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제강점기의 끝자락인 1943년에 태어났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비켜난 시골에서 태어난 덕분에 어린 시절은 넉넉하고 따뜻하게 보냈다. 내 고향 충남 보령군 웅천은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어릴 적 살던 접동골은 대대로 황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지만, 타성바지인 우리 집이 그 동네에서 가장 잘 살았다. 머슴을 열두 명이나 둘 정도로 부유했다.
독실한 신자였던 부모님은 집안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교회에 다니셨다. 읍내에 하나밖에 없는 교회에 가기 위해 수요일 저녁이면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횃불을 들고 밤마실 가듯 교회에 가셨다. 어릴 적 추억 중 절반 이상은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모태신앙에 유아세례를 받은 나는 교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교회가 놀이터이자 학교였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계모였는데, 아버지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많은 핍박을 하셨다. 그래도 아버지는 고개 한 번 들지 않으셨다. 때리면 맞으셨고 욕하면 들으셨다. 새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는 가족 앞에서나 남들 앞에서 할머니의 권위를 세워주셨다.
바람 잘 날 없었던 우리 집은 아버지가 독립하고 나서야 편안해졌다. 충남 광천에서 표백공장을 하시던 아버지는 홍수로 기계를 다 떠내려 보내고, 군산으로 옮겨가서 메리야스 공장을 차리셨다. 우리 가족과 삼촌을 데리고 군산으로 분가하셨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방학식을 마치면 곧장 시골로 가곤 했는데, 그때는 마침 장이 서는 날이라 집에 아무도 없었다. 방에 있자니 답답해서 책 한 권을 들고 대추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누웠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구성진 노랫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장에 가서 술 한 잔 걸치신 할머니가 동네 어르신들을 모시고 집에 오신 것이다. 어르신들은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노랫가락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그러다 한 분이 내 발에 걸려 넘어지셨다.
그제야 나를 발견한 할머니는 손주가 왔다며 반가워하셨다. 나는 어르신들 사이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기가 민망해 계속 자는 척을 했다. 그러다 한 분이 나를 보면서 혀를 쯧쯧 차시더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하셨다. “에고,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이렇게 멀끔하게 자란 것도 못 보고…. 애 엄마가 애 몇 살 때 죽었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자는 줄 아셨던 할머니는 죽은 엄마에 대해서 줄줄이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유난히 어머니를 따랐던 만큼 배신감도 컸다. 친엄마가 아닌 줄도 모르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엄마 젖가슴을 만지고 잤으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장요나 선교사 약력=연세대 상경대학 졸업. 파월 십자성 부대 복무.
한영기업 대표이사, 벽산그룹 기획실장 역임.
감리교신학대 신대원 졸업 후 1990년 1월부터 베트남 선교사로 사역.
베트남에 교회 312개, 선교병원 16개, 초등학교 2개 등 건축.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