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바울서신 강해·김효성목사 기타

★고린도후서 1장: 위로하고 기쁨을 돕는 직분 - 7장: 위로와 기쁨을 얻는 직분

영국신사77 2020. 4. 15. 18:12


고린도후서강해

김효성 목사

2019년 6월 26일 수정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적 견해를 버릴 타당한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1장: 위로하고 기쁨을 돕는 직분

2장: 사랑과 승리의 직분

3장: 새 언약의 직분

4장: 낙심치 않는 직분

5장: 화목케 하는 직분

6장: 고난으로 감당하는 직분

7장: 위로와 기쁨을 얻는 직분

8장: 풍성한 헌금

9장: 즐거움으로 하는 헌금

10장: 우리의 싸우는 병기

11장: 고난의 수고

12장: 사도의 표

13장: 권면과 축도


고린도후서 서론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의 서신이다. 초대교회의 폴리갑, 터툴리안, 이레니우스 등은 본 서신을 자주 인용했다. 본 서신 내용의 세부적 성격과 그 자연스러움과 생생함은 그것의 순수성을 잘 증거한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사도 바울을 심히 반대하고 비난하는 자들이 있었다(10, 11장).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 고린도를 방문했으나 그 노력은 실패했고 바울을 반대했던 자들의 주동자는 그를 크게 모욕했던 것 같다. 에베소로 돌아온 바울은 한 엄중한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냈다(2:3-4; 7:6-16). 그 편지는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사이에 쓰여진, 지금은 없어진, 한 편지이었던 것 같다. 고린도에 갔다가 돌아온 디도가 보고한 내용은 바울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였다. 그때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에 있었고 거기에서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2:13; 7:5-8; 8:1; 9:2-4). 그렇다면 본 서신의 저작 시기는 주후 54년 혹은 55년 말경이었을 것이다.1)

고린도후서의 특징적 내용은 사도의 직분에 관한 것이다. 1-7장은 위로하고 기쁨을 돕는 직분, 사랑과 승리의 직분, 새 언약과 성령과 의의 직분, 낙심치 않는 직분, 화목케 하는 직분, 고난으로 감당하는 직분, 위로와 기쁨을 얻는 직분 등 사도의 직분의 여러 면모에 대하여 말하고, 8장과 9장은 헌금에 대하여 교훈하고, 10-12장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하여 변호하고, 마지막으로 13장은 사도 바울의 권면과 축도이다. 본 서신은 특히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의 직분을 변호한 서신으로서 개인의 간증적 내용을 담고 있다.


1장: 위로하고 기쁨을 돕는 직분

1-11절, 위로의 직분

[1-2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평안]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뜻이나 결심으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전에 예수님을 핍박하고 하나님을 대적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따라 강권적으로 그를 부르셨고 이 길로 이끄셨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 그리스도 예수의 보냄을 받았다. 그는 복음을 위해 택함을 입었고(롬 1:1)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보냄을 받은 것이다(고전 1:17). 그는 디도서 1:3에서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에게는 ‘형제 디모데’가 있었다. 그는 혈육의 형제가 아니고 주 안에서의 형제요 바울의 조력자이었다. 디모데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는 것같이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였다(빌 2:22).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편지하였다. 고린도시에 많은 단체들이 있었을 것이지만, 교회는 그런 인간적 단체들과 다른 ‘하나님의 교회’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불러내어 거룩케 하시고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신 사람들의 모임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고린도시에 국한되지 않고 아가야 지방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도를 포함했다. 교회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포함한다. 사실, 교회는 아담 이후 하나님의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교회의 구성원은 ‘성도’(聖徒), 즉 거룩한 자들이라 불린다. 이것은 법적인 의미이다. 그들은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기 전까지 죄인으로 살았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된 자들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안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나 혼자만의 아버지가 아니시고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다. 그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나 동시에 우리가 범죄할 때 징계하시는 아버지이시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 곧 우리와 온 세상의 주인, 주관자, 왕, 하나님이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안”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있기를 기원했다. 사람의 호의도 사람에게 많은 유익을 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 곧 값없이 주시는 호의는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셨고 또 구원받은 우리의 성화(聖化)와 세상에서의 신앙생활 전반을 도우실 수 있는 큰 복이다. 또 하나님의 ‘평안’도 세상에서 매우 큰 복이다. 그것은 마음의 평안, 몸의 건강, 일용할 양식, 그리고 사회적 안정까지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복이다. 그것은 실상 천국의 특징이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평안은 천국의 복의 시식(試食, 맛보기)과 같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의 원인이요, 하나님의 평안은 그 구원의 결과이다.

[3-4절]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하나님과 아버지](원문)이시요 자비[자비들]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고 표현되신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다(요 20:17).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자비들의 아버지’이시다. ‘자비들’이라는 원어는 많은 자비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비가 많으신 아버지이시다. 또 그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위로는 본문의 중요한 주제이다(3-7절에 10번 나옴). 이 세상은 슬픔과 환난이 많기 때문에 위로가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의 위로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로는 큰 힘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평안과 용기를 주실 뿐 아니라 그의 뜻을 따라 능력으로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하신다. 외아들의 장례식에서 하염없이 울던 나인성 과부에게 그 아들을 살려주심으로 위로해주셨듯이, 하나님의 위로는 심히 크시다.

바울은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였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환난 중에서” 그와 그의 동료들을 위로하셨다. 성도에게는 환난이 있으나 위로도 있다. 그것은 사람의 위로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위로, 즉 하나님의 영육의 도우심과 간섭하심의 위로이다. 성도는 이 땅에서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과 순교의 길을 통과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모든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환난 중에서 위로하신 것은 그들로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한 자마다 고난 당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해주고 그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5-7절] 그리스도의 고난[고난들]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그리스도의 고난들’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즉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전하기 때문에, 그의 복음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받는 여러 종류의 고난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들을 넘치게 경험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즉 그리스도께서 공급하시는 위로도 넘치게 경험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 가운데 고난들도 허락하시지만, 결단코 자기 백성을 미워하거나 방관하는 것이 아니시다. 그는 그의 작정하신 때에 풍성한 위로로 그들을 위로하신다. 고난도 받고 위로도 받는 것은 신앙생활에 유익할 뿐 아니라, 특히 남을 돕는 데 유익하다.

사도들이 환난 중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던 것같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도 환난 중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로 말미암아 그들은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게 될 것이다. 환난 중에 사도들을 위로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오늘날도 우리에게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하다”는 말은 환난 받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을 것이라는 소망이 확실하다는 뜻이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과 구원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성도들에게는 세상에서 때때로 고난이 있으나 하나님의 위로도 확실히 있을 것이다!

[8-9절]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과 디모데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언급한다. 그들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하였고 살 소망까지 끊어졌었다. 그것은 죽음의 문앞에까지 간 환난이었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절망의 때이었다. 그는 그것을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표현하였다. 사도 바울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때때로 성도들에게 이런 극심한 고난이 닥쳐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기쁨과 위로의 줄을 다 끊어버리시고 오직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서게 하시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다.

사도 바울이 당한 극심한 고난의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오늘날도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들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들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로, 고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신 8:2). 둘째로, 고난은, 본문의 말씀대로,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한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많은 고난을 통해 강해지고 견고해진다. 셋째로, 고난은 우리의 인격을 거룩하게 한다(히 12:10-11).

[10절]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 일행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 고난에서 건져내어 주셨다. “또 건지시리라”는 말은 전통사본에 현재형이다(뤼에타이).2)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는도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하심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또 미래에도 적용된다. 그는 우리를 건지셨고 건지시고 또 건지실 것이라는 뜻이다. “의지하여 바라노라”는 원어(엘피카멘)는 완료형으로 소망의 확실함을 보인다. 과거에 함께하신 하나님, 지금도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미래에도 함께하실 것을 확신하며 소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곁에 계신다.

[11절]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쉰위푸르군톤)[돕고 있도다].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는 원문은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 바울 일행을 위해 기도와 간구로 돕고 있다는 뜻이라고 본다(KJV, NASB). 성도들은 복음사역자들을 위해 기도와 간구로 협력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방법이다. 복음사역자들 자신들의 기도뿐 아니라, 그들과 그들의 사역을 위한 성도들의 힘있는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힘있게 이루게 할 것이다.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과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가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들을 다 씻으셨고 우리를 단번에 거룩하게 하셨고 의롭다고 여기셨고 영생을 주셨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안을 늘 사모하며 받아 누리자.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성화의 원동력이며 하나님의 평안은 이 세상에서 참으로 귀한 복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성도들의 삶에는 많은 고난이 있지만, 그 고난들 중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많은 위로가 있다. 고난도 있지만, 위로도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함으로써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자가 된다.

넷째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우리를 겸손케 하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유익이 있으며, 특히 극심한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한다.

다섯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복음 사역과 그 일꾼들을 위해 기도로 도와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중요한 방법이다. 복음 사역과 그 일꾼들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힘있게 이룰 것이다.

12-24절, 기쁨을 돕는 직분

[12-14절]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거룩함’이라는 원어의 전통본문(하플로테스)3)은 ‘단순함’(KJV)이라는 뜻이며 원문은 ‘단순함과 하나님의 진실함으로’라는 말이다. 바울은 성도들을 대할 때 단순함과 하나님의 진실함으로 했다. 또 그는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였다. 육체의 지혜는 이기적이며 계산적이다. 그것은 겉보기는 그럴 듯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진실한 척하나 진실이 없고, 의로운 척하나 의롭지 못하고, 사랑하는 척하나 사랑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는 달라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 특히 믿음 안에서 형제된 다른 교우들을 대할 때 이기적이거나 계산적이지 않고 거짓되지 않고 사람의 꾀나 세상적 생각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함 가운데서 단순하고 솔직하며 진실하게 행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행해야 한다.

사도 바울의 심정은 편지로 다 표현되었다. 그들이 읽고 아는 것이 그의 마음 전부이었다. 그 이상의 것도, 그 이외의 것도 없었다. 숨겨진 다른 마음은 없었다. 이것이 단순함과 솔직함이다. 오직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자신이 교인들의 자랑이 되는 것을 원하였다. 참된 성도들은 마지막 날에 전도자들에게 영광과 자랑이 될 것이며, 또 전도자들도 그들에게 영광과 자랑이 될 것이다.

[15-20절]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사도 바울의 본래 여행 계획은 고린도에 갔다가 마게도냐로 가고 그 후 다시 고린도에 가서 유대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의 이 여행 계획은 쉽게 ‘예’하고 쉽게 ‘아니오’하는 경솔한 계획이 아니었다. 그것은 육신적, 인간적 계획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믿음직하시며 진실하시듯이 자신의 말도 경솔함이나 불신실함으로 한 것이 아니고 진실함으로 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들이 전파한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경솔하게 예 하고 아니오 하는 분이 아니셨다. 그는 불신실하신 분이 아니셨다. ‘저에게는 예만 되었다’는 말은 ‘오직 저에게는 예가 있었다’는 뜻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예’ 하시고 끝까지, 죽기까지 그것을 지키셨다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실하셨다.

사도 바울은 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구원의 약속 곧 사죄(赦罪)와 칭의(稱義)의 약속이며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약속이다. 그것은 영육의 복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이며 아멘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21-22절]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므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고 견고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말한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의존한다. 우리는 죄인이었으나 그가 우리 대신 죽으셨음으로 우리가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얻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심은 특히 그가 우리 마음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 사실에서 증거되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다는 말은 성령의 활동 영역을 나타낸다.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인격성을 가진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활동하신다. 그는 우리 마음에 새로워짐과 거룩한 변화를 주신다. 구원은 마음의 변화를 가져온다(겔 36:24-28; 엡 4:20-24).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우리를 인치셨다. 그는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는 친히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 구원하신 자들을 견고케 하신다. 물론 이 진리는 성도의 안일함이나 방종의 구실로 사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령의 인치심은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을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모든 성도들 안에 이미 거하신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또다시 성령을 받을 필요가 없고 단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하심은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영육의 모든 기관들과 기능들을 주관하시는 것을 말한다. 성도의 구원의 보장은 삼중적(三重的)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예정의 불변성이요, 둘째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성과 그의 중보사역의 효력이며, 셋째는 성령의 인치심이다. 본문은 이 세 번째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시는 하나님의 인치심이시다.

[23-24절]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전도 여행 계획의 변경을 해명하면서 자신을 ‘너희 기쁨을 돕는 자’라고 겸손히 표현하였다. 이단자들이나 사이비종파의 교주들은 그들의 잘못된 교리들을 가지고 교인들의 믿음을 주장하고 지배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의 겸손한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우리의 양심의 주인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 우리의 영혼과 양심을 주관할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시고 보증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사든지 교사든지 권찰이든지 다른 이들의 기쁨을 돕는 자로 처신해야 한다. 우리는 속죄 신앙에 굳게 서서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살며 서로를 단순함과 하나님의 진실함으로 대해야 한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이기적이거나 계산적이거나 위선적이어서는 안 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며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주심으로써 우리를 인치셨고 구원을 보증하셨다. 모든 신자에게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다(요일 2:27). 성령께서는 우리의 위로자와 돕는 자이시다. 그는 우리를 끝날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지키실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남의 믿음을 주관하려 하지 말고 그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양심의 주인은 하나님뿐이시다. 우리는 남을 섬기는 자로 처신하며 겸손히 그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2장: 사랑과 승리의 직분

[1-3절]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결심]하였노니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무리를 대하여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고 근심하게 하기를 원치 않는다. 교인들은 목사의 기쁨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4:1에서 말하기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의 기쁨은 바울의 기쁨이 되고 그들의 근심은 그의 근심이 된다. 성도의 기쁨은 목사의 기쁨이요 성도의 근심은 목사의 근심이다. 또 바울은 자신의 기쁨이 고린도 교인들의 기쁨임도 확신한다. 목사의 기쁨은 또한 성도들의 기쁨이다.

[4절]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에게는 외적으로는 큰 환난과 핍박이 있었고 내적으로는 애통과 근심이 있었다. 그의 애통과 근심은 고린도 교인들의 연약과 부족 때문에 왔고 그러므로 그는 많은 눈물로 편지를 썼었다. 바울의 사역은 눈물이 있는 사역이었다. 그는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도,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라고 말하였고 또 “너희가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하였다(행 20:19, 31).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냈던 사도 바울의 눈물의 편지는 책망과 권면의 내용이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근심과 슬픔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을 향한 그의 뜨겁고 넘치는 사랑의 표현이었다. 사랑이 아니라면 눈물의 책망의 편지를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책망은 감추인 사랑보다 낫다.

[5-6절]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희 무리를]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은 것이 족하도다.

‘근심하게 한 자’는 범죄자를 가리킨다. 바울은 그로 인해 근심했으나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케 한 것”이라고 부드럽게 말했다. 고린도 교회는 범죄자를 권징하라는 그의 권면을 받아들였다. 어떤 사람들이 그 권징에 반대했을지도 모르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찬성했고 그 범죄자를 벌했다. 이처럼 고린도 교회에는 권징이 있었다. 그들은 사도의 권면을 순종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사도를 통해 주신 성령의 권면을 따랐다. 그 교회는 참된 신앙고백과 순종이 있는 교회이었다.

[7-9절]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권징은 벌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죄인의 회개를 목표로 한다. 권징치 않으면 죄 가운데 머물 형제를 권징을 통해 바로 세우는 것이 목적이다. 이제 권징의 목적이 이루어졌으므로, 사도 바울은 그 범죄자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기지 않도록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말한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징계한 후 그를 품어주듯이, 그는 그 회개한 자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말한다. 오늘날도 교회는 권징이 있고 용서와 위로도 있어야 한다. 이것이 참 교회의 모습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 중에 서로 사랑하라는 그의 새 계명을 어기기를 원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 새 계명에 복종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권징이 미움의 표현이 아니고 사랑의 동기에서 행해진 것임을 증거할 필요가 있다. 범죄하는 자를 징벌하는 교회에 그에 대한 사랑이 있음을 범죄자에게 증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그의 권면을 순종하리라고 기대한다. 아니 이 권면뿐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순종하는 자들이기를 기대한다. 불순종은 옛날부터 사람 속의 뿌리깊은 죄악이다. 교회는 성경에 증거된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10-11절]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교회는 회개한 자를 용서하고 해벌(解罰)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행해진다. 주께서는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8:18). 사탄은 범죄자로 하여금 너무 근심케 함으로 낙망케 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하려 할 것이다. 사탄의 궤계는 첫째, 성도를 범죄케 하는 것과, 둘째, 낙심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범죄자에 대한 징벌도 필요하지만 회개한 자에게 주는 용서와 위로도 필요하다. 사탄은 죄인에게 속박과 근심과 낙심을 주지만, 주 예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여 그에게 죄로부터의 자유와 기쁨과 평안을 주신다.

[12-13절]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주 안에서 열린 ‘문’은 전도의 문이다. 문은 하나님께서 열어 주셔야 된다. 전도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드로아에서 전도의 문이 주 안에서 바울에게 열렸고 그는 거기서 복음을 전했으나,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해 심령이 편치 못해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다.

[14절]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지식의 향기,’ 곧 그리스도의 지식을 널리 알리는 향기라는 뜻이라고 본다. 구약시대에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듯이”(삼하 8:6, 14), 하나님께서는 바울 일행의 전도 사역에서 그들이 항상 이기게 하셨다. 그의 사역은 고난 중에서도 항상 승리적이었다. 오늘날도 진리의 사역은 항상 승리적이다. 불순종과 죄는 실패의 원인이지만, 순종과 의는 항상 승리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인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의 사역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15-16절]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전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향기이며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향기이다. 그러나 이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전도는 참으로 존귀하고 복된 직무이며 두렵고 떨리는 직무이다. 그것은 사람들 가운데서 생명과 사망을 나누고 영생(永生)과 영벌(永罰)을 나누기 때문이다(요 3:18). 우리는 사람의 지혜나 힘으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 일을 감당할 뿐이다.

[17절]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혼잡하게 한다’는 원어(카펠루오)는 ‘장사한다, 품질을 떨어뜨린다, 부패시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라는 원어(호스 에크 데우)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같이’라는 뜻인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많은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같이 또는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순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증거하였다. 그는 말씀의 바른 일꾼이었고 모든 시대에 설교자의 좋은 본이 되었다. 말씀의 일꾼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변질되거나 타협하지 말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지 말고 순수하게, 순전하게 전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교회는 범죄자에게 눈물과 사랑의 권면과 책망과 권징을 해야 한다. 교인들이 믿음과 순종으로 바로 살 때 그것은 목사에게 기쁨이 된다. 목사의 기쁨은 교인들이며 교인들의 기쁨은 목사이다. 그러나 범죄자는 목사에게나 교인들 모두에게 슬픔이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범죄자에게 권징을 내리지만, 회개하고 돌이킨 자에게는 용서와 위로를 주며 너무 낙심치 않게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알리는 지식의 향기를 널리 풍겨야 한다. 예수께서는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죄의 구속(救贖)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이 구원의 복음을 만방에 전하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구원이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멸망이다. 우리는 이 전도의 사역을 하나님의 은혜로 잘 감당하며 항상 승리할 수 있다.

셋째로, 오늘날 우리는 사도 시대의 거짓 교사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시키거나 부패시키거나 변질시키지 말고 오직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가감하지 말고 바르고 순수하게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자. 그러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성경 읽기와 연구하기와 묵상하고 실천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가감하지 말자.

3장: 새 언약과 성령과 의의 직분

[1-2절] 우리가 다시 자천(自薦)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너희에게서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오늘날도 어떤 사람을 신임하려면 추천서가 필요하다. 추천서도 다 믿기 어렵지만, 그래도 좋은 교회나 목사들이 쓴 추천서는 어느 정도 믿을 만하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스스로 추천하거나 누구의 추천서를 그들에게 보낼 필요가 없었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는 말은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 바울의 사도직을 증거하고 증명하는 추천서라는 뜻이다. 바울이 고린도에 1년 6개월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교회가 세워졌으므로(행 18:11) 고린도 교인들은 그의 인격과 사도 됨과 충성함을 잘 알 수 있었다.

그 추천서는 종이에 쓴 것이 아니고 바울 일행의 마음에 쓴 것이었다. 그것은 종이에 쓴 것보다 더 생생하였다. 고린도에서의 전도 사역은 종이에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바울 일행의 마음 속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쓰여 있다고 해서 다른 이들이 확인할 수 없는 은밀한 편지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증거할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공개된 편지이었다.

[3-5절]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心碑)[사람의 마음판]에 한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자격을 말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편지, 즉 그리스도께서 추천하시고 확증하시는 편지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추천서이었다. 그 추천서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었다. 성령께서는 그들 속에 살아 역사하시며 증거하신다. 그 편지는 돌판이나 종이에 쓰인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판에 쓰인 것이었다. 성령께서 쓰신 이 추천서는 바울의 마음판에도 쓰였고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판에도 쓰였다. 마음판에 쓰인 그리스도의 추천서는 돌판이나 종이에 쓴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편지이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이 같은 확신이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다고 고백한다. 모든 선한 것이 다 하나님께로 났고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든지 우리 속에서 난 것처럼 스스로 만족하거나 자긍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모든 전도와 목회의 사역과 그 열매는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모든 일을 행한 후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

[6절]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儀文)[글자,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성령](NASB)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성령은 살리는 자이심]이니라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예레미야로 미리 말씀하신 바이었다. 예레미야 31:31은,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고 말했다. 이것은 메시아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예언이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자리에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다(눅 22:20).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대조된다. 옛 언약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이었고,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는 자들과 맺으신 언약이다. 옛 언약 곧 구약은 율법의 형식으로 주어졌고 새 언약 곧 신약은 복음의 형식으로 주어졌다. 구약은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강조했으나, 신약은 ‘믿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강조한다. 구약 아래서도 제사 제도나 성막 제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증거되었다. 그러나 신약 아래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풍성하게 증거된다(요 1:17).

옛 언약의 일꾼들은 모세와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다. 그것은 사도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었다. 또 새 언약의 일꾼된 것은 의문(儀文), 즉 율법 조문으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 것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여 죄인을 정죄한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롬 6:23). 그러나 하나님의 영께서는 죄로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리신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살리시는 이는 바로 성령이시니] 육은 무익하니라.” 로마서 8:10,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성령께서는 의를 인하여 생명이시니라](KJV).”

[7-8절]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성령]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복음 사역은 단순히 사람들의 말과 글의 사역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다. 전도자의 직분은 성령의 직분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참된 목사들의 사역은 성령의 사역이다. 목사들은 그 사역을 성령의 도우심과 감동과 능력으로 감당해야 한다. 그 사역은 영광스러운 사역이다. 죽게 하는 율법의 사역도 영광이 있었다면, 살리시는 성령의 사역은 얼마나 더 영광스러운 것이겠는가!

[9절]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율법의 중요한 역할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고 죄를 깨닫게 하고 심판을 선언하는 정죄(定罪)의 사역이다. 그러나 복음은 의롭다 하심의 진리이다(롬 3:21-24).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값없이 받는 의의 소식이다. 복음의 일꾼들은 죄인을 정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의를 선포한다. 전도는 죄인들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전하는 사역이다. 정죄의 직분도 영광스러웠다면 의의 직분은 더욱 영광스럽다!

[10-11절]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율법의 사역도 영광이 있었다. 그러나 복음 사역은 더 큰 영광이 있다. 율법의 영광은 없어질 영광이었다. 구약과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 체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다. 그것이 율법의 한계이다. 그러나 복음의 영광은 한계가 없고 폐지되지 않는 영속적인 영광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루신 완전한 의(義)의 영광이다.

[12-16절]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려와 그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할 때 그 얼굴에 광채가 났다(출 34:29-35). 그러나 그는 말을 마친 후 그의 이마에 수건을 써서 그 없어질 광채를 가리었다. 그것은 율법이 장차 없어질 것이며 장차 나타날 참된 실체인 그리스도의 은혜를 예표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구약시대에는 그 수건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구약의 의식적(儀式的) 율법의 내용들은 그 내면에 감추어진 메시아의 사역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수건이 벗겨져야 할 때이다. 복음 사역은 수건을 쓰지 않는 사역, 즉 가려진 것이 없는 사역이다. 복음의 진리는 은밀하지 않고 밝히 드러난 진리, 공개된 진리이며, 그 영광은 없어지지 않는 영속적 영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읽을 때 아직도 수건을 쓰고 있다. 그 수건은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상징들에 대한 무지와 거기서 비롯된 잘못된 율법주의 사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져야 한다.

[17절]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신적 본질에 있어서 영이시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주의 영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의 죄를 씻으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그들의 죽은 영혼들을 살리실 때 죄로부터의 자유와 율법으로부터, 즉 율법 체계와 그 속박과 그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주신다는 것을 말한다. 복음 안에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있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8절]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깨달은 자들이다. 기독교 복음은 은밀히 감추인 것이 없다. 또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믿을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점점 더 그의 형상을 본받게 된다. 지금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본받는 작은 빛에 불과하며 우리의 성화는 심히 부족하고 보잘것 없지만, 우리는 점점 더 그의 거룩한 형상을 본받으며 우리의 성화가 완성될 때 우리는 마침내 그의 영광의 온전한 형상을 이루게 될 것이다(롬 8:29-30).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새 언약 아래 있다. 그것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이다(눅 22:20). 그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한 바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의 중생과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과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렘 31:33-34)를 내포한다. 우리는 모세의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아래 있다. 거기에는 많은 특권들이 있다.

둘째로,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를 정죄하고 절망케 한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주었다.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룩함을 얻었고 완전케 되었다(히 10:10, 14).

셋째로, 우리는 성령을 받았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신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며 이 세상에서 몸의 죄성을 극복하며 성화를 이루어간다. 로마서 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넷째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얻었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은 실상 율법의 요구를 성취한 것이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이 없고 우리를 위협할 것이 없다. 거기에 그리스도의 참된 자유와 평안이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6에서,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고 말하였다.

4장: 낙심치 않는 직분

[1-2절]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사도 바울은 본장에서 사도직의 한 면모인 ‘낙심치 않는 직분’에 대해 말한다. 그는 앞장에서 자신의 사도직이 새 언약의 직분이요 성령의 직분이며 의의 직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가운데 그런 직분을 받았고 고난 중에도 낙심치 않고 일했다. 그는 죄악된 숨은 부끄러운 일이나 거짓된 일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거나 변질시키지 아니하고 진리를 증거하였다. 이 사실은 고린도 교인들도 잘 아는 바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를 추천한다고 표현하였다.

[3절]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이며(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복음이다(갈 1:12). 그 복음은 그 내용을 아무도 가감할 수 없고 변경할 수 없는 유일한 복음이다(갈 1:8-9). 그러나 이 복음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복음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받아들이지만, 다른 이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 그런 현상이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때문이다. 복음이 가리어져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멸망에 이르게 작정하신 자들, 즉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에 대해 긍휼로 용서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될 때, 두 부류의 사람들, 곧 영생에 이를 자들과 영원한 형벌에 이를 자들이 명확히 구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의 결과에 너무 마음을 쓰지 말고, 오직 바른 복음, 성경적 복음을 가감하지 말고 담대히 전해야 한다.

[4-5절]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멸망하는 자들은 사탄과 악령들의 방해를 받은 자들이다. ‘이 세상 신’은 사탄을 가리킨다. 주 예수께서는 그를 ‘이 세상 임금’이라고 부르셨고(요 12:31) 바울은 다른 곳에서는 그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불렀다(엡 2:2).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게 방해한다. 오늘날도 사탄의 방해가 클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전파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전하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다(고전 3:7). 전해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요하시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주이시며 사람이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참된 믿음은 그에게 절대적 순종을 약속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요 우리는 그에게 절대 순종해야 할 종의 위치에 있다.

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위하여(디아 예순)[예수님 때문에] 교인들의 종이 되었다. 바울은 자신을 교인들을 섬기는 종으로 자처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이지만, 교회와 교인들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고 그들을 섬기는 종이 되려 하였다.

[6절]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복음을 깨닫고 받아들인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된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흑암 중에서 빛을 창조하셨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의 외아들 예수님을 구주로 세상에 보내셨고 죄인들의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어 주셨다. 예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놀라운 지식과 믿음이 죄인들에게 구원이 된다. 그것은 우주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요 인생의 불행의 원인인 죄 문제를 해결하는 지식이다. 사람은 구주 예수님을 알고 믿음으로 영생의 복을 얻는다.

[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복음을 깨닫고 받고 믿은 신약 성도들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자들과 같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들어진 연약한 몸을 말한다. 사람은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질그릇이며 성도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질그릇 속에 보배를 가졌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가리키며 그 지식과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의와 영원한 생명이 있고 그들 속에 성령께서 거하신다. 이 지식과 믿음, 의와 생명, 성령의 내주하심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이다. 우리의 몸은 연약하지만, 능력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늘 함께하신다.

[8-10절]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부서지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주](전통사본) 예수 죽인 것[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예수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전도 사역에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없지 않았지만, 낙심치 않고 잘 감당했음을 증거한다. 그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부서지지 않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치 않았다. 그는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지듯이 고난의 길을 갔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그를 통해 나타나게 하려 함이었다.

[11-13절]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사도 바울 일행이 예수님과 그의 복음 때문에 항상 죽을 것 같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그들의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었다. 그는 고백하기를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하였다. 바울 일행의 전도 사역은 죽는 것 같은 고난 속에서도 영혼들을 구원하고 구원받은 영혼들을 믿음에 굳게 세우는 사역이었다. 고난은 있었으나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 교회 건립과 성장의 역사가 있었다. 오늘날에도 참 목사들은 고난이 있어도, 그들을 통해 생명 구원과 성장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14-15절]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 일행의 모든 사역은 교회와 교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죽는 것 같으나 죽지 않고 살아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사도 바울 일행도 그 고난에서 다시 살리셔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실 것이다. 우리도 주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그와 함께 다시 살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 우리의 죽음이 되고, 예수님의 부활, 우리의 부활이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이미 연합되었고 장차 그것이 천국에서 영광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골로새서 3:2-4,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바울을 통해 전도를 받고 믿고 구원받은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사람의 겉사람 곧 몸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늙고 병들고 쇠하고 마침내 죽는다. 그것은 많은 고난 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자신의 삶을 ‘날마다 죽는’ 삶이라고 묘사하였다(고전 15:31). 속사람은 영 혹은 영혼을 가리킨다. 성도의 영혼은 그 지식이 자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완전한 의와 성결 가운데서 날마다 하늘의 위로가 더하고 천국 영광의 소망이 더욱 새로워진다. 그의 겉사람 곧 몸은 낡아지지만 그의 속사람 곧 영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낙심치 않는다. 또 그가 고난을 당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죄인들이 구원을 얻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17-18절]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바울은 성도의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을 비교한다. 그는 현재의 고난이 잠시 받는 것이며 비교적 가볍다고 말한다. 그것이 수년 혹은 더 오랜 기간의 고난이라 할지라도, 또 그것이 극심하고 극악한 종류의 고난이라 할지라도, 성도들이 누릴 미래의 영광은 영원하며 지극히 크다. 현세의 영광은 일시적이며 수십 년을 넘기지 못하지만, 장래의 영광은 영원하다. 바울은 로마서 8:18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보이는 것 곧 물질 세계를 위주하여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 곧 하나님의 세계, 영적 세계를 위주하여 산다고 말한다. 이것이 모든 성도의 바른 삶이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다. 시편 39: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며 살아야 한다. 우리가 받은 새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우리가 들어갈 천국은 ‘영원한 나라’다(벧후 1:11).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어떠한 환경 여건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잠깐 후면 없어질,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만 바라며 살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즉 하나님의 세계, 영원한 천국과 영생의 세계를 바라며 살아야 한다.

고린도후서 4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복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소식이다. 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사탄이 그 눈을 어둡게 함으로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 여러분은 복음을 깨닫고 믿었는가?

둘째로, 우리는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므로 어떤 여건 속에서도 낙심치 않을 수 있다. 이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며, 거기에 의롭다 하심과 영생이 있고, 그들 속에 성령께서 거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된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고난의 환경 속에서도 낙심치 말고 믿음과 순종으로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의 몸은 쇠해가고 고난 중에는 더욱 그러하지만, 우리의 영은 날마다 새로워진다. 지식과 깨달음이 자라고 인격과 삶이 성숙해진다.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가 얻을 천국의 영광에 비하면 잠시 받는 작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육신적, 물질적 세계만 바라보지 말고,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5장: 화목케 하는 직분

1-10절,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1-3절] [이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앎이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는’이라는 말은 앞장 끝에서(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며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말한 이유를 보인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은 현재 우리의 몸을 가리킨다. 그것을 천막집이라고 부른 것은 임시적이고 영구성 없음을 나타낸다. 벽돌집은 비교적 영구적이지만, 천막은 그렇지 않다. 천막은 보통 임시로 사용하기 위하여 치는 것이며 사용 후엔 걷어서 넣어두거나 옮겨서 다른 곳에 친다. 이것은 비유다. 이것은 우리의 몸이 영구적이지 못하고 얼마간 쓰면 낡아지고 쇠해짐을 표현한 것이다. ‘장막 집이 무너지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가리켰다. 천막을 걷어 분해하여 보관하듯이, 사람이 죽어 몸이 땅에 묻히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은 흙으로 분해되어 버린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썩어 흙이 되지만,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전도서 3:21,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몸을 떠난 성도의 영혼은 있을 곳이 없어 방황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로 올라가 거기서 거처할 곳을 얻게 된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성도가 죽은 후 그 영혼이 들어가 거처할 천국을 가리킬 수 있다. 성도의 영혼은 지금 육체 가운데 있지만, 몸의 죽음 후에는 천국에 들어가 부활 때까지 안식할 것이다. 요한복음 14:2, “내 아버지 집[천국]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히브리서 9:11,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천국].” 히브리서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 . . 저희를 위하여 한 성[천국]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2:22-23,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천국]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천국에 올라간 성도의 영혼이 장차 입을 부활체를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우리에게 영원한 몸을 주실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현재의 몸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몸이다. 고린도전서 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빌립보서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우리의 영혼은 지금 땅 위에서 탄식하며 천국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는다’는 것은 영이 몸을 떠난 후 천국에서 거처를 얻고 장차 부활체를 얻는 것을 말한다. ‘벗은 자’라는 말은 영혼이 몸을 떠나 좋은 거처를 얻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의 영혼이 탄식하는 것은 성도의 성화가 불완전하여 늘 내면적으로 죄와의 싸움과 갈등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죄와 마귀의 시험이 많은 세상이 지나가고 속히 새 세계가 오기를 소원하기 때문이다.

[4-5절]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성도의 영혼이 지금 세상에서 육체 가운데 있으면서 탄식하는 것은 단순히 육체를 떠나고자 함이 아니다. 성도의 소원은 현실의 삶이 고통스러워 단지 죽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의 영혼의 탄식은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으로 덧입고자 하는 탄식이다. 그 생명은 천국의 생명이요 영광스런 생명이다. 다시 말해, 영혼이 지금 탄식하는 것은 빨리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서 하는 탄식인 것이다. 이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구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의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 성도는 그 속에 계신 성령의 활동으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천국의 산 소망과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성도의 구원 확신은 성경말씀 안에서 그리고 성경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말미암는다.

[6-7절]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다”는 말은 성령께서 구원의 보증으로 우리 속에 거하시므로 우리가 영광의 구원, 곧 내세 천국을 담대히 확신한다는 뜻이다. 또 우리는 몸에 거할 때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안다. 우리는 지금 실제로 주와 함께 있지 못하고 단지 영적으로, 성령으로 그와 함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님과 교제하되 보는 것에 근거하여 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한다.

[8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성도는 죽음을 담대히 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도의 죽음은 그 영혼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성도의 영혼은 죽는 즉시 천국에 들어가 주와 함께 거하게 된다. 누가복음 23: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빌립보서 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성도의 소원은 이 땅에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있기를 사모하며 천국에 들어가기를 갈망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또 성도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묵상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9절]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거하는 것’은 영혼이 몸 안에 거하는 것 곧 생명이 연장되는 것이요, ‘떠나는 것’은 영혼이 몸을 떠나는 것 곧 몸의 죽음을 의미한다. 성도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곧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긍휼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영생을 얻었고 천국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주의 뜻대로, 즉 성경의 진리와 교훈대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곧 경건한 삶이요 의와 선과 진실의 도덕적 삶이다.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의 심판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 요한복음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그의 심판은 공정하고 공의로운 심판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행위대로 보상을 받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완전한 의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완전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완전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의 구원은 영광스럽다. 성도의 부활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처럼 영광스러울 것이다(빌 3:21; 고전 15:43). 성도의 천국 생활은 영광스러울 것이다(계 21, 22장).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은 죄를 버리고 의와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만일 누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죄 가운데 머문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중생한 자는 계속 죄 가운데 살 수 없다. 요한일서 3:9-10,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중생한 자는 즉시 회개하며 죄를 떠나고 의와 선을 행하려 애쓸 것이다. 그것은 새 생명의 당연한 결과이다. 불신앙과 불의는 멸망할 자들의 특징이며 의와 선은 구원받은 자들의 특징이다.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는 아직도 중생치 못한 자요 사망 가운데 있는 자이다(요일 3:14).

상급은 우리의 선행과 봉사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다.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는 말씀은 우리의 선한 행위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상이 다를 것을 보인다. 사실, 사람의 선행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공로로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다(눅 17:10; 계 4:10).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고 또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으로 선을 행하기 때문이며, 또 우리의 선행이 우리의 당연한 의무에도 못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행에 대해 상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는 우리의 부족한 선행에 대해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실상, 우리의 선행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과 상을 생각하면서 두려움과 기대를 가지고 죄를 짓지 말고 바르게 살며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들에 충성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도에게는 죽음 후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 있다. 그것은 천국과 몸의 부활체를 가리킨다고 본다. 성도의 영혼은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 부활 때까지 안식을 누린다. 그러다가 주의 재림 시에 영생할 수 있는 영광스런 몸을 가지고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미래의 일, 곧 주의 재림 때의 일이다.

둘째로,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히 원한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는 죄성이 없고 범죄 가능성이 없는 상태가 되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게 되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은 이 세상의 그 누구와 함께 있는 것보다 더 복되고 기쁜 일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상을 기대하면서 오직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죄 짓지 않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선한 일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드리는 것이다. 거기에는 상이 따를 것이다.

11-21절, 대속(代贖)을 믿고 하나님과 화목하라

[11-12절]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주의 두려우심’이란 앞절에 말한 대로 마지막 날에 선악간에 심판하시며 보응하시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한다. 그 사실을 아는 자마다 죄짓지 않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고 의롭게 선하게 살려고 힘쓸 것이며 또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권면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다’는 말은 사도 바울 일행이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뜻이다. ‘너희의 양심에도 알려졌기를 바란다’는 말은 사도 바울의 진실한 삶이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알려졌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진실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자기를 변호하는 편지를 쓰는 것이 자신을 고린도 교회 앞에 다시 추천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거짓 교사들 앞에서 그가 진실한 종임을 자랑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을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대단한 자인 것처럼 자랑하지만, 사실상 그들의 마음은 자기들이 아무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자랑하는 것도 악한데 허풍으로 무엇을 자랑하는 것은 얼마나 더 악한 것인가!

[13-14절]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열심 있는 성도는 때때로 세상 사람들 보기에 미친 것같이 보인다. 그들은 그의 열심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아무리 성도가 열심을 낸다 하여도 하나님의 요구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라고 명하셨지만(신 6:5),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힘의 70퍼센트, 아니 50퍼센트도 하나님을 사랑치 못할 때가 많을 것이다.

열심 있는 성도가 미친 것같이 보여도 실상 그는 미친 것이 아니다. 성도는 결코 미쳐서는 안 된다. 온전한 정신은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정신이다. 기독교는 비정상적이거나 비상식적인 종교가 아니다. 정상적인 인격은 바른 정신을 가진다. 성도는 하나님을 섬길 때나 인간 관계에서나 바른 정신을 가져야 한다.

성도의 미친 것 같은 열심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함 때문이다. 성도는 그 사랑 때문에 핍박 중에도 낙심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홀로 있어도 외로워하지 않으며, 물질적 가난과 궁핍 속에서도 위축되거나 그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주의 일에 열심히 충성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사랑이다. 그것은 한 사람이신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 죽으신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희생적 사랑이다. 그것은 그가 자신을 십자가 위에 희생제물로 내어주신 사랑이다. 그것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그 사랑 때문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십자가의 고통스런 죽음에 내어주셨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 여기에 ‘모든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죄가 다 해결되어 마지막 심판이나 지옥 형벌이 남지 않게 되었을 것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사람만이 그의 구원의 은혜를 받는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실제로 죽은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속죄 개념이다. 속죄는 속죄물이 실제로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2천년 전 유대 땅 예루살렘 성 밖에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위에서 실제로 우리의 모든 죄의 책임을 담당하셨고 실제로 우리의 모든 죄의 형벌을 받으셨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우리 모두는 그와 함께 실제로 죽은 것과 같았다.

[15절]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구원받고 새 생명 얻은 자들이 이제는 자신들을 위해 살지 않고 그들을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은 죄짓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목표이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고린도전서 6:19-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부터 우리는 사람을 육체대로 알아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 된 자들, 곧 그가 매우 귀하게 여기신 자들이다. 여기에 성도들의 특별한 가치가 있고 여기에 성도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할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목수 정도로 알았었다(막 6: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께서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려주셨다(고후 4:6).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구원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다. 이전의 것들, 곧 죄악된 것들, 정죄된 것들, 허무한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다’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보라,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되었다’라고 되어 있는데,4) 이제 그에게 있는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 그는 새 생명 곧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을 상속받을 자가 되었다. 이제 그는 과거의 그가 아니다. 그의 삶의 의미와 가치는 완전히 새로워졌다.

[18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인한 것이다(롬 9:16; 11:36). 구원은 화목의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다른 말로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 것이었다. 그 화목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말한다. 우리의 죄는 우리와 하나님을 원수 되게 만들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관계가 친근한 관계로 회복되었다(골 1:21-22). 하나님께서는 바울 일행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 사도의 직분은 화목케 하는 직분이다. 오늘날 목사들과 전도자들의 직분은 화목케 하는 직분이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분인 것이다.

[19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뿐 아니라 또한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다.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위한 속죄의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많은 죄인들의 많은 죄들을 그들 자신들에게 돌리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화목케 하는 직분을 주셨고 화목케 하는 말씀을 부탁하셨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화목케 하는 말씀이다. 여기에 교회의 사명이 있다.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대한 일은 이 화목의 말씀을 전파하여 주 예수께서 피흘려 사신 영혼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것이다. 화목케 된 자들마다 죄씻음을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며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산다.

[20절]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使臣)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전도자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使臣)’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 곧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며 원수된 자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일을 위해 목사들과 전도자들을 온 세상에 파송하시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도 하나님과의 화목이 필요한 자들이 있었다. 교회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은 자는 아니다. 교인들 중에도 하나님과 화목이 필요한 자가 있을 수 있다. 교회 안에 아직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를 인도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우리는 교회 집회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하였는지 살펴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아직 교회 밖에 있으나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 그들의 수가 얼마이든지 간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정죄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贖)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죄의 죽음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그의 속죄의 죽음 때문에,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4). 이것이 대속에 근거한 구원이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우리는 이 화목의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사랑을 감사하자. 한 사람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해 죽으셨다. 이 일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다(요 3:16; 롬 5:8; 요일 4:9-10).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목적은 분명하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8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말하였다.

셋째로, 죄인들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하고 우리는 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한다. 죄사함과 화목의 결과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참 평안을 누리며 담대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롬 5:1-2; 히 4:16).

6장: 고난으로 감당하는 직분

[1-2절]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사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들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고 간절한 마음과 진지한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 아직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때요 아직은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다!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부르며 그에게로 가까이 나와야 구원을 받아야 한다(사 55:6). 그러나 말씀의 기근이 올 때가 있다(암 8:11).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은혜를 거두시고 심판을 내리시는 날이 올 것이다(잠 1:24-26).

[3절]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그의 직분이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든지 거리낌을 주지 않도록 처신하려고 애썼다. 그의 직분이 비난받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되며 영혼 구원과 교회 건립의 일들에도 지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교회 직분자들이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행동한다면 교회는 은혜롭게 진행되며 잘 세워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도, 교회도 위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일과 교회의 평안과 건립에 해를 끼칠 것이다.

[4-5절]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바울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고난을 당했고 그것을 견디었다. 경제적 어려움도, 핍박과 매맞음과 갇힘 등의 육체적 고난도 있었다. 그는 때때로 어떤 이들의 반대와 배척을 받았고 소동과 소란을 경험하였다.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는 일들도 있었다.

[6-7절]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크레스토테스)[친절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바울은 범사에 깨끗하였다. 물질 관계에서도 이성 관계에서도 그러하였다. 이것은 후대의 모든 일꾼들에게 모본이 된다. 또 그는 항상 지식으로 준비되었다. 전도자는 늘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른 지식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또 그는 범사에 오래 참았고 친절하였다. 또 그는 늘 성령의 감화를 받았다. 성령께서는 전도자들의 힘과 위로이시다. 또 그는 거짓 없는 사랑으로 행하였다. 이것들은 다 하나님의 일꾼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그는 또 진리의 말씀으로 일하였고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였다. 또 그는 의를 전하고 의를 세우는 도구로 일하였다. 복음 운동은 의인 만드는 운동이다. 물론 이 일을 위한 도구로 쓰임 받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고 그 의만 의지하고 그 의를 전하고 의를 실천하는 자이어야 한다.

[8-9절]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비록 사도라는 그의 직분이 영광스럽지만, 바울은 악하고 거짓된 비난도 받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의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또 그의 확신 있는 교훈 때문에 그는 확실한 지식과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마치 속이는 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속이는 자가 아니고 진리를 말한 자이었다. 또 그는 자기를 선전하지 않고 조용히 일하였으므로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신실한 자들은 그를 인정하고 그를 사랑했고 그의 이름은 그들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다. 그는 죽을 고난도 많이 당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으로 구원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그가 고난을 당하고 육신의 질병으로 고생할 때는 마치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 같았지만, 그는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를 겸비케 하고 하나님만 의지케 하는 훈련 과정이었다.

[10절]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비록 그가 성도들의 연약 때문에 근심하기도 했지만, 그는 예수님과 그의 구원 사역의 확장 때문에 항상 기뻐할 수 있었다. 그는 비록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구원의 풍성한 은혜와 복으로 부요하게 하는 자이었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심으로 모든 것을 가진 자로 부족함이 없이 일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꾼들은 평안 가운데서 뿐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바른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 전도자의 직분은 고난으로 감당해야 할 직분이다. 그러나 비록 심적, 육체적, 물질적 고난이 컸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공급하심과 위로와 능력도 컸다. 그러므로 전도자들과 성도들은 낙망치 않고 더욱 주의 일에 충성하게 된다.

[11-13절]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바울의 마음은 넓어져 있고 그의 입도 열려 할 말을 가지고 있었으나,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향해 마음이 좁아져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그의 고난의 사역을 상기시키며 아버지같이 권면한다. 그의 사역은 그들에게 그의 진심을 알게 할 것이다. 그들은 마음을 넓게 열고 그의 말과 생각과 행위를 이해하고 그와 일치된 마음을 가지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생각이 목사의 생각이 되고, 목사의 생각이 장로들과 교인들의 생각이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잘 세워 나가야 할 것이다. 서로를 향하여 마음이 좁아짐이 없이 마음을 넓혀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 안에서 일치할 때 교회는 잘 진행하고 세워질 것이다.

[14-16절]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헤테로쥐게오)[어울리지 않게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믿음 없는 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 같다. 고린도 교인들은 믿지 않는 자들과 어울리지 않는 멍에를 같이하지 말아야 했다.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거룩한 길을 걷는 자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가 삶의 주인이고 죄에게 종이 되어 불경건과 불의와 죄악된 욕심 가운데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와 어울리지 않는 멍에를 같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의와 불법이 함께할 수 없음과 같다. 의는 불법을 정죄하고 멀리하며 불법은 의를 싫어하고 배척한다. 또 그것은 빛과 어두움이 서로 사귈 수 없음과 같다. 빛이 오면 어두움은 물러가고 어두움이 오면 빛이 물러간다. 빛과 어두움은 동시에 함께 있을 수 없다. 또 그것은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벨리알(Beliavr)은 ‘무가치한 자’라는 뜻으로 마귀를 가리킨다(BDAG). 마귀는 하나님의 원수이다(마 13:39). 예수께서는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다(히 2:14).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서로 조화될 수 없다. 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소유하는 바가 서로 다르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받고 영생과 천국을 소망하고 그가 주시는 평안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사탄의 지배를 받고 멸망과 지옥을 향해 가고 있고 허무한 삶을 살고 있다. 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도 일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진리는 성도들의 교제 전반에서 적용될 원리이다. 믿음 없는 자는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지 교제의 대상이나 협력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의 교제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의와 진리 안에서 참된 믿음과 순종과 소망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이어야 한다(요일 1:3).

[17-18절]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고린도 교인들은 믿지 않는 자들과 교제를 끊어야 한다. 순종하는 형제들 간의 분리는 죄이지만, 불신자들과의 교제 단절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신약성경은 이것을 밝히 교훈한다. 로마서 16:17-18,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성도의 교제는 믿는 자들 간의 교제이어야 한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것은 성도 상호간의 사랑을 명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사 시대에 반복적으로 실패했던 원인은 가나안 정복 시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들을 완전하게 제거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삿 1장).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키지 않았고 그 우상숭배자들을 포용함으로 그 우상숭배를 본받게 되었고 부패되었다.

오늘날도 교회가 불신자들을 교인으로 포용하고 성도들이 그들과 교제할 때 교회는 속화되고 부패되기 시작할 것이다. 무분별한 교제가 교회를 부패시키는 것이다. 작은 누룩이 온 교회를 부패시킨다. 그러므로 교회는 불신자들과 분리된 회(會)가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교회에 나아와 말씀을 들을 수 있으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의 구주와 주님으로 인정하고 영접하기까지 그는 아직 교회의 참 교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를 교회의 직분자나 봉사자로 세우거나 그런 자와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려는 것은 매우 큰 잘못이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은 명확히 구별된다(요일 3:10). 세상과 교회의 선이 명확할 때 교회는 강력한 단체가 될 것이다. 교회가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은 교회의 특권이요 힘이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과 비슷하게 될 때 교회는 맛 잃은 소금이 되어 결국 세상에 짓밟히게 될 것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때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다. 우리는 모든 불경건과 불의와 악을 버리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고 모든 성경 교훈을 온전히 순종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고난으로 감당해야 한다. 우리 주님의 지상 생활은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했던 삶이셨다. 사도 바울의 전도사역은 환난, 궁핍, 매맞음, 수고, 비방을 당했던 사역이었다. 오늘날 교회의 직분자들은 자기를 부정하고 고난을 감수하고 죽도록 충성하기를 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고난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다.

셋째로, 우리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고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하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믿는 자와의 교제가 중요하다. 악은 누룩같이 퍼진다. 잘못된 교제는 신자 개인과 교회를 부패시키고 변질시킨다. 우리는 잘못된 교제를 피하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7장: 위로와 기쁨을 얻는 직분

[1절]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이 약속’은 앞에서 말한 바(6:18)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약속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었다(요 1:12). 우리는 장차 의인의 부활 시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런 모습을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비록 아직 죄성을 가지고 있고 우리 속에는 죄와의 싸움이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의 품위를 가지고 거룩하고 바르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라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우리의 거룩한 삶의 원동력이 됨을 보인다. 잠언 16:6,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셨기 때문에, 또 장차 그가 우리를 심판하시고 선악간에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들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목표, 곧 성화의 목표이다. 비록 완전 성화가 땅 위에 사는 동안 불가능할지라도, 성도는 완전한 거룩을 향해 달음질해야 한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이란 우리가 육신적 죄뿐 아니라, 심적 더러움, 예를 들어 미움, 음란한 마음, 물질에 대한 탐욕 등에도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을 보인다.


[2-4절]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에 대한 거짓 교사들의 악한 비난으로 인해 생긴 간격을 버리고 마음으로 그를 영접해야 했다. 바울은 그들에게 불의를 행하거나 해롭게 하거나 속여 빼앗은 일이 없었다. 모세나 사무엘도 백성의 나귀 하나도 취하지 않았고 한 사람도 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민 16:15; 삼상 12:3). 디모데전서 3:8은 집사의 자격에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는 것을 말했다. 직분자는 그래야 한다.

또 사도 바울은 그 교인들과의 일치된 마음과 사랑으로 생사(生死)를 같이하기를 원했다.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담대함과 자랑은 그들을 사랑하고 신뢰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가 그들을 참으로 사랑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았다면 담대히 말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담대함과 자랑대로, 그의 사랑과 신뢰대로, 바울은 많은 환난 중에서도 그들로 인해 위로와 기쁨이 넘쳤다. 그는 6, 7, 13절에서도 자신이 위로와 기쁨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5-7절]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그러나 비천한 자들(타페이누스)[낙심한 자들](KJV, NASB, NIV)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바울의 전도 활동은 육신적 휴식이 없는 활동이었다. 그는 사방으로 환난을 당했다. 밖으로는 유대인들의 핍박과 이방인 우상숭배자들의 핍박이 있었고 안으로는 인간적 연약과 두려움이 있었다. 주님을 따르는 전도자의 길은 많은 고난을 감당해야 하는 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 복음을 위해 충성되이 일하려 하다가 힘이 빠지고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신다.

바울의 마음이 위로를 받고 기쁨을 얻은 것은 그의 협력자 디도가 그들로부터 돌아와서 그들에 대한 좋은 보고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위로이며 기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만 바라며 때때로 낙심하는 성도들을 도우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에서 그들이 도움과 위로를 받을 데가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도우시고 위로하신다.


[8-9절]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먼저 쓴 편지에서 범죄자를 지적하고 책망했던 것이 너무 심하여 그들이 낙심했을까봐 후회했으나, 그것이 그들을 잠시만 근심케 한 줄을 알고 이제 후회하지 않게 되었고 지금은 도리어 기뻐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근심함으로써 회개함에 이르러 바울에게 어떤 징계도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범죄한 자를 포용한 문제에 대한 책망이 그 범죄자와 교회에 좋은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10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근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요 다른 하나는 세상 근심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자기의 죄와 부족을 깨닫고 하는 근심이다. 이런 근심은 많이 할수록 좋다. 왜냐하면 그것은 회개와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다. 시편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그러나 세상 근심은 세상의 일들로 인한 근심과 염려, 즉 의식주의 염려, 건강의 염려, 경제의 염려, 사회 환경의 불안 등이다. 이런 근심은 마음과 몸의 건강을 해치고 믿음까지도 잃어버리게 한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이런 근심을 버려야 한다. 누가복음 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누가복음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우리는 세상의 모든 근심과 염려는 버리고, 믿음으로 바르게 살지 못하고 온전한 거룩함을 이루지 못한 것만 근심해야 한다.


[11절]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은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고린도 교인들은 잘못을 해결하기 위해 간절했고 그들의 거룩함을 증거하기 위해 변명했고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의분했고 하나님의 징벌을 두려워했고 하나님의 은혜을 사모하였다. 그들은 회개하기에 열심을 내었고 악한 자를 벌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 자신들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다. 이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미련한 자는 교훈과 책망을 받으려 하지 않지만, 지혜로운 자는 겸손히 받는다. 잠언 1:7,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우리가 책망을 들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으면 조심하면 될 것이고, 우리에게 해당되면 받아들여 고치면 될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책망을 겸손히 받았다.


[12-13절]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

바울의 편지의 결과, 바울을 향한 고린도 교인들의 진실함과 간절함이 확인되었다. 편지를 통한 그의 책망은 그들의 회개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바울 일행은 위로를 받았다. 또 바울이 그들에게 보냈던 디도의 마음이 그들로 인해 안심함과 새 힘을 얻었기 때문에 바울은 더욱 많이 기뻐하게 되었다. 말씀의 봉사자의 위로와 기쁨은 성도들이 예수님 잘 믿고 믿음 안에서 순종하며 살 때 온다.


[14절]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진리를 말했고 디도에게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 말한 말도 참되었다고 증거한다. 이것은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꼭 필요한 간증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항상 바르고 참된 말만 전달해야 한다. 야고보서 3:1-2,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15-16절] 저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보낸 복음사역자 디도를 두렵고 떨림으로 영접하였고 그의 말을 순종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의 바른 태도이다. 주께서 세우시고 보내신 자를 영접하고 순종하는 것은 곧 주님을 영접하고 순종하는 것이다(마 10:40; 25:35-40). 요한삼서에 보면,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은 교회에서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자이었다. 그는 전도자들을 영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영접하려는 진실한 성도들을 교회에서 내어쫓기까지 하였다. 얼마나 악한 행동인가! 사도 요한은 그 서신에서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하나님에게서 나왔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고 교훈하였다(11절).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디도의 사랑의 심정은 그들의 진실한 영접과 순종을 인해 더욱 풍성해졌다. 복음의 일꾼이 주의 백성의 진실한 믿음과 순종을 볼 때 그들을 향해 사랑이 깊어지고 풍성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또 디도의 이런 보고를 받은 바울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을 향한 신뢰와 담대함 때문에 바울은 기뻐했다. 복음사역자들에게 고난과 핍박과 교회로 인한 근심도 많았지만,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기쁨도 풍성하였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영육의 더러움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여 온전한 거룩함을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거룩함과 의 가운데 사는 것이다. 죄가 인류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영육의 모든 더러움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여 온전한 거룩함을 이루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 근심은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만 하여 참된 회개와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 의식주의 염려, 건강의 염려, 경제의 염려, 사회 환경의 불안 등의 세상 근심은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만들고 파괴시킨다. 우리는 그런 근심은 하지 말고 하나님께 다 맡겨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해야 한다. 우리는 죄를 철저히 미워하고 버리고 바로 살기를 결심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사역자들에게 많은 고난 중에서도 위로와 기쁨을 얻게 하신다. 그것은 특별히 교인들이 주께서 세우시고 말씀을 전하게 하신 자들을 영접하고 그들의 교훈에 순종하여 범죄한 자들이 회개할 때 생긴다. 목사들은 많은 고난 중에도 위로와 기쁨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