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믿음간증歷史

[역경의 열매] 베트남의 '언더우드' 장요나 선교사 (1)-(10)

영국신사77 2020. 3. 31. 00:05

[역경의 열매] 장요나 (1) 고 2때 자는 척 하다 엄마가 계모인 것 알고 충격

방학에 시골집 가니 할머니와 동네 어른 자는 줄 알고 죽은 친엄마 얘기 꺼내

입력 : 2020-03-02 00:06
31년째 베트남에서 사역하는 장요나 선교사가 최근 성경책을 들고 베트남 국기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나는 일제강점기의 끝자락인 1943년에 태어났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비켜난 시골에서 태어난 덕분에 어린 시절은 넉넉하고 따뜻하게 보냈다. 내 고향 충남 보령군 웅천은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어릴 적 살던 접동골은 대대로 황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지만, 타성바지인 우리 집이 그 동네에서 가장 잘 살았다. 머슴을 열두 명이나 둘 정도로 부유했다.

독실한 신자였던 부모님은 집안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교회에 다니셨다. 읍내에 하나밖에 없는 교회에 가기 위해 수요일 저녁이면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횃불을 들고 밤마실 가듯 교회에 가셨다. 어릴 적 추억 중 절반 이상은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모태신앙에 유아세례를 받은 나는 교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교회가 놀이터이자 학교였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계모였는데, 아버지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많은 핍박을 하셨다. 그래도 아버지는 고개 한 번 들지 않으셨다. 때리면 맞으셨고 욕하면 들으셨다. 새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는 가족 앞에서나 남들 앞에서 할머니의 권위를 세워주셨다.

바람 잘 날 없었던 우리 집은 아버지가 독립하고 나서야 편안해졌다. 충남 광천에서 표백공장을 하시던 아버지는 홍수로 기계를 다 떠내려 보내고, 군산으로 옮겨가서 메리야스 공장을 차리셨다. 우리 가족과 삼촌을 데리고 군산으로 분가하셨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방학식을 마치면 곧장 시골로 가곤 했는데, 그때는 마침 장이 서는 날이라 집에 아무도 없었다. 방에 있자니 답답해서 책 한 권을 들고 대추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누웠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구성진 노랫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장에 가서 술 한 잔 걸치신 할머니가 동네 어르신들을 모시고 집에 오신 것이다. 어르신들은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노랫가락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그러다 한 분이 내 발에 걸려 넘어지셨다.

그제야 나를 발견한 할머니는 손주가 왔다며 반가워하셨다. 나는 어르신들 사이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기가 민망해 계속 자는 척을 했다. 그러다 한 분이 나를 보면서 혀를 쯧쯧 차시더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하셨다. “에고,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이렇게 멀끔하게 자란 것도 못 보고…. 애 엄마가 애 몇 살 때 죽었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자는 줄 아셨던 할머니는 죽은 엄마에 대해서 줄줄이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유난히 어머니를 따랐던 만큼 배신감도 컸다. 친엄마가 아닌 줄도 모르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엄마 젖가슴을 만지고 잤으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할 것인가
? 

장요나 선교사 약력=연세대 상경대학 졸업. 파월 십자성 부대 복무. 
한영기업 대표이사, 벽산그룹 기획실장 역임. 
감리교신학대 신대원 졸업 후 1990년 1월부터 베트남 선교사로 사역. 
베트남에 교회 312개, 선교병원 16개, 초등학교 2개 등 건축.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요나 (2) 한·일회담 반대시위서 학교 대표로 혈서 써

고2때 검정고시로 연세대 상대 진학…

정부의 굴욕 수교에 의협심 발동해 시위 주도하다 붙잡혀 경찰서 연행

입력 : 2020-03-03 00:07
장요나 선교사(오른쪽)가 1962년 여름 대학교 친구들과 찍은 사진.

그날 밤 할머니는 내게 그동안 숨겨왔던 이야기를 다 해주셨다. 나는 장손도 아니었다. 위로 형이 두 명 있었는데, 모두 콜레라로 잃었다고 했다. 나도 약골로 태어나 얼마 못 살 것으로 생각하고 아랫목에 누여 놨는데 신통방통하게 살아났다. 친엄마는 나를 안아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하셨다.

나는 집을 나오기로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충실하시라 하고, 나는 아버지 도움을 받지 않고 돌아가신 친엄마의 아들로만 살기로 했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선생님 댁에 남았다. 아버지의 암묵적 동의로 나를 맡아주신 선생님은 자식처럼 살뜰하게 돌봐주셨다. 덕분에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인 그해에 검정고시로 연세대 상대에 진학했다. 남들보다 1년 먼저 대학에 간 것이다.

어렵사리 대학에 들어갔지만, 대학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964년도는 한·일협상 반대 운동으로 온 나라가 들끓었다. 63년 대선에서 승리한 박정희 대통령은 출범과 동시에 한·일 수교를 준비했다. 여론과 상반된 결정이었다. 모든 야당과 사회, 종교, 문화단체 등 저명인사들이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서울대 문리대에서는 한·일회담 성토식을 하고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그것이 도화선이 돼 서울의 각 대학 학생들도 거리에 나와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나도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피가 뜨거웠고 가슴은 정의감으로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나의 의협심을 부추긴 또 다른 원동력은 여학생들의 응원이었다. 연세대 상대를 대표해 혈서를 썼을 때는 정말 으쓱했다. 손가락 끝을 잘라 ‘한·일회담 반대’를 쓰고 돌아서자 여학생들이 일제히 한숨 섞인 탄성을 내지르며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한 여학생이 뛰어나와 내 상처에 크림을 발라주고 손수건으로 손가락을 묶어 줬다.

그날 이후 대학 생활의 낭만은 끝났다. 6·3 시위 직후 경찰에 연행돼 졸업도 9월에 했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 주동자란 이유로 군대도 남들보다 2년 늦게 보충역으로 가야 했다. 군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엉뚱하게 보충역으로 빠진 것이다. 그것도 내 전공이나 경험과 전혀 무관한 위생병으로 말이다.

내가 근무한 곳은 청주 23육군병원이었다. 병원 업무가 몸에 익어갈 무렵 내 인생의 행로가 크게 휘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병원장의 호출을 받아 가보니 병원장과 간호부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두 사람은 내게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었다. 크리스천이라고 했더니 내게 이상한 종교에 빠진 간호장교가 병원에 있는데, 기독교 이단 계통 같다고 했다. 그녀가 이단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책임지고 설득하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니 난감했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요나 (3) 이단에 빠진 간호장교 구해줬더니 결혼하자며…

청력 잃고 처지 비관하다 이단 늪으로… 끈질긴 설득과 기도에 서서히 마음 돌려

입력 : 2020-03-04 00:05
장요나 선교사가 1968년 7월 베트남 나트랑에서 십자성 부대 감찰부에 근무할 때 찍은 사진.

그 간호장교라면 나도 보고 들은 바가 있었다. 옷차림은 수수한데 스타킹은 찢어진 걸 신고 다니고, 옷도 사 입지 않고 헌 옷만 고집했다. 병원 피엑스에서 박카스 병을 줍고 다녀서 한눈에 봐도 이상해 보였다. 그녀는 중위, 나는 사병이었다. 아무리 명령에 살고 죽는 군대라지만 상사를 이단에서 빼 오라는 명령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간호장교를 만났다. 이단 종교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려는데, 간호장교는 내 말을 막으면서 자신의 종교에 대해 비판하려거든 한 번이라도 자신이 다니는 공동체에 오라고 말했다.

그곳에 가보니 뭐가 문제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성경책은 같았지만 해석이 달랐다. 찬송가도 따로 있었다. 무엇보다 목사 자신이 재림 예수라 하면서 자기가 세상을 구원할 자라고 했다. 이보다 더 명확한 이단의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 

나는 간호장교에게 그곳의 교리가 잘못됐다고 이야기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오히려 나를 사탄이라 몰아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간호장교의 속사정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간호장교가 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국방부 장학금으로 간호대학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누구보다 똑똑하고 사리 분별이 정확했다고 한다.

그런데 국방부 장학생으로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간호장교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대구 군의학교에서 사격훈련을 받다가 오른쪽 귀를 다쳤고 청력을 잃었다. 청각 장애인이 된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소홀해졌다. 그러면서 이단에 빠진 것 같았다.

나는 화를 내며 피하는 간호장교를 따라다니며 진심으로 설득했다. 점심시간에는 식판을 앞에 두고 그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고 냉대와 수모를 감수했다. 그러자 간호장교도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때 간호장교와 같은 이단에 빠진 A대학 여대생이 농약을 먹고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단을 반대하는 부모에게 자신의 종교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슨 독을 마셔도 죽지 않는다’는 말씀을 잘못 해석한 교주의 말을 믿고 농약을 먹었다 참사를 당한 것이다. 그 신문기사를 보여주자 간호장교도 마음을 돌려 이단에서 스스로 빠져나왔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간호장교가 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가 만났으니 한 몸 되어 잘살아 보자고 주말마다 찾아와 졸랐다. 거절해도 소용없고 피해도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더 괴로운 것은 병원 사람들조차 나와 간호장교가 사귄다고 믿는 것이었다. 둘이 설전을 벌이는 것을 사랑싸움으로 오해한 것이다. 부인하고 해명해도 다들 농담으로 받아들이며 나와 간호장교 사이를 공식적인 관계로 여겼다. 잘못하다가는 뜬소문에 밀려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할 판이었다. 견디다 못해 나는 베트남 파병을 자원했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요나 (4) 간호장교 피해 파병 간 베트남에서…

전쟁 공포 속 라디오듣다 파병 동생 위해 노래 부른 여인에 반해 

수소문 끝 동생 찾고 편지로 사랑 고백

입력 : 2020-03-05 00:01
장요나 선교사(가운데)가 1969년 월남전쟁 당시 베트남 나트랑의 십자성부대 감찰부에서 근무할 때 동료들과 찍은 사진.

내가 베트남에 간 1969년에는 우리나라가 세계 최빈국이었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하고 풍성했다. 피가 튀는 전쟁터일 것으로 예상했는데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푸른 바다와 눈부신 백사장 곁으로 우뚝하게 키가 큰 야자수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배치받은 나트랑이 한국군 야전사령부와 십자성부대의 주둔지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여유가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십자성부대에서 감찰부로 근무하며 감찰검열을 위해 베트남 구석구석을 다니며 전쟁의 참상을 볼 수 있었다. 곳곳에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밀림은 파괴됐고 삶은 궁핍했다. 하지만 삶의 터전이 완전히 망가지진 않았다. 베트남 사람들은 특유의 생명력과 근면성으로 자신들의 일상을 지키고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데는 교회의 역할이 컸다.

1911년 CMA(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 소속 선교사인 
제프레이, 호슬러 그리고 허글러스가 다낭에 사무실을 열고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성경 보급, 문서선교, 사역자 훈련 등을 통해 
교회의 부흥을 이끌어 온 북베트남은 
공산화되기 전까지 기독교 신자가 10만명 가까이 됐다. 
나트랑에는 성경신학원도 있었다.

전쟁 중 믿음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데 베트남 성도들은 자신의 믿음을 지키며 복음을 전했다. 
언제 습격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교회를 찾았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는 특별하고도 은혜로웠다. 
겉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불안과 공포를 안고 지내는 파월 장병들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됐던 것은 전쟁의 한복판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내일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베트남 사람들의 평안한 얼굴이었다.

베트남전 참전은 내 인생에 전화위복을 가져왔다. 
평생의 반려자인 아내를 베트남에서 만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에 있는 아내를 라디오를 통해 만났다.

당시 라디오는 내 유일한 벗이었고 고국의 소식을 전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베트남에는 부대마다 주월한국국군방송국이 있었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송해씨가 진행하는 ‘파월 장병의 시간’이었다. 
아내가 그 방송에 출연해 
베트남에서 고생하는 동생과 장병들을 위해 에델바이스를 불렀다.

노래가 시작됨과 동시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목소리가 얼마나 곱고 청아하던지 달콤하고 시원한 물을 들이켠 것 같았다. 마음이 한번 기우니 오매불망 ‘에델바이스의 그녀’ 생각뿐이었다. 결국 베트남에 파병을 와있던 그녀의 동생을 찾아가 사진과 집 주소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사진을 보자 더 망설일 게 없었다. 당장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어떻게든 마음을 얻고 싶어 당시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미제 껌을 동봉해 보냈다. 며칠 뒤 도착한 그녀의 편지에서 나에 대한 호감이 느껴졌다. 그때부터 나의 군 생활은 편지를 쓰고 기다리는 일로 채워졌다. 그리고 제대한 뒤에 바로 결혼했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요나 (5) 사업 정리하고 들어간 회사… 실력 인정 받아 파격승진

사업 승승장구하다 사업장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 돼 정리… 

경력직 입사해 밤새워 일하며 실적 쌓아

입력 : 2020-03-06 00:01/수정 : 2020-03-13 15:49
장요나 선교사(왼쪽)가 1971년 2월 한영기업 대표이사 시절 직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아내와의 신혼은 깨가 쏟아지거나 알콩달콩하진 않았다. 대신 안온하고 평탄했다. 우리 집 분위기가 180도로 달라진 건 아이들이 태어난 후부터였다. 결혼하고 곧 첫아들이 태어나고 10개월 후에 둘째 아들이 연년생으로 태어났다. 첫아들을 품에 안았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둘째 아들이 태어나자 더 바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가족을 갈망했는데 내게 진짜 가족이 생겼으니 말이다.

결혼과 함께 나는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을 하고 싶어 항상 사업 아이템을 구상했는데 마침 베트남에서 기막힌 아이템을 발견했다. 달걀 보관 용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달걀을 지푸라기에 엮어서 팔았다. 그걸 들고 오다 보면 아무리 조심해도 한두 개는 깨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베트남에는 달걀 보관 용기가 따로 있었다. 그걸 보자 한국에서 직접 만들어 팔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달걀 보관 용기를 붙들고 씨름했다. 다양한 재질로 판을 짜고, 모양새를 만들었다. 그리고 여러 달 만에 달걀 보관 용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특허도 받았다. 다른 아이템도 눈에 들어왔다. 자연석을 팔면 돈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허가를 받아 강원도 철원에서 자연석과 정원석을 채취해 일본에 수출하는 무역을 했다. 역시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겼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7년 9월 자연보호운동을 천명했는데 철원도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사업을 이어갈 수 없게 됐다. 결국 사업을 정리하고 벽산그룹에 들어갔다. 경력을 인정받아 벽산의 계열사인 대한종합식품의 판매촉진 과장대리로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대학원에 들어간다는 각오로 입사했다. 중역들은 교수고 업무는 내게 주어진 일종의 미션이라 생각했다. 남들이 퇴근하면 그때부터 넥타이를 풀고 웃통을 벗어젖힌 후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며 일을 시작했다. 나의 첫 미션은 통조림 판매량을 올리는 것이었다. 광고나 통계를 보면서 아이디어를 짜내고 화장실에 갈 때도 혹시 생각이 날까 싶어 메모지를 들고 갔다.

첫 번째로 회사에 제안한 것은 수당 제도의 도입이었다. 판매 실적이 좋은 회사는 대부분 판매에 따른 수당이 있었다. 우리 회사 영업부 사원은 월급제였다. 차량을 운전해 대형 매장에 상품을 배달해주는 게 주업무였다. 잘 팔리지 않는 상품에 대한 판촉도 하고 리어카를 제작해 중소형 매장도 배달하며 영업하도록 했다. 판매 실적에 따라 수당을 지급했다.

그렇게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가면서 일하는 재미를 제대로 맛보았다. 날마다 밤을 밝혀 새로운 아이템을 연구했다. 승진도 남들보다 빨랐다. 그러다 획기적인 일이 발생했다. 계열사 부장에서 갑자기 그룹 기획실장으로 발탁된 것이었다. 김인득 회장님의 직접 지시라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파격 인사였다. 회장님은 내가 밤늦게까지 일하는 걸 몇 번 목격하고 경비 직원에게 나에 관해 물으셨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내 진짜 수업이 시작됐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요나 (6) 업무 스트레스 술로 달래다 결국 큰 실수

전직원 예배 드리는 자리에서 사회 보다 숙취로 월요일로 착각 새마을 조회 진행

입력 : 2020-03-09 00:07
장요나 선교사가 벽산그룹에서 근무하던 1978년 대한종합식품의 경북 포항 통조림공장에서 교육하고 있다.

33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벽산그룹의 기획실장 자리는 절대 만만하지 않았다. 입사한 지 고작 4년밖에 되지 않는 내가 감당하기엔 벅찬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김인득 회장님은 일에 있어서 철두철미하고 가차 없기로 유명했다. 작은 실수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군대보다 더 엄격한 김인득사관학교에서 7년간 훈련받았다. 그룹 기획실장이니 업무 영역도 다양했다. 직원 교육부터 각 계열사 지원까지 각종 업무를 총괄하고 담당했다. 그때 건축에 대한 지식도 해박해졌다.

유능한 참모로 그룹의 소유주 대표에게 인정을 받았으니 남들이 보기에는 아쉬울 게 없어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항상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언제 호출을 당할지 몰라 마음 놓고 밥 한술 뜨기도 힘들었다. 그런 내게 유일한 즐거움은 술이었다.

퇴근하고 나면 으레 술집으로 향했다. 월요일은 원래, 화요일은 화가 나서, 수요일은 수없이 마셨고 목요일은 목이 차게 마셨다. 금요일은 금세 금세, 토요일은 토하면서 일요일은 일없이 술을 마셨다. 다행히 술이 세서 엔간히 먹어서는 티가 나지 않았다.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벽산그룹은 매주 화요일 전 직원이 예배를 드렸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회장님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면 꼭 참석할 만큼 예배를 중시했다. 화요일 아침이면 다른 때보다 더 일찍 준비하고 신경을 썼다. 그런데 그날은 어쩐 일인지 아침까지도 술이 깨지 않았다.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 들어가 단상 위에 올라갈 때까지도 머리가 맑아지지 않았다.

나는 배에 힘을 주고 직원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전원 기립, 지금부터 벽산그룹 직장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국기에 대하여 경례!”

아뿔싸. 그만 새마을조회를 진행한 것이었다. 매주 월요일 같은 장소에서 전 직원이 새마을조회를 하다 보니 착각한 것이다. 문제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국기에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제창할 때까지 나는 그날이 화요일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관객석을 쳐다봤는데 사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목사님은 어색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애국가를 부르고 계셨다. 회장님은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애국가 3절은 후렴구에 접어들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까지 듣다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애국가 4절은 생략하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새마을조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의미에서 예행연습을 했다고 둘러댔다.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는데 다리가 덜덜 떨렸다. 목사님이 단 위에 올라가시는 걸 보고 나서야 겨우 회장님의 안색을 살피는데 ‘아, 이제 나는 끝났구나’ 싶었다.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회장님은 노발대발 불같이 화를 냈다. 거룩한 예배에 사회자가 고주망태가 돼 애국가를 제창하는 게 말이 되냐며 그렇게 믿을 거면 집사를 그만두라고 호통을 쳤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요나 (7) 나이 마흔 넷에 원인 불명 희소병으로 식물인간

경력 바탕으로 건설사업 시작 사업 커지며 매일 업자들 만나 접대 주일까지 접대로 술 취해 자고났더니…

입력 : 2020-03-10 00:01/수정 : 2020-03-13 15:53
장요나 선교사는 40대 중반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이런 이유로 당시 사진은 남아있지 않다. 사진은 2002년 분당서울대병원에서 강직성 척추염 판정을 받은 장 선교사.

해고가 돼도 할 말이 없는 사건이었지만, 그동안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터라 회장님은 다시 기회를 주셨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로 비상사태가 일어났다. 벽산그룹은 뜻하지 않게 세무사찰을 받아 큰 어려움을 겪게 됐다. 나는 기지를 발휘해 그 사건을 잘 해결해 회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했다. 이후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80년대 초반에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준비하느라 대형 공사가 많았다. 벽산그룹에서의 경력을 바탕으로 건설업에 뛰어들어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을 수주받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돈은 원 없이 벌었다. 옥외광고회사도 차려 전국의 시계탑 광고를 독점했다. 물 쓰듯 돈을 쓰며 흥청망청 세상 재미에 푹 빠져 살았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지만 마음은 텅 빈 것 같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쓸쓸함에 외롭고 허전했다. 그때마다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해운대 바닷가를 배회했다. 그때 교회를 다니지 않은 건 아니다. 모태신앙인 나는 예배가 삶의 일부와 같았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예배드리는 종교인일 뿐이었다. 그래서 술 냄새를 풍기며 교회에 가도 창피한 줄 몰랐고, 축도가 끝나자마자 술집으로 직행해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그런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주일에 꼭 교회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느슨해졌다. 업자와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는 평일보다 여유 있는 주말에 접대하는 게 유리했다.

마침 그날도 주일이었다. 아침부터 업자들과 모임이 있어서 예배를 빠지고 부산 범어사 계곡으로 향했다. 절 앞 계곡에 있는 야외식당이 목적지였다. 주로 닭백숙을 팔았는데 가족들이 아닌 이상은 대부분 하루 놀 작정으로 온 사람들이라 백숙을 시켜놓고 고스톱판을 벌였다. 나도 업자들이 기분 좋게 이길 수 있도록 비위를 맞추며 고스톱을 치고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해 숙소에 돌아와 자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왼쪽 뺨이 얼얼해서 만져보니 차가운 게 내 살 같지 않았다. 그래서 숙취로 인해 잠시 안면 마비가 온 거로 생각하고 우황청심환을 하나 물고 출근했다. 그런데 회사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려는데 손가락에 감각이 없었다. 눈도 뻑뻑하고 말도 어눌해졌다. 다리마저 풀려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고 바로 김해공항으로 출발했다.

서울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서 온갖 검사를 다 받았는데 거기서 정신을 잃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희소병. 이게 한 달 만에 의사가 내린 결론이었다. 혼수상태에 전신 마비가 된 내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의사 앞에서 아내와 가족은 망연자실했다. 그 사이 증상은 점점 심해졌다. 강남 성모병원,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다녔지만, 결론은 똑같았다. 멀쩡한 몸으로 나갔는데 한 달여 만에 식물인간이 돼 집으로 실려 왔다. 그때 내 나이 44살, 큰아들은 중학교 1학년이었고 둘째 아들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요나 (8) 의식 돌아왔지만 말 안 나와… 숨겨둔 ‘돈’ 생각에 끙끙

퇴원 후 귀만 열린 식물인간으로 지내며 상처 주는 말과 사람들 비정함에 분노

입력 : 2020-03-11 00:06
장요나 선교사가 2002년 5월 분당서울대병원에서 강직성 척추염으로 치료받고 있을 때 베트남 사역에 헌신한 김종찬 온누리교회 집사가 방문해 중보기도를 하고 있다.

집에 돌아오고 얼마 후 의식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귀도 열렸다. 하지만 다른 것은 전부 마비된 채였다. 의식은 또렷해서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입안에서 맴돌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음식은 삽관해 유동식 호스로 넣고 아내가 대소변을 받아냈다. 아내가 애처롭고 안쓰러웠지만 미안하다는 말도 못하고 뿌옇게 흐린 천장만 바라봐야 했다.

산 송장으로 누워있으면서 나는 사람들의 비정함을 톡톡히 맛봤다. 퇴원 초창기에는 병문안 오는 사람들로 집안이 항상 복작댔다. 교회 식구들은 날마다 찾아왔고 직원과 친구들, 사업차 알게 된 지인들까지도 내 병세가 궁금해 문턱이 닳도록 찾아왔다. 하지만 그중에 나를 진정으로 걱정해 준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다들 내가 걱정돼 한달음에 찾아온 것처럼 설레발을 떨었지만 식물인간이 된 내 모습을 보고는 배려 없는 말을 쏟아냈다.

내가 듣고 있을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내를 위로한답시고 이것저것 얘기하며 내 사생활을 까발렸다. 부산에서 여배우와 만난 것도 그때 아내에게 들켰다. 유행가를 유난히 좋아했던 나는 ‘여자의 일생’을 끝내주게 부르는 삼류 배우의 목소리에 홀딱 반해 한 달에 한 번씩 만났다. 밤새 노래를 들으며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눴다. 손목 한번 잡지 않은 사이였지만 아내가 들어서 좋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그들에게 나는 산 송장일 뿐이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와 울다 가시는 부모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아이고, 아비보다 먼저 가는 자식이 어디 있다니. 나보다 먼저 가려고 이렇게 고생을 하니” 하면서 슬피 우셨다. ‘아버지, 저 살고 싶어요. 저를 제일 잘 아시잖아요. 제발 살려주세요’라고 힘껏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오직 나만, 내가 다시 일어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식물인간으로 누워있으면서도 사람들의 말에 상처를 받고 분노하며 병문안 오는 사람들과 소리 없는 전쟁을 벌였다. 그럴 때마다 결론은 숨겨둔 돈을 반드시 찾아야겠다는 거였다. 그것만이 내 마지막 자존심을 살려줄 것으로 생각했다.

사업을 하면서 나는 비자금을 꽤 많이 꿍쳐두었다. 땅문서와 비자금도 상당했고 이름을 달리한 통장도 여럿 됐다. 문제는 그걸 아무도 모른다는 거였다. 이렇게 맥없이 쓰러질 줄 알았다면 아내에게 말했을 텐데….

‘직원들이 금고 비밀번호를 알아내 벌써 땅과 건물을 다 처분한 건 아닐까?’ 아내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비자금 행방이 궁금해 밤에 잠이 안 왔다. 직원들이 알고도 시침을 떼는지 정말로 모르는지 쓸데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다 갔다.

비자금은 물 건너갔고 죽어라 일해 남 좋은 일만 한 셈이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8개월이 걸렸다. 나는 비자금을 한 푼이라도 건지겠다는 오기로 살았다. 식물인간이 되고 8개월 이상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돈’, 비자금이었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요나 (9) “나 아직 살아있어!”… 산소 호흡기 뗄까 가슴 졸여

병세 악화되자 부모님도 포기… 그만 포기하자는 장모님 설득에도 아내는 끝까지 희망 버리지 않아

입력 : 2020-03-12 00:01/수정 : 2020-03-13 16:00
2002년 분당서울대병원에서 강직성 척추염 판정을 받은 장 선교사.

전신 마비가 된 지 석 달쯤 되자 자가 호흡이 곤란해져 산소호흡기를 달았다. 숨을 제대로 못 쉬자 위급 상황도 자주 발생했다. 목구멍에 숨이 걸리고 유동식도 넘어가지 못해 막혔다. 가래가 자주 끓어 병원에 실려 가곤 했다. 그때마다 마주하는 건 좌절이었다. 제일 비참했던 건 내 앞에서 나를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었다. 의사들의 냉정한 태도를 볼 때마다 살 수 있을 거란 실낱같은 희망이 툭툭 끊어졌다.

4개월쯤 지나자 부모님도 나를 포기하셨다. 내가 다시 깨어날 거라 기대하진 않으셨지만, 차마 아들을 보내지 못해 집에 오실 때마다 내 손을 붙잡고 우셨던 아버지도 결국 내 손을 놓으셨다. 그날 아버지가 내 이마에 얼굴을 맞대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아버지, 저 아직 살아있어요. 제발 포기하지 마세요.’

다급해진 내가 아버지를 애타게 불렀지만 돌아온 말은 ‘이제 편히 가라’였다. 마지막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은 아내였다. 생각해 보면 결혼해서 아내와 함께 산 세월이 5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일하기 바빠 밖으로만 도는 바람에 생과부로 살게 했는데, 내가 집에 있어도 생과부 신세는 마찬가지라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아내가 조금씩 나를 소홀하게 대해도 서운하지 않았다. 나를 다루는 손길이 거칠어지고 신세타령이 늘어져도 섭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에 대한 확신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발단은 장모님이었다. 창졸간에 식물인간이 된 사위도 안타까우셨겠지만, 곱게 키운 외동딸이 고생하는 게 마음이 아파 오실 때마다 눈물 바람이셨다. 그런데 그날은 분위기가 좀 달랐다.

“에미야, 장 서방 못 살겠다. 이제 그만 산소호흡기 떼고 포기하자.”

내 곁에서 훌쩍이던 장모님이 아내에게 무겁게 한마디 하셨다. 아내가 울면서 어떻게 그러냐며 남편이 불쌍해서 그렇게 못한다고 하자 장모님이 버럭 화를 내셨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언제까지 가망도 없는 사람을 붙들고 생지옥에서 살 거냐고 하셨지만, 아내는 울기만 했다. 장모님은 문을 박차고 나가 버리셨다.

당장이라도 산소 호흡기를 뗄 것 같은 장모님의 기세에 간이 오그라들었는데,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니 안심이 됐다. 내 목숨은 내 소관이 아니란 생각을 하자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장모님과 아내가 마음만 바꿔 먹으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아내가 두려웠다. 혹시라도 마음을 바꿔 산소 호흡기를 떼면 어쩌나, 아내의 한숨이 깊어지거나 신세타령이 길어질 때마다 가슴이 졸아들었다.

‘여보, 나 좀 살려줘. 나 죽지 않았어! 나 멀쩡해요. 내 겉 사람만 마비된 거야.’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불렀다. 10개월 동안 한 번도 부르지 않은 이름, 한 번도 떠올리지 않은 그분을 마지막 순간에 찾은 것이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요나 (10) 주님 말씀 내 안에 들어오자 피가 돌고 몸 움직여

방탕하게 살았던 세월 후회하며 절박한 마음으로 살려만 달라 기도…주님 음성 들리며 성령으로 깨어나

입력 : 2020-03-13 00:01/수정 : 2020-03-13 16:08

‘하나님.’

이 가냘픈 외침이 10개월 만에 드린 나의 첫 기도였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나의 그 외마디에 응답하셨다. 마치 오랫동안 그 말 듣기를 기다리신 것처럼.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제가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는 걸 알았습니다. 어리석고 타락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허랑방탕하게 살았던 지난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나는 44년 인생 동안 돈에만 충성하며 살았다.

“하나님 저를 다시 살려 주십시오. 병신이 되더라도 좋습니다. 한 번만 살려주시면 제가 손발이 닳도록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겠습니다.”

기도를 마치자마자 천지를 집어삼킬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내가 너를 소유하리라. 이제 네 서원을 갚아라.”

그때 내 귀에 또렷이 ‘하나님의 종이 되겠습니다’라는 음성이 들렸다. 다름 아닌 나의 목소리였다. 10년도 더 이전의 어느 날, 절박한 마음으로 드렸던 기도였다.

둘째 아들이 세 살 때 큰 사고를 당했다. 연년생으로 아들을 낳고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 한 딸내미 몸보신을 시키려고 장모님이 사골을 끓이셨는데,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대청마루에서 고양이와 놀던 아이가 뜨거운 사골 국물에 덤벙 빠진 것이다. 어른들이 달려갔을 때 둘째는 이미 가마솥에 엉덩이가 녹아 살이 흐물흐물해진 후였다.

의사는 화상이 너무 심해 살릴 방도가 없다며 돌려보냈다. 그 얘기를 듣고 아내는 기절해 쓰러졌고 울다 지친 아이는 정신을 잃었다 깼다를 반복했다. 그날 나는 회사 직원들을 데리고 야유회를 갔다가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왔다. 아이의 사고 소식을 듣고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하나님, 아들을 살려 주십시오. 
 이 아들만 살려주시면 제가 주의 종이 되겠습니다. 이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아이의 화상이 치료됐다. 깨끗하게 나았다. 하지만 나는 그 기도를 까맣게 잊고 10년 넘게 살았다. 하나님은 그날을 기억하게 하셨다.

“내가 이제 너를 소유하리라. 요나야, 너는 일어나 저 큰 성 니느웨로 가라. 
 가서 내가 네게 말하는 것을 그들에게 선포하라.”

천지를 진동케 하는 폭풍우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에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요나는 누구이며 니느웨는 어디란 말인가
? 명색이 집사였지만, 요나서를 읽어본 적이 없었기에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하나님 니느웨가 어디입니까
?

하나님은 천둥 같은 음성으로 내게 대답하셨다.
 “네가 전에 갔던 곳이다.”

그때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나를 뒤흔들면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바짝 말랐던 혈관에 피가 돌고 근육이 풀리면서 몸이 움직였다.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온몸이 찌릿찌릿하고 혈관이 따끔거렸다. 손가락과 발가락 끝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씀으로 새롭게 되면서 내 육체는 성령의 피로 채워진 새 부대가 됐다. 그날은 44년 만에 새 생명을 부여받은 내 인생의 첫날이었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27520&code=23111513&cp=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