무죄함에 대해 인식하였으나 마침내 그를 정죄하고 유대인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빌라도는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말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다음 장(19장)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함을 두 번 더 말한다(19:4, 6). 그러나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 대신 강도 바라바를 사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강도보다 못한 악인으로 취급하였던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무지한 열심은 오히려 위험하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이고자 하는 데 있어서 열심이 있었다. 그들은 새벽부터 모여 예수님을 정죄하였다. 사람이 열심히 산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그 뜻에 일치하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지한 열심을 버리고 바른 지식과 지식 있는 열심을 소원해야 한다.

둘째로, 타락한 종교인은 불신자보다 더 나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긴다는 유대 지도자들은 이방인 빌라도보다 더 나빴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예수가 무죄하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알았다. 사형은 큰 죄를 범한 자에게 내려져야 한다. 종교적인 죄 때문에 사형이 필요한 경우도, 먼저 그 죄를 확증해야 할 것이다. 어떤 재판에서든지 죄의 명확한 증거가 없이 사람을 정죄하는 일은 옳지 않다. 도덕성 없는 경건의 모양은 위선에 불과하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를 믿고 따르는 것은 그의 왕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의 왕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한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다. 성경은 그 나라의 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도덕적인 나라이다. 그 나라의 행동지침은 의와 사랑이며 그 나라의 특징은 평안이다. 신약교회는 이 나라의 부분적 성취이다. 그 나라는 장차 주 예수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19장: 십자가에 못박히심

1-16절, 빌라도의 판결

[1-3절]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의 사건을 재판함에 있어서 올바르지 못했다. 그는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았으나 그를 데려다가 채찍질하였다. 군병들은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말하며 손바닥으로 때렸다. 그들은 그를 희롱하고 학대했고 빌라도는 이 일들을 방치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학대와 조롱을 당하셨다.

[4-6절]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하속들(officers)[직원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빌라도는 다시 밖에 나가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음을 말했다.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자, 빌라도는 그들에게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고 말했다. 대제사장들과 직원들은 예수를 보고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고 소리질렀다. 그들은 예수를 사형시키려고 이미 작정했었다. 빌라도는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고 말했다. 그는 무책임하였다. 그의 말과 행동은 일치하지 않았다. 그가 참으로 예수님을 죄 없다고 생각했다면 그를 보호했어야 했다. 그는 정의롭고 용기 있는 재판관이 아니었다.

[7-9절]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유대인들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함으로 당연히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였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나 두려움이 있었다. 모든 사람 속에는 그런 의식이 어느 정도 있다. 그래서 빌라도는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너는 어디로서냐?” 그는 예수께서 정말 하늘로서 온 자인지 물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대답하여 주지 않으셨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을 그를처형할 죄목으로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당하려면 예수의 주장이 근거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근거 없이 예수님을 정죄하고 있었다.

[10-11절]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빌라도는 자신이 예수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다고 말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고 대답하셨다. 빌라도가 가진 재판 권세는 실상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재판관들의 재판관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유대 지도자들의 죄는 더 컸다.

[12절]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필로스)[친구]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다. 그는 예수의 무죄함을 알았다. 그는 심지어 예수께 대한 어떤 두려움을 가졌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그가 예수를 놓아준다면 가이사의친구가 아니라고 압박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교묘한 압박이었다. 악한 자들은 악한 일에 놀라운 지혜를 발휘했고 빌라도로 하여금 잘못된 판결을 하도록 몰아대었다. 그들의 악한 계획은 승리하고 있었다. 빌라도는 이성과 양심의 판단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총독직의 안정을 구할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서 잘못된 길로 이끌리고 있었다.

[13절]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교묘한 압박의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재판석에 앉았다. 그는 자신의 총독직의 안정을 포기하지 않으면 예수를 놓을 수 없었고 또 그렇다고 이 재판을 회피할 수도 없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재판석에 앉았다.

[14-15절]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6시[제6시경](원문)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유월절의 예비일’이라는 말은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 예비일 즉 금요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제6시경’은 오전 6시경을 가리킨다고 본다. 이른 아침부터 재판이 열렸다. 그 재판은 공정한 심리와 올바른 판단과는 거리가 먼 재판이었다. 거기에는 군중의 부르짖음만 있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군중을 선동하는 지혜가 있었다(마 27:20).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라고 말했으나, 대제사장들은 대답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권, 메시아의 왕권을 포기하였다.

[16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총독 빌라도는 마침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선동에 굴복하여 재판관의 지위를 로마법에 어긋나고 이성에 어긋나고 양심에 어긋나게 사용하였다.

본문의 교훈을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셨으나 고난을 당하셨다. 그는 채찍질을 당하셨고 가시면류관을 쓰셨고 조롱과 매맞음과 학대를 당하셨다. 총독 빌라도는 그가 죄가 없음을 알았으나, 그런 고난을 당하도록 방치하였다. 예수께서는 잘못한 것이 없이 고난 당하는 모든 성도들의 본이 되셨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잘못된 판결을 받으셨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그의 무죄함을 여러 번 거듭하여 증거하였다. 그는 심지어 그를 놓으려고 힘썼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고 군중을 성공적으로 선동하였다. 빌라도는 마침내 로마법에 어긋하고 이성에 어긋나고 양심에 어긋나게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되도록 내어주었다. 이것이 죄악된 세상의 현실이다(행 8:33). 이것이 우리 주님 예수께서 가신 길이며 또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서 고난을 당하셨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 그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찔림과 상함을 당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사 53:5-6).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되셨고(요 1:29)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벧전 2:24).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의 죄의 대속(代贖)이 되었다.

17-30절, 십자가에 달리심

[17절]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로부터 예수를 넘겨받았다. 예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라는 곳으로 나오셨다. 다른 복음서들에 보면, 군병들은 구레네인 시몬을 잡아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워 그와 같이 가게 하였다(마 27:32; 막 15:21).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고 시몬은 그의 뒤에서 십자가를 같이 졌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체력으로 혼자서 무거운 십자가 나무 형틀을 지실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십자가를 지시고 사형장으로 나가셨다.

[18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예수께서는 좌우에 다른 두 죄수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극악한 죄수처럼 십자가에 처형되셨다. 십자가형은 역사상 세계 여러 곳에서 존재했고 로마 시대에는 주로 큰 죄를 지은 노예들에게 적용되었고 로마 시민들은 그런 형벌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사형수는 땅에 있는 십자가틀 위에 누인 채로 양손과 발에 날카로운 못이 박혔고 형틀은 밧줄로 들어올려 곧바로 세워졌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고 말씀하셨다(눅 24:39). 십자가형에 의한 죽음은 오랜 시간을 끌었다. 그것은 심장에서 가장 먼 손과 발에서 피가 서서히 흘러나와 마침내 죽게 되는 형벌이었다. 36시간 전에 죽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어떤 경우는 9일 동안 끈다고 한다. 사람이신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통은 극심했을 것이다.

[19-20절]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로마어(라틴어)로]62) 기록되었더라.

십자가형을 받는 죄수들은 그 십자가 위에 그의 죄패가 붙는다고 한다. 빌라도는 예수의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붙였다. 예수께서 못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유대인들은 이 패를 읽었는데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로 기록되었다. 나사렛에서 자라시며 어린 시절을 보내신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유대인의 왕이시며, 온 세상 사람들이 알아야 할 ‘세상의 구주’이시다. 그의 이름은 단지 한 시대, 한 민족에게만 복된 이름이 아니고 모든 시대, 모든 민족에게 복된 이름이요 구원의 기쁜 소식이다. 사도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말하였다(딤전 1:15).

[21-22절]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나는 내가 쓴 것을 썼다] 하니라.

대제사장들은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죄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를 죽였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의 양심은 평안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말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것을 고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나는 내가 쓴 것을 썼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예수가 사형받을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았고, 단지 유대인들의 교묘한 압박과 요구를 물리치지 못하고 허락했을 뿐이다. 그는 죄패의 글은 고칠 마음이 없었다.

[23-24절]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군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었다. 그들은 네 명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속옷도 취하였는데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었다. 군병들이 그것을 제비 뽑아 가진 것은 시편 22:18의 예언대로 된 것이었다. 옷은 사람의 품위를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겉옷과 속옷을 벗기운 채 수치스런 죽음을 죽으셨다.

[25절]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이모 즉]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 즉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등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원문에는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사이에 ‘와’라는 말이 없으므로 그 두 사람은 같은 인물로 보인다(KJV, NASB). 다른 복음서들은 많은 여인들이 멀리서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한다(마 27:55; 막 15:41). 그들은 남자들보다 용감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였고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위하여 열심이 있었다.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는 그의 모친 마리아를 가리킨 것 같고(마 13:55),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즉 사도 요한의 모친은 본문의 ‘이모’나 마가복음 15:40의 살로메와 같은 인물일지도 모른다.

[26-27절]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께서는 그 모친과 그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셨다. “여자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이니이다.” 그는 또 그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는 그를 자기 집에 모셨다.

‘그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의 다른 곳에서 네 번이나 나온다(요 13:23; 20:2; 21:7, 20). 그는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임이 분명하다. ‘여자여’라는 호칭은 당시에 존경심을 가진 말로 쓰인 말이라고 한다. “[당신의] 아들이니이다”라는 말씀이 자신을 가리키는지, 그 사랑하시는 제자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으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후자로 이해하며 문맥도 그것을 지지하는 것 같다.

주의 말씀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증거한다. 예수님과 모친과의 인간적 관계는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리아의 아들이셨다. 십자가에 달린 아들 예수를 보는 모친 마리아는 인간적으로 그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을 것이다. 30여년 전, 그가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려갔을 때 시므온이라는 선지자가 마리아에게 칼이 네 마음을 찌를 것이라고 예언하였었다(눅 2:35). 지금 그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이 그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가 모친을 그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려는 뜻이 있어 보인다. 그는 육신의 모친에 대한 사랑과 공경심을 끝까지 가지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후 다른 여러 자녀들을 낳았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표현하며(마 1:25 전통사본; 눅 2:7) 또 성경에는 ‘그의 모친과 동생들(혹은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오며(마 12:46; 13:55, 56; 요 2:12; 행 1:14) ‘주의 형제 야고보’라는 표현도 나오기 때문이다(갈 1:19). 요셉은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난 것 같다. 주께서 모친을 왜 동생들에게 부탁하지 않으셨는지는 불명확하지만 그의 동생들은 다 결혼하였거나 믿음이 부족했고(요 7:5) 사도 요한은 누구보다 예수님의 모친을 돌볼 만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영적 관계는 육신적 관계보다 더 낫다.

[28-30절]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혹은 식초]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그 영]이 돌아가시니라.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은 그의 고통이 매우 컸음을 보인다. 그는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육신의 고통을 십자가 위에서 당하셨다. 많은 피를 흘리신 그는 목마르셨다.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었다. 사람들은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었다. 그는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 곧 택자들을 위한 속죄사역을 다 이루셨다(히 9:12). 그런 후 그는 머리를 숙이시고 그 영이 돌아가셨다. 그는 그의 영을 하나님께 맡기셨다(원문).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는 행악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고 겉옷과 속옷까지 벗기운 채로 수치스럽게 달리셨고 심한 갈증을 느끼실 정도로 고통스럽게 죽으셨다. 우리는 그의 고난을 잊지 말고 그를 진실히 믿고 사랑하자.

둘째로,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그의 모친을 배려하셨다. 그는 고통스런 십자가 위에서도 그의 모친을 그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셨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부모 공경의 실천이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의 대속 사역을 다 이루셨다. 그는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하셨다. 이것이 십자가의 참 뜻이다. 그의 대속 사역으로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은 온 세상에 알려져야 할 복음이다. 이 복음은 온 세상의 모든 나라의 언어들로 번역되어야 할 소식이다.

31-42절, 예수님의 장례식

[31-33절]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은 예비일이었다(막 15:42; 눅 23: 54). 그것은 무교절 주간의 안식일의 예비일 즉 금요일을 가리켰다.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날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않으려고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들을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했다. 사형수들의 다리를 꺾는 것은 그들이 도망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군병들은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었다. 좌우의 죄수들의 다리를 꺾은 군병들은 예수께 와서 그가 이미 죽은 것을 보고 그의 다리는 꺾지 않았다.

[34-35절]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다리를 꺾는 대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곧 피와 물이 나왔다. 이것을 본 사람이 증거하였으므로 이 증거는 참되었다. 그는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사람들로 믿게 하려고 증거했다. 성경은 목격자들의 진실한 증거들을 기록한 책이다. 주 예수의 제자들은 거짓 증인이 아니고 진실한 증인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고 옆구리가 찔려 물과 피까지 흘리셨다. 가시 면류관을 쓴 머리에도 피가 흘렀고 못이 박힌 그의 손과 발에도 피가 계속 흘렀을 것이고 또 옆구리도 창에 찔려 물과 피를 흘렸다. 그는 확실히 죽으셨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그는 회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으셨다.

[36-37절]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그의 뼈가 꺾이우지 않은 것과 그의 손과 발과 옆구리가 찔린 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출애굽기 12:46에 보면, 유월절 어린양에 대해 “뼈를 꺾지 말라”고 명령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희생되셨다(고전 5:7). 또 스가랴 12:10에 보면,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리라”고 예언되어 있다. 메시아에 대한 이러한 예언들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38절]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은밀히 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은밀히 행하였다. 그는 빌라도더러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였고 빌라도는 허락하였다. 그는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왔다. 다른 복음서들에 의하면, 그는 부자요(마 27:57) 존귀한 공회원이었고(막 15:43; 눅 23:50) 선하고 의로운 자이며 예수님을 정죄한 유대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않았던 자이었고(눅 23:50, 51)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이었다(막 15:43; 눅 23:51). 마가복음 15:43에 보면, 그는 빌라도에게 용감히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했고 그것을 받아 세마포를 사서(막 15:46) 그것으로 쌌다.

[39-42절]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예수님의 장례를 받든 다른 한 사람은 니고데모이었다. 그는 수년 전에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들었던 자이었다(요 3장).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aloe, 알로에) 섞은 것을 백 근(100리트라)[약 34킬로그램]쯤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들과 함께 세마포로 쌌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식은, 평소에 드러나 있지 않았던 두 사람, 즉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에 의해 이렇게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때에는 비상한 방식으로 그의 일을 행하신다. 그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그 두 사람을 사용하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 속에 판(마 27:60; 막 15:46; 눅 23:53) 새 무덤이 있었다. 그것은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이었다(마 27:60).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무덤이 가까웠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기 두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는 이렇게 조촐하게 이루어졌다. 장례식을 호화스럽게 하는 것은 필요 없는 일이다. 성도의 장례식은 믿음과 소망 가운데서 검소하게 행해져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자. 우리 주 예수께서는 가시면류관을 쓰셨고 손과 발에 큰 못이 박히셨고 옆구리에 창을 찔리셨다. 머리에서도, 양손과 발에서도, 또 옆구리에서도 피가 계속 흘러나왔을 것이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여러 시간 많은 고통을 느끼셨을 것이다. 그는 물과 피를 다 흘리셨다.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 믿자.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메시아의 오심과 그의 하실 일들에 대해 예언하시고 그 일들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뼈가 꺾이우지 않으신 것과 그의 손과 발과 옆구리가 찔리신 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그것이 다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이사야 53:9는 그가 부자와 함께 묻히겠다고 예언했고 그 예언도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는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다. 주께서는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눅 24:27). 또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고 하셨다(눅 24:44). 또 그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었다(요 5:39). 이와 같이 성경은 어떤 사건을 예언하였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그것이 성취되었다. 성경의 이러한 성격, 즉 예언의 성취라는 성격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한 증거이다. 우리는 성경의 이 놀라운 내용과 성격을 깨닫고 성경을 다 믿자.

셋째로, 우리는 인간의 의식(儀式)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말자. 세상의 장례식들은 거창하다. 왕의 장례식이나 대통령의 장례식은 화려하고 거창하다. 그러나 그런 거창한 장례식들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일들은 실상 다 헛되고 큰 가치가 없다. 전도서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사야 40:6, 8,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그런 의식과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용이 중요하다. 사람에게 중요한 내용은 구원과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그것을 소유한 자는 그런 거창한 장례식이 없어도 복된 자이지만,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아무리 거창한 장례식을 한다 해도 아무 가치가 없고 그의 영혼의 죽은 후 상태는 지극히 불행스러울 뿐이다.


20장: 부활하심

1-18절,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1-2절] 안식 후 첫날[주간의 첫날](원문)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해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순서적으로 자세히 기록했다고 보인다. 주간의 첫날 즉 주일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바위에 판 새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말하였다.

다른 복음서들에 보면, 다른 여러 여자들도 같이 갔던 것 같다(마 28:1; 막 16:1; 눅 24:1, 10).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2절)는 말은 다른 여자들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 향품을 준비해 왔다(막 16:1; 눅 23:56; 24:1).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믿음과 사랑은 컸고 간절하였다.

그러나 그 여자들은 바위에 판 그 무덤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보았던 것 같다(막 16:5; 눅 24:4). 마리아가 사도들에게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들이 들어가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확인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는 요한복음 21:24에 의하면 본서를 쓴 자이며 사도 요한임이 분명하다.

[3-7절]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갔다. 누가복음 24:11에 의하면,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허탄한 소리로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도들과 달리 베드로는 무덤으로 즉시 달려갔다. 누가복음 24:12도 그 사실을 증거한다. 본문은 거기에 더하여 ‘그 다른 제자,’ 아마 요한도 함께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말한다. 그 둘이 같이 달음질하였는데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는 뒤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았다. 과연 예수님의 시신은 없었고 단지 그 시신을 쌌던 세마포가 놓여 있었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따로 한 곳에 개켜 있었다. 예수님의 시신은 살아나셨다. 그것을 쌌던 세마포가 놓여 있었다. 그 몸이 다시 사셨으므로 그 세마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더욱이, 머리 수건은 개켜 있었다. 이런 사실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단지 영적 현상이 아니었음을 증거한다. 십자가 위에서 상하셨고 죽으셨고 무덤에 장사되었던 바로 그 몸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확실히 몸의 부활이었다.

[8-10절]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와 같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하였다. 여자들도 확인하였고 베드로와 요한도 확인하였다. 빈 무덤은 그의 몸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었다. 예수께서 기절하셨다가 다시 살아나실 가능성은 없었다. 사형을 집행하던 군인들은 그의 죽음을 확인했고 또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이 흘렀고 그의 제자들은 그를 장사했기 때문이다. 또 설사 그렇게 회생(回生)하셨다 하더라도 죽다 살아난 자가 무덤을 막았던 무거운 돌을 밀어 제치고 군사들의 경비(마 27:62-66)를 물리치고 밖으로 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 그의 제자들이 그의 시신을 도적질할 가능성도 없었다. 그 무덤문은 큰돌로 막혀 있었고 군사들의 경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시신을 훔쳐 숨겨두고 그가 부활했다고 거짓말하며 그 거짓말을 위해 핍박을 받고 순교까지 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의 원수들이 그의 시신을 도적질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은 그의 몸의 부활 외에 다른 무엇으로도 설명되기 어렵다.

[11-16절]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베드로와 요한은 집으로 돌아갔고 막달라 마리아는 남아 있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마음이 아픈데 그의 시신까지 분실되니 마음이 몹시 슬펐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또한 불신앙의 눈물이었다. 그는 주께서 자신의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 바를 믿지 않고 있었다. 그는 부활하신 주께서 그를 부르실 때도 그를 동산지기인 줄로 알았고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연약한 믿음과 마음으로라도 그를 사모하며 따랐던 마리아를 찾아주셨다.

마리아는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는데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신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는 천사들의 말에 그는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님의 서신 것을 보나 그를 알지 못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말했다.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라고 말씀하시니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고 말했다. 랍오니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17-1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부활하신 주께서는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사람이 만질 수 있는 몸을 가지고 계셨다. 또 그는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 신성(神性)의 영으로는 그가 십자가에 위에서 구원받은 강도를 그 날 낙원에서 대할 수 있으셨으나, 인성(人性)으로는 아직 땅 위에 계셨다. 그는 땅 위에 계실 때에도 “하늘에 있는 인자(人子)”이셨다(요 3:13 전통본문).

그는 후에 도마에게 그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세마포나 머리 수건을 개킬 수 있으셨고 사람이 만질 수 있는 몸을 가지고 계셨다. 그는 자신의 인성(人性)을 여전히 증거하셨다. 또 그는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고 하나님을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그는 신성(神性)으로는 아버지와 동등되신 자이지만, 인성(人性)으로는 우리와 같은 자이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다. 막달라 마리아는 가서 제자들에게 그가 주를 보았고 주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확신하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상하신 그 몸으로 부활하셨다. 물론 그는 단지 회생(回生)하신 것이 아니고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고 다시 살아나셨다. 본문은 그의 몸의 부활의 증거로 막달라 마리아가 주의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했고, 베드로와 요한이 주의 빈 무덤을 확인했고, 그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머리 수건이 놓여 있었고, 그 무덤에서 두 천사가 나타나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의 부활의 사실을 전해주었고,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 친히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 이런 사실들은 주 예수의 몸의 부활을 증거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의심치 말고 확신하자.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한다. 사도행전 17:30-31,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받아야 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확증한다. 고린도전서 15:20-22,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19-31절, 제자들에게 두 번 나타나심

[19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본문은 주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 날, 즉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셨다고 증거한다. 본문은 부활하신 주께서 문을 열지 않고 들어오셨음을 증거한다. 그의 부활체는 신비한 몸이었다. 물론 그의 몸은 손과 옆구리에 상처가 있었다(20절). 그러나 그의 부활은 단순히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그 몸의 회생(回生)이 아니었다. 그 몸은 변화된 몸이었다. 그의 몸은 닫힌 문을 열지 않은 채 통과하여 방 가운데로 들어오실 수 있는 몸이다. 그의 부활의 몸은 우리가 장차 천국에서 가지고 누릴 것과 같은 변화된 몸이었다고 보인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이 있기를 기원하셨다. 유대인들의 위협 속에서 불안과 근심을 가졌던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평안이 필요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그 평안을 주셨다.

[20절]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부활하신 주님의 손에는 못 자국이, 그의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상하신 바로 그 몸으로 부활하셨다. 물론 그의 몸은 영화롭게 변화되셨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몸으로 부활하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셨다. 그것은 며칠 전 유월절 식사 후에 하신 말씀의 성취이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너희는 곡하고 애통할 것이나 내가 다시 너희에게 올 것이니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리라고 하셨다(요 16:17, 20, 22).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했다.

[21절]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께서는 다시 평안을 기원하신 후에 그가 아버지께 받은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것은 전도를 통한 영혼 구원의 사명이었다. 전도는 사도들의 사명이며 신약교회의 최대의 임무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병 고침이나 기적 행함이 예수님의 사명이 아니었듯이, 단지 교육 사업, 자선 사업, 구제 사업 등의 선한 일들은 교회의 사명이나 임무가 아니다. 그것들이 비록 선한 일이지만 교회의 사명이나 임무는 아니다. 주님의 사명이 영혼 구원의 전도이었듯이, 교회의 사명은 영혼 구원의 전도, 오직 거기에 있다. 실상, 영혼 구원의 전도는 이웃을 위한 가장 큰 사랑이요 가장 큰 선행이다. 죄로 인해 지옥 영원한 불못에 던지울 영혼들을 건져내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선한 일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22절]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행 1:8). 성령을 받는 것은 사명 수행을 위해 필수적이다. 물론 이 말씀은 예언적이라고 보인다. 이 말씀은 사도행전 2장에 증거되어 있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성취될 것이다. 주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내려오셨다(행 2:4).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대로, 주께서 명하신 전도의 사명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음으로 능력 있는 전도자들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대로, 성령 받은 제자들은 과연 능력 있는 전도자들이 되었다.

[23절]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구원 운동은 죄사함의 운동이다. 죄가 개인과 사회의 근본적 문제이었다. 복음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는 도리이다. 전도자들은 복음을 통해 죄사함을 선포하는 자들이다. 죄인들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24:47). 오순절에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설교하였다(행 2:38). 복음 전파는 죄사함의 선포이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죄사함을 받을 것이고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은 죄사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신”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엡 5:26). 교회는 죄사함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24-25절]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을 때 함께 있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말하자, 그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다고 말했다. 도마는 이성적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다. 그는 우리가 부활하신 주를 보았다고 증거하는 제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믿으려 하는 자들 중에 도마와 같은 교인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26절]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부활하신 주께서는 믿음 없는 도마를 위해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여드레를 지나서”라는 말은 그 다음 주일을 가리킨다고 본다. 제자들이 다시 함께 집안에 있었다. 도마도 함께 있었다. 그 날도 제자들은 집의 문들을 닫고 있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평안은 사람에게 매우 큰 복이다. 히브리말에 ‘평안’이라는 말(솰롬)은 우리말에 ‘안녕’처럼 매우 포괄적인 뜻을 담고 있다. 그것은 마음의 평안, 몸의 건강, 경제적 안정, 환경적 평안을 다 포함하는 뜻이라고 본다. 예수께서는 주일에 부활하셨고 또 그 다음 주일에 다시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는 신약 시대에 주일을 복되게 하셨다고 보인다. 주일에 성령께서도 강림하셨다(행 2:1). ‘주의 날’ 곧 주일에 사도 요한도 주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되어질 일들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계 1:10). 주일은 확실히 구별되었다고 보인다.

[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주께서는 믿음 없는 도마에게 말을 건네셨고 믿음의 기회를 주셨다. 주께서는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부활은 영이나 정신세계의 현상이 아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세계의 사건이었다. 그는 몸으로 부활하셨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몸의 부활을 믿는다. 고린도전서 15:13-15, “만일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도마 같은 합리주의자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 의심하겠지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으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요 또 증인들의 증거의 진실성을 믿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고 말씀하셨다(마 22:29).

[28-29절] 도마가 [그에게](원문)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의심 많았던 도마는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는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장차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도 믿을 것이다. 그들은 복된 자들이다. 이것이 교회의 역사요 기독교 확장의 역사이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도다”라고 증거하였다(벧전 1:8).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그를 믿고 있다. 우리는 단지 그를 본 증인들의 증거의 말씀들을 담고 있는 신약성경에 근거하여 그를 믿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이다.

[30-31절]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사복음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과 부활을 증거한다. 복음서들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과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증한다. 또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얻는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복음서들을 주신 목적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의 특징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상하신 그 몸으로 부활하셨다. 그의 손에는 못 자국이 있었고 그의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 있었다. 그 손의 못 자국과 그 옆구리의 창 자국은 만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신비한 몸이었다. 그는 문들이 닫힌 방안으로 들어오셨다. 그 몸은 닫힌 문을 통과하여 들어올 수 있는 몸이셨다. 그 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몸, 천국에서 영생할 몸이라고 보인다.


둘째로,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기쁨과 평안과 믿음을 주셨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고 기뻐했고, 주께서는 그들에게 평안하라고 말씀하셨다. 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부활시키신 것은 우리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시려 함이었고 또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시려 함이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기뻐하며 주께서 주시는 참 평안을 누리고 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의 복을 누리자.


셋째로,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다. 그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다. 또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며 죄사함의 사역을 지시하셨다. 복음 전파는 죄사함과 영생을 전하는 사역이다. 우리는 죄사함의 복음을 만인에게 전파하자. 사람들을 죄와 지옥 형벌로부터 건져내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복된 일이다.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세상에 없다.


21장: 세 번째 나타나심

[1-2절]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바다를 가리킨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었다(마 28:10). 베드로를 비롯하여 일곱 명의 제자들은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확실히 보았고 그와 대화하였다. 그것은 주께서 부활하신 후 세 번째 나타나신 일이었다.

[3-6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부활하신 주께서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으나(요 20:21), 그들은 아직 전도의 일을 하지 못했고 하려 하지도 않았고 할 힘도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먹을것을 얻기 위해 고기나 잡으러 배에 올랐다. 그러나 그 밤에 그들은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날이 새어왔다. 그때 바닷가에 나타나신 주께서는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이 그물을 던졌는데,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수년 전 예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처음 부르실 때의 사건과 비슷하였다. 그때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었다. 그때 그는 “선생이여,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말하며 그물을 내렸는데,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질 정도이었다. 오늘 디베랴 바닷가의 사건은 수년 전 그때의 사건과 비슷하였다. 그것들은 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나타낸 사건들이었다.

[7-9절]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200규빗]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인 사도 요한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라고 말했고, 베드로는 그 말을 듣자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내렸다. 그의 행동은 그가 주님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었는지를 잘 나타낸다. 다른 제자들은 육지와의 거리가 200규빗, 즉 약 90미터 정도밖에 안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왔다. 그들이 올라와 보니 숯불 위에 생선과 떡이 있었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해 두셨다.

[10-1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오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이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셨다. 그러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육의 것을 풍성하게 주시는 자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일을 합하여 좋은 방향으로 이끄실 것이 확실하므로 하나님의 종들과 백성들은 의식주의 문제를 염려치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뜻대로 살기만 힘쓴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전도자의 사명도 잘 감당할 수 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한 명도 구원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많은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15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요나](전통본문)63)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아침식사 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그는 이전에 예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었다(마 16:16). 또 그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도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고(마 26:33) 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했었다(마 26:35). 그러나 그는 그 밤에 주님을 세 번 부인했었다. 그것은 그의 수치스러운 실패의 경험이었다. 이렇게 연약했지만, 그는 주님을 믿고 사랑하였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의 고백은 그의 신앙고백이었고 그의 사랑의 고백이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주께서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에게 목양의 사명을 주시는 말씀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전도자로 부르셨었다. 전도와 목양(牧羊)은 하나님의 일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집이다. 교회는 주께서 사랑하셔서 피 흘려 사신 백성들의 모임이다. 교회의 구성원인 교인들은 하나님의 양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이다. 목사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의 양들을 먹이며 보살피라고 세움을 받은 자들이다(행 20:28; 벧전 5:1-4). 베드로는 이제 전도와 목양의 사명을 기억하고 그 일을 위해 자신을 바쳐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16-17절]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 하셨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을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주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는 대답을 듣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주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알지 못한 자이거나 믿지 않는 자일 것이다.

주께서는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을 받으실 때마다 반복해서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목양(牧羊)은 베드로에게 주시는 사명이다. 전도와 목양은 하나님의 일이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교회와 성도들의 최대의 과제이다. 우리 모두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하며 헌금해야 한다. 또 성도들은 전도자들과 또 전도와 목양을 위해 일하며 협력하는 모든 이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며 봉사하는 자들이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사랑의 고백을 받으신 후 목양의 사명을 일깨우신 것은 목양의 일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일들 중에 영혼들을 다루는 일보다 어려운 일은 없다. 세상에서 질병들을 치료하는 의사들보다 더 위험한 직업도 없겠지만, 사람의 영혼과 인격의 결함들은 육신의 질병들보다 더 치료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구원은 영적 병들을 치료하는 일과 같고 교회는 그런 병원과 같다. 인간의 죄성(罪性)은 여러 종류의 암보다 더 무서운 질병이다. 그것은 뿌리뽑히지 않는 질병과 같다. 그런 죄인들을 다루며 가르치며 책망하며 위로하며 돌보는 것이 목양이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그것은 주의 십자가 사랑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마음으로만 겨우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죄로 병든 영혼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에 목사와 장로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양들을 사랑해야 한다.

[18-19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말씀하셨다고 설명을 하였다. 주께서는 이런 암시의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초대교회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를 당하였다고 한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그가 주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는 암시이었다. 고난을 각오하며 사는 것은 전도자에게만 해당된 말씀이 아니다. 주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하였다(빌 1:29).

[20-23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주께서는 베드로가 그를 따를 때 다른 이와 비교하거나 다른 이의 일에 관여치 말고 주님만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종들은, 비록 교회의 성결을 위해 바른 말을 하고 잘못된 일들을 지적하는 일들이 있으나, 다른 사역자와 비교하거나 경쟁하거나 참견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각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하면 된다. 교회의 모든 직분자도 다 그런 마음으로 주를 섬기며 충성하면 된다. 우리는 남의 일을 상관치 말고 하나님만 바라며 하나님 앞에서만 충성하고 하나님의 명령만 준행해야 할 것이다.

[24-25절]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나는](원문) 아노라. [아멘](전통본문).64)

주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 만찬석에서 주의 품에 의지하였던 그 제자가 바로 이 책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는 우리가 아는 대로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다. 이 사실은 본서에서 그가 자신의 이름을 감춘 겸손한 미덕에서 짐작될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실하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내용들 중에서 극히 일부분을 선택하여 이 책에 기록하였다.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는 말씀은 사도 요한 당시의 교회의 공동적 증거이며 사도 요한의 글에 대한 초대교회의 확증이라고 보인다. 초대교회가 증거한 대로 이 책에 기록된 사도 요한의 증거들은 다 참된 증거들이다. 이것이 성경의 성격이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진실한 증인들의 진실한 증언들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부활하신 주께서는 기적을 행하셨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새벽에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셔서 큰 물고기가 153마리나 잡히게 하셨다. 또 그는 숯불과 생선과 떡을 갖춘 신기한 아침 식탁도 제공하셨다. 본문에 언급된 7명의 제자들은 이 새벽에 이 사건에 대한 증인들이었다. 우리는 주 예수를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주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으시고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목양의 사명을 주셨다. 성경을 연구하고 복음을 전하며 구원받은 양무리들을 가르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세에 고통하는 시대가 올 것이나,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말했다(딤후 4:2). 주의 종들은 주를 사랑하며 성경을 연구하고 전하고 가르치기를 힘써야 한다.

셋째로,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가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는 뜻이라고 보인다. 주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눅 9:23). 사도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뿐 아니라, 오늘날 주의 종들과 성도들도 다 이 길을 가야 한다.

넷째로, 마지막 두 절은 본서가 진실한 증인의 진실한 증언들임을 증거한다. 이것이 성경이다. 진리의 세계는 진실의 세계이다. 성경은 진실한 증인들의 진실한 증언들의 기록이다. 이 진리의 증언들에 구원과 영생이 달려 있다. 누구든지 이 말씀에 증거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을 다 믿어야 한다.

미주

1) 이단 반박, 3. 1.

2) A. T. Robertson, A Harmony of the Gospels, pp. 284-87.

3) 헬라어 엔은 미완료과거 시제이다. 그것은 그가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계셨음을 나타낸다. 물론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이란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을 가리킬 뿐이다.

4) ‘태초에 무엇이 있었느냐?’는 질문은 예로부터 철학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혹은 첫 번째의 질문이었다. 이것을 ‘존재론’(Ontology)이라고 부른다.

5) 요한복음 1:18; 3:16, 18; 요한일서 4:9는 ‘독생하신 아들’(獨生子)이라고 되어 있으나, 본절은 ‘독생하신 자’(獨生者)라고 되어 있다.

6) Byz A W ita b e ff2 vg syrc arm 등에 있음.

7) Byz A lat syr(p) copmss 등이 그러함.

8) ‘그 날 함께 거하니’라는 말이나 안드레가 시몬을 예수께 데려오는 것, 또 무엇보다 후에 요한복음 19:14에 빌라도가 예수를 제6시에 심문했다는 것과 마가복음 15:25에 예수께서 제3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 등은 요한복음이 유대인의 시간 계산방식을 사용했다고 보기 어려운 점들이다. B. F. Westcott,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II, 324-326; A. T. Robertson, A Harmony of the Gospels, pp. 284-287.

9) Byz A vgcl syrp s copbo-ms arm 등이 그러함.

10) Byz A ite syr 등에 있음.

11) 요한복음 4:35에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는 말씀은 5:1의 절기가 유월절이나 유월절 약 50일 후에 오는 오순절일 것을 보인다.

12) Byz (A) ita b ff2 vg syrp copbo-pt arm Origen 등에 있음.

13) Byz A itb e ff2 vgcl (ww st) syrp s copbo-ms arm geo Cyprianvid 등.

14) Byz A latt syr 등에 있음.

15) Byz p75 it vg 등이 그러함. 또 KJV, RV, RSV, NEB 등도 그러함.

16) Byz A D syrp 등에 있음.

17) 4:35의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라는 말씀은 그때가 겨울임을 나타내며, 그것은 봄인 유월절 이후 8개월 이상의 시간이 경과하였음을 나타낸다.

18) 대략 서울에서 수원까지의 거리임.

19) 이레니우스, 루터, 헹스텐버그, 매튜 풀, 재미슨-포셋-브라운 등. 그러나 크리소스톰, 칼빈 등은 오순절로 보며, 랑게 등은 부림절로 본다.

20) 에피 테 프로바티케라는 말은 ‘양의 [무엇](생략된 말) 곁에’라는 뜻으로, 테 프로바티케라는 여성 관사와 형용사 어미가, 생략된 명사의 성을 나타낸다. 그 명사는 아고라(ajgorav) 즉 ‘시장’(market)(KJV), 혹은 퓔레(puvlh)나 뒤라(quvra) 즉 ‘문’(gate)(한글개역, NASB, NIV)이라고 추측된다. 이 단어들은 다 여성명사들이다. 

21) 3-4절의 괄호 안의 구절은 Byz (A) ita b e ff2 vgcl syrp copbo-pt 터툴리안 등에 있다. 그것은 확실히 신약성경 원본의 본문이다.

22) Byz A ite syrp copbo-pt 등. 18절에,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라는 표현을 보면, 본절의 전통본문이 더 타당하고 자연스럽다.

23) ‘진실로’라는 원어(아멘 ajmhvn)는 요한복음에 51번 나오고, 신약성경 전체에 152번 나온다.

24) ‘들을’이라는 전통사본 원문(아쿠손타이)(미래 중간태)은 ‘자신들을 위해 듣는다’는 뜻이다.

25) Byz א* D(*) ita e syr (syrc) copsa 등에 있음.

26) Byz א A D W 등.

27) Byz A syrp c 등.

28) Byz A ita b d e ff2 vg syrp copsa pbo bo 등.

29) Byz syrp copbo 등.

30) Byz p66* (א*) ita b d e ff2 vg syrp s c Diatessaron 등이 그러함.

31) Byz (ita e) itff2 (vg) syrp (syrs) copbo-mss Diatessaron Cyprian 등.

32) 많은 헬라어 사본과 고대 역본들이 이 부분을 생략하고 있지만, Byz D itd e ff2 vg copbo-mss fay 등에 있다. 문맥적으로 보아도, 이 부분이 없으면, 본문은 화난 공회원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부터 예수께서 성전뜰 연보궤 앞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는 장면으로 매우 부자연스럽게 이어진다.

33) Byz p39 66 75 B T W ita b e ff2 vg syrp copsa pbo bo ach2 arm geo Origen 터툴리안 등에 있음.

34) Byz lat syr copsa bo 등에 있음.

35) Byz syr(p) (copbo-pt) 등에 있음.

36) Byz D ita b d e ff2 vg syrp s 터툴리안 등이 그러함.

37) 대다수의 교부들, 종교개혁자들, Matthew Poole, J. C. Ryle 등.

38) Byz A C vgms (syrp) copbo 등이 그러함.

39) Byz A C ita b e ff2 vg syrp s copach2 arm Diatessaron 등이 그러함.

40) Byz ita b e ff2 vg syrp copbo arm goth 터툴리안 Origenmss 등.

41) Byz p66* A D ita b d e ff2 syrp s coppbo 등에 있음.

42) ‘수전절’이라고 번역한 헬라어(엥카이니아 ejgkaivnia)는 히브리어 카누카에 해당하는 말로서 봉헌(奉獻, dedication)이라는 뜻이다.

43) Byz א A vg syrp 등이 그러함.

44) 원문에는 15스타디아라고 되어 있다. 1스타디온은 약 184.2미터이다.

45) Byz p66 A D itd ff2 vg syrs copbo ach arm geo 등에 있음.

46) ‘근’이라는 원어(리트라 livtra)는 약 340g이다(ISBE, IV, p. 1055).

47) 요한복음 2:13과 6:4에 두 번의 유월절이 언급되어 있고 요한복음 5:1의 절기도 유월절이든지 혹은 다른 유월절 후의 어떤 절기일 것이다.

48) Byz A D (Q) latt copbo 등에 있음.

49) Byz A itq (ff2) syrp s copsa 등이 그러함.

50) Byz p66 א A D W ita b d ff2 vg syrp s copbo-pt Origen Tertullian 등.

51) Byz p66 A W copbo 등이 그러함.

52) F. Godet, 박윤선 등.

53) 매튜 풀, 매튜 헨리, 재미슨-포셋-브라운 주석, J. C. 라일 등.

54) Byz p66* A D itb d e ff2 vg syrp s copsa-mss ach2 arm 등이 그러함.

55) Byz A D W ita b d e ff2 vg Origenlat 등이 그러함.

56) Byz p66 A D W vg 등이 그러함.

57) Byz A vg syrp (s) cop(pbo) (arm) 등에 있음.

58) 크리소스톰, 매튜 풀, 헹스텐버그, 알버트 반즈, 레온 모리스 등.

59) Byz A D ita b vg syrp s copsa bo ach2 arm Diatessaronarm Origen 등.

60) 본장 6, 9, 24절에와 요한복음 6:39; 18:9에 나온다.

61) Byz A D ita b (d) e ff2 vg syrp Origenlat 등이 그러함.

62) Byz A lat syr 등.

63) Byz A syrp s arm (eth) geo 등이 그러함.

64) Byz lat 등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