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바울서신 강해·김효성목사 기타

★고린도전서 1장: 십자가의 도 - 7장: 결혼 생활

영국신사77 2020. 4. 15. 18:10


고린도전서강해

김효성 목사

2019년 1월 10일 수정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적 견해를 버릴 타당한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1장: 십자가의 도

2장: 영적인 진리

3장: 사람을 자랑치 말라

4장: 교만치 말라

5장: 권징

6장: 몸으로 영광 돌림

7장: 결혼 생활

8장: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9장: 스스로 자유를 제한함

10장: 우상숭배치 말것

11장: 머리 수건과 성찬

12장: 성령의 은사

13장: 사랑의 덕

14장: 방언과 예언

15장: 부활

16장: 사랑의 교제


서론

고린도전서의 저자는 사도 바울이다(고전 1:1-3; 16:21). 속사도 시대의 저작자인 로마의 클레멘트는 본 서신을 “복스러운 사도 바울의 서신”이라고 불렀고,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터툴리안 등은 본 서신을 많이 인용하였다.

고린도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로 아테네에서 약 60km 서쪽에 위치했는데, 동쪽으로 애게 바다와 서쪽으로 이오니아 바다를 연결하고 있었다. 그 도시는 매우 부요했고 매우 음란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시 고린도에 들려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했다. 유대인들의 핍박이 있었을 때 그는 회당 옆에 있었던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고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머물며 복음을 전했다. 그것이 고린도교회의 시작이었다.

바울은 본 서신을 썼을 때 에베소에 있었고 그에게 광대하고 효력있는 전도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고전 16:8-9). 그러므로 본 서신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주후 54년 혹은 55년 봄경에 썼을 것이다.

고린도전서의 특징적 주제는 ‘교회의 문제들’이다. 이 서신에서 다루어진 문제들은 교회 안의 분쟁, 음행한 교인의 포용, 권징, 성도의 법정 소송, 우상제물과 우상숭배, 여자의 머리 수건 문제, 성찬, 성령의 은사, 부활, 헌금 등의 문제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진 본 서신의 내용은 그 당시의 고린도교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후시대의 모든 교회들에게도 적용된다. 본 서신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1장: 십자가의 도

1-17절, 단합을 권면함

[1-3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헤기아스메노이스)[거룩하여졌고] 성도라[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도로 부르셨기 때문에 그의 직분은 권위가 있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잘 계시되어 있다. 예를 들어, 디모데전서 3:2-7은 감독의 자격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직분자를 부르시는 몇 가지 증표가 있다고 본다. 첫째, 그 직분을 위한 마음의 강한 소원이다(빌 2:13). 둘째, 그 직분을 위한 은사의 확인이다(롬 12:6). 셋째, 회중들의 인정과 추천과 선택이다(행 6:5-6).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를 보내신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핍박자 사울을 부르셔서 사도로 만드셨다(행 9장).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복음 전파자로 택하시고 보내셨다(롬 1:1).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졌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였다. 신약성경의 많은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부르셨다고 말한다.1) 그것은 구원으로의 부르심이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성도가 되었다.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은 교회가 하나님의 소유물임을 보인다. 그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과 그의 소유된 백성이며(벧전 2:9) 그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다(롬 1:7).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후원을 받는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들이다. 사람의 근본 문제는 죄 문제이었다. 죄 때문에 사람은 불행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다. 사람은 심히 부패한 죄인들이며 어찌 할 수 없는 죄인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 오셨다. 죄 없으신 그가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와 형벌을 담당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씻음 받게 되었다. 죄씻음과 거룩하여짐이 구원이다. 죄가 죽음과 불행의 원인이었고 죄씻음 받음은 영생과 행복과 평안의 원인이다. ‘성도’라는 명칭은 바로 이런 자들에게 붙여진 매우 존귀한 이름이다.

‘거룩하여졌다’(헤기아스메노이스)는 원어의 완료분사는 법적인 의미를 가진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구속(救贖)을 다 이루셨다(요 19:30). 그는 우리의 의와 거룩이 되셨다(롬 10:4; 고전 1:30). 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중세시대에 가려졌었으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던 성경적 복음이며(롬 3:24; 히 10:10, 14) 여기에 참 자유와 평안이 있다(갈 5:1; 롬 5: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만 문안하지 않고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문안하였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바울은 본 서신에서 예수님을 약 68회 ‘주’라고 불렀다. ‘주’라는 말은 주인, 소유자, 하나님 등의 복합적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고백이며 그에 대한 복종을 고백하는 것이다. 또 이 고백은 사람이 죄와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은 표가 된다(롬 10:9).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는 구원의 은혜이다. 그것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성화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길이다. 또 평안은 사람이 은혜로 구원받은 결과로 누리는 복이다. 죄인은 평안의 길을 알지 못했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그러나 예수께서는 참 평안을 주셨다(마 11:28). 평안이라는 말은 마음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적 안정, 사회적 안정 등을 다 포함한다. 이 세상은 언제나 불안정하지만, 성도에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참된 평안이 있다(요 14:27).

[4-9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口辯)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였다. 그는 그가 감사한 이유를 좀더 설명한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과 지식의 풍족함을 주셨고 그리스도의 증거, 즉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견고케 되게 하셨음을 감사하였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 즉 그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출생하셨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셨다는 사실들에 근거한다. 그것들은 다 증인들의 증언들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그 사실들이 긴 시대적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믿어지는 이유이다. 성경은 진실한 증인들의 증언의 책이다. 우리의 믿음은 그 위에 근거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들을 확신했다.

둘째로, 그는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렸기 때문에 감사하였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모든 성도에게 항상 있어야 할 요소들이다(고전 13:13).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을 믿는 것이며,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행하는 것이며, 소망은 주의 재림과 천국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성도들의 소망이요 큰 힘과 위로이다.

셋째로, 그는 주 예수께서 그들을 그의 재림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이기 때문에 감사하였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바울은 빌립보서 1:6에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하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구속(救贖)하신 자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영생에 이를 것이다(요 6:39; 10:28; 롬 8:30).

주께서는 피흘려 사신 자들을 다 찾으실 것이며 그가 찾아 구원하신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이다. 성도의 구원은 보장된다. 그는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는 인격자로 훈련시키시고 보존시키실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위로와 담대함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다. 그가 한번 우리를 불러 예수 믿어 구원받게 하셨다면, 끝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주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며 주를 대항하며 죄 가운데 살았을 때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다면, 그는 우리가 지금도 부족과 연약이 많을지라도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고 지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망치 말고 더욱 분발해야 한다.

[10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스키스마)[분열]이 없이 같은 마음(누스)[생각 mind]과 같은 뜻(그노메)[판단 judgment] (KJV, NASB)으로 온전히 합하라.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형제들’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 대한 겸손한 호칭이다. 모든 성도는 주 안에서 다 형제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엇을 명령하지 않고 권면하였다. 그에게는 명령할 권위가 있었으나 그는 권면하였다. 이것도 우리가 본받을 만한 겸손한 모습이다.

바울이 권면한 내용은 그들이 다 같은 말을 하고 분열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것이었다. 말은 생각과 판단의 표현이다. 생각과 판단이 같으면 말이 같아지지만, 생각과 판단이 다르면 말도 달라진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가 분열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으로 온전하게 단합하여 진행하는 것이다.

[11-12절]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린도교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 문제가 분쟁의 문제이었다. 그 교회에는 바울을 따르는 자들과 아볼로를 따르는 자들과 게바 즉 베드로를 따르는 자들이 있었고, 또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하였다. 교회가 아직 분열되지는 않았을지라도 교인들 안에는 이미 단합된 마음이 없었고 교인들끼리 분파를 조성하고 있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답지 않았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며 나뉘실 수 없는데, 그의 몸된 교회에 어떻게 분파가 합당하겠는가? 그 교회를 개척한 바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비교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바울이 죽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의 이름으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히 서로 사랑하고 복종하며 일치단합해야 한다. 분쟁과 분열은 수치스런 죄악이다.

[14-17절]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세례는 주께서 친히 명하신 의식이며(마 28:19) 믿는 자는 세례를 받아야 하며 세례를 받지 않는 것은 주의 명령을 어기는 죄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그곳에 보내신 것은 세례를 주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세례는 중요하지만 구원에 본질적이지는 않다. 즉 세례받으면 반드시 구원받는다든지 세례받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에 본질적인 것은 복음 신앙뿐이다. 사람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멸망에 이를 것이다(막 16:16; 요 3:36).

바울은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죄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 얻게 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를 성도로 부르심을 감사하며 거룩함을 나타내자.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미 거룩함을 얻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확신한 것을 감사했고 또 주께서 그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을 믿고 감사하였다. 그것은 신자들의 성화의 확실함과 끝까지 견딤의 진리를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화를 이루실 것을 믿고 더욱 분발하자.

둘째로, 우리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할 덕목이다(고전 13:13).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강림하심은 동일한 사건을 가리킨다(눅 17:30; 살전 4:16; 살후 1:7, 10; 히 9:28).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복된 소망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역사의 대종말이 올 것이다. 마지막 심판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광의 천국이 주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자.

셋째로, 우리는 항상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합하자. 우리는 다 같은 말을 하고 우리 가운데 분열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으로 온전히 단합하자. 교회는 지도자들 때문에 분열해서는 안 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는 교리적 차이 때문에 교파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교파가 성경의 근본교리에서 이탈한 이단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와 다른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의 지체로 인정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18-31절, 십자가의 도

[18절] 십자가의 도(道)(로고스)[말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독교 복음은 ‘십자가의 도(道)’ 즉 ‘십자가의 말씀’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소식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과 그 죽음의 속죄적 의미가 죄인들에게 복된 소식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 그러나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구원 얻는 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거기서 돌이키며 구주 예수님의 대속(代贖)의 소식을 듣고 감사한 마음으로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다. 복음은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다. 복음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

[19-21절]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케뤼그마 khvrugma)[혹은 ‘설교’]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란 전도의 내용뿐 아니라, 또한 전도라는 방식도 가리키는 것 같다. 전도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며 또 말로 전하는 방법도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뜻은 전도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혜와 웅변과 아름다운 말로 사람을 구원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의 방법인 전도로 구원해야 한다.

[22-23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헬라인](전통사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기독교는 기적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다. 오늘날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을 추구하고 강조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적주의나 은사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기적주의와 은사주의의 풍조를 조심해야 한다. 기독교는 지혜를 구하는 종교도 아니다. 사람의 이성적 사고와 경험을 중시하는 것이 철학이다. 역사상 기독교의 복음과 철학을 조화시키려는 자들이 있었다. 현대신학은 칸트 철학이나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는 철학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사람들의 이성적, 경험적 생각으로 혼잡시키고 변질시키려는 시도들을 경계해야 한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전파한 내용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죄인들을 구속(救贖)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죽으신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사하는 속죄의 의미가 있었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있고, 여기에 성경적 기독교가 있다.

예수께서는 친히,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말씀하셨고(요 6:51), 또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사도 바울은 본 서신 뒷부분에서 복음의 골자를 표현하기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하였다(고전 15:3-4). 속죄는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말씀은 기적을 원했던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 하나님의 능력의 체험을 강조하지 않고 과거의 한 사건을 중요시하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과거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그 복음이 현재에 죄인들의 죽은 영혼들을 살려 새 삶을 시작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십자가의 복음이야말로 참으로 현재의 구원의 능력인 것이다.

십자가의 말씀은 또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독교 복음의 논리는 단순하고 소박해보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논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의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으므로 예수님 믿는 우리는 죄씻음을 받고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리적 형벌의 개념이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책임적 행동을 강조하며 자기의 일을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복음의 논리는 그들에게 어리석게 보인다.

사람의 책임 있는 행동이 좋은 인격의 요소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아무리 책임 있는 행동을 한다 해도 그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심히 죄악되어서 이미 많은 죄를 지었고 또한 날마다 짓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최선의 의로운 행위들이라는 것은 단지 더러운 누더기 옷에 비교할 수 있다(사 64:6). 그러므로 구원은 사람의 행위로가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와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가 바로 그 방법이었다.

[24-25절]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선택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신 자들을 가리킨다. 이것을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고 한다. 단순히 ‘믿으라’는 초청이 아니고 ‘믿게 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중생(重生) 즉 거듭남이다. 그때 성령께서는 죄인의 마음 속에 깨달음을 주셔서 세상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자신이 죄인인 것과 예수께서 구주이신 것을 깨닫고 믿어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은 거리낌이나 어리석음이 아니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최선의 방법이다. 그것은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며 가장 힘있는 방법이다. 그것은 사람의 최선의 생각보다 낫고 그 어떤 힘있는 수단보다 낫다. 그것은 사람의 웅변적 말이나 수사학적 말보다 힘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감동시키는 정도가 아니고, 사람의 죽었던 영을 살리고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한다. 우리는 오늘도 전도와 설교의 효력을 믿는다.

[26절]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형제들’이라는 말은 신자들이 주 안에서 믿음의 한 식구 됨을 보인다. 그것은 사회적 신분, 학력, 재산 정도를 뛰어넘는 말이다. 교회에는 높고 낮은 계급이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르심을 받은 형제들이다. 여기에 ‘부르심’이란 성령의 역사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를 실제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이다.

고린도교회에는 육신적으로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 정치적 권력이나 재력(財力)이 있는 자, 좋은 가문이나 사회적 신분이 있는 자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고린도교회만의 현상이 아니고 역사상 모든 교회들의 일반적 현상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들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예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마 19:24).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그의 무지와 어리석음이지만 세상의 만족과 즐거움은 그를 어둡게 하였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은 믿음에 입문하기가 비교적 쉽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27-29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중 다수는 과거에 미련한 자들, 약한 자들, 천하고 멸시받는 자들,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었다. 머리가 좋고 말을 잘하는 자들이 아니고 좋은 학교 출신도 아니고 몸이 건강한 자들도 아니다. 세상적으로 존귀하거나 인정받거나 잘난 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택함을 입었고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의 근본이다. 이로써 우리는 우주와 사람의 근원을 알게 되었고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었고 또 도덕의 근거와 내용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지혜 중의 지혜이며 지식 중의 지식이다. 또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삶은 세상의 빛이다. 그들은 거짓되고 악한 세상 속에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산다. 그들은 역경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소망과 용기를 가진다. 그들에게는 기쁨과 평안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도우시고 공급하신다. 그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의 이러한 지식과 삶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주신 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는 자이다. 사람은 죄인이며 또 죄의 결과로 많은 고생과 슬픔과 허무함 가운데 살고 있다. 사람의 육신적, 물질적, 세상적 자랑은 헛되다.

[30-31절]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엑스 아우투)[그로 인하여,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아포 데우)[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해 중생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救贖)의 은혜와 복 안으로 들어가 그의 의와 생명 안에 거하며 그의 영광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구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 우리는 과거에 지혜가 없이 정신적 혼돈 속에 살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누구이시며, 사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이며 무엇이 선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지혜가 되셔서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 바른 대답을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의 의로움이 되셨다. 의는 율법을 다 지킨 것을 말한다. 세상은 불의하고 죄악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율법의 요구 곧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고 완전한 의를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의 거룩함이 되셨다. 우리에게는 거룩함이 없었다. 죄악된 세상은 더럽고 불결하며 거기에 사는 죄인들은 더럽고 불결하였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 모든 더러움과 불결을 다 씻어주셨다. 그는 우리의 죄를 씻는 샘이 되셨다(슥 13: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구속(救贖)함이 되셨다. 구속은 값 주고 사서 건져내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죗값을 다 지불하시고 죄와 그 형벌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된 것, 의인된 것, 성도된 것, 천국 시민된 것, 영생 얻은 것, 이것들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해야 한다. 실상, 육신적, 물질적, 세상적 자랑은 헛되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께서 사람이 되셔서 죄인들을 위해 속죄의 죽음을 죽으신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신 죽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근거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주신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 속죄 신앙이 구원의 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멸망할 것이다.

둘째로, 십자가의 도는 기적주의와 은사주의나, 이성주의와 경험주의와 다르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았다. 오늘날도 어떤 이들은 기적과 초자연적 은사를 추구한다. 그들은 복음 진리와 속죄신앙과 경건과 계명 순종을 충분하게 생각하지 않고 기적 체험, 은사 체험을 추구한다. 또 다른 이들은 사람의 이성의 판단이나 경험의 잣대로 성경의 계시 진리들을 판단한다. 그들은 성경을 신화의 책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다 기독교의 핵심을 오해하였다. 우리는 이 두 경향을 다 경계하고 성경적 정통 기독교를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 한다.

셋째로, 십자가의 도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 복음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따라 이 십자가의 말씀, 곧 속죄의 복음을 만민에게 전파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으로 부족한 자들을 그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부르시고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육신적, 물질적, 세상적인 것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해야 한다.

2장: 영적인 진리

[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복음은 ‘하나님의 증거’이다. 그것은 죄사함과 영생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신 진리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참되며 확실하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 복음의 진리성은 하나님께서 증거하셨다는 사실에 있지 사람의 달변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기독교 복음은 그 전달 방법보다 그 내용이 더 중요하다. 복음의 가치는 그 내용에 있다. 그 중심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전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하겠다고 작정하고 결심했다. 사람이 복음을 아름다운 말로 단장한다고 복음이 더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의 효력은 사람의 아름다운 말에 있지 않고 그 내용 자체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이 죄인들을 구원하는 능력이 된다.

[3-5절]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사람의]2)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기독교 복음의 내용이 능력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린도에 머물었을 때에 사람으로서는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구원의 능력으로 사용하셨으나 복음을 전하는 당사자인 바울 자신은 약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오히려 복음의 능력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그 내용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잘 드러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스스로 약하다고 느낄 때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들을 충실히 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전도하며 설교할 때 사람의 지혜의 권하는 말로 아니하고 성령과 능력의 나타남으로 했다. 여기에 전도자의 바른 자세가 있다. 복음 전도자는 사람의 지혜의 권하는 말로 전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 그는 단순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 단순한 복음 전파에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신다. 그 능력은 과거에 외적으로 나타난 기적들 뿐만 아니라, 또한 어느 시대나 내면적 변화의 능력, 즉 죄인을 회개시키고 믿게 하는 구원의 능력을 가리킨다.

복음의 성격이 그러하듯이, 성도의 믿음도 사람의 지혜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다. 그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다. 이와 같이, 성도의 믿음은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존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우리를 믿게 하셨다.

[6-7절]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성경은 ‘온전한 자’나 ‘온전함’에 대해 많이 말한다(고전 14:20; 엡 4:13; 히 5:14; 빌 3:15; 골 1:28; 4:12; 마 5:48; 약 1:4; 3:2). ‘온전한 자’란 구원의 복음에 대한 바른 지식과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주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 즉 신앙 인격에 성숙한 자를 가리킨다고 본다. 사도 바울은 온전한 자들 가운데서는 지혜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가 말하는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것은 ‘비밀한 가운데 있었던 하나님의 지혜,’ 곧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의 영광을 위해 미리 정하셨고 오랫동안 감취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라는 말은 구원의 목표를 보인다. 그것은 영화 즉 영광스런 상태의 회복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거룩하고 의롭고 영광스러운 자로 창조되었었다. 그러나 사람은 범죄함으로 그 거룩하고 의롭고 영광스러운 형상을 잃어버렸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셔서 그 본래의 영광스러운 상태의 회복을 주시는 것이다.

이 구원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의 모든 일들에 대한 완전한 설계자요 계획자이시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대로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인류 구원의 일도 그러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구원은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작정하신 방법이다.

[8-9절]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이 세상의 왕들과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이 비밀한 지혜, 감취었던 지혜를 알지 못하였다. 만일 로마 총독 빌라도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죽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예수님을 ‘영광의 주’라고 부른 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그는 초라한 유대인 사형수에 불과한 자가 아니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주이셨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 곧 성도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세상 사람들의 눈이나 귀나 마음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택함을 입은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섞여 살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버려두신 자들 곧 하나님을 모르고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사랑하고 죄악된 삶에 빠져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말씀을 믿고 따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과 부활과 영생을 사모하지만, 하나님께서 버려두신 자들은 이 세상의 헛되고 죄악된 것들, 곧 돈과 육신의 쾌락과 덧없이 지나가는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한다.

[10-11절]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신비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신성(神性)을 가지셨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 모든 것을 아심 즉 전지(全知)의 속성은 하나님만의 속성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기운이나 세력이 아니고 인격적 존재이시다. 그는 무엇을 아시는 분이시다. 인격적 존재가 아닌 것은 무엇을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영이시지만, 성경은 하나님과 구별되신 성령에 대해 증거한다(요 14:16).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는 분명하게 구별되신다.

[12-13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하나님의 깊은 것도 아시는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감취었던 지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복음 진리를 사도들에게 계시해주셨다. 사도들은 ‘하나님께로 온 영’ 곧 성령을 받았고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셨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성령께서 주신 진리 곧 영적인 진리이다. 우리는 동일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이 전한 복음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셨다. 그는 사도들을 통해 주신 신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깨닫게 하셨고 믿고 구원 얻게 하셨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 세상의 지혜로 분별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분별할 수 있다.

[14절] 육에 속한 사람[육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에 속한’ 즉 ‘육적인’(프쉬키코스)이라는 말은 ‘영적인’ (프뉴마티코스)이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로 육신의 욕구와 격정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다. 육적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일반 사람, 즉 믿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그는 성령을 받지 못한 자이다. 이단자들도 육적인 자들(프쉬키코이 yucikoiv)이다(유 19). 육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고전 1:21) 깨닫지 못하고(롬 3:11) 하나님을 경외함과 섬김이 없고 하나님께 감사치 않고(롬 1:21; 3:18)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롬 1:23).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치 않고 사탄과 악령들을 따라 육체의 욕심대로 온갖 죄와 부도덕에 빠져 있다(마 15:19; 롬 3:12-15; 엡 2:2-3; 4:17-19).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교훈을 받지 않고 믿지 않는다. 그는 성령께서 계시하신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여기며 성령의 일을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되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15-16절] 신령한 자[영적인 사람]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영적인 사람’은 성령을 받아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이다.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난다. 사람이 중생(重生)하고 구원을 받을 때 성령께서 그 속에 들어오시며 그 안에 영원히 거하시고 그를 거룩한 길로 인도하신다. 성도는 성령을 받은 자이다.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엡 1:13).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오셨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복음을 깨닫고 믿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을 분별하고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는 자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께서 주신 지식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는 자이다.

고린도전서 2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단순히 전하는 것이며 그것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오늘날도 우리는 사람의 아름다운 말이나 언변으로가 아니고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 복음은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오직 성령으로 깨닫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광의 주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으로 이 진리를 깨달았고 믿었다. 믿는 자들은 성령의 가르치심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더욱 배워 온전함에 이르러야 하고 구원의 최종 목표는 영광의 상태의 회복이다.

셋째로,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외함과 섬김이 없고 그에게 감사하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 그에게는 복음이 미련하게 보인다. 오직 성령을 받은 영적인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시며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깨닫고 믿고 구원을 얻는다.

3장: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1절]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사르키코이)[육신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육신적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즉 영적으로 어린 성도를 가리켰다. 그는 주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는 하지만 아직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육신의 죄성에 지배를 받는 자이다.

[2절]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밥’은 ‘딱딱한 음식’을 말한다. 갓난아기는 밥을 먹지 못한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어린 성도들은 듣기 쉬운 교훈만 받고 어려운 교훈들을 받지 못한다(히 5:12-14).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자랄수록(엡 4:13-15; 벧전 2:1-2; 벧후 3:18)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연구하고 배우며 믿고 행하며 지식과 인격이 자라야 한다.

[3절]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과 분열]3)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육신에 속한 자 곧 영적 어린아이라고 취급하는 까닭은 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과 분열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기, 분쟁, 분열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죄악들이다(갈 5:19-21). 성도는 그런 죄들을 다 버리고 씻음 받아야 한다.

[4절]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신에 속한](전통본문)4) 사람이 아니리요.

고린도교회의 분쟁은 지도자들에 대한 교인들의 잘못된 태도에서 나타났다. 바울은 그 교회를 개척했고 아볼로는 그 후에 성경말씀을 가르친 자이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 어떤 이들은 바울을 중심으로, 다른 이들은 아볼로를 중심으로 파당을 만들었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 육신에 속한 증거이었다. 영적으로 어린 자들은 사람에게 속하려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서 파당과 분열이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서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사람을 바라보면 시험에 떨어지고 범죄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주님만 믿고 바라며 섬기고, 오직 성경말씀만 믿고 순종하고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으로 생활하고 교회에서 일치 단합해야 한다.

[5-7절]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바울과 아볼로는 복음의 일꾼들이었다. 일꾼이 중요하지만, 하나님과 복음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일꾼은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그를 보내신 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해야 한다.

복음 사역은 씨 심는 것과 물 주는 것에 비유되었다. 씨를 심는 것은 복음을 전해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을 가리켰고, 물을 주는 것은 구원받은 자들을 양육하는 것 곧 목회하는 것을 가리켰다. 씨를 심는 것은 전도하는 것이요, 물을 주는 것은 양육하는 것이다. 심는 일도 가꾸는 일도 다 중요하듯이, 복음 사역에서는 전도도 목회도 다 중요하다. 그러나 씨를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한 영혼도 구원할 수 없고 한 영혼도 성장시킬 수 없다. 개인의 구원과 성장이나, 교회의 설립과 성장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씨를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복음 사역에 있어서 복음의 일꾼 자신이 대단히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셔서 영혼들을 구원하셨을 뿐이다. 그렇다고 교인들이 복음 사역자를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복음 사역자 자신은 자신의 무능하고 무익함을 인식해야 한다(눅 17:10).

[8-10절]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복음 사역자들은 각각 자기의 일한 대로 상을 받을 것이다. 상은 구원과 다르다. 구원은 죄에서 건짐을 받는 것을 말하지만, 상은 선행과 봉사, 특히 복음 사역에 대해 약속된다. 구원에 차등이 있다고 말할 것은 아니나, 상에는 차등이 있다. 상은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즉 자신의 선행과 봉사와 충성의 정도에 따라서 주어질 것이다.

복음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성도들과 교회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다. 바울은 복음 사역을 또한 건축에 비유한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기초를 닦아야 한다. 바울은 터를 닦은 자요 그의 뒤에 일하는 사역자들은 그 위에 건물을 세우는 자들이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건축해야 한다. 목회는 집을 세우는 일이다. 그것은 구원받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교훈하고 훈련시키는 것이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구원의 시작이요 성화(聖化)는 구원의 진행이다. 믿는 자는 지식과 인격에 있어서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형상, 곧 거룩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한 모습을 이루어야 한다.

[11절]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다른 터는 없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반석은 베드로가 조금 전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고백한 그의 신앙고백을 의미하였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 교회의 기초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믿는 속죄신앙은 믿음의 핵심이다.

[12절]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두 종류의 건축 자재가 있다. 하나는 금과 은과 보석 같은 내구성(耐久性)이 있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나무와 풀과 짚 같은 내구성이 없는 것이다. 두 종류의 목회가 있다. 하나는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짓는 목회요, 다른 하나는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집을 짓는 목회이다.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짓는 것은 자재 값이 비싸지 않아서 비교적 쉽게, 크게, 또 빠르게 지을 수 있으나,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짓는 것은 자재 값이 비싸고 기술도 많이 필요해 집을 짓기가 힘들고 크게 짓는 일은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금과 은과 보석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참 목회요 그렇게 지어진 교회가 참 교회이다.

금과 은과 보석은 바른 교훈을 가리키며, 나무와 풀과 짚은 거짓된 교훈을 가리킨다. 참 교회는 바른 교훈을 통해서 세워진다. 세상적인 생각이 섞이지 않은 바르고 순수한 설교는 바른 교회 건립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혼합된 말을 전하는 자들도 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기보다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를 하였다. 그들은 회개를 외치기보다 평안을 선포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평안은 오지 않았다. 평안은 죄를 버릴 때에만 오기 때문이다.

[13절]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공력’이라는 원어(에르곤)는 ‘일’이라는 뜻이다. 복음 사역자들의 사역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평가하실 날이 온다. 그것은 마지막 심판 날이나 그 전의 대환난 날이다. 그때 그들의 사역이 겉보기는 굉장했으나 구원과 성화가 없는 불충성된 사역이었는지, 참으로 영혼들을 구원하고 양육한 충성된 사역이었는지 판별될 것이다.

[14-15절]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복음 사역자들은 자신의 일한 바가 불 시험을 통과하면 상을 받을 것이다. 즉 그가 목회했던 교인들이 불같은 환난을 잘 통과하면 그는 목회를 잘 한 자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불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비록 목회자 자신이 구원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는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그의 목회 사역에 대한 상은 없을 것이다.

[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성도 개인도 그러하고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도 그러하다.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기 때문이다(고전 6:19).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성령께서는 성도 개개인에게도 계시고 그들의 모임인 교회 가운데도 계신다. 이것은 성도 개인과 신약교회에 놀라운 복이 아닐 수 없다.

[17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은 큰 복이지만, 그 사실은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않고 거룩하게 보존해야 하는 의무를 보인다. 성전을 더럽힌다는 것은 범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거슬러 자기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모든 것이 죄이며 그것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다. 특히 교인들 간에 서로 미워하고 분쟁하는 것은 거룩한 교회를 더럽히는 일이다. 바울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는 하나님께서 멸하시리라고 경고했다.

[18-20절]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국한문--‘궤계’)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사람의 사상들과 철학들은 실상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것들은 진리 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진리를 논하는 어리석은 일이다. 이 세상의 가장 지혜로운 자의 지혜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미련한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스스로 속게 하시며 그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여기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지혜가 참 지혜가 되지 못하며 오히려 자기 꾀에 빠지고 자기 모순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는 헛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참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에는 지혜와 지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교인들 가운데 자신을 똑똑하고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오히려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지혜는 참 지혜가 아니고 참으로 지혜로우신 분은 창조자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21-23절]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사람을 자랑하는 데 있었다. 지도자 중심의 파당과 분쟁이 그들의 문제이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중요한 교훈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복음 사역자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들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자와 섭리자와 구주이신 하나님만 자랑하고 하나님께만 감사해야 한다.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 다 교회를 위한 일꾼들이요 교회의 공동적 소유물과 같다. 그들은 모든 교회의 공동적 봉사자들이다. 온 세상도 교회의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우리의 모든 것은 다 교회를 위해 존재하고 다 성도들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 파당에 속하지 말고 교회 전체에 속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3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복음 사역자들은 바르게 일해야 한다. 전도는 씨를 뿌리는 것과 같고 목회는 물을 주는 것과 같으며, 전도는 터를 닦는 것과 같고 목회는 그 위에 집을 세우는 것과 같다. 전도자이든지 목회자이든지 복음 사역자들은 바르게 일해야 한다. 전도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만 전해야 한다. 구원을 위한 다른 길은 없다. 또 목회자는 하나님의 양들을 금, 은, 보석으로, 즉 하나님의 순수한 교훈, 성경의 순수한 교훈으로 양육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자신과 교회를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 개인 속에는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영원히 거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우리가 범죄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가 된다. 이와 같이,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교회에 관련하여 죄를 지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가 된다. 특히 우리가 잘못된 이단사설을 용납하거나 파당을 만들고 분쟁하고 분열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큰 죄를 짓는 자가 될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를 멸하실 것이라고 경고한다.

셋째로, 우리는 사람을 자랑하지 말자. 복음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이지만, 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구원과 영적 성장 곧 성화는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고 자랑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 단합해야 한다.

4장: 교만치 말 것

[1-2절]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종들]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속죄의 진리이며 구약시대에 감취었다가 이제 계시된 비밀의 말씀이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이며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 복음을 충성되이 해설하고 전파하였고 신약성경들에 기록하였다. 신약교회는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또 오늘날도 하나님의 복음을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것이다. 충성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믿을 만한 상태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충성은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이다(갈 5:22). 오늘날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에게 필요한 것도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것이다.

[3-4절]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바울은 사람의 판단을 크게 여기지 않았다. 우리가 사람의 판단에 너무 마음을 쓰면 주의 일을 힘있게 할 수 없다. 바울은 심지어 자기 자신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았고 스스로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성도는 범사에 양심적으로 살아서 자책할 것이 없어야 한다. 바울은 모든 판단을 주님께 맡겼다. 사탄의 큰 전략의 하나는 하나님의 일꾼들의 힘을 빼어 하나님의 일을 잘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낙망은 큰 시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말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충성해야 한다.

[5절]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드러난 이단 사상이나 죄는 판단하고 지적하고 책망하고 그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는 말씀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점들, 특히 복음 사역자들의 진실성과 충성의 정도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것들은 하나님만 아신다. 그러므로 그가 오셔서 모든 것을 심판하실 때까지 우리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는 뜻이다.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은 완전하고 철저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때 주의 선하고 충성된 종들은 위로와 칭찬을 받을 것이며, 악하고 불충성된 종들은 책망과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재림 때까지 다른 이의 드러나지 않는 점들을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특히 복음 사역자들의 충성의 여부와 충성의 정도를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려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드러난 이단 사상과 오류는 지적되어야 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점들에 대해서는 주님께 맡겨두면 된다. 주께서 완전히, 철저히 판단하시고 공의로 보응하실 날이 있기 때문이다.

[6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말씀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라](전통사본)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복음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종들에 불과하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물론 성도들이 그들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들을 지나치게 생각해 자랑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종들도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말고 자신의 무익함을 항상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자들을 높이어 파당을 만들지 말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교회의 일치와 단합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교만한 마음으로 남을 대적하는 자리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 교만은 사람의 타고난 본성의 큰 결함이다. 그것은 마귀의 죄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크게 생각하며 자기의 위치를 벗어난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항상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고 자기 위치를 지키며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한다. 참된 성도의 모습은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충성하는 것이다.

[7절]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누가 성도를 세상 사람들 중에서 구별하였는가? 또 누가 직분자들을 성도들 가운데서 구별하였는가? 우리를 구별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하여 부르셨고 또 우리 가운데서 어떤 이들에게 교회의 직분까지 주셨다.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직분은 우리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의 뜻 가운데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다.

우리의 가진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께 받은 것들이다. 우리의 육신의 생명도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받은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세상을 떠나갈 수밖에 없다. 건강도 우리의 것 같지만 하루아침에 그것이 우리를 떠나갈 수 있다. 부모님도,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다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섬기게 된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 죄사함 받고 천국과 영생을 기업으로 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성령을 받은 것 등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들이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모든 영적인 것들과 육신적인 것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본래부터 우리의 소유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사람은 남의 것을 가지고 자기의 것인 것처럼 자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자랑해야 하고 하나님께만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님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한다.

[8절]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하기를 원하노라.

고린도 교인들은 물질적 부요함과 풍족함, 또 성도로서의 자유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물론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높아져 서로 분쟁하고 파당을 만든다면 그들의 그 부요와 풍족, 그 자유와 특권은 복이 되지 못한다. 차라리 사람을 겸손케 하는 가난과 속박이 그들에게 복이 될 것이다.

[9절]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사도 바울의 형편은 고린도 교인들의 형편과 정반대이었다.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선택하시고 복음의 말씀을 맡기시며 기적 행할 능력을 주신 자이며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존귀한 직분이었다. 사도들은 교회의 기초이었다(엡 2:2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존귀한 직분자 사도 바울을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다. 가장 존귀한 자를 가장 미천한 위치에 두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세상의 구경거리, 천사들과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다.

[10-13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사도 바울 일행의 비천함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미련한 자가 되고 약한 자가 되고 비천한 자가 되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가 전한 그리스도 때문에 지혜를 얻고 힘을 얻고 존귀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이 인류의 구원이 되었듯이, 주의 종들이 비천함을 당하며 이룬 사역들이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복에 이르게 한 것이다.

바울은 그의 일행이 지금까지 당한 고난을 증거했다. 그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없었고 매맞았고 거처할 곳이 없었고 손으로 일했고 비방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욕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축복하였고 참았고 권면했다. 바울은 자신들이 한 마디로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표현하였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비천함에 두신 것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을 것이다. 첫째로, 그것은 그들로 겸손케 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둘째로, 그것은 그들로 하나님과 내세에 소망을 견고히 두게 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셋째로, 그것은 복음 사역자들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길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헛되고 무가치함과 오는 세상의 참된 가치를 알고 하나님 중심, 진리 중심으로 살아야 하며,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내세의 소망 안에서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려야 한다.

[14-16절]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사도 바울이 자신의 비천한 형편을 말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을 부끄럽게 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을 사랑하는 자녀들같이 권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의 전도를 통하여 설립되었다. 그는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다. 아버지는 선생들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고 자녀들을 가르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하였다. 그것은 그의 낮아짐, 그의 비천함, 그의 겸손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고린도교회의 첫째 문제점은 높은 마음에서 생긴 분쟁과 분열이었다. 그들은 이제 높은 마음을 버리고 자신들을 낮추는 것이 필요했다. 그들이 바울이 당한 비천함을 듣는다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질 수 있을 것이다.

[17-21절]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에서 능력으로 일하신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는 이론만 있지 않고 또한 실제적 삶이 있다. 참된 교회에는 교인들의 바르고 선한 인격과 삶이 있고 또 그들의 거룩한 헌신과 사랑의 봉사가 있다.

고린도전서 4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교회는 복음 사역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과 기독교 복음의 청지기들로 인식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복음 사역자들과 교회 직분자들의 드러나지 않는 점들에 대해 주의 재림 때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고 서로를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만과 자랑은 우리에게 합당하지 않다.

넷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복음 사역을 하며 충성했던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그것은 주님 자신께서 가신 길이었고 또 그가 친히 교훈하신 바이었다. 주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5장: 사귀지 말고 내어쫓으라

[1-2절]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고린도교회의 또 하나의 문제는 음행한 자를 용납한 것이었다. ‘너희 중에 심지어’라는 표현은 그 용납의 행위가 교회의 거룩함에 매우 배치된다는 것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으므로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교회는 교리적 이단뿐 아니라, 윤리적 죄악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어떤 교인이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큰 악을 용납했다. 그것은 율법에 명백히 정죄된 죄악이었다(레 18:6). 율법은 그런 범죄자를 사형시키라고 규정했다(레 20장). 하나님께서는 이런 벌을 통해 이스라엘 사회에서 악을 제거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결혼 관계의 성결을 중시하신다. 부부 관계를 벗어난 성행위는 하나님 앞에서의 큰 죄악이다. 고린도교회가 포용한 그런 행위는 심지어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교회는 권징을 통해 그런 악을 제거하고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지만, 고린도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3-5절]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우리]5) 주 예수 [그리스도]6)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전통본문)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비록 몸으로는 떠나 있었지만 영으로는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거기에 있어서 그 악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다. 그 악한 자가 그 죄를 청산하지 않는다면 그는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하였다. 교회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이는 단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회는 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치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고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할 것이다.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딤전 1:20도 그런 표현을 함)은 제명출교를 가리킨다고 본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세상은 사탄이 어느 정도 지배권을 행사하는 곳이다. 요한일서 5:19,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육신이 멸한다는 말은 사탄에게 내어 준 바 된 결과 사고나 몸의 병 등으로 죽게 됨을 의미할 것이다.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한다는 말은 영으로는 회개하여 주 예수의 날, 곧 그의 재림의 날에 구원받은 자로 나타나게 된다는 뜻이라고 본다. 권징의 일차적 목적은 그를 버리는 데 있지 않고, 그를 회개시키는 데 있다. 권징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오히려 죄를 회개할 기회가 없겠지만, 권징할 때 택함 받은 죄인은 자신을 돌아보고 그 죄를 회개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교회가 주 예수의 능력으로 그런 범죄자를 사탄에게 내어준다는 말은 교회의 권세의 원천을 증거한다. 교회의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다. 권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에 근거하여 시행된다. 권징의 효력은 단지 교회에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다.

[6-8절]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전통본문)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고린도 교인들은 그런 악을 용납하면서도 뻔뻔스럽게 자랑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체로 건전하다. 단지 한 명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자랑은 옳지 않았다. 그 한 명을 용납한 것이 문제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기 때문이다. 악은 전염성을 가진다. 범죄한 한 명 때문에 교회의 거룩함이 상실되고 기강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용납되었다면 또 다른 죄인이 용납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 교회는 점점 더 부패될 것이다. 이것은 한 지교회나 한 교단이나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에 예표된 유월절 양이시다. 그가 우리 대신 희생되심으로 우리는 죄사함을 얻었다. 유월절 양의 피를 문틀에 바름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듯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묵은 누룩은 옛 죄악들을 가리킨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날의 죄악된 행습을 버려야 한다.

주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일은 명절과 같다. 주의 제자들은 이 날 공적 예배를 위해 모이기 시작했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제7일 토요일로부터 주간의 첫째날인 주일로 변경되었다. 신약교회는 공적 집회를 가질 때 누룩 없는 떡을 가지고 해야 한다. 그것은 옛날의 죄악들을 다 버리고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주일 집회로 모이는 것을 말한다.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교회의 구성원들도 거룩해야 하고 교회의 집회들도 거룩해야 한다.

[9-10절]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우리가 악한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할 때, 그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결코 이 세상과 격리되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가라든지 혹은 따로 공동집단을 만들어 그 속에서만 살라는 뜻이 아니다. 이 세상은 죄인들이 사는 세상이므로 우리가 죄인들과 도무지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면 우리는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의 전도 구역은 바로 이 죄악된 세상이며, 우리의 사랑의 대상, 전도와 구원의 대상은 바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죄인들이다.

[11절]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우리가 악한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는 교훈은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가 아니고 교회 안에 있는 자들에 대해서이다. 그것은 ‘형제라 일컫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아무나 형제라고 부르지 않는다. 형제라는 호칭은 세상과 교회를 구분하는 선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 형제라고 부를 수 있다.

권징과 교제 단절에 대한 교훈은 바로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문제이다. 즉 어떤 형제가 음행이나 탐람(貪婪)이나 우상숭배나 후욕(詬辱)이나 술취함이나 토색(討索) 등의 죄를 범한다면 그런 자와 교제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탐람은 탐욕, 후욕은 남을 욕하는 것, 토색은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는 것을 말한다(Thayer, BDAG). 이런 일들은 명백히 죄이며 교회 안에서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죄에서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만일 교회 안에 그런 악한 자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자들과 사귀지 말고 함께 먹지도 말아야 한다. 바른 믿음을 저버린 이단자들이나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과 불순종자들은 교회의 교제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12-13절] 외인들을 판단하는 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권징의 문제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이다. 물론 우리가 무엇을 바르게 판단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밝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날에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의 악한 자에 대해서는 교회가 판단하고 권징해야 한다. 만일 어떤 교인이 자신이 행한 악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그를 교회의 교제로부터 제외시켜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가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 또 죄의 심각성과 전염성을 안다면, 교회는 이 교훈대로 충실하게 권징을 시행해야 한다. 목사가 바른 교훈을 하고 교인들이 바른 신앙고백을 하고 실천을 힘쓰고 권징이 충실히 시행될 때, 그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함께할 것이다. 참 교회는 권징을 충실히 시행하는 교회이다. 권징이 없는 교회는 참 교회의 표를 잃어버리고 있는 교회이며 병들었거나 죽어가는 교회일 것이다.

고린도전서 6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교회는 누룩 없는 덩어리이어야 한다. 교회는 음행, 탐욕, 우상숭배, 욕설, 술취함, 강탈 등의 드러난 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거룩한 교회이어야 한다.

둘째로, 적은 누룩은 온 덩이에 퍼진다. 죄는 전염성을 가진다. 포용된 죄는 성도들의 삶을 부패시킬 것이다. 교회 안에 한 가지 죄가 포용되면 다른 죄들도 포용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전염성을 알고 드러난 죄는 한 가지라도 용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우리는 회개하지 않는 드러난 범죄자와 교제하지 말고 그를 내어쫓아야 한다. 권징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권징의 대상은 교리적인 이단들뿐 아니라, 도덕적 범죄자들이다. 한두 번은 권면하고 경계하지만, 계속 회개치 않으면 그와의 개인적, 교회적 교제를 끊어야 한다.

6장: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절]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고린도교회에는 성도간의 문제로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성도가 어떤 일로 다른 성도를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것은 의인이 불의한 자 앞에 판결을 구하는 옳지 않은 일이다. 성도들 간의 갈등의 문제는 성도들 앞에서 즉 교회 안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성도는 세상 법정보다 교회 법정을 더 크게 여겨야 한다.

[2-3절]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

성도는 마지막 심판 날에 세상 사람들을 판단할 것이며 악한 천사들도 판단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가 상호간의 일들을 판단치 못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 상호간의 일을 판단해야 한다. 성도는 양심을 깨끗이 씻음 받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받았으므로 세상 사람들보다 더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다.

[4-5절]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교회가 성도간의 문제를 재판하기 위해 모였을 때, 교회는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교회 안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워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 교회의 일들은 진리의 지식과 믿음과 지혜가 있는 자들을 세워 처리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바른 판단을 하고 일을 바르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는 그런 자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필요를 공급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기 적절하게 진리의 지식과 믿음과 지혜가 있는 자들을 세워 주실 것이다.

[6-8절]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성도간의 문제를 세상 법정에 고소하고 불신자들 앞에서 재판을 받는 것은 부끄럽고 잘못된 일이다. 죄씻음 받은 자들이 죄인들에게 판단 받는 것은 모순된 일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더 낫다.

[9-10절]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한다. ‘미혹을 받지 말라’는 말은 ‘속지 말라’는 뜻이다. 죄 가운데 머물러 죄의 낙을 누리면서도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속는 생각이다. 사도 바울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의 죄악들을 열거한다.

첫째는 음란이다. 음란은 결혼 관계 외의 성행위를 가리킨다. 오늘 시대는 매우 음란한 시대이다. 성도는 이 시대의 음란 풍조를 경계해야 한다. 음란에 대한 최선의 대책은 시험되는 환경을 피하는 것이다.

둘째는 우상숭배이다. 하나님 외의 다른 신에게 절하는 것, 조상의 혼령을 섬기는 제사와 차례, 점치는 것, 마리아의 무죄함, 승천, 중보자 됨을 믿고 그에게 기도함, 돈 사랑 등은 다 우상숭배에 해당한다.

셋째는 간음이다. 결혼한 사람이 자기 배우자가 아닌 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이 간음이며 이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큰 악이다. 신명기 22:22,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넷째는 탐색(貪色)이다. ‘탐색하는 자’라는 원어(말라코이 mala- koi;)는 ‘여자 같은 남자들, 동성애자들’을 뜻하며, ‘미동(美童) 혹은 남창’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다섯째는 남색(男色)이다. ‘남색하는 자’라는 원어(아르세노코이타이 ajrsenokoi'tai)는 남자동성애자를 가리킨다. 성경은 동성애를 용납할 수 없는 큰 죄악으로 간주한다.

여섯째는 도적질이다. 속여 취한 재물은 사람에게 결코 복이 되지 못한다. 잠언 20:17,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 성도는 돈 셈이 정확해야 한다.

일곱째는 탐람[탐욕]이다. 그것은 더 가지려는 욕심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셨다(눅 12:15). 탐심은 우상숭배이다(골 3:5).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10). 우리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히 13:5).

여덟째는 술 취하는 것이다. 술 취함은 마약과 같이 바른 정신을 잃게 하고 많은 실수와 범죄의 원인이 되는 나쁜 행위이다.

아홉째는 후욕이다. 후욕은 남을 비열하게 비난하고 욕하는 것이다. 진실을 증거해야 할 경우, 부득이 정당한 비난을 해야 할 때가 있겠지만, 성도는 보통 다른 이에 대한 비난을 삼가는 것이 좋다.

열째는 토색이다. 토색은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는 것을 말한다.

이상의 악들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이런 자들은 교회 속에 있어서도 안 된다. 교회는 충실한 권징으로 이런 자들을 배제하고 거룩한 회(會)가 되어야 한다.

[11절]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본절 후반부는 원문에 “그러나 씻음을 받았고, 그러나 거룩하여졌고, 그러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표현되었다. 성도는 다 과거에 죄인이었지만 그러나 지금 씻음을 받았고 지금 거룩하여졌고 지금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성령의 역사로 된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불의한 행위 가운데,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그 구원에 합당하게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12절]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지배를] 받지 아니하리라.

사람에게는 행동의 자유가 있어서 무슨 일이든지 할 자유가 있으나 자기에게 다 유익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은 죄악되어 그에게 해를 준다. 죄악되지 않은 일들 중에도 절제하지 않으면 해가 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음식을 먹을 자유가 있지만 과식하면 자기에게 유익이 아니고 해가 된다. 취미 생활이나 오락도 너무 빠지면 신앙생활에 해가 된다. 성도가 돈을 버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돈에 종이 되지 말아야 하고, 또 육신의 쾌락에 종이 되지 말아야 한다.

[13-14절]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음식은 먹기 위해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해 있다. 먹을 것이 없다면, 배가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동안만 서로를 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위장병을 주시면 음식을 먹을 수 없고 세상에 기근을 주셔도 위가 할 일이 없게 될 수 있다.

특히 우리의 몸은 음란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몸에 죄성이 있어서 언제나 음란에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몸을 그렇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몸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부부의 사랑이나 육신적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몸은 첫째로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하나님과 주 예수님께 순종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연약성을 아셨고 우리를 동정하셨고(히 4:15), 친히 우리를 위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우리의 몸을 예수님의 영광스런 부활의 몸과 같이 부활시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심같이 그 동일한 능력으로 모든 죽은 성도들을 영광스럽게 다시 살리실 것이다. 주의 재림의 날에 성도들은 영광스럽게 부활할 것이다.

[15-16절]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더 놀라운 사실은, 구원받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의 몸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고, 자기 몸을 창녀와 결합하여 더럽혀서는 안 된다.

[17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주와 합한다’는 말은 영적 연합을 가리킨다. 그것은 요한복음 15장에서 주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신 뜻과 같고 성경에 자주 나오는 ‘주 안에’ 혹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씀의 뜻과 같다. 이것은 주님과 우리의 인격적 구별을 부정하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사람과 하나님의 실체적 연합은 불가능하다. 유한한 인간과 무한하신 하나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주와 한 영이 된다는 말씀은 단지 영적, 정신적 의미일 뿐이다.

[18절]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의 지체이기 때문에 자기 몸을 음행에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 음행을 피해야 한다. 음행은 다른 죄들과 달리 자기 몸을 더럽힌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의 몸을 음행으로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19-20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전통본문)7)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며 주의 핏값으로 사신 바된 몸이다(고전 3:16; 행 20:28).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몸을 항상 거룩하게 보존해야 하고 우리의 몸과 영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치며 살아야 한다. 성도의 첫 번째 생활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이다. 이사야 43:7은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말한다. 소요리문답 제1문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에게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삶을 말하며(사 43:21),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삶을 말한다. 그것은 성경의 진리대로 사는 삶이며 서로 사랑하는 삶이다(요일 3:23). 요한이서 4,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것을 포함한다.

고린도전서 6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성도간의 소송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지 말고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와 죄사함을 받고 새 삶을 살기 시작했다. 성도는 마지막 날 세상을 판단할 것이며 천사들도 판단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간의 문제를 세상 사람인 법관 앞에 판단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잘못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그런 일을 판단할 만한 진리의 지식과 믿음과 지혜를 가진 자들을 주실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는 음란, 우상숭배, 간음, 동성애, 도적질, 탐심, 술취함, 욕설, 강탈 등의 죄를 범한 자를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하실 것이며 그가 사탄과 악령들을 위해 준비한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져 넣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과 형벌은 매우 무서울 것이다. 지옥은 참으로 두려운 곳일 것이다. 우리는 다 과거에 지옥 가야 마땅했던 죄인들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성령의 역사로 죄씻음을 받았고 거룩함을 얻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모든 죄악을 멀리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사셨고 우리의 몸을 그의 지체가 되게 하셨고 성령께서는 우리 몸 속에 오셔서 우리의 몸을 그의 성전으로 삼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귀하고 거룩한 성전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음행과 같은 죄를 지음으로써 우리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몸과 영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거룩하고 선하게 드려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즉 성경의 교훈대로 거룩하게 살고 선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과 하나님의 선한 일들에 사용해야 한다.


7장: 독신, 결혼, 절제

[1-2절]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가까이 하다’는 원어(합토마이)는 ‘만지다(KJV, NASB), 결혼하다(NIV)’는 뜻을 가진다. 결혼이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제도이지만(창 2:18; 잠 18:22),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은 임박한 환난 때문이었다(26절). 환난 때에는 가족 관계가 즐거움이 아니라 근심과 짐이 될 수 있다. 또 성도는 결혼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일에 더욱 전념할 수 있다(32-33절). 오늘날도 주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기를 원하는 성도는 독신으로 살며 그렇게 할 수 있다.

독신의 장점이 있지만, 결혼의 필요성도 있다. 결혼 제도는 아내가 남편을 돕게 하기 위해 또 자녀 출산을 위해 주셨지만, 음행의 방지를 위해서도 주셨다.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며 성도는 세상에서 음행의 시험을 받는다. 그러나 정상적 결혼 생활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음행의 시험에 대한 최선의 방지책이 된다.

[3-4절]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결혼한 사람은 자기 의무를 다해야 한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다정한 표정과 따뜻한 말로 그 사랑을 표현하고 경제적 책임을 다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 양육, 식사 준비 등의 집안일을 함으로써(딛 2:4-5) 남편이 바깥일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또 그들은 부부로서의 의무도 행해야 한다. 부부는 한 몸이므로, 자기 몸을 상대방이 주장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부부의 감정은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원하는 바를 무시하지 말고 존중하고 사랑하고 품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에, 부부 관계에 불만이 생기고 사랑이 식어지고 갈등이 커질 수 있다.

[5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금식하고](전통본문)8)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서로 분방하지 말라’는 원어는 ‘서로[서로의 권리]를 빼앗지 말라’는 말로서 상대방이 원할 때 거절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금식하고 기도할 시간을 위해서는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부부관계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나 분방하는 것도 서로 합의해서 단지 ‘얼마 동안’ 해야 한다.

부부가 분방치 말아야 할 이유는 절제 못함을 인해 사탄으로 시험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마귀는 사람의 약점을 엿본다. 육신적인 감정과 욕망은 사람의 공통적 약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일에 있어서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 신앙생활과 부부생활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믿음 좋은 사람은 부부관계도 좋아야 한다. 부부간에 다투는 일이 있더라도 각방을 쓰지 말고 속히 화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6-7절]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허용]요 명령은 아니라.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바울이 결혼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은 명령이 아니고 허용하는 것뿐이다. 그는 이미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고 말했고 또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한다’고 말했다(8절). 이 말씀들에서 그는 분명히 독신의 유익을 말하고 있다. 물론 결혼이 두렵다거나 귀찮아서가 아니고, 또 자유 분방하게 살기 위해서도 아니다. 독신이 유익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들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독신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가 있어야 가능하다(마 10:10-12).

[8-9절]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바울은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나 과부들에게 “나와 같이 그냥[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즉시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고 말한다. 절제할 수 없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낫다. 사람이 절제하지 못하면 범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육신의 정욕은 결혼을 통해 정당하게 해소되는 것이 좋다(딤전 5:14).

[10-11절]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결혼한 자는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 정당한 이혼이 아닌 경우 여자가 부득이 남편을 떠나 별거하게 되면, 재혼하지 않고 그대로 지내든지 그 남편과 다시 합해야 한다. 그러나 정당한 이혼을 한 경우에는 재혼이 가능하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5). 남편도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 음행 외에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정당한 이유는 없다.

[12-13절]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주의 명령이 아니라’는 말은 예수께서 지상 생애 동안 이런 경우에 대해 직접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도를 통하여 이 경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증거된다. 부부 중에 한 쪽만 믿는 경우, 믿지 않는 쪽이 함께 살기를 좋아하면 믿는 이는 그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결혼한 남녀 중 한 쪽이 먼저 믿게 되었을 경우를 말한다. 물론, 성도는 믿는 자와만 결혼해야 한다(고전 7:39; 신 7:1-4).

[14절]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되었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되었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부부 중에 한 쪽만 믿어도 그의 가정은 이미 세상 사람들의 가정과 구별되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 가정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른 쪽의 구원의 가능성이 열렸다. 또 믿는 가정에 태어난 자녀들은 부모 중 한 쪽만 믿어도 거룩하다. 이것은 언약적 의미라고 본다.

[15-17절]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믿지 않는 이가 헤어지기를 원하면 헤어질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부부관계보다 우선적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영생의 길이므로 성도에게 절대적 요소이며 부부관계보다 앞서야 한다. 믿는 성도가 믿지 않는 쪽을 구원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어느 날 내가 상대방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참고 지내겠다는 것은 결코 최선의 생각이 아니다. 그러나 가능한 한 화평을 지키는 것이 좋다. 별거는 부득이한 일이며 이혼은 최악의 조치일 뿐이다.

[18-19절]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성도에게 할례를 받고 안 받고는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세례 의식도 그 형식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참 종교는 형식에 있지 않고 믿음과 순종에 있다.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20-24절]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도가 가진 세상적 신분이나 어떤 육신적 조건이 중요하지 않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 다 동등한 특권을 누린다. 골로새서 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베드로전서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성도는 예수님의 속죄의 피로 사신 바 되어 그의 종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25-26절]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판단]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사도의 판단은 신적 권위를 가진다(살후 2:15). 그는 충성된 마음으로 권하기를, 임박한 환난 때문에 처녀가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했다. 환난 중에는 의식주 문제로 많은 고통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27-28절]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결혼한 자는 결혼의 의무를 짐스럽게 생각하여 거기로부터 해방되기를 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아내와 사별(死別)했거나 정당하게 이혼했을 경우 아내를 구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결혼하는 것은 죄 짓는 일이 아니며 단지 육신에 고통이 따를 뿐이다.

[29-31절]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성도는 세상에서 맡겨진 자기의 의무에 충실해야 하지만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거나 자랑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다 지나가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세상이 헛된 줄 알고 세상 위주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내세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읽기를 좋아하고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32-35절]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결혼한 자는 상대방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애쓰게 된다. 이것은 결혼한 자로서 정상적인 행위이며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자는 결혼한 자보다 더 주의 일을 위해 살 수 있다. 독신은 유익이 있다. 그러나 바울이 독신의 장점을 가르침은 성도에게 시험의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요 마음의 흐트러짐 없이 전심으로 주를 섬길 수 있게 하려 함이었다. 성도는 주의 일을 위해 독신생활을 할 수 있다.

[36-38절]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 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부모가 처녀 딸을 결혼시키는 것은 정당한 일이요 죄짓는 것이 아니지만, 결혼시키지 않고 그로 하여금 주의 일에 전적으로 힘쓸 수 있게 하는 것은 더 잘하는 것이다. 물론, 그가 스스로 원해야 한다.

[39절]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법으로]9)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재혼할 수 있다. ‘주 안에서만 하라’는 말씀은 성도의 결혼의 기본 원리를 증거한다. 성도는 반드시 구주 예수님을 믿는 자와만 결혼해야 한다(신 7:1-4; 느 13:23-27; 고후 6:14-16).

[40절] 그러나 내 뜻[의견, 판단]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사도의 교훈은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은 교훈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독신(獨身)은 유익하다. 독신은 마음의 흐트러짐이 없이 하나님의 선한 일에 전심전력할 수 있는 유익이 있다. 그러나 단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절제의 은혜가 필요하다.

둘째로, 결혼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음행 방지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최선의 방책이다. 절제의 은사가 부족한 우리는 결혼 관계를 잘 사용함으로써 마귀가 주는 음행의 시험을 막을 수 있다.

셋째로, 결혼한 자는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 부부는 각자의 의무를 다해야 하며 특히 자기 몸을 자기가 주장하지 말고 상대방을 항상 배려해야 한다. 금식하고 기도하는 일 외에는 서로 분방하지 말아야 한다.

넷째로, 결혼의 기본 원칙 하나는 “주 안에서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는 마음의 큰 고통이 따르고 육신의 고통도 따를 것이다. 이것은 별거나 이혼이나 재혼에도 적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