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바울서신 강해·김효성목사 기타

고린도후서 8장: 풍성한 헌금 - 13장: 권면과 축도

영국신사77 2020. 4. 15. 18:13


고린도후서


제목차례

8장: 풍성한 헌금

9장: 즐거움으로 하는 헌금

10장: 우리의 싸우는 병기

11장: 고난의 수고

12장: 사도의 표

13장: 권면과 축도


8장: 풍성한 헌금

8-9장은 헌금에 대한 교훈이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해소되었을 때, 사도 바울은 그들이 작정했던 헌금을 실행할 것을 권하였다.

[1-2절]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마게도냐 교회들은 빌립보 교회나 데살로니가 교회 등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본절에서와 4, 6, 7절에서 ‘은혜’라는 말을 헌금의 의미로 계속 사용하면서 헌금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헌금하는 은혜를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금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헌금할 수 없을 것이다. 마게도냐 교회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 속에서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헌금을 하였다. 넘치는 기쁨은 믿음 충만, 은혜 충만, 성령 충만한 데서 나온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이다. 또 풍성한 헌금은 반드시 평안과 부요함 가운데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환난과 극한 가난 속에 있을지라도 믿음과 성령의 충만과 기쁨을 가진 성도는 누구든지 풍성한 헌금을 할 수 있을 것이다.

[3-4절]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마게도냐 교회들은 헌금을 하되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하였다. 힘대로 헌금하는 것도 귀한 일인데, 힘에 지나도록 했으니 참으로 귀한 일이다. 그것은 자원하는 마음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며 억지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헌금의 용도는 ‘성도를 섬기는 일’을 위해서이었다. 성도를 섬기는 일은 가난하고 어려운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는 것, 즉 구제하는 일이다. 또 마게도냐 교인들은 이런 구제 헌금에 참여하겠다고 사도 바울에게 간절히 구하였다. 그들은 헌금을 짐스럽게 생각하여 회피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헌금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던 것이다.

[5-6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우리가 그렇게 바라서가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그가]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노라.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금은 바울의 요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라는 말은 ‘우리가 그렇게 바라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렸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에 협력하고자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그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에서 비롯된다. 전도와 구제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필요한 물질을 바치는 헌금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의 행위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를 권면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는 디도를 통해 헌금을 시작했었다. 바울은 이제 디도에게 그가 시작한 헌금을 마치게 하라고 권면한다. 그들이 헌금하기로 결심하고 소원한 것을 실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헌금하기로 작정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실행하여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께 약속하고 실행치 않는 것은 죄가 된다. 작정한 결심대로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7-8절]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고린도 교회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간절함과 바울 일행을 사랑함 등의 모든 일에 풍성하였다. 바울은 그들이 이 은혜 곧 헌금하는 일에 있어서도 풍성하기를 권한다. 헌금은 하나님의 주시는 선한 열매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헌금하는 일에도 풍성한 자가 되어야 한다. 풍성한 헌금은 믿음의 풍성한 열매이다. 바울은 풍성한 헌금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마게도냐 교인들의 간절함을 들어 권면하는 것이며 이 일을 통하여 고린도 교인들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형제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한다(요일 3:18). 우리의 형제 사랑의 진실성은 구제와 선행을 통해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9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런 아들이시며 부요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하셨고 죄인들 가운데서 자라셨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수치와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가 자신을 낮추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하신 것은 우리의 대속(代贖)을 위함이셨고 우리에게 완전한 의(義)와 영원한 생명과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주시기 위함이셨다. 그는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여 의와 영생과 천국의 영광으로 인도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살며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풍성한 구제 헌금을 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0-12절]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1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고린도 교인들은 1년 전에 행하기를 시작하고 원하기도 하였던 그 작정 헌금을 실행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헌금을 하되 있는 대로 하고 없는 것을 무리하게 만들어 할 것은 없다. 빚을 내서 십일조를 하거나 다른 헌금들을 할 필요는 없다. 할 마음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있는 대로 받으실 것이며,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실 것이다.

[13-15절]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헌금은 어떤 사람들을 어렵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평안케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들의 유여한 것으로 다른 사람들의 부족을 보충하는 것뿐이다. 얼마 후에는 반대로 지금 유여한 자가 어려운 자가 되고 지금 어려운 자가 유여한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서로의 부족을 보충함으로써 성도들의 생활을 평균케 만드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서로 도우며 세상을 살게 하셨다.

[16-19절]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저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복음 안에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이뿐 아니라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복음 사역에 있어서 함께 일하는 사역자들이 같은 간절함을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인지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충성된 마음이기 때문이다. 바울에게는 그런 동일한 마음을 가진 디도가 있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있어서 같은 간절한 마음을 가진 일꾼들이 필요하다. 바울은 디도 외에 또 한 형제를 보내었는데, 그는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바울 일행이 맡은 헌금의 일로 그들과 동행하는 자이었다. 바울은 그를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라고 소개했다. 한 교회에서 칭찬 받는 자가 되는 것도 귀한데,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이니 얼마나 귀한 일인가! 칭찬 듣는다는 말은 비교적 흠과 점이 없는 인격이라는 말이니 이런 자가 하나님의 일에 적합하다. 직분자는 교회에서 칭찬 듣는 자이어야 한다.

[20-21절]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교회가 모은 거액의 헌금을 가지고 목적지에 전달하려 함에 있어서 매우 조심하였다. 그것은 아무도 그들을 비난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행하려 했을 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흠 없이, 정직하게 행하려 했다. 이것은 헌금을 취급하는 모든 일꾼들에게 요구되는 정신이다. 헌금을 취급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깨끗하게 행할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그러해야 한다. 헌금은 깨끗하고 정확하게 처리됨으로써 아무에게도 비난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

[22-24절] 또 저희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가 여러 가지 일에 그 간절한 것을 여러 번 시험하였거니와 이제 저가 너희를 크게 믿으므로 더욱 간절하니라.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partner)[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를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저희에게 보이라.

세 번째 사람이 있었는데, 바울은 그의 간절함과 부지런함을 여러 번 시험하였고 확인했다. 교회의 일꾼들은 이런 시험에 통과된 자이어야 좋다. 우리의 열심은 일시적이어서는 안 된다. 참된 믿음과 충성은 여러 시험과 환난을 통과한 후에 증거된다. 디도는 바울의 마음을 이해하며 고린도 교회를 위해 파송되어 필요한 일들을 처리할 동료요 동역자이었고, 그 외의 형제들은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었고 그리스도의 영광이었다. 교회의 충성된 일꾼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결과이며 그들의 진실과 충성과 사랑은 주 예수의 영광을 반영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 사역자들을 사랑으로 영접하기를 바란다. 성도들은 서로 사랑해야 하고 특히 주께서 세우신 교회의 일꾼들을 존경하고 사랑으로 영접해야 한다. 그것은 곧 주님을 존경하고 사랑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본장은 헌금에 대하여 교훈한다. 첫째로,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결코 헌금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 헌금의 용도는 성도를 섬기는 일을 위해서, 즉 물질적 어려움이 있는 교인들을 구제를 위해서이다. 거기에는 전도자들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면, 헌금의 용도는 전도와 구제를 위해서이다.

셋째로, 헌금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간절히 소원할 만한 일이다.

넷째로, 헌금은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할 때 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리는 우리의 몸 속에는 우리의 돈과 재물도 포함된다.

다섯째로, 하나님 앞에서 작정한 헌금은 실행되어야 한다.

여섯째로, 헌금은 풍성하게 해야 한다.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소득의 십분의 일을 헌금하라고 명하지만 신약성경은 그 이상을 교훈한다.

일곱째로, 헌금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한다.

여덟째로, 헌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은혜에 근거한다. 부요하신 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큰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즐거이 헌금할 수 있다.

아홉째로, 헌금은 할 마음만 있으면 내게 있는 정도대로 받으신다.

열째로, 헌금은 교회 안의 성도들을 평균케 하는 것이다.

열한째로, 헌금은 깨끗하고 정확하게 관리되어야 한다.

열두째로, 헌금은 교회에서 칭찬 듣는 자들에 의해 관리되어야 한다.

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의 성육신의 은혜를 기억하고 풍성한 헌금을 할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자.

9장: 즐거움으로 하는 헌금

[1-2절]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1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

본장의 헌금은 성도를 섬기는 일을 위한 것이었다(고후 8:4). 그것은 교회 안에 물질적으로 어려운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이었다. 고린도 교회는 이 일을 원했었다. 교회의 헌금은 전도와 구제를 위한 것이다. 아가야 지방의 고린도 교회가 1년 전부터 구제헌금을 원하였고 준비했다는 바울의 자랑이 마게도냐 지방의 교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성도들의 선한 열심은 다른 성도들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 물론 감동을 받지 않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감동을 받아 자기들이 그 일에 동참할 선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다른 이들의 선한 행위를 본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

[3-5절]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율로기아)[복]답고 억지(플레오넥시아)[탐심]가 아니니라.

바울이 디도와 두 형제들을 고린도에 먼저 보낸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1년 전에 작정한 헌금을 준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바울이 마게도냐인들과 함께 고린도에 갈 때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헌금에 관한 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헌금은 미리 준비해야 된다는 것이다. 또 사람이 헌금할 때 탐심을 가지면 아까운 마음이 들고 억지로 하는 헌금이 된다. 그러나 헌금은 억지로 해서는 안 되고 미리 준비해야 헌금답다. 특히 바울은 헌금을 복(율로기아)이라고 표현한다. 구제 헌금은 받는 자에게도 복이요 하는 자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복이다.

[6-7절]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바울은 헌금을 심는 일에 비유했다. 농사를 할 때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헌금도 그렇다는 것이다. 헌금은 많이 낼수록 복되다. 그는 많이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헌금을 억지로, 아까운 마음으로 내지 않고 최선을 다해 준비할 것이다. 바울은 헌금에 대한 또 하나의 교훈을 한다. 그것은, 헌금은 사람의 마음의 선한 결심대로 하되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는 헌금은 헌금답지 못하고 복되지도 못하다. 하나님께서는 천한 분이 아니시다. 그는 우리의 최선의 것, 우리의 최상의 것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즐겨내는 자가 되려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심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데 인색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 것을 누구에게 준다고 생각할 때 인색한 마음을 가진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의 것이란 실상 없다. 이 세상 만물의 참된 소유자는 창조자 하나님뿐이시다.

다윗은 역대상 29장에서 성전 건축을 위해 자신과 온 백성이 바친 헌금과 헌물에 대해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다: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대상 29:11, 14, 16). 이것이 바른 생각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신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더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거듭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돈으로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없고 영생을 살 수 없고 천국 백성의 자격을 얻을 수 없다. 우리의 돈은 우리의 세상 생활을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것도 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라고 내게 맡겨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그 일부를 드리는 헌금에 우리는 인색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은 마땅히 기쁨과 즐거움으로 해야 할 일이다.

[8-9절]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한 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충만한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의 충만한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게 주셔서 우리로 선한 일에 풍성한 자가 되게 하신다. 선행과 구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행하는 일이므로 의(義)이다. 선행과 구제에 힘쓰는 사람은 의로운 자이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는 자들은 다른 이들에게 많은 선을 행하고 가난한 이웃들을 너그러이 돌아보는 의인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구원받은 자들이 맺어야 할 의롭고 선한 열매이다.

[10절]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돈은 두 가지 용도가 있다. 하나는 먹을 양식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는 일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먹을 양식을 풍성히 주시는 분이시다. 그는 물질적으로 부요하신 분이시다. 그는 또한 우리에게 심을 것도 풍성하게 주신다. 그것은 전도와 구제의 헌금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적 복으로 먹고 살며 필요한 것을 사고 행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전도와 구제의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

[11-12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일에 풍성함을 주셔서 우리로 헌금도 풍성하게 할 수 있게 하시며, 그 헌금을 통해 하나님께 풍성한 감사가 돌려지게 하신다. 특정한 대상을 위해 바쳐지는 후한 구제 헌금은 가난한 성도들의 부족을 보충할 뿐 아니라, 구제받는 자들로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드리게 만든다. 이것은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된다.

[13절]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헌금에 대한 또 하나의 교훈은, 헌금이 헌금하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선한 행위는 진실한 믿음의 증거이다. 입으로는 순종을 말해도 마음으로 순종치 않는 자는 참으로 의와 선을 행할 수 없다. 이 세상이 장차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을 알고 자신의 소망을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이 아니고 내세(來世)에 두는 자가 아니고서는 물질 사랑과 탐심을 참으로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세상과 돈을 정말 버린 자만이 전도와 구제를 위해 후한 헌금을 즐거이 드릴 수 있고, 또 이렇게 즐거이 드리는 후한 헌금은 헌금하는 자가 하나님을 진실히 믿는다는 표가 된다.

[14-15절]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이며 증거이다. 우리는 성도의 헌금을 통해 헌금한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본다. 즐거이 드리는 후한 헌금은 그것을 보는 이, 그 일을 듣는 이로 하여금 ‘오 주여, 그에게 이런 은혜, 이런 믿음, 이런 사랑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게 한다. 돈 귀한 줄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풍성한 헌금을 즐거이 할 자는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가 역사상 땅 위에 곳곳에서 나타났고 지금도 나타난다.

8장에 이어, 본장도 헌금에 대해 교훈한다. 첫째로, 헌금은 미리 준비해야 헌금답다. 헌금은 즉흥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미리 준비하며 해야 한다. 둘째로, 헌금은 복이다. 우리의 헌금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드리는 복된 선물이다. 셋째로, 헌금은 심은 만큼 거둔다. 많이 헌금한 자는 땅 위에서도 많이 거둘 것이다. 넷째로, 헌금은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내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거지가 아니시다. 우리는 마땅히 두려움과 기쁨과 감사함으로 헌금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헌금하는 자들을 기뻐하실 것이다.

다섯째로, 헌금은 우리에게 의가 된다. 그것은 창조자와 구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이며 의의 열매이다. 여섯째로, 우리에게 주신 돈의 용도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먹을 양식이며 또 하나는 심을 씨이다. 먹을 양식은 우리가 먹을 수 있지만, 심을 씨는 우리가 먹지 말고 심어야 한다. 우리는 먹을 양식 외에는 전도와 구제의 일을 위해 써야 한다. 일곱째로, 헌금은 헌금하는 사람의 믿음과 순종의 진실함의 증거이다. 여덟째로,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가 아니면 결코 풍성한 헌금을 할 수 없다.

10장: 우리의 싸우는 병기

[1-2절]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고린도후서 10-12장은 그의 사도직에 대한 바울의 변증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대면할 때 겸손했다고 말한다. 그는 고린도에서 교인들을 대할 때 겸손한 태도로 대했었다. 지금 그들을 떠나 있을 때에도 그는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온화함으로 그들을 권면하기를 원한다. ‘관용’이라는 원어(에피에이케이아)도 ‘온유함, 온화함’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겸손하고 온유하고 온화한 성품을 가진 성도가 되어야 하고 또 그런 직분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교사들은 사도 바울을 육체대로 행하는 자라고 비난했다. ‘육체대로(사르키코스 sarkikov") 행한다’는 말은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 오직 인간 본성의 생각과 감정을 따라 행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그런 사람은 세상의 욕심과 명예심을 가지고 행할 것이다. 바울이 그렇게 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가 육체대로 행한다고 비난했다. 하나님의 종들은 세상에서 잘못된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겸손과 온유함과 온화함으로 대하려 하였으나, 자신을 그릇되이 비난하는 자들을 향해서는 담대한 마음으로 대하려 하였다.

[3-4절] [이는]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아니함이라. 이는]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토 데오)[하나님으로 말미암아](KJV)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강력임이라].

우리는 다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육신적 생각, 즉 세상적인 욕심과 명예심이 아주 없지 않겠지만, 주의 종들은 육체대로 싸워서는 안 된다. 즉 그들은 세상적 욕심이나 명예심을 가지고 행해서는 안 된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고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복음 사역은 사탄과 악령들과의 전쟁이며 악한 자들과의 전쟁이다. 그때 복음 사역자들의 무기는 육신적 힘이나 육신적 지혜와 생각이나 세상적 수단과 방법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한 능력이다. ‘견고한 진’은 사람의 생각을 가리킨다. 구원받기 전의 사람의 무지하고 불경건한 생각은 매우 완고하다. 그것은 견고한 진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깨뜨리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전도는 하나님의 영혼 구원의 방법이다. 전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다. 그 능력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견고한 진을 파괴하는 폭약(다이나마이트) 같은 강한 능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자를 위해 또 전도할 때마다 ‘오 주여, 영혼을 구원하소서! 견고한 진을 파하소서!’라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5-6절]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이론들, 즉 세상의 잡다한 사상들을 다 파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다 파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지식의 근본이며(잠 1:7; 9:10) 가장 중요한 복인 영생의 길이다(요 17:3).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지식을 대항하여 높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이것들을 다 깨뜨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복음을 통하여 사람인간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킨다. 복음은 죄인들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다. 죄인들은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복종이 온전히 된다는 말은 복종의 정도, 즉 성화(聖化)의 정도를 나타낸다. 복종에는 부족한 복종이 있고 온전한 복종이 있다. 그것은 불순종하던 옛 사람의 요소들이 죽고 순종하는 새 사람의 요소들이 사는 과정이다. 고린도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할 때, 모든 복종치 않는 자들은 징벌을 받을 것이다.

[7절]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을 외모로 평가하고 판단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외모로는 그렇게 훌륭해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종들을 외모로 보는 것은 큰 잘못이다. 사람의 가치는 그의 외모나 외적인 조건들에 있지 않고 그의 내면성, 즉 그의 영적, 신앙적 상태에 있다. 우리는 상대방의 내면성을 보려고 해야 한다.

[8-11절] [이는]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아니할 것임이라].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같이 생각지 않게 함이니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자가 어떠한 자이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도 그와 같은 자인 줄 알라.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영적 권세와 권위는 교인들을 허물기 위한 것이 아니고 세우기 위한 것이다. 주께서는 오늘날 복음의 일꾼들에게도 영적 권위를 주셨다. 그것은 영혼들을 죄에서 건져내고 구원받은 자들을 돌보며 양육하는 권위이다. 전도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요 목회는 구원받은 자들을 돌보며 양육하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몸이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바울에 대해 그의 편지는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울을 약하게 보고 그 말이 시원치 않다고 보는 것은 그의 외모만 본 것이다. 그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와 그의 풍성한 진리들이 들어 있었다.

[12-14절] [이는]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없음이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교회 안의 어리석은 자들, 아마 거짓 교사들은 자기 스스로 비교하고 평가하며 칭찬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유의 사람이 아니고 그런 자들과 감히 비교될 수도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이방세계에 전하다가 고린도에까지 갔던 것이므로 그의 자랑은 하나님께서 주신 분량의 한계에 맞는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 교회의 개척자인 바울은 그 교회로 인하여 기뻐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15-18절]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너희에 의해 풍성히 넓어지기를] 바라노라. 이는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사도 바울은 복음의 계속적인 확장을 위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너희에 의해 풍성히 넓어진다’는 것은 그의 마음과 자랑과 전도 영역이 넓어진다는 뜻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주의 은혜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랑은 주님밖에 없고, 주의 은혜와 주의 능력밖에 없었다. 참으로 주 앞에서 인정받는 일꾼들은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들이다. 우리는 스스로 칭찬하는 자가 되지 말고 주께 칭찬 듣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과 확고한 믿음과 선한 인품을 가진 자는 참으로 주님께 칭찬을 들을 것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함과 온유함과 온화함을 본받자. 1절,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온유함]와 관용[온화함]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겸손함과 온유함과 온화함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이 가져야 할 덕이며 특히 교회 직분자들이 가져야 할 덕이다.

둘째로, 우리는 복음 사역이나 교회 봉사에서 육신의 생각과 감정으로 행하지 말고 성령의 생각과 감동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해야 한다. 3-4절,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육신의 생각과 감정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사람을 외모로 보고 판단할 것이나, 성령의 생각과 감동으로 행하는 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성령의 생각과 감동으로 행하는 사람은 모든 마귀의 시험과 사람의 연약한 모든 일들을 잘 물리쳐 나갈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모든 생각을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시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5-6절,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우리는 모든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구원이며 참된 성화이다.

11장: 고난의 수고

1-15절, 거짓 사도들

[1-2절]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이는]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이는]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이란 그의 자랑함을 가리킨다. 앞장에서 그는 주께서 주신 사도직과 그 직분을 가지고 고린도에 가서 한 그의 사역에 대해 자랑스럽게 증거했다(고후 10:13-18).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루신 일이었고 결코 분량 밖의 자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울의 사도직을 비난하고 그의 사도적 권위를 부정하는 거짓 교사들 때문에 부득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한 자랑이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하나님의 열심으로 일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열심을 가지고 자기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주의 종들은 하나님의 열심을 본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의 전도 사역을 중매하는 일로, 즉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성도들 간에 중매하는 일로 표현하였다. 그 결혼이 복된 결혼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들은 정결해야 한다. 그들은 한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만 사모하는 순결한 신부가 되어야 한다.

[3절]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하플로테스)[단순함, 신실함][과 깨끗함](전통사본에는 없음)5)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성도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신앙의 변질과 부패이다. 사탄은, 옛날 에덴 동산에서 그 간계로 이와[하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오늘날도 성도들을 미혹케 하려 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바른 지식을 버리고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그를 향한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불신앙에 떨어지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구약성경에 증거된 대로 끝까지 단순하고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믿고 따라야 한다.

[4절] [이는]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용납함이니라].

고린도 교인들은 거짓 교사들이 전파한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잘 받아들였다. ‘다른 예수’는 신약성경에 증거되신 예수님이 아닌 다른 예수이다. 성경의 예수님은 처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어 나시고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사십일 만에 승천하시고 장차 하늘로부터 눈으로 볼 수 있게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예수는 다른 예수이다. 이름만 같지, 실제로는 다른 자이다.

‘다른 영’은 하나님의 영, 성령, 곧 진리의 영이 아닌 영이다. 그 영은 사탄과 악령들이다. 그것은 거짓과 불결과 혼돈의 영이다. 그 영에게서 다른 사상이 나온다. 우리는 아무 영, 아무 사상이나 받지 않아야 한다. 성도들은 영의 출처와 소속을 분별해야 한다(요일 4:1).

‘다른 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주신 복음, 그들이 선포하고 해설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복음 외의 복음을 가리킨다. 실상, 다른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주의는 다른 복음이다. 마리아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천주교회의 교훈도 다른 복음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베푸는 삶이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자유주의 신학도 다른 복음이다. 속죄 진리를 무시하고 기적 체험만을 강조하는 은사주의도 다른 복음이다.

우리는 사도적, 성경적 신앙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역사적 기독교의 바른 교리와 신앙과 삶을 보수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신구약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속죄의 복음만 굳게 믿고 지켜야 한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이 증거하는 그 옛신앙을 가지고 그 옛신앙을 지키고 그 옛신앙을 전해야 한다.

[5-6절] [이는]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생각함이니라. 이는]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아니함이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거짓 교사들은 원사도들을 ‘지극히 큰 사도들’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바울은 자신이 그들보다 부족함이 조금도 없다고 말한다. 그는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지식이 말보다 중요하다. 사람이 말도 잘하면 좋겠지만, 말은 아첨이나 위선이나 이중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바른 지식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전할 수 있고 성도들에게 바른 길을 가르칠 수 있다.

[7-8절]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料)[후원, 후원금]를 받은 것이 탈취한 것이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한 것은 그들을 존중하여 자신을 낮춘 것이요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아무 대가 없이 전한 것이요 그들을 섬기기 위해 다른 여러 교회의 후원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다른 교회들에게서 후원금을 받은 것을 탈취한 것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그것은 탈취한 것이 아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아무 대가를 받지 않고 다른 교회들의 도움을 받아 그 교회를 세우고 돌아본 것이니 그것을 탈취라고 표현한 것뿐이다. 사도 바울의 이런 행위가 죄(罪)인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선이요 사랑이었다.

[9절]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머문 동안 물질적으로 유여했던 것이 아니고 부족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았다. 그것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 즉 아마 빌립보 교인들이 그의 부족을 보충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일에 고린도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조심했다. 그는 앞으로도 그렇게 조심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주었다.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세상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남에게 유익을 주고 도움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을 본받는 것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으며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10-12절]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어떠한 연고뇨?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 함이로라[이는 그 자랑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와 같이 되려고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버리려 함이라](NASB, NIV).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품고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했다. 그가 고린도 교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한 것은 결코 그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은 “바울도 별 수 없다. 결국 그도 속으로는 물질을 구하는 자일 뿐이다”라는 비난을 하려고 하였다. 이 악한 자들은 바울을 비난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러한 기회를 끊어버렸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순수한 믿음과 참된 사랑의 동기로 전도하고 교회들을 돌아보는 일을 함으로써 그렇게 했다.

[13-15절] [이는]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假裝)하는 자들이니라[자들임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假裝)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假裝)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초대교회 때부터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거짓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칭 그리스도의 사도이지만 실상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들이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저런 거짓 사도들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탄이 자신을 빛의 천사로 위장(僞裝)한 것을 생각한다면, 사탄의 종들이 의의 일꾼으로 위장(僞裝)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저 악한 종들의 결말은 그 행위대로 될 것이다. 주의 말씀대로,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 마귀의 종은 마귀 일을 하고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 어떤 이가 하나님의 종인가 마귀의 종인가는 그에게 의와 사랑과 진실의 행위가 있는지 여부를 보아서 판단할 수 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악과 거짓을 행하는 사탄과 악령들과 악한 종들을 영원한 지옥에 던져 넣으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정결한 처녀같이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 사탄은 사도 시대 이후 줄곧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해왔다. 우리는 신앙의 변질을 가장 조심하고 오늘날 각종 이단사설들, 특히 자유주의 신학과 은사주의를 경계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지키고 계명 순종을 실천해야 한다.

둘째로, 복음사역자들은 교회 봉사를 할 때 물질적 이익을 구하지 말고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이 세상 것들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자는 이 세상을 초월한다.

셋째로, 우리는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거짓 목사들을 분별하고 그들의 결말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시키는 사탄의 사자들이다. 주 예수께서는 그들을 공의의 징벌로 보응하실 것이다.

16-33절, 고난과 수고를 증거함

[16-20절]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사도 바울은 육신적으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자기도 육신적으로 대하려고 한다. 잠언 26:5는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고 말했다. 고린도 교인들은 저 어리석은 거짓 사도들을 기쁘게 용납했다. 거짓 사도들은 교인들을 종으로 삼아 자기의 왕국을 건립하려는 자들이었고, 교인들을 잡아먹듯이 그들의 재산과 돈을 삼키는 자들이었으며, 교인들을 사로잡아 속이고 이용하고, 또 자신들을 높이고 교만하며, 심지어 교인들을 윽박지르고 구타하며 폭력을 사용하는 자들이었다. 그래도 고린도 교인들은 그 거짓 사도들, 그 거짓 교사들을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생각하여 참고 용납하고 있었다.

[21-23a절] 우리가 약한 것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부끄럽게도 나는 우리가 연약했음을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들의 비난에 대해 대답하기를 원한다.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이 히브리인이며 이스라엘인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사도 바울은 그 말에 대답하여 자신도 히브리인이며 이스라엘인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또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자처했다. 거기에 답변하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어떻게 많이 수고하고 고생했는지 증거한다. 그가 받은 많은 고난과 수고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일꾼이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의 이익만을 구하지만, 참된 일꾼은 고난 중에서도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위한다.

[23b-27절]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몽둥이]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一晝夜)[하룻밤과 하루 낮, 즉 만 하루]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사도 바울은 수고를 넘치게 하였고 고난을 많이 당했다. 그는 옥에도 여러 번 갇히었다. 그는 매도 수없이 맞았다. 그는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 그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 신명기 25:3은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과다히 때리면 네가 네 형제로 천히 여김을 받게 할까 하노라”고 말했다. 또 바울은 몽둥이로 매를 맞은 것이 세 번이었다. 또 그는 한 번 돌로 맞았다. 그것은 루스드라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사도행전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설득]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또 그는 전도여행 중 세 번이나 배가 파선하는 일이 있었고 한 번은 만 하루를 꼬빡 깊음에서 지냈다. 그는 전도여행에서 여러 번 강을 건너는 위험, 강도들의 위험, 유대인들의 핍박의 위험, 이방인들의 핍박의 위험, 또 도시 안에서의 위험, 광야에서의 위험, 바다에서의 위험을 당했고, 게다가 거짓 형제들이 있어서 그를 악하게 비난하고 해치려는 위험도 있었다. 또 그는 수고하며 애쓰며 피곤하도록 고생했다. 또 그는 여러 번 자지 못했다. 그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었던 때도 있었다. 그는 여러 번 먹지 못하고 굶었다. 또 그는 따뜻한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여 추위에 떨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전도 사역의 여정에서 많은 고난과 수고를 겪었다.

[28-33절]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위에서 말한 고난과 수고뿐 아니라, 사도 바울의 심령에는 날마다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가 있었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고 순종으로 사는 것을 원하는 염려이다. 주의 종들은 마치 자신들이 대신 심판대 앞에 설 것처럼 교인들을 염려하며 가르치며(히 13:17)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누가 연약하면 그의 마음은 약해졌고 누가 범죄하면 그의 마음은 애탔다. 부득이 자랑한다면 바울은 이런 여러 가지 고난들과 염려들을 자랑할 것이다. 바울의 간증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그가 말한 고난의 목록에 한 가지를 더한다. 그것은, 아레다 왕의 방백이 그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 때 그가 광주리를 타고 그 성의 한 집의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도피한 사실이었다. 사도행전 9:23-25에 보면,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 바울의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을 본받은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셨고 수제자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맹세하며 저주하며 부인하였다. 공회원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주먹으로 치며 손바닥으로 때렸다(마 26:67). 로마 군병들도 그를 조롱하며 그에게 침을 뱉었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쳤고(마 27:29-30) 그에게 채찍질하였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았다(막 15:15). 예수께서는 사람의 배신과 연약으로 인한 심령의 큰 고통을 당하셨고 또 십자가에 못박히신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다.

바울뿐 아니라, 다른 사도들도 고난을 받았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들은 옥에 갇혔고(행 5:18) 채찍질을 당했다(행 5:40). 사도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의 환난에 동참하는 자라고 표현했다(계 1:9). 또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고(행 7:58-60), 남녀 신도들도 옥에 갇혔다(행 8:3).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기억하자. 첫째로, 고난과 수고는 참된 믿음의 증거가 된다. 사도 바울의 고난과 수고는 그가 참되고 충성된 사도이며 그가 전한 구원의 복음이 진리임을 증거한다. 우리의 고난과 수고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사랑, 그리고 주께서 구원하신 영혼들과 교회를 향한 우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거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고난을 각오하며 살자. 주께서는 그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셨었다(마 5:11).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고(행 14:22), 또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했고(빌 1:29), 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했다(딤후 3:12). 우리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고난을 기억하고 본받아 고난을 각오하며 신앙생활을 하자.

셋째로, 고난과 수고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은 클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주를 인해 욕과 핍박과 악한 비방을 받을 때 복이 있으며 하늘에서 우리의 상이 크기 때문에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11-12).

12장: 사도의 표

1-10절, 육체의 가시

[1-2절]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14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셔서 자신이 받았던 하나님의 환상들과 계시들에 대해 말한다.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는 바로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그는 사도직의 변호를 위해 부득이 이 사실을 언급한다. ‘환상과 계시’는 옛 시대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별하게 나타내셨던 그의 특별계시의 방법이었다. 민수기 12:6,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異像)[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히브리서 1:1-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런 특별계시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또 온전케 된다(딤후 3:15-17). 사도 바울이 14년 전에 환상 중에 올라간 셋째 하늘은 하나님께서 계시고 천사들이 거하는 가장 높은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면 첫째 하늘은 새들이 나는 창공을, 둘째 하늘은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하늘을 가리킬 것이다.

[3-4절]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사람이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말이로다.

사도 바울은 그 셋째 하늘을 ‘낙원’이라고 표현한다. 그 곳은 우리가 천국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예수께서 하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나사로가 죽은 후 들어간 ‘아브라함의 품’(눅 16:22)이나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약속하신 ‘낙원’(눅 23:43)은 다 이 곳을 가리킨다. 또 히브리서 12:22가 말한 ‘하늘의 예루살렘’도 바로 이 곳이다. 셋째 하늘, 아브라함의 품, 낙원 등은 다 천국을 가리킨다.

천국은 확실히 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천국을 예비하셨다. 에녹은 일찍이 그 곳으로 올라갔고, 엘리야도 그 곳으로 올라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 곳으로 올라가셨다. 의인들의 영들이 지금 그 곳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고 있다. 천국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된 기업이다.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그 곳에 들어갈 수 없다. 모든 죄인들과 악인들은 그 곳에 들어갈 수 없다. 천국에 들어갈 자들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하고,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이 순종하며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거기서 사람이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말을 들었다. 우리는 천국에서도 인격적 의사 소통을 가질 것이다. 천국은 확실히 대화가 있는 사랑의 세계일 것이다. 사도의 자격 요건의 하나는 주께서 자신의 뜻을 그에게 계시하심에 있었다. 자기 마음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말하는 자들은 분명히 거짓 사도들이다. 오늘날 성경을 충실히 강해하거나 강론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이나 세상의 생각들을 전하는 목사는 확실히 거짓된 목사일 것이다.

[5-6절]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에 올라간 환상과 계시를, 자기 몸 안에 있었든지 혹은 자기 몸 밖에 있었던 한 사람의 경험이라고 말한 것(2-3절)은 자신의 사도직의 변증을 위해 부득이 하는 자랑이었기 때문이다. 이 간증은 거짓말이거나 과장된 말이 아니고 ‘참말’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보거나 자신의 간증을 듣는 자들이 무엇을 지나치게 생각지 않도록 그 정도만 말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7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놀랍고 중요한 계시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여기에 주께서 직접 부르시고 세우신 사도들, 즉 열두 사도들과 사도 바울의 권위가 있고 신약성경의 신적 권위성이 있다. 사도 시대 이후의 목사들은 사도들과 분명히 다르다. 목사들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주신 신구약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진리와 교훈을 전하는 자들이다. 오늘날 목사들의 권위는 바르고 충실한 성경적 설교와 교훈에만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주신 계시들이 너무 중대하였기 때문에 그가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의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 교만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죄이다. 교만은 마귀가 마귀가 된 죄라고 보인다. 디모데전서 3: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그러므로 목사들도 성도들도 교만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교만의 경향성을 꺾고 하나님의 은혜로 겸손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에게 주신 ‘육체의 가시’란 몸의 어떤 질병이나 연약성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것은 그를 교만치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이었다. 그는 그것을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했다.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 욥을 쳐서 온 몸에 악창이 나게 하였었다(욥 2:7). 그러나 욥에게나 바울에게나 그런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었다.

[8-9절]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병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그가 제거하실 수 있다. 성도가 병들었을 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약이나 의술을 의지하는 것은 분명히 불신앙이다(대하 16:12). 의술은 제한적이다. 우리는 병들었을 때 먼저 하나님께 회개하며 그의 긍휼과 치료를 간구해야 하며(약 5:14-16) 그 후에 의사의 치료도 감사히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의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주시기를 위해 하나님께서 세 번 간구했으나 거절되었다. 거절하심도 일종의 기도 응답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자주 다르다. 우리의 최선의 소원이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최선이 아닐 수 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낫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생각과 그의 섭리하심에 우리 자신을 항상 의탁하여야 한다. 바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이었다.

육체의 가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미워하셨기 때문에가 아니라 더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신 것이었다. 사람은 부족하고 연약하다. 조금만 편안해도 해이해지고 교만해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와 훈련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징계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의 우리 정도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와 훈련 속에서 완전을 향해 더 잘 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연약을 통해 충만한 능력으로 역사하셨다. 우리가 스스로 강하다고 느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지 않으실 것이지만, 우리가 연약하다고 느낄 때 그는 우리를 통해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그의 일을 이루시며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는 참으로 놀랍다.

[10절]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약할 때 하나님의 일도 약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사역에 충만히 나타남을 깨달았다. 즉, 그가 약할 때가 곧 그가 강할 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약함들, 곧 많은 고난과 수고와 육체의 가시까지 간증하고 자랑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늘날도 우리의 몸과 마음은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의 일을 힘있게 이루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바울의 사도직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고 고난 당했음을 통해 증거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받았던 주의 환상과 계시를 통해서도 증거되었다. 환상과 계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주셨던 그의 특별계시의 방법이었다. 그것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글인 성경의 신적 권위성을 증거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의 글들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순종하자.

둘째로, 우리는 셋째 하늘 곧 낙원의 영광을 사모하자. 이 세상의 삶은 나그넷길이며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천국을 확신하고 그 영광스럽고 복된 천국에 우리의 소망의 닻을 든든히 두자.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귀한 종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도 주셨다. 그 육체의 가시는 바울로 하여금 교만치 않고 겸손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고난은 그들을 미워하셔서가 아니고 그들을 거룩함과 겸손과 믿음으로 단련시키시기 위함이다. 우리에게 주신 고난들은 성화와 온전함을 위해 유익하다.

넷째로, 하나님의 능력은 사도 바울이 연약할 때 온전히 나타났다. 바울에게는 연약함이 많았으나,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그를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의 고난과 연약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도 고난 중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자.

11-21절, 사도의 표와 바울의 주관심

[11-12절]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이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아니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셋째 하늘에 올라간 일을 말한 것이 어리석은 자랑임을 말한다.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 어떤 이들이 거짓 교사들의 말에 동요되어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하고 도전했기 때문에 그가 부득이 한 자랑이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신이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

[12절] [참으로](멘)(KJV)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참음으로]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참으로 사도의 표들은 모든 참음 가운데서 표적들과 기사들과 능력들에 의해 행해졌도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표가 특별한 환상들을 본 것뿐 아니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임을 말한다. 사도들은 주 예수께서 친히 부르시고 세우시고 보내신 자들이며 특히 그들이 기적을 행한 것은 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신분증, 즉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와 같았다. 그것은 구약시대에 참된 선지자들이 가졌던 표와 같았다.

[13-14절]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물질적 폐를 끼치지 않았다. 그가 그것을 ‘공평치 못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 행위는 잘못된 불공평이 아니고 사랑의 동기에서 나온 불공평이었다. 폐를 끼칠 수 있는 자가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은 사랑이지 인격적 결함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모든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사랑과 봉사의 삶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치는 자가 되지 말고 유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교인들의 재물을 구하는 자가 아니고 그들의 영혼들을 구원하고 바로 세우기를 원하는 자이었다. 천하보다 귀하고 세상의 모든 재물보다 귀한 것은 사람의 영혼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셨다(마 16:26). 또 부모가 아이들을 위해 재물을 저축하듯이,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자신을 드렸고 그의 재물도 사용했다. 물질적 이익을 초월한 교훈은 진리의 교훈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이 세상과 세상의 것들밖에 모른다. 물질적 이익은 그들에게 가장 큰 가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그것들을 초월한다. 교인들에게 물질적 폐를 끼치지 않는 바울은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참된 종이다.

[15절]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사랑은 컸고 그는 그들을 위해 재물을 허비하고 자기 자신까지 허비하려고 한다. 주 예수님과 그의 종들은 바로 이런 길을 가셨다. 우리는 세상에서 현세적, 물질적 대가를 기대하지 말고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하고 영광스럽고 존귀한 대가만을 바라며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 주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셨고 도리어 사람들을 섬기시며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함이었다.

[16-17절]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利)를 취하더냐?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깨끗하게 사역했지만, 비난하는 자들은 그가 간교한 속임수로 교인들을 취하였다고 말했다. 그 비난은 그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일을 허물어뜨리려는 악한 말이었다. 바울의 경우처럼, 주의 종들에게는 그들의 선한 봉사의 걸음에 때때로 악한 비난의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참 일꾼과 거짓 일꾼의 차이는 분명하다. 거짓 일꾼은 썩어지고 허무한 이 세상의 것들과 물질적 이익만을 구한다. 그러나 참 일꾼은 이 세상을 사랑치 않고 오는 세상을 사랑하며, 세상의 썩어질 것을 구하지 않고 장차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주실 존귀와 영광을 구한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교회를 위해 이 세상의 것들을 소비하고 자신까지 희생하면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에 힘쓸 수 있다.

[18-19절]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利)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정신](KJV, NASB, NIV)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이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바울과 디도는 동일한 정신을 가졌고 동일한 보조로 행하였다. 그 정신과 그 걸음은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적인 것이요,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교회와 교인들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요, 이 세상을 사랑치 않고 장차 올 세상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목사와 성도들의 정신과 걸음이어야 한다. 오늘날에도 우리 모두가 이런 정신과 보조로 행할 때 하나님의 일은 잘될 것이다.

이제까지 사도 바울의 변명은 단지 자기 변명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런 의미뿐이라면 그가 그렇게 변호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주를 위해 죽기를 각오한 자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변명은 단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고린도 교인들의 유익을 위함이었다. 그것은 다른 말로 그들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가 하고자 한 일은 주의 복음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모든 뜻 안에 그들을 굳게 세우는 것뿐이었다. 오늘날에도 복음사역자들의 관심은 영혼들의 구원과 구원받은 자들의 성화 곧 영적 성장뿐이다.

[20-21절]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사도 바울의 주관심은 그들의 회개이었다. 그는 그들이 회개하고 순종하며 사는 것을 보기를 원하며, 자신도 그들에게 책망의 얼굴로가 아니고 사랑과 기쁨의 얼굴로 대하게 되기를 원했다. 또 그는 그들이 회개하여 다툼이나 시기나 분냄이나 당 짓는 것이나 중상함이나 수군수군함이나 거만함이나 어지러운 일들이 없기를 바랬고, 또 그가 다시 그 곳에 갈 때 그들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기를 원했고, 또 이전에 범죄했던 자들이 그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떠나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했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생을 얻는 것일 뿐 아니라, 이제는 서로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음란하지 않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구원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그런 참된 믿음과 변화된 삶을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모든 것, 성경에 어긋나는 모든 것, 모든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위를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도의 표는 기적을 행하는 것이었다. 12절, “참으로 사도의 표들은 모든 참음 가운데서 표적들과 기사들과 능력들에 의해 행해졌도다.” 마태복음 10:1,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마가복음 3:13-15,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병들을 고치며](전통사본)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사도들이 병들을 고치며 기적을 행한 것은 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권위의 표이며 신분증과 같았다.

둘째로, 사도 바울의 주관심은 교인들의 재물이 아니고 교인들 자신이었다. 14절,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바울은 그들의 재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들 자신이 구원받은 자가 되는 것을 원한다. 그는 그들에게 폐를 끼치기를 원치 않는다. 그의 동역자들도 동일한 정신으로 그들을 위해 일하였다. 기독교는 단지 현세의 문제, 육신의 문제, 물질적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몸의 건강과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 그러나 기독교의 참된 관심은 죄 문제의 해결,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문제, 영생과 천국의 문제에 있다. 그것은 영원한 평안과 행복의 문제이다. 그것은 참된 회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이다.

셋째로, 사도 바울의 주관심 속에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덕을 세움, 즉 그들의 성화와 온전함이 있다. 이것은 모든 전도자와 목회자들의 주관심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은 성도들로 온전케 하기 위함이며(딤후 3:17), 하나님께서 교회에 목사들을 주신 목적도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엡 4:11-12).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해 세운 고린도교회가 온전케 되기를 원한다. 그는 그들 가운데 다툼이 없고 서로 사랑하며,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말씀의 사역자를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며, 또 음란하지 않고 거룩하기를 원한다. 그 일을 위해 그는 편지로 교훈했었고 또 지금도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온전해야 한다.


13장: 권면과 축도

1-7절,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라

[1절]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 터이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사도 바울은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 터이라”고 말한다. 그는 첫 번째는 그가 소아시아에서의 전도를 마치고 소위 2차 전도여행에서 유럽 전도를 시작할 때 마게도냐 지방에 있는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전도했고 또 그 후에 아가야 지방의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전도함으로써 고린도 교회를 세웠었다. 고린도에서의 그의 전도 사역은 사도행전 18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그 곳을 떠난 후, 고린도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듣고 고린도전서라는 편지를 썼었다. 그 편지의 끝부분에서 그는 마게도냐를 지난 후 다시 그들에게 나아가서 겨울을 지날 뜻을 보였었다(고전 16:5-6).

그러나 고린도후서의 초두에, 그는 자신의 계획을 바꾸어 고린도 교인들에게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해 먼저 고린도로 갔고 거기서 마게도냐로 갔다가 또 다시 고린도로 가서 거기서 유대로 가려고 하였었으나, 고린도를 떠나 마게도냐로 간 후 다시 고린도로 가지 못하였음을 말했다(고후 1:15-16, 23). 그는 가지 못한 대신에 많은 눈물의 편지를 그들에게 썼었다(고후 2:4). 아마, 그의 두 번째 방문 후에 그는 고린도 교회 내에 있었던 어떤 거짓 교사들과 또 그들의 영향을 받은 어떤 교인이 그의 사도직을 부정하는 작지 않은 도전을 받았던 것 같다. 고린도후서는 이런 상황에서 부수적으로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목적도 가지는 서신으로 쓰여졌다고 보인다.

그는 이제 세 번째 그들에게 갈 예정이며 이 일은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정할 것이라고 말한다. 율법은 사람의 죄를 확정할 때 한 증인으로만 하지 말고 두세 증인의 입으로 하라고 규정했다(신 19:15).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진실하게 말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하고, 또 그의 진실성은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증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2절]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다시 가면 죄를 회개치 않는 자들에 대해 징벌할 것이라고 엄하게 경고한다. 사도 바울의 주관심은 죄 문제이었다. 하나님의 주관심도 죄 문제이다. 우리의 주관심도 죄 문제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는 죄 문제이며 범죄자들의 문제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회개해야 한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죄를 회개하고 죄씻음을 받은 자들만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릴 수 있다.


[3절]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살아계셔서 사도 바울 안에서 그리고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셨으나, 고린도 교인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 증거를 요구하였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약한 모습만 보았고 사도 바울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향해 결코 약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강하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오늘날도 주께서는 주의 신실한 종들 안에서 말씀하시고 그들을 통해 일하신다. 비록 주의 종들이 외적으로 연약하게 보일지라도 그들 안에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약하지 않으시고 강한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종들의 연약한 외모만 보지 말고 그들을 세우시고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능력의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4절]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는 참으로 약하게 보였지만 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다. 이와 같이, 주의 종들은 사람들 보기에 약해보이지만,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며 일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의 종들의 능력이 되시며 그들을 통해 능력으로 일하신다.


[5절]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들의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말한다. 또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심을 알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성도들 속에 계신다.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가진 인격자로서 그는 지금 하늘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지만, 그의 신성(神性)의 영으로는 지금 그를 믿는 성도들 속에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을 받게 되었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게 된 것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만일 그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바울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참된 믿음을 가졌다면 바울의 권면대로 회개하고 순종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속에 계심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은 버리운 자일 것이다.

[6-7절]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리운 자 같을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버리운 자가 아님을 확신하고, 고린도 교인들도 그 사실을 알기를 바란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순종하는 자들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신이 옳은 자임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고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죄에서 떠나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참된 믿음과 구원은 거룩하고 선한 삶으로 나타난다. 구원받은 신자들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선한 삶을 살도록 이끄신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목적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딛 2:14). 예수께서는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다(마 7:17). 구원받은 자들은 의롭고 선하게 산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교회는 범죄자를 징벌해야 한다. 마태복음 18:15-17,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교회는 거룩한 자들의 모임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우리 안에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증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2:3,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로마서 8:9,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셋째로, 우리는 악을 행치 말고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요한일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성도는 악을 버리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8-13절, 권면과 축도

[8-10절] [이는]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뿐임이니라.] [이는]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우리가 약하나 너희가 강할 때에]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것임이니라]. 이를 인하여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파하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진리를 거슬러 행하지 않고 진리를 위하는 자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만 위하고 진리대로만 행하고 사람 앞에서 진실만을 말하였고 또 계속 그러하기를 원한다. 마귀의 세계는 거짓의 세계이지만, 하나님의 세계는 진실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진리만 위하고 진리대로만 행하고 진실만 말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약하지만 고린도 교인들이 믿음에 굳게 서서 강건하게 행하는 것을 기뻐하며, 또 그들이 온전하게 되기를 기도한다고 말한다. 사람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후에도 몸의 죄성이 남아 있어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완전한 의를 실제의 삶 속에서 나타내어야 한다. 이것이 성화(聖化)의 과정이다. 성화의 목표는 도덕적 완전이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온전케 되기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야 하고 또 자신도 애써야 한다. 바울은 성도들의 온전함을 위해 일하는 일꾼이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을 떠나 있을 때에도 그들의 온전함을 위해 편지를 썼다. 만일 그들이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도의 권세로 그들을 징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모든 부족과 연약을 회개하고 고침으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다.

[11-12절]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생각]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 또[그러면]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몇 가지를 권면한다. 첫째로, 그는 “기뻐하라”고 말한다. 그들은 죄를 범했을 때 근심했지만, 이제 회개했으므로 기뻐해야 한다. 이 세상에는 슬프고 근심된 일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님 믿는 우리들은 창조주와 섭리자 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사실 때문에, 또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천국 기업 때문에 근심 걱정이 많은 세상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다. 기쁨의 생활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정상적 생활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빌립보서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둘째로, 그는 “온전케 되라”고 말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부족을 고치고 온전해져야 한다. 우리는 개인의 성화(聖化)와 온전함을 위해 성경말씀의 권면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서로 권면하고 기도해야 한다. 마태복음 5:4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골로새서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셋째로, “위로를 받으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환난에서 위로하시는 자이시다(고후 1:3-4). 특히 그는 책망의 편지로 인해 근심하며 회개했던 자들과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위로한다. 범죄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지만,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선언된다.

넷째로, 그는 “생각을 같이하라”고 말한다. 고린도 교회에는 분열과 파당이 있었고 거짓 교사들을 인해 사도 바울을 향해서도 간격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모든 교만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을 같이하고 온유와 겸손과 순종으로 일치단합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생각]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다섯째로, 그는 “평안하라”고 말한다. 평안은 죄씻음의 구원에서 오는 큰 복이다. 이 평안은 성도 상호간의 화목을 포함한다. 지상에서의 성도들의 거룩한 교제와 문안과 화목은 참으로 아름답고 복되다.

사도 바울은 “그러면 사랑과 평안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온전케 되고 생각과 마음을 같이하고 서로 화목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13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있기를 원하노라](벧전 1:2; 벧후 1:2). [아멘.]6)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은혜이다. 그의 보혈은 우리의 과거의 추하고 더러운 죄들을 씻어주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또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부족과 실수와 연약을 씻어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구원의 사랑이다. 그 사랑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무제한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은 택자들에게만 제한되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셨고, 또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의 완성 곧 영화의 단계에까지 이끄실 것이다. 하나님의 그 사랑은 너무 크고 놀라워 아무도 그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측량할 수 없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을 중생(重生)시키시고 회개와 믿음을 주시고 우리 속에 거하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시며 의의 길로 가게 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성령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과 구원받은 자들 속에 영원히 거하시는 목적은 바로 구원과 의를 위해서이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실제로 시작하시고 완성하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신앙생활은 성화(聖化)의 과정이며 그 목표는 도덕적 완전이다. 우리는 이 목표를 향해 힘써 달음질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말씀의 교훈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베드로후서 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둘째로,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위로를 받아야 한다. 슬픔과 근심이 많은 세상이지만,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구원 때문에, 천국과 영생 때문에 항상 기뻐해야 하고 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위로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늘 위로를 받고 힘을 잃지 않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생각과 마음을 같이하고 서로 화목해야 한다. 인간의 삶은 인간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가정에서 또 교회에서 생각과 마음을 같이하고 서로 화목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으로 행하는 자들의 모습이다. 우리는 온유와 겸손과 오래 참음 가운데서 서로 생각을 같이하고 서로 화목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도우심과 복 주심을 늘 사모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만세 전에 택함을 받았고, 때가 되어 성령의 중생케 하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고,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오셔서 거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도우신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과 복 주심을 받으며 더욱 사모하며 누리자.


미주

1) 메이천, 신약개론, I, 208-211쪽.

2) Byz vgcl Origengr 등이 그러함.

3) Byz UBS itd vg syrp 등.

4) Byz vgcl arm Origen 등이 그러함.

5) Byz vg syrp arm geo Clement Origenlat 등은 생략함.

6) Byz D lat syr copbo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