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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whitelawyer (2005-03-23) |
354년에 아프리카의 타가스테에서 출생하여, 430년 히포의 감독 (현재 알제리 숙크아라스)으로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교부중의 한사람입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패거리를 이루어, 타락한 도시 바벨론의 뒷 골목과, 환락의 진흙탕의 길을 마치 값비싼 향수나 향유의 거리인양 쏘다녔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론 2권.3.8)
그는 도둑질도 장난을 빙자하여 서슴치 않고 했습니다. 그 도둑질은 물건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단지 도둑질하면서 느끼는 쾌감 때문에 그 같은 짓을 했습니다. 알려진 대로 배나무 얘기도, 그것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훔치고 싶은 충동 때문이었습니다.
몰래 야밤에 들어가 배를 따냈지만, 실제 맛본것은 두세 개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버리거나 돼지에게 주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훗날 그 같은 기억을 회고하면서,
"죄악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 행한것이 아니라, 단순히 죄악 그 자체를 좋아하는데서 생긴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범행동기도 심층적으로 분석했습니다.
범죄뒤에는 두가지 요인이 있는데, 하나는 세상적 욕망을 채우고 싶은 소유욕이요, 다른 하나는 가진 것을 잃지 않으려는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범죄에는 범죄 자체를 사랑하는것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동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범죄를 하는 동기가, 시각의 즐거움이나, 촉각 또는 감각의 즐거움이나, 명예욕, 정복욕, 정권욕과 같이, 그 대상에 따라 상이하게 적용된다고 본 점에서, 이 문제를 심리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고백론2권 5,10,11)
"나는 우정의 샘을 불결한 더러움으로 모독하였고, 그 순결을 지옥과 같은 탐욕으로 훼손하였으면서도, 외모로는 항상 인자한 인격을 지닌 인사로 보이려고 애썼습니다. 나는 이처럼 육욕적이고, 순수하지 못한 사랑에 사로잡혀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고백론3권1,1)
그는 키게로가 쓴 호르텐시우스에서 "행복은 육욕의 만족에 있는것이 아니라, 진리의 인식에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케게로가 제시한 지헤의 탐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차하는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민한 젊은 시절,11년을 카르타고에서 머물렀습니다. 17세에 카르타고에 가서 그곳을 떠난 29세까지의 13년은, 그의 지적 탐구와 수용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에 해당됩니다. 그가 후에 겪은 기독교로의 회심조차도, 어떻게 보면 역설적으로 이때에 예비된 것이라고 불수 있습니다.
충분히 부식된 토양위에서 힘찬 생명력의 싹이 피어오르듯이, 카르타고에서의 인생체험과 실험은, 결국 4년후(387년) 암브로시우스에게 극적으로 세례를 받는 사건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주시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카르타고 시절의 어거스틴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기보다는, 오히려 진지한 삶과 진리의 실험적 탐구기간이었다고 보는것이 타당할것입니다.
카르타고에서의 자유분방한 생활을 통하여 갈등도 많이 겪었지만, 지적으로, 신체적으로, 인간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절실한 것은, 선과 악의 문제였습니다. 자신의 실제 행동에서 범하고 있는 악한 행위와, 그것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싶은 간절한 소망 사이에서, 어떻게든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만 했습니다. 기독교로 돌아가려는 그의 노력에, 가장 큰 방해가 되는것은 영적인 문제와 선악의 문제였습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을 있게 할수 있느냐의 의문이었습니다.
이세상의 불행과 고통을 만들어 놓은 이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할수 있는가가, 그의 고민이었습니다.
선악 이원론에 근거한 마니교(Manicheism)는, 원래 조로아스터교(Zoroaster)에서 유래한 것으로, 3세기 마니(Mani274-279)가 최초로 설파한 이원주의를 주장하는 그노시스파 즉 영지주의적 종교의 일파였습니다.
마니는 엄격한 이원주의를 가르쳤는데, 빛과 어둠, 선과 악, 영체와 물체를 대립된 것으로 보았으며, 이들을 실체로 파악하였습니다.선과 악의 본질은 원초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서로 분리되며, 반되되는 원리입니다.다만,악의 원리의 그릇된 행동으로 인해, 이 세상이 혼돈스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Britnica Encyclopedia 783)
선악 이원론에 따르면, 근본원인은 신에게 까지 구해지며 ,결과적으로 자기가 저지른 잘못도 신의 책임으로까지 추적해 갈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때문에 자신의 죄에 대한 죄책감을 덜 수가 있습니다. (마니교는 구약성경적인 하나님의 개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빠져 나올수 있게 하였습니다.) 자애로워야 할 유일신이, 징벌적이고, 복수적이며, 고통을 주는 전능자라는 점을 이해할수가 없었습니다.
플라톤은 육체적 쾌락의 추구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했고, 철학의 시조인 키게로는 관능의 탐닉은 철학의 가장 큰 적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플라톤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로티누스 그리고 포르프리우스로 이어집니다. 포르프리우스(Porphrius)는 그의 저서 에네아드(Enneads)를 집필하여 최초의 조직신학자라고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플로티누스의 주장에 따르면, 악은 홀로있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선의 힘의 속성에 따라, 악은 혼자일 수만은 없습니다. 마치 황금의 족쇄에 붙잡혀 있는 포로처럼, 악은 필히 선의 사슬에 매어 있는것으로 나타납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악은 결코 실체일수가 없으며,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선을 내포하고 있는것이었습니다. "악은 원천으로부터 멀어졌을때의 상태이며, 그것은 실체가 아닌 상대적인 선의 불충분일뿐이며, 그 원인은 역시 선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악이란, 질서로부터 분리를 의미한다. 다시말해 보다 상위존재와의 접속점을 읽고, 자기의지적부분(self willed part)이 되는것을 뜻한다."
밀라노의 교회 감독 암브로시우스는 로마의 고위급 관료인 리구리아(Liguria)와 에밀리아((Aemilia)의 주지사로 명망높은 명문귀족이었습니다 그는 34세에 밀라노 감독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밀라노에 갈 무렵 암부로니우스는 44세 였고, 어거스틴은 30세였습니다.
-Fredrick Copleston의 A History of Philosophy (전9권)의 제2권 Augustine to Scotus Westminster. Maryland : The Newman Press 1962 에서...
암부로시우스는 당시의 석학이었습니다. 어거스틴과는 달리,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읽어 관계서적들을 독파하고 있었으며, 설교는 지적 내용이 가득하고, 새로운 통찰력이 번득이고 있어, 당대 라틴 세계의 최고 설교자로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듣기 시작한 설교는 창세기 내용이었던 같고, 이것은 그때까지 물질주의적 사고에만 젖어있던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것 같았습니다. 그의 자신에 찬 모습은 어거스틴에게 퍽 인상적으로 비췄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변호한다는 것이 수치스럽게만 느껴졌던 그에게, 처음으로 신앙도 변호할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구약성서의 해석은, 그가 고민해 왔던 여러문제들에 대한 답을 주는것 같았습니다.
암브로시우스 자신도, 차안의 세계보다는 피안의 세계에 중점을 두며 설교 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영혼에 관해서 집중적으로 설교하였습니다.
"인간은 바로 영혼이라는 것입니다.몸이란 단순히 헝겊으로 만들어진 옷과 같은 것이며, 우리의 몸이란 영혼의 수동적인 도구에 불과합니다. 적은 바로 우리 내면, 우리안에 있는것이며, 잘못의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려던 태도의 잘못을, 인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약성서의 여러구절을 영적으로 해석하는것을 듣고서, 율법과 예언서에 대한 마니교의 비난은 무엇인가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마음에는 두가지 입장에 대한 저울질의 어려움을 겪게 되고, 때로 판단 중지에 이르기까지 된것 같았습니다. 아직도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며 마니교 신앙을 저주할 생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승리도 패배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저울추의 균형이 차츰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마니교의 사상에 심취하여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던 마음이, 반대로 그리스도 신앙에 근거하여 마니교를 비판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돌아섰습니다.
그자신이 그토록 불변의 진리로 인식하고 있던 정신적 실체론(Spiritual Substance)도, 더 이상 신빙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세계와 모든 자연의 구조와 본질이 육체의 감각적 기능을 통하여 이해할수 있다는, 사상과 모든 학파를 비롯한 철학자들의 주장도, 그에겐 회의를 불러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공간속에 형태적으로 위치하며, 존재하지 않는것은 단순히 없는것으로 확정짓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정신세계속에 형성된 형성이란, 눈으로 확인할수 있는 궁극적 실체이어야 하며, 모든 철학적 사상도 개념화 형상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속 깊은 내면에는, 에피쿠로스적 쾌락주의가 스스로를 정당화 시켜주고 있었습니다. 육체의 쾌락이 있을 때에 행복한 것이며, 죽음후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진정한 절제가 따를 때 참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생활은 매우 방만하였습니다.
행복이란 영혼안에 진리의 원천인 신을 소유하는것입니다. 지혜란 신의 아들입니다. 자신들은 신을 얻은것이 아니라, 신을 구하고 있기 때문에, 지혜롭거나 행복하다고 간주할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어거스틴의 회심은 두가지의 과정을 겪었는데, 하나는 지적인 것이었으며, 다른하나는 의지적인 것이었습니다.
첫번째 회심은 물질주의적 사고와 선악의 문제였습니다. 두번째 회심은 의지적인것으로, 세상의 부와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는것이었습니다.
진리를 깨닫고도, 습관 때문에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의 영혼속 깊숙이 숨겨져 있던 그 자신의 비참한 모습이, 눈앞에 스크린처럼 드러나고, 폭포수 같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였고, 그는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홀로 한없이 통곡하고 싶어, 알리피우스의 곁을 떠나, 정원의 호젓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왜 나의 더러운 생활을, 이 순간에 깨끗이 끝내지 못합니까?"라고 애통하며 울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이웃집에서 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소년의 음성인지 소녀의 음성인지 구별은 안갔지만 그 노래의 가사는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라고 들렸습니다.
그는 알피리우스가 앉았던 장소에서, 사도바울의 서신을 펴들고 제일 먼져 눈에 띠는 곳을 읽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로마서13:13-14]
이는 광명한 확신의 빛으로, 어거스틴의 폐부를 찌르듯이 박혀 들어갔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버틸수가 없었습니다. 선택의 폭풍은 지나가고, 은밀한 정적과 평화가 그의 온몸에 가득하였습니다. 그의 오랜 방황이 종착역을 찾는 순간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회의함으로 존재한다"
근대철학의 시발자인 데카르트는, 존재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조명해 주시기는 하지만, 신은 무한하시기에 우리의 한정된 마음을 가지고는 그 전제를 인지할수 없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
내용출처 : [직접 서술] 블로그 집필 - whitelawyer의 블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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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naidel2 (2005-05-23 21:17) |
성어거스틴의 고백록 마음의 회무화과 나무 밑에서
하나님 인식에 대한 지적 확실성에 도달한 어거스틴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하나님 안에서 그의 마음이 더 견고히 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것들을 쉽게 떠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는 심한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때에,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심플리키아누스를 찾아가게 된다. 어거스틴은 심플리키아누스에게서 빅토리누스의 회심 이야기를 듣는다. 빅토리누스는 뛰어난 플라톤주의철학자였는데, 성서와 심플리키아누스의 권면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여러 사람들을 앞에서 신앙고백을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적 영향을 널리 끼친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은 빅토리누스의 회심이야기를 들은 후, 자신도 그와 같이 전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더욱 소망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의지의 왜곡에서 비롯된 습관의 폭력에 의해,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행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어느 날, 어거스틴은 폰티키아누스라는 사람과 대화를 하게 된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그의 집에서 바울의 서신을 발견하고는 기뻐하며 애굽의 수도사 안토니우스의 회심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또한 수도원과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회심하여 수도사가 된 두 명의 동료에 대해 말했다. 이 이야기는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여전히 습관의 흐름을 쉽게 끊지 못하여,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했다.
어거스틴의 내면의 갈등 상황은 그를 정원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그는 이러한 갈등 상황의 원인을 의지의 왜곡, 의지의 혼돈에서 찾고 있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자신의 이해가 마니교도가 믿는 선과 악의 두 가지 본성 이해와는 전혀 다른 것임을 밝힌다. 즉 어거스틴은 사람이 무엇을 할려고 숙고할 때 하나의 영혼이 서로 상반되는 여러 의지 사이에서 헷갈리며, 이 헷갈림에 의해 내면의 갈등이 비롯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어거스틴은 습관의 폭력에 얽매여 영혼의 병으로 앓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진리를 좇아 하나님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그의 육욕과 세상의 쾌락의 유혹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그는 내딛기 두려워했던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순결한 절제, 하나님의 선행적인 부르심을 듣고 유혹의 소리가 매우 작아졌음을 느낀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작은 소리는 어거스틴을 붙들었고, 따라서 그는 유혹의 소리와 절제의 부름 사이에서 처절히 논쟁하며 이상한 흥분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그 때, 그는 무화과나무 밑에 쓰러져 울며, 자신의 죄에 대해 통회한다. 그러던 중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는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성서를 펼쳐 첫눈에 들어온 롬13:13~14 을 읽고는 마음의 회심을 체험한다. 이 체험을 어머니 모니카에게 이야기하고, 모니카가 기도에 응답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어거스틴의 고백에는, 습관의 폭력에 대한 무서움이 담겨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길로 가야하는 것이 옳은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아는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그 이유는 바로 의지의 왜곡에서 비롯되어, 필연이 된 습관의 폭력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쇠사슬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죄의 속성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이 쇠사슬을 끊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거스틴은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고 있다. 즉 우리를 조명하는 빛이신 하나님을 향할 때, 그러한 것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어거스틴은, 습관의 폭력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유일회적인 것으로 보는 것인가, 아니면 끊임없이 하나님의 조명을 받아 매 순간 습관의 폭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보는 것인가? 더불어, 어거스틴의 구원이해 또한 유일회적 사건인가, 매 순간 끊임없이 일어나야하는 사건인가?
성어거스틴의 참회록 어거스틴의 세례와 모니카의 죽음
8권에서 회심을 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종으로, 이전의 허망한 것들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을 쫓으며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한다. 그리고 혀를 사용하여 거짓말을 일삼았던 교수직을 그만두고 싶어 한다. 그 때 마침, 어거스틴은 폐가 약해져 호흡을 하기가 힘들게 되는데, 어거스틴은 학교를 그만 둘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생겼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방학이 될 때까지 인내하기로 결심한다.
곧이어, 어거스틴 일행에게 별장을 빌려 준 베레쿤두스의 회심과 죽음, 네브리디우스의 회심을 언급한다. 어거스틴은 그것을 대단히 기쁘게 여기며, 베레쿤두스의 죽음에 깊은 애도와 기도를 올린다. 드디어 방학이 되자 어거스틴과 일행은 카씨키아쿰에 있는 베레쿤두스의 별장으로 간다. 거기서 친구들과 학문적인 대화를 나누고, 하나님께 향한 자신의 독백을 정리하여 책을 쓴 것과, 그 곳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정신세계와 마음을 다듬으셨던 것, 그리고 알리피우스를 회심시키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다. 그러면서 참 행복은 불변하시는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자기가 치통을 겪었다가 중보기도를 통해 치유받은 경험을 이야기 하면서, 영과 육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
어거스틴은 방학이 끝나자 수사학 교수직을 그만둔다. 그리고 세례를 받기 위해 다시 밀라노로 온다. 어거스틴은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알리피우스와 함께 세례를 받고, 과거의 그릇된 생활에 대한 불안이 전부 사라졌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밀라노에서 찬송이 불려지기 시작한 유래-유스티나에 의한 암브로시우스의 박해를 막기 위해 교인들이 모여 철야를 하던 중, 동방교회를 본받아 교인들이 찬송을 부름-를 이야기한다. 또한, 암브로시우스의 꿈에 의해 게르바시우스와 프로타시우스의 유골을 발견하여, 사람들이 병고침을 받고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하면서 암브로시우스에 대한 박해가 멈춘 일을 회고한다.
이제는,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에 대한 회상이 계속 이어진다. 모니카는 어린 시절, 술을 조금씩 맛보다가 나중에는 술을 좋아하는 습관을 지니게 되었는데, 하녀의 질타를 통해 그 습관을 단절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니카는 남편에게 순종하면서도 지혜있게 행동하여 화목한 부부로 남았음을 말한다. 어거스틴과 그 일행이 모니카와 함께 아프리카로 돌아가던 중, 오스티아에서 어거스틴은 모니카와 함께 신비체험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지혜와 접촉한 것은 비록 매우 짧은 순간이었지만,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것으로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이후, 모니카는 열병으로 눕게 된다. 그녀는 원래 고향에 묻히기를 원했던 사람이었지만, 믿음이 성장하여 임종에 이르렀을 때는 어디에 묻히던 상관이 없고, 다만 자식들에게 자신을 주님의 제단에서 기억해주기를 요청한다. 이 말을 남기고 모니카는 세상을 뜬다. 어거스틴은 겉으로는 태연했으나 ,그 마음에는 이중적인 슬픔으로 괴로워했으며, 결국 홀로 울었던 일을 회상한다. 이어서, 하나님께 어머니와 아버지를 긍휼히 여겨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면서 9권을 마친다.
어거스틴은 9권을 쓰는 내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고백한다. 즉 자신이 회심하게 된 것과 세례를 받게 된 것, 어머니와 함께 했던 신비체험, 어머니의 죽기까지의 과정 등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계획하심에 따른 것임을 고백한다. 어거스틴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나의 삶에도 은밀히 개입하시어 내 삶을 이끄시는 주님의 은혜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9권을 읽는 동안, 어거스틴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과연 그 기쁨이란 어떤 것일까...? 내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인지 아직 그렇게 깊은 체험은 하지 못했다. 여전히 돈과 명예와 욕망을 채우는 일들이 더 흥미롭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될 그 날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은 막막하지만, 주님께서 내 마음에 주신 인내를 가지고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진리를 추구하면서, 나를 온전히 변화시키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것이다. 그 때, 주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기쁨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
내용출처 : [직접 서술] 블로그 집필 - 즐거웁자*^^* |
어거스틴 (알제리아) | 성공인물.성경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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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거 스 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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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의 이해에 필요한 몇가지 중요한 문제
1. 어거스틴이 개종하고 세례를 받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은 무엇인가? ① 모니카의 영향. 어거스틴이 33세(387년 밀라노에서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친구 알리피우스와 함께 암브로시우스 감독에게 세례받음)에 세례를 받게 되기까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어머니 모니카였다. 모니카의 경건 생활과 자기 아들을 주 앞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일편단심으로 기울였던 노력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자기 어머니가 이 한 가지 소망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였는지를 말하면서 자기가 믿음의 은혜를 받게 된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음을 인정했다.
② 키케로의 영향. 카르타고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던 어거스틴은 마니교의 감독이었던 파우스투스에게서 만족할만한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키케로가 저술한 '호르텐시우스'를 읽기 시작했다. 어거스틴은 이 대화편에서 크게 감동을 받았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가장 값있게 추구해야 할 것은 오로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 그 책의 주제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진리의 추구에 온 심혈을 다 기울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철학에서는 만족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점차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를 의심하는 회의주의에 빠져들게 되었다.
③ 신플라톤 철학의 영향. 이 때 어거스틴은 플라톤의 번역서와 신플라톤주의자들의 글을 읽고 상당한 만족과 깨우침을 받았다. 플라톤 사상의 핵심이 되는 관념론은 어거스틴에게 영혼의 빛 가운데서 실체를 고찰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플라톤은 어거스틴의 사상을 유물론에서 관념론으로 바꾸게 했다. 어거스틴은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윤리론을 택하여 기독교화 시켰다.
④ 암브로시우스의 영향. 어거스틴은 밀라노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플라톤을 연구했다. 그는 밀라노에서 설득력(은유적 성서 해석)이 뛰어난 암브로시우스 감독을 만났다. 처음에는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나 연설의 문체를 공부하고 듣는 것만을 위해 예배에 참석했었으나, 마침내는 진지하게 기독교를 연구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아카데미파의 비판적 시각을 통해 마니교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기독교회의 예비신자가 된다.
⑤ 바울 서신의 영향. 바울 서신은 그의 기독교에 대한 평가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정원에서 울타리 밖의 어떤 어린 아이가 '취하여(들고) 읽으라"(Tolle lege, Tolle lege)고 한 노래 소리를 듣고 급히 쫓아가서 성경책을 펼쳐 들었다. 그것은 육체를 좇는 생활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하는 바울 서신의 말씀(롬13:13,14)이었다. 어거스틴은 그 말씀을 읽는 순간 무화과 나무 밑에서 회심하고 새 존재가 된 것이다.
2. 고백록을 저술한 목적이 무엇인가? 고백록은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긴 감사의 기도이다. 어거스틴은 사람의 힘으로는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을 수가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백록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로우신 사랑을 그리고 있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범한 원죄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보내주신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은 은혜가 없으면 아무도 영원한 저주에서부터의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어거스틴은 제 1권부터 제 10권까지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사 구원을 받게 하셨던 크신 축복을 말하기 위해서 자신의 죄악되었던 지난 날의 생활을 겸손하게 밝혔다. 어거스틴이 바라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던 모습을 읽은 독자들이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마지막 부분에서 자기가 세례를 받고난 이후의 자신의 영혼 상태에 관하여 말한다. 이것은 많은 유혹 가운데서 꾸준히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또 하나님과의 연합은 깊은 묵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3. 신비주의에 대한 어거스틴의 견해. 어거스틴은 영혼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는 것이 영혼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 은혜와 협력하여서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과 더불어 연합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의 깨우침을 받는다. 인간은 여러 단계의 수준을 거쳐서 완전에 도달한다. 신비적인 은혜를 추가적으로 받은 사람은 깊은 묵상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과 보다 더 가까워진다. 이 밀접한 연합은 자기를 부인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합한 삶을 살아가는 복된 사람들의 상태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과 같은 환상적인 연합의 형태를 가지기도 한다.
4. 어거스틴은 '환상'이란 말로 무엇을 나타내려 했는가? 절대적인 진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된다. 왜냐하면 모든 진리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성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진리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하나님과 성경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인간이 자기 영혼 속에 임재하고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하려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 안에 있는 바 실체와 진리들을 조명하여 주는 하나님의 은혜는 세례를 받을 때 임한다. 하나님은 특별하신 방법으로 인간의 영혼 속에 임재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 속에 진리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
5. 어거스틴의 시간관. 어거스틴의 시간관은 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시간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주를 만드신 순간 함께 창조하신 것이다. 시간 속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기간을 측정하는 틀이 되는 제한된,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사물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 속에는 시간이 없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영원한 순간으로 존재한다. 하나님에게는 시작이나 끝이 없다. 영원한 현재만 있을 뿐...
6. 플라톤이 어거스틴에게 끼친 중요한 사상적 영향. ① 이데아론. 플라톤이 어거스틴의 사상에 끼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이데아론이다. 어거스틴이 플라톤의 글을 읽기 전까지는 유물론자이었다. 그래서 그는 순수한 영적인 존재의 실재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거스틴은 뜨겁게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플라톤의 영원한 이데아 개념과 절대 진리의 개념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② 정의론. 플라톤이 주장한 이상적인 유토피아는 정의로운 국가를 기초로 하고 있다. 플라톤은 인간이 자기 혼자만으로서는 정의로와질 수 없다고 믿었다. 그에게는 정의로운 국가에 산다는 것이 중요했다. 어거스틴은 플라톤으로부터 정의에 대한 도덕적인 개념을 받아들여서 정의란 하나님과 이웃과의 정당한 관계라는 용어로 재해석했다. 그러나 그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살지 않는 사람은 정의로와질 수 없다고 보았다. 정의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인간이 정의로운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은혜를 받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사회 즉 종교적인 사회는 정의로운 국가 안에서만 가능하다. 정의로운 국가를 떠나서는 정의와 공의를 실천할 수가 없다.
③ 교육론. 플라톤은 인간이 진리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의 훈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교육은 도덕적 훈련을 그 내용으로 하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 영원하신 하나님과 더 가깝게 연합하도록 해야 한다. 진리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모든 실체들이 형상이 되는 영원한 이데아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서만이 찾아낼 수 있다. 어거스틴의 사상도 전적으로 이 견해와 일치하고 있다.
④ 예술론. 시나 희곡은 현실 세계를 무시하고 허구의 세계를 그린다는 것 때문에 플라톤은 그것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게다가 많은 영웅들의 이야기는 어린이들의 성격 형성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여겨졌다. 어거스틴도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종교적인 활동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은 무엇이 되었든지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7. 어거스틴의 정치론. 어거스틴은 합법적인 국가는 반드시 종교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상이다. 그는 국가의 종교는 반디시 참 종교 즉 기독교이어야 한다고 했다. 모든 미덕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생각을 이끌어내지 않는 국가는 덕스럽게 행동할 수가 없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 벌을 내리거나 육체적 손해를 입혀야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8. 어거스틴이 논박했던 이단들. ① 도나투스파. 도나투스파는 성례란 반드시 참석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해 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에 의해서 집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초대 교회의 분파이다. 어거스틴은 사제로 재직하던 초기에 신자들이 어려운 교리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대중적인 음률의 노래를 작곡한 일이 있다. 그리고 히포의 감독 시절에는 '파르메니아누스의 편지를 논박함'(Aganist the Letter of Parmenianus)이란 제목을 붙인 3권의 책을 써서 거룩이란 교회를 떠나간 소수의 분파들에 의해서는 거룩이 유지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교회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어거스틴은 모두 7권으로 된 '세례에 관하여'(Concerning Baptism)라는 책을 써서 계속해서 이 이단을 논박했다.
② 마니교. 마니교는 끊임없이 싸움을 벌리고 있는 두 개의 원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이단이다. 그 두 원리는 빛과 선의 원리 그리고 어둠과 악의 원리이다. 존재하는 모든 악은 악의 원리에서부터 나온다. 어거스틴은 이 사상을 논박하기 위하여 많은 책을 썼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자유의지론'(Concerning Free Will)과 '두 영에 관하여'(Concerning Two Spirits)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의 본질론'(Concerning the Nature of Good)이 가장 뛰어난 책이다.
③ 펠라기우스파. 펠라기우스파는 어거스틴에게 가장 큰 골치거리었다. 그들은 원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의 덕스러운 삶만 가지고서도 영원한 상급을 얻는 공로를 쌓을 수 있다고 했다. 이 이단은 은혜와 구속에 대한 기독교 견해에 정곡을 찔러 공격을 했다. 어거스틴은 성공적으로 펠라기우스파를 무찔렀다. 그가 펠라기우스파를 논박하기 위하여 저술한 책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6권으로 된 '율리안을 반박함'(Aganist Julian)이 있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하여'(Concerning the Grace of Christ)나 '원죄에 관하여'(Concerning Original Sin)와 같은 소논문들이 많이 있다.
9. 신국론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신국론(하나님의 도성)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제 1부는 이교사상에 대한 논박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거스틴은 이방 종교 뿐만 아니라 이방 철학에 대해서도 논박했다. 그러나 제 11권부터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기원과 발전 과정 그리고 궁극적인 목적을 다루고 있다.
10. 신국론이라는 방대한 책을 저술한 동기. ① 로마의 함락에 대한 기독교적 변명. 알라릭이 고트족을 이끌고 들어와 로마를 함락시키자 많은 이교도들은 로마의 멸망에 대한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전가시켰다.
② 로마의 재난에 대한 기독교적 변명. 로마가 함락을 당하기 13년 전부터 이교 사상이 만연되어 모든 신전들이 공공연하게 정부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교도들의 지도자들은 로마에 재난이 임한 것은 로마인들이 옛날에 섬기던 신들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기들이 당한 재난을 책임질 속죄양을 빨리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들의 요구는 이와 같은 구실을 찾아내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기독교인으로서 호민관으로 있던 마르셀리누스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이교도들에 대한 답변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13년에 걸쳐서 22권의 책을 완성했다.
11. 교회론. 어거스틴이 신국론을 쓰던 시대에는 교회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로 갈라져 있었다. 동방 교회는 황제를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보았다. 주요 절기들을 지키는 시기나 방법도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서방 교회는 휠씬 더 황제로부터 자유스러웠다. 암브로시우스는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발칸 반도에서 마음대로 황제권을 행사하게 했다. 어거스틴은 통일적, 보편적 측면에서 교회를 생각했다. 그가 교회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지 않은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각 지 교회가 자기 교회를 조직할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일부 특별한 교회들에게는 특별한 권위를 인정해주었다. 신학적인 문제를 결정 하는데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 최종 결정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궁극적인 권위는 오직 하나의 특별한 교회에만 있다고 보았다.
12. 신령한 사회의 우월성. 어거스틴은 구성원들에게 행복한 평화를 누리게 해주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했다. 그는 고대 철학자들의 방식대로 사회를 가정, 국가, 지구, 우주의 네 단계로 나누어 고찰한 후에 물질적인 사회속에는 어느 곳에나 슬픔, 죄악, 고통, 잔인함이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진정한 행복과 완전한 평화는 영혼이 불완전한 물질에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신령하고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연합하는 삶을 가질 때만이 가능하다고 한다.
13. 삼위일체론. 신국론에도 삼위일체 사상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만,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만을 위해서 16년 동안(400~16) 16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는 제 1권부터 제 7권까지에서 성경과 전통적 사상을 근거로 하여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하나의 본체로 존재하고 계심을 분명하게 밝혀 놓았다. 그리고 제 8권부터 제 15권까지에서는 삼위일체 교리를 풍부하게 해설해 놓았다. 그러나 그는 중세의 신학자들처럼 삼위일체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그는 독자들이 믿음을 가지고 이 교리의 가능성을 인정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14. 현대 철학자들이 어거스틴을 배척하는 이유.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은 어거스틴의 시간과 공간에 관한 견해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시간과 공간에 관한 어거스틴의 주관적인 해석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필적할만하다. 그러나 분석 철학자, 실용주의 철학자, 일부의 실재론자들은 그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적 입장에 반대 의사를 표시한다. 많은 현대 철학자들은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한다. 지식의 대상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식이란 그 자체가 인간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감각을 초월해 있는 것들에 대한 완벽한 지식은 인간으로서는 가질 수가 없다고 한다. 그들은 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인류학이 윤리학의 상대적인 문제를 보충해준다고 한다. 어거스틴이 이러한 철학적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여 믿음이 없이는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한 것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믿음이 합리적으로는 세울 수 없는 권위에 대한 믿음이었음을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믿음을 이런 식으로 강조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매우 특별하게 베풀어 주신 은혜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노만 가이슬러 편, 박일민 역.『어거스틴 사상』. 1994. 성광문화사. 참고. |
어거스틴의 신학사상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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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평 감사합니다^^ | |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는, 이교도 부친과 크리스챤인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저는 초기에 어거스틴의 생애 라는 책을 통해 동감을 느끼고 신앙 첫걸음에 도움이 됐습니다. 그는 수사학을 배워 법률가가 되려고 했으나 373년 키케로의 Hortensius를 읽고 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9년간 마니교를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니교 지도자 파우스트에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384년 밀라노로 가서 신풀라톤주의에 접함과 동시, 암부로 시우스 주교의 설교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로마서13:13을 보는가운데 회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히포주교로 있었는데 마니교의 악의 문제 해석에 대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모든 피조물의 선함을 변증했고 도나투스파의 논쟁을 통해서 교회론과 성례전 및 섭리론을 정리 했습니다. 펠라기우스논쟁을 통해서는 인간타락과 원죄 및 예정론에 대한 교리를 발전 시켰습니다. 대표적 작품은 400년경 저술된 '고백론'과 예수교 최초의 역사철학사인 '하나님의 도성(신국:신의 도성)으로 이책은 신학생들이 필독하도록 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의 사상은 13세기 아퀴나스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재해석되어 가톨릭신학으로 정착되기 까지 중세의 보편적 신학으로 영향을 주었습니다. 16세기에는 루터,칼빈등 종교개혁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다른점은, 인간 영혼기원에 있어서 유전설을 따랐고,창조설은 토마스아퀴나스와 개신교에서 따르고 있습니다. 종말론에서 천년왕국 견해는 후천년설(천년기 후 재림설)을 따랐습니다. 이는 무천년설과 유사하여 무천년설을 따랐다고도 합니다. 그의 신의도성에서,'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기간동안에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가 교회를 통하여 실현되는것'으로 규정한 이후 계속되온것이 무천년설임. 즉 천년기간을 신약시대로 보는 것임. |
어거스틴의 신학중 도나투스 논쟁의 핵심은?
step1970 (2005-06-09) |
도나투스 논wod
도나투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은 초기 교회사에서 매우 중대한 사건 중에 하나로 손꼽힌다. 이 논쟁으로 인해 초기 어거스틴의 신학이 좀 더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아래에 자세히 도나투스와 어거스틴 논쟁의 초점을 언급하였다.
도나투스파는 4세기 초, 곧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대박해가 끝날 무렵에 일어났다. 이 파는 일찍이 몬타누스파와 노바티아누스파가 가지고 있던 청교도적 성향을 띠고 있었는데 이들 역시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도나투스파가 직접 생긴 원인은 박해 기간 중에 강압이나 두려움에 의해 성경을 버리거나 부인하는 자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도나투스파는 교회는 이런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범죄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교회는 하나님이 떠난 교회이므로 참 교회로 인정할 수 없으며 이런 범죄를 저지른 지도자들로부터 세례를 받거나 가르침을 받는 것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르타고의 대부분의 감독들은 관용 정책을 써서 박해시에 범죄한 자들을 비호하고 반대로 도나투스파와 같은 강경론자을 탄압했다. 그래서 강경론자들은 새 감독을 세웠는데 316년에는 도나투스가 카르타고의 강경론자들이 세운 새 감독 자리에 올랐다. 이렇게 되어서 카르타고에는 두 사람의 감독이 있게 되었고 북아프리카의 교회는 그후 약 100년간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도나투스파는 급속히 발전하여 로마 제국의 다른 지방에도 전파되었다. 그들은 콘스탄틴 황제에게 자기들을 보호하고 후원해 달라고 호소하였으나 콘스탄틴은 처음에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박해했다. 그러나 박해를 당하자 도나투스파는 더 광신적인 열정으로 세력이 확장되었다. 그러자 콘스탄틴은 태도를 바꾸어 321년에 그들에게 완전한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주는 새 법을 선포했고 카톨릭에 대해서는 인내와 관용으로 그들을 대하라고 권고했다.
도나투스파는 우선 엄격한 교회 규칙의 적용과 교인의 순결 유지에 대해 강조했다. 그러고 세속적인 사람을 교회 지도자로 세우는 것을 절대 반대했다. 교회 일에 대해 세속 권력자가 간섭하는 것을 단호히 배격했다. 그러나 제도는 카톨릭적인 감독 정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그들도 카톨릭의 일반적인 관습을 따라 세례에 의한 중생 곧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인정했고 유아세례도 시행했다.
하지만 정작 어거스틴과 도나투스의 논쟁이 바로 세례와 성례전에 관한 사항이었다. 로마의 박해가 한참이던 시기에 기독교를 버리고 배교한 무리들이 다시 교회에 돌아오는 것에 반대하며, 특히 배교한 성직자가 베푼 세례는 무효라며 다시 세례를 받으려는 도나투스파와 세례는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의 성호로 받는 것이니 베풀어진 세례는 유효함을 논증한 어거스틴(히포의 어거스틴)과의 논쟁을 말한다. 당시 어거스틴과의 논쟁에 의해 도나투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나 이단이라고 하기 보다는 교회의 또 다른 모습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마치 신사참배로 인해 갈려진 기장과 예장의 모습이 연상되어진다.) |
내용출처 : myrodem.com |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 <시간편>에서 시간의 의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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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의 『고백록』1~9장 까지는 대체로 자신의 타락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찾아가는 과정 즉, 회심의 과정을 심도있게 다룬 반면, 10장 부터는 세계 창조의 섭리와 시간이론에 대해서 다룹니다.
일반적으로 과거와 우리 인간의 시간 개념은 과거, 현재,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 이론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어거스틴에 따르면 시간은 항상 현재만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과거와 미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어거스틴의 시간 이론에 따르면 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현재만 있고 과거는 현재의 의식 속에서 '기억'의 방법으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과거라는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그 순간이 바로 현재라는 것이지요.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 하지 않는 미래는 다만, 현재의 사실과 우리의 의식속에 과거라고 간주되는 그 관념이 현재의 의식 속에서 작용을 하여 우리의 정신 속에서 미래라는 관념이 생기는 것입니다.
핵심은 어거스틴에게는 오로지 현재만 있습니다.
P.s] 그리고 고백록은 최근에 CLC 출판사에서 나온 텍스트가 가장 정확한 번역을 했다고 평가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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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어거스틴의 고향, 다가스데의 한 언덕에 위치한 가장 오래된 올리브 나무. 아마도 성 어거스틴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었을 나무이기도 하다.
마다우라의 원형 경기장. 여기서 초등 교육을 받았다.
카르타고의 유적지. 여기서 그는 욕망에 넘친 청소년기를 보냈다.
성 암브로시우스가 사역했던 밀라노 대 성당
성 암브로시우스가 성 어거스틴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터 (밀라노, Italy)
성 어거스틴이 회심 후에 아프리카로 돌아가기 이전에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묵으며 신비 체험을 한 곳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비(오스티아, Italy)
아프리카로 가는 배(모자익, 오스티아)
성 어거스틴이 사역했던 히포 교회(Souk-Ahres, 알제리)
히포에 위치한 성 어거스틴 수도원 전경
성 어거스틴의 성묘(파비아, 이탈리아)
그의 유해가 이곳으로 옮겨졌다
성 어거스틴 성묘 하단 부분(Pavia)
성 어거스틴 성묘 전경(Pavia)
성 어거스틴(6세기 경)
이 그림은 현존하는 것 중, 최고 오래된 것이다.
'비너스의 탄생'으로 유명한 보티첼리가 1480년에 그린 '성 어거스틴'
(Ognissanti 성당 벽화, Florence, Ita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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