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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삼서강해
김효성 목사
2019년 12월 4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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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적 견해를 버릴 타당한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서론
요한삼서의 저자도 사도 요한이다. 본 서신은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 가운데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쓴 개인적 성격의 편지로서 원문 신약성경 중 가장 짧은 책이다. 본 서신의 저작 연대도 주후 85-90년경으로 추정된다.
요한이서의 특징적 주제와 같이, 요한삼서의 특징적 주제도 ‘진리 안에서 행함’이다. 3절,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또 본서는 사도 요한을 악하게 비난하고 복음전도자들을 영접하지 않고 영접하는 자들까지 핍박했던 교만하고 악한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을 언급하며 그런 행위를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며, 또 여러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던 데메드리오에 대해서도 증거한다.
진리 안에서 행함
[1-2절]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내가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장로라는 말은 사도 요한이 나이도 많음을 보이는 것 같다. 또 그는 가이오에 대해 ‘사랑하는 가이오’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사랑하는 자여’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가이오에 대한 그의 사랑을 나타낸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며 성도들은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질투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전 13:4-5).
사도 요한은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한다. 영혼이 잘된다는 말은 우리가 믿음으로 바로 사는 것을 말한다. 성도에게는 믿음이 견고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죄와 더러움을 버리고 천국을 소망하며 기쁨과 평안 가운데 사는 것보다 더 복된 삶이 없다.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인의 삶이며(창 5:22; 6:9) 신명기 28장에 말씀한 순종의 삶이다.
범사가 잘되는 것은 인생의 삶의 모든 부분, 즉 가정과 자녀들의 문제, 학업, 취업, 결혼의 문제, 직장과 사업의 문제 등을 포함한다.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범죄치 않으려고 애썼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범사에 형통한 삶을 주셨다(창 39:23).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가 얻을 자녀의 복, 물질의 복, 건강의 복에 대해 말한다(신 28:1-6). 시편 1편도 악을 버리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복된 자는 그의 하는 모든 일에 형통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은 또 가이오가 강건하기를 기원하였다. 사람의 건강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다. 신명기 28장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을 때 여러 가지 질병이 있을 것을 경고하나,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건강할 것이다. 잠언 3:7-8,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건강]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모든 질병이 다 죄의 징벌은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격 훈련을 위해 주시는 질병도 있으나(욥기; 고후 12:7), 건강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분명하다.
[3-4절]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사도 요한에게 온 형제들은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통적 진리, 곧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 진리를 주셨다. 우리는 이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진리 안에서의 삶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이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순종하는 삶이다. 만일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거룩하고 선한 행위가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일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믿는 자라면, 우리는 교만과 미움과 다툼과 음란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을 듣고 심히 기뻐하였다. 그는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다고 말한다. 어떤 성도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사실은 확실히 목사들에게 큰 기쁨이요 성도들에게도 큰 기쁨이다.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의 진리를 읽고 듣고 배우며 그 진리를 믿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의 영혼이 잘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보다 더 귀하고 기쁜 일은 없다.
[5-8절]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된 자들[형제들과 나그네들](전통사본)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저희가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거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저희를 전송하면 가하리로다. 이는 저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이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형제들과 나그네들’에게 선하고 진실하게 행한 일을 칭찬하며 격려하였다. ‘나그네들’은 아마 순회전도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가이오의 사랑의 행위에 대하여 교회 앞에서 증거하였다. 가이오의 행위는 진실한 행위이었고 가식이나 위선이 아니었다. 그의 선행은 모든 성도들이 본받을 만한 일이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그들을 전송할 때에도 ‘하나님께 합당하게’ 전송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합당하게’라는 말은 우리가 다른 성도나 주의 종들을 대할 때 그들의 외모를 따라 사람에게 대하듯 하지 말고 그들의 중심을 보고 하나님께 대하듯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골로새서 3:23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교훈하였다.
가이오가 주의 종들을 하나님께 합당한 태도로 영접하고 전송하는 것이 옳은 까닭은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해 대가 없이 일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은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전도자들은 물질적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일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삯군이 아니다. 말씀 사역은 장사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말씀하셨다(마 10:8). 물론 그는 또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부언하기도 하셨다(마 10:10).
성도들이 전도자들과 주의 종들을 영접하는 것은 마땅하다. 주께서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0:40). 또 성도들이 전도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한 것은 진리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직접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지 못할지라도 기도와 헌금으로 또 기회 있을 때 전도자들을 하나님께 합당한 태도와 예절로써 영접하고 또 전송함으로써 진리를 위한 수고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9-10절]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부당하게 비난하고도] 유위부족(猶爲不足)하여[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쫓는도다.
사도 요한은 디오드레베의 악함에 대해 몇 가지로 지적하고 증거한다. 첫째로, 디오드레베는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사람 속에는 교만과 명예심이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그들보다 높아지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이것은 사람의 죄성의 한 본질적 요소이다. 마귀는 교만함으로 타락했다. 그러나 주께서는 교만과 명예심을 미워하시고 정죄하신다. 교만한 자는 멸망의 문 앞에 서 있다(잠 16:18; 18:12). 만일 회개치 않으면 그는 멸망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며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높이신다(마 23:11-12).
둘째로, 디오드레베는 악한 말로 사도 요한과 그의 동료들을 부당하게 비난하였다. 우리는 다른 성도에 대해 정당한 비난도 조심해야 한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마 7:1). 하물며 부당한 비난이야 더 합당치 않다. 그것도, 참된 목사들에 대한 부당한 비난은 매우 악한 일이다. 예수께서는 선한 자는 그 쌓은 선에서 선한 말을 하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한 말을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2:35). 잠언 12:18은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는 말을 매우 조심해야 한다.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온전한 자라고 말하였다(약 3:2).
셋째로, 디오드레베는 요한과 그의 형제들 즉 주의 종들을 영접하지 않았고 심지어 영접하려 하는 자들을 금하고 교회에서 내어쫓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주님을 배척하는 악한 행동이었다. 주께서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0:40).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교회 안에 다른 양들을 밀뜨리는 염소들에 대해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로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다(겔 34:21).
[11절]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사람들은 선한 일을 보고 본받기도 하지만, 악한 일을 보고 본받기도 한다. 고린도전서 15:33,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성도는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한다. 악과 선의 근원이 다르듯이, 악을 행하는 자와 선을 행하는 자의 근원이 다르다.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다. 선행은 성도가 중생한 자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자이다. 사람이 계속 죄 가운데 거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12절]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거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을 아느니라.
사도 요한은 데메드리오에 대해서도 증거한다. 데메드리오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증거를 받았다. 많은 사람이 그의 믿음과 선함에 대해 증거했다. 데메드리오는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참된 믿음과 행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우리도 그에 대해 증거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데메드리오는 진실한 믿음과 선행이 있는 성도임이 여러 방면으로 증거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기쁘고 복된 증거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우리 자신이 다 이런 복된 증거를 가지기를 원한다.
[13-15절]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면대하여 말하리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각 친구 명하에 문안하라.
사도 요한은 가이오와 속히 만나 얼굴을 맞대고 말하기를 원하였다. 성도의 교제는 항상 사모할 만한 것이다. 사도 요한은 또 평안을 기원한다. 근심과 불안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성도들에게 큰 복이다. 그는 또 여러 친구들의 문안을 언급하며 가이오도 그들에게 일일이 그들의 이름으로 문안하라고 요청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열고 생각을 낮추고 참된 사랑을 가지고 서로 교제하고 문안하고 서로에게 평안을 기원해야 할 것이다.
본 서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몸도 건강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며 우리의 하는 모든 일들이 잘되고 몸도 건강하기를 원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4:8에서 경건에는 현세와 내세에 약속이 있다고 말했다.
둘째로, 우리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복음 진리를 믿어 구원받고 그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 진리에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도 들어 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하며 서로 사랑할 때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디오드레베의 악행을 본받지 말고 가이오와 데메드리오의 선행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주의 종들을 하나님 대하듯 대함으로 복음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 전도는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영접하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며 후원하고 그들을 전송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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