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공동서신 ·계시록 강해·김효성목사

계시록 1장: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 6장: 일곱 인[두 증인, 일곱째 나팔 소리] / 김효성 목사

영국신사77 2020. 4. 15. 16:42


요한계시록강해

김효성 목사

2018년 6월 12일 수정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적 견해를 버릴 타당한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차례

1장: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표제와 인사, 그리스도의 명령]

2장: 일곱 교회들에 주신 교훈 (1)[에베소,서머나,버가모,두아디라 교회]

3장: 일곱 교회들에 주신 교훈 (2)[사데,빌라델비아,라오디게아 교회]

4장: 하늘 보좌의 광경[하늘의 예배]

5장: 어린양[책과 어린 양]

6장: 일곱 인[일곱 봉인에 담긴 심판] 

7장: 흰옷 입은 무리[인치심을 받은 144,000명, 각 나라에서 온 무리]

8장: 일곱 나팔 (1)[일곱째 봉인과 금 향로, 나팔 소리⑴]

9장: 일곱 나팔 (2)[나팔 소리⑵]

10장: 작은 책을 먹음[천사와 작은 책]

11장: 두 증인[두 증인, 일곱째 나팔 소리]

12장: 사탄이 내어쫓김[여자와 용]

13장: 두 짐승[짐승 두 마리]

14장: 구속받은 성도들[144,000명이 부르는 노래,세 천사가 전하는 말,

                        마지막 수확,마지막 재난을 가지고 온 천사①] 

15장: 승리한 성도들의 노래[마지막 재난을 가지고 온 천사②] 

16장: 일곱 대접[진노의 일곱 대접]

17장: 큰 음녀[큰 음녀 바벨론에게 내릴 심판]

18장: 바벨론의 멸망[바벨론의 패망]

19장: 백마 탄 자의 심판[어린 양의 혼인 잔치, 백마를 탄 자]

20장: 천년왕국과 대심판[천년 왕국,사탄의 패망,백보좌 심판]

21장: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성[새 하늘과 새 땅,새 예루살렘⑴]

22장: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라[새 예루살렘⑵,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서론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인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히폴리투스 등은 

본서를 사도 요한의 저작으로 인용하였고 

서방교회에서는 대체로 사도 요한의 저작으로 인정되었다. 

동방교회에서는 오랫동안 논란되었으나, 

순교자 저스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등은 

본서를 사도 요한의 저작으로 인용하였고, 

특히 수리아의 위대한 교부 에브라임 시루스는 

요한계시록을 사도 요한의 저작으로 반복해서 인용하였다.


본서의 저작 연대는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 때인 주후 95-96년경이라고 보인다.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유세비우스 등은 

사도 요한이 도미시안 황제(81-96년)의 통치 제15년에 

밧모섬에 유배되었고(주후 95년), 

도미시안 말기에(주후 96년) 그 섬에서 이 계시를 보았고, 

도미시안이 죽은 후에 네르바 황제(주후 96-98년)의 통치 초기에 에베소로 돌아와 

트라얀 황제(주후 98-117년) 때까지 에베소에 머물렀다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의 특징적 주제는 종말 예언이다. 

본서는 장차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강조하며(1:7; 22:20) 

그 재림 전에 있을 환난 시대에 대해 예언한다. 

이 예언의 목적은 교회들로 하여금 환난에 대비하여 

믿음에 굳게 서고 인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본서에는 “내가 보았다”(ei\don)는 단어가 57회, 

“또 내가 보았다”(kai; ei\don)는 표현이 32회 나온다. 

그 외에도, ‘어린양’(28회), ‘주’(21회) 등의 말이 빈번히 나온다.


요한계시록 6장부터 19장까지에 기록된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재앙의 해석에 대해 

크게 네 가지 견해가 있다.


1. 과거적 견해--초대교회 시대 즉 로마 제국시대에 다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 직전의 대환난의 징조들로 

본서의 내용과 같은 것들을 말씀하셨다(마 24장). 

그러므로 이미 다 이루어졌다는 해석은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2. 교회사적 견해--사도 시대로부터 세상 종말까지의 교회 역사 전체에 

관한 것으로 본다(루터, 벵겔, 반즈, 메이천). 

그러나 본서의 내용들이 교회역사상 어느 정도 나타날 수는 있어도 

그것들을 교회역사상의 구체적 사건들과 일치시키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3. 영적 견해--역사에서 악의 세력과 참 교회 간의 투쟁의 원리를 

교훈하는 것으로 본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제롬, 어거스틴). 

그러나 본서의 내용이 악의 세력과 참 교회 간의 투쟁의 원리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라고 보지만, 

본서가 예언서인 한 

어떤 미래의 구체적 사실들이나 사건들과 

그것들의 전개에 대한 예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언은 비록 상징적일지라도 미래의 어떤 사실들 

혹은 사건들에 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4. 종말론적 견해--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사건들에 관한 것으로 본다(순교자 저스틴, 이레니우스, 히폴리투스, 터툴리안, 잔). 

이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은 

마태복음 24장과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내용과 비슷한 점들이 많다. 

박윤선 박사는 종말론적 해석을 중시하면서 

영적 해석과 교회사적 해석도 참고하는 입장이었다.


이런 네 견해들에 더하여,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비유적 해석의 두 견해가 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은 

대략적으로 여덟 가지 견해가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뜻은 정확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고 견해들도 다양하다. 

그러나 장차 있을 대환난을 대비하고 

믿음과 인내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영광의 천국을 소망하라는 교훈은 분명하다.


1장: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1-3절, 계시의 성격

[1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본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이다. 요한계시록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계시란, 감추인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을 뜻한다. 바울이 받은 복음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었다. 갈라디아서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요한이 받은 종말 예언은 그의 계시이다. 이것은 본서의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이 계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옛날부터 자신의 모든 뜻을 계시하여 주셨다(히 1:1-2). 하나님의 진리들은 하나님 자신께서만 계시하실 수 있다. 창조의 진리도, 구원의 진리도, 종말의 진리도 그러하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별되신다.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비가 여기에 있다. 성경은 삼위(三位)[세 인격]의 구별을 하나님, 주 예수, 성령으로 표현하거나,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영으로 표현한다. 신성(神性)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구별되시나, 그 둘은 한 하나님이시다. 인성(人性)에 있어서도 아들께서는 하나님과 구별되신다. 예수께서는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시기 때문에 사람이신(딤전 2:5) 그는 하나님과 구별되신다. 예수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가진 한 인격이시며 하나님과 예수님은 신적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이렇게 삼위의 구별이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고 그들의 관계성이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까닭은 성경이 그의 신성에 대해 충만히 증거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요일 5:20), ‘크신 하나님’(딛 2:13)으로 불리셨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고(포도주와 떡 기적, 나병, 중풍병 치료, 죽은 자들을 살리심 등), 하나님과 나란히 영광과 찬송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신다(계 5:13).

본서는 ‘반드시 속히 될 일들’ 즉 미래의 일들, 특히 종말 사건들에 관한 것이다. 그것들 속에는 대환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마지막 심판, 죽은 자들의 부활, 새 하늘과 새 땅 등이 포함된다. ‘반드시’라는 말은 계시된 내용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종말 예언의 내용은 진실하고 확실하다. 또한 ‘속히’라는 말은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낸다. 이 계시의 내용들은 반드시 속히 될 일들이다. 이 말씀을 주신 지 2천년이 지났다. 교회는 이 예언의 말씀대로 때가 가까움을 의식하며 살아왔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알 수 없으므로 항상 종말의식을 가져야 한다. 사람의 편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일이 더딘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가 작정하신 모든 일들을 속히 이루실 것이다.

계시의 목적은 ‘그 종들에게 보이시기 위함’이다. ‘그 종들’은 주의 사도들과 제자들을 가리킨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이다.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유다서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요한계시록은 바로 하나님의 종된 우리 모두를 위한 책이다.

본서의 계시는 천사를 통해서 그리고 요한을 통해서 주어졌다(계 22:8). 또 그 방법은 상징으로 나타내시는 것이었다. ‘지시하신’이라는 원어(세마이노)는 ‘상징으로 나타내다’는 뜻이다. 요한계시록은 종말 사건들에 대한 상징적 예언의 책이다.

[2절]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계시의 기술자는 요한 자신이다. 요한은 자기가 받은 계시를 책으로 기록하였다.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주께서 친히 증거하신 진리이며, 사도 요한이 본 바이었다. 본서에는 ‘본다’는 동사(에이돈)가 57회나 사용되었고, 그 중에 ‘또 내가 보니’라는 표현(카이 에이돈)이 32회나 나온다. 요한은 많은 상징적 내용들을 환상 중에 보았다. ‘다 증거하였다’는 말은 요한이 기록한 본서가 하나님의 계시를 충분하게 기록하였음을 증거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이다. 그 말씀은 우리를 온전케 하고 선한 일을 위하여 온전히 준비되게 한다(딤후 3:16-17). 그러므로 이 책에 무엇을 가감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계 22:18-19).

[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성도는 하나님의 계시를 읽고 듣고 지켜야 한다. 옛날에는 책이 귀하므로 한 사람이 읽고 나머지 사람들은 들었다. 그래서 읽는 자(단수명사)와 듣는 자들(복수명사)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감사하게도 모든 성도들이 누구나 원하면 마음껏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을 많이 읽고 듣고 지켜야 한다. 지킨다는 말은 성경말씀을 보수(保守)하고 실천하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하나도 버리지 말고 다 보수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다. 특히 계시록을 통한 복은 환난을 대비함과 인내와 위로의 복이고(13:10; 14:12) 성도가 환난과 죄악을 이겨 마침내 천국과 영생에 이르는 복이다(22:5, 17).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책인 성경은 그것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 참으로 복되다.

계시된 내용은 긴급한 일들이다. “[마지막] 때가 가깝다.” 성도에게는 항상 종말의식이 필요하다.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하다. 지구의 종말이 가깝다. 본서와 성경 다른 곳들에 예언된 세상 종말의 징조들, 예를 들어 많은 거짓 목사들의 출현, 교회들의 배교(背敎), 전쟁, 기근, 전염병, 지진, 핍박, 세계복음화 등이 이미 나타나 있다. 자연계에도 자원 고갈, 환경 오염, 생태계 파괴, 오존층 파괴, 지구 온난화 현상 등 이상 징조들이 많이 나타나 있다.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계시의 책에 주목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어려운 책이므로 주관적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덮어두어서는 안 될 중요한 책이다.

1절부터 3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내용, 곧 신적 권위로 인쳐진 말씀이다. 우리는 신적 권위로 인쳐진 말씀인 이 책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둘째로, 요한계시록은 종말 예언의 말씀이다. 본서는 인류와 세계의 미래 역사에 대한 지도책과 같다. 우리는 인류와 세계의 미래를 위하여 이 책을 주목하고 지침으로 삼고 연구하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이 책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장차 올 대환난을 대비할 믿음과 인내와 위로를 얻을 것이며, 또 마귀와 세상과 죄악을 이기고 마침내 천국과 영생에 들어가는 복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듣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믿고 지켜야 한다.

4-8절, 문안과 송영

4-8절은 사도 요한의 문안 인사와 송영이다.

[4-5a절]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사도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였다. 종말 예언의 계시인 본서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형태로 되어 있다. 여기에 아시아는 소아시아, 지금의 터어키 지역을 가리킨다. 요한은 먼저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안이 그들에게 있기를 기원하였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영원 자존(永遠自存)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계시하셨다(출 3:14).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그 보좌 앞에 일곱 영들’은 성령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여러 신들이라는 뜻이 아니고 그의 완전한 지혜와 지식, 충만한 위엄과 능력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5:6은, “[어린양의 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그의 충성된 증인 되심, 그의 부활, 땅의 임금들의 머리 되심을 언급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충성된 증인이셨다. ‘증인’이라는 헬라어(말투스)는 ‘순교자’라는 뜻도 가진다. 충성된 증인은 죽기까지 진리를 증거하는 자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증거하신 충성된 증인이셨다. 또 그는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땅의 왕들의 머리가 되셨다. 그는 모든 교회의 우두머리이시며 온 세계의 정치가들의 우두머리이시다. 그는 만주의 주이시고 만왕의 왕이시다(계 17:14). 우리는 만주의 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긴다.

사도 요한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안이 그들에게 있기를 기원하였다. 은혜와 평안은 성도에게 참으로 요긴한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이다. 사람은 은혜를 받아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더 잘 믿을 수 있고 죄 안 짓고 바르게 살며 성화를 이룰 수 있다. 평안은 은혜의 결과로 포괄적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일차적으로 마음의 평안을 가리키지만, 또한 몸의 건강과 일용할 양식과 환경적 평안까지 포함한다고 본다. 또 그것은 현세와 내세의 평안을 포함한다.

[5b-6절]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다수의 전통사본들은 ‘해방하시고’ 대신에 ‘씻으시고’라고 되어 있다.1) 뜻은 비슷하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었다. 이것이 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기쁜 소식이다. 죄는 인생의 근본 문제이다. 범죄한 사람은 누구나 죽으며 지옥에 던지움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씻음을 받아야 하고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음으로 죄씻음 받는 것이 구주 예수께서 주시는 구원이다.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특권을 가리킨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고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되었다(벧전 2:9).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천국 백성이 되었다. 또 우리는 시시때때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능력을 돌려야 한다.

[7절]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요한계시록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승천 시 구름이 그를 가리웠듯이 그의 재림 시에도 그는 구름과 함께 오실 것이다. 구름은 그의 영광의 신비를 부분적으로 가리울 것이다. 그의 재림은 각인의 눈이 볼 수 있는 사건일 것이다. 또 심판주의 나타나심 앞에 어떤 사람들은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후회와 공포 속에 부르짖을 것이다. “그러하리라, 아멘”이라는 마지막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확실함을 강조한다.

성도는 이 땅의 것을 소망하지 않는다. 이 땅의 것들은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들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다 불탈 것이다. 그것들은 다 불심판을 위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있다. 그가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의 기대는 전적으로 거기에 있다. 그가 다시 오시면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8절]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본절은 다시 하나님의 영원자존성을 증거한다. ‘주 하나님’이라는 말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신약적 표현이다. 구약성경의 ‘여호와’는 신약성경에서 ‘주’라고 번역되어 있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첫 글자와 끝 글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시작과 끝이시다. 시작은 창조요 끝은 심판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하나님이시요 심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의 사건을 기록한 창세기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상의 종말을 예언한 요한계시록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자, 곧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모든 피조물은 제한성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께는 제한성이 없으시다.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여기에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들이 질적으로 다름이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자존하시며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우주와 인생의 모든 해답이 있다.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다.

4절부터 8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자.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계신 자이시다. 사람은 우주의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는 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시작과 끝을 아시는 영원하신 자이시다. 그는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개인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는 섭리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하나님만 섬기자.

둘째로, 우리는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땅의 왕들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씻으시고 장차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자. 그가 다시 오실 때 그를 기쁘게 영접하는 자도 있을 것이나, 두려워 떨며 통곡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땅의 것들을 소망하지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성도들의 복된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자.

셋째로, 우리는 일곱 영으로 온 세상에 충만하게 활동하시는 성령을 믿자. 그는 지혜와 지식, 위엄과 능력이 충만하시다. 그는 믿는 성도들 속에 영원히 계시며 그들을 위로하시고 거룩한 삶을 이루게 하신다.

넷째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음을 믿자. 우리는 천국 백성답게 의롭고 거룩하게 살고, 또 제사장의 특권을 가지고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얻기 위해 담대히 그의 보좌 앞에 나아가자.

9-20절, 계시를 받은 경위와 주께서 하신 말씀

[9-11절]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요한은 자신을 성도들의 형제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노사도의 겸손한 인품을 나타낸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겸손히 처신해야 한다. 그러나 일반 성도들은 직분자들을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존경해야 한다. 요한은 자신을 또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표현하였다.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받는 환난이 있다(마 16:24; 행 14:22; 딤후 3:12). 우리는 다 그 환난에 동참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또한 그의 나라와 참음에도 동참하는 자들이다. 환난이 있지만, 그의 나라도 있다. 참으면 영광도 있다(딤후 2:12). 그의 십자가의 낮아지심 뒤에는 부활과 승천의 높아지심도 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계시를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받았는지, 즉 그가 계시를 받은 경위를 증거한다. 그는 주의 날에 계시를 받았다. 그는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신 날도 주일이었고(요 20:19, 26),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도 주일이었다(행 2:1; 레 23:15-16). 사도시대에 벌써 하나님께서 주일을 복된 날로 구별하시는 표들이 있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주의 계시를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섬에 있었다. 초대교회의 증거에 의하면, 그는 밧모섬에 유배를 당하였으나 그 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시를 위하여 그를 밧모섬에 유배를 당하게 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어려운 일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생기며 모든 일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요한은 그가 보는 내용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었다. 주께서 요한이 본 내용을 책에 기록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더 잘 보관하고 전파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에 더 굳게 서고 더 큰 위로를 얻게 하기 위함이셨다. 여기에 성경의 필요성과 목적이 있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과 온전함을 위해 성경책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을 사랑하고 가까이 하고 주야로 읽고 묵상해야 하며 그 교훈에 귀를 기울이고 실천해야 한다.

[12-16절]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요한은 일곱 금촛대와 촛대 사이에 서신 영광스럽고 엄위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한다. 요한이 본 첫 번째 내용은 일곱 금촛대이었다. 그것은 일곱 교회를 가리켰다. 그것은 금촛대와 같다.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은 존귀하고 교회는 영광스럽다(엡 5:26-27).하나님의 뜻은 교회의 설립과 성장과 완성에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참된 교회의 건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요한이 본 두 번째 내용은 일곱 금촛대 사이에 계신 인자 같은 이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예수께서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신 것은 그의 왕으로서의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시는 것 같다.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은 것은 그의 지극히 거룩하심을 나태내신다. 또 그의 눈이 불꽃같은 것은 그의 깊고 철저한 통찰력을 나타내시며, 그의 발이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은 것은 그의 심판의 권세를 나타내신다. 그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와 같은 것은 그의 말씀의 큰 권위를 나타내신다.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는 것은 그가 교회들의 목사들을 붙드시고 사용하심을 나타낸다.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것은 사람의 영혼을 쪼개는 그의 예리한 말씀을 나타내신다. 그의 얼굴이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은 것은 그의 크신 영광을 나타내신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후에 승천하셨고 장차 재림하실 주 예수께서는 참으로 영화로우시고 엄위하시다. 그 영광의 주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인류의 역사를 주장하시는 분이시며 주의 재림 직전의 종말 사건들을 홀로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17-20절]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 앞에 엎드러졌다.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 앞에서 엎드러져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피조물이다. 예수께서 자신을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본질과 본체에 있어서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처음과 나중이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의 신비는 성경이 증거하는 기본적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는 이제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그는 죄인들을 사망과 지옥에서 건져내실 수 있는 구주이시다.

‘네 본 것’은 일곱 금촛대와 그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며, ‘이제 있는 일’은 사도시대 교회들의 일들을 가리키고 ‘장차 될 일’은 교회 역사상 되어질 일들과 주님 재림 직전의 일들과 인류의 최종 상태에 대한 것들이다. 일곱 교회와 일곱 별의 ‘일곱’은 땅 위에 있는 모든 시대의 교회들을 대표할 것이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고 하였는데, 사자는 교회의 목사를 가리킨다. ‘일곱 별의 비밀’이라고 한 것은 목사들의 영적 상태와 충성의 정도는 사람들은 모르고 주님만 아시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교회의 목사들은 주님의 오른손에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너무 염려하거나 너무 낙심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일곱 교회들 사이에 다니시며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오른손에 붙들고 쓰기도 혹은 쓰지 않기도 하신다.

9절부터 20절까지의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과 위엄을 깨닫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결과 위엄, 그의 불꽃같은 눈길, 그의 권위 있는 말씀을 깨닫자.

둘째로, 우리는 교회의 존귀함을 깨달아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금은 보석처럼 귀한 존재이다. 그것은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의 옷의 흉패와 견대에 있는 보석들과 같다.

셋째로, 우리는 교회의 사명을 깨달아야 한다. 교회는 촛대와 같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전도와 선행이 그 빛이다. 주께서는 우리의 선한 행실이 세상에 빛이 된다고 말씀하셨다(마 5:16). 베드로는 우리가 받은 구원의 목적이 그러하다고 말했다(벧전 2:9).

넷째로, 우리는 목사들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임을 깨달아야 한다. 목사들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별들이다. 그가 그들을 붙드시고 사용하실 것이다. 여기에 목사직의 존귀함도 있지만 목사들의 책임과 의무도 있다. 목사들은 하나님의 쓰임 받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2장: 일곱 교회들에 주신 교훈 (1)

요한계시록 2장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교회들의 목사들에게 주신 교훈이다. 그것은 첫 사랑을 회복할 것, 죽도록 충성할 것, 순결성을 지킬 것 등을 강조한다.

1-7절, 에베소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1-3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케크메카스)[피곤하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2-3장에 7번 나오는 ‘편지하기를’이라는 원어(그랍손)는 ‘편지하라’는 명령형이다.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 보내진 각 편지는 그 교회의 사자, 즉 목사에게 보내졌다. 목사는 교회를 인도하는 자이다. 마치 목자가 양무리를 인도하듯이, 목사는 하나님의 양무리인 교회를 인도한다. 장로들은 이 일에 목사와 협력한다. 그러므로 목사가 바로 서면 교회는 바로 설 것이고, 목사가 잘못되면 교회가 잘못될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주께서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신다. 그는 모든 것을 아신다. 그는 목사를 세우실 능력도, 폐하실 능력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므로 자기의 원하시는 바를 다 이루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급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잠잠히 그의 하시는 일을 보아야 할 것이다.

전지하신 주께서는 에베소 교회 목사의 선한 행위들을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주께서는 그의 믿음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아신다. 때때로 다른 이는 우리의 중심을 모를지라도 주께서는 아신다. 특히 에베소 교회의 목사는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았고 자칭 사도라 하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내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일은 많은 원수들과 싸워야 하는 힘든 일이요 낙심하기 쉬운 일이지만, 그는 이 일을 잘 수행하고 잘 참고 피곤하지 않았다. 주께서는 그의 선하고 충성된 행실을 기억하고 계셨다.

[4-5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께서는 에베소 교회의 목사의 과거에 잘 한 일도 인정하시지만, 현재의 문제점도 지적하고 책망하신다. 그의 문제점은 처음 사랑을 버린 일이었다. 그가 처음 사명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주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의 복음 진리를 전하고 지키는 일을 위해 수고하고 참고 성실하였으나, 지금은 처음에 가졌던 그 사랑과 그 열심과 그 성실함을 버렸다는 말이다. 누구든지 지금 주를 진실하게 사랑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의 일을 바르게 수행할 수 없다.

주께서는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신다. 물론 근본적 회개는 사람의 일생에 한번만 있다. 하나님 없이 죄 가운데서 방황하며 살던 사람이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가 그것이다. 그것은 단회적 성격의 회개이다. 이것이 ‘생명 얻는 회개’(행 11:18)이다. 아직 회개한 적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왜냐하면 회개치 않는 자는 영원한 멸망(눅 13:3, 5), 곧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이런 회개를 한 자도 어떤 구체적 죄 가운데 빠졌을 때 그 죄로부터 돌이켜야 한다. 이런 회개는 반복적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그 은혜는 죄인 속에 반드시 회개와 믿음을 일으킴으로 그를 구원하는 은혜인 것이다.

주께서는 그에게 만일 네가 회개하지 않으면 네게 임하여 그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고 말씀하셨다. 촛대를 옮기는 것은 교회를 폐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평양의 교회, 그러나 그 도시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는 죄를 범했던 그 교회를 폐하신 것과 같다. 그것은 무서운 경고이다.

[6절]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에베소 교회의 목사에게 선한 점도 있었다. 그것은 그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 것이었다. 니골라당은 14-15절에 있는 대로 우상숭배와 음행을 허용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자유를 왜곡하고 남용하였던 것 같다. 주께서는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셨다. 주의 참된 종들은 이단들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주 예수의 말씀은 곧 성령의 말씀이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본질과 본체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또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하신 말씀은 다른 교회들에게, 즉 지상의 모든 교회들의 사자들과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 모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알고 믿고 그를 사랑했던 그 처음 사랑을 버리지 말고 주를 향한 사랑이 더욱 많아져야 할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신다. 이긴다는 말은 죄와 사탄과 세상을 이긴다는 말이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먹는 것은 영생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지는 자, 곧 죄에 지고 사탄과 세상에 지는 자는 영생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는 영생을 얻고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 요한일서 5: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그러나 그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성령 안에서 성실히 노력해야 한다. 주 예수를 진실히 믿고 순종하는 자는 이긴다. 우리는 다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1절부터 7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오래 참고 선한 일을 힘쓰고 수고하고 피곤해지지 말자. 다른 사람은 우리의 중심을 몰라주어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과 우리의 선행과 수고와 인내를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낙심치 말고 선한 일을 위해 하나님께 충성하자.

둘째로, 우리는 특히 처음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로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신앙생활에는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하다. 현재 우리의 사랑과 열심이 식어져 있다면 주님의 책망을 들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 예수를 날마다 더욱 사랑해야 한다. 오늘 말씀과 기도로 깨어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일에 힘쓰자.

셋째로, 우리는 범죄한 일을 깨달으면 즉시 깨닫고 회개해야 한다. 성도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어떤 특정한 죄를 지으면 그 죄를 고백하고 버리고 바른 길에 서야 한다. 우리는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온다.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거룩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죄와 사탄과 세상을 이겨야 한다. 우리는 모든 불경건과 부도덕을 버려야 하고 멀리해야 하고, 사탄과 악령의 시험과 장난을 분별하고 대적해야 하고, 세상의 악하고 음란한 풍조를 배격하고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중생시켜 구주 예수를 믿게 하신 자들은 다 이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과 성령 안에서 진지하게 노력해야 한다.

8-11절, 서머나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8-9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처음이요 나중[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전통사본)2)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會)라.

주께서는 자신을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만 참 하나님이시며 오직 그 분만 온 세상을 주관하신다. 또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인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다(요 11:25). 우리가 그를 위하여 죽는다 할지라도 그는 우리를 영광스럽게 다시 살리실 수 있고 참으로 다시 살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활의 주께서는 고난받는 목사들과 성도들에게 큰 힘과 위로와 소망이 되신다.

주께서는 서머나 교회 목사의 계명 순종과 충성의 행위와 환난과 궁핍을 아셨다. 주께서는 우리의 계명 순종과 충성을 아신다. 또 주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많은 환난과 궁핍을 경험할 것이다. 사도행전 14:22,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디모데후서 3:14,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비록 서머나 교회의 목사가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평가하셨다. 인생의 참된 부요는 물질적인 데 있지 않고 영적인 데 있다. 물질적인 가치는 일시적이지만, 영적인 가치는 영원하다. 주 예수께서는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고 교훈하셨다(눅 12:21). 또 가난한 자들이 믿음이 좋은 경우가 많다.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말했다(약 2:5). 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만 소망하며 위로로 삼고 하나님의 뜻만 행하며 사는 자이다.

서머나 교회의 목사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을 받았다. 구약교회는 매우 타락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또 주의 제자들과 성도들을 핍박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구약교회인 유대인들의 모임은 실상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고 사탄의 회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죽이고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자들이 어떻게 참 교회에 속하겠는가? 그들은 분명히 사탄의 회에 속한 자들이었다.

[10절]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서머나 교회의 목사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아야 하였다. 고난은 기껏해야 우리의 육신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자. 주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고(마 10:28), 사도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노라”고 말하였다(고후 5:1).

서머나 교회에는 장차 10일 동안의 환난이 있을 것이며 마귀가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할 것이다. 그 교회의 목사가 견고히 섰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에 시험과 환난이 있을 것이다. 10일 동안의 환난은 서머나 교회에게 닥칠 문자적으로 10일 간의 환난이든지 혹은 상징적으로 어떤 제한된 기간을 가리킬 것이다. 성도들이 당하는 핍박과 고난은 영속적이지 않고 지나가는 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끝까지 충성해야 한다.

주께서는 서머나 교회의 목사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셨다. ‘충성’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참 충성은 죽기 전까지는 증명될 수 없을 것이다. 충성은 죽음을 통해 참으로 증명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12:11, “또 여러 형제[구원받은 성도들]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사탄]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순교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확실한 표이다. 물론 참 하나님, 곧 신구약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그의 뜻을 위한 순교와 충성만이 의미와 가치가 있다.

주께서는 죽도록 충성하는 종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생명의 면류관은 면류관의 종류 중 하나라기보다 생명의 영광 혹은 영광스러운 생명이라는 뜻일 것이다. 죽기까지 참된 믿음을 지키고 충성하는 자는 영광스러운 영생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 충성치 않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보장되지 않는다. 주님을 배반하고 떠난 자에게는 영생의 영광이 약속되지 않는다.

[11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주의 참된 종들과 성도들은 주 예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있어야 한다. 그들은 주 예수의 음성 곧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성경책을 읽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그 모든 내용을 믿고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기는 자는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충성하며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이다. 그런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둘째 사망의 해는 지옥 형벌을 말한다. 요한계시록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요한계시록 21:8,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믿음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 대해 충성치 않고 순종치 않는 자는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다. 그러나 구원은 반드시 믿음과 인내, 그리고 순종과 충성의 삶을 동반한다.

8절부터 11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기를 구하지 말고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기를 구하자.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물질적 부요는 일시적 가치를 가질 뿐이며, 영적 부요는 영원한 가치를 가진다. 영생은 백년의 세상 생활과 비교할 수 없이 복되고 영광스럽다. 천국은 온 세상과 바꿀 수 없는 보화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식과 믿음, 천국 소망, 그리고 하나님과 교회 사랑에 부요한 자가 되자.

둘째로, 우리는 환난과 순교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죽도록 충성하자. 충성은 참 믿음의 증거이다. 그것은 이기는 자가 되는 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충성하다가 죽으면 우리는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세상은 단지 우리의 육신적 목숨만을 위협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 앞에서 죽도록 충성하자.

12-17절, 버가모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12-13절]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주께서는 자신을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로 묘사하셨다. 1:16에서는 그 검이 입에서 나온다고 표현되었다. 그 ‘좌우에 날선 검’은 그의 예리한 말씀, 즉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여 영혼을 회개시키는 말씀을 가리킨다. 물론 그 말씀이 악인을 죽이기도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칼과 같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주께서는 좌우에 날선 예리한 칼과 같은 말씀을 주신다.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영적 전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야 한다. 개인의 신앙생활과 교회의 진리 운동은 영적 전쟁과 같다. 마귀와 불신앙과 비진리를 대항하여 싸울 이 전쟁에서 우리의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주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기록되었으되” 하며 성경말씀을 사용하셨듯이, 오늘날 우리도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때 기록된 성경말씀을 사용해야 한다.

버가모는 사탄의 위(位)가 있는 곳, 곧 우상숭배의 총본부와 같았다. 그 도시에는 제우스 신의 신전과 아테네 여신의 신전과 디오니소스 신의 신전 외에, 뱀 모양의 의술의 신 에스큘라피우스 신의 신전이 있었고, 로마 황제 아구스도를 숭배하는 신전도 있었다고 한다. 황제 숭배는 초대교회 시대인 로마 시대에 보편적 풍조이었다. 사탄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혼란시켰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미혹하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믿음과 순종의 행함이 있는 사람이었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믿음에 굳게 선 사람이었다. 그는 주의 이름을 굳게 잡았고 주의 충성된 증인 혹은 순교자 안디바가 죽임을 당했을 때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바른 믿음을 지키는 사람은 순교자 못지 않게 충성된 자일 것이다.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그런 사람이었고 주께서는 그의 믿음과 행위를 아셨고 그를 인정하셨고 칭찬하셨다.

[14-15절]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주께서는 버가모 교회의 목사에게 책망도 하셨다. 우리에게 칭찬거리가 있으면 그가 우리를 칭찬하실 것이지만, 우리에게 책망거리가 있으면 그는 우리에게 책망도 하실 것이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책망은 그 교회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발람의 교훈은 발람이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미혹하는 한 방책을 일러준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 여자들과 행음하며 그 신들에게 제사한 제물을 함께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셨다(민 25:1-3). 그 범죄는 발람의 조언에 의한 것이었다(민 31:16). 이와 비슷한 교훈이 버가모 교회 안에 들어온 니골라당의 교훈이었다. 그것은 우상숭배와 음행을 용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그런 자들을 용납하고 있었다.

오늘날도 교회는 우상숭배와 음행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교회가 경계해야 할 우상숭배는 천주교의 마리아 숭배와,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 숭배와, 종교다원주의의 이방 종교 관용이다. 우상숭배의 용납은 하나님께 책망받을 큰 잘못이다. 오늘날 교회는 또 음행을 경계해야 한다. 현대 사회와 문화는 심히 음란하다. 오늘날 교회에는 심지어 동성애와 동성애자 결혼, 그리고 동성애 목사까지 용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인들을 바로 가르치고 바로 훈련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께 큰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목사는 바른 교훈을 전하고 가르치며 교인들을 그 교훈대로 살도록 지도하고 관리해야 한다.

[16절]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주께서는 버가모 교회의 목사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다. 교회 안에 우상숭배와 음행을 하는 자들을 용납하는 것은 교회의 목사가 회개할 죄이었다. 만일 목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주께서는 그 교회에 직접 개입하실 것이다. 교회가 권징을 회피한다면 주께서 직접 개입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교인들 중에서 죄 지은 자들에게 직접 징벌을 내리실 것이다. 주께서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신다는 말씀을 보면 주의 입의 칼은 심판의 칼인 것처럼 보인다. 주님의 직접 개입은 목사에게 큰 수치가 될 것이다. 그가 돌보는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직접 징계를 당할 것이다. 그의 목회는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물을 짓는 것과 같은 목회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상급은 크게 감소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직접 개입하시기 전에 그는 교인들을 바르게 관리하고, 필요할 때 적절한 권징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1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만나는 천국의 양식을 상징하는 것 같다. 시편 78:24-25, “저희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으로 주셨나니.” 만나를 주셔서 먹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장차 천국에서 주님과 누릴 사랑의 식탁 교제를 가리킬 것이다. 또 흰 돌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옛 시대에 흰 돌은 운동 경기에서 이길 때에나, 재판에서 무죄 판결 시에나, 큰 잔치에 입장할 때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과연 장차 우리가 받을 흰 돌은 그런 의미들을 다 포함하는 것 같다. 그 흰 돌은 세상에서의 영적 싸움에 승리한 자들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무죄(無罪) 혹은 의롭다 하심의 판결을 받을 자들과, 영광스럽고 복된 천국 잔치에 참여할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 흰 돌 위에는 새 이름이 기록될 것인데, 그것은 받는 자밖에는 알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새 이름은 천국에서 사용될 우리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천국 백성으로서 우리가 누릴 복된 신분과 영광을 나타낸다.

12절부터 17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탄의 위(位)가 있는 곳, 우상숭배가 가득하고 죽음의 위협이 있는 곳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주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참 믿음은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장차 온 세상에 임할 대환난 시대에 대비하여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준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상숭배와 음행의 악을 포용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시대는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시대이다. 우리는 이 어두운 시대에 교리적, 윤리적 죄악을 분별하고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구원받았지만, 우리는 죄를 짓지 말고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악을 정죄하면서 악을 용납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자가 될 것이며 주의 책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8-29절,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18-19절]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내가 네 사업[행위]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것보다 많도다.

주님의 눈이 불꽃같다고 한 것은 그의 통찰력의 날카로움을 나타내시며 그의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고 한 것은 그의 심판의 엄위함을 나타내신다고 본다. 주께서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에게 이런 모습으로 표현된 것은 주께서 그 목사의 문제점을 통찰하시고 그가 포용한 악에 대해 심판하실 것을 암시한다. 오늘날도 주께서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보시며 우리의 행위들을 판단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먼저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가 잘 한 일에 대해 칭찬하셨다. 그 목사는 주께 칭찬들을 일을 많이 했다. 그는 주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고 주를 사랑했고 믿었고 섬겼고 인내했다. 이것들은 다 좋은 점들이었다. 우리도 주를 위해 일하는 자가 되고 주를 참으로 사랑하고 믿고 섬기는 자 되기를 원하며 또 환난 중에도 오래 참는 자 되기를 원한다. 또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는 나중 행위가 처음 것들보다 많았다. 그는 참으로 진실한 자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꾸준히 주를 믿고 섬겼으며 점점 더 열심히 주를 믿고 섬겼다.

[20-21절]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네 아내]4)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그 여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진실히 주를 믿고 섬기는 목사에게도 문제점이 있었다. 그의 문제점은 버가모 교회 목사의 문제점과 같이 잘못된 자를 포용하는 데 있었다. 그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그의 아내 이세벨을 용납하였다.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의 아내는 선지자로 자처하였을 뿐만 아니라, 옛날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처럼 우상숭배자이었다. 그 여자는 주의 종들을 가르쳐 꾀어 음행하게 하고 우상제물을 먹게 함으로써 우상숭배에 떨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는 이 죄악을 용납하고 있었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도 포용주의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과 목사들이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들과 천주교회를 포용하거나 심지어 동성애 같은 악을 포용하고 있다. 주께서는 확실하게 그들에 대해서도 책망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그 여자에게 그 죄를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주께서는 죄인들에게 회개하고 믿을 기회를 주신다. 그들은 그 기회에 지체하거나 고집을 부리지 말고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구원받지 못한 자이었을 것이다. 교회 속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회개치 않는 죄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자들을 보면 낙심할 것이 아니고, 힘써 권면해야 하고 또 우리 자신을 성찰하여 그런 죄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바울은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 말했다(고전 15:33-34).

[22-23절] 볼지어다, 내가 그[그 여자]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주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 사모에게 징벌을 선언하셨다. 첫 번째는 그를 침상에 던지는 것이다. 그것은 그를 병상에 눕게 하심을 가리킨다. 두 번째는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회개치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 여자의 자녀들을 죽이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공의의 징벌이다. 이로써 모든 교회는 주께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죄는 마음의 은밀한 곳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주께서는 인간의 그 은밀한 마음과 뜻을 살피시고 판단하시고 징벌하신다. 주 앞에는 비밀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모든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는 오늘날에도 공의로운 징계의 채찍을 드실 것이다.

[24-25절]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감사하게도 두아디라 교회에는 그 여자의 교훈을 받지 않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성도들이 남아 있었다. 해이해지고 넓어진 교회들 속에도 순진한 교인들이 남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두아디라에 남아 있는 교인들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으셨다. 그는 그들에게 단지 그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그의 재림의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권면하셨다. 오늘날도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안에 사탄의 은밀한 활동들이 많이 있다고 판단된다.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이 만연하고 비성경적 에큐메니칼 운동 즉 교회연합운동이 활발하고 은사주의의 혼란과 교회 음악의 타락 등이 그 증거들이라고 보인다. 현 시대는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주께서 남겨두신 신실한 교회들이 있고 목사들과 성도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끝까지 속죄신앙과 개혁신앙을 지키고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하기를 원한다.

[26-29절]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심판의 권세이다. 요한계시록 12:5에는 예수님 자신이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로 묘사되어 있다. 주께서는 이 권세를 성도들에게도 어느 정도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9:28). 사도 바울은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말했다(고전 6:2). 또 주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새벽별을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 새벽별은 주님의 영광의 빛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요한계시록 끝부분에서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표현하셨다(계 22:16).

18절부터 29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의 선한 행위와 사랑은 처음 믿었을 때보다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자라고 풍성해져야 한다. 두라디아 교회의 목사는 나중 행위가 처음것보다 많았다. 우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믿음과 선행이 자라가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가족들 중에 있는 악이라도 용납하지 말고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는 잘못된 교훈을 따르는 아내를 용납하였다.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잘못이 있을 때 그를 책망하고 고치게 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음행과 우상숭배를 경계해야 한다. 모든 악의 포용은 교회를 부패시킨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

셋째로, 우리는 처음 믿을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굳게 붙잡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밝히 계시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굳게 지켜야 한다. 시대마다 교회 속에 은밀히 들어오는 온갖 교리적, 윤리적 오류들을 분별하고 배격하고 성경적 교훈만을 붙들고 믿고 행해야 한다.

3장: 일곱 교회들에 주신 교훈 (2)

요한계시록 3장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에서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들의 목사들에게 주신 교훈이다. 그것은 신앙과 행위의 온전함, 바른 신앙의 보수, 확신 등을 강조한다.

1-6절, 사데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1절]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지고 계신다. 성령을 일곱 영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분의 완전한 지혜와 지식과 통찰력을 나타내신다.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 곧 성령과 본질적으로 일체가 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지혜와 지식, 또 그의 통찰력은 완전하시고 충만하시다.

주께서는 사데 교회의 목사의 행위를 아셨고 그의 행위에 근거하여 그를 판단하셨다. 우리는 사람들의 단편적인 혹은 불완전한 말만 듣고 사람을 판단하기 쉽지만, 주께서는 그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신다. 사람의 행위는 그의 마음과 인격의 표현이다. 사람의 말은 자기 마음을 어느 정도 감출 수 있고 심지어 위선적일 수도 있으나, 사람의 행위는 그것을 그대로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사람의 마음도 판단하시지만, 특히 행위에 근거하여 사람을 판단하신다.

사데 교회의 목사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었다. 그와 그의 교회는 사람들의 보기에 매우 활동적이었고 또 그렇게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활동적이라는 것이 교회가 건전하다는 표시는 아니다. 이단들도 매우 열심이 있고 이방종교인들이나 공산주의자들도 그러하다. 열심이 있다는 것이 진리를 소유한 표시는 아니다. 무엇을 위한 열심이냐, 어떤 성질의 열심이냐가 중요하다.

사데 교회의 목사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이었다. 죽었다는 말은 영적 의미이다. 그는 육신적으로는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었을지 모르나, 영적으로, 신앙적으로는 죽었다고 간주되었다는 말이다. 그의 활동은 바른 지식과 참된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행위들은 인정받을 만하지 않았다. 의롭고 선한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생명 있는 믿음으로 보기 어렵다. 의롭고 선한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2절]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이 말씀을 보면, 사데 교회의 목사는 아직 완전히 죽은 상태는 아닌 것 같다. 그에게 죽게 된, 죽어가고 있는 남은 바가 있었다. 그것은 복음 신앙의 뿌리이었거나 중생했으나 연약한 생명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죽을 처지에 있었다. 그 남은 것을 그냥 내버려두면 결국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목사는 그것을 굳게 붙잡아야 했다. 그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했다. 행위의 온전함은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행위를 가리키고, 행위의 결함은 불경건하고 더럽고 불의하고 악하고 거짓된 행위를 가리킬 것이다. 사데 교회의 목사에게는 행위의 온전함이 없었다.

[3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성도가 받고 들은 것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진리이다. 사데 교회의 목사는 그것을 다시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해야 하였다. 생각한다는 말은 기억한다는 말이다. 과거의 기억은 유익하다. 특히 구원의 기억이 그러하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찬송가 405장). 우리는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회개케 하셨고 예수님 믿게 하셨는지 기억하고 회개해야 한다. 과거에 받은 은혜에 대한 기억은 오늘과 내일의 신앙생활에 힘이 된다. 그러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셔도 그 목사가 일깨지 않으면 주께서 도적같이 그에게 임하실 것이며 직접 개입하실 것이다.

[4절]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교인들의 영적 상태는 목사의 영적 상태를 따라가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데 교회는 달랐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사데 교회는 목사가 영적으로 죽은 자이었으나, 그 교회에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주와 함께 다닐 자들이었다. 그들은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흰옷은 순결을 의미한다. 성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흰옷이며 의롭다 하심을 얻는 참 믿음 곧 속죄신앙이 흰옷이다. 또 성도는 이 의 안에서 바른 믿음을 지키고 바르고 선한 일을 힘쓴다. 그러나 흰옷을 입은 자들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많은 이들이 믿음을 저버리고 해이해졌고 죄의 낙을 누렸다. 노아 시대에도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는 다 멸망을 당했다. 영생에 이를 좁은 길로 가는 자들은 적다.

[5-6절]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우리는 흰옷 입은 목사, 흰옷 입은 직분자들, 흰옷 입은 성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흰옷 입은 무리의 수에 들어야 한다. 성도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고 또 그 의 안에서 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흰옷을 입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죄를 짓는 자는 흰옷을 더럽히는 자요 영적으로 죽어 가는 자이다. 교인들은 산 자와 죽은 자, 흰옷 입은 자와 흰옷을 더럽히는 자, 둘 중의 하나에 속한다.

흰옷 입은 자들의 구원은 확실하다. 주께서는 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지우지 아니하고 그것들을 하나님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실 것이다. ‘이름을 흐린다’는 말은 이름을 지워버린다는 뜻이다. 주님만 바라고 죄를 대항하고 의를 행하는 자들의 구원은 확실하여 주께서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워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흰옷을 더럽히는 자들 곧 범죄하는 자들의 구원은 보장될 수 없다. 사람이 죄 가운데 살면서 구원을 말하는 것은 거짓된 확신이며 그가 구원을 소망한다고 해도 그것은 헛된 소망이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말고 성경의 모든 교훈을 행해야 한다.

1절부터 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외적인 모습이나 이름이나 평판만 가지지 말고 실제로 참 믿음과 선한 행위를 가져야 한다. 사데 교회의 목사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 혹은 죽어가는 자이었다. 우리는 그런 자와 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단순히 입술의 고백이나 종교적 의식의 종교가 아니고 실제의 삶의 종교이다. 우리가 참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에 증거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파악하고 굳게 지켜야 한다. 우리는 신앙의 기본적 내용을 보수하고 그것에 합당한 경건하고 선한 행위를 가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의 흰옷을 입은 자는 그 흰옷을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또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참으로 믿는 자가 되며 참으로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

7-13절,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7-8절]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이는]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아니하였음이라].

본문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보낸 편지이다. 분문은 주께서 거룩하시고 진실하시다고 말하며 또 그가 다윗의 열쇠로 천국문을 열기도 하시고 닫기도 하시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고 말한다. 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4:6).

주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열린 문을 주셨다. 그것은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이다. 열린 문은 천국의 확실한 보장을 가리킨다.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자가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위해 주께서는 천국 문을 여신다. 주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신다. 그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0:28).

주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열린 문을 주신 이유는, 그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의 말씀을 지키며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린 문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인간 편에서 볼 때 그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는 큰 재능을 가진 자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 주의 말씀을 지켰고 주의 이름을 부인치 않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하나님께서 주신 열린 문, 곧 천국의 확실한 보장이었다.

우리는 힘이 없다고 핑계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보잘것없는 재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래서 두렵고 떨릴지라도, 힘을 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의 이름을 배반하거나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신앙의 순결과 절개를 지켜야 한다. 그것은 깨끗한 신앙생활을 말한다. 그것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경건하게 살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고, 세속의 죄악된 풍조에 물들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교회 중심으로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작은 힘으로도 주를 진실하게 믿고 따라야 한다.

[9절]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주께서는 유대인들의 모임을 사탄의 모임이라고 부르셨다. 구약교회인 유대인들의 모임은 부패되고 타락하여 사탄의 모임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였고 신약교회를 핍박하였다.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전서 2:15-16에서,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 유대인들 중에 몇 사람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 앞에 굴복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 신실한 목사에게 내리시는 보상과 같았다. 주께서는 이 일을 통해 자신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거하실 것이다.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살아계심과 그들을 사랑하시고 위하심을 종종 현실 속에서 이렇게 나타내신다.

[10절]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주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한 가지 더 복된 약속을 주셨다. 그것은 주께서 친히 그를 지키어 장차 온 세상에 임할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시험의 때는 대환난의 때를 가리키는 것 같다. 물론 그것은 그 목사가 대환난을 통과하지 않고 하늘로 올리우는 것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모든 성도들이 대환난을 겪을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4: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요한계시록 7:14,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든 시험과 환난의 때를 면하는 은혜가 예비되어 있었다. 그것은 옛날 애굽에 내렸던 10가지 재앙 중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했던 고센 땅이 그 재앙을 받지 않았던 것과 같은 은혜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대환난 중에도 우리의 피난처이시다.

[11절]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주께서는 단지 한 가지를 그 목사에게 요구하셨다. 그것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른 신앙의 보수를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역사적 기독교,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굳게 믿어야 한다. 그것이 장차 우리가 받을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범죄하고 회개치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장차 받을 면류관, 곧 영광을 빼앗길 것이다.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고 우리에게 예비된 천국의 영광을 빼앗으려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과 성도들은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주께로부터 받은 말씀 안에 굳게 서고 유일한 복음인 십자가의 속죄의 복음을 굳게 믿어야 한다.

[12-13절]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참된 성도를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엡 2:21-22).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집이다. 또 그들은 다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 된다는 뜻이다. 또 주께서는 이기는 자들에게 세 가지의 이름, 즉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의 새 이름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새 예루살렘 성의 백성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임을 확증하신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모든 교회들과 성도들이 다 듣고 실천해야 할 교훈이다.

7절부터 13절까지의 본문은 무슨 교훈을 주는가? 우리는 본문에서 한 가지 분명한 교훈을 받는다. 그것은 우리가 받았던 하나님의 말씀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그 믿음을 굳게 지키라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능력이 크든지 적든지, 우리는 주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의 말씀을 지켰고 주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우리들도 그러해야 한다. 우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로부터 전달받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천주교회의 어두움으로부터 다시 발견한 바른 신앙을 잘 파악하고 믿고 끝까지 지키고 실천해야 한다. 그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을 지키는 것이 보수신앙이며 옛신앙이다. 온 세상에 마지막 대환난이 올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기 백성을 결코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며 환난과 시험을 감당하거나 피할 길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오직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신앙만을 굳게 간직하자.

14-22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14-16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아멘[진실]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실하시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 곧 만세 전에 그가 택하신 자들의 대속 사역을 이루시는 일에 충실하셨고 그의 뜻을 참되게 증거하셨다. 주께서 자신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에게 교훈하시는 뜻이 있어 보인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주께 충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 주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라고 표현하셨다. 고대의 헬라 철학자들은 우주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였다. 우주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시며 철학자들의 근본적 질문에 대한 대답이시다.

주께서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하셨다. 차거나 덥다는 것은 주의 복음과 일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굳게 믿고 그 복음을 전하며 영혼들을 구원하며 바른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해 열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주께서는 그의 미지근한 태도를 지적하시며 그가 분명한 태도를 가지기를 원하신다. 즉 믿는가, 믿지 않는가 확실한 태도를 취하고 믿으려면 확실히 믿으라는 것이다. 미지근한 태도는 믿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고, 오히려 참된 믿음에 방해가 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자신을, 믿는 자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이런 미지근한 태도를 미워하신다. 미지근한 태도는 꾸며진 불신앙이며 일종의 위선이다. 하나님께서는 위선을 미워하신다. 그는 우리의 진실한 믿음과 순종을 원하신다.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외적으로 즉 교인 수나 재정에 있어서 부요했던 것 같다. 그 교회 목사는 자기 만족에 빠져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네가 가난하다’고 말씀하셨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물질적으로 부요하였으나 영적으로 빈곤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참된 모습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었고 벌거벗었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서머나 교회의 목사의 경우와 정반대이었다. 서머나 교회의 목사는 외적으로는 빈곤하였으나 내적으로는 부요한 자이었다(계 2:9).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외적으로는 부요하였으나 내적으로는 빈곤한 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물질적 부요를 크게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의 영적, 신앙적 부요를 크게 여기신다(눅 12:21).

[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불로 연단한 금’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 곧 확신을 가리킬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였다(벧전 1:7). ‘벌거벗은 수치를 가릴 흰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확신을 가리킬 것이다. 우리의 흰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교훈하였고(롬 13:14), 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하였다(갈 3:27). 또 안약은 영적 세계, 하나님의 세계, 진리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성령의 지혜와 지식을 가리킬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주 예수께로부터 살 수 있다. 주님께 산다는 말은 이 모든 것이 주의 소유라는 것을 나타낸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실상,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드려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이런 것들을 간구할 때 그는 그것들을 값없이 은혜로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씀하셨다(사 55:1).

[19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책망과 권면, 회개의 촉구는 다 주님의 사랑에서 나온다. 주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많은 부족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오래 참고 또 책망하시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버려두시거나 아니면 벌써 쳐서 데려가셨을 것이다. 부모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매를 때리고, 우리는 사랑하는 친구에게 충고한다. 만일 우리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를 사랑하시며 그에게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12:5-6은,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라고 말했다.

[20-22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주님을 문밖에 세워두었다. 목사인 그는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지 못하였다. 주께서는 그의 몸을 성전 삼지 못하시고 그를 떠나 계셨다. 그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경우이다. 그는 문을 열고 그를 영접해야 했다. 그가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면 그는 즐거운 식탁 교제, 즉 주님과의 교제의 회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이기는 자들은 심판날에 주의 보좌에 함께 앉고 그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다.

14절부터 22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해야 한다. 라오디게아 목사의 문제는 미지근한 데 있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에게는 주께 대한 불신앙과 의심이 있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그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시력도 없었다. 그는 세상적 가치관과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미지근한 마음을 버리고 주님과 그의 복음 진리를 확신하고 의롭다 하심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무슨 잘못이 있을 때 그것을 즉시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열심으로 회개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주님과의 교제의 회복, 즉 말씀의 깨달음과 기도의 문의 열림과 그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것이다.

4장: 하늘 보좌의 광경

[1절]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나팔소리 같은 음성은 주님의 음성이었다(계 1:10, 12). 본문은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교회의 휴거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요한이 성령의 감동 중에 천상의 광경을 보게 된 경위를 말하는 것뿐이다.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이란, 이미 1:19에서 말한 대로, 사도 시대 이후의 교회 역사와 세상의 종말 사건들을 가리킨다.

[2-3절]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사도 요한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보좌에 앉으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5:1에 그의 오른손에 책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씀은 이 사실을 더욱 확실케 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그의 본체는 아무도 볼 수 없으나 때때로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습은 벽옥과 홍보석과 무지개와 녹보석 등 상징적인 네 단어로 여전히 묘사되었다. 벽옥은 그의 거룩하신 영광을, 홍보석은 그의 공의와 심판의 엄위하심을, 무지개는 그의 신실하신 긍휼의 약속을, 녹보석은 그의 선하시고 아름다우심을 나타내는 것 같다.

[4절]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사도 요한은 또 보좌에 둘려 있는 24보좌를 보았다. 거기에는 24장로들이 앉아 있었다. 24장로들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상징하는 것 같다. 24라는 수는 구약교회의 12지파들과 신약교회의 12사도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요한계시록 21:12, 14에 보면, 새 예루살렘 성의 열두 문 위에는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자손 12지파의 이름이 쓰여 있고, 성곽의 열두 기초석 위에는 12사도의 이름이 있었다. 또 24장로들이 입은 흰옷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와 성결을 가리키고, 그들이 쓴 금면류관은 장차 교회가 누릴 존귀와 영광을 상징할 것이다. 우리의 소망과 영광은 이 땅에 있지 않고, 천국에 있다. 우리는 보이는 세계를 바라며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며 산다. 세상은 장차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태워질 것이나, 우리는 하나님의 의와 영광이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이다.

[5-7절]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은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나타날 능력과 위엄을 보이는 것 같다. 또 보좌 앞의 일곱 등불, 곧 하나님의 일곱 영은 하나님의 충만하신 지혜와 지식을 나타낸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신 영이시다. 그는 사람들의 모든 말과 행위를 다 아시고 그들의 은밀한 일까지도 아시고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사도 요한은 또 보좌 앞에 수정 같은 유리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 것을 보았다. ‘수정 같은 유리바다’는 구약시대에 성막의 물두멍이나 성전의 바다를 기억나게 한다. 그것들은 다 제사장의 수족을 씻는 일을 위하여 만든 것이었다. 천상의 ‘수정 같은 유리바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흠과 점 없게 된 성결을 나타낼 것이다. 보좌 가운데와 주위에 있는 네 생물은 에스겔서에 나오는 그룹 천사와 같다. 24장로가 교회를 대표하듯이, 이 네 생물은 천사들을 대표하는 것 같다. 그들의 앞뒤에 눈이 가득한 것은 그들의 통찰력과 지식의 충만함을 상징할 것이다.

그 네 생물의 모습은 매우 상징적으로 묘사되었다.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다. 사자는 불굴의 용맹스러움을, 송아지는 온순함과 충성을, 사람은 지혜를, 독수리는 쇠하지 않는 생명력과 민첩함을 상징할 것이다. 천사들은 악령들과의 전투에서 용맹스럽고, 온순하여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충성하며, 지혜롭고 총명하며, 민첩하며 쇠하지 않는 생명력을 가진다.

[8-11절]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주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5)] 하고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네 생물들은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찬양하기를 힘썼다. 천사들의 모습은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천사들의 존재는 실재이다. 천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을 즐겁게 하려고 노래하는 자들이 아니고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을 찬양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허무한 가사를 지절거리는 노래들을 미워하시나, 진리에 합한 노래들을 귀히 보신다. 물론, 찬양은 가사뿐 아니라, 곡과 리듬과 박자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과 질서에 맞게 아름다워야 한다(시 96:9).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해야 한다.

24장로들은 하나님께 경배하며 자신들의 면류관을 벗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던져 드렸고 오직 하나님께만 찬송과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돌렸다. 성도의 찬양의 근본적인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만 우리의 찬송과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믿음과 선행에 대해 상주시지만, 성도는 사실상 그런 상을 받을 만한 의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우리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천상에서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한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상의 어둡고 불완전한 현실만 보지 말고 천상의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며 또 천국의 영광을 묵상하며 그 영광을 바라자. 온 우주의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엄위하시고 아름다우시며 천국의 영광도 그러하다. 고린도후서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골로새서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둘째로, 우리는 장차 의의 흰옷, 즉 죄성이 전혀 없는 영광스런 몸과 금면류관을 쓸 것을 소망하자. 이것이 성도들이 천국에서 누릴 복된 영광이다. 빌립보서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로마서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셋째로, 우리는 네 생물의 덕, 즉 사자 같은 용맹, 송아지 같은 온순함과 충성, 사람의 지혜, 독수리같이 쇠하지 않는 생명력과 민첩함을 배우자.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주의 모든 종들에게 필요한 덕이다.

5장: 어린양

[1-5절]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獅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든 책은 장차 될 일들, 즉 교회 역사와 세상 종말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쓴 책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6장부터 계시되는 내용이며 요한계시록의 중심 부분이기도 하다. 안팎에 썼다는 말은 그 내용이 많고 자세함을 보인다. 일곱 인으로 봉하였다는 것은 은밀하게 감추어진 내용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 그 인봉이 하나씩 떼어질 것이고 인류 역사의 종말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씩 계시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밀한 종말 계획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의인의 영들 중에도 없고, 땅 위에 살아 있는 자들이나 땅 아래 죽은 자들 중에도 없었다. 그래서 요한은 크게 울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안타깝고 답답하여 울었을 것이다.

그때 장로들 중의 한 사람이 요한에게 울지 말라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일을 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가르쳐 주었다. 유대 지파의 사자(獅子)요 다윗의 뿌리라는 표현은 창세기 49:9에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는 예언과 이사야 11:1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날 것이라”는 예언 등에 근거했다고 본다. ‘이기셨다’는 말은 그가 마귀의 시험과 죄와 세상의 악을 이기셨다는 뜻일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마귀의 시험과 죄와 세상의 악을 이기셨고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다. 이제 그는 인류 역사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되셨다.

[6-7절]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요한이 본 어린양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나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상징한다. 그는 죽음으로 하나님의 택자들을 위한 속죄를 완성하셨고 부활로 그 사실을 확증하셨다. 어린양에게 있는 일곱 뿔은 그의 신적 능력을 보이고 일곱 눈은 그의 신적 통찰력과 지식을 보인다. 그 일곱 눈은 온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일곱 영 곧 성령이시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어린양은 종말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기록한 책을 취하였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이며, 어린양은 구속 사역을 완성하심으로 인류 역사의 미래와 종말 사건들, 심판과 최종 영광까지를 계시하실 자격자가 되셨다. 미래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어린양에 의해 하나씩 계시될 것이다(계 6:1).

[8-10절]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24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엎드렸고 장로들은]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6)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우리를](전통본문)7)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왕들과]8)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

어린양이 책을 취하실 때에 네 생물과 24장로들은 그에게 엎드려 경배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천사들과 성도들에게 경배를 받으실 자이시다. 24장로들은 각각 거문고와 향 대접을 가지고 있었다. 또 성도의 기도들은 향에 비교되었다. 성도들의 찬양과 감사, 죄의 고백, 및 소원의 간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과 같다.

새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을 노래하는 노래를 가리킨다. 어린양 예수께서는 친히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셔서 세계 각 나라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속(救贖)하셨다. 그러므로 참된 찬송은 속죄의 찬송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친히 자기 피로 우리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찬송해야 한다.

또 주께서는 그의 속죄사역으로 우리를 왕들과 제사장들로 삼으셨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일 뿐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는 왕들이 되었다. 우리는 장차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할 자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천국에서 영원히 왕노릇할 자들이다(계 20:6; 22:5). 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들이 되었다.

[11-12절]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요한은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수많은 천사들의 찬양 소리를 들었다. 그 천사들의 수는 천천 만만으로 표현되리만큼 수없이 많았다. 그들은 어린양에게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돌렸다. 어린양의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은 하나님의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은 지극히 합당하다. 특히 신성(神性)을 가지신 그가 죽임을 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택한 자들의 죄의 책임과 형벌을 대신하기 위함이셨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에게 죄씻음의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성취되었음을 인해, 하늘의 천사들도 어린양에게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이다. 그 찬송은 합당한 찬송이다.

[13-14절]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천지의 만물들, 즉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사람들이나 기타 모든 만물들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찬송과 영광을 돌렸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올리는 만물의 영광스러운 합창이었다. 여기에 한번 더 성자(聖子) 예수께서 성부(聖父)와 동등한 영광과 능력을 가지신다는 삼위일체 교리가 증거된다. 만물들의 찬송에 대하여 네 생물과 24장로들은 아멘으로 화답하며 경배하였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심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 역사의 미래가 계시되었음을 알자. 역사는 정치가들이 만들어 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배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의 뜻이 역사 속에 다 이루어진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이다. 그의 계획 속에 그의 아들 예수께서 인류의 구주로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택한 백성의 속죄를 다 이루셨다. 그러므로 그는 또한 인류 역사의 미래에 대해 증거해 주실 유일한 주님이 되셨다.

둘째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속(救贖)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모든 천사들과 모든 피조물들의 경배와 찬송을 받으실 주님이시다. 본장의 찬송 가사들같이, 우리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감사하는 찬송을 항상 주께 올리자.


6장: 일곱 인

1-8절, 첫째 인부터 넷째 인까지

[1-2절] 내가 보매 어린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소리같이 말하되 오라[와서 보라]9) 하기로 내가 이에 보니 흰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을 취하신 어린양께서 그 인을 하나씩 떼실 때마다 장래 일들이 예언된다. 첫째 인을 떼실 때, 요한은 흰말과 그 탄 자를 보았다. 요한계시록에서 흰색은 좋은 뜻으로 사용된다. 흰색은 성결과 의를 나타낸다. 인자 같은 이의 머리털은 양털같이, 눈같이 희었다(1:14). 신실한 성도들은 흰 돌을 받았고(2:17) 흰옷을 입었다(3:4). 또 재림의 주님은 흰말을 타고 오실 것이며(19:11) 그를 따르는 하늘 군대들도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흰말을 타고 그를 따를 것이다(19:14). 또 하나님의 최종 심판 보좌도 흰 보좌일 것이다(20:11). 그러므로 본절의 흰말과 그 탄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그레다너스, 박윤선) 혹은 그의 거룩한 심판 사역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가 면류관을 받고 이기고 또 이기려 한 것은 그의 사역이 승리적임을 말한다.

[3-4절]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와서 보라] 하더니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붉은 말과 그 탄 자는 전쟁을 상징함이 분명하다. 그가 ‘큰 칼’을 받은 것은 전쟁으로 인한 큰 살육을 뜻할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볼 수 있는 대량 살상 무기를 예언한 것일지도 모른다. 말세의 한 징조는 국가 간의 갈등과 전쟁들이다. 주의 재림 전에 큰 전쟁들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4: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요한계시록에는 본절 외에도 유브라데 강 부근에서 2억의 군사가 동원될 전쟁과, 유브라데 강이 말라 동방의 왕들이 들어옴으로 세계적 연합군이 형성되어 아마겟돈(므깃도 언덕)에서 마지막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 예언되어 있다(계 9:13-16; 16:12-16).

역사상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크고 작은 전쟁들이 있었으나, 그 모든 전쟁들 중에서도 20세기에 치룬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처참한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죽은 군인들만 거의 1,000만명에 이르렀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군인들만 약 1,700만명이었다고 한다. 민간인 사망자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는 서방세계와 공산진영으로 서로 대립되었고 아직까지 그 갈등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이 세계 공산화의 꿈을 버리기 전까지는 그러할 것이다. 또한, 중동에서는 이스라엘과 아랍 간의 종교적 갈등이 있다. 만일 제3차 세계대전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핵무기와 화학-생물학무기들을 동원한 인류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매우 처참한 전쟁이 될 것이다.

[5-6절]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전통사본은 생략함)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검은 말과 그 탄 자는 기근을 상징함이 분명하다. 손에 저울을 가진 것은 식량의 배급을 상징하며 그것은 식량이 부족할 것을 뜻한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고, 한 되는 보통 사람의 1일분 식량이라고 한다. 하루 품삯으로 한 되의 밀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식량값이 매우 비싼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식량의 큰 부족을 나타낸다. 보리는 밀보다 품질이 낮은 식량이다. 그러나 감람유와 포도주를 해치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서민들의 기본적 식용품, 의약품, 음료수가 허용됨을 보이는 것 같다.

주의 재림 전에는 기근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4:7, “처처에 기근들과.” 기근은 옛날부터 있어왔지만 근래에 세계적으로 더욱 심해진 것 같다. 월드북 백과사전10)에 의하면, 1870년대에 남부 인도에서 약 5백만명이 기근으로 죽었고, 중국에서는 9백만명 이상이 죽었다. 1929년과 30년에는 중국의 황허강의 홍수로 인한 기근으로 약 2백만명이 죽었다. 1943년 동부 인도 벵갈에 대기근이 있었다. 제2차 대전 후 150만명 이상이 기근으로 죽었다. 1960년대 이후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남부 사헬 지역과 남부 아프리카, 특히 이디오피아 등에 심각하여 수백만명이 죽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2013년 현재 세계에 약 8억 7천만명이 기아 상태에 있다고 보고했다.11)

[7-8절]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와서 보라] 하기로 (내가 보매)(전통사본에는 생략됨)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청황색 말과 그 탄 자는 사망을 상징한다. 그의 뒤를 따르는 음부는 무덤을 가리킨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4분의 1은 전쟁과 기근과 사망 혹은 무서운 질병과 땅의 짐승들로 인해 죽을 것이다. ‘사망’이라는 원어(다나토스)는 ‘사망’이라는 뜻 외에 ‘치명적 질병’이라는 뜻도 있다(BDAG). 주의 재림 전에 많은 질병들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4:7, “기근들과 온역들(전통본문)과.” 역사상 많은 질병들이 있었지만, 의학이 발달된 오늘날도 병원들은 각종 환자들로 붐빈다. 고혈압과 당뇨와 암은 오늘날 무서운 질병들이다. 특별히 동성애적 음란에 관련되어 있다고 보이는 에이즈(후천성 면역결핍증)의 확산은 매우 위협적이다. 에이즈는 1981년 처음 보고된 이후 2001년까지 약 20년간 그로 인한 전 세계의 사망자 총수는 약 2,100만명이었고, 매년 거의 200만명씩 죽는다. 2011년 현재, 전 세계에 에이즈(HIV) 감염자수는 약 3,400만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12) 이것은 시대적 재앙이다. 이와 같이, 전쟁과 기근과 질병 등의 사실들은 오늘 시대가 세상의 마지막 시대라는 징조라고 본다.

1절부터 8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인부터 넷째 인까지는 주의 재림 직전의 대환난 시대의 여러 일들을 계시한다고 본다. 그것은 시대 순서라기보다 동시적이라고 생각된다. 주의 재림 직전에 전쟁과 기근과 사망 혹은 질병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자신의 재림 직전의 징조들로서 제시하신 내용들과 일치한다. 물론 이러한 징조들은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성도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어느 정도 나타날 수도 있다고 보이나, 교회 시대 말기, 즉 주의 재림 직전에 절정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치신 바이었다고 본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전쟁과 기근과 질병들과 사망의 대환난의 시대가 올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가 그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환난에 대비하는 믿음을 준비하는 일이다.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께서 오늘날 교회들과 우리에게 순교의 상황을 주시고 순교를 요구하신다 할지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참된 믿음과 충성된 마음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9-17절, 다섯째 인과 여섯째 인

[9-11절]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죽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伸寃)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어린양께서 다섯째 인을 떼실 때 사도 요한은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탄원하는 모습을 보았다.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었고 죽으면 몸과 영이 분리된다. 몸은 땅에 묻히지만, 영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간다(전 12:7). 순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자들이다. 즉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순교한 자들이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였더라면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사랑하셔서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순히 몸만 죽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마 10:28).

이와 같이 신앙의 핍박과 순교는 종말 징조이며 대환난 시대의 한 특징이다. 물론, 경건한 자는 항상 핍박을 각오해야 하였다.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했다(딤후 3:12). 그러나 주의 재림 직전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주께서는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다”고 말씀하셨다(마 24:9-10).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3장에서 한 짐승에 대해 “[저가]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고 증거했는데(계 13:7) 그것은 적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고 보며, 또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는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라고 말했다(계 13:15).

순교자들의 영혼들은 제단 아래서 하나님께 공의의 심판을 탄원하였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악을 보응하신다는 도덕 질서를 위하여 또 기독교가 참된 진리임을 변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이며 또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순교자들의 탄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그는 그 핍박자들에게 보응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순교자들의 영혼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셨다. 흰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은 성결과 의를 상징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른 동료 종들과 형제들이 순교하기까지 잠시 동안 쉬라고 말씀하셨다. 순교자들의 영혼들에게는 비록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간청하는 기도가 있었지만 또한 참된 안식이 있을 것이다. ‘잠시 동안’이라는 말은 인간의 시간표의 수천년도 하나님 앞에서는 잠시에 불과함을 보인다(벧후 3:8).

다섯째 인의 환상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순교자들이 더 있을 것을 보인다. 교회 역사상 초대교회로부터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다. 로마 시대와 중세 시대, 일제시대와 공산치하에서 학살당한 자들의 수 속에는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포함되었다. 특히 중세 1,200년 동안 5,000만명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역사상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고 마지막 심판 때 전까지 순교의 죽음은 계속될 것이다.

[12-14절]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매.

어린양께서 여섯째 인을 떼실 때, 사도 요한은 큰 지진과 천체의 큰 변동을 보았다. 해는 총담같이 검어졌다. 총담은 털실로 짠 거무스름한 부대자루를 가리킨다. 달은 피같이 되었다. 별들은 무화과나무가 큰 바람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졌다.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갔고 각 산과 섬은 제자리에서 옮겨졌다. 이러한 묘사는 극심한 천재지변을 나타낸다. 큰 지진들과 천재지변들은 종말의 한 징조라는 사실이 계시된 것이다.

천재지변들은 세상의 종말과 주의 재림 직전의 한 징조이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주께서는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4:29). 또 요한계시록 8:12에도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고 예언되어 있다.

특히 큰 지진들은 세상의 종말과 주의 재림 직전의 한 징조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4장에서 지진들이 세상 종말과 자신의 재림 직전의 한 징조일 것을 말씀하셨다(마 24:7). 또 요한계시록 11:13은 두 증인의 승천 후 큰 지진이 나서 성 10분의 1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7천명이라고 증거하였고 요한계시록 16:17-20은 일곱째 대접을 쏟을 때 큰 지진이 있어 큰 성 바벨론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또 큰 우박이 있을 것이라고 증거한다. 큰 지진의 힘은 약 1억 8천만 톤의 티엔티(TNT) 폭탄과 같으며, 그것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용되었던 원자폭탄의 약 만 배의 위력이라고 한다.

월드북 사전에 의하면, 역사상 대지진들이 간혹 있었지만, 20세기에 들어와 더욱 빈번해졌다. 20세기에 5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지진들은 24개 이상이 되며, 그 중에 2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것은 14개나 된다. 5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큰 지진들만 열거해본다면, 1908년 이태리 멧시나 7만 5천명, 1920년 중국 중앙부 간서 20만명, 1923년 일본 도오꾜-요코하마 약 14만 3천명, 1932년 중국 중앙부 7만명, 1935년 인도 쿠에타(오늘날의 파키스탄) 6만명, 1970년 페루 침보테 약 6만 8천명, 1976년 중국 북동부 헤베이 24만명 등이다.

[15-17절]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그의](전통본문)13)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은 평상시에는 담대하고 때때로 교만하기까지 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 대환난의 날에 두려워 떨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를 피할 곳을 찾기에 급급할 것이다. 이사야는 예언하기를, 하나님의 심판 날에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고 하였다(사 2:19). 대환난은 어린양의 진노의 큰 날이다. 이때에 불경건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을 것이다.


본문은 다섯째 인과 여섯째 인을 떼실 때 나타난 징조를 증거한다. 다섯째 인과 여섯째 인은 핍박과 순교와, 큰 지진의 징조를 나타낸다. 이 세상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참된 신앙에 대한 핍박이 있고 순교도 있을 것이며 또 큰 지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징조들을 볼 때 성경의 예언들을 기억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고난을 각오하며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일들을 다 이루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