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인물,선각자, 宣敎師

어거스틴 (5) /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중심으로 - 유해룡

영국신사77 2020. 3. 25. 13:47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중심으로 - 유해룡


I. 들어가는 말

일생을 사는 동안 인간만큼 변화의 가능성이 많은 존재는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한다.

초월적인 실재를 향하여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인간을 향하여 영성적인 존재라고 한다.

영성적인 존재는 자신의 변환을 위하여

끊임없이 영성적인 성장을 꾀한다.

그런데 영성적인 성장이란

외모의 변화나 지적인 변화처럼

쉽게 측정되거나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성적 상태란

그 자체가 보이지 않는 내면 세계를 다루는 것이기에

내면 세계에 대한 탁월한 이해나,

인정받는 객관적인 틀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누구도 측정 불가능한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주관적인 편견을

마치 객관적인 기준으로 착각하는 오류도 범할 수 있다.

특별히 영성 지도를 꾀하는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내면세계에 대한 이해와

믿을만한 영성적 성장에 대한 모형 이해는 필연적이다.

이런 취지에서 이 글은

영성사가 유산으로 남겨준

과거의 탁월한 영성가들의 기록과 그 발자취를 연구하면서

그들이 보여준 영성적 성장의 전형적인 모델을 소개하며,

특히 어거스틴 자신이 후에 자신의 영성적 순례를 돌이켜 보면서,

남겨놓은 그의 자서전적인 ‘고백록’을 통하여

영성적인 성장 과정을 분석적인 이해를 시도할 것이다.


II. 영성사에 나타난 영성 형성의 모델들

오늘 우리에게 고전으로 남겨진 영성가들의 기록을 읽노라면,

그들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교적인 삶의 실체를

구체화하고 객관적으로 표현키 위한

적지않은 노력에 대해서 깊은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상징어나 은유적인 표현을 통하여

내면 세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사용한 상징어나 은유적인 표현들을 이해할 수 있다면,

깊은 바다와 같은 내면의 세계를 표면으로 떠오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마가렛트 마일즈(Margaret R. Miles)는

과거 영성가들이 보여준 영성의 길(spiritual path)을

세부류의 은유적인 표현으로 분류 정리해 주고 있다.

첫번째는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n of Christ)"의 모델이다.

두번째는 그리스도교적인 삶의 여정을

하나의 "순례(pilgrimage)"로 보는 모델이다.

세번째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향한 상승운동(ascent to union with God)"

을 이상적인 그리스도교적인 삶의 모델로 보는 견해이다.


첫째 "그리스도를 본받음"의 모형을

영성적인 길로 택한 가장 두드러진 인물중의 하나는

아씨시의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삶을 내면화하기 보다는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의 삶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그의 독특한 영성 형성의 길로 택했다.

역사적인 예수의 삶을

자신의 현실적인 삶속에서 실제적으로 실현해 가는 삶의 형태다.

프란시스는 무너져가는 성 다미아노 교회안에 걸려진

고상(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을 통해서

고난받으시는 예수로부터 한 메시지를 전달받고,

그것이 그를 회심으로 이끌어 간다.

여기서부터 프란시tm는

일찌기 프란시스의 영성의 길은

수난 받으신 그리스도와 밀접한 인연을 맺기 시작한다.

프란시스는

인간 예수가 보여준

가난, 자기비하, 무력함, 연약성등을 실현해야 할

가장 주요한 덕으로 생각하고

그 길을 자신의 영성 형성의 길로 받아들인다.

프란시스는 이러한 예수의 삶의 스타일을

내면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문자 그대로 그 삶을 실천해 갈 때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형성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내면적인 영성 형성에 반영하게 된다.

이러한 프란시스의 인간 예수를 문자 그대로 본받으려는 열망은

그가 죽기 2년 전에

십자가의 성흔(stigmata)을 경험함으로서 절정에 이룬다.


문자 그대로 인간 예수를 따르려는 프란시스의 모범은

그 이래로 몇세기에 걸쳐 하나의 유행이 될만큼

중요한 영성 형성의 모델이 되어 왔다.

이러한 분위기로 무르익은 13세기에 보나벤투라(S. Bonaventura)는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명상하기 위한 길잡이로서

'생명의 나무 (The Tree of Life)'라는 소책자를 저술한다.

이 책의 서문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와 그리스도의 참 제자는

진심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라는 확신이 있을 때까지

영적으로 육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기를 열망해야 한다."

라고 했다.

13세기 말에 익명의 저자에 쓰여진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명상(Meditations on the Life of Christ)’

은 당시 사람들 가운데 매우 유행했던 경건서이다.

이 책 역시 프란시스의 삶에 대한 해석이지만,

프란시스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외형적인 생애를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적인 특성들을 내면화하고 본받는 것에 촛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5세기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가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

라는 경건서를 내어 놓는다.

켐피스의 길 역시 프란시스의 극단적인 실천보다는

평범한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내면적으로 닮아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명상’과 같은 영성의 길을 채택한다.

프란시스가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의미는

일차적으로 문자 그대로의 실천을 통하여

그것이 내면화 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내면화 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함으로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길'을 선택한다.

즉 행위보다 존재의 형성을

우선적으로 하는 영성적인 길이라 하겠다.


두번째,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형성하는 길은 "순례"라는 모델이다.

이 패턴을 채택한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어거스틴을 예로 들 수 있다.

그의 ‘신의 도성 (the City of God)’이 이 패턴을 따른다.

이 책의 핵심은

각 사람이 갈망하고 추구하는 사랑의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지상의 도성"에 속하기도 하고,

"신의 도성"에 속한다는 내용이다.

만약 그 사랑의 흐름이

세상 안에 있는 감각적인 것들을 소유하려는 경향을 지닌다면,

그는 "지상의 도성"에 속한 시민이요,

만약 그 사랑이 하나님을 향하여 흐른다면,

그는 "신의 도성"에 속한 시민이다.

그러나 신의 도성의 시민이라 할지라도

"그가 죽을 육체 안에 머물고 있는 한,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낯선 땅의 순례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나그네는 믿음대로 행해야지

보이는대로 행해서는 안된다....

이 신의 도성은

모든 나라에서 순례중에 있는 자기의 시민들을 불러 모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머물고 있는 동안

'지상의 도성'과 '신의 도성' 양쪽을 포함하면서

순례자의 삶이 지속된다.

완전한 신의 도성에 이를 때까지 믿음의 갈등은 계속되며

동시에 완전한 신의 도성을 향한

지상의 도성에서의 투쟁의 과정이 순례자의 삶이다.

이러한 '순례'적인 모델은

어거스틴 이래로 기독교 영성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중에서 17세기 이래로 가장 영향력 있는 경건서로는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 역정(Pilgrim's Progress)’이다.

1678년 영국에서 첫 출판이래로

백여개가 넘는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왔다는 것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번연은 아주 열악한 환경인 감옥에서 '천로역정'을 저술했기에 

그의 내면의 갈등적인 상황과 모순적인 세속적인 환경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 열악한 환경과 불의한 세상 속에서 싸우는 과정을 

마치 천국을 향한 순례의 과정으로 비유하고 있다. 

번연의 내면적인 갈등과 싸워야 하는 상황은 

현실적으로 모순에 가득찬 세상과 싸워야 하는 

그것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즉 내면적인 갈등과 실존적으로 존재하는 외면적인 갈등이 

그대로 일치를 이루고 있기에 

번연은 천국에 이르는 길목에서 

전진을 방해하는 온갖 내면적인 적들을 

외적인 대상으로 의인화 시키는 일에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그리스쳔(천로역정에서의 주인공을 나타내는 고유명사이면서 동시에 일반명사)을 자연스럽게 '싸우는 순례자'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순례자인 그리스쳔은 절망의 수렁과 허영의 시장, 의혹의 성을 

하나씩 하나씩 통과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순례의 길을 돕는 자도 만나고, 

또 한편으로는 극복해야 할 많은 방해자들을 만나기도 한다.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하여 천국 문에 이를 때까지 

그리스쳔이 겪어야 할 갖가지 과정과 경험들은 

순례의 길을 걷는 모든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일반적으로 '순례'의 모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상적인 경험세계로부터 

영적인 세계를 분리하기를 요구한다. 

천국이 우리가 다달아야 본향이라고 한다면, 

보이는 지상의 세계는 낯선 타향이다. 

이 낯선 타향에서의 나그네는 언제나 극복해야 할 장벽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이 보이는 세계는 머물를 곳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곳이라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순례자'이다. 


이 모델의 특징은 

보이는 현상을 무조건 부정하거나 무시되어야 할 부분이 아니고 

오히려 서로 다른 영역임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영적인 세계는 얻어야 할 목표점이요 보상이라면, 

일상적인 보이는 세계는 하나의 투쟁과 준비를 위한 영역이다. 

그러므로 '순례'라는 영성적인 길은 

이 두 영역을 긍정적으로 통합시키는 역동력을 지닌 은유어이다.


세번째, 영향력 있는 모델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향한 상승 운동'이다. 

이 모델은 '그리스도를 본받음' 이나 '순례'의 모델과는 달리 

문자적인 실천에 강조를 두지는 않는다. 

물론 이 상승모델 그 자체가 결코 독립적인 것은 아니다.

 '순례' 나 '그리스도를 본받음'이라는 모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면 번연의 '천로 역정'에서도 영적인 진보를 "능력의 산"에 오른다든가 

"기쁨의 산"에 오른다든가 등의 오름으로서 그 진보를 묘사한다. 

순례자의 영적 세계를 향한 상승적인 운동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 예이다. 

이 '상승'모델의 성서적인 근거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일, 

하늘과 땅을 잇는 야곱의 사닥다리의 비젼, 

예수의 변화산 사건등을 들수 있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향한 그리스도교적인 삶은 

점점 상승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강조한 모델이다. 

이 모델은 주로 수도자들의 영성생활의 진보를 설명해 주는 

유용한 도구로 사용 되어 왔다.


'상승'이라는 은유어를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의미로 이해하기 위해서 

'사다리'라는 이미지를 사용하기도 한다. 

감각적인 세계를 사다리의 시작점으로 생각한다면, 

이 사다리를 한단계 한단계 올라가서 

마침내 이르러야 할 목표점이 곧 하나님과의 일치이다. 

사다리를 통한 상승 궤도는 

점점 감각적인 세계를 떠나서 

이미지 없는 세계 (imageless seeing)를 향하도록 권고한다.


 5세기의 동방 교부중의 하나인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는 

물질 세계로부터 비물질 세계로의 상승의 원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나타나는 미는 보이지 않는 사랑의 표시이며, 

감각을 자극하는 향기로운 냄새는 개념적인 확산을 나타내며, 

물질적인 빛들은 비물질적인 빛들의 이미지이다." 

위디오니시우스는 감각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의 관계를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반영하는 분명한 증거로 이해하고 있다. 

보나벤투라 같은 맥락을 취하고 있다. 

그의 영성적인 입장을 밝힌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여행 (The Soul's Journey into God)'에서 

하나님에로의 상승의 단계를 

"피조물의 세계는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계단이다."라고 했다. 

보이는 대상들은 단계적으로 관상하면서 

점진적으로 영적인 세계에로 나아가게 하는 계단들이다.

어거스틴 역시 감각적인 세계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향한 상승으로 인도해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했다. 

감각적인 세계에 대한 관상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러면 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요? 나는 땅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이 땅은 나에게 대답하기를 "나는 그 분이 아니다"라고 하였읍니다. 

또한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같은 말로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바다와 심연과 그 안에서 기어다니는 생물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답하기를 

"우리는 너의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 위에서 그 분을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지나가는 바람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하늘과 달과 별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나의 하나님에 대하여 말을 해다오... 

그때 그들은 분명히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그분이 우리를 만드셨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나의 질문은 그들에게 대한 나의 관찰(contemplation)이었고 

그들의 대답은 그들의 조화의 미에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상승 이미지와 관련하여 

보이는 세계를 보이지 않는 세계에 비하여 비하시키는 

플라톤적인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립적인 관계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로의 상승을 위한 

필연적인 입구 역할을 한다. 

그것은 서로 변증법적인 관계 속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상승이라는 모델에서 영성적 성장이란 

보이는 세계 안에 있는 대상물들로부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로 

그 관심과 시선을 돌리는 하나의 투쟁으로 묘사된다.


동방 교회의 교부로서 '상승'모델을 가장 조직적으로 제시하여 

기독교 영성사에 가장 영향력을 끼쳤던 인물은 위디오니시우스이다. 

그는 5세기 후반에 시리아 기독교와 신플라톤적인 분위기 아래에서 

바울의 측근중의 한 사람인 

아레오바고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Areopagite, 행 17:34)라는 아명을 가지고 저술활동을 한 동방교회의 한 수도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그의 작품을 통하여 

신플라톤적인 형이상학과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통합하여 

내면적인 영성적 여행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는 피조물들의 존재원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창조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래로의 산출(the procession downward)이며, 이 창조는 다시 하나님으로의 복귀를 위해 상승한다(the return upward). 여기서 디오니시우스는 긍정적 신학 혹은 유념적인 길(affirmative theology or kataphatic way)과 부정적인 신학 혹은 무념적인 길(negative theology or aphophatic way))이라는 독특한 영성적인 길들(spiritual path)을 창출해 낸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나 이미지는 그것이 아무리 고상한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 이미지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유사성과 비유사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분여해 주신 그만큼 유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반면에 그 분에게만 속한 무한한 속성에 대해서는 비교할 수 없는 비유사성이 있다.

전자의 유사성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상승하려는 것을 긍정신학 혹은 유념적 길(Apophatic Way)이라 하고, 후자의 비유사성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일치를 꾀하려는 것을 부정신학 혹은 무념적 길(Kataphatic Way)이라고 한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때 아무리 하찮은 피조물일지라도 하나님의 속성을 분여받고 있다. 그러므로 이 하찮은 피조물을 관상(contemplation)함으로서 가장 고상한 하나님의 속성에 이를 수 있다. 말하자면 단순히 생명을 보존하려고 꿈틀거리는 벌레에게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엿볼 수 있다. 자연을 아름답게 수놓는 갖가지 수목에게서도 하나님의 지혜를 볼 수 있다. 인간의 희생적인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로 볼 수 있다. 모든 만물을 변함없이 보존하시고 보호하심은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과 그 선하심의 속성을 보이신 것이다. 이렇게 하찮은 것으로부터 가장 고상한 하나님의 속성을 단계적으로 관조하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영성적 여행의 한 패턴을 유념적 방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념적 방법만으로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향한 상승을 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인간의 이미지나 속성도 하나님과 조화할 수 없는 비유사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비유사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 때만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성취할 수 있다. 그것은 곧 피조물과 인간의 개념 속에서 유추할 수 있는 긍정적인 하나님의 속성들을 하나씩 하나씩 부정하는 길 밖에 없다. 그것이 곧 무념적 방법이다. 하나님에게 가장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속성이나 개념들로부

터 부정하면서 위로 올라가게 된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 '태양같은 하나님의 義'등의 가장 고상한 속성들도 부적합한 것으로 여기고 부정한다. 끊임없는 부정의 길을 달려갈 때 결국 인간의 모든 개념이나 언어는 잠을 자게 되고 깊은 침묵의 심연 속에 이르게 된다. 이 깊은 심연은 결코 감각으로도 지적인 인식 작용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순전한 영의 세계요 어둠의 세계이다(the cloud of the unknowing). 감각이 모두 잠을 자는 이 어두움의 세계속에서 개념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일치로서 영적인 상승은 완결을 짖게 된다.

산출과 복귀 (procession and return) 혹은 긍정의 길과 부정의 길을 통한 상승 모델로부터 정화(purification), 조명(illumination), 완성(perfection) 혹은 일치(union with God)라는 3단계의 영성적 성장의 모델을 유추해 낼 수 있다. 본래 위디오니시우스가 제시한 이 3단계 패턴은 영성적 지식의 습득정도를 가름하기 위해 사용된 개념들이다. 완성의 단계가 하나님과의 신비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영성적 지식의 온전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기 중세에 이르러 하나님과의 신비적인 연합 관계의 단계로서 발전되어 사용하게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까지 심리적으로 영성적 성장을 분석하려 할 때에 이 패턴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그것은 위디오니시우스가 최고의 영적 지식은 모든 감각과 인식 작용이 멈춘 침묵의 심연에서 가능하다는 그의 부정신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III.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통한 영성적 성장의 패턴연구

언더힐은 전통적인 영성적 성장에 대한 3단계의 패턴을 받아들이면서 여기에 정화의 단계이전에 '자아에 대한 자각(the awakening of the self)'이라는 단계를 첨부하고 있다. '자아에 대한 자각'은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인식이며, 여기서 기쁨과 찬미라는 강력한 심리적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자각은 중요한 회심의 계기를 마련하지만 신앙적인 회심의 단계로는 볼 수 없다. 단지 자아의 존재에 대한 한계성과 불완전성을 절실하게 인식하는 것으로 그 역할을 마친다. 그것을 정화(purgation)의 단계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할 수 있다. 정화 단계를 통하여 자아는 감각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영성적인 세계에 합당한 덕들과 품성들을 형성하도록 한다. 그러한 덕들은 영혼과 하나님이 영성적인 결혼을 위한 장신구들에 해당되는 것이다. 영성적 여행을 시작한 자아는 하나님의 속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평상시에 경험하는 요소들 -- 환상적인 현실, 모든 불완전하고 악한 현실등 -- 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내적인 투쟁을 겪는다. 이런 의미에서 회심과 정화는 동시에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을 벗어나면서 자아는 창조되지 않은 빛(진리의 빛)에 의해서 자아에 대한 새로운 중심을 경험한다. 이 단계를 조명(illumination)의 단계라고 일컫는다.

조명의 단계에서 자아는 좀 더 차원높은 회심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정진하게 된다. 행동과 생각이 조화되어 통일된 깨달음을 얻게되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확실한 관계를 맺게 된다. 그는 실제로 영성적인 세계에 어울리는 새로운 비젼과 지식을 성취한다. 그리하여 자아는 영성적인 세계가 무엇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인지하고 즐기는 단계이지만, 영성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속성(벧후 1: 4)에 참여하는 일치의 상태(unitive state)에 이른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이 단계에서는 일치 경험에 대한 열망으로 타오르게 된다. 이 일치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영혼일지라도 이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자유로움을 맛볼 것이며, 자신이 영원한 실존에 흡수되는 경험을 하게된다. 때때로 이 일치의 단계에서는 초월적인 실재를 미리 맛보는 황홀경의 체험도 수반할 수 있다.

영성사적으로 검증된 이러한 삼중적인 영성적 성장의 모형을 통하여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분석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해 보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영성적 성장 모형의 첫단계를 '정화'로 보지만, 어거스틴의 고백록에서는 '조명'의 단계를 시작점으로 경험하는 것이 독특한 면이다. 이어서 정화의 단계, 일치의 단계가 따라온다. 특히 {고백록}의 7권, 8권, 9권에서 이러한 단계가 뚜렷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글에서는 주로 이 세권에 국한하여 어거스틴의 영성적 발전과정들을 추적하게 될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영성적 여정을 결과적으로 돌이켜 보면서 회심의 전과정을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로 받아들인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에 의해서 회심의 과정이 시작되었다고 고백한다. "당신은 내적 자극으로 나를 일으키사 내 영혼의 눈이 당신을 확실히 볼 때까지 편안함을 얻지 못하도록 하셨읍니다. 그리하여 어루만져 치료하시는 당신의 은밀한 손에 의해 나의 부은 상처는 가라앉았고, 병들어 어두워진 내 영혼의 시력은 아프지만 치료가 되는 슬픔의 안약으로 나날이 더 좋아져 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당신의 은밀한 손'의 출발점이란 플라톤파의 철학서적을 통해서 얻어진 지혜를 의미한다. 그는 이미 플라톤 철학의 권고를 통해서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실제로 {고백록}에서 "나는 이 책을(플라톤파 철학책) 통해 나 자신으로 들어가라는 '권고'를 받았고 당신의 인도하심을 따라 내 영혼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게 되었다."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이 플라톤파의 책에서 얻은 영감 역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요, 하나님이 그 자신에게 허락한 권고라고 믿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조명이론'에 의하면 그것이 결코 초자연적인 은총에 의한 깨달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시점에서의 신적인 조명이란 초자연적인 빛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지성적인 본질에 속하는 빛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지성 안에 비추어준 지성의 빛을 의미한다. 이 지성의 빛이 플라톤파 철학을 통하여 전달받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빛으로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어거스틴은 내재하는 이러한 신적인 빛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 '판단의 표준'에 대해서 추적한다. 무엇이 옳고, 그르고 하는 판단이 있다는 것은 불변하는 영원한 진리와 변하지 표준이 내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어거스틴은 "점점 물체에서부터 육체의 감각을 통하여 물체를 지각하는 영혼으로 올라가고, 거기에서부터 혼의 내적 지각에 다다랐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사실 감각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판단하는 이성까지도 변하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그 이성 위의 불변하는 '지성의 원리'로 올라간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마침내 "존재자체(스스로 계신 존재자)"에 대한 깨닫음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여기서부터 서서히 기독교적인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찾는다. 그는 플라톤 철학을 통하여 비추어진 빛을 기독교적인 중보자 예수와 연결 하고 있다. 이러한 발견은 이미 그의 '조명 이론'에서 보여준 대로 내면의 빛이 하나의 중보자가 되어 '존재 그 자체'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내면을 향한 여행은 하나님을 향한 상승운동으로 설명되어진다.

어거스틴의 내면으로의 여행이 곧 하나님에로의 여행으로 이어지는 경험을 {고백록} 7권 10장, 17장, 20장에서 설명해 주고 있다. 7권 10장에서 어거스틴은 첫 여행의 시작을 "영혼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17장에 이르러서는 자기 마음 안

에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발견하면서 무엇인가 판단의 기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 판단의 기준으로서의 불변하고 영원한 진리는 분명히 '마음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판단의 원천은 이제 20장에서는 보이는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고,

비물질적인 진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게 된다.

이러한 플라톤 주의자들의 책들을 통해서 얻은 비물질적인 진리에 대한 인식은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점점 기독교에로의 방향을전환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특별히 마니교에서 얻은 이원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사고로부터 해방을 받기 시작했다.

모든 만물은 높은 차원에서 낮은 차원으로 즉 영성적인 실재로부터 물질적인 세계가 도출되어 나온다. 그러므로 창조된 물질을 통하여 창조자를 인식할 수 있다. 여기서 어거스틴이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창조자의 존재와 그 분은 무한하시며 변하지 않으시

는 실재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고 세상은 끊임없이 어두움과 빛과의 이원론적인 대립속에서 지속된다라고 가르친 마니교의 사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플라톤적인 회심은 하나님에게 이르는 첫길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므로 플레테른(Fleteren)은 어떤 의미에서 어거스틴의 조명의 단계가 플라톤적이긴 하지만 곧 중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7권에서의 어거스틴의 영성적 여행은 이중적인 운동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 편에서의 운동과 사람 편에서의 운동이다. 하나님편에서의 운동이란 하나님의 도우심과 섭리적인 은총을 통하여 영성적 상승 운동을 출발케 하며 지속케 하며 마침내 하나님께 도

달되는 운동이다. 반면에 인간 편에서의 운동이란 인간 자신이 그 '존재 자체'에 도달하게 되고, 비로소 보이지 않는 않는 것들은 창조된 것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는 확신을 말한다. 이러한 양면적인 운동이라는 깨달음 속에서 어거스틴의 은총론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마음의 내적 조명과 마음의 메신저 즉 모세(율법 혹은 양심의 법)등을 통하여 은혜의 초기 운동을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계속되는 은총은 인간의 자유로운 협동을 요구한다. 그러한 협동이란 은총을 용이하게 할지언정 은총을 낳게 하는

것은 아니다. {고백록}은 이 두 요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당신(하나님)을 처음 보았을 때 당신은 나를 들어 올려 나로 하여금 봐야 할 것을 보게 하셨읍니다. 그러나 나는 그 때까지도 그것을 볼 수 있는 시력이 없었읍니다. 당신은 활홀한

강한 빛을 나에게 비추어 내 시력의 약함을 물리쳤습니다." "이렇게 하여 내 마음은 불변한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데,...눈 깜빡할 순간에 "존재 자체(스스로 계신 존재자)에 도달하게 되었읍니다." 어거스틴은 각 개인에게 주어진 내적 조명을 하나님의 은 총으로 보지만 동시에 그것은 하나의 시력을 얻게 해주고 주관적인 협력을 요구하는 계기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협력 은총'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구원의 필연적인 요소가 된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순간적으로 하나님에게 이르지만, 그의 마음은 아직도 그 안에 머물지는 못했다. 즉 그는 눈 깜박할 순간에 "존재자 자신"에게 도달하였고, 그래서 그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계속에서 그 존재 자체를 바라볼 수는 없

었다. "또 다시 자신의 약함으로 떨어져 보통하는 일들의 세계로 돌와오고 말았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마치 아름다운 기억과 그에 대한 동경은 있으나 그것은 마치 먹지 못하고 냄새만 맡는 음식과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이제 어거스틴은 하나님 안에서 그 분을 즐길 수 있는 "알맞는 힘"을 얻고자 길을 찾아 나선다. 바울 서신을 통하여 플라톤적인 지성의 깨달음을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로 대체함으로서 이러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른다. 플라톤의 책이 신적인 비젼을 주기는 하나, "경건의 표현, 고백의 눈물, 당신의 희생, 괴로워하는 마음, 상하고 참회하는 심정, 겸손, 당신의 백성의 구원, ... 우리의 구속의 잔"이 있지 않았다고 하면서 플라톤의 지적인 깨달음을 대체하고자 한다. 어거스틴의 플라톤적인 조명이 그리스도교적으로 바뀌어지게 된 동기는 플라톤적인 가르침과 바울의 가르침 사이에 어떤 일치점이 있는가를 보기위한 호기심에서 비롯된다. 동시에 하나님의 조명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도덕적으로 정화되지 못한 때문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회심은 도덕적인 정화의 단계로 넘어간다.

{고백록} 8권은 '성인이 먹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고민하는 장면과 마침내 그 나약함을 극복하게 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적인 진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진리가 요구하는 순수성을 받아들일 수도 이

를 수도 없었다. 지적으로는 만족이 있었으나 의지는 무력했다. 그는 교회 밖에서 세상을 쫒는 자신에 대해서 증오를 느꼈다. 그는 자기의 일 속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세속적인 명예와 이익에 대해서도 흥미를 잃어 버린다. 그런데 여전히 여자에 대한 애

착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내 손과 발을 묶어 놓은 결혼(동거) 생활 때문에 나는 내가 원치 않던 다른 일까지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나의 번민은 심해져 내 심신은 몹시 피곤하고 쇠약해졌었습니다."라고 자신의 고민을 술회한다.

이 싯점에서 어거스틴의 문제는 금욕생활에 집중된다. 그는 기독교에 대해서 지적으로는 만족했다. 그러나 자기 안에서 포기적인 삶 특히 독신적인 삶을 유지하는 힘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독신적인 삶은 그리스도가 권고한 더 좋은 삶이라고 믿고 있었

다. 그리고 독신적인 삶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른 그리스도가 권고하는 좋은 삶을 이룰 수 없다고 믿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어거스틴은 심플리키아누스에게 영적인 충고를 구한다. 심플리키아누스는 당시 가장 훌륭한 로마의 수사학자로 알려진 빅토리누스가 세상의 천하고 약한 것들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겸손 앞에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인으로

회심을 하게 된 사실을 전해 주었다. 어거스틴은 바로 빅토리누스의 이야기를 하나의 모범으로 받아들이고 그와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났다. 어거스틴에게는 "빅토리누스가 용감하게 보였을 뿐만 아니라 행복하게 보였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당신께만 그의 모든 시간을 바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왜곡된 욕심과 그 욕심을 따르는 버릇이 쇠사슬이 되어 그를 꽁꽁 묶고 있었다. 그는 이제 비로소 "육체의 소욕은 영을 거스리고 영이 원하는 것은 육을

거스린다(갈 5:17)"는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는 진리를 알지 못해서 세상을 버리고 주님을 섬기기를 주저하는 것이 아니다. 땅에 매여 있기에 주님의 병사가 되기를 싫어 한다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육체의 정욕이 그를 이토록 고민

하게 하였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투쟁이 계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어느날 자기 집에 찾아온 폰티키아누스라는 사람으로부터 당시의 영웅적인 수도사 안토니우스에 관한 이야기도 듣는다. 어거스틴은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자기의 속이 썩어 들어

가는 듯 괴로왔고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압도되어 몸 둘 바를 몰랐다'고 하였다.

이렇게 고문을 당하는 듯한 고통은 어거스틴 자신을 자기가 살고 있는 정원으로 내몰았다. 이 때 그의 마음의 상태를 {고백록}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 싸움이 어떻게 끝날지에 대해서는 당신만이 아실 뿐 나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내가 현재 얼마나

불행한 처지에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조금 후에 얼마나 좋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미치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원하는 것과 할 수 있다는 것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원하지만 원하는 바

를 할 수 없는 존재가 자신임을 절실하게 경험한다. 이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무화과 나무 밑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오,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오,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내일입니까? 내일입니까? 왜 지금은 아닙니까? 왜 이 순간에 나의 불결함이

끝나지 않습니까?"라고 절규한다. 절망적인 불행 속에 빠져있는 자신의 모습을 향하여 통회하며 울고 있었을 때에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Tolle lege, Tolle lege)"라는 신비한 음성을 듣는다. 어거스틴은 어디서 들려왔는지 모르는 이 소리를 하나님

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달려 들어가 즉시 첫 눈에 들어오는 책을 들고 읽었다. 그것이 바울 서신이다. 어거스틴이 우연히 들려오는 이 소리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던 사막의 안토니의 경험이 자신의 경험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했기 때

문이다. 즉 순종하여 읽은 바울 서신에서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는 말씀을 만난다. 이 말씀을 대하는 순간 '더 이상 읽

을 필요도 없이 확실한 빛이 마음에 들어와 의심의 모든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게 되었다'라고 회심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의지의 회심이었다. 그 결과로서 여자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움직이셨다라고 고백한다. "이제 당신은 나를 당신에게로 전향하게 하셨으니 나는 아내나 세상의 어떤 다른 희망도 찾지 않기

로 하였습니다. 나는 오래전에 당신이 나에 대하여 꿈으로 어머니에게 보여 주셨던 그 "신앙의 교리"에 굳건히 서 있었던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요 6:45, 빌 2:13, 고전 4:7등의 영적인 말씀에 근거로 들면서 회심은 개인의 공적과는 상관없는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총으로 돌렸다. 그러나 성령은 각 개인을 믿음에 머물도록 강압하지는 않는다. 단지 견인의 은총이 선을 향한 각 개인의 열

망을 지탱해 주고, 그것으로 유혹을 이기도록 해준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고백록}에서의 어거스틴의 정화의 단계는 하나님의 은총이 동기가 되어 그것을 이루려는 그의 불타는 열망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서 맺어진 열매이다. {고백록} 제 8 권은 어거스틴의

정화 경험으로 부도덕한 삶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기에 합당한 덕을 얻으려는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투쟁이었다. 이런 점을 강조할 때 어거스틴의 회심은 '점차적인 회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자기를 굴복시

키고, 새로운 결단으로 나아가는 순간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갑작스런 회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은총에 대한 순종이 이루어진 그 다음 순간, 그는 관상적인 삶을 경험할 필요가 있었다. 어거스틴은 보다 영성적인 진보를 가져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보다 느슨한 정서적인 쉼이 필요했다. 그 쉼 후에 어거스틴은 새로운 출발의 의미로 세례를 받게 된다.

그 감격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그리하여 같이 세례를 받고 나니 과거의 그릇된 생활에 대한 우리의 불안이 전부 사라졌습니다...나는 당신을 찬양하는 찬송과 노래를 듣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당신 교회의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얼마나 깊이 감명되었는지 모릅니다.

그 노랫소리는 내 귀에 흘러 들어갔고 그 진리는 내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안으로는 내 경건의 감정이 차고 넘쳤고 밖으로는 눈물이 넘쳐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의 눈물이었습니다."

사실 이 세례의 감격은 앞으로 오스티아에서 경험될 신비적이고 관상적인 기쁨(contemplative delight)을 미리 맞보는 경험이었다.

세례를 통해서 교회와의 일체감을 경험한 어거스틴은 자기의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려는 열망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의 일행과 어머니와 함께 밀란을 떠나 아프리카로 돌아간다. 그들이 아프리카로 돌아가기 위해서 항구도시 오스티아(Ostia)에서 배를 기다

리며 얼마간을 머물게 된다. 어머니 모니카와의 오랜 동안의 갈등을 해소하고, 이제 믿음 안에서 온전한 일치를 이룬 상태로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지내는 세월이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가히 천상의 기쁨을 누리는 듯한 행복이었을 것이다. 어느날 어거스틴

은 어머니와 단 둘이서 집안의 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창가에 기대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가없는 영성적 세계에 대한 신비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 경험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마음 속에서 이처럼 열정적으로 타오르는 사랑으로 인하여 "항상 같으신 분"(불변자)을 향하여 오를 때 점차적으로 여러 계층의 사물들을 통과하여 해와 달과 별들이 지상으로 빛을 보내는 저 하늘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명상하고, 말하고, 감탄하면서 오르다가 우리의 마음에까지 왔었고, 나중에는 그것마저 초월하여 더 올라가 당신이 진리의 음식으로 항상 이스라엘을 먹이시는 곳, 다함이 없이 넘치는 그 풍부한 영역에 다다르고자 하였습니다...우리가 이

처럼 말하고 전심전력을 다하여 그 지혜를 향해 목말라 하는 동안 우리는 순간적으로 그 지혜와 약간 접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긴 한숨을 쉬면서 "영의 첫 열매"를 그 곳에 묶어 둔 채 우리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인간의 말로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오스티아의 비젼이 과연 기독교 영성사에서 전통적으로 인정하는 기독교적 신비적 차원과 같은 것이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무란트(John Mourant)는 십자가 성요한의 신비적 체험을 표준으로 하여 어거스틴의 경험에는 하나님과의 일치의 경험이나 압도하

는 하나님과의 강한 친밀감을 찾아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신비경험의 일반적인 현상인 고조된 감정의 움직임도 없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오스티아에서의 경험은 영성적 세계에 대한 지복(至福)직관에 대한 철학적인 관조에 불과한 것이라고 무란트는 주장한다. 물론 어거스틴은 감성적인 단어보다는 플라톤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어거스틴에게 있

어서는 그것이 내적 경험을 표현하는 가장 편안한 방식이었다. 어거스틴의 내적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거스틴 자신에게 이미 익숙한 플라톤적인 표현방식에 대한 이해가 고려되어야 한다. '하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든가 '그 지혜와 약간 접촉을 하였

다'라는 등의 표현들은 플라톤적인 용어를 빌어쓴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전통적인 신비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인 감성이 넘치는 경험과 같은 차원의 것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더우기 무란트가 주장 하는대로 신비적인 경험에

서 반드시 감성적인 현상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나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등을 우리는 분명히 신비가의 계열에 넣지만 그들 경험의 묘사는 대단히 사변적이고, 지성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들의 하나님 경험은 직접적이고 비상한 것이었다. 이러한 신비가들에 비하면 어거스틴의 오스티아의 경험은 훨씬 감성적이고 강렬하다. 어거스틴의 "전심전력을 다하여 그 지혜를 향해 목말라 하는 동안 우리는(어거스틴과 모니카) 순간적으로 그 지혜와 약

간 접촉을 하게 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은 매우 강렬하고 직접적이고 단순한 접촉의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무란트가 어거스틴의 오스티아의 경험을 과소 평가하는 이유는 그의 경험이 기독교적이라기 보다는 플라톤 주의에 기반을 둔 철학적인 경험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밀란의 한 정원에서 경험된 회심의 사건을 간과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밀란의 사건은 철학적이라기 보다는 분명히 계시적이고 신앙적인 사건이었다. 전적으로 기독교적인 것이었다. 정신적으로 그가 여전히 플란톤주의적이라 할지라도 어거스틴의 의지는 이미 모니카와 일치되어 있어으며 동시에 보다 성서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

다. 그러므로 오스티아에서의 어거스틴의 비젼은 그의 초월적인 삶을 표현하는 방식에 비추어 볼 때 기독교적일 뿐만 아니라 신비적인 차원임에 틀림없다.

언더힐(Underhill)은 카더린(St.Catherine of Genoa)으로부터 균형잡힌 신비적인 경험의 표준을 제시하고 있다. 그 표준이 말하고 있는 믿을만한 근거는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 속에서 느끼는 평화와 기쁨의 경험'이라고 한다. 그러한 근거에 비추어 볼 때

어거스틴의 신비적 경험에 대해서 보다 확실한 신뢰를 구축하게 해준다. 어거스틴은 오스티아에서의 주어진 순간적인 경험이 계속된다면 그것이 바로 부활 후에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그것과 같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만일 이러한 순간(오스티아에서의 신비적인 경험)의 경험이 지속이 되고 다른 낮은 종류의 영상들을 우리 마음에서 제거한다

면, 그리고 이 순간적인 경험만이 그것을 관상한 우리를 즐거움으로 황홀케 하고, 흡수하고, 포괄함으로써 우리의 전생이 영원히 지금 우리가 한숨을 쉬며 바라고 있는 그 순간의 경험과 같아진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네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

다'(마 25:21)라고 말씀 하신 뜻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순간적인 경험과 동시에 "다른 낮은 종류의 영상들을 우리 마음에서 제거한다면" 이라는 조건이 제시되고 있다. 이 말을 덧붙임으로서 어거스틴은 영성적 형성은 완성을 향해서 지속적으로 진보되어야 한다는 여운을 남겨주고 있다. 그것의 완성은 "우리가 다 부활할 때요, 우리가 다 변화할 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오스티아 비젼에서 신비적인 하나님과의 일치의 경험은 하나의 완성을 향한 '맛보기요' '강력한 자극이요' '시작'일 뿐 결코 완성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IV. 나오는 말

지금까지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독자의 입장에서 전통적인 틀을 통해 그의 영성적 여행을 분석해 보았다. 특히 {고백록}을 하나의 영성적 여행에 대한 자전적인 기록이라고 할 때 7권, 8권, 9권은 가장 명백한 여정을 드러내 주고 있다. 이 세권에서 어거스

틴은 3단계의 영성적 형성의 패턴을 따르고 있음을 고찰해 보았다. 즉 영성적인 불안, 회심, 영성적 평화들이다. 7권에서 어거스틴은 죄의 대한 확실한 인식을 통해서 내적인 긴장을 경험한다. 8권에서는 그의 영성적여행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여기서 그는

영혼의 '새로운 중심'을 경험한다. 이 어서 오스티아의 정원에서 경험된 계시적인 음성과 성서의 말씀은 새로운 영성적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여기서 비로소 전적인 기독교로의 회심을 경험한다. 9권에서 어거스틴은 영성적인 평화의 항구에 도달한다. 신비

적인 경험을 통하여 그는 기쁨의 결단과 확실성과 자유라는 영성적인 열매를 맛본다. 오스티에서의 이러한 급진적인 영성적 경험의 사건은 그로 하여금 천성을 향한 오름의 여행을 시작케 했다. 하나의 영성적 여행을 맺으면서 또 하나의 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어거스틴의 영성적 여행이다. 그는 영혼 깊은 곳을 향해서 오랜 동안 여행을 해왔다. 영혼 깊은 곳에 다다랐을 때 다시 그는 하나님 그 분을 향하여 상승적인 여행으로 인도받게 된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영성 형성의 과정을 전통적인 틀에 비추

어 볼 때 그의 영성적 여행은 영혼을 향한 내림과 하나님 자신을 향한 오름이 동시에 일어나는 '순례모델'로 설명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철학적인 배경이 그러하듯이 플라톤적인 구조를 지닌 하나님과의 일치를 향한 '상승모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진 영성가들의 기록들은 한 가지 목적 즉 '영성 형성'을 향하여 갖가지 다양한 길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틀들은 오늘 영성적 순례자들에게 수많은 통찰력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틀들을 바르게 이

해하고, 그 틀들을 하나의 거울로 삼을 수 있다면, 중간지점과 행선지와 목적지가 분명한 영성적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영성적 여정을 지도하는 영성 지도자들에게 이러한 틀의 이해는 큰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으

로 확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