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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 (4) / 성 어거스틴의 영적인 발전 - 칼 아담(Karl Adam) 지음,구영철 옮김

영국신사77 2020. 3. 25. 13:36


(본 역서는 출간 이전에 미리 이곳에 게재된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의 영적인  발전

 

 

어거스틴 사후 1500년 회고 기념 강연

1930년 5월 4일 튀빙엔 대학교 카톨릭 신학부

 

 

칼 아담(Karl Adam) 지음

구영철 옮김

 

인문 과학의 영역에서 어거스틴은, 오늘날 우리가 학문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는 그러한 소수의 인물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먼저 이 사실은 그의 변화무쌍한 인생이 서양 역사의 중차대한, 참으로 결정적인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하는 점에 있습니다. 한 이교도 아버지와 한 기독교 신자 어머니의 아들로서 그는 저 열광적인 흥분의 시대, 곧 이교문화와 기독교가 마지막 화해를 위해 애를 썼던 시대를 자신의 인격 안에서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의 소년 시절에 여전히 배교자 율리안의 투쟁 구호가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율리안은 가장 극한 폭력으로써 그리스도의 영향력에서 로마 제국을 빼돌려 이교 제신(諸神)에게 다시 바치기를 원하였던 사람입니다. 생애의 절정에서 어거스틴은 중차대한 사건들의 증인이 되었는데, 곧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카톨릭 국가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와 로마 제국, 감독과 황제를 서로 동거동락 하게 하였던 사건들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노령에 접어들었을 때에, 동 로마와 서 로마의 분리를, 즉 어떤 의미로 서방의 탄생 시간을, 그러나 또한 동시에 게르만 정신의 탄생 시간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미 알라리히가 로마를 침공하였고, 게르만 지파들은 서 로마 제국을 쳐서 그 잔재로 자신의 제국들을 건설할 참이었습니다. 열병으로 침대에 누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육안으로, 게르만계 반달족이 그의 감독 도시(히포)를 포위하였을 때에, 새로운 사람들을, 즉 한 새로운 미래를 담당할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그의 외적인 운명에 따라 볼 때에도, 과도기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한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서, 이교 문화가 기독교에 의하여, 로마 문화가 게르만 문화에 의하여 극복되었던 시대와, 형성 중인 서양의 최초의 윤곽들이 역사의 하늘에서 어슴푸레 그려지기 시작했던 시대를 직시하였던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살았던 외적인 시대 상황의 독특한 특성 이외에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성자 자신의 인격입니다. 이미 생전에도 상당히 읽혀졌던 「고백록」1)에서 그는 거기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러한 한 영혼의 역사를 보기 드문 필체로 그리고 있는데, 이 필체는 아주 복잡다단하고 깊이 숨어 있는 영혼의 과정들을 그 본원적인 신선함과 향내를 풍기는 가운데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비록 그가 부차적으로 그 시대의 정신에, 곧 고대 말기의 정신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할지라도, 무엇보다도 심리학적 심리 관찰과 심층 관찰에 대한 관심을 통하여 현대적인 어느 현대인과도 같이, 그는 본질적으로 그의 정신 세계에 힙 입고 있습니다. 단순한 세상 감정으로 대담할 정도로 자기 자신의 내면 세계를 그냥 뛰어 넘어섬으로써 자신을 등한시하고 외부 세계에 전념하던 고대 사람의 입장과는 현격하게 달리 그의 사유에 있어서 내적인 사람, 곧 인간 영혼은 가장 본래적이며 가장 가까운 의미 있는 성찰 대상과 인식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게 볼 때에 어거스틴은 의식적인 경험주의자였습니다. 전대미문의 섬세함과 정확성을 가지고, 진정 "생리학적 심리학"2)을 가지고서 그는 자기 성찰과 타인 성찰의 노정에서 인간 영혼의 삶에 대한 표현들과 기능들과 법칙들을 서술하였습니다. 여전히 오늘도 어린아이의 영혼의 삶과 그의 놀이와 눈물과 거짓말에 대한 그의 진단들과, 연민과 비극적인 것에 대한 심리 묘사와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한 심리 묘사 등은, 이에 대해 말하여 질 수 있는 것 중에서도 최상에 속합니다. 아마도 그는 일말의 의식의 사실들의 토대로부터야 비로소 실재성의 굳건한 대지로 들어갔다 할 수 있습니다3). 그리고 비로소 인간 영혼 안에서 발견된, 논리적이며 윤리적이며 미학적인 제 공리(公理)의 기존 사실로부터, 이 실체적인 선험(先驗)으로부터야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실재성에 이르는 어떤 확실한 길을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거듭 그에게 있어서는 심리학적인 성찰이 형이상학적 대상들의 사전 단계요 근거였습니다. 참으로 그는 심리학적으로 훈련된 눈을 가지고서 심지어 신적인 삶의 심층을, 하나님의 삼위 일체적 존재를 들여다보고 인간 영혼의 삶을 비유로 삼아 삼위일체의 내부 삶을 선명하게 그려보고자 과감하게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적-심리학적인 정신 자세가 그의 탐구 자세에 부여하였던 것은, 우리가 특히 어거스틴 적이라고 느끼는 그러한 실재성에 가까움과 그러한 뜨거운 구체성과 선명함과 동시에 또한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 정신 자세는 허무맹랑한 것에서 그의 사유를 지켜주고, 그가 제 아무리 높이 정신의 날개를 펼쳤다 하여도, 모든 인간적인 인식의, 그러나 또한 모든 신학적인 인식의 불완전함과 제약성에 대하여 그를 무지한 상태로 두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가 '박식한 무지'(docta ignorantia)4)란 말을 사용했다고 하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누구와도 달리 어거스틴은 위대한 신학자 중에서도 심리학자였습니다. 또한 그의 천재적인 통찰력, 즉 미리 예감하는 동시에 미리 느끼고 포착하면서 궁극적인 가능성들과 맥락들을 감촉하는 능력은 그의 심리학적인 재능에 뿌리를 두고 있기도 합니다. 그가 새로운 고랑을 파지 않았거나 적어도, 그 해결을 위하여 수 백년 간이나 애써 왔고 또 애쓰고 있는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싶은 신학 분야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이미 얻은 결과들의 순수 논리적인 추론과 괄호 묶음을 무시하였고, 그의 사상들의 보다 말끔한 조직적인 구축과 확장 등을 무시하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창조적이며 언제나 새롭게 시작되고 새롭게 태어나는, 그의 심리학적 내부 고찰과 심층 고찰의 풍성함과 관계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철학적인 통찰들과 신학적인 통찰들은 상당히도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고도의 통일성으로 총괄하여서 그들에게 그의 체계의 전체 안에서 그들의 특별한 장소를 배당하고자 하지도 않았거니와 적어도 그렇게 하기에도 충분치 않았던 것입니다. 적지 아니한 그의 논제들에 대하여 오늘날 여전히 그 학술적인 연구가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과, 어느 정도의 권리를 가지고 어거스틴의 명제들에 의존하지 아니하는 그러한 기독교 공동체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 사실도 바로 이러한 점에서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한 생동력 있는 사람으로서, 즉 먼저 자신의 질문들을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끄집어내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에게 문제들을 제시하는 그러한 외적인 대상을 결코 그 단순한 문제 자체에서 보려고 하지 않고, 언제나 자기 자신과 관계시키는 가운데 그것을 보려는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연구하였습니다. 그런 한에 있어서 그의 신학은 체험의 신학입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거룩한 것과 신성한 것이 단지 체험의 과정으로서 혹은 의식의 사실로서 존재하기나 하는 것 같은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도리어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 진리인 동시에 학문이 아닌 진리 자체나 학문 자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학문은 그 자신과의 관계성을 통하여 비로소 참으로 살아 있고 풍성하게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그러했습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얼마나 다른 길을 걷고 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주체, 곧 신학자는 대상(객체), 곧 계시의 말씀의 고상한 실재성 앞에서 전적으로 뒷전에 물러나 있습니다. 신학을 한다는 것은 여기서 침묵의 경외심으로 하나님의 말씀, 이것만 듣고 해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주체성을 벗어나서, 모든 개인적이며 문화사적이며 시대사적인 정조들과 숙고들에서 온전히 벗어난 가운데 진리 자체, 곧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그 순수성과 풍성함 가운데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 토마스의 작업 방식을 수놓는 이 유일한 파토스는 순수 사실성의 파토스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결한 봉사의 파토스입니다. 이렇게 모든 주체성에서 벗어나는 일로부터 모든 시간에서 벗어나는 일이, 곧 전적으로 타당한 것, 초시간적인 것, 영원한 것이 흘러나오나, 다른 한편으로 또한 토마스주의 적인 교리방식의 냉랭한 것, 뻣뻣한 것, 비인격적인 것이 흘러나오기도 합니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그의 인격과 그의 시대와는 뗄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신학은 적지 않게 시대 조건적이요, 상대적인 것을 그 자체에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바로 그 때문에 일깨워주고 불을 일으키고 있다 할 수 있으며 오늘날까지 이 불을 일으키는 힘에 있어서 잃은 것이 하나도 없다 할 수 있습니다.

 

II

 

이로써 어거스틴이 이미 그의 심리학적인 입장으로 볼 때에 현대인들에게 가까이 있다면, 즉 어느 위대한 스콜라 신학자들보다도 더 가까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그 자신이 그러했던 바 그러한 사실을 통하여, 즉 그가 그 자신의 삶을 살았던 그러한 특별 방식을 통하여, 그의 생애의 특유한 리듬을 통하여, 그의 특별한 삶의 스타일을 통하여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어거스틴은 삶의 여러 수수께끼에 눈이 뜨이기 시작하였을 때, 카톨릭 교회의 삶 공동체와 사랑의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경건한 어머니 모니카는 아마도 그가 어려서부터 그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마음에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세례를 받지도 아니했거니와 철저한 교회 교육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고독한 자로 성장했던 것입니다. 처음에 그의 이교도 아버지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제어하기 어려운 삶의 쾌락과 무제한적인 명예욕과 생동감 있게 번득이는 정신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 즉 한 부드러운 유연한 심성과 섬세한 영적 감각과 순전한 내적 경건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그 안에서 꿈틀거렸다는 사실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열정적인 감각성의 온 정열을 다하여 이 세상의 즐거움에, 곧 외적 명예와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일에, 무엇보다도 사랑의 자극에 탐닉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것 말고 내 마음을 즐겁게 하였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5) 그는 한 이교도였습니다. "내가 비어 있으면 있을수록..., 내 영혼은 건강하지 못했고, 종기 투성이가 되어서 바깥 세상으로 내던져졌습니다."6) 물론 또한 이교도로서 그는 어머니를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얌전하였습니다." 그는 "영혼이 없는 것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7) 이 뜨거운 정열적인 시절에 어머니의 유산은, 그가 친구들을 찾고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러한 여성적인 부드러움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이와 같이 동일한 생각을 가진 자들과의 영적인 연대성을 가지려는 그의 욕구는 전 생애에 걸쳐서 드러나며 후에, 그의 사랑의 신학과 공동체 신학이 그 위에서 성장하였던 바 그러한 자연적인 토대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키케로(Cicero)가 지혜 추구에 대하여 논하였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란 작품을 읽게 되었을 때에, 어머니의 기도와 눈물 덕택으로 말미암아서 어머니의 유산은 계속하여 제법 풍성하게 전개될 수 있었습니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서"8) 그는 지혜의 불멸성을 추구하고자 열망하였습니다. 그 책은 "이 학파나 저 학파가 아니라, 진리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진리 자체를 사랑하고, 탐구하고, 얻고, 붙잡고, 강하게 포옹하도록"9) 그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오, 진리, 진리시여, 그때에도 내 영혼의 골수가 얼마나 내적으로 주님을 찾아 숨을 헐떡거렸는지요!"10) 여기서 이미 가장 내면적인 어거스틴이, 곧 열정적인 진리의 추구자, 자기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얻고자 애쓰는 사람, 하나님을 얻고자 싸움을 벌이는 사람으로서 나타납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그 어떤 전문적 학문의 주도 명제와 교조가 아니라, 또한 그 어떤 한 조각의 실재성을 단순히 탐색하고 목록으로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실재성의 가장 깊은 근원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원(原) 근원들과 배후 근원들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입니다11). 또한 이것은 다시금, 한 이론적인 지식 취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실제적인 입장 천명을 목적으로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추구하였던 진리는 그에게 있어서 삶이었습니다. 'veritas'(진리)와 'beata vita'(행복한 삶)는 그에게 있어서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질문과 사유는 그의 삶의 의지의 깊이로부터 태어난 것이었는데, 이것을 실존적인 질문이자 사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영혼을 불태웠던 진리에 관한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전반적인 하기의 발전을 그릇된 빛 가운데 보지 않기 위하여, 이미 여기서 동시에 확정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 질문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나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자신이 거듭 설명하듯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처음부터 그 안에서 살아 있었습니다. 이것을 그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거스틴은 처음부터 그 어떤 단순한 의미로 볼 때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것도 그의 어머니에게서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그렇게 열정적으로 소화한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란 책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서 꽤 언짢은 실망이었던 것입니다12). 참으로, "그리스도의 본질의 맛"으로써 여러 차례에 걸쳐 그는 그에게 다가온 세계관 체계들을 검증하였습니다13). 그가 마니교에 빠졌을 때에, 그에게 있어서 "미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14)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들과 결별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그들의 가르침에 "그리스도의 본질의 맛"이 없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철학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를 묶어 둘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15) 우리는 '어거스틴이 인식적으로가 아니라, 감성적으로 그 자신이 생각하고자 했던 것 이상으로 그 당시에 벌써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 그의 진리 추구는 무엇과 관계되었습니까? 그것은 그의 하나님 개념이 소화해 낼 수 없을 정도로 짐을 가중시켰던 그러한 일종의 난점들과 반 명제들을 해명하는 일과 관계되었습니다. 그의 그 당시, 대중적인 스토아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물질주의적인 사유 방식에 있어서는, 그 어떤 방식으로든 질료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떠한 실재성도 있지 못했거니와 또 있을 수도 없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나온 모든 존재의 질료성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아마도 하나님이, 신이 아닌 모든 것을 자체에 빨아들이는 그러한 끔찍하게도 생긴 해면과도 같이, 무한히 질료적인 연장으로 존재하는가? 하여튼 그에게 있어서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사람의 형태로 생각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무엇보다도 카톨릭 교회에 진노를 발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카톨릭 교회가 그러한 단순한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하나님 개념을 대변하는 까닭에 그러한 하나님 사상이 들어 있는 구약을 굳게 고수하고 있다고 하는 선입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그를 괴롭히는 질문은 무엇보다도 사유를 약속해 주는 어지간한 하나님 개념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런즉 이 질문은 반(反) 카톨릭 적으로 첨예화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하나님 개념을 추구함으로써 다른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악과 질병과 죄와 죽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와 관계될 수 있는가? 그의 물질주의적 전제에 따르면 그에게 있어서 또한 악은 다소 질료적인 것, 곧 질료적 실체였습니다. 이 악의 실체는 어디서 오는가?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의 실체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인가? 아니면 그것은 도리어 악한 마귀의 권세 물은 아닌가? 이 질문 또한 반 카톨릭적 르상티망의 결과였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카톨릭 교회가 그 권위를 지극히 강조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악한 것, 곧 죄를 인간의 자유 의지로 돌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카톨릭 교회는 또한 심리적으로 악한 것, 즉 질병과 죽음을 적어도 간접적으로나마 자유 의지의 오용으로, 곧 아담의 원죄로 돌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어거스틴의 감각적이며 열정적인 정신이 그 당시에 느꼈듯이, 이러한 그에 대한 교회의 응답은 어거스틴 안에 필경 심각한 대립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이 다소 질료적인 것, 한 실체였다면, 어떻게 사람이 그의 피조물적인 무력함 가운데 스스로 악을 일으킬 수 있었는가? 교회에 대한 그의 반대가 감성적으로 아마도 더욱 자극되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가 악하다 불렀던 바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거니와 또 포기하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카톨릭 교회에 대한 그의 반대 감정은 또한 바로 이 문제로부터 항시 새로운 양식을 공급받았던 것입니다. 교회가 그러한 문제와 비슷한 난점들에 대하여 적절한 토대를 제공하지 못하고, 언제나 단지 신적인 권위의 비중만을 제공하였다는 사실이 그의 영혼을 진절머리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한 자랑이 자유스런 탐구의 억압, 참으로 진리애의 억압을 의미하지 않았습니까?

그와 같이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진리의 문제는, 요컨대 그가 교회가 제시하는 길과는 다른 길을 추구하고 찾아야 했다고 하는 의미로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교회 없이 그리고 교회에 반대하여 탐구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거스틴이 교회에 대한 이러한 반대 입장을 취한다는 사실, 그가 그의 이해들을 끊임없이 교회의 가르침과 비교하고 교회를 비난하고자 극구 애쓰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이 심리학자에게서 교회의 권위가 그렇게 그 당시에 벌써 그의 무의식 안에, 그가 이것을 분명히 의식하였을 때 보다 더 깊이 뿌리를 내렸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교회가 요구하는 권세로서 그 당시에 이미 그의 영혼에 있어서 그로 하여금 궁극적인 진리 탐구를 카톨릭 진리와의 논쟁으로 이해하도록 하였던 까닭에 내적으로 교회에 반대해야 했기 때문에, 교회에 반대하였던 것입니다. 그 어린 아이 안에 있던 어머니는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 어린아이는 어머니에게 대들었습니다. 19세의 어거스틴은 마니교도에게 갔습니다. 여기서 그는 그가 추구하였던 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성장해 나온 다른 영지주의와 비슷하게도, 거기에 단순한 하나님 개념만 들어 있다 하여서 구약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론과 그리스도론을 그럴듯한 학술적이며 천문학적인 논증들로 강화시켰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진리, 진리"에 관하여 말하였으며 자유스러운 탐구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모든 믿음을 맹신이라고 정죄하였습니다16). 나아가 그들은 죄와 악을 자기 의지의 무행위라 설명하지 않고 빛의 하나님과의 투쟁을 벌이는 한 악한 원리의 발현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그의 비판적 사유의 모든 요구들이 채워진 것처럼 보였으며, 가장 중요한 것, 즉 살 권리와 온전한 감각적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확보된 것 같았습니다. 어거스틴은 9년간 이 정열적인 동방의 이원론에 헌신하였으므로, 어머니에 대한 저항과 교회로부터의 이탈이라고 하는 극점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의 가장 심오한 그리움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진리애는 너무도 정직한 것이었으므로 마니교도들의 천문학적인 지혜와 그들의 "잘 차려입은 사환"17) 파우스투스에게 속아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그들의 가르침에는 그리스도의 본질의 맛이 없었다"18)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회의주의 철학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통하여 이 결과에 이르렀는데, 그것들은 그에게서 마니교의 전 교리 체계를 뒤흔들어 놓고 말았던 것입니다. 심한 좌절로 말미암은 이 분위기 안에서 그는 384년에 법정 웅변 교사로 밀라노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처음에 그로 하여금 전적으로 의심과 절망을 품게 하였으나, 심층적으로 그의 회심의 위기를 불러 일으켜 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섬세한 마음의 소유자요 처세적이며 경건한 감독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들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카톨릭 신자들의 하나님 개념과 믿음 개념에 대한 자신의 거절적인 판단들이 그릇된 편견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밀라노에서 겪은 체험들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 "우리 주님이시오 구세주이신 분에 대한 카톨릭 교회의 믿음이 깊이 내려앉았다"19)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의 영혼은 그것을 "매일 더 많이" 마셨습니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회의 그리스도 상(像)이 밀라노에서 그를 매혹시켰던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영혼을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계몽에 열어 주었고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한 주장을 매력 있게 만들었던 것은 다시금 어머니의 오래된 유산, 곧 모니카에게서 전수된 그리스도에 관한 청소년기의 영향들이었습니다. 이미 그는 이런 계획을 품게 되었습니다: "내 부모님이 세워주신 그 곳에 내 발을 굳게 디뎌야지."20)

그러나 처음부터 그를 괴롭히고 교회와 갈등을 일으켰던 두 주요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참된 하나님 개념에 대한 문제와 악의 기원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그것들은 그의 물질주의적인 전제에, 곧 모든 존재자가 필경 물체적이라는, 즉 하나님과 악이 어떠한 물질적인 실체들로서 이해될 수 있다고 하는 전제에 뿌리를 두었습니다21). 그는 물질(질료)로 곤란을 겪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곤란을 겪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를 물질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그러한 부질없는 시도는 그를 단순히 감내하기 어려운 투쟁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찢겨지고 말할 수 없는 비애를 겪는 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시기에 어거스틴은 파우스트와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괴테의 파우스트와 어거스틴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몇 가지 특징들을 언급한 것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 양자에게서 진리와 영혼의 지복을 얻기 위한 동일한 열정적인 고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양자에게서 천문학과 악령에 빠진 일, 여인 사랑과 이 세상을 섬기는 일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양자에게서 진리에 대한 좌절과 죽음에 대한 그리움이 나옵니다. 그리고 동시에 발전의 마지막을 미리 이야기 해 보자면, 양자에게서 "지복으로 전개되는 사랑의 계시"를 통한 동일한 구원의 노정이 나옵니다.

그의 분열되고 짓눌려진 영혼의 염려로부터, 그의 물질주의적 사유의 곤궁에서부터 그를 구해준 것은 두 번째 위대한 체험이라 할 수 있는 신(新)플라톤주의 서적들을 읽은 일이었습니다. 고대의 철학적 체계에서 정신적인 것이 플라톤과 그 후손들의 체계에서만큼 그처럼 그 본래 존재와 본래 법칙에 있어서 풍성하게 인식되고 알려진 것은 없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신플라톤주의 서적 - 무엇보다도 플로틴의 「엔네아데」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 에 점점 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순수 영적인 것의 본질과 실재성이, 곧 변화하지 않고 보편타당하며 필연적인, 그러기에 사라지고 가시적인 사물들보다 더 심오하고 더 참된 존재를 소지하는 그러한 한 영적 개념 세계의 실존이 더욱 더 그에게 반짝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의심을 물리쳤던 해방하는 인식, 곧 비물체적인 한 존재, 질료적 존재보다 더욱 뛰어난 한 존재, 한 순수 영적인 존재가 있다고 하는 인식이었습니다. 이로써 물질주의적 사유가 관념론적 사유로써 극복된 것입니다. 어거스틴에게서 그 결과들은 스스로 일어났습니다. 불변하는 개념 세계의 원 근거인 하나님은 순수 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영혼도 이 불변하는 개념들의 유기체와 담지자로서 순수 영적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어거스틴의 사유에 있어서, 질료적 실재성과 충돌하는 일없이, 흡사 하나님과 영혼이 그 영원한 실재성을 가지는 장소가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차후로 그는 공간과 연장의 문제로 놀라는 일없이, 하나님과 영혼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또한 동시에 다른 문제, 곧 악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원 진리와 원 실재성으로서 존재의 충만함, 곧 불변자, 참 존재이기 때문에, 비신적(非神的)인 것, 반신적(反神的)인 것, 곧 죄와 악은 어떠한 질료적인 것도, 요컨대 어떠한 존재자도 아니라, 본질적으로 존재의 결여, 존재로부터의 타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22).

이렇게 어거스틴은 모든 어려운 문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의 물질주의적인 사유가 없어진 동시에 물질주의적 하나님 개념과 그 이원론적 우주론이 사라졌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새로운 입장이 그에게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존재의 비밀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네 자신에게로 돌아가라! 진리는 속 사람 안에 거한다."23) 진리는 하나님이 영혼과 접촉하시는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양극, 즉 하나님과 영혼 사이에 이제부터 이 성자의 사유가 움직이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과 영혼을 알기를 갈망합니다. 다른 아무 것도 없는가? 다른 아무 것도 없습니다."24) 어거스틴은 자기 자신에게로, 마음의 고요함으로, 위대한 침묵으로 돌아갑니다. 어거스틴은 신비주의자가 됩니다.

어거스틴에게서 차후에 물질주의적 사유로부터 해방됨과 더불어 곧 카톨릭 기독교가 참된 기독교로 입증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특징적인 일입니다. 확실히 그 자체로 볼 때에 관념론으로 나아감으로써 카톨릭 교회로 나아가는 일이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로써 새로이 카톨릭 교회와 그 권위가 이미 처음부터 그의 무의식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살아 있었다고 하는 우리의 추측이 확증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가 질풍노도 시대에 교회에 제시하였던 그러한 모든 비난들이 그대로 사라졌던 순간에 교회는 유일한 참된 교회로 그의 정신 앞에 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무거운 짐을 떨구듯이, 옛 편견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25).

그러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신플라톤주의적 영 개념과 더불어 또한 유일한 카톨릭 교회와 유일한 카톨릭 진리가 문제없이 입증되었다는 사실이 확실하다 할지라도, 다른 한편으로 확실히 그가 이 카톨릭 진리를 그 당시에 아직도 신플라톤주의의 눈으로 보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카톨릭 교회에 대한 그의 고백은 모든 교의와 제도들에 대한 분명한 긍정을 포함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심정적으로 그 당시에 이미 온전한 카톨릭 교인이었으며, 그는 끝까지 이것으로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카톨릭주의를 그 당시에 아직도 신플라톤주의의 조명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달리 얘기하면, 그는 기독교를 그 당시에 아직도 본질적으로 신플라톤주의와 동일시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양 종교 체계들의 공통점만을 인지하였고 그 차이점과 반대되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 공통점을 무엇보다도 하나님 개념에서 인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순수 영이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영에 관한 신플라톤주의의 가르침을 그대로 원용하였는데, 그 당시에 그는 여전히 그 가르침이 범신론적인 색채를 띄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 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이 고백하였던 그 하나님은 확실히 모든 변화하고 물체적이며 감각적인 사물들 저 편에, 참으로 이것들과의 본질적인 반대편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영적인 것 자체의 저 편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전적 타자(全的 他者), 곧 모든 영적인 것과 비 영적인 것의 창조주적 원(原) 근거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는 오로지, 자신 안에서 무한히 풍성하게, 단계적으로 영적인 제 능력을 우주로 방출하며 사람에게 내어 비추는 - 참으로 인간 영혼이 저 신적-영적 권세의 한 부분으로서, 질서 잡힌 단계적 과정에서 다시금 그러한 신적-영적인 것으로 올라가서 환시(幻視) 가운데 그와 하나가 될 자격을 부여받는 그런 형태로 - 그러한 영적 존재의 최고 정점이었던 것입니다. 어거스틴 자신은 "떨리는 바라봄의 순간에"26) 신적인 것을 이 방식으로 건드렸다고 믿었습니다. 신적인 것은 모든 영적인 것과의 본질적 일치를 이루었고 모든 비 영적인 것과는 본질적 대립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세계상으로부터 도덕성은, 영적인 것, 곧 이러한 신적인 생명의 불꽃을 감각적인 것의 구속에서 해방하고 만유의 영과 사랑으로 일치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하여, 모든 비 영적인 것, 곧 육신, 몸, 감각성을 죽이는데 있었습니다. 감각성의 변화가 아니라, 그것을 죽이는 일이 신플라톤주의 윤리의 목표였습니다.

신플라톤주의가 영의 실재성에 있어서 그를 깨웠던 순간에 바로 이 플라톤주의를 통하여 터무니없는 신령주의에 빠지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이 위대한 성자의 형성 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진기한 비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계속적인 회심 이야기가 이것을 보다 극명하게 증거해 줍니다. 어거스틴은 바로 그 당시에 기독교를 신플라톤주의의 빛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는 전적으로 감각을 벗어나는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의 영혼은 너무도 부드럽고 양심적이어서, 철저히 이러한 감각을 벗어나는 길을 걸을 수 있기 전에는 감히 세례를 받을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이제부터 그의 쾌감적이며 정열적인 본성에 있어서 하나의 엄청나고 심각한 투쟁이, 곧 몸과, 이와 관계하는 모든 것에 대한 투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여성을 얻기 위한 투쟁이요, 여성을 반대하는 투쟁이었습니다. "한 여성의 포옹을 포기해야 한다면, 너무도 불쌍하다고 생각하였던"27) 어거스틴은 이제부터 어떠한 형태의 여인 사랑도, 심지어 혼인도 포기하는 것을 그의 양심의 의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포기는 그에게 있어서 그 당시에 복음적인 조언으로서, 곧 특별한 완전성 추구의 표현으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전폭적인 감각 초탈의 새 윤리가 요구한 도덕적 의무로서 나타난 것입니다. 마니교가 "육"을 한 오염된 원리라고 정죄하고 전수했던 그러한 영지주의적인 정죄는 신플라톤주의를 통하여 수정된 것이 아니라, 강화되었던 것입니다28).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의무적으로 이루어진 가정 생활과 주의 깊은 자녀 교육에 있어서"29) 이러한 것들의 위엄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여도, 필경 혼인 생활에서 다소 감각적으로 오염된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지혜로운 어머니가 그에게 추천하였듯이, 그러한 어떤 혼인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너무도 섬세한 감정을 소지하였기에, 여기서 절충안들을 만들 수 없었으며, 그의 그 당시 입장으로 볼 때에 혼인은 하나의 절충안이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그것은 격렬한 투쟁이었습니다. 두 "의지가 내 안에 있었는데, 곧 옛 의지와 새 의지요, 하나는 육적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이요, 이 둘은 서로 싸우며, 내 영혼은 이 분쟁으로 찢겨 졌습니다."30) 존경받던 수사학자 빅토리누스의 회심에 관한 충격적인 보고와 성 안토니우스와 그의 수도원들의 엄격한 회심자 생활에 관한 감동적인 소식은 더욱 깊게 그의 의지를 움직여 모든 감각성을 단호하게 부정하게 하였으며, 이 야수성에 사로잡힌 사람은 또한 이 가운데 신음하며 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자 결국 내적인 투쟁이 바깥 정원에서 그 정점에 달하였을 때에, 곧 그가 "모든 뼈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으라고 제 아무리 부르짖어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까닭에 심한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번민을 하였을 때에," 어린아이들의 말소리가 있어서 그로 하여금 성경을 펼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여기서 마치 새로운 눈으로 대하듯 이방인의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돌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장 13절 이하) 이 구절을 읽은 직후에 곧 그의 마음은 "매우 밝은 확신성의 빛으로 비추어지고 모든 의심의 어두움이 사라졌습니다."31) 어거스틴은 치유된 것입니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카톨릭 기독교로의 회심이었습니다. 그것은 어거스틴이 온전한 카톨릭 그리스도인이 되기만을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회심은 신플라톤주의의 베일을 쓰고서 일어났습니다. 물론 마음과 심정을 알아주시는 하나님은 또한 신플라톤주의라는 옷에서 기독교적 영혼을 보시고 이 영혼이 은혜를 달라고 외친 것을 들어 응답해 주셨습니다.

순전히 심리학적으로 판단해 볼 때에 어거스틴과도 같이 이러한 영적인 사람의 출현은 확실히 한 기나긴 발전, 곧 한 과정의 결과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의식의 주변에 혹은 하부 의식에 위치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청소년기의 인상들이 더욱더 모든 유사한, 특히 신플라톤주의에서 넘어온 정신적-도덕적인 인상들을 입었고 의식 분야의 테두리에서 쌓아 올렸던 것입니다. 그것들이 더욱 축적되면 축적될 수록, 의식의 중심에 저장된 다른, 참으로 대립되는 청소년기 체험들에 대한 그 압력은 더욱 강하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압력을 하나의 강한 감정의 긴장으로 느꼈습니다. 이 긴장은 그의 외적이며 내적인 체험들이 더욱 그 안에서 영적인 그리움들을 강화시키면 시킬 수록,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무제한적인 자기 평가절하와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과 상심의 느낌들은 이것으로 해소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밖에 정원에서 절망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였던 순간에 의식의 테두리에 쌓인 영적 체험들이 승리를 거두어, 갑자기 의식 분야의 한 중심에 들어와 여기서 단 한번 청소년 때부터 수집된 정욕의 체험들을 억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자신이 아주 갑자기 중생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그는 이 비약을 창조 초월적인 권세의 강림으로서, 은혜의 역사(役事)로서만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회심은 그 심리학적인 성격에 의하면, 청소년기의 종교적 인상들이 성숙한 사람 안에 다시 강하게 일어난 것, 곧 발현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어린아이 안에 있는 어머니가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우리는 달리 여기서 한 사람의 영적인 과정에 있어서 처음 종교적인 청소년기 인상들과 아울러 부모 교육에 귀속되는 그러한 엄청난 의미를 인지하게 됩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가 신플라톤주의적이라고 표현하였던 그러한 체험들과 확신들이 주요 요인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 심리학적인 분석으로써 어거스틴의 회심의 수수께끼를 다 드러내었다고 믿는 것은 지대한 오류일 것입니다. 심리학적인 수단으로써 우리는 회심의 과정을 서술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그 뿌리에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목표를 잘 설정하고 불굴의 인내로써 모든 신체-심리학적 규칙을 사용하는 가운데 어거스틴 안에서 일어났던 체험들의 교환을 그렇게 규정하며, 마지막까지 감각적인 사람으로부터 한 영적인 사람이 되었던 저 궁극적인 권세가 무슨 권세였는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목표를 잘 설정하면서 그 과정의 전향을 후에 방해하고 새 사람을 모든 험난한 재발에서 보호하였던 그러한 궁극적인 권세가 무엇이었는지 - 이와 같이 잘 역사 하는 궁극적인 권세의 본질이 심리학자의 체험에서는 언제나 접근할 수 없게 머물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이 입을 열며, 여기서 신학자가 입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 권세를 자신 안에서 역사 하는 것을 한껏 감촉 하였던 사람과 함께 자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은혜의 송가를 부르는 일만 하게 됩니다.

 

III

 

이후에 우리가 세례 받은 어거스틴의 영적인 발전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하는데, 어거스틴의 회심이 확실히 카톨릭 기독교로의 온전한 진지한 회심이었다는 사실, 그러나 그것이 신플라톤주의의 도움을 받아서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바로 어거스틴의 영성에 달라붙어 있는 강한 신플라톤주의적 요소들은 그의 신학적 전개와 성숙의 끊임없는 원동력과 가시요 자극제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의 이후의 전체적인 발전을, 그가 신플라톤주의로부터 내적으로 해방되었고 기독교의 본질적인 것 속으로 성장해 나아갔던 계속적인 과정으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만일 그가 자신의 발전 과정에서 끊임없이 신플라톤주의와 논쟁하지 않았다면, 위대한 성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며, 확실히 지금과도 같은 위대한 신학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인 고투는 어거스틴이 기독교에 대한 전체 이해를 얻고자 애를 쓸 때에, 세례 시에 받은 새로운 것을 그 본질적인 것을 놓고 질문하고 전해 받은 옛 것과 관계시키려는 것이, 즉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질문의 문제로, 그에게 있어서 한 관심일 때에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이미 강조하여 언급했던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어거스틴이 어린아이 시절부터 그리고 그의 질풍노도 시절 전반에 걸쳐서 적어도 감정적으로나마 구세주를 사모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마니교도로서 그는, "우리의 구세주, 하나님의 독생자"를 고백하였는데, 물론 여기서 그가 그 영지주의적인 전제들로부터 예수의 참된 육신의 본성에 대하여 고백할 수 없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32). 마니교와 결별한 이후에도 그는 성육신의 비밀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그는 그 당시에도 그리스도를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뛰어난 지혜의 인물"33)로 존경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교회에 들어갔을 때, 교회로부터 성육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카씨키아쿰에서 그의 제자들이 또한 단지, 본래의 의미로 아버지만을 하나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할 때에, 그는 그들을 호되게 꾸짖었습니다34). '그리스도는 참된 하나님이시오 전적인 사람이시다'란 믿음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에게서 어두워졌다는 요점은 그의 전체적인 이후의 이야기에서 찾아 볼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시다'라는 근본 전제와 '성육하신 하나님이 없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근본 전제에 있어서 어거스틴이 그의 회심 이후로 변화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아마도, 어떠한 것이 그리스도의 신성의 특별한 기능들에 속하며 기독교 본질의 구축과 확장에서 어떠한 것이 그의 신성의 특별한 기능들에 속하는가 하는 질문에 있어서 변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이에 대하여 제시하였던 그러한 뒤바뀐, 참으로 대립적인 대답들이 그의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변화된 입장을 통하여 제약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특징적인 일입니다. 그러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첨예화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신적인 진리이시기 때문에, 내가 구속함을 받았는가? 혹은 그리스도께서 내 인간적인 형제가 되셨기 때문에 내가 구원함을 받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오류에서의 구속이 관점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종을 통한 죄에서의 구속이 관점인가? 초기 시절에 어거스틴은 처음 답변을, 후기의 성숙한 시절에는 두 번째 답변을 선호하였습니다. 그의 신학 전체는 이 두 번째 답변의 연속선상에서 그 특별한 색채를 입었던 것입니다.

처음 결정적인 시기는 그가 사제가 되었던 시기인 391년으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아직 사제가 아니었을 때, 즉 387년에서 391년까지 그의 마음에는 회심하던 때의 그러한 정신 자세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였으나, 이러한 기독교를 여전히 신플라톤주의의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아직 그 본질적인 깊이에 들어가지 못했기에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가 그 진리의 내용에 따르면 본질적으로 서로 구분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플라톤이 카톨릭 국민 교회의 포괄적인 뒤바꾸는 권세를 체험하였다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그는 그의 체계 안에서 "단지 몇 마디 말과 문장만"을 바꿀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35).

요컨대 또한 어거스틴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비밀을 신플라톤주의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요, 그는 말씀, 진리,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용어적으로는 교회의 가르침의 토양에서 움직입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그는 이러한 신적인 말씀과 이 지혜를 이내 신플라톤주의의 'patrikos nous'(아버지의 영), 즉 일자(一者)로부터 발하면서 만물의 원상(原象)들과 본질들을 자신 안에 포함하고 창조적으로 설정하는 그러한 신적인 본원 권세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그 안에서 제(諸) 사물의 모든 본질이 근거를 두고 있고, 그것을 통하여 이 사물들이 현 모습을 얻고 있는 그러한 본원 진리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한에 있어서 그는 척도(modus)요 원형(原形, archetypon), 지음을 받은 세상의 궁극적인 최고의 형상(形象) 원리라는 것입니다36).

물론 어거스틴은 이미 상당히 의식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었기에, 이러한 사상들의 근거가 되는 신플라톤주의의 범신론과는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결연히 굳게 붙잡고 있던 것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라는 사실, 그가 한 영원히 지속되는 세상의 과정 가운데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지 않고 영원으로부터 그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또한 여기서 그는 제 사물이 내적인 자연적인 필연성과 더불어 창조주의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유스러운 창조주 의지의 결과라는 사실을 뒤흔들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분명하게 여기서 어거스틴이 신플라톤주의의 로고스론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억지로 맞추고 있다 하여도, 그에게 있어서 고귀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상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아들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안다는 것은 영원한 신적인 본원 진리 가운데 미리 그리고 함께 주어져 있는 변화 불가한 진리들을 직접 바라보는 것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37).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묵상적 신비주의, 즉 그리스도께서 곧 그러하신 그러한 진리 안에서 모든 불변하는 진리들을 파악하는 것이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직접적인 바라봄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자신과의 합일에 이르게 되는데, 참으로 그것이 이 삶에서 가능한 한, 심지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합일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38). 어거스틴은, 몇몇 특권을 부여받은 영들이 이미 지상에서 이와 같이 삼위일체를 직접 바라보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고, 물론 단 한번이 아니라, 일곱 단계로 방법론적으로 계속되는, 감각적인 것에서 초감각적-신적인 것으로 상승하는 가운데, 그러한 일을 체험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이 땅에서 전적으로 가능한 일로 간주합니다39). 그러므로 기독교는 진정한 철학과 동일하며40), 본질적으로 하나의 주지주의적인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또한 지복은 한 영원한 진리 체험에만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41).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그리스적인 것의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적으로 주지주의적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꼭 붙잡고 있고 결코 참된 오성(recta ratio)에서 벗어나지 않는 현자(sapiens)라는 것입니다. 참된 덕은 이러한 참된 오성에 있으며, 현자가 이 참된 오성을 소유하는 한, 그는 결코 죄를 지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42).

이 점에서 볼 때에 그리스도의 중재자 직분은 오로지 그의 신성적인 것에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는 영원한 말씀이요, 우리의 영을 내적으로 해방하고 비추시는 진리며 지혜이기 때문입니다43). 그러므로 기독교의 기본어는 믿음이 아니라 앎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어떠한 구원의 행위가 아니며, 그것은 단지 일종의 앎에 대한 내용물, 즉 그 자신이 진리를 직접 바라볼 능력을 부여받게 될 때까지, 육신적인 성향의 감각적인 사람이 사용하는 한 대체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가 첨예하게 헬라주의화한 것을 보게 됩니다. 어거스틴이 그것을 마니교도 시절에 물질주의화 하였던 것처럼, 그는 이제 신플라톤주의에 매혹되어 그것을 헬라주의화 하고자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구속을 가져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 곧 영원한 말씀과 영원한 진리로서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구속의 동화에 있어서 한 사후 보조적인 의미만 그의 인성에 귀속될 뿐입니다. 이것을 더 자세히 규정하기 위하여, 어거스틴은 다시금 신플라톤주의에, 특별히, 이전에 자기 마음을 정결하게 하였던, 즉 모든 감각적인 노력으로부터 정화시킨 사람만이 그 불변하는 진리를 바라볼 수 있다고 하는 신플라톤주의의 가르침에 결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자가 이러한 마음의 정화를 사람의 도덕적인 고결함에 돌리는 반면에, 어거스틴은, 만일 감각성에 빠진 사람에게 도덕적 이상, 곧 'auctoritas divini intellectus'(신적 오성의 권위)가 사람이 되신 분 안에서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나타나서 그를 촉구하여 본받게 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필연적으로 그 감각성에 빠진 사람은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가 그의 시야를 자기 자신에게 향하지 않고, 사람이 되신 분에게로 돌리며 이 사람이 되신 분의 겸비(humilitas)로써 자신의 영적 교만을 알고 또 이것을 버리는 것을 배운다는 사실을 통하여 신플라톤주의자와 구분된다는 것입니다44). 그러므로 전적인 성육신의 의미는, 성육신이 인간 본성을 영원한 진리로 특별히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며, 사람이 되신 분의 형태에서 신적인 삶의 규범들을 그 "강권적인 위엄과 찬란한 청명성" 가운데 흡사 눈으로 보듯 그렇게 만들며 결국 사람의 노력에다가 생생한 본보기(exemplum vivendi)를 제공한다는 사실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45). 이러한 열정적인 뜨거운 모범적 의미는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귀속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 새 생명으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증명해 주신 사실은, 지혜 추구에 있어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은 하나도 없으며, 우리가 어떠한 죽음의 양태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 시기에 어거스틴이 아직 너무나도 신플라톤주의자였기에,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 등에게 참된 구속적인 권세를 돌리지 못하고 그것을 기독교의 핵심과 중점에 두지 못했다고 하는 점입니다46). 그는 우리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에 관하여 침묵하며, 이 시절에 또한 범한 죄에 대한 통회나 회개에 관하여 아무 것도 말할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오직 성육하신 분을 본받는 가운데 그의 마음을 모든 불순한 연정에서 정결케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영원한 진리를 직접 바라보는 것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만이 관건이었습니다. 이 바라봄이야말로 우리를 구속하고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를 이해함으로써 얼마나 어거스틴이, 성 바울과 성 요한과 카톨릭 교회가 보았던 그러한 기독교의 참된 본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가는 그 자신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것으로부터 그러한 열정적인 절박한 마음이 설명될 수 있는데, 이 마음과 더불어 그는 자기 의사에 반하여 391년에 사제로 임명되었을 때에, 성경 전체를 철저히 연구하기 위하여, 그의 감독 발레리우스에게 부활절 때까지 휴가를 달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47).

물론 그것은 참으로 이 철저한 성경 연구에서 하나의 전적으로 새로운 발전의 시작과 이정표를 볼 수 있는 그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어거스틴의 사유는 개인적이며 전체적인 사유였기에, 새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일어났으며, 어거스틴은 전적으로 어디서나 자신의 초기의 사유 과정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별 생각 없이 기독교적 이해를 허용하였던 그러한 신플라톤적 표현들을 다른 설명 없이 간직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차후 신플라톤주의와 완전히 결별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평생 신플라톤주의에 관하여, 그가, 예레미야에게서 인용하는 방식으로든, 아니면 자기 자신의 숙고를 통해서든, 영원한 진리들의 변화불가성을, 곧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는 말씀을 알고 고백하였다는 사실을 신플라톤주의의 특별한 업적으로서 자랑하였습니다48).

그러나 그의 눈은 성경을 강독함으로써 열려지게 되었고, 그는 신플라톤주의에서 더 이상 단순히 공통적인 것만을 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대립들도 보았던 것입니다. 이 본질적인 대립은 무엇보다도 그의 세계 내재적인 일원론적인 하나님 개념과 그 정신 태도의 주지주의적인 면이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차후에 지속적으로 엄격히 오류를 피함으로써, 심지어 후에 그 자신의 이전 태도에 대하여 심히 항의하는 어조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 그의 새로운 통찰력이었습니다: "복되게 사는 것은 단지 오성에 따라서 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에 따른 삶일 것이다. 복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49) 내재적 태도의 자리에 초월의 태도가 들어선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논점이 되는 바 그러한 대립들은 차안의 세상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감각적인 것과 영적인 것, 육과 영, 감각적 세상과 오성적 세상의 대립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것은 차안과 피안, 시간과 영원성,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대립이라는 것입니다50). 그러므로 피해야 할 그것은 물체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감각적인 것의 오용과 동시에 영적인 것의 오용입니다. 내적인 전향, 곧 하나님께 원칙적으로 향하는 자세는 모든 도덕적인 것과 거룩한 것의 표징인 척도라는 것입니다51). 이 자세가 없을 때에, 사람이 자기 자신을, 또한 그의 가장 영적인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서 긍정할 때에 또한 그의 가장 아름다운 도덕들은 "도덕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악덕"52)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교만한 인식이 아니라, 겸손한 믿음, 세상 앞에서 어리석음인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인간의 겸손한 긍정이 기독교의 근본 행위입니다. 믿음은 더 이상 지식에 이르는 단순한 사전 단계가 아니라 그의 독자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믿음은 구원의 기능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본질적으로 의지의 행위요, 결단, 곧 배아적(胚芽的) 사랑이라는 것입니다53).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를 진지하고 내적으로 원하는 일과 행하는 일이 우선권이 있지, 더 이상 인식이 우선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주지주의자에서 의지주의자로 변화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현자가 아니라, 영적인 사람(spiritalis)입니다. 더 이상 진리가 최고이며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이 그러합니다. 더 말씀을 드리자면, 참된 진리는 사랑에 근거를 두며 사랑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390년에 완성된 「카톨릭 교회의 관습」이란 글에서 이미 그는, 물론 플라톤적인 경향의 의도로, 사랑을 그리스도인의 기본 속성이라 칭송하였습니다. 이제부터 그는 신약의 정신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면서 이방인의 사도 바울의 말씀을 수도 없이 반복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습니다."(롬 5장 5절) 참된 가장 심오한 실재성은 하나님 자신인 사랑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특별난 주안점이요, 그의 모든 행위에 참된 내용을 줍니다54). 'Dilige, et quod vis, fac!'(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행하라!)55) 사랑만이 참된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을 구분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의 상징으로써 표시를 하고, 아멘을 말하고 할렐루야를 노래하고, 세례를 받고 교회를 찾고 교회를 짓는다 하여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악마의 자녀들과 구분된다."56)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을 소지한 감독 어거스틴 이외에 다른 어떤 교부나 신학자도 그러한 내적인 감동과 중후함을 가지고, 그러한 감동적인 음색으로써, 성 바울이 전에 불렀던 그 사랑의 애가(愛歌)를 수용하지 못했으며 다음 시대에 계속 전해주지 못했습니다. 교회 예술이 그에게, 바로 그의 손에 한 타오르는 마음을 넘겨주었을 때에, 그것은 잘 본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내가 이 위대한 거룩한 사랑에 이를 수 있는가? 바로 여기에, 어거스틴이 신플라톤주의의 기독교에서 순수하고 온전한 기독교로 옮겨간 사건이 가장 눈에 잘 드러나는 요점이 들어 있습니다.

사제 시절에 그는, 하나님 안에 있는 새 생명의 참된 실체인 사랑을 하나님께서 일으키신다는 사실, 곧 성령의 행위라는 사실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참으로 또한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 있어서도 영의 새 생명은 만유 정신으로부터 침하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도 사랑의 "부으심"에 관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시절에, 적어도 이러한 사랑의 새 생명의 토대인 믿음이 사람의 업적이라는 사실을 고수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그가 사제 시절에 제 아무리 인상적으로 'massa peccati'(죄 덩어리)에 관하여 말하고 인류의 운명을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내어 맡겼다 하여도, 그 당시에 그는 여전히 사람의 본성이 전폭적으로 부패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57). 어거스틴은 이 시절에 아직 인류의 실재적인 상속 죄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인간 의지의 상속된 무지와 허약함을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 양자는 사람을 악에 치우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자유 의지의 능력과 주도권을 통하여 그리고 함께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도움을 받음으로써 모든 악한 동기들에 대하여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58). 그러므로 인간 본성은 그 근본 본질에서 아직 부패된 것이 아니며, 그런 까닭에 인간 본성은 자기 능력으로 적어도 새 생명에 이르는 시작, 곧 믿음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또한 아직 사제 시절에, 그 자신이 후에 아주 솔직하게 고백하듯이59), 인간적인 '할 수 있음'을, 가령 이후의 반(半)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도 같이60), 여전히 비교적 낙관적으로 판단하였습니다.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에 물들여지지 않은 핵심, 즉 그것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믿을 수 있는 바 그러한 한 건전한 의지는 인간 본성의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어거스틴 안에서는 옛 이교도적인 신플라톤주의적 유산, 곧 자신의 창조적인 능력에 대한 강력한 신뢰가 계속 활동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396년이 다가 왔습니다. 어거스틴은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의 목회의 음울한 체험들, 성직자들과 수도승들 가운데 임재한 도덕적 결여, 나아가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양심적인 자기 성찰 등은 그 안에서 이미 오래 전에, 그가 이미 이 삶에서 삼위일체 되신 분을 바라볼 수 있다는 가능성의 여지를 주었었던 바 그러한 대담한 확신을 파괴시켰던 것입니다. 그것들은 또한 이미 사제 시절에 그로 하여금 통회와 회개의 구원의 가치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게 하였습니다. 이 체험들로부터 그는, 한 친구의 질문들에 응답해 주기 위하여, 397년에 다시 한번 바울 서신을,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철저하게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또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다'란 사실이 그에게 분명한 확신이 되었던 것입니다61). 이 믿음, 바로 이것이 사람 안에서 최초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환히 비추어 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동요된 마음으로 그는 "오 사람아, 네가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 4장 7절)란 말씀의 깊이를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는 이 근본적인 인식을 후에 반 펠라기우스주의와의 논쟁에서 모든 방면으로 확대시켰습니다. 그 결과는 이러했습니다: 우리의 인간 본성은 자체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 안에서, 그 단순한 자연성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그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 아담의 죄가 우리가 개인적으로 행하는 것 속에서, 우리의 인식과 원함에서만 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 자체인 바 그러한 것 속에서 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부패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Sunt omnes homines... una quaedam massa peccati.'(모든 사람은... 하나의 죄덩어리다)62)

이 새로운 인식의 배경에서야 비로소 어거스틴은 기독교의 구속 교리를 그 중심에서, 그 핵심에서 포착하고 들추어내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그 본성 존재의 가장 깊은 심층에 이르기까지 부패되었기 때문에, 인류에게 있어서 한 새로운 본성, 곧 우리가 한 새로운 무죄한 사람 존재로 편입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구속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람 존재가 하나님께로 구속함을 받고자 한다면, 전적으로 새로운 토대와 뿌리를 얻어야 한다 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같이 죄의 저주 아래 있지 않고 본질상 하나님과 결합되어 있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서 나온 한 사람과 같이 동일한 공동 혈육과 공동 운명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결합되어 있는 그러한 한 새로운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이 이 땅으로 내려오고, 그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 그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구속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와 같이 기독교는 한 새로운 사람과 이 새 사람으로의 편입에 관한 은혜의 소식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새 사람은 그리스도이십니다63).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 안에 받아들여진 그 분은 단순히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 곧 새 아담, 인류의 머리, 구원의 공동체의 기원이자 처음 난 자, 참으로 그는 새로운 인류 자체이십니다64). 처음 아담 안에 전 인류가 이미 배아적으로 포함되었듯이, 이 둘째 아담 안에, 바로 그가 인격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전 새로운 인류가, 곧 모든 선택받은 자들의 단일체가 이미 배아적으로 함께 주어진 것입니다. 구속받은 인류는 예수의 시공적으로 전개된 인류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시요, 우리는 그의 지체입니다65). 그러므로 머리와 몸이 있는 곳에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 공동 존재와 공동 생명이 그와 같이 내적인 것이기에,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를 하나의 유일한 그리스도로서, 참으로 하나의 유일한 사람으로서 말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66). 어거스틴의 온전한 구원의 관심사는 이와 같이 우리의 인간 존재가 새 사람인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존재 적 결합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실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그것은 더 이상 이전에와 같이 성육하신 말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의 성례전에서 이 존재적 결합이 기초가 놓여지고, 성만찬에서 이 결합은 인격 대 인격이라는 모든 신앙인들의 단일체, 곧 하나의 유일하고 모든 구속받은 자들을 포괄하는 나(자아), 'unus homo'(단 한 사람)가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바로 성례전에서 이러한 새 사람과의 존재적인 결합이 일어나고 갱신되고 심화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성례전적입니다. 어거스틴은 초기 시절에 성례전과 더불어 어떠한 옳은 것도 시작할 줄 몰랐기에, 그에게 있어서 이제 그것은 아주 뚜렷한 상징, 참으로 기독교 본질 자체의 완성된 표현이었습니다. 성례전에서 그러한 일이 올바로 일어나는데, 오직 기독교 비의(秘儀)만이, 곧 '새 사람 그리스도와 우리의 존재적인 결합'만이 거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이 성 바울의 "한 중보자,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 곧 새 아담, 형제 중 먼저 난 이, 그리스도의 몸, 그의 머리와 그의 지체들에 관한 가장 심오한 사상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사상들은 확실히 전적으로 과거에 귀속되지 않았습니다. 안디옥의 이그나치우스로부터 암브로시우스와 위(僞) 암브로시우스와 힐라리우스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새로운 입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비밀을 찬양하였던 교부들의 음성이 잘못 울린 적은 없었습니다. 도나투스주의자인 티코니우스도 의심할 여지없이 기독교를 그리스도의 몸의 일치로부터 보았던 것입니다67). 그러나 그 이전의 어느 교부도, 아마도 그 이후의 어느 신학자도 이러한 신비적 일치가 그렇게 심오하게 그리스도론적인 비밀에 뿌리를 두지를 못했으며 기독교와 교회의 내적 이해에 있어서 히포의 위대한 성자만큼이나 그렇게도 풍요하며 포괄적으로 평가하지를 못했습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위대한 스승, 위대한 이방인 사도의 천재적인 제자였습니다. 물론 어거스틴은, 그가 바울을 여기서 그렇게 잘 이해했다고 하는 사실을, 이것이 눈에 띄는 일이라 하여도, 아마도 그가 성 바울의 무기를 가지고 바로 이 자리에서 내리쳤던 바 그 동일한 신플라톤주의로부터 갖게 되었습니다. 여느 다른 철학적 체계와 달리 참으로 바로 이 신플라톤주의가 그의 일원론적 토대들로부터, 모든 영적인 것의 물체적인 통일성을 제시하였으며 이 모든 영적인 것이 신적인 것과 본질적으로 결합됨을 제시하였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제 아무리 단호하게 이 견해를 거절하고, 영혼이 하나님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반대한다 하여도68), 그리고 그가 재차 초기에 세상을 "살아있는 본질"로서 잘못 판단한 일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하여도69), 그에게 있어서, 적어도 단지 형식적으로 고찰해 볼 때에, 만유의 통일성에 관한 신플라톤주의적인 근본 상념이 분명하게 나타났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상념은 아마도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의 통일성에 관한 바울적인 사상들 - 비록 이것들이 전적으로 다른 전제들로부터 나왔다 할지라도 - 에 대한 이해를 첨예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거스틴은 또한 사제 시절 이전에 벌써, 아담으로부터 세상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통일체로서, "한 유일한 인생처럼" 간주될 수 있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70).

그러나 어떻든지 간에, 사람이 되신 분을 통한 구원,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지체들과 그 머리의 신체적 결합은 성자 어거스틴의 구속론의 중심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의 신학 일반의 구심점에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은혜론과 예정론이 그 자신과 제자들에게 있어서 제 아무리 선정적인 것이었다 하여도, 그의 신학적 관심에 있어서 그것은 첫 번째 것이 아니라, 두 번째 것에 불과합니다. 첫 번째 것은 기독교에 관한 그의 근본적인 이해를 말하는데, 어거스틴은 기독교를 모든 구속받은 자들이 새 사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만일 이 속에서, 오직 성육신의 비밀스러운 과정에서만 인류의 구속, 그 신인적(神人的)인 머리를 통한 신성과의 재(再) 합일이 단 한번 포함되었다고 보는 그러한 소아시아의 총괄 갱신론의 신판으로만 보려 한다면, 그것은 어거스틴을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위대한 업적은 바로, 그가 이러한 하나님 말씀과 인류의 결합을 정적인 것, 즉 단지 일어난 신비적인 사건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신 분 안에서 역동적으로 계속 역사 하는 것으로서 이해하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구속하는 요인은 본래 성육신과 그 초역사적인 의미 내용과 가치 내용에 있다기 보다는, 사람이 되신 분과 그의 역사적인 사역하심과 그 계속적인 사역 안에,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믿고 사랑하면서 이 사람이 되신 분에게 편입된다면,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자기 것으로 동화하게 됩니다. "그는 머리시요 우리는 몸이며 우리는 또한 그가 그의 위격에서 당하신 것을 그 안에서 당했다."71)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고난의 제물"72), "십자가의 제물"을 바치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또한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위를 안셀름의 의미로 보상의 행위로서 규정하는 것을 단념하는 반면에, 매우 인상적으로 'pro peccatis nostris'(우리의 죄를 위하여), 'sacrificium pro nobis'(우리를 위한 제물)란 말을 강조합니다73). "전 인간 본성은 믿음과 그의 죽음의 성례 전을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 "그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죽으셨고 우리의 의를 위하여 부활하셨다."74) 어거스틴은 우리를 위한 구속적인 헌신의 관점에서 예수의 삶 전체를 보았습니다. 화목적인 헌신의 동인을 밝혀내기 위하여 그는, 분명히 어떤 한 이론에 국한되는 일없이, 전통적으로 내려온 거의 모든 구속에 관한 이론들을 사용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몸의 머리가 자기 지체들을 위하여 살며 고난 당하고, 죽고 부활하며 바로 이 사실을 통하여 모든 죄책을 그들에게서 없앤다고 하는 확신에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에게 있어서 더욱 소중한 것은, 우리의 가장 깊은 가장 참된 의가 그리스도를 통한 이 죄사함에 있다고 하는 확신이었습니다75).

그러나 사람이 되신 분의 구원의 행위는 오직 이 화목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나아가 성자 어거스틴의 고찰 방식의 역동적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지체 안에서 새 생명의 계속 역사 하는 능동적 원리로서 입증된다고 하는 그의 가르침에서 강조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은 경험적인 개인-자아가 아니라, 그의 성령을 통한 그 안에서 역사 하시는 그리스도, 곧 지체 안에 계신 머리가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그의 은혜론과 예정론을 구축합니다. 믿음과 사랑의 새 원리는 자연적으로 성장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으로부터 'massa damnata'(정죄 받은 덩어리)로부터 구속으로 부르신 자를 믿음과 사랑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인간적인 행위의 그 어떤 선견(先見)으로부터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탐구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경륜의 깊이로부터, 우리가 헤아리기 어려운 그의 신적인 행위의 선지(先知)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76). 확실히 사람은 선천적으로 믿을 능력, 곧 'posse habere fidem'(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77), 즉 또한 자신의 충동으로부터 은총의 충동에 동의할 능력을 소유합니다78). 그러나 보다 높은 영적인 생명의 동인들에 맞추면서, 바로 그 "사랑스러움"79)을 통하여 인간의 의지를 그의 감각적인 구속에서 구원하고 자유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주며80), 의지가 "불가항력적으로 그리고 극복할 수 없게"81) 자유스러운 내적인 긍정으로써 진리에 순종할 정도로 동의하게끔 하는 것은 계산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께만 귀소되는 은혜의 유혹들입니다. 그와 같이 믿음의 그 빛나는 실재성과 그 생생한 현상은 오직 하나님의 행위에 불과합니다82).

그러므로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은혜, 곧 시공 안에서 전개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겸손과 사랑은 특별히 기독교적인 덕목들입니다. 'humilitas'(겸손)와 'caritas'(사랑)란 개념은 어거스틴의 이와 같은 발전 단계에서 그 초기의 국한되었던 의미를 상실합니다. 'humilitas'는 더 이상 단순히 진리 인식에 종사함에 있어서 참된 자기 겸비가 아니며, 'caritas'는 더 이상 단순히 주변 사람에 대한 섬김이 아닙니다. 이 양 개념은 우주적인 내용을 얻게 됩니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은혜이기 때문에, 'humilitas'는 그리스도인의 기본 자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한, 겸손이 우리 완전함 자체이다."83) 그것은 양심에서 빛나는 의식이요, 우리를 온전하고 무조건 하나님의 수중에 내어 맡기는 것에 관한 의식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머리와 그 지체와의 하나됨이기 때문에, 'caritas'는 단지 이웃, 곧 타자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 전체성, 공동체 의지에 대한 사랑입니다. 전적인 기독교 세계는 'unus Christus'(유일한 그리스도), 'amans seipsum'(그 자신을 사랑하는 자)입니다84). 어거스틴의 의미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결코 홀로가 아니며, 결코 고독하지 않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그리스도와 그 지체와의 결합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세상 감정은 언제나 전체적이고 공동의 것에 있었지, 단독자와 개인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로부터 곧 알 수 있는 사실은, 성자 어거스틴의 신학에서 어떠한 자세가 교회에게 귀속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 사이에 하나의 동일성, 곧 외적인 현상의 동일성이 아니라, 내적 본질의 동일성이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을 통하여 지체에게 역사 하시는 유일한 한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들이 있는 일이 가능하며, 모든 가라지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존재하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이 성도들은 머리의 영으로 말미암아 활력을 얻기 때문에, 교회 은총의 복으로 풍성한 샘터, 곧 'unica columba'(유일한 비둘기), 교회의 참된 반석(petra)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성도의 교제에 빚을 지지 않은 은혜는 교회 내에 하나도 없습니다. 은혜의 가시적 수여자는 성직을 맡은 자, 곧 그 권위를 자기 자신으로부터나 공동체의 품으로부터가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가지는 그러한 교회의 "일군들"입니다. 그와 같이 교회는 이 땅에 있는 참되고 유일한 구원의 장소요, 그리스도의 구세주 권세의 계시와 나타남, 그의 몸입니다.

오직 유일하게 구원을 갖다주는 교회에 관한 어거스틴의 가르침과 모든 분파주의적이며 이단적인 공동체들에 대한 그의 강한 반대 자세는 이러한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의 동일시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그의 부정적인 판단은 더 강화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얀센주의 논쟁에서 교회에서 재차 부인되었던 견해에 이르기까지 극단에 이르렀습니다: "교회밖에 있는 것은 정죄된 세상입니다."85) 다른 한편으로 또한 교회의 미래에 대한 그의 믿음의 승리는 이러한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의 동일함에 근거를 둔 것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다면, 야만족들이 그 감독 도시를 파괴할 것이며, 악마의 도성(civitas diaboli)이 성소 가장 깊숙이 까지 들어 와서 제단을 허물 것이나,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은 앞으로도 교회에서 그 강인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 바로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를 거두며 앞으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IV

 

이제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투쟁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어거스틴에게 맞는 말입니다. 이미 그가 소수의 사람들과 같이 진리의 추구자였으며, 전 인생을, 곧 정신과 몸을 가장 담대하고 가장 고상한 것, 곧 오직 구원하는 그 진리에 대한 문제에 인생을 내걸었던 사람이었다는 이 사실만이 그에게 세계사의 위인들 가운데 한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이 질문만을 던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피와 상처투성이인 한 진리가 그 답변이었던 곳에서조차도, 그에게는 또한 대답할 용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그의 전 인생은 하나의 커다란 고상한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정신사적인 의미를 평가한다면, 그 의미는 전적으로 그 당시의 오류들과의 논쟁에서 거둔 승리와 이로써 주어진 중요한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개념들의 해명과 깊이에 있지 만은 않습니다. 교회 내적인 삶과 교회 경건에 미친 어거스틴의 영향력이 오히려 더 중요하였던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그 당시의 기독교로 하여금 자신을 새롭고 활력 있게 숙고하도록 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다시금 새롭게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변증교부들의 반(反) 영지주의적인 활동이후로 교회 내에는 기독교를 순수하게 주지주의적으로, 도덕주의적으로 해석하였던, 곧 사람들이 믿으면서 인식해야 하는 신적인 가르침으로서, 사람들이 자기 인생을 바로잡아야 하는 그러한 신적인 규율로서 해석하였던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성 바울과 교부들 가운데 최상의 교부들에게 침잠하였으므로, 기독교의 새로움과 그 온전한 의미가 그에게서 빛을 발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본질상 구속이요 본질적으로 성육신의 비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믿으면서 신적인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따르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 곧 그리스도이신 새 사람 안에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복음이요, 이것이 그의 삶을 강건하게 하고 승리하게 하였으며, 이것이 그의 마음의 기쁨이었습니다: "나의 원천은 그리스도시요, 내 뿌리는 그리스도시요, 내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86) 이 중심에서부터 그는 이교도 문화와 기독교, 하나님과 세상을 해석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여 말씀드리지만, 어거스틴과 같이, 그러한 명료성과 심오함을 가지고서, 그러한 내적인 감흥과 그러한 풍성한 체험과 그러한 반짝이는 언어를 가지고서 이러한 기독교의 본질적 핵심을 선포하였던 교부나 신학자가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은 날이나 혹은 그의 태어난 날을 장엄하고도 새롭게 축하하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마음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이 마음, 어거스틴의 사유와 삶의 이러한 보물을, 그가 우리에게 전해주었던 그대로 조심스럽게 보존하였습니까? 이 질문은 심한 질문입니다. 대답할라 치면 풀이 죽고 맙니다. 참으로 여전히 우리는 모두, 구속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까? 니체가 극명하게 수백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한 "구속받은 자들이여, 그들이 더 구속함을 받았을지 모른다"란 말이 합당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게르만족과 유럽인들의 가장 깊은 심층에 있지 아니합니다. 단지 그 때문에 우리 시대의 교만한 이기주의와 자기 추구적인 개인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으며 상속권을 상실한 자들의 편에서 한 그릇되고 왜곡된 공동체 이상향을 뇌수와 마음에 심어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피상적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또 그러하다는 사실 때문이요, 우리가 특별히 수 백년 이래로, 어거스틴의 기독교로부터,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모든 지체들의 본질적 결합에 대한 살아 있는 믿음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몸의 비밀로부터 흘러나오는 그러한 엄청난, 공동체를 형성하며 보존하는 권세들을 잘못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갱신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곧 우리 존재의 궁극적인 원(原) 근거로부터 나온 갱신이요, 하나님에게서 나온 거듭남(중생)입니다. 그러한 중생이 있어야 어느 정도나마 어거스틴의 정신과 어거스틴의 기독교를 다시 일깨움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어거스틴의 형상은 단지 어두운 과거로부터 우리에게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형상은 또한 미래를 향하여 밝게 빛을 발합니다. 그래서 옛 진리가 다시 새로운 고상한 의미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죽은 것이 아니라,

어거스틴은 살아 있습니다.

 

1. Quid autem meorum opusculorum frequentius et delectabilius innotescere potuit quam libri Confessionum?(그러나 내 작품 가운데 어떠한 것이 「고백록」 보다도 더 자주, 더 즐겁게 유명해 질 수 있었는가?, 「견인의 은사」 20,53).

2. V.Harnack, Reflexionen und Maximen XV을 참고.

3. Nam et sumus et nos esse novimus et id esse ac nosse diligimus. In his autem tribus, quae dixi, nulla nos falsitas veri similis turbat. Non enim ea, sicut illa, quae foris sunt, ullo sensu corporis tangimus, velut colores videndo, sonos audiendo, odores olfaciendo, sapores gustando, dura et mollia contrectando sentimus, quorum sensibilium etiam imagines eis simillimas, nec jam corporeas, cogitatione versamus, memoria tenemus, et per ipsas in istorum desideria concitamur. Sed sine ulla phantasiarum vel phantasmatum imaginatione ludificatoria, mihi esse me, idque nosse et amare certissimum est. Nulla in his veris Academicorum argunenta formido, dicentium, quid si falleris? Si enim fallor, sum. Nam qui non est, utique nec falli potest, ac per hoc sum, si fallor. Quia ergo sum, si fallor, quomodo esse me fallor, quando certum est me esse, si fallor? (즉 우리는 존재하며,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며 우리는 이러한 존재와 지식을 사랑한다. 내가 언급하였던 이 세 항목에서 진리의 여느 유사한 기만도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색채를 보고 소리를 듣고 향기를 맡고 맛을 보고 딱딱한 것과 부드러운 것을 만짐으로써 느끼듯이, 밖에 있는 사물들처럼, 그것들을 어떤 육체의 감각으로써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감각적인 것들 중에서 우리는 또한 이것들과 유사하나, 더 이상 실체적이 아닌 상상들을 생각으로 숙고하고, 기억으로 간직하며, 그러한 것들 자체를 통하여 그것들을 열망하도록 자극을 받는다. 그러나 그러한 환상이나 망상의 기만적인 상상들 없이, 나에게 아주 확실한 사실은 내가 존재하며 내가 그것을 알며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다. 아카데미주의자들의 논쟁들은 이러한 진리들에 있어서 어떠한 두려움도 주지 못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만일 기만을 당한다면, 어떻게? 내가 즉 기만을 당한다면, 나는 존재한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자는 전혀 기만을 당할 수도 없거니와, 내가 기만을 당한다면, 이것을 통하여 내가 이것을 통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기만을 당한다면, 내가 존재하는 까닭에, 내가 기만을 당한다면,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실하기 때문에, 어떻게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만당하는가?, 「하나님의 도성」 XI,26 이하).  

4. Est ergo in nobis quaedam, ut ita dicam, docta ignorantia, sed docta spiritu Dei, qui adjuvat infirmitatem nostram(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어떤 박식한 무지가 있는데, 말하자면 우리의 허약함을 도와주는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박식한 무지가 있다, 「서신」 130,15,28).

5. 「고백록」 2,2,2.

6. 「고백록」 3,1,1.

7. 「고백록」 3,1,1.

8. 「고백록」 3,4,7.8.

9. 「고백록」 3,4,8.

10. O veritas, veritas, quam intime etiam tum medullae animi mei suspirabant tibi, 「고백록」 3,6,10.

11. Nulla pugnacitas calumniosarum quaestionum per tam multa, quae legeram inter se confligentium philosophorum extorquere mihi potuit, ut aliquando non crederem te esse, quidquid esses, quod ego nesciebam, aut administrationem rerum humanarum ad te pertinere(내가 자가당착한 철학자들의 책에서 무수히도 읽었던 그러한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질문들의 논쟁도 내가 주님께서 존재하신다고 믿는 믿음과 - 비록 내가 주님이 어떠한 분이신 지 알지 못한다 하여도 - 주께서 인간 세사를 섭리하신다고 믿는 믿음에서 나를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고백록」 6,5,7. 또한 「고백록」 7,7,11; 7,19,25를 참조).

12. 「고백록」 3,4,8.

13. Quia nec sapiebas in ore meo sicuti es(왜냐하면 나는 주께서 있으신 그대로 내 입에서 주님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고백록」 3,6.10).

14. 「고백록」 3,6,10.

15. Quibus tamen philosophis, quod sine nomine salutari Christi essent, curationem languoris animae meae committere omnino recusabam(철학자들에게는 구원을 가져오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들에게 내 병든 영혼의 치료를 내어 맡기기를 단연코 거절하였습니다, 「고백록」 5,14,25).

16. 「고백록」 3,6,10.

17. 「고백록」 5,6,10.

18. 「고백록」 3,6,10.

19. 「고백록」 7,5,7.

20. 「고백록」 6,11,18.

21. Et quoniam cum de Deo meo cogitare vellem, cogitare nisi moles corporum non noveram, neque enim videbatur mihi esse quidquam quod tale non esset, ea maxima et prope sola causa erat inevitabilis erroris mei(내가 내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할 때에, 어떤 물체 덩어리로밖에는 생각할 줄 몰랐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 오류의 가장 크고 거의 유일한 원인이었습니다, 「고백록」 5,10,19).

22. 「마니교도들의 서신 반박」 35,39; 「선의 본성」 4 이하; 「상이한 83 논제들」 논제 6을 참조.

23. 「참 종교」 39,72.

24. 「독백」 1,2,7.

25. Itaque confundebar et convertebar et gaudebam, Deus meus, quod ecclesia unica corpus Unici tui, in qua mihi nomen Christi infanti est inditum, non saperet infantiles nugas(그러므로 내가 혼돈된 상태에 있었고 전향되고 있었으며, 나의 하나님, 어린 시절에 나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던, 주님의 독생자의 몸인 하나인 교회가 유치한 짓거리를 맛보지 않았음을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고백록」 6,4,5; 7,1,1을 참조.).

26. 「고백록」 7,17,23.

27. 「고백록」 6,11,20.

28. Quam tibi sordidus, quam foedus, quam exsecrabilis, quam horribilis complexus femineus videbatur, quando inter nos de uxoris cupiditate quaesitum est(우리가 함께 혼인의 욕망에 대하여 토의하였을 때, 여성의 포옹이 네게 얼마나 불결하고 더럽고, 저주스럽고 혐오스럽게 보였는가!, 「독백」 1,14,25; 1,10,17을 참조).

29. 「고백록」 6,12,22.

30. 「고백록」 8,5,10.

31. 「고백록」 8,12,29.

32. 「고백록」 5,10,20.

33. 「고백록」 7,19,25.

34. 「질서」 1,10,29.

35. Itaque si hanc vitam illi viri nobiscum rursum agere potuissent, viderent profecto cuius auctoritate facilius consuleretur hominibus et paucis mutatis verbis atque sententiis Christiani fierent, sicut plerique recentiorum nostrorumque temporum Platonoci fecerunt(그러므로 이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다시 한번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었다면, 그들은 분명코 누구의 권위로써 사람들이 더 쉽게 보살핌을 받는가 하는 것을 깨달을 것이며, 최근 들어서 플라톤주의자들이 그렇게 되듯이, 단지 몇 마디 말과 문장만 변화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될지 모릅니다, 「참 종교」 4,7; 「아카데미 학파 반박」 3,20,43, 「하나님의 도성」 8,4 이하를 참조).

36. 「상이한 83 논제들」 논제 23: est enim species prima, qua sunt, ut ita dicam, speciata, et forma qua formata sunt omnia(그 까닭은, 말하자면, 그것을 통하여 형상화를 입은 것들이 존재하는 바 그러한 제 일 형상과, 그것을 통하여 모든 형상을 입은 것들이 존재하는 바 형상이 있기 때문이다). O.Scheel, die Anschauung Augustins über Christi Person und Werk, 33쪽. 38쪽을 참조.

37. Religet ergo nos religio uni omnipotenti Deo; quia inter mentem nostram, qua illum intelligimus Patrem, et Veritatem, i.e. lucem interiorem, per quam illum intelligimus, nulla interposita creatura est. quare ipsam quoque Veritatem nulla ex parte dissimiem in ipso et cum ipso veneremurm quae forma est omnium, quae ab uno facta sunt et ad unum nituntur. Unde apparet spiritalibus animis, per hanc formam esse facta omnia, quae sola implet, quod appetunt omnia(그러므로 종교가 한 분이신 전능하신 하나님과 우리를 결합해 준다. 왜냐하면 그것으로써 아버지를 인식하는 바 우리의 오성과 그것을 통하여 그 분을 인식하는 바 진리, 곧 내적인 빛 사이에 어떠한 피조물도 놓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전적으로 유사한 진리 자체를 그 분 안에서 그리고 그 분과 함께 존경하고자 하는데, 이 진리는, 그 유일하신 분에 의하여 만들어졌고 이 유일하신 분에게로 나아가려 애쓰는 바 만유의 형상이시다. 그러므로 신령한 영혼들에게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오로지 만물이 경주하고 있는바 그것을 채워주는 이 형상을 통하여 만들어진 만물이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이다, 「참 종교」 55,113). 다음을 참조: 「교사론」 11,38; 「교회의 관습」 1,17,31; 「상이한 83 논제들」 논제  46,2, 논제 54.

38. Trinitas... ita etiam a paucis sanctis beatisque intelligitur(삼위일체는...그처럼 또한 소수의 성도와 복자들에 의하여 인식됩니다, 「서신」 11,2). 「참 종교」 7,13을 참조.

39. 「영혼의 위대함」 33,76; 「참 종교」 26,49.

40. 「참 종교」 5,8.

41. Quod est aliud beate vivere nisi aeternum aliquid cognoscendo habere(복되게 사는 것은 영원한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소유하는 것 이외에 무엇인가, 「상이한 83 논제들」 논제 35,2); in tantum enim est beatitudo nostra, in quantum eius(sc.Domini) contemplatione perfruimur(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의 관상을 향유하면 향유할 수록, 우리의 지복은 더욱 크기 때문이다, 논제 69,5).

42 「믿음의 유용」 16,34; 12,27.

43. 「교사론」 11,38.

44. 「아카데미학파 반박」 3,19,42.

45. 「참 종교」 16,30; 「서신」 11,4; 「상이한 83 논제들」 논제 36,2; 논제 43.

46. 「참 종교」 14,32; 「상이한 83 논제들」 논제 25.

47. Debeo scripturarum eius medicamenta omnia perscrutari(나는 성서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처방 약들을 철저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서신」 21,3).

48. 「기독교 교리」 2,28,43; 「하나님의 도성」 8,11.

49. 「수정록」 1,1,2.

50. 「수정록」 1,3,8.

51. 「수정록」 1,4,7; 1,1,2.

52. 「하나님의 도성」 19,25. 다음을 참조: 「하나님의 도성」 5,12; 「율리안 반박」 4,3,30.

53. Quid est ergo credere in eum? Credendo amare, credendo diligere, credendo in eum ire et eius membris incorporare(그러므로 그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믿으면서 사랑하는 것, 믿으면서 사모하는 것, 믿으면서 그 안에 거하고 그의 지체로 편입하는 것이다, 「요한 복음 강해」 29,6).

54. 「서신」 55,10,18.

55. 「요한서신 강해」 7,8. Miscell.Agost.Vol I S.Aug. serm.post Maur.rep.(Roma 1930) 214쪽을 참조.

56. 「요한 서신 강해」 5,7.

57. 「상이한 83 논제들」 논제 68,3.4.

58. 「포르투나투스 반박」 16; 「자유의지」 3,19,53; 3,20,56; 3,22,63.

59. 「로마서의 명제 강해」 44.

60. 「성도의 예정」 3,7; 4,8; 「수정록」 1,23,2.3.

61. 「상이한 논제들, 심플리키아누스에게」 1,2,9. 「성도의 예정」 3,7.

 

62. 「상이한 논제들, 심플리키아누스에게」 1,2,16. 「은혜와 원죄」 2,39,44를 참조.

63. 「설교」 144,5; 「시편 강론」 27,2; 190,2,1; 56,5; 「설교」 126,6. J.Vetter, der heilige Augustinus und das Geheimnis des Leibes Christi 1929, 30쪽 이하를 참조.

64. Ecclesia principium et primitiae(교회의 머리요 처음 난 자, 「요한 서신 강해」 2,2).

65. 「요한 서신 강해」 1,2.

66. 「설교」 144,5; 45,4; 「요한 복음 강해」 21,8을 참조.

67. 「기독교 교리」 3,42-55를 참조.

68. 「서신」 166,3을 참조.

69. 「수정록」 1,10,4.

70. 「참 종교」 27,50.

71. 「시편강론」 62,2.

72. 「시편강론」 84,13.

73. 「시편강론」 129,7.

74. 「본성과 은혜」 2; 「요한 복음 강해」 8,4를 참조.

75. Ipsa quoque nostra jstitia, quamvis vera sit propter veri boni finem, ad quem refertur, tamen tanta est in hac vita, ut potius peccatorum remissione constet quam perfectione virtutum(심지어 우리의 의 조차도, 비록 그것이 관계를 맺고 있는 바 그러한 참된 선의 목표로 말미암아 참된 의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는, 덕들의 완전함보다는 오히려 죄사함으로 이루어져 있을 정도로 보잘 것이 없다,  「하나님의 도성」 19,27).

76. Non ergo quia futuri eramus (sancti), sed ut essemus(그러므로 '우리가 앞으로 거룩할 것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거룩하다는 사실', 「성도의 예정」 18,36). 「징계와 은혜」 7,14; 「서신」 186,7,25를 참조.

77. Proinde posse habere fidem sicut posse habere caritatem, naturae est hominum; habere autem fidem quemadmodum habere caritatem, gratiae est fidelium. Illa itaque natura, in qua nobis data est possibilitas habendi fidem, non discernit ab homine hominem. Ipsa vero fides discernit ab infideli fidelem(그러므로 사랑을 가질 수 있는 능력처럼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사람의 본성에 귀속된다. 그러나 사랑을 가지듯이, 믿음을 가지는 것은 믿는 자들의 은혜에 귀속된다. 그러므로 그 속에서 믿음을 가지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주어진 바 그 본성은 사람과 사람을 구분한다. 그러나 이 믿음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분한다, 「성도의 예정」 5,10).

78. Nemo habet in potestate, quid ei veniat in mentem, sed consentire vel dissentire propriae voluntatis est(어느 누구도 자기 마음에 임하는 바 그것을 자기 권세에 두지 못하며, 그 자신의 의지는 단지 동의하거나 반대할 뿐이다, 「영과 문자」 34,60).

79. 「설교」 131,2.2.

80. Haec enim voluntas libera tanto erit liberior, quanto sanior, tanto autem sanior, quanto divinae misericordiae gratiaeque subiectior(왜냐하면 이 자유로운 의지는 더 건강하면 건강할 수록, 더 자유 하게 될 것이나, 그러나 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에 종속되면 종속될 수록, 더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서신」 157,2,8). 「설교」 155,3을 참조.

81. Subventum est igitur infirmitati voluntatis humanae, ut divina gratia indeclinabiliter et insuperabiliter...neque adversitate aliqua vinceretur(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불가항력적으로 그리고 극복할 수 없게...그 어떤 반대 세력에게도 정복되지 않도록, 인간 의지의 허약함은 도움을 받았다, 「징계와 은혜」 12,38).

82. Profecto et ipsum velle credere Deus operatur in homine et in omnibus misericordia eius praevenit nos(참으로 하나님은 이 믿으려는 의지를 사람 안에 일으키시며 그의 자비하심은 만물 안에서 우리에게 선행한다, 「영과 문자」 34,60).

83. 「시편강론」 130,11.

84. 「요한 서신 강해」 10,3.

85. 「설교」 96,8. 「서신」 185,50을 참조.

86. 「페틸리아누스 서신 반박」 1,7,8.

 

 

 

 

4장 성 어거스틴의 석학과 신학

 

  성 어거스틴은 주로 신학 문제에 대하여 많은 책을 썼다. 그의 논쟁 중에는 문제가 될 만한

것도 있었다. 특히 펠라기우스 논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나는 그의 작품을

전부 춰급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단지 본질적이고, 역사적으로 보아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것만

논하려고 한다. 우리가 고찰해 보려는 문제는 아래와 같다.

  첫째, 그의 순수 철학, 특히 그의 시간론

 둘째, <<신국론>>에 나타난 그의 역사 철학

 세째, 펠라기우스파에 반대하여 제창된 그의 구원론

    1. 순수 철학(Pure Philosophy)

  성 어거스틴은 대체로 순수 철학에 몰두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관심을 가졌던 제한된

범위의 순수철학적 문제에 관한 한 놀라운 재능을 발휘한다. 그는 처음으로 순수 사변적

(순수사변적)인 견해와 설경을 일치시키도록 한 사람으로, 그 이전의 기독교 철학자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가령 오리게네스(Orison)와 같은 사람도 기독교와 플라톤주의는 서로 병립되며, 결코

융합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의 경우, 플라톤주의와 [창세기]가 어떤 점에서

조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그의 순수 철학에 있어서의, 통찰력은 더욱 고무된다.

  성 어거스틴의 저술 가운데 가장 순수한 철학적인 작품은 <<고려>>의 제11권이다. 그 대중판

중에는 10권으로 끝마치는 것도 있는데, 그것은 그 다음 권이 그다지 흥미있는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것이 흥미가 없다고 한 까닭은 전기가 아니라, 철학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11권에는 아래와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즉 창조는 [창세기] 1장에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루어졌으며, 또 어거스틴이 마니교에 반대하여 주장하는 바와 같다면, 이 창조는 좀더

빨리 이루어졌어야 할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반대자의 이론을 가상하고 있다.

 @p498

  만일 그의 해명을 이해하려면, 우선 알아야 할 것은 구약에서 가르치는 무로부더의 창조는

그리이스 철학에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이 창조에 대하여 말할 때,

그는 근원이 되는 물질을 가상하고, 신이 이에 대하여 형상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신은 조물주라기 보다는 한 기술자요,

건축가라고 하겠다. 질료는 영원한 것이며, 창조된 것이 아니고, 단지 형상만이 신에 의하여

비롯되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은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여, 정통적인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세계는 어떤 질료에서 창조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에서 창조된 것이며,

신은 오직 질서와 정돈(arrangement)뿐만 아니라, 물질까지도 창조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무에서의 창조는 불가능하다는 그리이스인들의 견해는 기독교 시대에도 때때로 반복되어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것은 범신론으로 이끌려갔다. 범신론에서도 신과 계시는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이다. 즉 신의 분신들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견해는

스피노자에 있어서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들은 누구나 다 이런 견해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리하여 기독교가 생긴 이후로 어느 세기에서나 신비주의자들은

정통주의에 머물기 어려웠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세계가 신을 떠나 있다고 믿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거스틴는 이 점에 대해서는 난점을 전혀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창세기]는 명확하여, 그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였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그와 같은 견해를

가져야만 비로소 그의 시간론이 본질적으로 나오게 된다.

  세계는 어찌하여 좀더 일찍 창조되지 않았는가? 그 까닭은 [보다 일찍]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도 세계가 창조될 때 함께 창조된 것이다. 신은 영원한 존재이다. 그것은

무시간적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신에게는 이전이나 이후가 있을 수 없고, 오직 영원한 현재만이

있을 따름이다.

 @p499

  신의 영원성은 시간 관계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그에게는 모든 시간이 동시적으로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창조보다 더 앞서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앞선다]는 것은 그도 또한 시간 속에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영원히 시간의 흐름 밖에 있다. 이러한 주장은 성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시간의 상대성)에 대한 매우 놀라운 이론에 이르게 하였다.

  [그렇다면 시간은 무엇인가?]하고 그는 묻는다. [나는 아무도 나에게 이에 대하여 묻지 않을 때,

나는 알고 있지만, 나에게 묻는 자에게 설명을 하려고 하면 모르게 된다.] 여러 가지 난점이 그를

곤란한 입장에 서게 한다.

  그는 말하기를, 과거나 미래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현재만이 실재한다. 현재는 단지

하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은 지나가야만 측정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시간은 실재하며, 또한 미래의 시간도 실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

모순을 피하기 위해 어거스틴이 발견한 길은, 오직 과거나 미래는 현재로서만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거]는 기억과 동일하게 볼 수 있고, [미래]는 기대와 동일시할 수 있으며,

기억이나 기대는 현재의 사실들이다. 그려하여 그에 의하면 세 가지 종류의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물들의 현재와 현재의 사물들의 현재 및 미래의 사물들의 현재]가 그것이다.

[과거의 사물들의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의 사물들의 현재는 눈 앞에 목격하는 것이며, 미래의

사물들의 현재는 기대이다] [<<고백>>, 11권 20장].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가지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대화에 편리하도록 ,하기 위한 편법에 불과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와 같은 학설로 인하여 모든 난점이 다 해결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의

영혼은 이 가장 어려운 수수께끼를 풀어보려고 안타까와 합니다.] 그는 이처럼 하나님께 깨닫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관심을 갖는 것은 오직 쓸데없는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오 주여, 나는 고백합니다. 나는 아직도 시간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은 시간이 주관적인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즉, 시간은

기대하고 생각하며 기억하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앞의 책, 28장]. 피조물이 존재하기

전에는 시간도 있을 수 없고[앞의 책, 30장], 또한 창조 이전의 시간에 대하여 운운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p500

  이 학설에서 시간이 정신적인 무엇이라고 보는 점에 대하여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이 학설은 심각하게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매우 훌륭한 학설인 것은 사실이다. 한걸음

나아가서 이 학설은, 그리이스 철학에 있어서 이 문제에 대하여 발견할 수 있는 어느 것보다

훨씬 앞서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칸트의 주관적인 시간론보다도 더 우수하고 더 명확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칸트의 시간론은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 사이에 널리 인정되어 온 것이다.

  시간이 우리들의 사유의 한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의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 이후로 점점 발전되어 온 주관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하나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 정서면은 죄 의식 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이 죄의 정서적인

면은 지적인 면보다 더 나중에 생긴 것이다. 그런데 어거스틴에게는 이 두 가지 주관주의의

국면이 함께 나타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주관주의는, 칸트의 시간론을 연상케 할 뿐더러

데카르트(Descartes)의 코기토(Cogito, 나는 생각한다)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솔리로퀴아](Soliloquia)에서 그는 말하기를,

  [너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느냐?]

 [나는 그것을 안다.]

 [너는 네 자신이 단일하다고 생각하느냐 복합되어 있다고 생각하느냐?]

 [난 모른다.]

 [너 자신이 움직였다는 것을 아느냐?]

 [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아느냐?]

 [나는 안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포함하고 있을 뿐더러, 갓센디 (Gassendi)의 [나는 거느린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Ambulo ergo sum)에 대해서도 해 답을 준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도 높은 위치를 차지할만하다.

 @p501

    II.. 신국론(The city of God)

  417년에 로마가 고트족의 침략을 당하자, 이교도들은 이 재난의 원인을 고대의 신들을 저버린

데 있다고 하였다. 그들은 로마가 쥬피터를 경배하고 있는 동안은 강력하였지만, 지금은 환제들이

쥬퍼터를 멀리하였기 때문에, 쥬피터는 로마인들을 보호하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교도의 주장은 답변을 요구하고 있었다. <<신국론>>(The city of God)은 412년부터 427년

사이에 쓴 책으로 성 어거스틴의 답변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차츰 훨씬 더 폭넓은 문제로

발전되어,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을 개관하고 있다. 이 책은 중세기에 큰

영향을 미친 책이다. 특히 황제들과 교회와의 투쟁에 있어서 그러하였다.

  이 책도 그밖의 위대한 책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 읽을 때에 생각했던 것보다 다시 읽을 때에

더욱 좋은 인상을 준다. 이 책에는 오늘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쓰여 있다. 그리고 그

중심 제목도 그 시대에 속하는 부수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다소 애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도성과 신의 도성 사이의 대조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그것은 신학이외의

용어로서도 설명할 수 있다.

  이 책의 상세한 부분은 설명을 보류하고, 그 핵심에 대하여만 말한다면, 지나치게 좋게만 보일

것이다. 그와 반대로 세부의 설명에만 치우치면 가장 훌륭하고 핵심이 되는 것을 빠뜨릴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두 가지 오류를 다 피하기 위해 우선 세밀한 부분에 대한 설명을 어느

정도 하고 나서, 역사의 발전에 있어서 나타난 일반적인 개념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는 우선 로마에 야만인이 침입을 하였을 때 일어난 일부터 서술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가 생기기 전에도, 이보다 더 비참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 재난이

기독교 때문에 일어났다고 비난하는 이교도들도 이 침입을 당하고 있는 동안에, 떼를 지어

교회로 몸을 피해 목숨을 건지고 있다. 고트족도 기독교인들이라, 교회는 소중히 여겨, 그리로

피하는 자를 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p502

  이와는 반대로 트로이가 함락되었을 때에 유노의 신전은 아무 보호도 하지 않고, 피난처를

제공하지 못하였으며, 또한 그 신들도 도시와 파멸을 막지 못하였다. 로마인들도 그들이 정복한

도시에서 특히 신전을 아낀 적이 없다. 이렇게 볼 때, 로마의 함락은 다른 어느 경우보다도

조용한 편이었으며, 이것은 오직 기독교의 덕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도시가 함락될 때 희생된 기독교인들도 불평을 말할 것이 못된다. 그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고약한 고트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희생시키고 번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 고난을 당할 것이다. 어떠한 죄악이든지 다 이 지상에서 벌을 받는다면,

최후의 심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인내는 그들이 유덕한 자일진대 결국은

그들의 이득으로 돌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시간에 매인 사물들을 잃어도 값진 것은

전혀 잃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육체가 매장도 되지 못하고 버림을 받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식욕이 왕성한 들짐승도 이 육신의 부활을 훼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에 이교도들이 침략하였을 때에 유린당한 독실한 동정녀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여자들은 스스로 과오를 범한 것이 없는데도 동정의 왕관을 잃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 어거스틴은 그런 주장에 대하여 매우 지혜롭게 반박하고 있다. [아서라!] 남의 육욕이

너를 더럽히지 못한다. 순결이란 정신의 덕이요, 남이 유린했다고 해서 잃는 것이 아니다. 악한

의도가 있을 때에는, 설사 그것이 실천에 옮겨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순결은 잃게 된

것이다. 신이 이 유린을 허용한 것은, 그 희생자들이 자기들의 금욕에 대하여 너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역주 #1).

  한편 유린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살을 하는 것은 죄악이다. 여기서 루크레시아에 대한 긴

논의에 이르게 된다(역주 #2). 룬크레시아는 자살하지 말아야 했을 것이다. 자살은 언제나

죄악이다. 다만 삼손(Samson)의 경우만은 예외이다.

 @p503

  능욕당한 유덕한 부녀자들의 무죄를 변명하는 데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녀들이 능욕당할

때에 그것을 향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향락했다면 죄가 되는 것이다.

  다음에 이교 잡신들의 사악함을 취급하고 있다. 가령 [너희들의 연극-그 부정한 광경과 음란한

행위-은 처음에 사람들이 타락하여 이것을 로마로 가져온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신들이 직접

명령하여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신국론7, 1-3l]이와 같이 부도덕한 신들을 섬기느니 차라리

스키피오(Scipi7)와 같은 유덕한 사람을 신으로 경배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기독교인-[순례하는 하나님의 토성]이 그들의 지성소를 차지하고 있는-이 로마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침해를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세계에는 두 개의 도성-가상의 도성과 하늘의 도성-이 병존하고 있다. 그러나 나중에는 예정한

자와 버림을 받은 자는 구별될 것이다. 이 삶에서 외관상 원수로 보이더라도-누가 최후의 택함을

받은 자 가운데 들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철학자들에 대한 반박이라고 한다. 이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기독교인과 견해를 같이하는 점도 상당히 가지고 있다. -예컨대 영생과 신의 창조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견해가 상당히 일치되어 있다[앞의 책, I-35)].

  철학자들은 이교의 신들을 숭배하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또 그들의 도덕적인 가르침은

미약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들은 사악하기 때문이다. 이교의 신들은 다만 신화에 불과하다고

반박하지는 않는다. 성 어거스턴은 그 신들은 존재하며, 그것은 악마들이라고 주장한다. 이

잡신들은 인간에 대하여 추악한 이야기들을 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인간이 타락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이교도들에게는, 쥬피터의 행위가 플라톤와 학설이나 카토의 견해보다 다

소중하게 보이는 것이다. [통치가 잘 되어 있는 도시국가에는 시인이 사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플라톤은, 무대 연극을 통하여 영광을 받기를 원하는 이 잡신들보다 자기가

더욱 가치있는 존재임을 보이려고 하였던 것이다][앞의 책, II-14].

 @p504

  로마는 사비네 (Sabine) 부녀들을 강탈한 후로 언제나 사악하였다. 그는 로마의 제국주의가

저지른 죄악을 드러내는 데 많은 장을 소비하고 있다. 이 국가가 기독교화되기 전에는 재난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 골(Gaul)족에게서 받은 고난과 내란으로 당한 환란은,

고트족에게서 당한 것보다 오히려 더 심했던 것이다.

  점성술은 고약할 뿐더러 허위에 가득 차 있다. 이 허위성은 가령, 쌍동이는 같은 천체좌 위치

아래서 태어나지만, 그 운명이 다른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을 것이다[이 주장은 어거스틴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자인 카르네아데스에게서 빌려 온

것이다. 쿠몽(Cumont), <<로마 이교에 있어서의 동방 종교>> (Oriental Religions in Roman

Paganism), 166쪽 참조]. 운명에 대한 스토아 학파의 개념은(그것은 점성술과 관련되어 있다)

부당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천사들이나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우리의

죄를 예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또한 덕이 불행을 가져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세상에 있어서도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다. 기독교도인 황제들은, 덕망이 있으면 운수가 좋지 못하여도 행복했던 것이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다 운수가 좋았다. 또한 유태인의 왕국은 유태인들이

종교의 진리를 견지해 오고 있는 동안은 존속되었던 것이다,

  그는 플라톤에 대하여 공감을 하고 있다. 그는 플라톤을 모든 학자들의 우위에 놓는다. 다른

철학자들은 그에게 다 자리를 사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탈레스는 그의 물을 갖고 떠나게 하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가치고, 스토아 철학자들은 그들의 불을 갖고, 에피큐로스는 그의 원자를

갖고 떠나가게 내버려 두라][<<신국론>>,viii-5]. 이들은 다 유물론자들이었으나, 플라톤은

그렇지 않다. 플라톤은 신을 어떤 물체라고 보지 않았다. 그리고 만물이 다 존재를 신으로부터

받고 변치 않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보았다. 감각 기관이 진리의 표준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

것도 옳다. 플라톤주의자들은 그 논리와 윤리가 뛰어나고 기독교에 가장 가깝다. [최근에 생존한

플로터노스는 플라톤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제일 훌륭하다고 보았다. ] 아리스토텍레스는

플라톤보다 못하지만, 다른 철학자들보다는 훨씬 우위를 차지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두 사람이

모두 신들은 선하고 경배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p505

  그는 모든 감정을 죄악시한 스토아 학파에 반대하여 기독교인의 감정은 오히려 덕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분노나 동정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원인을 알아봐야 하는

것이다.

  플라톤 철학자들은 신에 대해서는 정당한 견해를 갖고 있지만, 신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도성인신(Incarnation)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올바른 견해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천사들과 악마(demon)들에 대한 논의가 있다. 이 논의는 신플라톤 철학과 관련되어 있다.

천사들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지만, 악마들은 언제나 악하다. 천사들에게는 시간적인

사물에 대한 지식 (설사 그들이 그런지식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은 비천한 것이다. 성

어거스틴은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감각적인 세계는 영원한 세계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한다.

  제11권에는 [신국]의 성격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신국이란, 택함을 받은 자들의 사회이다.

신에 대한 지식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철학자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이성에 의해 발견될 수 있는 사물들이 있지만, 그 이상의 종교적인 지식은 성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세계가 창조되기 전의 시간과 공간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창조

이전에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가 존재하기 전에 창조한 것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축복받은 것은 영원하다. 그러나 영원한 것이라고 해서 모두 축복받은 것은 아니다. 신은

악마들의 죄악을 예견하였으며, 또한 이들을 통하여 전체를 개선할 것도 예견하였다. 이것은 마치

수사학에서의 대조법과 같다.

  오리게네스는 영혼에게 육체가 주어진 것은 하나의 형벌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만일 그렇다면, 악한 영혼에게는 나쁜 육체를 제공해야 하는데, 악마들은 가장 악한 영혼이지만,

우리들의 신체보다도 더 좋은 무형의 신체를 소유하고 있다.

  세계가 6일 동안에 창조된 까닭은 6인이라는 숫자가 완전한 숫자이기 때문이다(즉 그 인수의

합이 역시 6이 된다). 선한 천사도 있고 악한 천사도 있다. 그러나 악한 천사라 하더라도 신에

반대되는 본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의 원수들이 본성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의지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악한 의지는 전혀 능동적인 원인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다만 수동적인 원인을 가질 뿐이다. 즉

그것은 (적극적인) 힘이 아니라, 오직 (소극적인) 결함일 뿐이다.

  세계의 연수는 6000년밖에 되지 않는다. 역사는 어떤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주기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보상하기 위해 단 한번 죽으셨다][로마서, 6장 10, 히브리서,

7장 27].

  만일 우리들의 처음 조상들이 죄를 범하지 않았던들 우리들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죄를 저지른 까닭에 모든 후손들이 죽게 되었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비단

자연적인 죽음만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 즉 멸망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포르피리(Porpyry)가 천국에서는 성인들(Saints)이 신체를 갖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잘못이다. 그들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졌던 육체보다 더 좋은 육체를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의

육체는 영적인 것이지만, 영 자체는 아니다 그리고 무게도 갖지 않을 것이다. 남성들은 남자로

부활하고, 여성들은 여자로, 또 어려서 죽은 자들은 성인으로 부활할 것이다.

  아담의 범죄는 전인류를 영원한 죽음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멸망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 죄는 영혼에서 온 것이요. 육신에서 온 것이

아니다. 플라톤 철학자들과 마니교도들은, 모두 죄를 육신의 본성에 돌려 과오를 범하고 있다.

마니교도들은 플라톤 철학자들처럼 심하지는 않지만, 역시 잘믓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의

죄로 인한 전 인류의 형벌은 의로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 범죄의 결과가 그렇지

않았던들 그 몸이 영적이었을 터인데 정신이 육적으로 되었으니 말이다.[<<신국론>>, 14-15].

 @p507

  잇달아서 성적인 욕망에 대한 깊고도 상세한 논의가 시작된다. 우리는 현재 아담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형벌의 일부로서 이 욕망 아래 있는 것이다. 이 주장은 금욕주의의 심리를 분명히

밝혀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비록 어거스틴은 이것이 점잖지 못한 문제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이 논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것은 이러하다.

  결혼한 사이의 성교는 죄가 아니라는 것을 우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의도가 자녀를

두자는 데 있을 때이다. 그렇지만 결혼에 있어서도 유덕한 사람은 육욕없이 성교가 이루어지기를

원할 일이다. 설사 결혼한 사이라 하더라도 성교할 때 남의 눈을 피하려고 할 정도로 사람들은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 합법적인 자연의 행위가 그 징벌로서 수치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견유학파에서는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디오게네스는 무슨 일에든지 개처럼 되려는 마음에서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한 번 이를 경험해 보고 나서는 실제로 이 극도의 파렴치한.,일을 다시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육욕이 수치스러운 것은 그것이 의지에서 떠나 있는 점이다--아담과 이브가 타락하기 전에는

이 욕망이 없이도 성교할 수 있었을 갓이다. 실제로 그들이 행하지는 않았으나, 가능하였을

것이다. 숙련공이 그 일을 수행할 때에 아무 욕망도 없이 그 손을 움직이는 것처럼, 아담도 그가

만일 선악과를 멀리 하였던들, 성교는 지금 필요로 하고 있는 욕정없이도 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적인 신체부위도 우리육체와 다른 부위와 마찬가지로 의지에 복종하였을 것이다. 성교에서

성욕이 필요하게 된 것은 아담의 범죄에 대한 일종의 형벌이다. 이 일이 없었던들 성(sex)과

쾌락은 서로 분리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역자가 적절하게도, 라틴어 원문의 적당한 미궁 속에

남겨둔 생리학적인 세부사항을 도외시한다면, 이상이 성에관한 어거스틴의 주장이다.

  이것으로 금욕주의자들이 성 (sex)을 혐오하는 까닭을 잘 알 수 있다. 즉 성이 의지에서

독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덕은 의지가 육체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지배에서는 성행위 (sexual act)를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행위는 유덕한

생활과는 부합되지 않는 것 같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 세계는 두 도성으로 분할되었다. 한 나라는 신과 더불어 영원히 다스릴

것이며, 또 한 나라는 사탄과 더불어 영원한 형벌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악마의 도성에

속하며, 아벨(아담의 둘째아들-역주)은 신의 도성에 속한다. 아벨은 예정된 은총으로 말미암은

지상의 한 순례자요, 천국의 한 시민이다. 초기 교회의 주교(the patriarchs)들도 천국에 속하였다.

메두셀라(Methuselah)의 죽음에 대한 논의는 자연히 70인역과 불가타 성경과의 비교에서 성가신

문제를 일으켰다. 70인역에 주어진 자료게 의하면 메두셀라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14년

동안이나 더 산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매두셀라는 방주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가타성경은 히브리 원문에 따라서 다른 자료를 제공해주었는데, 거기에

의하면 메두셀라는 바로 홍수가 나는 해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성 어거스틴은

성 제롬과 히브리 원문이 옳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유태인들은

히브리 성경을 교묘하게 고쳐서 기독교인들에게 불리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가정은

거부된다. 이와 반대로 70인역은 신의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프톨레미 (Ptolemy)를

기록한 사람이 70인역을 옮겨 쓸 때에, 틀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구약성경의 번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는 70인역의 성경을, 마치 다른 성경은 없는 것처럼 받아들였다. 그리이스의 기독교인들은

저마다 이 성경을 사용했으며, 다른 성경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우리의 라틴어역은 이

성경에서 번역되었다. 그러나 박식한 교직자요, 위대한 언어학자인 제롬이, 같은 성경을 히브리

원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유태인들도 그의 학문적인 노작이 모두 참되다고 인정한

바 있고, 또 70인역은 틀린 데가 여기저기 있다고 공언하기도 했으나, 기독교의 교회에서는 그와

같이 많은 사람들 더구나 그러한 일을 위해 대제사장이 선택한 많은 사람들의 번역보다 한

사람의 것을 취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

 @p509

  그는 70인의 역자들이 기적적으로 일치를 보았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이 70인역이 신의 감동을 받고 쓰게 된 증거라고 하였다. 그러나 히브리 성경도 마찬가지로

영감을 받고 쓴 것이다. 이러한 결론으로 말미암아 제롬이 번역한 성경의 전위에 대한 문제에

결정을 짓지 못하고, 그대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 두 성자가 성 베드로의 지조없는 성질

[갈라디아서, 2장 11~14]에 대하여 논쟁하지 않았던들 성 어거스틴은 보다 확정적으로 제롬의

편을 들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어거스틴은) 성스러운 역사와 세속적인 역사의 연표를 대조하고 있다 거기 보면 에네아스가

이탈리아로 온 것은, 이스라엘에서는 바로 압돈(Abdon)이 사사로 있을 때였다[이 압돈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아들 40명과 조카 27명을 두고 있었다는 것과, 이들이 저마다

당나귀를 길렀다는 것 뿐이다(사사기, 12장 14)]. 마지막 핍박이 일어난 것은 그리스도

밑에서이며, 그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성 어거스틴은 법률상 고문하는 일은 좋지 못하다는 주장을 한 다음에, 모든 것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 신아카데미 학파의 비판으로 들어 갔다.

  [기독교회는 이런 회의적인 태도를 미친 일로 간주하고 멀리한다. 교회는 사물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믿어야 한다. 그는 계속하여 참된 종교를 떠나서는 진정한 의미의

도덕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교도들의 덕은, [음란하고 추악한 악마들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더렵혀지고 있다.] 기독교인이 덕으로 간주하는 것을 이교도들은 악이라고 생각한다.

  [영혼이 덕으로 보고 모든 애정을 기울일 것으로 생각되는 덕일지라도 그것들이 다 신의 빛을

나타낼 수 없으면, 오히려 악이 되는 것이다.]

  이 사회(교회)에 속하지 않는 자들은, 영원히 비참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애써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때로는 고통이 승리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죽음이 고통을 일소해 버릴 수도 있다. 그리고 자연이 정복자가 되어 고통을 추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서는 고통이 영원히 벌을 받게 될 것기며, 자연은 영원히 고난을 당할

터이니, 곧 그것들이 받을 바 형벌이 계속되는 동안이라.]

 @p510

  부활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죽을 때의 영혼의 부활이요, 또 하나는 마지막 심판 때의

육신의 부활이다. 그는 천련 왕국에 대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논의한 끝에, 데살로니카

후서의 본문(2장 11~12)을 인용하였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전능한 자가 먼저 속이고 나서 그 속았다는 이유로 벌을 주는 것을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에게는 이것이 전적으로 정당하게 보인 것 같다.

  [그들은 정죄되어 타락하였으며, 타락함으로써 정죄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숨은 심판에 의해서이다. 이 비밀은 의로우며, 이의는 숨겨 있다. 그것은 실로 하나님의

의로서, 창세기 후로 언제나 심판을 해오신 의이다.]

  성 어거스틴은 주장하기를, 신은 인류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놓았다. 택함을 받은 자와 버림을

받은 자가 그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공로나 잘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자유스러운 선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모두가 다 열망을 받기에 적합하므로 버림을 받은 자는 불평을 할 아무런

이유도 갖고 있지 않다. 성 바울의 이상과 같은 글에 의하면, 저들이 악한 것은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며, 결코 악하기 때문에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육신이 부활한 후에, 멸망받은 자들은 영원히 불타게 되며, 결코 소멸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을 불도마뱀(불 속에 산다고 믿었음-역주)이나 에트나 화산에는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 악마들은 영체이지만, 물체인 불에 탈 수도 있다. 그리고 지옥의 고통은

정화와는 다르다. 그것은 성도들의 대속의 기도로 경감되지 않을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지옥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이단과 범죄를 저지른 카톨릭 교인들의

멸망을 받게 될 것이다.

 @p511

  끝으로 이책은 천국에서의 신과, 신국의 영원한 복락에 대한 환상을 그리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상에서 요약한 것으로는 이 책의 중요성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이 영향을

미친 것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대해서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국가가

교회에 예속되어야만 신국을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가르침은 그 후에

언제까지나 교회의 교리가 되어 왔다. 중세기의 교황권이 점차 고개를 드는 동안에 그리고

교황과 황제 사이에 알력이 있을 적마다, 성 어거스틴은 서로마 교회의 그 정책의 신학적인

정당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유태 나라도 사사들의 전설적인 시대와 바빌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신권정치를 실시하였던 것이다. 기독교 국가는 이 점에서 그것을 모방해야 한다.

황제들의 무능과 중세기 군주들의 약세로 말미암아 교회는 신국의 이념을 더욱 강하게 자각하게

되었다. 동로마에서는 황제의 권력이 강했으므로, 이러한 전개 과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서로마와는 달리 교회는 대체로 국가에 봉사해 왔던 것이다.

  종교개혁은 성 어거스틴의 구원의 결의를 다시 강조하였지만, 그의 신권정치에 대한 주장은

포기하여 에라스투스(Erastus)파로 되었다[애라스투스주의란 교회는 국가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교리이다]. 이것은 카톨릭과의 투쟁이라는 절박한 사정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의 에라스투스주의는 철처하지 못하였다. 프로테스탄트 중에서도 믿음이 독실한

사람들은, 거의 다 여전히 성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아 왔다. 재침례파, 제 5 왕국과(Fifth

Monarchy Men)나 퀘이커 (Quakers)교도들은, 다 그의 교리의 일부분을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비중에 대해서는 보다 덜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어거스틴은 예정설(역주#3)을 고집하고,

구원을 위한 세례의 필요성을 고집하였다. 이 두 교리는 잘 조화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극단적인

프로테스탄트들은 후자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종말론만은 여전히 어거스틴의 것이었다.

  <<신국론>>에는 근본적으로 독창적인 내용은 별로 들어 있지 않다. 종말론은 이미

유태인들이 이야기해 왔던 것이며, 주로 계시를 통하여 기독교에 도입된 것이다. 그리고 예정과

선택의 교리는, 바울 사도의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서한들에서보다 더욱 충실하고

논리적인 발전을 했을 따름이다. 신국의 역사와 세상의 국가의 역사를 구별한 것도 구약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어거스틴은 다만 이 각 요소들을 종합하여 당시의 역사에 적용시켰을

뿐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로 말미암아 그 후에 있는 로마 제국의 몰락과 그 뒤에 따르는 혼란기에

신앙적인 심한 시련은 겪지 않고, 이 모든 일에 대처해 나갈 수 있었다.

 @p512

  유태의 역사는, 과거와 미래에 걸쳐서 어느 시대에나 압박을 받아 불행한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자극하였다. 성 어거스틴은 이 유형을 기독교에 적용시키고,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에

적용시켰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전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변증법적 유물론

 메시아=마르크스

 선민=프로레타리아

 교회=공산당

 재림 =혁명

 지옥=자본가들의 형벌

 천년 왕국=공산주의 세계

  왼쪽의 술어들은 오른쪽의 술어들의 감정적인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감정적인

내용은 기독교나 유태교를 신봉하며 자란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 마르크스의

종말론을 믿게 하는 것도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치스를 위해서도 똑같은 사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개념은 더욱 순수하게 구약성서적이며, 마르크스의 개념처럼

기독교적이 되지 못한다. 또한 그들의 메시아도 그리스도와 유사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매카비(Maccabee)에 더욱 가깝다.

 @p513

    III.. 펠라기우스 논쟁

  성 어거스틴의 신학 중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부분으로서, 펠라기우스(Pelagius)이단을

반박한 논쟁이 있다. 그의 본래 이름은 모르간(Morgan)으로 그리이스어로 [펠라기우스]가

의미하는 것과 같은 [바다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교양이 있고 명랑한 사람으로 성직자들

중에서도, 당시에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 비교적 덜 광신적이었다. 그는 자유의지를 믿고 원죄에

대한 가르침은 의심하여, 인간이 덕을 행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도덕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일 올바로 행하고, 또 그 행위가 정통적일 경우에는 그 덕행의 보수로서 천국에

가게 된다고 가르쳤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견해가 매우 평범한 것같이 생각되지만, 당시에는 크게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를 문제시하여 이단이라고 선포하게, 된 것은, 주로 성 어거스틴의 노력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펠라기우스 이단)가 당시에 한때나마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어거스틴은 예루살렘의 총주교에게 편지를 전하여, 이 궤계를 사용하먼 이단을 조작하는 자를

경계하도록 요청하였다. 당시에 펠라기우스는 동부지방의 신학자들을 많이 설복하여, 자기 견해를

지지하도록 했던 겻이다. 펠라기우스가 정죄된 후에도 다른 사람들이 그 교리를 약화시킨 또

하나의 교리를 주장하여, 이들은 유사 펠라기우스파(Semi-Pelagian)라고 불리게 되었다. 성

어거스틴의 순수한 교의가 완전히 승리를 얻기까지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특히 프랑스에서

그러하여, 529년에 이르러 비로소 오렌지 종교회의(the Council of Orange)에서 유사

펠라기우스파가 이단이라고 정죄되었다.

  성 어거스틴에 의하면, 아담은 타락하기 전에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죄를 멀리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후에 그들이 타락하게 되고, 그것은 모든 후손에게

전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아무도 자기 힘으로 죄에서 떠날 수 없고, 오직 신의 은총만이

인간을 덕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아담의 죄를 상속하고 있었으므로 영원한

멸망을 받기에 합당한 것이다.

 @p514

  그러므로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자들은 누구나, 어린아이들까지도 지옥에 떨어져 끝없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불평할 이유를 갖지 못한다. 우리는 저마다 악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백>>에서 이 성자는 자기가 요람 속에서 저지른 모든 범죄를

들고 있다]. 그러나 신의 자유로운 은총으로 말미암아 세례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도록 선택을 받는 것이다. 이들이 곧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이들이 천국에 가는

것은 그들 자신이 선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완전히 부폐되어 있으므로 오직 신의 특별한

은총이 없이는-이 은총은 오직 택한 자에게만 내리는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길이 없다.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나머지 사람은 멸망당하는 데에는 아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다. 멸망은 신의 의로움을 나타낼 뿐이며, 구원은 그의 자비를 나타낼

따름이다. 이 어느 것이나 전부 그의 선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잔인한 교리는 칼빈에 의해 부활되었다. 그러므로 그 이후로 카톨릭 ,교회에서는 그 교리를

주장하지 않게 되었지만, 성 바울의 서신에서 그러한 주장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로마서에서

그것이 나타나 있다. 성 어거스틴은 바울와 서신을 마치 변호사가 법률을 다루듯이 하고 있다.

그의 해석은 능숙하여, 원문의 의미를 충실히 드러내 주고 있다. 사람들은 마침내 설복되고 만다.

이것은 성 바울이 어거스틴이 연역한 것을 믿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용된

본문을 딸로 떼어 보더라도 그것이 어거스틴의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긍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은 멸망을 받는다는 교리가 충격을 주는 가르침으로

생각되지 않고, 오히려 선한 신의 뜻으로 돌렸다는 것은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죄에 대한

확신은, 성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갓 태어난 유아까지도 사탄의 지체라고 믿게 하였던 것이다.

중세기 교회에서 일어난 가장 잔인한 일들의 대부분이, 그 기원을 찾아보면, 어거스틴의 이

보편적인 죄에 대한 음울한 의식에 이르게 된다.

  성 어거스틴을 실제로 괴롭힌 한 가지 지적인 어려운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인류, 즉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으면서도, 인간을 창조한 것이 비참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아니다.

 @p515

  그를 괴롭힌 문제는 이러하다. 만일 원죄가 성 바울의 가르침대로 아담으로부터 유전되어

내려오는 것이라면, 영혼도 육체와 더불어 부모들로부터 번식되어 왔어야 할 것이다. 죄는 영혼에

속한 것이며,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교리로 그는 난점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이에 대하여 성경이 침묵하고 있으므로 이 문제에 올바른 견해를 갖는 것은

구원에 필요한 것일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보류하고 있다

  암흑 시대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등장한 이 뛰어난 지성을 가진 인물이 문명을 구하고,

야만인들을 몰아내며, 행정권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개혁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처녀성의 가치나 세례 받지 않은 어린이의 멸망 같은 것만 설교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교회가 개종한 야만인들에게 전해준 것이 이러한 편견이었음을 생각할때, 그 뒤에 오는 세대가

그 잔인성과 미신에 있어서,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심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못된다.

  역주

 #1 기독교의 가르침은 마음의 바탕에 중점을 두고 그 계율은 매우 엄격하다. 예컨대 [여인을

보고 정욕을 품으면] 간음을 한 것으로 간주한다.

 #2 기독교에서는 육신을 성령의 집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귀족의 딸 루크레시아가 왕자에게

유린을 당하고 자살한 것도 죄악시한다.

 #3 구원할 자를 여호와께서 창세 전부터 정하였다는 기독교의 교리. 칼빈이 그 대표적인

신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