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바울서신 강해·김효성목사 기타

고린도전서 8장: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 16장: 사랑의 교제

영국신사77 2020. 4. 15. 18:11


제목차례

8장: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9장: 스스로 자유를 제한함

10장: 우상숭배치 말것

11장: 머리 수건과 성찬

12장: 성령의 은사

13장: 사랑의 덕

14장: 방언과 예언

15장: 부활

16장: 사랑의 교제


8장: 우상 제물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8장부터 10장까지에서 우상 제물에 대해 교훈한다.

[1-3절]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우상 제물에 대하여는 초대교회 안에 이미 충분한 지식이 있었던 것 같다. 신앙생활에 지식은 꼭 필요하지만, 지식만으로 충분치 않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덕을 세울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다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한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에 대한 지식과 사랑을 함께 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아시는 자로 그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다.

[4-6절]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마치]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있는 것 같으나](원문, KJV, NASB, NIV)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신적 존재나 초인간적 존재가 아니다. 그것이 우상에 대한 바른 지식이다. 세상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시편 115:4-5,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옛날부터 사람들은 참 하나님이 아닌 많은 거짓 신들을 상상해내었다. 사람들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신격화하였고 또 땅의 나무들이나 돌이나 짐승들을 신격화하였다. 종교들의 역사와 현상만 본다면 세상에 많은 신들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세상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 계신다.

그는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아버지이시다. 천지만물은 그가 만드셨다. 이 세상의 물질 세계나 영들의 세계는 다 그 창조자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사람들도 그가 만드셨다. 천지만물을 만드신 창조자 하나님 외에는 이 세상에 참 신이 없다. 예레미야 10:10-11,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또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았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해]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특히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주’라는 명칭은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명칭은 고대의 헬라어 번역에서 ‘주’라고 번역되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요 1:1), 우리의 크신 하나님(딛 2:13), 참 하나님(요일 5:20)이시기 때문에 주라고 불리신다.

[7-8절]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우상의 생각을 가지고](전통본문)10)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러워지느니라. 그러나]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우상숭배는 우상을 초인간적, 신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으로 참 경건에서 떠나게 하는 사상이며 마귀가 주는 헛되고 거짓된 사상이다. 사람은 우상의 제물을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을 때 우상숭배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의 양심을 더럽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상 음식과 신앙생활은 별개의 문제이다. 음식을 먹어서 믿음이 자라고 견고해지는 것은 없다. 음식은 먹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다. 우상의 제물도 그러하다.

[9-11절]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자유함’이라는 원어(엑수시아)는 ‘자유, 권리’라는 의미이다. 본문은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지식을 가지고 우상의 제물을 먹을 자유가 성도에게 있을지라도, 그 행위가 약한 자들로 범죄하게 하는 일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는 아직도 우상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우상제물이 복을 가져올 것처럼 생각하는 연약한 성도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지식 있는 자가 우상의 집에서 먹는 것을 보고 양심이 잘못된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우상의 제물로 생각하며 먹음으로 범죄할 수 있었다. 그러면 그 지식 있는 자의 행위는 그 연약한 자로 범죄케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지식을 가진 자의 행위가 약한 형제로 범죄케 하여 그를 멸망케 한다면, 그것은 결코 선한 행동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를 멸망케 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셨다면 우리도 그를 위하는 자가 되어야지 그를 멸망케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12-13절]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예수님의 속죄의 피로 구원받은 형제는 그의 몸된 교회의 지체이므로 그에게 잘못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잘못을 행하는 것이다. 주께서 고난 당하시고 피흘려 사신 형제를 나도 사랑하고 그를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힘쓰겠다는 마음은 바르고 선한 결심이다.

고린도전서 8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세상의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한 분뿐이시다.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시편 115:4-5,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이방신들은 다 허무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참 신이 아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만 참 신이시다.

둘째로, 비록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사람이 우상의 생각을 가지고 우상 제물을 우상 제물로 알고 먹으면 먹는 사람의 양심이 더러워진다. 우상의 생각을 가지고 우상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우상을 신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우상 제물이 자기에게 복이 된다고 생각하며 먹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상의 생각을 가지고 우상 제물을 먹는 자는 우상숭배의 죄를 짓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약한 형제를 범죄케 하는 것은 그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일이 된다. 이것은 술과 담배의 문제에도 적용되고,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는 교단에 머무는 태도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연약한 성도가 술과 담배에 인이 박히지 않도록 금주와 금연을 실천해야 하며 성경과 역사적 기독교를 믿는 목사들은 자유주의 교단들을 비평하고 교제를 끊음으로써 성도들에게 바른 것을 증거해야 한다.

9장: 스스로 자유를 제한함

[1-5절]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發明)[대답]할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바울은 종의 신분이 아니고 자유자이었다. 그것은 육신적인 의미에서 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도 그러했다. 그는 자유자일 뿐 아니라 또한 사도이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보았다. 바울은 사도로서 고린도교회를 세웠다. 주께서 그를 사도로 세워 복음 전파자로 사용하신 한 구체적 증거가 바로 고린도교회이었다. 그는 그의 사역을 트집잡는 자들에게 대답한다. 그는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먹고 마시는 자유를 스스로 제한했고,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는 결혼하고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녔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스스로 독신의 길을 택했다. 그것은 좀더 복음 사역에 자유롭게 전심 전력하기 위해서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한 것이다. 신자에게 죄 아닌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무엇이든지 포기하거나 제한할 수 있다.

[6-10절]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自費糧)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주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아 복음 사역에 전념하는 자가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세상에 자비(自費)로 군인이 되는 자가 없고 포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지 않고 양떼를 기르고 그 젖을 마시지 않는 자가 없다. 일꾼이 먹을것 얻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바울은 그 권리를 다 쓰지 않았고 친히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필요한 돈을 벌었다(행 18:1-3). 그는 신명기를 인용하면서, 소에게 일을 시킬 때 먹이면서 시키듯이, 교회가 일꾼들에게 먹을것을 주는 것은 합당하다고 말한다. 교회가 전임사역자들에게 거처할 곳과 생활비를 제공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합당하다고 본다.

[11-12절]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신령한 것’은 복음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켰고, ‘육신의 것’은 의식주에 관한 것을 가리킨다. 신령한 것은 영원하지만, 육신의 것은 세상에서만 유용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는 물질에 비교될 수 없다. 돈을 가지고 영원한 진리를 살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가치를 안다면 그 진리를 연구하고 전하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하는 일은 아까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은 결혼할 자유가 있고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받을 권리가 있지만, 그 자유와 권리를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보화이다. 인생의 참 기쁨, 참 행복, 참 평안, 참 생명이 그 안에 있다. 이 복음은 물질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에 비교될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복음이 장애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 현세적인 것을 양보하고 그것을 사용할 자유와 권리를 스스로 제한한 것이다.

[13-15절]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 . .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제물의 한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고 남은 부분은 먹도록 되어 있었다(레 2:3; 7:14, 31, 32).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내실 때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셨다(마 10:9-10). 주의 일꾼들이 그 사역하는 곳에서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받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권리들을 쓰지 않았다. 그는 의식주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독신으로 살았다. 그것은 복음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16-17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자원해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오이코노미아)[임무]을 맡았노라.

복음은 영혼 구원의 소식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구주로 세상에 오셨다. 이제 죄인들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얻는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사람에게 가장 귀한 소식이며 전도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 일을 자랑하지 않는 것은 부득불 할 일, 즉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전도는 주께서 그에게 맡기시고 명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그가 해야만 할 의무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자신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모든 성도가 다 전임전도자가 되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 신자 중 누가 육신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자원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전임전도자가 된다면, 그것은 상을 얻을 일이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라는 특별한 직분과 임무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복음 전도의 직분과 의무에 충실해야 했다. 오늘도 주께로부터 교회의 직분들을 받은 자들은 그 직무들에 충실해야 한다.

[18절]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마땅한 의무이므로 거기에서 상을 기대할 것은 없다. 단지, 그의 상은 그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했고 그의 권리를 다 쓰지 않은 데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의무를 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상을 기대할 것이 없지만, 의무 이상을 행했을 때 우리는 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19-21절]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전통본문에는 없음)11)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은 자유인이지만 주의 교훈대로(마 20:26-27; 23:11-12) 모든 사람에게 종처럼 처신했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었다. 그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한 것이다. 그는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으로서 처신하였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마치 자신도 율법 아래 있어서 율법의 의무를 지켜야 하는 자인 것처럼 처신했다. 그는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때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들 때문에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했는데, 그 까닭은 사람들이 그의 부친이 헬라인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행 16:3). 그러나 그는 율법 없는 자들 곧 이방인들에게는 비록 그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이지만 율법 없는 자같이 처신했다. 그 까닭은 그가 율법 없는 자들 곧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함이었다.

[22-23절]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참여]하고자 함이라.

사도 바울은 약한 자들을 대할 때 자신도 약한 자인 것처럼 처신하여 그들을 구원하려 했다. 그는 실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진리와 의 안에서의 처신이어야 하며 비진리와 악을 포용하는 처신이어서는 안 된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악을 포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진리와 의 안에서, 즉 죄 되는 일이 아닌 한,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을 비웠고 그가 처한 환경에 자신을 적응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사도 바울의 행동 원리는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이었다. 이로써 그는 복음에 참여하기를 원하였다. 복음의 일은 영혼 구원의 일이다. 복음에 참여하는 것은 영혼 구원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일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귀하기 때문에 그는 이 일을 위해 자신을 제한하고 조정하고 심지어 포기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 바울같이 복음을 위해 자신을 제한하고 조정하고 포기하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인 복음의 일, 곧 영혼 구원의 일과 참된 교회의 건립을 위해 우리 자신을 기꺼이 드려야 할 것이다.

[24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달리기 경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출발 지점에서 출발 신호를 받고 달리기 시작하지만, 1등의 상은 한 명에게만 돌아간다. 그 상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달리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마치 달리기 경주와 같다. 우리는 상을 얻기 위해 달리는 경주자들처럼 상급을 기대하며 힘써 달려야 한다. 성도는 경주자처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25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좋은 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이나 금메달을 목에 거는 운동 선수들은 시간을 아끼고 육신적 즐거움을 절제하였을 것이다. 영적 생활도 비슷하다. 영적 생활은 더 고상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 세상의 경쟁은 썩어질 면류관을 얻는 경쟁이나, 영적 경쟁은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는 경쟁이다. 우리의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벧전 1:9) 곧 영생이며(롬 6:22) 하나님께서 주시는 존귀와 영광이다(롬 2:7). 세상의 모든 것들은 썩는 것이지만, 영생은 영원히 썩지 않을 존귀하고 영광스런 일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신앙생활에서 승리하려면 시간 절제, 돈 절제, 힘 절제, 의식주 절제 등 절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26-27절]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사람은 열심히 살기만 하면 되지 않고 바르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 교회 봉사자는 단지 열심히 일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목표와 방법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 격투하는 자가 상대를 치지 않고 열심히 허공만 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목표는 영혼 구원의 일이었다. 그는 그 일을 목표로 삼고 전심전력하였다.

성도도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몸의 욕망대로 따라가면 실수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전도자라 할지라도 죄 가운데 빠져 산다면 그는 남은 구원해놓고 자신은 버림받는 자가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가상적 경고라고 본다. 참으로 중생한 자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고는 성경에 종종 나오고 또 필요한 경고이다(롬 8:13). 그러므로 바울은 주께서 주신 영혼 구원의 임무를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했고 범사에 절제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몸을 쳐 복종시키는 일이었다. 우리의 몸은 편안하고 즐거운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몸이 원하는 대로 살면 실패자가 되기 쉽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절제하고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

고린도전서 9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잘 달음질한 사람은 상을 얻을 것이다. 달리기 경주자가 잘 달릴 때 상을 얻는 것과 같이, 신앙의 경주도 잘 할 때 상을 얻을 것이다. 그것은 영생의 상이라고 표현된다.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썩는]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빌립보서 3:14, “[나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둘째로, 이기는 자가 상을 얻을 것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기는 것은 계명에 순종하여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요, 지는 것은 범죄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사자들에게 이기는 자가 될 것을 교훈하셨다(계 2-3장).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주께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께서 중생시키신 자들은 다 이길 것이다(요일 5:3-4).

셋째로, 신앙의 경주를 잘 하고 이기려면 모든 일에 있어서 절제해야 한다. 25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사람들은 썩을 면류관을 위해 절제하며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 주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교훈하셨다(눅 9:23). 자기를 부인하는 자는 절제할 수 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이다(갈 5:23). 구원받은 성도는 범사에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10장: 우상숭배치 말 것

[1-4절]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모든 인류와 신약 성도들에게 교훈이 된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통과했던 때의 일을 말한다. 그들은 그때 다 구름 즉 구름기둥 아래 있었고 또 바다 즉 홍해 가운데로 지났다(출 13:21-22; 14:19-24). 그들은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로 구름 아래서와 죽음의 바다에서 죄씻음의 세례를 받은 것과 같았다. 또 그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를 먹었고(출 16:13-15; 시 78:25; 105:40) 또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다(출 17:5-6). 사도 바울은 그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였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우리에게 참 양식, 곧 생명의 양식이요 참 음료, 곧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48, 51, 55; 7:37-39).

[5-6절]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굽에서 나온 20세 이상의 남자들 약 60만명 중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다 광야에서 죽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러한 실패의 역사는 우리의 거울과 본보기가 된다. ‘거울’이라는 원어(튀포이 tuvpoi)는 ‘예들, 본보기들’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본보기들을 성경에 기록하여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처럼 악을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얻는 것이며 다시는 죄 가운데 살지 않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7-8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23,000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의 역사에서 가장 큰 죄는 우상숭배이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며 하나님 대신 하나님 아닌 것, 곧 우상들을 섬기는 것이 가장 큰 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 지혜와 참 지식의 시작이다(잠 1:7). 우리는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섬기지 말아야 한다. 돈도 육신적 쾌락도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최고의 가치가 될 수 없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오직 창조주와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를 믿고 사랑하고 섬기며 그의 모든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인간 관계의 죄들 중 첫째로 중요한 죄는 간음이다. 하나님께서는 부부 관계를 벗어난 음란 행위들을 매우 미워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음행하다가 하루에 23,000명이 큰 재앙으로 죽었다. 민수기 25:9의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24,000명이었더라”는 말씀은 나무에 처형한 백성의 두령들의 수를 포함한 것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과 부부 관계의 순결을 중시하신다. 우리 각 사람은 가정과 부부 관계의 순결과 사랑을 잘 지켜야 한다.

[9-10절]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그리스도](전통본문)12)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 중에 어떤 이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심을 의심했고 하나님 앞에서 불평하며 원망했다가 뱀에게 물려 죽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늘 함께하시며 도우시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그는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이런 믿음이 있는 자는 병에 걸렸을 때나 물질적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도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현실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고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러지 못하였다.

[11절]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교훈](NASB)로 기록하였느니라.

‘말세를 만난 우리’라는 말은 신약시대가 말세임을 증거한다. 성경은 지구의 역사가 대략 6천년임을 증거한다. 성경은 정확한 역사책이다. 아담은 창조된 후 거의 천년 가량 살았고 그가 죽은 지 얼마 후 노아가 태어났다. 아담의 창조 후 2천년경에 아브라함이, 3천년경에 다윗이, 4천년경에 예수께서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마지막 때에 자기 아들을 보내주셨다. 주께서 승천하신 후 2천년이 지나고 있으니 확실히 지금은 말세지말(末世之末) 즉 말세의 마지막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는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고 또 말세를 당한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우리는 그들의 실패를 거울삼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에 빠져 실패자가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12-13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섰다’는 말은 믿음과 순종의 생활을 한다는 뜻이고 ‘넘어진다’는 말은 불신앙과 불순종의 삶 즉 범죄하는 삶을 가리킨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이 믿음에 섰고 순종하며 산다고 자신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늘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지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만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또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거나 하나님을 의심하는 불신앙에 떨어지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행하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기를 힘쓰면서 의와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4절]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우리는 우상숭배를 피해야 한다. 우상숭배는 유일하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의 제1, 2계명을 범하는 큰 죄이다. 오늘날 돈이나 자기 자신이나 육신의 쾌락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일종의 우상숭배이다. 사도 바울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말하였다(골 3:5).

[15-18절]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성찬의 떡과 포도즙은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리스도의 몸과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성도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의 십자가 사역으로 이루신 속죄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성찬의 떡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며 그 떡을 떼어 모든 사람에게 나누는 것은 우리가 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신비한 한 몸이 됨을 나타낸다.

[19-20절]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대저[그러나]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바울은 이미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고전 8:4). ‘대저’라는 원어(알르)는 ‘그러나’라는 뜻이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방인의 제사는 종교적 성격을 띤다. 구정이나 추석 때에 조상들을 위해 드리는 제사나 차례는 단순히 조상을 공경하는 행위가 아니고 종교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우상이나 조상신은 신이 아니고 어떤 신적 존재도 아니며 세상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의 제사는 귀신들에게 하는 악하고 헛된 일이다. 이방인들의 제사하는 것이 귀신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그들의 신이나 그들의 우상을 인정하고 그 우상숭배에 빠져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21-22절]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치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성도는 이방인들의 제사 행위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불신자가 섬기는 신이나 조상신이나 우상을 인정하거나 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상숭배에 빠진다면 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크게 노여워하실 것이다. 그는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만 섬기며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과 다투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23-24절] 모든 것이 [내게]13)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14)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사도 바울은 8장에서 신약성도들이 우상제물에 대한 지식과 자유함이 있음을 말했다(1, 7, 9, 10, 11절). 그러나 비록 우상제물에 대해 자유함이 있다 할지라도,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고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우상제물에 대한 바울의 교훈의 방향은 분명하다. 우상제물은 다른 이들의 유익과 덕을 위해 먹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성도가 우상제물을 먹어도 되니 먹으라는 교훈이 아니고 먹을 수 있으나 먹지 말라는 교훈인 것이다. 성도가 우상제물을 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상제물 자체의 불결함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유익과 덕을 위해서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희생하셨다. 우리가 그를 아는 자라면, 우리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살지 말고 다른 이들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

[25-26절]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사도 바울은 시장에서 파는 음식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이든지 아니든지 상관치 말고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말하였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이 세상에 우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상은 신이나 신적 존재가 아니다. 이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에 불과함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 때 그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27-30절]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전통사본).15)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불신자가 식사 초청을 할 때 성도는 가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그때 그 앞에 차려진 식탁에 우상제물이 있을지 모르지만, 성도는 함께 동참한 자들의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그냥 먹으면 된다. 그러나 어떤 이가 식탁의 음식물 중 어떤 것을 우상제물이라고 말하면 그는 알게 한 자의 양심을 위해 그것을 먹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함께 식사하는 이들 가운데 연약한 자의 양심에 거리낌을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먹는 일이 비방을 받게 해서는 안 된다.

[31-33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우리는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범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모든 사람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10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역사는 거울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와 간음과 원망의 범죄와 하나님의 징벌의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감당할 시험만 주시고 시험과 함께 피할 길도 주시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둘째로, 우리는 특히 우상숭배하지 말아야 한다. 이방인들의 제사는 귀신들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그런 제사에 참여하여 귀신들과 교제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덕을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가능해도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 덕의 중요성이 있다. 덕이란 것은 남의 유익을 위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가 영적으로 성숙할 때 우리는 덕을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남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 

11장: 머리 수건과 성찬

[1-2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성화의 과정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본이 된다. 위선은 구원 운동에 큰 장애물이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하나님의 종들이 전한 바른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자기 생각을 따라 성경을 가감하지 않고 성경의 교훈대로 믿고 행한다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칭찬을 받을 것이다.

[3절]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사도 바울은 남녀의 지위의 차이에 대해 말한다. 구원받은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머리’라는 말은 주관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각 남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한다. 남녀의 지위의 차이를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남자가 자기의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다. 이것은 남녀가 본질에 있어서나 영적인 특권에 있어서 차등하다는 뜻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했다(갈 3:28). 남녀는 본질에 있어서나 영적인 특권에 있어서 동등하다. 그러나 남녀는 그 지위와 역할에 있어서 다르며 여자를 주관할 자가 남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대하여 한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신성(神性)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과 본체이시며 그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시지만, 그의 인성에 있어서 사람으로서 사람들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며(딤전 2:5) 하나님께서는 인간 예수보다 크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4:28에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는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고 말씀하셨다.

[4-6절]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기도하는 것은 주로 대표기도에 적용되며 예언하는 것은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아 말하든지 아니면 성경을 해석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 즉 오늘날 설교에 해당한다고 보인다. 교회의 집회 시 기도나 설교를 할 때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일이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공적인 집회 시 여자들이 기도나 예언을 한 일이 있었던 것 같으나 바울은 본 서신의 뒷부분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교훈하였다(고전 14:34). 물론 여자들이 여성도들만의 모임이나 미성년자들의 모임에서는 기도나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때에도 여자가 머리에 수건이나 모자를 쓰는 것이 합당하다고 가르친다.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그가 그의 머리인 남편의 권세 아래 있음을 표시한다.

[7절] [이는]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영광임이니라].

남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므로 그것을 가리우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며,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할 이유는 여자가 남자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물론, 남자만 하나님의 형상이고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 1:27). 남녀가 다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드신 후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온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그 둘이 다 하나님의 형상의 영광을 가지지만, 여자는 또한 남자의 영광이기도 한 것이다.

[8-10절]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엑수시아 ejxousiva)[권세]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남자와 여자가 그 지위와 역할에서 구별된다는 것은 사람 창조의 사건에서 잘 증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남자를 만드시고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 또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지음을 받았다. 여자의 머리 수건 혹은 모자는 그가 남편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천사들을 인하여’라는 말은 교회의 공적인 집회 시간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성도들과 함께 있음을 가리킨 듯하다.

[11-12절]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남녀는 이처럼 지위적, 역할적 차이가 있지만, 영적 특권에 있어서는 동등하며 실상 상호의존적이다. 아담 이후 모든 남자는 여자에게서 출생했다. 그러므로 남자가 여자를 무시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주 안에서 구원받은 남녀는 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벧전 2:9).

[13-16절]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므로 긴 머리도 합당치 않다. 그러나 여자의 긴 머리는 여자에게 영광이 되며 머리에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어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인정된 규례이므로 누구든지 이 문제에 대해 변론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17-19절]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당파들]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고린도교회의 모임은 유익이 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분쟁과 분열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파들은 교인들의 지식과 믿음과 인격이 부족하므로 생긴다. 그러나 이런 일을 통해 바른 견해가 드러날 것이다.

[20-22절]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고린도교회에는 거룩한 성찬 모임이 변질되고 있었다. 이것은 그 교회의 큰 흠이었다. 또 이런 일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행위이었다. 그것은 고쳐져야 했다.

[23-25절]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파레디데토 paredivdeto)[혹은 ‘배반당하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전통본문).16)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위하여 찢는]17)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원문)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 하셨으니.

성찬은 주께서 친히 제정하신 규례이다. 성찬의 떡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 그것은 양손과 양발이 못에 찢어지고 머리가 가시면류관으로 찢기고 옆구리가 창에 찔려 상한 몸이었다. 성찬의 잔은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주께서는 그 피를 새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신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믿는 자와 맺으신 언약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죄인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성찬은 새 언약의 표와 확증이다.

[26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속죄의 진리를 나타낸다. 속죄란 속죄제물이 죄인들을 대신해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속죄도, 죄씻음도, 구원도, 영생도 없었을 것이다. 성찬은 그의 속죄사역을 증거한다.

[27-29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크리마)[정죄, 심판]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성찬의 떡과 잔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상징적 일치가 있다. 물론 떡이나 포도즙 안에 그의 몸과 피가 있다거나 그것들이 그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같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것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면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자신을 살핀 후 이 의식에 참여해야 한다.

[30-32절]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잘못된 태도로 성찬에 참여한 결과, 고린도교회 안에는 심신으로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았고, 잠자는 자 곧 죽은 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성도가 징계를 받는 것도 유익하다. 그것 때문에, 그가 회개함으로 세상과 함께 영원한 멸망을 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33-34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고린도교회는 성찬식이 당파적 식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하나님의 교회의 모임이 정죄받는 모임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고린도전서 11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본문은 여자가 머리에 수건이나 모자를 쓰든지 긴 머리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남편의 권세 아래 있음을 나타낸다. 남녀는 영적 특권에 있어서는 동등하지만, 지위와 역할에 있어서는 구별된다. 여자의 긴 머리는 머리 수건이나 모자를 대신하여 주신 것이다. 이것은 특히 여자가 공적 모임에서 기도할 때나 말씀을 전할 때 해당된다고 본다.

둘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면서 시시때때로 성찬 의식을 행해야 한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친히 세우시고 명하신 바이며 우리가 주의 재림 때까지 행해야 할 의식이다. 그것은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죄씻음을 증거하는 의식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것들이 많지만(건강, 직장, 사업, 소득, 가정),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 양식과 음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고 또 항상 성경말씀과 믿음과 지식과 성화(聖化)의 진전과 영혼의 안식처와 같은 교회와 사랑하는 성도들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성찬 시 바른 지식과 믿음이 없이 참여함으로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성찬의 떡과 포도즙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생각하며 먹고 마셔야 하고, 이런 믿음 없이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된다.

12장: 성령의 은사

[1-3절]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신령한 것’은 성령의 은사들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도 알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말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 다녔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 허무한 것들에게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된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라고 말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할 수 없다. 성도는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이라고 바르게 믿고 고백하며 구원을 받은 자이다.

[4-7절]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은사’(카리스마)는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을 가리키며, ‘직임’(디아코니아)은 봉사의 직분을 가리키고, ‘역사(役事)’ (엔에르게마)는 일하심이라는 뜻이다.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은사들과 직분들과 역사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하심이다. 성령께서 다양한 은사들을 주시는 목적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것은 개인의 유익뿐 아니라, 교회 전체의 유익을 말한다.

[8-11절]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본문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언급한다. ‘지혜의 말씀’은 현실에 바르게 대처하게 하는 말씀을 가리키며, ‘지식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깨달음과 지식을 가리킨다고 본다. ‘믿음’의 은사는 기적에 대한 믿음을 가리키는 것 같다. ‘예언함’은 하나님의 뜻을 대언(代言)하거나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며, ‘영들 분별함’은 사람의 생각을 분별하는 것을 가리키며, ‘각종 방언 말함’은 다른 나라의 말을 하는 것이고, ‘방언들 통역함’은 그 말을 통역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방언은 외국어를 가리킨다고 본다. ‘방언’이라는 원어(글로싸)는 ‘언어’라는 뜻이다(행 2:11; 계 5:9; 7:9; 10:11; 11:9; 13:7; 14:6; 17:15). 오순절에 약 15개 지역에서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각각 자기 지역의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했고(행 2:6)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행 2:8),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말했다(행 2:11). 또 성경에 ‘방언들’(복수명사)(행 10:46; 19:6), ‘새 방언들’(막 16:17), ‘다른 방언들’(행 2:4)이라는 표현들과,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다든지, 그것을 기도와 찬송에 사용한다든지, 그것을 통역한다는 것 등도 방언이 언어임을 보인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을 전달하고 확증하기 위해 주신 것이었다. 그것들은 사도시대에 신약성경이 완성된 후 거두어졌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거두신 것은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그 목적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마치 건물을 짓기 위해 설치된 비계들이 건물이 완성된 후 철거되는 것과 같았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초자연적 은사들 외에 여러 가지 자연적 은사들도 나누어주심으로 교회에게 유익을 주셨다. 로마서 12:6-8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은사, 섬기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권면하고 위로하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 관리하는 은사, 긍휼을 베푸는 은사 등을 언급하였다. 우리는 거기에 찬양의 은사도 포함할 수 있다.

성령의 은사들은 다양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한 성령께서 자기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돌아보신다. 영혼들을 구원하시고 양육하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다. 성령께서는 개인을 중생(重生)시키시고 점점 더 거룩하게 하시고 마침내 교회 전체가 온전케 되게 하신다.

[12-13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이는]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하셨음이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이다. 사람의 몸은 머리, 눈, 코, 귀, 입, 손, 발 등 많은 지체들과, 뇌, 위, 간, 폐, 심장 등 약 128개의 기관들과 200개 이상의 뼈들과 600개 이상의 근육들로 구성되었고, 뇌(腦)는 약 80억개의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사람의 몸에 많은 지체가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도 많은 지체들과 직분들이 있어 한 교회를 이룬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들이 된 것은 성령의 세례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성령의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성령세례는 민족, 피부 색깔, 사회적 신분, 직업, 경제 정도 등을 초월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 믿고 죄씻음받아 한 몸이 되는 경험이다. 그것은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믿는 이들이 두 번째의 경험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모든 믿는 자들이 이미 받은 것이며 중생(重生)과 동일한 사건이다.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물을 마시듯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말한다(요 7:37-39).

[14-20절]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몸은 한 지체뿐이 아니고 여러 지체이다. 각 지체는 다른 지체와 다르다고 해서 자기가 몸에 붙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발과 손, 귀와 눈은 서로 달라도 다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이다. 또 몸의 각 지체는 다 필요한 지체이다. 몸에는 눈도 귀도 코도 다 필요하다. 한 지체만으론 몸이 될 수 없다. 한 지체만 가득한 몸은 없다. 몸의 각 지체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임을 인식해야 한다.

[21-27절]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몸의 지체는 어느 것 하나도 쓸데없는 것이 없다. 눈이 손더러 ‘너는 볼 줄 모르기 때문에 쓸데없다’고 말할 수 없다. 손이 없다면, 눈이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그것을 집어올 수 없다. 또 머리가 발더러 쓸데없다고 말할 수 없다. 발이 없다면, 눈이 좋은 것을 보아도 그것을 가지러 갈 수 없다. 이와 같이, 몸의 각 지체는 다른 지체를 무시하거나 쓸데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몸의 지체들 중에는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더 중요한 것이 많다. 눈은 약한 지체이지만 매우 중요하며, 두뇌나 심장이나 폐 등도 약하지만, 매우 중요하다. 또 몸의 지체들 중 덜 귀히 여기는 것이나 덜 아름다운 것은 옷을 입히거나 신을 신기지만, 아름다운 얼굴은 가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체를 고르게 하여 부족한 것에게 존귀를 더하신다. 따라서 각 지체는 서로 싸우지 말아야 한다.

몸의 지체 중 한 부분이 아프면 온 몸이 아프다. 몸의 모든 지체는 그 아픔을 함께 나눈다. 모든 지체가 한 몸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는 함께 그 영광을 누리며 즐거워한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 성악가는 입과 목만 칭찬을 받지 않고 온 몸이 칭찬을 받고, 금메달을 딴 마라톤 선수는 발과 다리만 축하를 받지 않고 온 몸이 축하를 받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들은 그 몸의 각 지체들이다. 그러므로 각 지체는 다른 지체들과 다르다고 자기는 몸에 붙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 각 지체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한 지체만 가지고 몸이 될 수는 없다. 또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더 중요한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무시하지 말고 서로 다투지 말고 서로 돌보아야 한다. 우리는 한 지체의 고통이 모든 지체의 고통이며 한 지체의 영광이 모든 지체의 영광임을 알아야 한다.

[28-31절]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타 크레잇토나)[더 유익한](전통본문)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여러 가지 은사들과 직분들을 주셨다. 몸에 여러 지체들이 있듯이, 교회도 그러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또 사도 바울은 끝으로 더 유익한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다. 더 유익한 은사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은사를 말하는 것 같다. 또 ‘제일 좋은 길’이란 다음 장에 말한 사랑을 가리킨다고 본다. 이것은 더 유익한 은사를 사모하되 사랑의 원리를 따라 하라는 교훈이다.

고린도전서 12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령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바로 깨닫고 고백하게 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은 성령의 역사로 된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사람이 창조자와 섭리자 하나님도, 자신이 멸망 받을 죄인임도,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이심도 알 수 없고 믿을 수 없다.

둘째로, 은사들은 여러 가지이나 그것들을 주신 성령께서는 한 분이시다. 교회의 직분들도 여러 가지이나 그것들을 주신 주님께서는 한 분이시고, 각 사람 속에 역사하시는 역사는 여러 가지이나 그것들을 행하시는 자가 한 분 하나님이시다. 교회에 주신 여러 은사들과 직분들은 한 몸의 여러 지체들과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과 직분들이 서로 다를지라도 우리는 각 지체의 기능과 역할을 인정하고 서로 귀하게 여겨야 한다. 우리는 다른 이에게 주신 은사와 직분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가 한 몸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우리가 같이 고통을 당하게 되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우리도 같이 영광을 나누고 기뻐함을 알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더 유익한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신약성경이 완성된 이후,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유익한 선물인 성경책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풍성한 교훈을 받고 그 내용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

13장: 사랑의 중요성, 성격, 영원함

[1-3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사람들과 천사들의 방언들로 말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도 바울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에 관해 말하는 중에 사랑에 대해 말한다. 그는 먼저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참된 사랑을 뜻한다. 그것은 창조자와 섭리자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대한 지식과 믿음에서 나온 사랑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이 순종하는 사랑을 가리킨다.

사도 시대의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아 방언, 즉 외국어를 말하는 일이 있었다. 이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도는 비록 성도가 방언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사랑은 방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사도는 비록 성도가 예언하고 모든 비밀을 아는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가졌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사랑은 예언과 지혜와 지식의 은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사도는 비록 성도가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의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은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지만, 사랑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믿음은 무가치하다. 사랑은 믿음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사도는 비록 사람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 구제하는 놀라운 선을 행하고 또 자기 몸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진심에서 행한 것이 아니고,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나 영웅심으로나 어떤 정치적 이념, 사회적 이념, 종교적 이념 때문에 행한 것이라면 아무 유익이 없다. 그런 구제와 선행, 그런 헌신은 하나님 앞에 의(義)나 구원적 공로가 되지 못하고 자기에게 아무 유익도 없다.

[4-7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쉽게](KJV, NIV)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도 바울은 이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즉 사랑의 성격에 대해 말한다. 사랑은 무엇보다 오래 참는다. 사랑은 일시적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이라면 영속적 감정이다. 사랑은 머리로 잠시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오래 참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므로 그를 아내로 얻기 위하여 7년 동안 외삼촌 라반에게 봉사했으나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고 창세기 29:20은 말한다. 사랑은 또한 온유하다. ‘온유하다’는 원어(크레스튜오마이 crhsteu'omai)는 ‘친절하다’는 뜻이다(KJV, NASB, NIV). 사랑은 거칠거나 사납지 않다.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하는 자는 그들에게 거칠게 대하지 않고 구타하지 않고 말이나 표정이나 행동에 있어서 친절할 것이다.

사랑은 또 투기하지 않는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그가 잘되는 것을 샘내거나 질투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고 축하할 것이다. 또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 자랑은 자기 중심적인 마음에서 나온다. 자랑은 그런 자랑거리가 없는 상대방을 낙심케 하거나 슬프게 한다. 그것은 사랑의 원리에 배치된다. 사랑은 또한 교만하지 않는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상대방 앞에서 자신을 높이지 않는다. 사랑은 또한 무례히 행치 않는다. ‘무례히 행하다’는 원어(아스케모네오 ajschmonevw)는 ‘보기 흉하게 행하다’는 뜻이다.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예절을 지킨다. 사랑을 가진 자는 그 인격이 아름답다. 사랑은 또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그의 유익을 위한다.

사랑은 또한 쉽게 성내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기뻐하고 자기에게 손해가 되면 화를 내는 경향이 있지만, 참 사랑은 자기의 이해관계를 초월한다. 물론 사람이 진리와 의를 위해 정당하게 성내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그것도 조심해야 한다. 사랑은 또한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 사랑은 남을 위한 선한 마음가짐이다. 그것은 남에게 악을 행하거나 남을 해롭게 하지 않는다. 사랑은 또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사랑은 결코 불의를 행하거나 용납하지 않는다. 사랑은 성결하고 의롭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하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그냥 죄 없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의 독생자에게 우리의 죄의 형벌을 담당시키심으로써 공의롭고 정당하게 우리를 구원하셨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 우리가 참으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모든 것을 참을 수 있고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다. 이것은 불의와 거짓과 위선의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 진실한 성도간의 관계는, 비록 지금 다 이해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다.

[8-10절]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쇠잔하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사도 바울은 또한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 말한다. 사랑은 영원하다. 사랑은 완전한, 이상적 인격의 특성이다. 사랑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생활 원리이며 영광스런 부활체들의 속성이며 행동 규칙이다.

사랑의 영원성에 대조하여, 사도 바울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일시적 성격을 말한다. 여기에서 또 한번 사랑의 가치가 드러난다.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간의 가치적 차이는 무한히 크다. 그러면 사랑의 중요성과 가치가 충분히 증명되며, 우리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보다 더 사모해야 할 덕이 무엇인지 확실해진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일시적이라는 것은 그것들이 부분적인 것에 관계한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지식의 은사는 부분적인 지식에 관계되고 예언의 은사도 부분적인 일들에 관계된다. 그러므로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에 관계하던 은사들은 폐지될 것이다. 초자연적 은사들이 폐지될 시기는 온전한 것이 올 때이며, 폐지될 이유는 온전한 것이 왔기 때문에 부분적인 것에 관계된 것들이 불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충족한 지식, 충족한 예언이 오게 되면 부분적인 지식, 부분적인 예언은 불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온전한 것’은 무엇이며,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언제인가? 물론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완성되는 때이지만, ‘온전한 것이 올 때’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에 관한 한 신약성경의 완성의 때를 가리킨다고 본다. 신약성경 27권은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한 ‘온전한 것’이다. 사도시대에 신약성경 27권이 다 기록되었다. 거기에 하나님의 진리와 뜻에 관한 충족한 지식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부분적인 지식의 은사, 부분적인 예언의 은사 등 사도시대 교회에 있었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 후 시대에 불필요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것들은 중지되고 폐지되었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11-12절]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사도 바울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초보적 성격을 말한다. 그는 초자연적 은사들이 마치 사람의 어린 시절과 같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에는 사람이 말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어리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폐지될 때는 교회가 장성한 사람이 될 때이며 그 이유는 그가 장성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장성한 사람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다. 어린아이에게는 젖병과 장난감이 필수품이지만 크고 나면 더 이상 필요 없듯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교회의 창설시기의 것들이며 후시대에는 필요치 않은 것들이었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진리의 지식에 있어서 매우 제한적이고 부분적이고 불명료하였다. 그것은 마치 놋쇠로 만든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하나님의 뜻에 관해 온전하게, 충족하게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신약성경 27권의 완성된 계시가 초자연적 은사들보다 온전하고 명확하고 충족한 말씀일 것을 암시하였다고 본다. 오늘날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완성된 특별계시이며 그의 명료하고 충족한 말씀이다.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본절은 13장의 결론이다. 믿음은 우리의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모든 진리와 약속의 말씀들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진실한 증인들의 증언들을 믿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고(20:30-31), 그의 동료들은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고 말했다(21:24). 우리는 신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을 다 믿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벨릭스 총독 앞에서 심문받을 때 “[나는]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다”고 증거하였다(행 24:14).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 특히 성도들의 영광스런 부활과, 영광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안에서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고 세상의 불쌍한 영혼들을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세상에서 성도들에게 항상 있어야 할 필수적 덕목들이다. 성도에게는 믿음도 꼭 필요하고 소망도 꼭 필요하고 사랑도 꼭 필요하다. 믿음은 사람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을 얻는 방법이며, 소망은 고난과 수고가 많은 세상을 사는 동안 성도에게 계속적인 힘과 위로의 원천이며, 사랑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의 열매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성도들의 필수적 덕목들이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그 까닭은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과 천국 소망의 결과요 열매요 증거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랑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보다 더 중요하다. 기독교는 단순히 은사 추구, 기적 추구의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을 바로 믿고 그의 뜻대로 서로 사랑하는 도이다.

둘째로,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고 교만치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이기적이지 않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른 지식과 믿음과 거룩하고 선한 인격과 삶이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의식보다 더 중요하다.

셋째로,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쳤지만, 사랑은 영원하다. 믿음, 소망, 사랑은 성도에게 항상 있어야 할 덕목이지만,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다. 사랑은 참 믿음과 소망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에서도 영원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할 것이다.

14장: 방언과 예언

[1절] 사랑을 따라 구하라[사랑을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본문은 사랑이 은사들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먼저 사랑의 덕을 구하고, 그것을 가진 자로서 신령한 것, 곧 성령의 은사들을 구하라는 뜻이다. 또 사도는 그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되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했다.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것은 본장 전체에서 그의 교훈의 요지이다. ‘예언한다’는 원어(프로페튜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물론 때때로 미래의 일에 대한 예언(豫言)도 포함한다. 사도시대니까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가르친 줄 안다. 만일 그가 오늘날 교훈한다면,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믿고 행하고 성경으로 권면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눅 16:29-31; 계 22:18-19).

[2절] [이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방언은 ‘외국어’를 가리킨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는 것이며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비밀’이라고 말한 것은 그 내용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3-4절]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덕을 세운다’는 말은 ‘유익을 준다’는 뜻이다.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말은 다른 교우들에게 권면이나 위로를 주는 것을 말한다.

[5절] 나는 너희가 다 방언[방언들]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이는](전통사본)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못함이니라].

사도는 방언하는 자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 통역하지 않으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므로 그들이 방언보다 예언하기를 원하였다.

[6-9절]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저[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성도는 혀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해야 한다. 아무리 방언을 잘해도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허공에다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10-12절]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교회에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지 말고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영적 성장을 위해 필요하고 중요하다.

[13-14절]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누스)[생각, 이해력]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영의 활동이기는 하나 생각으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 즉 내가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 방언은 하나님의 영께서 성도의 영에 직접 역사하셨던 현상이라고 보인다.

[15-17절]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찬미]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찬미하는 자는 통역하지 않으면 듣는 사람이 아멘으로 화답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아무 유익이 없다.

[18-19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생각]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그러나 나는 교회에서 방언으로 일만 마디 말을 하기보다 다른 사람들도 가르치기 위하여 생각을 가지고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교회에서 방언으로 하는 일만 마디 말이, 생각을 가지고 가르치는 다섯 마디 말보다 못하다고 말한다.

[20절] 형제들아, 지혜(프렌)[생각, 깨달음]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생각]에 장성한[온전한] 사람이 되라.

사람 속에는 악의 경향성이 있으므로 악은 모를수록 좋고 경험해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생각과 깨달음에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생각은 사람의 인격을 이루며 그의 말과 행동을 결정한다. 잠언 23:7,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爲人, 사람 됨)도 그러한즉.” 생각이 어리면 미숙한 인격이지만, 생각이 온전하면 온전한 인격이다. 바른 생각, 깊은 생각, 원만한 생각, 온전한 생각은 성숙한 인격의 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에 있어서 온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

[21-22절]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사도 바울은 이사야서를 율법이라고 불렀다. 율법은 구약성경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구약의 모든 책들은 권위에 차등이 없다. 그는 방언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로 주신 은사이며, 예언은 믿는 자들에게 표로 주신 은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믿는 자는 방언을 구할 것이 아니고 예언을 구해야 하며 오늘날 성경 교훈을 사모해야 한다.

[23-25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교회에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교훈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들의 죄를 깨우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하며 그를 믿어 구원받게 한다.

[26절]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사도시대 교회의 집회 순서는 주로 찬송과 설교로 이루어져 있었다. 계시와 방언과 통역은 사도시대에만 있었고 그 후 시대에는 없어진 순서들로서 교훈적 성격을 가진다. 오늘날에는 성경 강해가 그것을 대신한다. 공예배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차적 의미를 가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성경 강해로 영적 유익을 얻기를 원하신다.

[27-28절]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多不過)[많아도]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사도 시대의 집회에서도 방언을 하는 것은 세 사람을 넘지 말아야 했고 또 반드시 통역하는 자가 있을 때만 공집회에서 허용되었다.

[29-31절]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사도 시대의 공예배 시 예언도 둘이나 셋이 말하게 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해야 했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권면과 위로를 받아야 했다.

[32-33절]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방언과 예언은 무질서하게 이루어져서는 안 되었다. 교회의 집회는 질서 있는 집회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어지러움과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질서와 화평의 하나님이시다. 죄는 사람의 인격을 무질서와 혼란에 떨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주의 질서를 찾고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알게 된다.

[34절]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너희의 아내들](전통사본)18)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사도는 아내들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교훈한다. 그는 몇 가지 점을 말한다. 첫째로, 이것은 모든 교회에서 지켜지는 규례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교회의 보편적 규례라는 것이다. 둘째로, 이것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율법에 이른 것같이’라고 말한다.

[35-38절]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셋째로, 이것은 ‘주의 명령’이라고 말한다. 사도들의 모든 교훈은 주의 권위로 주어진 것들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교훈을 무시하는 것은 주의 명령을 무시하고 거역하는 죄가 된다.

[39-40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배 순서는 질서 있게 행해져야 한다. 교회의 공적 예배의 순서들은 찬송과 기도와 설교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다(33절). 그러므로 사도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교훈하였다(40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어수선하고 소란스럽게가 아니고 경건하고 차분하고 질서 있게 드려져야 한다. 찬송과 기도, 특히 설교가 그러해야 한다.

둘째로, 아내들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 사도는 그것이 모든 교회의 보편적 규례이며, 성경에 계시된 바이며, 또 주님의 명령이라고 말했다. 이 교훈은 디모데전서 2:11-14의 말씀과 더불어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세우는 것이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보인다.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는 비성경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며 참 교회를 세운다면서 사도적 교훈을 무시하고 어겨서는 안 된다.

셋째로, 우리는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고 생각에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20절, “형제들아, 지혜[생각, 깨달음]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악은 모를수록 좋으나 생각은 바르고 깊고 원만하고 온전할수록 좋다. 우리는 생각에 있어서 온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골 1:28). 그것이 온전한 성화이다.

넷째로, 우리는 성경을 힘써 읽고 배우고 성경말씀으로 서로 권면하고 위로하며 교회를 견고히 세워 나가야 한다. 사도는 방언보다 예언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예언이 교회의 유익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는 방언으로 하는 일만 마디보다 생각을 가지고 하는 다섯 마디가 더 낫다고 말했다. 방언과 예언은 사도 시대 이후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그쳤다고 본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신약성경으로 완성되었고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어떤 이들처럼 예언과 방언의 계속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이제 성경은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이므로, 우리는 성경 읽기와 공부의 중요성을 알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깨닫고 믿고 행하며 남에게 권면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5장: 죽은 자들의 부활

1-28절, 그리스도의 부활, 죽은 자들의 부활

[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들은 그것을 받았고 그 가운데 섰다. 기독교 복음은 불변적 내용으로 사도들을 통해 세상에 주어졌다. 교회는 이 복음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 우리는 이 복음을 헛되이 받지 않고 굳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다.

[3절]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복음의 핵심적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성경대로’라는 말은 그의 죽음이 구약성경에 예언되고 예표된 바라는 뜻이다. ‘위하여’라는 원어(휘페르 uJpe;r)는 ‘대신하여’라는 뜻이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이것이 속죄(贖罪)사역이며 속죄의 진리이다. 기독교 복음은 속죄의 복음이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소식은 죄 문제의 해결, 즉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4절]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또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라는 말씀은 그의 부활이 그가 묻히셨던 무덤을 비우시고 다시 사신 사건임을 증거한다. 그의 부활은 복음의 주요 내용이다. 그의 부활은 그의 모든 것을 확증한다. 즉 그의 부활은 그의 무죄(無罪)하심과 그의 모든 말씀의 진실하심과 그가 친히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 대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의 핵심인 그의 속죄사역을 확증하는 것이다.

[5-8절]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대부분]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을 열거한다. 복음서들과 달리, 여기서는 남자들만 언급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은 증인들이었다. 첫째로 그는 게바 곧 베드로에게 나타나셨고, 둘째로 열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셋째로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는데, 그 대부분은 그 당시까지 살아 있었다. 이것은 놀라운 증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은 수백 명이었고 주께서 부활하신 지 약 20여년이 지난 후에도 대부분 살아 있었다. 넷째로 그는 야고보에게, 다섯째로 모든 사도들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에게 나타나셨다. 이 정도면 그의 부활의 증인들의 명단이 충분하지 않는가? 이 정도의 증인들을 가진 사건이라면 믿을 만하지 않은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한 사건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우리의 죄와 형벌을 대속하신 자이시며 따라서 기독교는 참되고 유일한 구원의 진리이다. 오늘 우리는 성경의 이런 증거들에 근거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 

[9절] [이는]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자임이로라].

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표현한 이유를 말한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이며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고 말한다.

[10-11절]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신자와 사도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또 그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자신이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라고 간증한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 참된 모든 종들의 고백일 것이다.

바울과 모든 사도들은 복음을 전파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증거하였다. 그것은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의 주요 내용이다. 속죄의 복음은 사도적 복음이며 속죄 신앙은 복음 신앙이다.

[12-13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린도교회에는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성으로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죽은 자들의 부활은 성경의 기본 진리이며(사 26:19; 단 12:2; 마 22:23-33; 히 6:1-2) 그런 기본 진리를 부정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중대한 문제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많은 증인들에 의해 확증된 사실이며 복음의 핵심 내용임을 증거함으로써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을 반박하고 부활 진리를 증거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었다. 죽은 자의 부활이 불가능하다면 그리스도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14-15절]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에 매우 중요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사도들의 전파하는 내용은 헛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파하는 중심 내용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포함하였기 때문이다(행 1:22; 2:32; 3:15; 4:33; 5:30-32). 또,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도 헛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고 그것에 근거하여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사활(死活)이 걸린 중요한 문제이다.

또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모든 사도들은 거짓 증인이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독교는 거짓말에 근거한 사기(詐欺)이며, 기독교 신자들은 거기에 미혹된 가련한 영혼들이 될 것이다.

[16-19절]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바울은 앞에서 말한 요지를 반복하면서 두 가지를 덧붙이고 있다. 하나는,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그의 부활로 확증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죄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의 문제로 남게 될 것이다. 또 하나는,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를 믿고 소망 가운데 죽었으나 그 소망이 헛되기 때문이며 더욱이 그를 위해 핍박과 순교를 당한 자들은 헛된 죽음을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전(全) 역사를 뒤엎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은 돈, 부귀, 영화, 명예, 권세, 쾌락 등 이생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소망은 부활과 영생과 영원한 천국에 있다. 그 소망 때문에 우리는 고난도 받고 순교도 감당한다. 만일 우리의 소망이 이생뿐이라면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순교까지 당하는 자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이다.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리스도의 부활은 확실한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잠자는 자들 즉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의 시작이 되었다!

[21절] [이는]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말미암음이로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롬 5:12). 사람의 범죄로 죽음이 왔기 때문에 사람이 죗값을 받음으로 죽음을 극복해야 했다.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왜 사람이 되셔야 했는가 하는 이유가 있다. 물론 그는 사람이 되신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참으로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

[22절] [이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얻을 것임이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든 사람들(엡 1:4)을 가리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다 부활하여 영생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때문이다. 그의 대속을 입은 모든 사람은 하나도 예외 없이 다 영생을 얻는다.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6:39).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의 성취이다.

[23절]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호이 투 크리스투)[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요.

부활에는 순서가 있다. 처음에는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곧 그의 재림 때에 그에게 속한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모든 자들은 그의 재림 시 다 영광스럽게 부활할 것이다(살전 5:16).

[24절] 그 후에는 나중이니[마지막이 오리니](KJV, NASB, NIV)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리스도의 재림과 의인의 부활이 있은 후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다. 그때 악인의 부활도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악인의 부활을 ‘심판의 부활’이라고 표현하셨다(요 5:29). 다니엘서에는 그것이 수욕과 무궁한 부끄러움을 입을 부활로 묘사되었다(단 12:2). 요한계시록은 모든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 보좌 앞에서 심판받을 것을 증거했다(계 20:12). 그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또 그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 즉 마귀의 권세를 다 멸하실 것이다.

[25-26절]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모든 원수’는 사탄과 악령들과 세상의 악한 정권들을 가리킨다(엡 6:11-12; 단 10:20-21). 그는 모든 원수를 다 복종시키실 것이다. 그는 만왕의 왕으로서 온 우주를 통치하시고 모든 원수를 복종시키실 것이다. 맨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다.

[27-28절]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려] 하심이라.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친히 아버지께 복종하셨다. 그는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셨다(마 26:3; 빌 2:8). 그때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와 세상과 인류에게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복음 신앙, 속죄 신앙을 가지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내용을 포함한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죽음이었고 그의 부활하심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가 없으신 자이시며 그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의 죄사함을 위한 속죄의 죽음이셨음을 확증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는 구원이 된다.

둘째로,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다. 사람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사람의 영혼은 불멸하며 사람은 본래 죽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죽음은 인간의 죄 때문에 왔다. 사람에게는 부활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증거이다. 의인도 악인도 다 부활한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요한복음 5:28-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고 영생의 나라인 복된 천국이 있고 영원한 형벌의 처소인 지옥 불못이 있다.

셋째로, 우리는 특히 성도의 복된 부활을 사모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에 이를 복된 부활을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복된 부활의 첫 열매이시다. 우리도 장차 그의 영광스런 모습과 같이 부활할 것이다. 빌립보서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우리는 그 복된 부활을 사모하자.

29-58절, 부활의 몸, 부활의 개가

[29-32절]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범인(凡人)처럼(카타 안드로폰)[인간적 동기로]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받는다는 말은 비세례교인이 세례받기 전에 죽었을 때 그의 가족이 그를 대신하여 세례를 받았던 초대교회의 한 잘못된 풍습을 가리킨 것 같으나, 그 풍습은 부활 신앙에 근거했었다. 바울은 그것을 들어 그들의 부활 소망을 증거하려 한 것 같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말은 바울의 생활이 죽음의 위험이 가득하였음을 증거한다. 그는 날마다 죽음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생활을 피하지 않는 것은 부활의 확실한 소망 때문이었다. 그가 싸웠던 ‘맹수들’은 그를 죽이려는 무리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현세주의자들의 좌우명은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도 그런 자가 될지도 모르나, 부활과 내세가 있음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근신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려고 한다.

[33-34절]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호밀리아이)[교제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마땅히 정신을 차리고](NASB)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교제는 영향이 있다.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과의 교제는 악한 교제이며, 악한 교제는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 우리는 마땅히 정신을 차리고 범죄치 말아야 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구주 예수님을 믿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이제는 선하고 의롭게 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게 된 자들은 그렇게 살 것이다.

[35-38절]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몸이 썩어버리는데 어떻게 다시 살 것인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은 자연계에서도 추론할 수 있다. 사람은 벼나 밀을 직접 심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것의 낟알 곧 씨를 땅에 뿌리고 그 씨가 땅에 심겨 썩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기쁘신 뜻대로 그것에게 각각의 형체를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벼와 밀의 씨가 썩은 후에 싹이 나고 자라 각각 벼와 밀의 형체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은 죽어 그 몸이 땅에 묻혀 썩지만, 장차 그 몸이 부활할 것이다.

[39-41절] 육체(사르크스)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또한]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형체들]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짐승들과 새들을 흙으로 창조하셨다(창 2:7, 19). 물고기들도 흙으로 창조하셨다(시 104:29). 그러나 그 몸들은 다 동일하지 않고 각각 다르다. 생명체의 몸들도 다 다르고, 해와 달과 별들의 형체들도 다 다르다. 하늘의 것들과 땅의 것들의 영광이 서로 다르고 하늘의 것들 간에도 영광이 서로 다르다. 해와 달과 별들은 그 크기와 밝기에 있어서 각기 다르다.

[42-44절]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죽은 자의 부활은 부활 전 상태와 다를 것이다. 그러면 부활 전의 사람의 몸은 어떠하며 부활 후의 사람의 몸은 어떠한가?

첫째로, 부활 전의 사람의 몸은 썩을 몸이지만, 부활 후의 사람의 몸은 썩지 않을 몸이다. 사람이 범죄한 후 모든 피조물과 피조 세계는 시들고 쇠하고 죽어 썩는 존재가 되었다. 그것은 죄의 결과이다. 그러나 죄씻음의 구원의 결과인 부활의 몸은 썩지 않을 몸인 것이다. 부활의 몸은 죄악성이 다 제거된 몸일진대 썩지 않아야 마땅하다.

둘째로, 부활 전의 몸은 욕된 몸이지만, 부활 후의 몸은 아름다운 몸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지혜롭고 의롭고 아름다웠으나, 범죄함으로 그 의와 영광을 상실했고 슬픔과 고생이 많은 세상 속에 살면서 그 얼굴은 점점 보기 흉해진다. 어린 아기들의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또한 사람의 내면적 불결과 악함도 겉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부활은 본래의 아름다운 몸의 회복이다.

셋째로, 부활 전의 몸은 약한 몸이지만, 부활 후의 몸은 강한 몸이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사람의 몸이 약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사람의 몸은 작은 부분 하나만 이상이 생겨도 아프다. 그러나 부활할 때에 우리는 더 이상 병과 연약이 없는 건강한 몸을 가질 것이다.

넷째로, 부활 전의 몸은 육의 몸이지만, 부활 후의 몸은 신령한 몸이다. ‘육의 몸’은 타고난 죄성(罪性) 즉 죄악된 욕구와 감정의 지배를 받는 몸이라는 뜻이나, ‘신령한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몸, 죄성이 없는 몸’을 가리킬 것이다. 또 그 몸은 예수님의 부활의 몸처럼 시간과 공간의 제약성을 초월하는 성질도 가질 것이다(요 20:19). 

[45-46절]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프쉬케 조산)[산 존재]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으로 죄 없는 인성(人性)을 입고 오셔서 인류의 모든 죄와 불행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는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 ‘살려주는 영’ 혹은 ‘생명을 주는 영’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인류의 대속(代贖)을 이루셨고 지금 성령으로 죄인들에게 그 속죄를 적용하여 새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일을 하심을 의미한다. ‘먼저는’은 첫 사람 아담을 가리키고, ‘그 다음에’는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첫 사람 아담은 육적 생명을 가진 존재이었고,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적 존재이시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신성(神性)의 영이셨지만, 부활 전에는 그 사실이 그의 육신에 가리워 있으셨으나 부활 후에는 그것이 밝히 드러나셨다.

[47-49절]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곧 주(主)]19)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입자].20)

첫 사람은 몸이 먼저 지음 받고 그 후에 영혼이 지음 받았다. 그러나 둘째 사람 곧 주께서는 본래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영이시다. 그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다(요 1:1). 신적 영이신 그가 때가 되어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사람의 본질을 취하신 것이다. 그의 근본은 육이 아니며 영이시다. 그는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시다.

‘흙에 속한 자’는 아담을 가리키고, ‘흙에 속한 자들’은 부활 전의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 ‘하늘에 속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하늘에 속한 자들’은 장차 부활할 성도들을 가리킨다. 성도들은 흙에 속한 아담과 같았지만 장차 부활할 때에 하늘에 속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습을 닮을 것이다. 그의 형상은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영적인 몸이다. 그것이 장차 성도들이 입을 부활의 몸이다.

[50절]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血)과 육(肉)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썩을 것]은 썩지 아니한 것[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혈과 육’은 현재의 몸을 가리킨다. 성도의 부활의 몸이 단지 영뿐이지는 않을 것이지만 현재의 몸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현재의 혈과 육의 몸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썩을 몸이기 때문이다. 썩을 몸은 썩지 아니할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51-52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이는]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변화할 것임이라].

주의 재림 때에 있을 죽은 자들의 부활과 살아 있는 자들의 변화는 우리가 지금 다 이해할 수 없는 비밀과 같다. 이 사건은 마지막 나팔소리에 맞추어 일어날 것이다(마 24:31; 살전 4:16-17). 마지막 나팔은 예비신호의 마지막이며 죽은 자들의 부활이라는 본 사건의 시작이다. 주 예수님의 재림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끝날 때 죽은 성도들의 부활과 살아 있는 성도들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순식간에 홀연히’ 일어날 것이다. ‘홀연히’라는 원어(엔 리페 오프달무)는 ‘눈 깜짝할 사이에’라는 뜻이다(KJV, NASB, NIV).

[53-54절] [이는]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입어야 하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입어야 함이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부활의 시간이 오면 사망의 확실한 패배가 증명될 것이다. 이것은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이사야 25:8은 “[여호와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역사상 사망처럼 강력한 승리자가 없었지만, 그때가 되면 그것이 패배하고 말 것이다. 성도의 부활과 변화는 사망에 대한 영원한 승리이며 사망의 영원한 추방이다.

[55-56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무덤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21)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망의 권세는 죄 때문이며 죄가 힘을 가지는 것은 율법 때문이다. 인류 6천년 역사는 사망과 무덤이 지배해왔다. 모든 사람은 죽었고 무덤에 묻히었다. 그러나 죽은 성도가 부활하고 산 자들이 변화될 때 그 기록이 깨질 것이다. 이것은 인류의 최종적 원수인 사망에 대한 승리이다. 부활과 영생의 승리보다 더 감격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57-58절]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사망에 대한 승리를 감사하며 두 가지를 권면한다. 첫째는, 우리가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약속들, 특히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약속들을 확신하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는, 우리는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이다. 주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요 6:29) 복음을 전하고(막 16:15)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마 16:18). 우리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을 얻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의 부활의 몸은 현재와 몸과 현격하게 다를 것이다. 현재 우리의 몸은 썩는 몸이지만, 장차 우리가 얻을 부활의 몸은 썩지 않을 몸일 것이다. 현재 우리의 몸은 욕된 몸이지만, 장차 우리가 얻을 부활의 몸은 영광스러운 몸일 것이다. 현재 우리의 몸은 약한 몸이지만, 장차 우리가 얻을 부활의 몸은 강한 몸일 것이다. 현재 우리의 몸은 육의 몸이지만, 장차 우리가 얻을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일 것이다. 우리는 그 복된 부활을 사모하고 기대하고 소망하자.

둘째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에게는 부활의 때가 있다. 물론 악인들도 부활할 것이다. 그들은 최종적 심판을 위해 부활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5:28-29에 보면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 특히 구원받은 성도들의 부활은 참으로 복되고 영광스러울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모든 죽은 성도들은 순식간에 홀연히 다 살아날 것이며 모든 살아 있는 성도들은 홀연히 다 변화될 것이다.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결과로 부활과 영생이 있을 것이다. 사망은 영원히 패할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이 부를 개가이며 얻을 복이다.

셋째로, 부활 진리와 소망은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준다. 첫째, 우리는 죽음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날마다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도 활동을 했다. 그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말했다. 부활을 소망하는 자는 죽음의 위협이 되는 고난과 핍박과 순교를 겁내지 않는다.

둘째, 우리는 죄를 짓지 말고 선을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며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거룩하게 하심이다. 부활과 천국을 소망하는 자는 이 세상 것들 때문에 비굴하게 범죄하지 않는다. 우리는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견고히 서서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 살아 있는 목적은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다. 주의 일은 복음을 전하며 참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것보다 더 귀한 일은 없다.


16장: 헌금, 믿음, 사랑, 복종

[1절] 성도를 위하는 연보[헌금]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헌금에 대한 교훈이다. ‘성도를 위하는’이라는 말은 헌금의 목적을 보인다. ‘연보’라는 원어(로기아)는 ‘모금’(collection)이라는 뜻이다(Thayer).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구제헌금을 부탁하였었다(행 24:17; 고후 8, 9장). 성경에 계시된 교회의 헌금의 목적은 전도와 구제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전도와 구제를 위해 헌금하기를 힘써야 한다.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라는 말씀은 사도들의 교훈이 어느 한 지역뿐 아니라, 모든 지역의 모든 교회들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임을 보인다.


[2절]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利)[이익]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헌금]를 하지 않게 하라.

‘매주일 첫날’은 일요일 곧 주일(主日)이다. 이 날 각 사람이 이익을 얻은 대로 헌금하여 저축하라는 지시는 초대교회가 이 날 공적 집회로 모여 헌금했음을 암시한다. 사도시대 직후인 속사도들의 글들에 보면 초대교회들이 더 이상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지 않았고 일요일 곧 주일에 공적 예배를 위해 모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주후 100년경의 바나바 서신은 “그러므로 또한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제8일을 기뻐하기 때문에 그 날을 지킨다”고 말했고, 주후 107년경 익나시우스의 마그네시아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도, “만일 옛 습관들로 살았던 자들이 새로운 소망에 이르러, 더 이상 안식일들을 지키지 않고 주의 날을 따라 그들의 삶을 산다면 . . .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를 떠나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주후 150년경 순교자 저스틴도, “일요일에 모든 도시의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 사도들의 글을 읽으라. 이 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다”라고 말했다.


[3-4절]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사람들](원문)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사도 바울은 헌금을 취급할 때 교인들의 시험과 오해가 없게 하기 위해 자기가 직접 관계하지 않고 그 교회가 인정하는 사람이면 누구이든지 그들을 보내도록 처리했다. 한글개역성경에는 ‘인정한 사람’이 단수명사이지만, 원문에는 ‘인정한 사람들’로 복수명사이다. 헌금은 교회에서 인정받는 두 사람 이상에 의해 바르고 깨끗하게 계수되고 관리되어야 한다. 교회의 봉사자가 마귀의 시험을 받아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을 취하거나 오용한다면 그에게 큰 화가 될 것이다.


[5-7절]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過冬)할[겨울을 지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교제하기를 소원하였다. 그는 지나가는 길에 그들에게 잠시 들리기를 원하지 않고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함께 지내며 겨울도 지나기를 원하였고, 또 그들이 그를 그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기를 원했다. 성도의 교제는 얼마나 아름답고 사모할 만한 것인지! 거짓과 미움과 이기주의로 가득한 세상에서 참된 교회처럼 진실과 사랑을 볼 수 있는 곳이 또 어디에 있겠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뜻을 행하는 진실한 성도들에게서만 그런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를 기대할 수 있다.


[8-9절]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功效)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본절은 바울이 이 서신을 쓴 대략적 시기와 장소를 보여준다. 그것은 사도행전 19장에 해당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회당에 들어가 석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론하며 권면했으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그 도(道)를 비방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기를 2년 동안이나 했고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다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그의 사역이 에베소에서 큰 열매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대적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내게 광대하고 공효(功效)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라는 말씀은 그의 전도 사역에 큰 열매가 있었음을 뜻한다. 사도행전 19:19-20은,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5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증거한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의 은혜로 전도의 문이 열려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힘있는 말씀의 사역, 영혼 구원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10-12절]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디모데는 바울처럼 주의 일을 힘쓰는 자이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그들 가운데 머물게 하고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자기에게 오게 하라고 권하였다. 여기에 복음사역자들을 존중하고 예우해야 할 성도들의 의무가 있다. 복음사역자들을 위하는 것은 곧 주님을 위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형제 아볼로에 대해서도 그에게 권했지만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아볼로에게 무엇을 명령하거나 그의 심령을 지배하려 하지 않았다. 주의 사역자들은 겸손히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또 주의 일은 자원적으로 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


[13절]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사도 바울은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 말한다. 원문에서 본절은 네 개의 명령어로 되어 있다. 첫째는 깨어라(그레고레이테)이다. 이 세상은 악하고 마귀와 악령들은 성도들을 넘어뜨리려고 사방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주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그의 재림을 기다리며 깨어 있으라고 교훈하셨다(마 24:42). 깨어 있는 생활은 믿음, 소망, 사랑의 정상적 신앙생활을 의미한다. 사람이 죄를 짓고 육신적 쾌락에 빠지면 영적으로 해이해지고 잠이 드는 것이다.

둘째는 믿음에 굳게 서라(스테케테)이다. 성도는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엡 2:8).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마귀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우리로 낙심하고 믿음을 잃게 하고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려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셋째와 넷째는 남자다워라(안드리제스데)와 강건하여라(크라타이우스데)이다. 하나님 없고 부도덕하며 심지어 성도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고 의와 선을 행하려면, 우리는 담대하고 강건해야 한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다(요 16:33).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도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고 교훈하였다(엡 6:10).


[14절]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린도교회에 필요한, 그리고 모든 시대에 모든 교회들에 필요한, 중요한 덕은 사랑이다. 고린도교회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함으로 일치단합하여야 했다. 사랑은 이상적인 인격의 덕이다. 우리 속에 참된 사랑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많은 사람에게 덕을 세우며 유익을 끼치며 주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15-18절]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 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

스데바나의 집은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바쳐진 가정이었다.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 등은 교회의 봉사자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바울을 찾아왔고 정신적으로 또 아마 물질적으로 그를 돕고 위로하고 격려함으로써 바울과 또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였다. 이것은 아첨하는 칭찬이 아니고 진심에서 나온 인정이다. 바울은 성도들이 이 같은 자들에게와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고 또 이런 자들을 알아주며 인정하라고 권면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의 복음의 일을 위해 또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헌신한 봉사자들을 존중하고 알아주고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셨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헌신된 자들을 세우셔서 자기의 양들을 지키시고 양육하게 하시고 교회가 진리 안에서 바르고 질서 있게 진행되기를 원하신다.


[19-21절]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성도들은 하나님의 집의 가족들로서 서로 진심으로 그리고 거룩한 사랑으로 교제하고 문안해야 한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고 성령의 역사로 복음을 믿어 구원 얻은, 온 세계의 성도들은 한 교회를 이룬다. 거기에는 아시아의 교회들과 유럽의 교회들의 차별이 없다. 또 사도시대에는 성도의 ‘집에 있는 교회’가 있었다. 외적으로 훌륭한 건물이 있어야만 교회가 아니고 집에서 모이는 교회도 참된 교회일 수 있다. 교회의 교회다운 점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섬기며 순종하고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는 데 있다.


[22-24절] 만일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전통사본)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할지어다. [아멘].22)


마지막으로, 바울은 두 가지 내용을 말한다. 

첫째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사랑 없이 내뱉은 경박한 저주의 말이 아니다. 이것은 주를 사랑하는 것이 선택 사항이 아니고 모든 성도에게 필수적 사항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표현한 것이다. 주님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 분 외에 이 세상에서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 없다. 그 분 외에 아무 곳에서도 우리는 삶의 참된 의미와 위로를 찾을 수 없다. 그는 참으로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시다. 그는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신 주님이시다. 우리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기에 마땅한 죄인이었지만,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해주셨다. 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자라면 어찌 주를 사랑치 않을 수 있겠는가!


둘째는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는 말씀이다. 이 말은 원어로 ‘마라나 다’(marana qa)라고 하는데,23) 이것은 아람어로서 ‘주여, 오소서’라는 뜻이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말이다. 신약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말로 끝난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진실로] 오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면 모든 일이 완성될 것이다. 그가 다시 오실 때 주를 사랑한 자들은 영광과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 주를 알지 못하는 자들, 주님을 배반하고 세상을 사랑하던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의인들과 악인들,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보상, 보응]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본장은 헌금에 대해 교훈한다. 첫째, 헌금은 교회의 공집회의 한 중요한 순서이다. 둘째, 헌금의 용도는 전도와 구제를 위한 것이다. 헌금은 전도자들과 교회의 전임봉사자들의 생활비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고 또 교회 안의 물질적 어려움을 당한 교우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셋째, 헌금은 깨끗하고 덕스럽게 관리되어야 한다. 헌금의 계수와 관리는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짐으로 사람들의 의심과 의혹을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된다. 헌금의 계수와 관리는 교회에서 모범이 될 만한 사람들을 세워서 깨끗하고 정확하게 관리되어야 한다. 헌금에 대한 범죄는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큰 죄가 된다. 넷째, 성경이 보이는 헌금의 기준은 풍성하게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득의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게 하셨다. 그것은 신약시대에도 헌금의 모범이 된다. 주 예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6:21).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8:7에서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헌금]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 말했다.


둘째로, 우리는 성도들의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를 귀히 여기며 사모하며 나누자.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며 고린도교인들과 함께 교제하고 겨울을 지나기를 원했다. 우리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교회의 교회다운 점은 성도들 상호간에 서로 사랑하는 데 있다.


셋째로, 우리는 전도자들을 위해 또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 사역이 힘있게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또 전도자들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그들에 대한 합당한 예절을 갖추어야 하고 또 그들에게 복종하고 또 그런 자들을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다. 물론, 주의 일을 하는 자들은 부득이 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깨어 믿음에 굳게 서고 남자답게 강건해야 한다. 우리는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깨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정상적 신앙생활을 함을 뜻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약속들을 믿는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또 우리는 남자다워야 하고 강건해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것은 선택사항이 아니고, 필수사항이다. 바울은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섯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소망하자. 주께서 하늘로부터 영광 가운데서 다시 오시면, 교회 안팎의 모든 일들과 온 세상의 모든 일들을 다 판단하시고 선악간에 보응하실 것이다.

------------------------------------------------------------------------------

미주

1) 롬 1:6, 7; 8:28; 11:29; 고전 1:2, 24, 26; 7:20; 엡 1:18; 4:1, 4; 빌 3:14; 살후 1:11; 딤후 1:9; 히 3:1; 벧후 1:10; 유 1; 계 17:14 등.

2) Byz A C vgcl Origengr 1/7, lat 1/8 등에 있음.

3) Byz p46 D itd syrp Irenaeus (Origenlat 1/4) Cyprian 등에 있음.

4) Byz syr 등에 있음.

5) Byz p46 B itd 등에 있음.

6) Byz p46 א vg syrp cop 등에 있음.

7) Byz vgms syrp arm 등에 있음.

8) Byz syrp Origenlat 1/6 등에 있음.

9) Byz vgcl syr 등이 그러함.

10) Byz D itd vg syrp arm geo 등이 그러함.

11) Byz syrp Origen1/2 등이 그러함.

12) Byz p46 D itd vg syrp cop Irenaeuslat 등이 그러함.

13) Byz vgcl syr 등에 있음.

14) Byz vgcl syr 등에 있음.

15) Byz. 그러나 א A B C* D itd vg syrp copsa bo arm 등은 생략함.

16) Byz vgcl syrp arm 등에 있음.

17) Byz itd syrp (arm) geo 등에 있음.

18) Byz syr Cyprian 등이 그러함.

19) Byz A syrp arm Origengr 1/2 등에 있음.

20) Byz p46 א A C itd vg copbo Irenaeuslat Clement Origengr lat 등.

21) Byz syr(p) eth Origengr 1/2 등이 그러함.

22) Byz א A C D itd vg copbo arm 등에 있음.

23) The Greek New Testament According to the Majority Text, ed. Zane C. Hodges and Arthur L. Farstad, 2nd. ed. (Nelson,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