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공동서신 · 계시록 강해-1

요한계시록 1-3장 /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6. 13:01

요한계시록 차례

요한계시록 1장 (1 - 13)

강해 1 : 요한이 받은 계시(계1:1-3)

강해 2 : 요한계시록의 해석방향(계1:1-3)

강해 3 : 요한계시록의 주제, 목적, 경종(계1:1-3)

강해 4 : 읽고 듣고 지키는 자의 복(계1:1-3)

강해 5 : 때가 가까움이라(계1:1-3)

강해 6 : 신상으로 보여주신 종말의 시기(계1:1-3)

강해 7 : 70 이레로 보여주신 마지막 때(계1:1-3)

강해 8 : 충성된 증인(계1:4-6)

강해 9 :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신 일(계1:4-6)

강해 10 : 주 재림의 선언(계1:7-8)

강해 11 : 주의 날과 참 안식(계1:9-11)

강해 12 : 요한의 참 형제(계1:9-11)

강해 13 : 주님의 영광(계1:12-20)


요한계시록 2장 (14 - 17)

강해 14 : 처음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계2:1-7)

강해 15 :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받은 서머나 교회(계2:8-11)

강해 16 : 니골라당의 교훈을 좇은 버가모 교회(계2:12-17)

강해 17 : 이세벨을 용납한 두아디라 교회(계2:18-29)


요한계시록 3장 (18 - 20)

강해 18 : 실상은 죽은 사데 교회(계3:1-6)

강해 19 : 인내의 말씀을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계3:7-13)

강해 20 : 차지도 덥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계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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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장 (1 - 13)

◆ 밤중소리 11-06 | VIEW : 3,180

강해 1 : 요한이 받은 계시(계1:1-3)

강해 2 : 요한계시록의 해석방향(계1:1-3)

강해 3 : 요한계시록의 주제, 목적, 경종(계1:1-3)

강해 4 : 읽고 듣고 지키는 자의 복(계1:1-3)

강해 5 : 때가 가까움이라(계1:1-3)

강해 6 : 신상으로 보여주신 종말의 시기(계1:1-3)

강해 7 : 70 이레로 보여주신 마지막 때(계1:1-3)

강해 8 : 충성된 증인(계1:4-6)

강해 9 :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신 일(계1:4-6)

강해 10 : 주 재림의 선언(계1:7-8)

강해 11 : 주의 날과 참 안식(계1:9-11)

강해 12 : 요한의 참 형제(계1:9-11)

강해 13 : 주님의 영광(계1:12-20)


강해 1 : 요한이 받은 계시

(계1:1-3)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긴급하고도 긴요한 메시지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종이 이 메시지를 등한히 하게 되면 ‘악한 종’이란 책망을 듣게 되며 주님은 이들에 대하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란 말씀으로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마24:48-51). 반면에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양 무리들로 주 재림을 소망으로 예비하는 생활을 하게 하면 주님은 그런 종들에게 ‘그 모든 소유를 맡기리라’는 말씀으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24:44-47).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을 두 가지로 간추려 말한다면 ‘인류의 구원과 심판’입니다. 이 세상에 구세주(메시아)를 보내시어 하나님의 택정 받은 백성들에 대한 구원을 이루시고, 끝까지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불신자들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을 내리십니다. 이 두 가지 하나님의 섭리가 성경전체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1. 요한계시록의 주요 계시

요한계시록은 바로 이 마지막 부분인 주의 재림과 인류심판에 관한 전반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하나님의 종말적 계시입니다. 이 계시가 빠지면 하나님은 인류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실 수 없으며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은 공허에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는 그의 신부들입니다. 그가 오시면 이 지상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데 이를 ‘어린양의 혼인 잔치’라고 말하며 이 혼인 잔치는 곧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릴 천년왕국에서의 성도들의 복된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그의 재림에 우리의 삶의 표적을 맞춰 신부의 단장을 해야 합니다. 이 같은 복된 신부로서의 단장을 위하여 계시해 주신 성경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며 그래서 3절에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기도하는 중에 받은 종말의 계시입니다. 계시란 말은 ‘아포칼룹시스’(Αποκἀλυϕις)란 헬라어의 번역으로 베일같이 가려진 것이 벗겨진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숨겨진 어떤 비밀한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그 비밀한 내용이 공개되어 그것을 드러낸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은 창세기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숨겨져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한 섭리를 우리에게 모두 계시(밝혀 주셨다)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로부터 주의 재림으로 오는 인류의 심판과 천국에 이르는 모든 비밀이 하나님의 계시(성경)로 완전히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는 계시를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계시를 공부하며 연구하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 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받은 종말의 계시를 아시아 지역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로 보내졌던 내용들입니다. 본서의 이름이 요한계시록인 것은 요한이 이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옛날 번역 성경에는 ‘묵시록’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성경대로 표현한다면 본문 서두에 있는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인 것입니다.


2. 사도 요한이 받은 종말계시

요한은 이 계시를 밧모섬에서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계시를 받을 당시의 자신의 형편에 대하여 9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말년 주후95년경에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로 인하여 밧모란 섬에 유배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섬은 ‘팥모스’란 이름의 섬으로 밀레도에서 남서쪽으로 약 65키로 미터 지점에 위치한 소아시아 해안의 작은 섬입니다. 요한이 유배될 당시에는 로마제국의 유배지로 사용해 오다가 1947년 이후로는 지금 그리스의 소유 영토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이 계시를 이곳에서 주의 날에 받았다고 했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계시록이 기록된 연대에 대하여 주후 97년이나 98년경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인봉된 책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치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22:10). 주님은 ‘때가 가깝다’고 하셨습니다. 주의 재림의 시기는 언제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점으로 알고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요한계시록에는 종말적인 시대적 징조에 대해 자세히 계시해 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서 이 모든 문제에 대하여 성경적인 해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분명히 밝혀 주신 하나님의 계시에 어두운 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미 개봉된 요한계시록을 다시 인봉하여 성도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의 반열에 서서 주의 재림에 소망을 가지고 그 날을 위해 준비하는 주님의 신부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해 2 : 요한계시록의 해석방향

(계1:1-3)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는 일에 우리가 제일 먼저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은 그 해석이 다양하기로 정평 있는 성경이라는 사실입니다. 해석이 다양하다는 말은 해석의 방향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주석을 찾아보거나 강해 집을 읽어볼 때 같은 계시로 나온 성경 구절을 가지고 그처럼 다양하고 제각기 특색 있는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니 과연 어떤 주석을 취하며 어떤 강해를 참고로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 요한계시록 해석의 세 가지 방향

요한계시록은 신학적으로 그 해석의 방향을 세 가지로 잡고 있습니다. 하나가 ‘영적 해석방법’이고 다음에 ‘과거적 해석방법’이며 세 번째로 ‘역사적 해석방법’이 그것입니다.

영적해석방법靈的解釋方法이란 요한계시록에 계시된 내용을 실제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견지에서 보는 해석입니다. 다음에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종말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이미 성취된 사건으로 단정해 버리는 신학적 견해가 있는데 이런 해석방법을 과거적 해석過去的解釋이라고 말합니다. 이 같은 해석에서 과거란 로마의 역대 황제들에 의하여 기독교가 핍박을 가장 심하게 받았든 1세기경을 전후한 시대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역사적 해석방법歷史的解釋方法이 있습니다. 역사적 해석방법이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모든 계시를 인류의 역사적 무대 위에서 성취 될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하는 견해를 말합니다.


2. 종말론에 대두되는 천년설

그런데 실상인즉 종말론 해석에 있어서 제각기 차이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원인은 신학자들에 의하여 이미 오래 전에 정립된 천년기설千年期說에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종말론을 연구하는 일에나 강해하는 일에는 누구든 어느 것이건 한 가지 천년기설만을 취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 두어야 할 일은 어떤 천년기설을 취하느냐에 따라 종말론 해석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1) 후천년설 ··· 후천년설後千年說은 천년왕국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신학적 견해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이전에 이 땅위에 천년왕국이 존재하게 되고 그 이후에 재림이 있다고 하는 신학적 학설입니다.

(2) 무천년설 ··· 무천년설無千年說은 문자 그대로 천년왕국이 없다고 주장하는 설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예수님의 초림 시부터 재림 때까지의 교회시대를 천년왕국으로 해석하며 지금 교회시대가 천년왕국 시대를 이루고 있다는 설로 이런 주장은 천년에 대한 상징적 해석에 근거한 것입니다. 근래에는 많은 신학자들이 이 견해를 선호하고 있으며 이 무천년설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설을 취하게 될 때 풀리지 않는 문제점들이 너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것이 이 설입니다. 대개의 경우,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천년설에 맞지 않는 성경 구절이 나오면 그것을 자신들의 무천년설에 합치하도록 상징적인 해석으로 뜯어고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3) 전천년설 ··· 다음에 전천년설前千年說이 있습니다. 이 전천년설은 천년왕국 이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신학설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세상을 심판하신 후 이 세상에 새로운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워지는데 그 왕국이 천년왕국이라고 해석하는 천년기설입니다. 이 전천년설은 성경에 계시된 모든 종말적인 사건과 일치되는 학설로 보수 진영의 교단 중 대부분 이 전 천년설을 종말론의 신학적 견해로 취하고 있으며 이 서리은 가장 오랜 신학적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천년설도 여러 가지 상충된 견해로 갈라지는 나머지 많은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특이한 전천년설로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이 소위 ‘세대주의 전천년설’世代主義 前千年說입니다. 이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다른 전천년설과 비교할 때 성경해석에 너무나도 현격한 차이를 두고 있기 때문에 보통 전천년설이라고 부르지 않고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이 같은 다양한 천년설로 인하여 종말론은 여러 갈래로 찢기고 갈라진 상태에서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에다 요한계시록 안에는 신학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난제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잘못된 함정에 빠져들기 쉬운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 신학에 얽매이다 보면 그 신학의 범위 안에서 해석해야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어 문제의 올바른 성경적인 해답을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는 하나의 대 드라마의 연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해석할 수 없는 계시를 주시지 않습니다. 계시라고 하는 문구자체가 비밀한 것의 그 너울을 벗겨 보여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참으로 이 계시를 하나님의 뜻대로 알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까이하고 연구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계시하신 그 뜻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들 앞에 바로 가까이 왔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신랑을 기다리는 일에 우물쭈물해서는 안 될 시기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랑으로 오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의 주인공이 되어 주 재림의 날에 그를 신랑으로 맞이 할 수 있는 신부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해 3 : 요한계시록의 주제, 목적, 경종

(계1:1-3)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의 주제主題가 무엇이냐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모든 문장에 있어서 대개의 경우, 그 문장의 주제만 밝혀지면 문장의 흐름이나 문장의 해석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주제란 그 문장을 작성하게 된 동기와 목적을 말합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자세히 살펴 볼 때 요한계시록에는 계시된 그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을 요한계시록의 주제, 요한계시록의 목적, 요한계시록의 경종 등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요한계시록의 주제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무엇이냐? 주제主題란 요한계시록 전체 내용을 수용하는 일종의 표어標語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그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다양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초두에 있는 ‘때가 가깝다’는 말씀에서 요한계시록의 주제를 찾아야 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하신 이 말씀은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주의 재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계시록 1장의 내용 전체가 주의 재림과 결부되어 있으며 계시록 전체의 흐름이 그렇게 진행되어 나가고 있다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계1:7절은 요한계시록 전체의 요절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요한계시록이 주의 재림을 증거하는 계시임이 명백한 것은 계22:20절 말씀으로도 알 수 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들을 증언했다는 ‘이것들’이란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 증거한 주의 재림에 관한 계시를 말합니다. 그것을 증언하신 이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속히 오리라 하신 메시지로 주신 증언의 계시가 요한계시록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주제를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주의 재림’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이 증언하신 메시지는 주의 재림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된 메시지는 이 한 가지 사실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연구하고 설교할 때 이 울타리를 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요한계시록의 목적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이 계시의 말씀을 주신 목적을 정확히 파악할 수만 있다면 건전한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건전한 해석이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있는 신부의 자격을 갖추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에게 요한계시록을 주신 것입니까? 이 책을 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은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주 재림에 대한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하며, 그런 그리스도인들에게 신부의 옷을 입혀 주시기 위해 주신 신랑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목적을 말한다면 요한계시록은 성도들로 신부의 단장을 시키는 주님의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듣고 지키는 생활을 통해서 ‘신부의 단장’을 하라는 메시지가 그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목적인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들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신부로서의 단장을 시키시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신랑이 그의 신부가 될 아내를 준비시키기 위해 그의 교회들에게 주신 계시가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읽고 듣고 지키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3. 요한계시록의 경종

요한계시록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엄중한 경종이 있습니다. 그 경종이란 무엇입니까? 인류의 종말에 이 세상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대적하는 무서운 ‘짐승’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짐승이 나타나면 이 자는 모든 인류의 ‘오른 손이나 이마’에 그의 표를 받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 표를 ‘짐승의 표’라고 하며 일명 ‘6 6 6 표’라고도 불려집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누구든지 이 표를 받으면 멸망을 받는다는 사실을 엄중히 경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계14:9-11절까지의 말씀을 펴시기 바랍니다.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결론 : 여러분, 인류의 종말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는 일에 가장 큰 장애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짐승’으로 등장하는 적그리스도입니다. 이 자가 종말에 나타나 큰일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구원받지 못한 모든 인류들에게 짐승의 표를 찍어 주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교회에 많은 환난과 핍박을 주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요한계시록을 잘 배워 지혜로 진리로 성령의 권능으로 이 짐승을 이기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해 4 : 읽고 듣고 지키는 자의 복

(계1:1-3)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이 책의 내용을 잘 연구하여 이 귀한 메시지를 주님의 양 무리들에게 잘 먹여야 합니다. 성도들이 이 예언의 말씀을 먹지 못하면 복을 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필수적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일과 듣는 일과 지키는 일에는 시대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이 계시를 받은 그 이후부터 ‘때가 가깝다’고 하신 주의 재림이 있는 그 날까지 그 기간이 아무리 길어도 주님이 주신 이 말씀은 유효한 것입니다. 주의 재림을 소망하는 성도들이라면 어느 시대에 살아가든 이 예언의 말씀에 기록된 복을 받을 수 있는 대상자가 되는 것입니다.


1.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의 복

이 예언의 말씀에 대한 복에 대하여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로 구분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읽는 자’라고 말씀해 준 대상은 사도 요한이 이 예언을 계시로 받아 서신으로 기록하여 보낸 소아시아 지역의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가리킵니다.

원래 요한계시록은 주의 종들에게 주신 계시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주의 종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주의 종들은 이 계시의 말씀을 양 무리들에게 읽어 주어야 합니다. 읽어 준다는 말은 알기 쉽게 풀이해서 모든 성도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전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도 있습니다. 혹 잘못 해석하면 빠져 나올 수 없는 사탄의 함정에 걸릴 염려도 있습니다. 이 계시를 해석하는 일이나 전하는 일에 얼마나 주의 깊고 세심해야 하느냐에 대하여 계22:18-19절에서 이처럼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이 예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의 복

다음에 복을 받을 두 번째 대상으로 듣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주의 종들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주의 종들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양 무리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들음이 없이는 영적소득이 없습니다. 믿음도 영생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5:24).

하나님의 말씀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에게 들어야 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고 하셨습니다(마24:45-47).

3.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

세 번째 복을 받을 대상자로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지키는 자란 읽는 자와 듣는 자들이 모두 포함된 말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주의 종이 전하는 일만 하고 지키는 일을 못한다면 거짓 선지자가 될 것입니다(마23:3). 듣는 성도들 역시 듣기만 하고 지키지 못하면 미련한 처녀로 종말에 연단의 도가니인 대 환난 가운데 들어가게 될 것이다.

‘듣기만 하고 행함이 없으면 스스로 속이는 자’라고 했습니다(약1:22). 예수님은 듣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자들의 결국에 대하여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다’고 하셨습니다(마7:26-27).

그러면 여기서 복이 있다고 하신 복이란 어떤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재림하시는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복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의 복 가운데 이 복이야말로 다른 복에 비교할 바 아닙니다. 재림의 주님을 영접할 복을 가진 성도는 ‘시험의 때’를 면케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계3:10). 다음에 공중으로 휴거 되어 마지막 심판에서 건짐을 받습니다(습1:2-3,계16:17-21). 그리고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결론 : 요한계시록에 수록된 종말의 계시는 우리가 반드시 읽고 듣고 지켜야 할 종말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지침입니다. 지금은 주 재림이 매우 가까운 시점에 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믿고 이 축복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강해 5 : 때가 가까움이라

(계1:1-3)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의 계시는 그 성취될 때가 가깝다는 사실을 요한계시록 전문에 걸쳐서 매우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나오는 말씀에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22:6절에서는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이라고 말씀하셨으며 22:10절에서는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계시를 마감하는 22:20절에서는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모든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때가 가깝다’는 말씀은 주의 재림의 시기를 의미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1. ‘때’란 주 재림의 시기를 말한다.

예수님은 그가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일에 대하여 반드시 오실 것을 여러 번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날을 주 재림의 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때가 가깝다’고 하신 말씀은 주의 재림의 시기가 가깝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이 그 날을 알 수 없다고 하여 주의 재림의 날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 오실 지 그 시일에 대해서 숨겨져 있을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그 날에 있을 일들에 대하여 계시해 주신 책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교회의 역사와는 상관없이 특정한 한 시대, 한 사건에 대한 제한적인 계시로 주신 책입니다. 전 교회시대의 구원의 사역을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주의 재림과 그 시기에 있을 종말에 관한 계시로 주신 책입니다.

(2) ‘때가 가깝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때가 가깝다고 하신 말씀의 진의眞意를 이해하지 못하면 요한계시록 해석에 혼선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가깝다’고 하신 말씀은 요한이 이 계시를 받은 그 시대를 배경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벌써 재림하셨어야 했습니다. ‘가깝다’는 말씀은 이 계시를 받은 후로부터 재림이 실현될 시기에 이르기까지 어느 시기에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주의 재림의 시기는 가까운 때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기에도 가까운 때가 되는 것이 주의 재림의 날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주의 재림의 시기를 전혀 알 수 없는데도 요한계시록의 계시자이신 예수님은 그 시기가 매우 가깝다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들에게 계속적으로 때가 임박했음을 거듭거듭 강조하면서 모든 성도들은 그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친히 재림하실 당사자가 되시는 예수님조차도 그의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는 전혀 말씀해 주신 일이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은 그 날에 대하여 아들도 모른다고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2. 때가 가깝다고 하신 이유

그러면 왜 모든 시대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때’가 가깝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 예수님께서는 주 재림 때까지의 모든 성도들의 생활이 주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시대는 주 재림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신약시대에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은 주의 재림을 소망하고 신부의 자격을 갖추는 생활에 삶의 표적을 두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등장하는 열 처녀들은 미련하건 슬기롭건 모두 신랑을 끝까지 기다려야 할 신부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랑이 더디 오게 되자 졸며 잤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졸며 잤다고 하는 태도는 그들이 맞이해야 할 신랑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세속적인 생활에 깊숙이 빠져 있는 성도의 신앙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그 신앙생활의 표적을 맞춰야 하는 것입니까?

(1) 첫째로 주의 재림에 우리의 모든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성결한 생활과 열매 맺는 생활을 해야 하는데 이런 생활은 주의 재림에 소망을 두는 생활에서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그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믿음을 가지고 그의 생애를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성도들은 항상 깨어 기도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면서 주의 재림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세상일에 전념하며 분주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 가운데도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하면서 양 무리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생활을 즐겨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 대하여 악한 종이라고 정죄하셨습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인류의 종말,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에 있을 모든 사건들을 계시해 주신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주의 재림을 우리의 신앙생활의 최대의 소망으로 삼는다면 마땅히 이 책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계시해 주신 책입니다. 이상하게 여겨도 안 되고 읽고 듣고 지키는 일에 등한해도 안 됩니다. 복이 있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왜 멀리 하는 것입니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한 말씀을 왜 덮어두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주의 재림에 대하여 두려워하거나 쉬 동심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두려움과 동요를 물리치고 정결한 처녀로써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주신 주님의 정다운 사랑의 메시지임을 알고 주 재림의 소망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활을 지배하여 놀라운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강해 6 : 신상으로 보여주신 종말의 시기

(계1:1-3)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주의 재림에 대한 여러 가지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가운데 다니엘서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신 적이 있습니다. 15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인류의 종말에 관한 계시를 주신 일과 그 계시 중에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는 인류 종말의 징조적 시기가 반드시 찾아온다고 하는 사실을 밝혀 주신 내용입니다.


1. 다니엘서에 계시된 인류의 종말 시기

다니엘서는 이스라엘 민족인 유대인들에게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의 계시로 주신 성경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의 내용을 바벨론의 박사, 술객, 점쟁이들에게 맞추도록 명했습니다. 그러나 왕의 꿈의 내용을 알아맞힐 도리가 없었던 이들은 결국 왕의 명에 의해 다 죽게 되었을 때 기도하는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 왕이 꾼 꿈의 내용을 보여 주시고 다니엘로 왕에게 해석해 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 앞에 서서 왕이 꾼 꿈의 은밀한 내용을 말하게 된 것이다.

그 내용이 단2:31-35절에 이처럼 나와 있습니다.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서 본 두렵고 놀라운 신상에 대한 해석을 정확히 밝혀 준 것입니다. 인류의 종말에 관한 계시가 다니엘서에는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서 본 신상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다니엘서는 이처럼 2장에서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서 보았다는 신상의 내용을 해석해 주는 내용으로 종말적인 계시가 진행되어 나가기 때문에 이 신상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야말로 다니엘서를 이해하고 종말의 시기를 깨닫는 일에 중요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2. 다섯 번째 나라의 정체

다니엘은 왕이 꿈에서 본 신상을 정확히 알려 주는 가운데 36절부터 그 꿈의 내용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나라는 금머리로 이 금머리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36-38절). 바벨론의 흥왕시대는 주전 606년-538년간입니다.

두 번째 등장하는 나라는 39절에서 왕의 후에 왕만 못한 나라가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나라는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지배하게 된 메데바사를 가리킵니다. 이 나라는 주전 538-330년간 기간까지 존속했습니다.

세 번째 등장하는 나라는 39절에서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놋이란 나라는 메데바사 다음에 등장한 나라로 헬라를 가리킵니다.

다음 네 번째로 등장하는 나라는 ‘철 종아리’라고 했습니다. 이 철종아리는 헬라 다음에 일어나 온 유럽을 지배하고 이스라엘을 다스릴 로마를 의미합니다. 이 로마는 주후337년경에 동서로 분할된 후, 동 서 로마로 나뉘어졌으며 서 로마는 476년에 독일에 의해, 동 로마는 1453년에 터키에 의해 종말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인류 역사의 마지막 제국인 다섯 번째 나라로 넘어가게 됩니다. 다니엘은 이 나라에 대하여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으로 된 발’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이 나라에 대하여 설명할 때, 이 나라를 한 개의 제국으로 가리킨 것이 아니라 여러 인종들이 합친 연합국가 형태를 이룬 여러 나라들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 나라가 이 세상에 마지막 제국인데 이 제국이 재림하시는 메시아에 의하여 부서지고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한 나라가 세워지는데 이 하나님의 나라가 적그리스도의 제국을 무너뜨린 후 세워지는 메시아왕국으로 천년왕국인 것입니다. 이 나라가 다니엘서에서 결론적으로 계시해 주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유대인들은 옛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를 소망하고 이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대하여 단2:44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우리는 다섯 번째 등장하는 발 시대가 언제 우리 앞에 올 것인가에 대한 그 시기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나라들은 장차 이스라엘에게 결정적인 환난의 때를 가져다 줄 나라들로 유럽지역을 무대로 강력한 세계적 열강을 이룰 것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이 나라가 등장할 시대에는 세계가 ‘네 바람 시대’를 이루는 열강 시대를 형성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결론 : 우리는 무엇보다도 1948년에 성취된 이스라엘의 회복이야말로 그 어떤 징조보다도 인류의 종말이 가까이 왔다고 하는 성경적 증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곧 오십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 날을 예비하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적같이 맞이할 것이라고 경종하셨습니다. 그 날을 바라보고 그 날에 소망을 두며 그 날을 준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강해 7 : 70 이레로 보여주신 마지막 때

(계1:1-3)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다니엘서는 요한계시록과 함께 인류의 종말을 연구하는 일에 결코 등한히 하면 안 되는 성경입니다. 그 이유는 다니엘서는 인류의 종말에 유대인들에게 있을 종말의 시기와 그 때 이뤄질 메시아왕국에 대한 예언을 계시해 주신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1. ‘70 이레’의 종말론적 의미

그러면 여기서 오늘 말씀의 주제가 되는 단9:24-27절까지의 말씀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24절부터 27절까지로 나와 있습니다. 해석하는 일에 편의상 각 절별로 네 구분으로 나누어 해석하도록 하겠습니다.

2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 말씀은 이 계시가 바로 다니엘의 백성인 유대인들과 다니엘의 고향이며 유대인들의 고국인 예루살렘 곧 이스라엘을 위한 종말적 계시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음에 ‘70 이레로 기한을 정했다’고 하셨습니다. 이 기한은 유대인들이 원하는 그들의 구원과 메시아왕국이 성취될 시기를 밝혀 주신 예언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70 이레가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구원의 시기가 있습니다. 그 때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되므로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의 시기에 이르면 유대인들은 죄악이 용서 됩니다. 죄사함의 은혜를 받고 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그들의 허물이 그치게 됩니다. 죄도 끝납니다. 이 말씀은 메시아왕국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그 나라에서는 허물이 그치게 되며 죄도 끝나는 생활을 하게 됨으로 원죄 속에 숨겨있는 죄성이 억제되어 의로운 생애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나라에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가 드러나 의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신 하나님의 환상과 예언이 이 때 모두 이루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들은 유대인들이 성취될 메시아왕국에서 누릴 복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천년왕국에서 성도들과 함께 누릴 축복의 생애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이란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그 분이 천년왕국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 그의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25절부터 27절까지는 70 이레가 이루어지기까지의 경로와 그 간에 일어날 징조에 대하여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2. ‘70 이레’의 출발점

2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70 이레의 출발점이 나오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7장의 계시를 주전 537년경에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맞을 메시아왕국이 70 이레에 이를 때에 성취된다는 계시를 보여 주시면서 그 70 이레의 역사적 출발점을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를 기준으로 삼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어느 시기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까? 느1:3절 말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2: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여기서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라고 느헤미야가 왕에게 아뢰게 되는데 이 시기가 아닥사스다 왕 20년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건축이란 말은 중건이란 말과 같은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이 해는 주전으로 기산 하면 445년경을 가리킵니다. 다니엘이 이 계시를 받기 100년이 조금 안 된 시점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보시겠습니다. 이 같은 중건령이 날 때로부터 7 이레와 62 이레가 지나서 69 이레가 되면 그 때 기름부음 받은 자가 일어나며 또 그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69 이레는 483년을 의미합니다. 이 기간은 예수님의 초림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주전 445년부터 시작해서 483년이 지나면 기름부음 받는 자이신 예수님이 일어나며 곧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끊어져 없어진다는 말은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신 사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26절에 나오는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온다’는 예언 때문에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이 70년대에 역사적으로 있었던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침공 당한 그 사건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장차’라고 하는 역사적 긴 기간이 지난 후, 인류의 종말에 한 왕이라고 표현한 적그리스도에 의해 실제로 예루살렘이 점령당하고 유대인들이 종교적 핍박과 환난을 당할 일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란 기간이 왜 오랜 역사의 흐름이 필요로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은 장차란 미래의 날이 인류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한 이레의 끝에는 메시아의 재림이 있어야 하며 예수님의 재림은 바로 종말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한 이레’의 출발점

2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과 더불어 한 이레의 언약을 굳게 맺고’라고 했습니다. 이 한 왕이란 존재는 적그리스도이며 이 적그리스도에 의해 중동에서 발생하는 전쟁으로 세계평화의 위협을 받을 때 세계평화를 위한 7년간의 평화조약을 이룰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평화조약이 적그리스도가 주도적으로 성사시키는 한 이레의 언약입니다. 이 한 이레의 언약이 인류의 종말 기간이며 우리는 이 한 이레의 기간을 7년 환난 기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이레의 언약이 있은 후, 7년이 지나면 이스라엘이 고대하는 메시아가 나타나 그들을 구원해 줄 것이며 메시아왕국이 세워질 것이라고 하는 계시가 단9장에서 말씀해 주는 69이레와 한 이레를 다룬 칠십 이레의 계시입니다. 이처럼 다니엘서에서 계시해 주신 한 이레의 사건이 신약시대에 와서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이 세상이 맞이할 종말사건의 모습으로 낱낱이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대는 어느 모로 보든지 인류의 최 종말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 가지 성경의 예언과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징조를 통해서 분명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눅21:28절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지금 이런 일들이 우리들 앞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일어나 머리를 들고 주의 재림에 크나큰 소망을 두고 그 날을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강해 8 : 충성된 증인

(계1:4-6)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요한은 이 편지의 서두에서 일곱 교회의 사자들에게 성삼위 이름으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축도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축도에서 요한은 성삼위를 표현함에 있어서 제각기 특색 있는 모습으로 나타냄으로 성삼위의 각기 인격의 독립성과 그 특이성을 보여 주고 있는데 특히 이 계시를 주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충성된 증인’이란 말로 그가 이루신 사역에 대해서 언급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내는 축도

요한은 편지 서두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곱 교회의 사자들에게 축도를 보내면서 성부 하나님께 대해서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했으며, 성령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 보좌 앞에 일곱 영”이라고 했으며, 성자 하나님께 대해서는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① 성부 하나님께 대해서 “이제도 계시고”라고 하신 말씀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만물을 주관하시는 만물의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낸 말입니다. “전에도 계시고”란 역시, 같은 뜻으로 해석되는데 이 전 에란 시한은 무한한 시간으로 인간이 계산할 수 없는 영원한 태초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② 다음에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 보좌 앞에 일곱 영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일곱이란 수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안식의 숫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곱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곧 성령을 의미하며 이 성령은 성경에서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하나님과 선재성과 거룩하심에 있어서 동일하신 분이시며 또한 창조주이심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③ 다음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충성된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서신으로 쓰면서 예수님을 충성된 증인이라고 부른 것은 주님이 이 땅위에서 이루신 그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① 예수님이 충성된 증인이란 칭호를 듣게 되신 일은 그가 자신을 한없이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하늘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만물의 창조주께서 그가 만드신 피조물 중에서도 하나님을 대적한 불순종의 죄인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② 예수님에게 충성된 종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그가 온전히 아버지의 뜻만을 따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살아가시는 생애 중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을 그의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원대로 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는 생활을 그의 삶의 지표로 삼으셨습니다(요5:30). 증인이란 보내신 분의 뜻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따라 행동해도 안 되거니와 자신의 생각에 의해 움직여도 안 되는 것입니다.


3. 충성된 증인이 되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생애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요20:21절에서 이 일에 대하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보내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들이기 때문에 그 분의 인정을 받으려면 충성된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① 우리는 증인의 사명을 가진 사람들로 과연 누구의 증인인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증인으로 오셨습니다. 그 증인된 사명을 잘 수행하시어 충성된 증인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을 통해서 아버지의 증인으로서의 사역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내 증인이 되라’고 명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1:8).

③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갖추어야 할 조건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 일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증인들이 받을 영광의 고난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마5:11-12).


결론 : 요한이 이 계시를 받아 편지로 써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낸 것은 오늘 이 시간 우리 교회에 보낸 편지로 지금 이 편지를 일곱 교회의 사자 격인 제가 여러분에게 읽어 드리고 있으며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충성된 증인으로 그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시어 하늘의 가장 높으신 자리에 오르신 것처럼, 우리들도 주님의 신실한 종, 충성된 증인이 되어 주님이 오시는 날, 그를 맞이하며 그의 그 놀라운 영광의 자리에 함께 앉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강해 9 :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신 일

(계1:4-6)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사도 요한은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종말적인 계시를 본격적으로 보여 주기 전, 성삼위의 이름으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원하고는 곧 이어 이 계시를 주신 예수님에게 영광과 능력을 찬미하는 송영을 보내고 있습니다.


1.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예수님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 대하여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사역은 그의 피로 우리를 우리 죄에서 해방시키는 일이셨습니다. 이 일은 인간이 죄를 범하여 죄의 굴레에서 종노릇하기 시작한 시초부터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창3:15절에서 하나님은 뱀에게 선언하신 말씀,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신 것은 인류에게 사탄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과 인류의 구원을 위한 메시아에 대한 최초의 약속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죄로 멸망을 선언 받은 모든 인류들에게 그 아들을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게 하시므로 그 피로 속죄의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를 믿음으로 그 혜택을 받게 되는데 하나님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예정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시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우리를 우리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 일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계1:5절 끝에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되지 않으면 풀릴 수 없는 오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나의 죄에서 해방하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버리셨다면 그 사랑이야말로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입니까? 예수님은 요15:13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3) 우리를 해방하신 우리의 죄란 무엇입니까? 요일3:8절에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귀에 속했다는 말은 마귀와 동류로써 그 운명이 마귀와 함께 된다는 뜻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죄인들은 마귀를 위해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를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선언을 내리신 것입니다(마25:41).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들을 마귀가 들어갈 그 무서운 영영한 불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그것도 값진 대가를 치르시고 그 일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아니셨다면 우리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고 하는 송영을 힘 있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로써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2.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예수님

예수님이 그의 피로 우리를 우리 죄에서 해방하신 후, 그것으로 끝마친 것이 아닙니다. 그 후에 이루신 일은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1)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셔서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이 백성들을 그의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성령께서 우리들 속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왕권을 가지고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그가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2) 우리를 거룩한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직분을 말합니다. 누구든 제사장의 직분 자가 아니면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말씀하시는 제사장이란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뤘다’는 말씀과 함께 성소의 휘장이 찢겨졌습니다. 지성소에는 아무라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기의 죄를 위해 송아지의 피로 제물을 삼고 백성들의 죄를 위해 염소의 피로 제물을 삼아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아니면 그 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소의 휘장이 찢겨지므로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새롭고 산길이 열린 것입니다. 지금은 누구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새로운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직분을 가진 사람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결론 : 그리스도의 피는 권세 있고 능력 있는 피입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이 피를 우리를 위해 흘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피로 인하여 우리의 죄에서 해방되었고 하나님 앞에 나라와 제사장의 직분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증거입니다.


강해 10 : 주 재림의 선언

(계1:7-8)

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오늘 본문 7절에 나오는 말씀은 주 재림을 선언하는 첫 번째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요한계시록의 제목은 ‘주의 재림’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주의 재림을 다룬 성경입니다. 다니엘 9장에 나오는 ‘70 이레 사건’ 중, 마지막 ‘한 이레의 사건’을 계시한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해석 범위를 인류의 종말에 있을 한 이레 기간에 국한해야 합니다. 만약 그 범위를 넘으면 요한계시록은 종말론적 해석이 되지 않고 상징적 해석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해석은 이 계시를 주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1.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이 계시를 받은 요한은 주님이 오시는 모습과 그가 오셨을 때 그를 맞이하는 인류들의 모습을 심각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볼지어다’란 말은 ‘그때 볼 수 있을 것이다’란 뜻입니다. 이 땅의 모든 인류들은 주의 재림에 관심이 있건 없건 그가 심판하러 오시는 그 날, 심판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계6:15-16).

(1)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예수님은 이 구름에 대하여 직접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마26:64절에서 그의 재림 시 타고 오실 구름에 대하여 ‘...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7:13절에도 이처럼 나와 있습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예수님의 재림은 심판주의 엄위하신 모습과 하나님의 영광으로 오심으로 그가 곧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살후1:7절 말씀에서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마24:27절에서는 ‘번개가 번쩍임 같이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표현은 모두 주님의 재림 시에 있을 그의 영광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2) 다음에 ‘각인의 눈이 그를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각인의 눈이라고 말한 표현은 모든 인류가 당할 환난과 고통을 의미해 주는 말로 실제로 모든 사람의 눈이 주의 재림을 바라볼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눈으로 직접 재림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육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입니다. 구약 슥12:10절 말씀을 보면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란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장소도 이미 비밀이 아닙니다. 성경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슥14:4절에서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산에 서실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태어나실 곳에 대하여 ‘베들레헴’이라고 예언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미5:2).


2. 애곡할 무리

예수님의 재림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의 재림으로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은 모두 이 애곡하는 무리 중에 들어갈 것입니다.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무리는 누구를 말합니까? 한 마디로 모든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6장에는 이 모든 족속에 대한 해석이 더욱 명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라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계6:15).

이들은 모두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인류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심판의 대상자들에게 적그리스도를 통해서 짐승의 표, 666 표를 받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종말에 적그리스도를 등장시켜 그와 그의 우상에게 경배케 하여 이 짐승의 표를 받게 합니다.

그리고 다른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굉장한 사건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살전 4장에서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이 지구가 일곱째 대접 심판으로 초토화되기 직전 최종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힘입어 하늘로 끌러 올려 그 곳에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영접할 수 있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결론 : 요한은 7절에서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증거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자요 전능한 자라’고 말씀하시므로 주의 재림의 확실성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대는 종말에 관한 예언의 징조가 거의 모두 성취되어 가고 있는 그런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요 깨어 있어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에 우리의 온 정성을 다 기우려 신앙생활에 힘쓰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강해 11 : 주의 날과 참 안식

(계1:9-11)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주의 날’이란 말이 본문에 나옵니다. 이 주의 날이 어떤 날인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주의 이레 중, 한 날을 가리켜 ‘주의 날’이라고 표현한 곳은 성경 전체 중, 본문 한 곳에만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 날이라고만 했을 뿐, 이 날에 관하여 더 구체적인 내용이나 설명이 없습니다. 다만 이 날이 율법에 명시된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 후 다음 날에 해당하는 날이란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날은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부활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가리켜 ‘주의 날’이라고 말했으며 그 날에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주의 날

요한이 10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였더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주의 날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를 드렸던가 아니면 특별한 기도를 드렸던가 여하튼 다른 날과는 어떤 구별 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주의 날에 관한 성경적 증거를 찾아보면 행20:7절에서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주의 날은 바로 안식 후 첫 번째 날로 일요일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떡을 뗐다는 말은 주의 성만찬을 가리키는 것으로 곧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함께 교회의 행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고전16:2절에 나와 있는 말씀에도 ‘매 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율법에 관하여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셨는가에 대하여 그가 하신 말씀을 통해서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마5:17). 예수님은 땅위의 지성소를 하늘로 옮기시므로 율법을 완전케 하셨습니다(히9:23).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들이시므로 양을 잡아 희생을 드리는 구약적 제사를 완전히 이루시어 제사 제도를 폐하셨습니다.


2. 율법과 안식일

안식일은 순전히 율법에 속한 날입니다. 안식에 대한 첫 언급은 창세기 2장에 나옵니다. 이곳에 나오는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여기 나오는 안식은 결코 인간들이 지켜야 할 안식일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날에 대하여 모세가 받은 율법 이전의 시대에서는 이 하나님의 안식을 사람이 지킨 사실이 전혀 없었다는 일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아브라함에게도 이 안식일에 대한 아무런 약속도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유월절의 경우에도 안식일이 전혀 개입된 일이 없습니다.


3. 안식일은 왜 없어져야 하는가?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십계명과 연결시켜 이 안식일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십계명 중 첫째부터 넷째까지는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요, 넷째부터 열 번째까지는 사람들에 관한 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은 도덕적 계명으로 영원히 불변하는 하나님의 계명으로 보지만 제 4계명인 안식일의 계명은 도덕적인 계명인 것이 아니라 한시적인 율법적 계명으로 성도들의 참 안식에 관한 그림자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관하여는 성경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분명히 교훈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는 말씀을 우리는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골2:14-17). 예수님은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고 했습니다.

이제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거역하는 일이며 그림자로 돌아가려는 비 신앙적인 행위로 바울에 의하여 ‘다른 복음’으로 정죄 받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과 함께 장래 일의 그림자로 이미 폐해졌습니다. 그 그림자의 실체가 드러나서 안식일의 의미가 사라졌습니다.


결론 : 사도 요한은 이처럼 주의 날에 하나님께 경배 드리며 기도하는 중에 이 놀라운 계시를 받았습니다. 요한이 주의 날에 이 계시를 받았다는데 큰 의미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계시를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다 이 그리스도의 참 안식에 참여할 수 있다는 언약이 되기 때문입니다.


강해 12 : 요한의 참 형제

(계1:9-11)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요한은 9절에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형제라고 지칭한 대상은 요한의 편지를 읽고 듣고 지킬 모든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왜 요한은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 형제’란 말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까? 원래가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그리스도인들은 그 머리에 붙은 지체들입니다. 그리고 이 머리와 지체가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의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체들은 어떤 위치에 있건 어떤 직분을 가졌건 동일합니다. 그 하나하나가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형제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1. 교회의 지체가 되는 모든 성도들

교회란 말은 사람의 손으로 건축한 어떤 건물을 가리키는 낱말이 아닙니다. 예배하는 장소로 만들어진 건물은 예배처소로 사용될 때에만 성전이라고 불립니다. 교회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이처럼 한 몸을 이루는 몸의 지체는 한결같이 소중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존귀하다면 그 몸을 이루고 있는 각 지체 역시 존귀한 것입니다. 여기서 지체라고 표현한 말은 사람의 몸과 비교해서 설명하는 하나의 비유입니다.

우리의 팔이나 발이 사고로 인해 혹 잘린다 해도 목숨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혀져 눈에 보이지도 않고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뇌의 지극히 작은 혈관이 파열된다면 반신불수가 되거나 뇌출혈로 목숨을 잃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다른 지체보다 더 존귀하고 소중히 여기시어 그것을 보호하시고 그 지체의 직능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귀중하게 다루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지체가 존재하고 있는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사실에 있습니다. 그것은 그 몸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지체는 그 몸의 원활한 활동을 이루기 위해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 지체가 죽으면 그 지체는 그 몸에 이로운 존재가 아니라 해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지체는 그 지체대로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지체의 사명은 빛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빛이라고 하신 말씀은 16절에서 밝혀 주신 말씀대로 그리스도인의 착한 행실을 말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지체의 사명을 이룬다는 말은 의의 병기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롬6:13절에서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체의 사명을 이룬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의 기준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두는 생활을 뜻합니다. 고전10: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요한의 형제들

종말의 계시를 받고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그 내용을 편지로 보내면서 사도 요한은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야 요한의 참 형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다.

요한은 여기서 참 형제의 자격을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자격이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 축복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일입니다. 우리가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땅위에서의 영화보다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누릴 그 축복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의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참는다는 말은 인내를 의미합니다. 히10:36절에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인내가 없는 생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패배적인 생활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결론 : 종말에는 요한의 형제 된 그리스도인들만이 세마포로 단장하여 신부의 자격을 가지고 신랑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저 그럭저럭 믿는 믿음의 생활은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이 되어 요한의 참 형제가 되어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해 13 : 주님의 영광

(계1:12-20)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사도 요한은 이 계시를 받으면서 계시자이신 어린양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요한은 복음을 위해 유배된 밧모섬에서 어느 주의 날에 깊은 기도 중, 성령에 감동하는 가운데 그의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때 요한은 몸을 돌이켜 자기에게 말하는 음성을 알아보려고 할 때, 일곱 금 촛대를 보게 되었는데 촛대 사이에 계시는 인자 같은 이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며 요한계시록에 어린양으로 등장하시는 심판주이십니다.


1.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신 인자

요한이 바라본 예수님은 바로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셨습니다. 일곱 금 촛대란 20절에서 일곱 교회라고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1) 일곱 금 촛대라고 하여 촛대를 교회로 비유하고 있는 것은 구약의 성전에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성막을 세우라고 명하셨을 때, 여러 가지 법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민8:1-4절 말씀을 보면 그 성막 안에 금으로 된 금 등잔을 만들어 그 곳에 항상 불을 켜 놓도록 명하셨습니다. 이 등불은 하나님의 성령을 상징하며 또 빛이 되신 예수님을 상징해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시대에 와서 세상의 빛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해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왜 등불로 상징되느냐 하면 성령이 하나님의 교회에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빛 되신 성령이 임재하지 아니한 교회는 등불이 꺼진 교회로 어둠에 속한 교회로 전락한 교회인 것입니다. 이들 교회는 종말에 세상에 생명을 주지 못하고 영적 흑암 중에 버림받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2) 종말교회는 촛대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환난 날의 교회를 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음녀교회입니다. 배도 세력을 형성하여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입니다. 다른 하나는 촛대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계12장에서 ‘해 입은 여자’로 등장하는 교회입니다.


2. 요한이 바라본 주님의 영광

이처럼 요한이 일곱 금 촛대를 보았을 때, 그 일곱 금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다니시는 것을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요한이 말한 ‘인자 같은 이’라고 한 대상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1) 요한이 바라본 주님의 영광은 먼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셨다’고 했습니다. 발에 끌리는 옷이나 금띠는 모두 왕의 권위의 표현으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입으신 왕복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2)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다’고 했습니다. 눈이나 양털은 성경에서 죄가 없는 순결을 의미해 줍니다. 이 같은 표현은 예수님의 지극히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주님과 같은 이 같은 흰옷을 입어야 합니다.

(3) ‘그의 눈은 불꽃같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 불꽃같은 눈으로 온 세상을 살피시고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불꽃같은 눈으로 세상의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십니다. 시15:3절에서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4) ‘그의 발은 주석 같다’고 하셨습니다. 주석이란 그 어떤 것이라도 밟아서 짓눌러 버릴 수 있는 단단한 금속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발이 주석 같다고 하신 말씀은 그가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나타내실 권세와 권능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5)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주님의 음성은 옛날 갈릴리 바다나 베다니 동리에 다니시면서 죄인들을 부르신 그런 다정한 음성이 아닙니다. 죄인을 심판하시는 심판주의 엄위에 찬 우렁찬 음성입니다.

(6) 그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날선 검이란 그의 말씀의 검으로, 말씀으로 심판하시는 권능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그의 입의 말씀이 심판의 검이 되어 인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7) 그의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얼굴이 힘 있게 비취는 햇빛 같다고 하신 말씀은 주님의 영광을 말씀하시는 표현입니다. 그 날에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류는 이 같은 주님의 얼굴을 바로 쳐다 볼 자가 없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를 받는 중에 이런 주님의 영광을 친히 바라보고 혼절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17절에서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을 보고 살 자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은 죽은 자 같이 된 요한에게 다가가 그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주의 재림은 심판받을 세상에는 엄위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시지만 그의 백성들에게는 자비하신 구주의 모습으로 보이시며 우리를 위로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4 - 17)

◆ 밤중소리 11-06 | VIEW : 3,476

강해 14 : 처음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계2:1-7)

강해 15 :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받은 서머나 교회(계2:8-11)

강해 16 : 니골라당의 교훈을 좇은 버가모 교회(계2:12-17)

강해 17 : 이세벨을 용납한 두아디라 교회(계2:18-29)


강해 14 : 처음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

(계2:1-7)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계시록 2장과 3장은 ‘이제 있는 일’에 속한 일곱 교회의 형편입니다. 예수님은 사도 요한에게 종말에 관한 계시를 본격적으로 보여 주시기에 앞서 일곱 교회 사자들에게 각기 자기가 속한 교회의 영적인 형편을 보여 주시므로 닥쳐 올 종말의 환난의 날에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한 책망과 격려가 필요했습니다.


1. 에베소 교회가 받은 칭찬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중 제일 먼저 등장한 교회는 에베소 교회입니다.

(1)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신앙적인 결실이 많았습니다. 행위도 있었는데 주님은 그들의 행위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생활에는 수고도 있었습니다. 수고가 있었다는 말은 교회를 위한 헌신과 봉사를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네 인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인내가 없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내란 소망을 기다리는 일에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2) 다음에 에베소 교회는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일’에 대하여 칭찬을 들었습니다. 교회에서 악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지 용납하여 그대로 놔 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악한 자라고 말하는 대상이란 범죄하고도 회개 할 줄 모르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3) 그리고 에베소 교회는 ‘거짓 사도들의 거짓된 것을 드러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밝혀주는 거짓 사도들이란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이나 거짓된 선생들을 의미합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거짓 선생들이 언제나 숨어 있습니다.

(4) 다음에 에베소 교회는 ‘주의 이름을 위해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가 듣고 있는 이런 칭찬은 지금 그들에게 있는 신앙의 열매인 것이 아니라 지난날 그들이 소유했던 열매였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5절에서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말씀에서 이 같은 사실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에베소 교회는 이런 좋은 신앙생활과는 먼 거리에서 이런 은혜생활을 다 잊어버린 상태에 있었습니다.


2. 처음 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

그러면 에베소 교회는 이처럼 놀랍게 칭찬을 들었던 그 열매를 어떻게 했기에 다만 ‘왕년’의 신앙으로 흔적만 남기고 지금은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신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까?

(1) 그 이유는 ‘네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지난날 이 같은 좋은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뿌리가 있었습니다. 그 뿌리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처음 사랑’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지난날에 처음 사랑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은 여러 가지 열매가 맺혀 있어서 그들에게 소망이 있었고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지만 그 처음 사랑을 버린 후, 이 같은 열매마저 다 사라져 버리고 끝내는 주님의 준엄한 견책을 듣기에 이른 것입니다.

(2) 그러면 에베소 교회가 버렸다고 하는 ‘처음 사랑’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인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에베소 교회가 주님께 대한 사랑을 버렸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에 주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그 뜨거운 사랑, 자신의 생애를 희생하고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은 그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결실은 우리가 지켜야 할 이웃에 대한 사랑까지라도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주님이 나를 위해 희생하신 그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마음으로 깨달아 그 사랑이 내 생애를 지배할 때 이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4)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은 주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지게 될 때 그리스도를 아는 그 지식 가운데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와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명하셨습니다.

첫째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떨어진 원인이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그 원인을 발견하는 일이 회개의 첫째 조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회개라는 말은 죄의 길에서 돌이켜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을 의미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가졌을 그 때의 생활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주님께 대한 사랑을 떠나서는 모든 것이 허사이며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떠나자 그들에게서 모든 것이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책망하십니다. 그들이 회개하여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면 그들은 이기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과실을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회개치 않는다면 교회의 촛대를 옮길 것이라고 경종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사랑에서 꽃피우는 많은 신앙적 결실을 맺으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강해 15 :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받은 서머나 교회

(계2:8-11)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로 등장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까? 그것은 서머나 교회는 종말에 있을 환난 날에 죽도록 충성하므로 이기는 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에 심판을 이기고 부활을 보장받는 영광의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실상은 부요한 서머나 교회

서머나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은 일이 없습니다. 일곱 교회 중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만이 책망 받음이 없이 칭찬만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교회는 모두 충성된 믿음으로 환난 날에 승리하는 보장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 사자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는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 서머나 교회는 환난 중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교회입니다. 그들이 당하고 있는 환난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사도 요한은 이들의 환난을 종말에 있을 환난과 결부시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의 당하는 환난은 믿음을 지키기 위한 영적인 시련에서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처럼 환난과 궁핍 가운데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부요한 자라고 하는 칭찬을 주신 것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부요를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에 대하여 부요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 대하여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다음에 다른 또 하나의 부요는 하나님께 대한 부요입니다. 이 경우, 자신에 대해서는 가난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대하여는 풍성하게 기쁨과 감사함으로 바칩니다.

서머나 교회가 가졌던 부요는 물질적 부요가 아니라 영적 믿음의 부요였습니다. 그들이 비록 악조건 아래서 육신적으로는 어려운 환난과 궁핍을 당하고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부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환난과 궁핍이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부요를 가지게 된 원인이 되었으며 그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당할수록 이러한 부요를 더 많이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부요를 가진 교회만이 종말에 서머나 교회에 닥쳐 올 그 무서운 십 일간의 환난을 승리할 수 있는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2. 장차 받을 십 일간의 환난

10절에서 말씀해 준 서머나 교회가 받을 십 일간의 환난은 종말에 하나님의 교회가 받을 환난을 의미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계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탄의 회로부터 환난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 자칭 유대인은 누구라고 했습니까? ‘유대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칭이란 말은 자기 스스로 그렇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이들은 ‘사단의 회’라고 했습니다. 사탄의 회란 사탄에 속한 모임이란 뜻입니다. 유대인이란 말은 이스라엘인이란 말과 같은 뜻으로 선민選民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곳에 등장하는 자칭 유대인은 스스로 신의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무리로 구약적인 유대인들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의 신은 사탄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회’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종말에 등장할 ‘음녀교회’를 상징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스스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무리라고 자처하지만 실상인즉 사탄에 속한 무리에 의해 장차 신앙적인 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피해를 입을 기간은 하나님이 정하신 일정 기간뿐입니다. 그 기간을 십 일간이라고 밝혀 주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이 기간 동안 잘 인내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십 일 동안 받을 환난은 종말에 하나님의 교회가 적그리스도의 무리인 황충이들로부터 받을 ‘첫째 화’를 가리킵니다. 10절에서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장차의 기간이란 종말을 의미하는 기간입니다.

이 환난에 대하여 계7:14절에서는 ‘큰 환난’이란 말로 나와 있습니다. 이 시험은 사탄의 영이 들어간 거짓 형제들로부터 받게 됩니다. 이 때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악한 영이 들어간 거짓 형제들의 핍박과 유혹을 받게 되며 그리스도를 배신하도록 갖가지 시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시련들은 또한 우리들 부모나 형제들로부터도 올 것입니다(눅21:17-19;마24:10-12).


결론 : 하나님의 교회는 장차 임할 이 같은 십 일간의 환난에 대처할 임전태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5개월 동안의 시험기간을 믿음으로 이기려면 서머나 교회처럼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4:13). 이처럼 이기는 자는 결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 받아 영원한 천국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강해 16 : 니골라당의 교훈을 좇은 버가모 교회

(계2:12-17)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13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오늘 등장하는 ‘버가모’란 도시는 소아시아 지역에서도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기고 예배하는 중심지였습니다. 산상에 신전을 세우고 그 곳에 ‘하나님의 아들, 세베스토스신’이라 조각했습니다. 또한 버가모는 마술의 본고장이요 ‘클레피우스’라는 뱀의 전각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버가모는 마귀의 본거지처럼 우상 숭배가 극성맞은 곳이었으므로 주님으로부터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란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1. 버가모 교회가 받은 칭찬

주님은 버가모 교회에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로 나타나셨습니다. 왜 이 같은 모습으로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것입니까? 그들 중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나타났고 버가모 교회에서 이 같은 자들을 용납했기 때문입니다.

버가모 교회가 받은 칭찬은 대단했습니다. 순교의 자리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한 사실에 대하여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이 증거하신 대로 버가모에는 ‘안디바’라고 하는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이 있었습니다. ‘나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버가모 교회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안디바를 기름이 끊는 가마에 집어넣고 죽이는 과정에서 버가모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도록 강요했지만 바가모 교회 성도들은 안디바와 함께 죽을지언정 그리스도의 이름을 결코 배반치 않았다고 했습니다.

버가모 교회 성도들이 이 같은 핍박 중에서 끝까지 승리한 비결은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아야 합니다. 시험의 때에도 그 이름을 굳게 잡아야 승리합니다. 환난의 날에도, 재앙의 날에도, 승리의 비결은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는 일입니다.


2. 버가모 교회가 책망 받은 일

그러나 이 같은 버가모 교회가 주님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받은 책망이란 그들 가운데 니골라 당과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동일시한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발람의 교훈은 구약적인 면에서, 니골라 당의 교훈은 신약적인 면에서 나타내신 말씀인데 결과적으로는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는 악한 누룩입니다.

(1) 발람의 교훈이란 발람이 우리에게 남겨 준 교훈을 말합니다. 발람이란 자는 명예와 탐심 때문에 참 신앙을 저버린 인물로 오늘날 교회에서 발람처럼 명예와 탐심으로 비 신앙적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발람은 하나님 앞에 거짓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분명히 알면서도 그 기도의 응답을 위해 기도한다면 이런 기도는 발람의 기도입니다.

발람은 하나님이 자신의 의도를 용납하지 않자 결국 이스라엘을 타락시키는 음란한 방법을 발락에게 가르쳐 주었고 이스라엘은 그 함정에 빠져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었으며 이스라엘로 음행하는 죄를 범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탄의 간교한 미끼로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시킨 발람의 경우를 ‘발람의 교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그러면 니골라 당의 교훈은 어떤 것입니까? 이 니골라 당의 교훈은 초대 교회의 니골라 집사에 의해 창시된 이단으로, 인간의 구원에 있어 영적인 면만 중요시하고 육적인 면을 무시 한데서 나온 무 율법주의, 탈 율법주의적인 구원관을 말해 줍니다. 니골라는 인간의 구원은 영적이기 때문에 육체의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버가모 교회 성도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행을 해도 그것이 자신들의 구원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교육을 받게 되어 발람처럼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타락시켰습니다. 버가모 교회에 들어온 이 같은 발람의 교훈은 결과적으로 버가모 교회 성도들의 생활을 세속화시켰습니다.


3. 버가모 교회에게 주신 경종

주님은 버가모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버가모 교회를 종말의 순교적인 교회로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1)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른 데서 얻어진 악의 열매에 대하여 철저히 회개해야 했습니다.

(2) ‘회개치 않으면 내 입의 검으로 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내 입의 검이란 재림하시는 주님의 심판의 검을 말합니다.


결론 : 주님은 버가모 교회에게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에 대하여 두 가지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는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고 또 하나는 흰 돌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흰 돌은 다니엘서에 기록된 ‘온 세계에 가득한 돌’을 의미합니다. 이 돌은 새로운 그리스도의 왕국에서의 생활을 말합니다. 곧 천년왕국에 대한 언약입니다(단2:34). 그런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름은 받는 자만이 알 수 있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바로 천년왕국에서 불릴 우리의 새로운 이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이름을 그 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들은 그 날에 버가모 교회에 약속하신 언약을 받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강해 17 : 이세벨을 용납한 두아디라 교회

(계2:18-29)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두아디라 교회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중 네 번째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모든 일에 칭찬을 들었지만 한 가지 일 때문에 책망을 듣게 되었습니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한 교회’로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종말에 등장하는 음녀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교회이기 때문에 주님이 이 교회에 내리신 책망과 권고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 두아디라 교회가 받은 칭찬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에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눈이 불꽃같다는 말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심판주의 눈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이런 눈을 가지고 오시기 때문에 아무라도 그 앞에서 감출 것이 없습니다. 이 같은 주님께는 위선이나 거짓이나 외식이나 변명 따위는 전혀 통할 수 없습니다.

또 ‘발이 주석 같다’고 했습니다. 이 발은 원수들을 짓밟는 심판주의 발을 말해 줍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 않지만 불꽃같은 주님의 눈에 찾으신바 된 사탄의 깊은 비밀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도 에베소 교회처럼 많은 칭찬을 들었습니다. 19절에 나오는 이들의 칭찬을 열거하면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고 하신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많은 사업을 경영했습니다. 물론 이 사업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아름다운 사업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사랑도 있었습니다.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섬김의 생활에도 능동적으로 잘 적응했습니다. 교회를 위한 봉사, 성도들을 위한 사랑의 헌신 등, 그들은 이런 섬김을 위해 시간과 물질과 몸을 바쳤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에게는 인내도 있었습니다. 인내는 모든 축복의 전제 조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내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본받을 만한 일은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많다’고 한 것입니다.


2. 두아디라 교회가 들은 책망

두아디라 교회는 많은 칭찬을 들었지만 반면에 호된 주님의 꾸중을 들었습니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한 사실에 대해 그 같은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종말교회가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주님의 칭찬 들을 만한 열매를 많이 맺어도 만약 이세벨을 용납한다면 이 런 열매는 한낱 물거품이 되며 오리려 책망을 듣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거짓 선지자 이세벨이 나타나 진리의 말씀을 흐리게 하며 하나님의 종들로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에 처한 교회는 이 이세벨의 등장에 관심을 가지고 이 거짓 선지자의 미혹을 받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을 용납해 주었습니다. 용납했다는 말은 그들이 교회에서 활동하는 것을 용인해 주고 방조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세벨을 따르는 무리를 한 형제로 받아 드렸다는 것입니다. 종말에 처한 교회는 자칭 선지자로 등장하여 성도들에게 쑥물을 먹이는 이세벨을 용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의 형제들이 아닙니다. 이세벨이 교회에서 하는 몇 가지 요소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가 ‘내 종들을 꾀어 행음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꾄다는 말은 일종의 유혹인데 종말에는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이들의 유혹에 넘어가 진리의 복음을 버리고 적그리스도를 추종하는 다른 복음 운동을 전개할 것에 대해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꾐에 넘어간 하나님의 종들이 적그리스도와 행음하게 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음이란 영적간음으로 신앙의 지조를 버리는 일을 말하며 우상의 제물이란 적그리스도를 추종케 하는 교훈으로 하나님의 종들에게 악한 누룩을 먹게 하는 일입니다(갈1:6-8).


3. 회개치 않을 때 받을 형벌

주님은 이들 이세벨의 무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들은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들에 대한 심판을 세 가지로 구분해 경종해 주셨습니다.

그 첫째는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라고 지적한 대상은 이세벨을 말합니다. 바로 음녀교회의 지도층을 말합니다. 그들을 던진다고 하신 침상이란 죽음의 침상으로 그들이 당할 둘째 사망을 말합니다(사57:2,겔32:25,계17:16).

다음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에 대한 경종으로 만일 그들이 회개치 아니할 때는 그들을 큰 환난 가운데 던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큰 환난이란 후3년 반의 대 환난 기간을 말합니다. 그리고 ‘내가 사망으로 그 자녀를 죽이신다’고 하신 그 자녀들이란 완전히 음녀화 된 교회(성도)를 말합니다.


결론 :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에서 끝까지 진리를 지키는 성도들에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네게 있는 것이란 그들이 칭찬 받은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말합니다. 그들이 이처럼 끝까지 이기는 자의 자리를 지키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8 - 20)

◆ 밤중소리 11-06 | VIEW : 3,729

강해 18 : 실상은 죽은 사데 교회(계3:1-6)

강해 19 : 인내의 말씀을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계3:7-13)

강해 20 : 차지도 덥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계3:14-22)


강해 18 : 실상은 죽은 사데 교회

(계3:1-6)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사데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하는 책망을 들은 교회입니다. 그들이 이 같은 책망을 듣게 된 이유는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하는 데 있었습니다. 여기서 사데 교회가 듣게 된 이 같은 책망은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씀한 야고보 사도의 경고와 한 맥이 되는 말씀이 되겠습니다(약2:26).


1. 사데 교회가 받은 책망

사데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함께 책망만 들었을 뿐 칭찬을 듣지 못한 교회 중에 하나입니다. 이미 주님으로부터 ‘죽은 자’라는 진단이 나오고 있는 사데 교회에 칭찬 받을 조건이 있을 리 없습니다.

(1) 주님은 사데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습니다. 다윗은 시69:5절에서 ‘내 죄가 주의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죄의 용서는 자신의 은밀한 죄를 하나님 앞에 숨기지 않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0:26).

(2) 사데 교회는 스스로 살았다는 이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은 속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자기 자신들까지도 속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스스로 살았다고 믿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2. 사데 교회가 회개해야 할 일

주님께서 사데 교회에게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회개해야 했습니다. 사데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함께 종말 교회의 모형입니다. 교회는 많지만, 그리고 교인들의 수효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영적으로 죽은 자리에 있다는 현실이 사데 교회를 닮은 종말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행위의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1) 사데 교회가 회개해야 할 방법에 대하여 주님은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일깨우란 말씀은 깨닫고 그 행위를 돌이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적 생명을 다시 소생시킬 수 있는 그루터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데 교회가 비록 죽은 자와 같은 자리에서 주님의 심한 견책을 받았지만 아직 절망적이 아닌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그에게는 새 생명으로 소생할 수 있는 ‘남은 그루터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에 빠지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발판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제 일깨운바 되었으면 그 남은 그루터기를 딛고 다시 세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2) 사데 교회가 회개해야 할 몇 가지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첫째로 회개하는 일에는 먼저 ‘어떻게 받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네가 받았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벧후3:18절에서 이르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으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은혜에서 떨어진 사람은 결국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회개하려면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들었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참된 영적 생명의 양식입니다. 사데 교회가 ‘실상은 죽은 자’가 된 원인은 영적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고 지키는 일에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4) 다음에 ‘지키어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말과 회개한다는 말은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지킨다는 말은 회개의 결과를 말하기 때문에 결과가 지키는 일로 나타나지 않는 회개는 실상인즉 회개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는 용서에 이르지 못하는 회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회개입니다.

예수님은 사데 교회에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일깨지 아니하면’이란 말은 모처럼 주어진 회개의 기회를 상실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교회에 주님은 ‘도적같이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고 없는 주의 재림으로 이 때 이들은 회개할 기회도 없이 재림하시는 주님에 의해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한 보응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결국 영적 소경으로 계시된 시대적 징조를 전혀 깨닫지 못하게 되고 예언의 성취나 계시록의 내용이 아직 닫혀진 묵시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멸망의 날이 속히 올 것이란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사29:10-12,겔7:26).


결론 : 그러나 이런 사데 교회에도 순결한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이 얼마간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남겨 두셨기 때문입니다(롬11:4). 이들은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닐 것입니다. 이들은 두 증인의 예언사역의 날에 흰옷을 입은 무리 가운데 합류할 것입니다. 이들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닌다고 하신 말씀은 후3년 반에서의 보호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축복을 의미합니다.


강해 19 : 인내의 말씀을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

(계3:7-13)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함께 칭찬만 듣고 책망은 듣지 아니한 교회로 유명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종말교회 중 이기는 교회의 표본으로 보여 주신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대단한 칭찬을 들었는데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는 칭찬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놀라운 약속을 받았습니다. 종말에 이런 주님의 약속을 받는 교회는 복이 있는 교회입니다. 그 약속이란 10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네가 내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1. 빌라델비아 교회가 받은 칭찬

빌라델비아 교회는 두 가지 면에서 칭찬을 들었습니다. 하나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그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했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내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1)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켰다’고 하셨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받은 능력을 적은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적은 능력이란 말은 특별히 부여하신 은사적인 능력인 것이 아니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주신 보편적 능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능력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두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동일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와 순종의 생활에서 나타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 적은 능력을 최대한으로 생활에 적용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떤 결실을 가져온 것입니까? ‘내 말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위대한 능력은 귀신을 쫓거나 병든 자를 일으키는 권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지키는 일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마7:22-13).

(2) 그들이 적은 능력을 가지고 행한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의 이름을 배반할 때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10:33).

(3) 다음에 그들이 받은 다른 하나의 칭찬은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종말에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특히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인내의 말씀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종말에 교회에 주시는 예언의 말씀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 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인내를 말합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2.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신 축복

빌라델비아 교회는 종말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를 받을 대표적인 교회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 교회에 대하여 몇 가지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1) 먼저 빌라델비아 교회를 핍박한 무리 중에서 얼마간 회개시켜 그들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고난의 날에 음녀교회에 속하여 그들을 핍박했던 자들입니다. 여기서 사탄의 회, 자칭 유대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무리는 이세벨의 교훈을 따른 음녀에 속한 무리를 말합니다.

(2)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인류의 종말에는 시험의 때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했습니다.

(3) 여기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면케 해 주시겠다’고 하신 시험의 때란 후3년 반 동안의 대 환난 기간을 의미합니다. 이 기간은 큰 바벨론을 이룬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는 기간입니다. 그 초기에 유브라데 전쟁이 일어나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죽는 재앙이 따릅니다.

(4) 이 기간에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아마겟돈 전쟁이 있게 되고 그 후에 일곱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을 때, 큰 바벨론으로 변모된 이 세상에 대한 마지막 심판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심판에서 그의 백성들을 지상에서 건지시기 위해 그의 천사들을 보내시어 하늘 이 끝에서 저 끝에 이르기까지 그의 택한 백성들을 모으시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인을 공중으로 끌어올리시는 공중휴거인 것입니다(마24:31).

그러므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언약하신 시험의 때를 면케 해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곧 이 같은 모든 재앙이 쏟아지는 후3년 반의 대 환난 기간에서 건져 주시겠다고 하신 주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계12장에서는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는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 : 예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여 ‘내가 속히 임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종말을 당한 교회들은 주님이 속히 임하신다고 하는 말씀을 명심하여 끝까지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강해 20 : 차지도 덥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

(계3:14-22)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종말에 등장하는 100% 세속화된 교회의 모형입니다. 주님은 종말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에 대하여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탄식하신 일이 있습니다(마18:8). 종말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자기 자신에게는 부요한 믿음이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주님은 곤고하고 가련한 믿음이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아멘’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참으로’란 뜻입니다. 진실과 충성이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님은 그의 참된 모습을 보여 주실 필요가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그 사명을 다 이루신 분입니다.


1. 라오디게아 교회가 책망 받은 일

라오디게아 교회는 사데 교회와 함께 칭찬을 받은 일은 한 가지도 없고 모두 책망뿐입니다. 그러나 그 책망 속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이 깃들어 있고 회개했을 때 그들이 받을 축복이 굉장히 크다는 사실에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주님은 그들에게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뜨겁다는 말은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뜨거워진 심령을 말합니다. 마음과 정성과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입니다. 이 신앙은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에서 나옵니다. 반면에 차다는 말은 신앙적으로 냉담하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언제부터인가 영적인 뜨거운 감각이 무뎌졌습니다.

이들은 세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면서 옛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들은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기들 나름대로는 가장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지적하신 대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는 교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주님은 이들에게 ‘뜨겁든지 차든지’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한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비위를 건드렸습니다. 왜냐 하면 미지근하다는 말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 한계가 분명해야 합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분명한 선택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이런 결단이 희미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그들에게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선언하셨습니다.

(3) 주님은 이들에게 미지근한 생활을 계속하면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는 경종을 내리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함이 없이 그들의 신앙생활이 계속 미지근하여 열매를 맺지 못할 바엔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신 말씀은 어떤 징계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말씀은 장차 무서운 환난 가운데 던져 넣어서 불같은 시련을 받게 하시어 올바른 신앙을 가지게 하실 것이라는 경종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회개치 않고 그대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한 일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4)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신앙상태는 주님 보시기에 외식과 거짓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고백하고 있었던 것처럼 부요했습니다. 성도들은 물질적인 축복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사하고 집을 짓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에 너무나도 풍요로웠습니다. 그러니 교회도 물량적으로 굉장한 바벨탑을 쌓아 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야말로 종말교회의 모습 그대로인 것입니다.


2.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주님의 책망

그런데 문제는 주님은 그렇게 인정해 주지 아니하셨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1) 첫째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우리 주님 보시기에 너무나도 가난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하나님께 부요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 부요는 그들의 재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자가 되는 부요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부요는 환난과 궁핍을 통해서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환 난과 궁핍 중에서 신앙적인 연단을 받으므로 성장한 인내의 믿음을 가리킵니다.

(2) 다음에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흰옷이란 의의 세마포 옷을 말합니다. 이 흰옷은 진실한 회개에서 얻을 수 있는 의의 옷입니다.

(3) 다음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밝았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을 바라보는 눈은 어두웠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안약을 사서 발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 안약은 세상 재물에 소경된 사람들에게 주시는 신령한 약인 것입니다(요9:39-41).


결론 : 라오디게아 교회는 종말에 세상에 범람할 교회의 모습입니다. 모든 목회자들이 이런 교회를 선망하고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종말 교회는 눈에 보이는 것에 치중하고 물량적인 외모에 만족하는 세속화된 교회를 이룰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같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많은 교회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신앙의 미몽 속에서 빨리 깨어나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간곡한 부탁처럼 거룩한 행실과 경건하므로 그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사모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