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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의 생애

영국신사77 2020. 3. 25. 13:54
                               어거스틴의 생애
                                                              집필자 : whitelawyer  (2005-03-23)
아우구스티누스

 

 

   354년에 아프리카의 타가스테에서 출생하여, 430년 히포의 감독 (현재 알제리 숙크아라스)으로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교부중의 한사람입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패거리를 이루어, 타락한 도시 바벨론의 뒷 골목과, 환락의 진흙탕의 길을 마치 값비싼 향수나 향유의 거리인양 쏘다녔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론 2권.3.8)

 

그는 도둑질도 장난을 빙자하여 서슴치 않고 했습니다.

그 도둑질은 물건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단지 도둑질하면서 느끼는 쾌감 때문에 그 같은 짓을 했습니다.

알려진 대로 배나무 얘기도, 그것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훔치고 싶은 충동 때문이었습니다.

 

몰래 야밤에 들어가 배를 따냈지만, 실제 맛본것은 두세 개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버리거나 돼지에게 주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훗날 그 같은 기억을 회고하면서,

 

     "죄악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 행한것이 아니라, 단순히 죄악 그 자체를 좋아하는데서 생긴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범행동기도 심층적으로 분석했습니다.

 

범죄뒤에는 두가지 요인이 있는데, 하나는 세상적 욕망을 채우고 싶은 소유욕이요, 다른 하나는 가진 것을 잃지 않으려는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범죄에는 범죄 자체를 사랑하는것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동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범죄를 하는 동기가, 시각의 즐거움이나, 촉각 또는 감각의 즐거움이나,

명예욕, 정복욕, 정권욕과 같이, 그 대상에 따라 상이하게 적용된다고 본 점에서, 이 문제를 심리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고백론2권 5,10,11)

 

"나는 우정의 샘을 불결한 더러움으로 모독하였고, 그 순결을 지옥과 같은 탐욕으로 훼손하였으면서도, 외모로는 항상 인자한 인격을 지닌 인사로 보이려고 애썼습니다.

나는 이처럼 육욕적이고, 순수하지 못한 사랑에 사로잡혀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고백론3권1,1)

 

   그는 키게로가 쓴 호르텐시우스에서

"행복은 육욕의 만족에 있는것이 아니라, 진리의 인식에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케게로가 제시한 지헤의 탐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차하는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민한 젊은 시절,11년을 카르타고에서 머물렀습니다.

17세에 카르타고에 가서 그곳을 떠난 29세까지의 13년은, 그의 지적 탐구와 수용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에 해당됩니다.

그가 후에 겪은 기독교로의 회심조차도, 어떻게 보면 역설적으로 이때에 예비된 것이라고 불수 있습니다.

 

충분히 부식된 토양위에서 힘찬 생명력의 싹이 피어오르듯이, 카르타고에서의 인생체험과 실험은, 결국 4년후(387년) 암브로시우스에게 극적으로 세례를 받는 사건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주시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카르타고 시절의 어거스틴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기보다는, 오히려 진지한 삶과 진리의 실험적 탐구기간이었다고 보는것이 타당할것입니다.

 

카르타고에서의 자유분방한 생활을 통하여 갈등도 많이 겪었지만, 지적으로, 신체적으로, 인간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절실한 것은, 선과 악의 문제였습니다.

자신의 실제 행동에서 범하고 있는 악한 행위와, 그것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싶은 간절한 소망 사이에서, 어떻게든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만 했습니다.

기독교로 돌아가려는 그의 노력에, 가장 큰 방해가 되는것은 영적인 문제와 선악의 문제였습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을 있게 할수 있느냐의 의문이었습니다.

 

이세상의 불행과 고통을 만들어 놓은 이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할수 있는가가, 그의 고민이었습니다.

 

   선악 이원론에 근거한 마니교(Manicheism)는, 원래 조로아스터교(Zoroaster)에서 유래한 것으로, 3세기 마니(Mani274-279)가 최초로 설파한 이원주의를 주장하는 그노시스파 즉 영지주의적 종교의 일파였습니다.

 

   마니는 엄격한 이원주의를 가르쳤는데, 빛과 어둠, 선과 악, 영체와 물체를 대립된 것으로 보았으며, 이들을 실체로 파악하였습니다.선과 악의 본질은

원초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서로 분리되며, 반되되는 원리입니다.다만,악의 원리의 그릇된 행동으로 인해, 이 세상이 혼돈스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Britnica Encyclopedia 783)

 

   선악 이원론에 따르면, 근본원인은 신에게 까지 구해지며 ,결과적으로 자기가 저지른 잘못도 신의 책임으로까지 추적해 갈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때문에 자신의 죄에 대한 죄책감을 덜 수가 있습니다.

(마니교는 구약성경적인 하나님의 개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빠져 나올수 있게 하였습니다.)

자애로워야 할 유일신이, 징벌적이고, 복수적이며, 고통을 주는 전능자라는 점을 이해할수가 없었습니다.

 

   플라톤은 육체적 쾌락의 추구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했고, 철학의 시조인 키게로는 관능의 탐닉은 철학의 가장 큰 적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플라톤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로티누스 그리고 포르프리우스로 이어집니다.

포르프리우스(Porphrius)는 그의 저서 에네아드(Enneads)를 집필하여 최초의 조직신학자라고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플로티누스의 주장에 따르면, 악은 홀로있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선의 힘의 속성에 따라, 악은 혼자일 수만은 없습니다. 마치 황금의 족쇄에 붙잡혀 있는 포로처럼, 악은 필히 선의 사슬에 매어 있는것으로 나타납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악은 결코 실체일수가 없으며,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선을 내포하고 있는것이었습니다.

"악은 원천으로부터 멀어졌을때의 상태이며, 그것은 실체가 아닌 상대적인 선의 불충분일뿐이며, 그 원인은 역시 선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악이란, 질서로부터 분리를 의미한다. 다시말해 보다 상위존재와의 접속점을 읽고, 자기의지적부분(self willed part)이 되는것을 뜻한다."

 

   밀라노의 교회 감독 암브로시우스는 로마의 고위급 관료인 리구리아(Liguria)와 에밀리아((Aemilia)의 주지사로 명망높은 명문귀족이었습니다

그는 34세에 밀라노 감독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밀라노에 갈 무렵 암부로니우스는 44세 였고, 어거스틴은 30세였습니다.

 

-Fredrick Copleston의 A History of Philosophy (전9권)의 제2권 Augustine to Scotus

Westminster. Maryland : The Newman Press 1962 에서...

 

암부로시우스는 당시의 석학이었습니다.

어거스틴과는 달리,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읽어 관계서적들을 독파하고 있었으며, 설교는 지적 내용이 가득하고, 새로운 통찰력이 번득이고 있어, 당대 라틴 세계의 최고 설교자로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듣기 시작한 설교는 창세기 내용이었던 같고, 이것은 그때까지 물질주의적 사고에만 젖어있던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것 같았습니다. 그의 자신에 찬 모습은 어거스틴에게 퍽 인상적으로 비췄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변호한다는 것이 수치스럽게만 느껴졌던 그에게, 처음으로

신앙도 변호할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구약성서의 해석은, 그가 고민해 왔던 여러문제들에 대한 답을 주는것 같았습니다.

 

   암브로시우스 자신도, 차안의 세계보다는 피안의 세계에 중점을 두며 설교 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영혼에 관해서 집중적으로 설교하였습니다.

 

      "인간은 바로 영혼이라는 것입니다.몸이란 단순히 헝겊으로 만들어진 옷과 같은 것이며, 우리의 몸이란 영혼의 수동적인 도구에 불과합니다. 적은 바로 우리 내면, 우리안에 있는것이며, 잘못의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려던 태도의 잘못을, 인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약성서의 여러구절을 영적으로 해석하는것을 듣고서, 율법과 예언서에 대한 마니교의 비난은 무엇인가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마음에는 두가지 입장에 대한 저울질의 어려움을 겪게 되고, 때로 판단 중지에 이르기까지 된것 같았습니다. 아직도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며 마니교 신앙을 저주할 생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승리도 패배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저울추의 균형이 차츰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마니교의 사상에 심취하여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던 마음이, 반대로 그리스도 신앙에 근거하여 마니교를 비판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돌아섰습니다.

 

   그자신이 그토록 불변의 진리로 인식하고 있던 정신적 실체론(Spiritual Substance)도, 더 이상 신빙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세계와 모든 자연의 구조와 본질이 육체의 감각적 기능을 통하여 이해할수 있다는, 사상과 모든 학파를 비롯한 철학자들의 주장도, 그에겐 회의를 불러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공간속에 형태적으로 위치하며, 존재하지 않는것은 단순히 없는것으로 확정짓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정신세계속에 형성된 형성이란, 눈으로 확인할수 있는 궁극적 실체이어야 하며, 모든 철학적 사상도 개념화 형상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속 깊은 내면에는, 에피쿠로스적 쾌락주의가 스스로를 정당화 시켜주고 있었습니다. 육체의 쾌락이 있을 때에 행복한 것이며, 죽음후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진정한 절제가 따를 때 참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생활은 매우 방만하였습니다.

 

행복이란 영혼안에 진리의 원천인 신을 소유하는것입니다.

지혜란 신의 아들입니다.

자신들은 신을 얻은것이 아니라, 신을 구하고 있기 때문에, 지혜롭거나 행복하다고 간주할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어거스틴의 회심은 두가지의 과정을 겪었는데, 하나는 지적인 것이었으며, 다른하나는 의지적인 것이었습니다.

 

    첫번째 회심은 물질주의적 사고와 선악의 문제였습니다.

    두번째 회심은 의지적인것으로, 세상의 부와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는것이었습니다.

 

진리를 깨닫고도, 습관 때문에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의 영혼속 깊숙이 숨겨져 있던 그 자신의 비참한 모습이, 눈앞에 스크린처럼 드러나고, 폭포수 같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였고, 그는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홀로 한없이 통곡하고 싶어, 알리피우스의 곁을 떠나, 정원의 호젓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왜 나의 더러운 생활을, 이 순간에 깨끗이 끝내지 못합니까?"라고 애통하며 울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이웃집에서 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소년의 음성인지 소녀의 음성인지 구별은 안갔지만 그 노래의 가사는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라고 들렸습니다.

 

그는 알피리우스가 앉았던 장소에서, 사도바울의 서신을 펴들고 제일 먼져 눈에 띠는 곳을 읽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13:13-14]

 

   이는 광명한 확신의 빛으로, 어거스틴의 폐부를 찌르듯이 박혀 들어갔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버틸수가 없었습니다. 선택의 폭풍은 지나가고, 은밀한 정적과 평화가 그의 온몸에 가득하였습니다.

그의 오랜 방황이 종착역을 찾는 순간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회의함으로 존재한다"

 

근대철학의 시발자인 데카르트는, 존재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조명해 주시기는 하지만, 신은 무한하시기에 우리의 한정된 마음을 가지고는 그 전제를 인지할수 없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내용출처 : [직접 서술] 블로그 집필 - whitelawyer의 블로그

 

 

 

 

                          어  거  스  틴
                                                                               집필자 : naidel2  (2005-05-23 21:17)

  성어거스틴의 고백록

마음의 회무화과 나무 밑에서

 

   하나님 인식에 대한 지적 확실성에 도달한 어거스틴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하나님 안에서 그의 마음이 더 견고히 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것들을 쉽게 떠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는 심한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때에,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심플리키아누스를 찾아가게 된다. 어거스틴은 심플리키아누스에게서 빅토리누스의 회심 이야기를 듣는다. 빅토리누스는 뛰어난 플라톤주의철학자였는데, 성서와 심플리키아누스의 권면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여러 사람들을 앞에서 신앙고백을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적 영향을 널리 끼친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은 빅토리누스의 회심이야기를 들은 후, 자신도 그와 같이 전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더욱 소망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의지의 왜곡에서 비롯된 습관의 폭력에 의해,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행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어느 날, 어거스틴은 폰티키아누스라는 사람과 대화를 하게 된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그의 집에서 바울의 서신을 발견하고는 기뻐하며 애굽의 수도사 안토니우스의 회심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또한 수도원과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회심하여 수도사가 된 두 명의 동료에 대해 말했다. 이 이야기는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여전히 습관의 흐름을 쉽게 끊지 못하여,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했다.

  

 어거스틴의 내면의 갈등 상황은 그를 정원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그는 이러한 갈등 상황의 원인을 의지의 왜곡, 의지의 혼돈에서 찾고 있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자신의 이해가 마니교도가 믿는 선과 악의 두 가지 본성 이해와는 전혀 다른 것임을 밝힌다. 즉 어거스틴은 사람이 무엇을 할려고 숙고할 때 하나의 영혼이 서로 상반되는 여러 의지 사이에서 헷갈리며, 이 헷갈림에 의해 내면의 갈등이 비롯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어거스틴은 습관의 폭력에 얽매여 영혼의 병으로 앓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진리를 좇아 하나님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그의 육욕과 세상의 쾌락의 유혹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그는 내딛기 두려워했던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순결한 절제, 하나님의 선행적인 부르심을 듣고 유혹의 소리가 매우 작아졌음을 느낀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작은 소리는 어거스틴을 붙들었고, 따라서 그는 유혹의 소리와 절제의 부름 사이에서 처절히 논쟁하며 이상한 흥분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그 때, 그는 무화과나무 밑에 쓰러져 울며, 자신의 죄에 대해 통회한다. 그러던 중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는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성서를 펼쳐 첫눈에 들어온 롬13:13~14 을 읽고는 마음의 회심을 체험한다. 이 체험을 어머니 모니카에게 이야기하고, 모니카가 기도에 응답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어거스틴의 고백에는, 습관의 폭력에 대한 무서움이 담겨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길로 가야하는 것이 옳은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아는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그 이유는 바로 의지의 왜곡에서 비롯되어, 필연이 된 습관의 폭력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쇠사슬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죄의 속성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이 쇠사슬을 끊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거스틴은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고 있다. 즉 우리를 조명하는 빛이신 하나님을 향할 때, 그러한 것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어거스틴은, 습관의 폭력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유일회적인 것으로 보는 것인가, 아니면 끊임없이 하나님의 조명을 받아 매 순간 습관의 폭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보는 것인가? 더불어, 어거스틴의 구원이해 또한 유일회적 사건인가, 매 순간 끊임없이 일어나야하는 사건인가?

 

 

성어거스틴의 참회

어거스틴의 세례와 모니카의 죽음

 

  8권에서 회심을 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종으로, 이전의 허망한 것들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을 쫓으며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한다. 그리고 혀를 사용하여 거짓말을 일삼았던 교수직을 그만두고 싶어 한다. 그 때 마침, 어거스틴은 폐가 약해져 호흡을 하기가 힘들게 되는데, 어거스틴은 학교를 그만 둘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생겼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방학이 될 때까지 인내하기로 결심한다.

 

   곧이어, 어거스틴 일행에게 별장을 빌려 준 베레쿤두스의 회심과 죽음, 네브리디우스의 회심을 언급한다. 어거스틴은 그것을 대단히 기쁘게 여기며, 베레쿤두스의 죽음에 깊은 애도와 기도를 올린다. 드디어 방학이 되자 어거스틴과 일행은 카씨키아쿰에 있는 베레쿤두스의 별장으로 간다. 거기서 친구들과 학문적인 대화를 나누고, 하나님께 향한 자신의 독백을 정리하여 책을 쓴 것과, 그 곳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정신세계와 마음을 다듬으셨던 것, 그리고 알리피우스를 회심시키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다. 그러면서 참 행복은 불변하시는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자기가 치통을 겪었다가 중보기도를 통해 치유받은 경험을 이야기 하면서, 영과 육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 

 

   어거스틴은 방학이 끝나자 수사학 교수직을 그만둔다. 그리고 세례를 받기 위해 다시 밀라노로 온다. 어거스틴은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알리피우스와 함께 세례를 받고, 과거의 그릇된 생활에 대한 불안이 전부 사라졌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밀라노에서 찬송이 불려지기 시작한 유래-유스티나에 의한 암브로시우스의 박해를 막기 위해 교인들이 모여 철야를 하던 중, 동방교회를 본받아 교인들이 찬송을 부름-를 이야기한다. 또한, 암브로시우스의 꿈에 의해 게르바시우스와 프로타시우스의 유골을 발견하여, 사람들이 병고침을 받고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하면서 암브로시우스에 대한 박해가 멈춘 일을 회고한다. 

 

   이제는,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에 대한 회상이 계속 이어진다. 모니카는 어린 시절, 술을 조금씩 맛보다가 나중에는 술을 좋아하는 습관을 지니게 되었는데, 하녀의 질타를 통해 그 습관을 단절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니카는 남편에게 순종하면서도 지혜있게 행동하여 화목한 부부로 남았음을 말한다. 어거스틴과 그 일행이 모니카와 함께 아프리카로 돌아가던 중, 오스티아에서 어거스틴은 모니카와 함께 신비체험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지혜와 접촉한 것은 비록 매우 짧은 순간이었지만,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것으로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이후, 모니카는 열병으로 눕게 된다. 그녀는 원래 고향에 묻히기를 원했던 사람이었지만, 믿음이 성장하여 임종에 이르렀을 때는 어디에 묻히던 상관이 없고, 다만 자식들에게 자신을 주님의 제단에서 기억해주기를 요청한다. 이 말을 남기고 모니카는 세상을 뜬다. 어거스틴은 겉으로는 태연했으나 ,그 마음에는 이중적인 슬픔으로 괴로워했으며, 결국 홀로 울었던 일을 회상한다. 이어서, 하나님께 어머니와 아버지를 긍휼히 여겨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면서 9권을 마친다.

 

   어거스틴은 9권을 쓰는 내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고백한다. 즉 자신이 회심하게 된 것과 세례를 받게 된 것, 어머니와 함께 했던 신비체험, 어머니의 죽기까지의 과정 등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계획하심에 따른 것임을 고백한다. 어거스틴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나의 삶에도 은밀히 개입하시어 내 삶을 이끄시는 주님의 은혜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9권을 읽는 동안, 어거스틴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과연 그 기쁨이란 어떤 것일까...? 내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인지 아직 그렇게 깊은 체험은 하지 못했다. 여전히 돈과 명예와 욕망을 채우는 일들이 더 흥미롭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될 그 날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은 막막하지만, 주님께서 내 마음에 주신 인내를 가지고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진리를 추구하면서, 나를 온전히 변화시키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것이다. 그 때, 주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기쁨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내용출처 : [직접 서술] 블로그 집필 - 즐거웁자*^^*

 

 

 

 

                   어거스틴 (알제리아) | 성공인물.성경인물
http://blog.naver.com/hdchae91/140004926050

                                                                                  글쓴이 : 이장희

◆ 어거스틴 (알제리아)
◆ 354~430년(76세)


   어거스틴 하면 기독교인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알려져 있다. 교회 역사속에 그만큼 이름을 떨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그를 성인으로 부르고 있다.

   어거스틴이 태어난 것은 기원 354년 11월 13일, 당시 콘스탄틴의 영유지였던 북 아프리카 알제리아(Algeria)의 누미디아(Numidia) 지방의 타가스테(Tagaste)였다. . 그의 어머니는 어거스틴이 태어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부터 하였다.

어거스틴은 그의 아버지 파트리키우스와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세 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렇지만 어머니 모니카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밑에서 아주 엄격한 신앙생활을 받고 자랐다.

어거스틴은 15살에 마다우라에 있는 상급학교에 입학해 착실하게 공부하였다.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져, 1년 남짓 공부하고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마다우라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서부터 어거스틴은 교회생활도 하지 않게 되었고, 이때부터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가 살고있는 타가스테는, 젊은이들이 타락하기 쉽도록 되어있었다. 절망에 사로잡힌 어거스틴은 온갖 더러운 짓을 하고 다니는 나쁜 친구들과 한패거리가 되어, 그들에게 뒤질새라 앞장서서 온갖 못된 짓을 하였고, 그의 부모님도 도저히 어찌하지를 못하였다.

그의 아버지의 옛 친구인 로마니우스가 찾아와 어거스틴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학비를 대주기로 하였다.

어거스틴은 로마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카르타고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머리가 뛰어나 첫해의 연말 시험에서 1등할 정도였다.

   17살이 되었을 때 그는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게 되자, 결혼도 하지 않고 같이 살게 되었고, 다음해에 아들을 낳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아이는 어려서 죽고 말았다.

그 즈음에 아버지는 어머니의 기도로 죽음 직전에 회개하고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바로 그 무렵 어거스틴은 마니교도를 만나 마니교(마니라는 사람이 가르치기 시작한 종교인데,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조로아스터교를 바탕으로 불교와 기독교와 유대교 등의 가르침을 혼합한 종교)에 빠지게 되었다.

   기원 383년, 그의 나이 29살 때 마니교의 주장들은 분명한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니교를 떠나게 되었다. 그해 어거스틴은 어머니 몰래 로마로 가서 수사학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심한 병에 들게 되었다.

   또한 그는 로마 시장의 추천으로 밀라노에 갈 수 있도록 추천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주고 암부로시우스를 만나 복음을 받게 되었고, 마음이 움직여지기 시작하였다.

그후로 그는 지난 날의 잘못들을 하나님께 회개하게 되었고,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나게 되었다(386년32세 때 밀라노에서 회심).

   수십년 동안의 어머니의 눈물과 기도는, 기어코 그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어거스틴 하면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이름부터 떠올리게 된다.

   밀라노에서 같이 살게 되었던 어머니는, 열병으로 5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많은 책들을 쓰게 되었고, 41살 때에는 힙포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감독으로 있으면서 ‘참회록’, ‘하나님의 도성’등의 책을 쓰게 되었는데, 두권의 책은 후세에 길이 남게 될 불멸의 고전이 되고 있다.

   그의 신앙은 지금까지도 많은 신앙인들이 바른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 있을 정도로, 성경 말씀 그대로 사는 일에 온 몸을 바쳤다.

   어거스틴은 다윗의 참회 시를 가냘픈 소리로 몇 번 외우더니, 이윽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기원 430년 8월 28일 밤, 그는 76살로 세상을 떠나 아름다운 천국으로 갔다.


 

 

 

                                 어  거  스  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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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거스틴은 바울 이후 신학을 가장 잘 집대성한 신앙인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신앙적 이론에 대해 수세기 동안 비판이 있었지만, 그의 사상을 훼손시키거나 변경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대에도 그의 이론은 도전을 받고 있지만, 그 도전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로마전성기의 말기에 태어났습니다. 당시 로마는 전성기를 맞아, 지중해의 무역 중심국으로 대제국을 건설하고, 번영과 평화를 누리고 문화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죽을 무렵에는 대제국의 면모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무너졌습니다. 그 시대 분위기는 로마인들조차 로마와 로마 지도자들의 위대함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책임을 회피하고, 가치있는 일을 시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는. 닥쳐올 위험을 막연히 인식하면서 불안해하고, 내적인 세계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로마에 거세게 반항하다가 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후, 로마의 식량 공급지로 전락한 북아프리카에서 A. D. 354년에 태어났습니다. 이 곳은 어거스틴이 교육을 받고 복음 사역을 감당한 어거스틴의 일생의 터가 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는 카르타고의 베르베르 종족인데, 종족의 특징은 작은 키, 검은 피부, 넓은 어깨, 좁은 엉덩이의 신체 조건을 가졌고, 성격은 신경질적이고 극성스런 기질을 갖춘 전형적인 전투사들이었습니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세계로 영토를 넓히던 로마를 위협한 한니발의 후손들이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가난했습니다. 그의 성격은 수집어하는 편이었지만 명석하고 다소 괴팍스러웠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빨리 숙달하지만 싫어하는 것은 무관심하는 편으로 편집증적인 면이 강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불성실하고 무뚝뚝하며 순각적으로 화를 내며 폭발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이 깊고 경건했으며 신중하고 모성애가 강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의 30년 기도로 어거스틴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남편도 말년에 개종시켰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고백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육신으로 나를 이 세상에 낳아주셨고, 영적으로는 주님의 영원한 빛 안에 낳아주셨습니다."

   그는 집안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출세의 수단으로 공부를 하려고 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공부를 출세의 길로 여긴 것은 그의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어거스틴은 15세에 고등교육을 받기위해, 고향 타가스테를 떠나 도시인 마다우라로 진학했습니다. 당시 마다우라는 거리마다 이방신들의 상과 신전이 즐비했습니다. A.D. 313년에 ‘콘스탄틴 협약’을 통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승인되었지만, 이방신전과 상들이 교회당 옆에 건재했고, 사람들은 임의로 신과 종교와 철학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이 도시에서 어거스틴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며 언변만 늘었습니다. 마다우라의 교육은 ‘문학과 웅변술’을 강조했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수사학과 언변에 능통하게 되었습니다. 언변의 재료는 이방신들의 신화와 전설이고, 여기에서 유추한 내용이 합리적인 설득방식으로 받아 들여지던 시대였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교육을 통해 신앙이 희미해져갔습니다. 결국 교회 생활을 하지 않고, 세상 출세와 여자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칭찬받으며 순진하게 신앙생활하던 그는, 화려하고 다양한 것들을 맛 볼 수 있는 도시생활에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도시생활을 1년한 후, 경제적 뒷받침이 없어 공부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목표를 상실하였고 그를 지도할 사람은 주위에 없었습니다. 이 기간에 행실이 좋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악행을 일삼았습니다. 더나아가 자신의 악행을 자랑하며 즐겼습니다. 후에 그는 고등 교육도, 자신 속에 내재된 죄를 통제하지 못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다행히 로마니아누스라는 부유하고 관대한 사람이 그의 후원자가 되어 카르타고의 교육을 받도록 비용을 대주었습니다. 카르타고는 국제적인 대항구도시였는데, 온갖 불법과 성적 쾌락을 추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17살이면 결혼을 해서 안주할 나이였지만, 세상 출세을 추구하는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출세에 대한 야심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수사학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우월감을 가질 정도로 세상에서 성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내적 갈등 속에서 그는 열정을 쏟을 대상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기간에 진리와 지혜를 열심히 찾고, 이것들을 위해서 야심를 버리겠다고 결심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로마의 위대한 철학자, 정치가, 웅변가인 키케로의 사상에 심취되었고 ‘지혜를 연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으로’ 보게되었습니다. 19살이 되던 때에 그의 부친이 죽었고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동거하는 여인을 얻게 되었습니다. 둘사이에는 아데오다투스(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카르타고의 3년 학교생활 후 수사학 교사로 귀향을 했습니다. 그는 키케로의 책 ‘호르텐시우스’에 심취되어 그 책을 강연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책에서 제기된 ‘행복으로 가는 탐구’라는 질문 때문에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번역이 잘못된 라틴어 성경과 구약의 전쟁 역사를 읽는 그는, 성경를 더 이상 탐구할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당시 카르타고에는 그리스도를 지혜의 원리로만 믿는 이성과 지성을 중시하는 마니교가 성행했습니다. 어거스틴같은 지식인이 매료당하기에 충분한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마니교는 자기의 죄를 변명할 수 있는 이원론적이고 구원이 지식과 깨달음에서 온다는 영지주위적인 종교였습니다. 그는 10년간 마니교에 심취되어 방황하기도 했지만, 이를 통해서 논쟁에 대한 열의와 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는 순진한 고향 사람들에게 마니교를 가르쳐 신앙에 혼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귀향을 했지만, 동거하는 여인과 아들 그리고 마니교를 가지고 갔으므로, 어머니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모니카는 엎드려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기도를 해서, 기도하는 곳마다 눈물로 적실 정도였습니다. 그 지방의 교회 감독은 마니교도로 자라다 개종한 사람이라, 모니카는 그에게 아들을 만나 줄 것을 거듭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만 기도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래도 불안한 모니카는 끈질기게 간절히 감독에게 애원하였습니다. 감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습니다. “안심하고 가세요. 이렇게 눈물로 비는 아들을 잃어 버릴리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우정을 잘 지켰습니다. 이 재능은 힙포의 감독으로 새인생을 살 때 공동체의 생활과 사귐을 통해서 복음 역사에 쓰임받았습니다. 그는 귀향 후 동갑내기의 절친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관심사가 동일한 둘은 매우 친밀하게 되었고, 어거스틴은 친구에게 마니교의 이론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친구가 갑자기 열병에 걸려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고 살아났습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농담으로 생각했으나, 친구의 신앙적인 단호한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며칠 후 이 친구는 열병이 도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친구를 아끼는 어거스틴에게 오랫동안 큰 슬픔이 되었습니다. 친구에 대한 슬픔을 잊기위해 그는 고향을 떠나 카르타고로 옯겼습니다. 그는 수사학 교사로서 상당한 사회적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카르타고에서 성공하고 새로운 생활을 접하면서 어거스틴은 영혼의 갈증을 잊었습니다. 그는 학문적으로, 정치적으로 고위층 사람들과 사귐을 갖기 위해, 그들과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어거스틴은 수학과 천체의 징조에 관한 서적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들은 마니교의 중요한 소재였기도 하지만, 당시 과학적 지식과 마니교의 주장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많은 고민 끝에 마니교의 교주를 만나 궁금을 풀고자 했으나, 핵심을 벗어난 화려한 미사여구식 답변에 실망하였습니다. 그는 이제 단순한 철학적 진리와 고상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과학적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니교의 모순을 과학적 사실로 증명할 수 있게 되자, 어거스틴은 마니교를 공공연히 비난하고 배격하다가, 29세에 마니교를 떠났습니다.

   어거스틴은 절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고향을 떠났고, 10년간 의지한 종교를 버림으로, 방황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친구와 고위직 사람들에게 들은 말에 끌려 로마에 대한 동경심을 품었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로마로 떠났습니다. 로마는 학문과 문화의 발상지인 동시에, 범죄와 폭력의 발상지이기도 하였습니다. 학생들은 예의가 바르고 온순했지만,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사고방식으로 인간성이 삭막했습니다. 평생지기가 된 알리피우스를 만난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로마의 검투사 시합같은 퇴폐적 쾌락 문화에 빠져들어가는 그를 보고, 고상한 이상과 확고한 의지를 가진 자라도 죄악된 본성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로마와 마니교에 혐오감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황제와 황사부 암브로스가 있는 밀라노의 수사학 교사로 승진하게 되었습니다. 마니교도들이 로마의 황제가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도록 보낸 전령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모든 신앙을 잃고 진리를 찾는 것에 절망을 느꼈습니다.

   모니카는 남편의 유산을 정리하고 밀라노로 이사하여 어거스틴 곁에 왔습니다. 당시 어거스틴은 마니교를 버린 상태로 아직 진리를 붙잡지는 못했지만 마니교의 허위에서 벗어난 상태였습니다. 황제와 귀족을 상대하는 자로, 사회적 지위가 높아진 그는 법적 아내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15년간 동거하던 여인을 떠나보냈습니다. 그러나 결혼할 신부는 법적 결혼 연령에 못미쳤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2년간 동거할 새로운 여자를 맞이 했습니다. 밀라노에서 알리피우스와 네브리디우스는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알기위해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모니카를 중심으로 카르타고인들이 모여, 자기 것이 없는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스를 만났는데, 그는 어거스틴의 아버지같이 그의 인격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어거스틴보다 14살이 위였고, 어거스틴 복음 사역의 본이 되었습니다. 암브로스는 훌륭한 선생이며 설교가였습니다. 또한 저술가이고 행정가이며 정치가로서 황제의 어머니에게 대항하여 기독교를 철저하게 수호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성령을 통한 성경 해석으로 율법과 선지서를 일관성있게 풀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과거 모순처럼 보이던 것들이 가장 이성적 진리였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설교에 빠져들었습니다. 마니교의 모순에 실망한 그는 성경의 진리에 들어가지 시작했습니다. 경건한 삶과 헌신으로 이루어진 일상 생활도 어거스틴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암브로스는 생활과 설교을 통해 금욕과 자제를 권면했는데, 이것은 어거스틴의 정욕적 생활에 양심의 가책을 주었습니다. 이즈음 어거스틴은 마음에도 없이 황제와 귀족들을 칭송하며 시를 읆조리는 삶에 혐오감을 느껴습니다. 그는 암브로스를 통해서, 사람의 구원의 길은 성경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암브로스는 플라톤의 철학으로, 어거스틴이 이원론적 사고 방식을 벗고 일원론적 세계관을 가지도록 가르쳤습니다. 어거스틴은 내면의 죄욕구를 이길 수 없는 자신을 보면서, 철학과 교육으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일한 고민을 한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서 5장과 7장은 그에게 영적인 깨달음을 주었지만, 그는 여전히 정욕의 쾌락을 포기하기 싫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게 순결을 주소서. 절제를 주소서. 그러나 아직은 마옵소서.” 갈등 속에서 그는 암브로스의 영적 아버지인 심플리키아누스와 상담했습니다. 심플리키아누스는 최고 의결기관인 로마 원로원의 수좌인 빅토리누스를 회심시킨 간증을 들려주어 어거스틴을 감동시켰습니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서 어거스틴은 시간이 날 때마다 교회에 들렀습니다. 그러다가 폰티키아누스라는 사람으로부터 성 안토니의 성결한 삶을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 간증을 듣고 회개를 미루는 자신를 발견하고 ,죄를 결단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때 어린 아이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집어 읽으라. 집어 읽으라.” 그는 이 소리를 성경을 펴고 읽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여겨져서 가지고 다니던 바울의 서신서를 폈습니다. 로마서 13장 13, 14절이었습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믈 도모하지 말라.”

 

   그는 이 성경 말씀으로 쾌락을 즐기던 죄악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33세에, 모니카의 기도대로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내적 여행은 철학과 종교와 과학을 거쳐, 기독교에서 마쳤습니다.

회심한 어거스틴은, 돈을 벌고 출세하려는 야심을 버리고 ,밀라노의 수사학 교사라는 직분이 신앙과 상충된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를 포기했습니다. 그는 시골로 내려가 요양을 하면서, 여자문제를 깨끗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는 휴양지에서 친구들과 공동체를 이루면서, 사색하고 글을 쓰면서 신앙 생활의 깊이를 더 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발전함으로써 글을 쓰고, 글을 씀으로써 발전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 기간에 “아카데미학파의 사람들에 대하여”, “행복에 관하여”, “질서에 관하여”란 3권의 책을 집필했습니다. 이 책은 공동체에 있었던 토론을 기초로 정리한 것입니다. 그는 신앙의 공동체가 지식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진리의 삶을 살려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진리는 혼자 사색하는 것보다는 ,토론과 교회의 교제를 통해서 더 잘 깨달을 수 있다는 것과, 토론과 모임 후에는 되새기며 생각할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과 여유를 반드시 가질 것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독백”이라는 책을 통해서 하나님안에 있는 생명과 삶을 깨닫고 은혜의 세계에 들어갔습니다.

   어거스틴은 휴양을 끝내고, 영적 아버지인 암브로스에게 돌아갔습니다. 암브로스는 세례를 주기 전에, 초대 교회의 사도들의 신앙을 그에게 가르쳤습니다. 많은 성도들의 축복 속에서, 그는 아들과 친구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 어거스틴은 매일 교회에 나가 암브로스의 말씀 강해를 들으며 은혜에 깊어 졌습니다.

   어거스틴은 친구들과 가족과 상의 끝에 고향으로 돌아가 신앙 공동체를 세우자는 합의를 하였습니다. 귀향 중에 모니카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아들아, 이제 네가 세상이 줄 수 있는 행복을 쳐다보지도 않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보았으니,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셨고, 그 외에 많은 것을 더 들어 주셨다.”

 

   어거스틴은 이제 어머니도 없고 ,세상의 지위도 없고, 아내도 없는 상태로 고향에 도착했습니다. 어거스틴을 중심한 공동체는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공동체로 성장해서 훌륭한 신앙인들을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절친한 친구 네브리디우스와 아들 아데오다투스가 다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와 공동체를 창설했던 친구들은 한 교부을 섬기는 감독이 되어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갑작스런 죽음을 계속 지켜보면서, 미래를 미리 준비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공동체 생활을 조직화하며 확고한 기초를 다졌습니다. 그리고 성경과 명상과 연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그가 일생동안 추구한 철학과 학문을 두 번째로 옯겼습니다. 그리고 “참종교에 대하여”라는 책으로, 플라톤이 추구했던 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했다는 것을 주장하고, 당시 번성하던 마니교를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신도로 살기를 고집해서, 40세까지는 감독이 없는 도시는 절대 심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구원하고 신앙 공동체를 건설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힙포에 갔다가, 뜻하지 않게 그 곳의 감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침에 평신도였다가, 점심에 성직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힙포는 카르타고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였는데, 마니교에 의해 장악이 되어 기독교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또한 도나투스주의도 기독교를 위협하는 큰 위험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성직자가 되자 힙포에 수도원을 세우고 임박한 영적 전투를 위해 성경 연구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힙포의 감독은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지도력과 전도에 열심을 부리지는 않았습니다. 이단에 대한 그의 대체는 소극적인 행정적 조치에 불과했고 이단 종교들은 계속해서 세를 확장해갔습니다. 논쟁에 익숙한 마니교도들은 힙포의 감독과 어거스틴을 공개 토론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토론회에서 승리하여 마니교를 추방했습니다. 또 다른 이단인 도나투스주의자들에게도 공개 토론회를 제의했지만 ,그들이 피하자 어거스틴은 그들의 전도방식인 유행가를 이용하여 그들을 몰아냈습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의 개혁을 위해서 아프리카 교구의 총회에서 ‘바른 신앙과 바른 삶’에 관해 발표하여 교회 지도자들의 중심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어거스틴 수도원”을 세워 북아프리카 교회의 10명이나 되는 감독을 양성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북아프리카의 기독교는 강성해졌고 이단들을 몰아내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41세에 힙포의 감독이 되어 34년을 봉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맡겨 주신 양무리에게 유익을 주려는 자세로 봉사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여행을 아주 싫어 하였는데도 교회 모임과 심방에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감독들은 국가 고위 관리와 면담하고 지방 유지들과 모임에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사소한 행정보다는 성경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신앙적인 권면을 하였습니다. 그는 점차 신앙인들과 그 사회에 영향력을 끼쳐갔습니다.

   어거스틴은 공동체 생활에서 힘을 얻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공동체 생활은 그에게 활력을 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10년의 공동체 생활 끝에 “어거스틴의 규칙”이라는 책을 집필하여 신앙공동체 생활의 원리를 정리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설교에 전념하는 것과 저술에는 양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단과의 싸움에서 논쟁을 주로 사용하였고, 논쟁에 일생을 바쳤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논쟁을 이용한 것은 로마 시대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의 문화가 논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문화를 이해했고 문화를 통해서 복음을 수호하고 전파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책은 신앙 생활과 복음 수호하기 위해서 발생한 실질적인 도전과 의문에 대한 진지한 답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순수 복음을 수호할 뿐 아니라 ,반대자들을 설득하고 개종시키기 위해 열정으로 쓴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목소리가 작았지만, 수사학 교사로서 웅변을 배웠기 때문에 훌륭한 설교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든지 할 수만 있다면 설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설교를 단순한 메시지로 그치지 않고 훈련된 제자가 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가르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며, 설득하는 것은 승리하는 것이다.”

 

   양들이 말씀에 순종하도록 돕는 것이 그리스도가 승리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성도들이 말씀과 영적 세계를 쉽게 이해하도록 그들이 알고 있고 경험한 것을 예로 설교하려고 노력했으며, 사람들의 소망과 마음에 말씀을 심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와 도나투스주의자들을 물리치고, 로마는 그들을 유혈진압하여 비참한 종말을 맞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결말에 회의를 느끼고, 논쟁보다는 저술에 관심을 가졋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친구의 아들 율리안이 반대편에 서서 그를 반박할 때 ,교회를 위해서 끝까지 싸워 논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속에서 자신의 허물과 사역에 지쳤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더욱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 “본성과 은혜”, “은혜와 자유 의지”을 통해 하나님의 설비와 경륜을 통한 전적인 은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거스틴은 나이가 많아 허약해지고 후계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기간에 자신이 출간한 책들을 개정하며 서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심려하지 않도록 기도하는 가운데, 75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거스틴은 본래 약한 사람이었으나, 은혜로 강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야심과 정욕으로 얼룩져서 좋지 못한 성품을 가졌으나, 은혜로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은사로 받은 열정적인 성향이나 논쟁을 즐기는 성향은, 회심 후에 오히려 하나님의 복음을 확장하고 수호하는데 쓰여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품과 직업을 통해 얻은 것을 그리스도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나는 어거스틴을 통해서 끊임없이 성장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배웁니다. 그는 세상 출세를 위해서 학문을 시작하였다가 인생의 진리를 알고자 철학에 심취했습니다. 철학적 의문에 대한 답변을 위해 종교로, 종교적 모순을 해결하려고 사실적 과학으로, 과학에서 성경으로 옮기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에는,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자신과 신앙 친구들의 발전을 도왔습니다. 후에는 한 교구의 감독이 되어서 도시의 이단 종교들과 싸웠고, 더 나아가 시대의 이단 종교들과 싸워 기독교를 수호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신앙 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발생한 신앙적 의문과 성경속의 답변을 모아서 책으로 기록하였고, 책을 통해서 시대를 초월하여 신앙의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가 복음 수호를 위해 논쟁을 하다가 친구의 아들과 사람들의 많은 피를 흘리는 큰 실수를 했지만 이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통한 전적인 은혜의 세계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한계와 허물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속에 서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이해에 필요한 몇가지 중요한 문제

 

   1. 어거스틴이 개종하고 세례를 받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은 무엇인가?

  ① 모니카의 영향.

  어거스틴이 33세(387년 밀라노에서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친구 알리피우스와 함께 암브로시우스 감독에게 세례받음)에 세례를 받게 되기까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어머니 모니카였다. 모니카의 경건 생활과 자기 아들을 주 앞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일편단심으로 기울였던 노력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자기 어머니가 이 한 가지 소망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였는지를 말하면서 자기가 믿음의 은혜를 받게 된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음을 인정했다.

 

  ② 키케로의 영향.

  카르타고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던 어거스틴은 마니교의 감독이었던 파우스투스에게서 만족할만한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키케로가 저술한 '호르텐시우스'를 읽기 시작했다. 어거스틴은 이 대화편에서 크게 감동을 받았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가장 값있게 추구해야 할 것은 오로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 그 책의 주제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진리의 추구에 온 심혈을 다 기울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철학에서는 만족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점차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를 의심하는 회의주의에 빠져들게 되었다.

 

  ③ 신플라톤 철학의 영향.

  이 때 어거스틴은 플라톤의 번역서와 신플라톤주의자들의 글을 읽고 상당한 만족과 깨우침을 받았다. 플라톤 사상의 핵심이 되는 관념론은 어거스틴에게 영혼의 빛 가운데서 실체를 고찰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플라톤은 어거스틴의 사상을 유물론에서 관념론으로 바꾸게 했다. 어거스틴은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윤리론을 택하여 기독교화 시켰다.

 

  ④ 암브로시우스의 영향.

  어거스틴은 밀라노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플라톤을 연구했다. 그는 밀라노에서 설득력(은유적 성서 해석)이 뛰어난 암브로시우스 감독을 만났다. 처음에는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나 연설의 문체를 공부하고 듣는 것만을 위해 예배에 참석했었으나, 마침내는 진지하게 기독교를 연구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아카데미파의 비판적 시각을 통해 마니교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기독교회의 예비신자가 된다.

 

  ⑤ 바울 서신의 영향.

  바울 서신은 그의 기독교에 대한 평가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정원에서 울타리 밖의 어떤 어린 아이가 '취하여(들고) 읽으라"(Tolle lege, Tolle lege)고 한 노래 소리를 듣고 급히 쫓아가서 성경책을 펼쳐 들었다. 그것은 육체를 좇는 생활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하는 바울 서신의 말씀(롬13:13,14)이었다. 어거스틴은 그 말씀을 읽는 순간 무화과 나무 밑에서 회심하고 새 존재가 된 것이다.

 

2. 고백록을 저술한 목적이 무엇인가?

  고백록은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긴 감사의 기도이다. 어거스틴은 사람의 힘으로는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을 수가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백록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로우신 사랑을 그리고 있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범한 원죄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보내주신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은 은혜가 없으면 아무도 영원한 저주에서부터의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어거스틴은 제 1권부터 제 10권까지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사 구원을 받게 하셨던 크신 축복을 말하기 위해서 자신의 죄악되었던 지난 날의 생활을 겸손하게 밝혔다. 어거스틴이 바라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던 모습을 읽은 독자들이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마지막 부분에서 자기가 세례를 받고난 이후의 자신의 영혼 상태에 관하여 말한다. 이것은 많은 유혹 가운데서 꾸준히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또 하나님과의 연합은 깊은 묵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3. 신비주의에 대한 어거스틴의 견해.

  어거스틴은 영혼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는 것이 영혼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 은혜와 협력하여서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과 더불어 연합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의 깨우침을 받는다. 인간은 여러 단계의 수준을 거쳐서 완전에 도달한다. 신비적인 은혜를 추가적으로 받은 사람은 깊은 묵상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과 보다 더 가까워진다. 이 밀접한 연합은 자기를 부인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합한 삶을 살아가는 복된 사람들의 상태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과 같은 환상적인 연합의 형태를 가지기도 한다.

 

4. 어거스틴은 '환상'이란 말로 무엇을 나타내려 했는가?

  절대적인 진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된다. 왜냐하면 모든 진리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성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진리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하나님과 성경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인간이 자기 영혼 속에 임재하고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하려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 안에 있는 바 실체와 진리들을 조명하여 주는 하나님의 은혜는 세례를 받을 때 임한다. 하나님은 특별하신 방법으로 인간의 영혼 속에 임재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 속에 진리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

 

5. 어거스틴의 시간관.

  어거스틴의 시간관은 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시간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주를 만드신 순간 함께 창조하신 것이다. 시간 속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기간을 측정하는 틀이 되는 제한된,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사물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 속에는 시간이 없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영원한 순간으로 존재한다. 하나님에게는 시작이나 끝이 없다. 영원한 현재만 있을 뿐...

 

6. 플라톤이 어거스틴에게 끼친 중요한 사상적 영향.

  ① 이데아론.

  플라톤이 어거스틴의 사상에 끼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이데아론이다. 어거스틴이 플라톤의 글을 읽기 전까지는 유물론자이었다. 그래서 그는 순수한 영적인 존재의 실재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거스틴은 뜨겁게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플라톤의 영원한 이데아 개념과 절대 진리의 개념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② 정의론.

  플라톤이 주장한 이상적인 유토피아는 정의로운 국가를 기초로 하고 있다. 플라톤은 인간이 자기 혼자만으로서는 정의로와질 수 없다고 믿었다. 그에게는 정의로운 국가에 산다는 것이 중요했다. 어거스틴은 플라톤으로부터 정의에 대한 도덕적인 개념을 받아들여서 정의란 하나님과 이웃과의 정당한 관계라는 용어로 재해석했다. 그러나 그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살지 않는 사람은 정의로와질 수 없다고 보았다. 정의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인간이 정의로운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은혜를 받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사회 즉 종교적인 사회는 정의로운 국가 안에서만 가능하다. 정의로운 국가를 떠나서는 정의와 공의를 실천할 수가 없다.

 

  ③ 교육론.

  플라톤은 인간이 진리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의 훈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교육은 도덕적 훈련을 그 내용으로 하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 영원하신 하나님과 더 가깝게 연합하도록 해야 한다. 진리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모든 실체들이 형상이 되는 영원한 이데아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서만이 찾아낼 수 있다. 어거스틴의 사상도 전적으로 이 견해와 일치하고 있다.

 

  ④ 예술론.

  시나 희곡은 현실 세계를 무시하고 허구의 세계를 그린다는 것 때문에 플라톤은 그것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게다가 많은 영웅들의 이야기는 어린이들의 성격 형성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여겨졌다. 어거스틴도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종교적인 활동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은 무엇이 되었든지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7. 어거스틴의 정치론.

  어거스틴은 합법적인 국가는 반드시 종교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상이다. 그는 국가의 종교는 반디시 참 종교 즉 기독교이어야 한다고 했다. 모든 미덕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생각을 이끌어내지 않는 국가는 덕스럽게 행동할 수가 없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 벌을 내리거나 육체적 손해를 입혀야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8. 어거스틴이 논박했던 이단들.

  ① 도나투스파.

  도나투스파는 성례란 반드시 참석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해 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에 의해서 집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초대 교회의 분파이다. 어거스틴은 사제로 재직하던 초기에 신자들이 어려운 교리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대중적인 음률의 노래를 작곡한 일이 있다. 그리고 히포의 감독 시절에는 '파르메니아누스의 편지를 논박함'(Aganist the Letter of Parmenianus)이란 제목을 붙인 3권의 책을 써서 거룩이란 교회를 떠나간 소수의 분파들에 의해서는 거룩이 유지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교회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어거스틴은 모두 7권으로 된 '세례에 관하여'(Concerning Baptism)라는 책을 써서 계속해서 이 이단을 논박했다.

 

  ② 마니교.

  마니교는 끊임없이 싸움을 벌리고 있는 두 개의 원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이단이다. 그 두 원리는 빛과 선의 원리 그리고 어둠과 악의 원리이다. 존재하는 모든 악은 악의 원리에서부터 나온다. 어거스틴은 이 사상을 논박하기 위하여 많은 책을 썼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자유의지론'(Concerning Free Will)과 '두 영에 관하여'(Concerning Two Spirits)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의 본질론'(Concerning the Nature of Good)이 가장 뛰어난 책이다.

 

  ③ 펠라기우스파.

  펠라기우스파는 어거스틴에게 가장 큰 골치거리었다. 그들은 원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의 덕스러운 삶만 가지고서도 영원한 상급을 얻는 공로를 쌓을 수 있다고 했다. 이 이단은 은혜와 구속에 대한 기독교 견해에 정곡을 찔러 공격을 했다. 어거스틴은 성공적으로 펠라기우스파를 무찔렀다. 그가 펠라기우스파를 논박하기 위하여 저술한 책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6권으로 된 '율리안을 반박함'(Aganist Julian)이 있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하여'(Concerning the Grace of Christ)나 '원죄에 관하여'(Concerning Original Sin)와 같은 소논문들이 많이 있다.

 

9. 신국론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신국론(하나님의 도성)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제 1부는 이교사상에 대한 논박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거스틴은 이방 종교 뿐만 아니라 이방 철학에 대해서도 논박했다. 그러나 제 11권부터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기원과 발전 과정 그리고 궁극적인 목적을 다루고 있다.

 

10. 신국론이라는 방대한 책을 저술한 동기.

  ① 로마의 함락에 대한 기독교적 변명.

  알라릭이 고트족을 이끌고 들어와 로마를 함락시키자 많은 이교도들은 로마의 멸망에 대한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전가시켰다.

 

  ② 로마의 재난에 대한 기독교적 변명.

  로마가 함락을 당하기 13년 전부터 이교 사상이 만연되어 모든 신전들이 공공연하게 정부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교도들의 지도자들은 로마에 재난이 임한 것은 로마인들이 옛날에 섬기던 신들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기들이 당한 재난을 책임질 속죄양을 빨리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들의 요구는 이와 같은 구실을 찾아내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기독교인으로서 호민관으로 있던 마르셀리누스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이교도들에 대한 답변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13년에 걸쳐서 22권의 책을 완성했다.

 

11. 교회론.

  어거스틴이 신국론을 쓰던 시대에는 교회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로 갈라져 있었다. 동방 교회는 황제를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보았다. 주요 절기들을 지키는 시기나 방법도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서방 교회는 휠씬 더 황제로부터 자유스러웠다. 암브로시우스는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발칸 반도에서 마음대로 황제권을 행사하게 했다.

  어거스틴은 통일적, 보편적 측면에서 교회를 생각했다. 그가 교회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지 않은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각 지 교회가 자기 교회를 조직할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일부 특별한 교회들에게는 특별한 권위를 인정해주었다. 신학적인 문제를 결정 하는데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 최종 결정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궁극적인 권위는 오직 하나의 특별한 교회에만 있다고 보았다.

 

12. 신령한 사회의 우월성.

  어거스틴은 구성원들에게 행복한 평화를 누리게 해주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했다. 그는 고대 철학자들의 방식대로 사회를 가정, 국가, 지구, 우주의 네 단계로 나누어 고찰한 후에 물질적인 사회속에는 어느 곳에나 슬픔, 죄악, 고통, 잔인함이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진정한 행복과 완전한 평화는 영혼이 불완전한 물질에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신령하고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연합하는 삶을 가질 때만이 가능하다고 한다.

 

13. 삼위일체론.

  신국론에도 삼위일체 사상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만,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만을 위해서 16년 동안(400~16) 16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는 제 1권부터 제 7권까지에서 성경과 전통적 사상을 근거로 하여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하나의 본체로 존재하고 계심을 분명하게 밝혀 놓았다. 그리고 제 8권부터 제 15권까지에서는 삼위일체 교리를 풍부하게 해설해 놓았다. 그러나 그는 중세의 신학자들처럼 삼위일체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그는 독자들이 믿음을 가지고 이 교리의 가능성을 인정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14. 현대 철학자들이 어거스틴을 배척하는 이유.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은 어거스틴의 시간과 공간에 관한 견해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시간과 공간에 관한 어거스틴의 주관적인 해석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필적할만하다. 그러나 분석 철학자, 실용주의 철학자, 일부의 실재론자들은 그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적 입장에 반대 의사를 표시한다.

  많은 현대 철학자들은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한다. 지식의 대상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식이란 그 자체가 인간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감각을 초월해 있는 것들에 대한 완벽한 지식은 인간으로서는 가질 수가 없다고 한다. 그들은 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인류학이 윤리학의 상대적인 문제를 보충해준다고 한다.

  어거스틴이 이러한 철학적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여 믿음이 없이는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한 것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믿음이 합리적으로는 세울 수 없는 권위에 대한 믿음이었음을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믿음을 이런 식으로 강조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매우 특별하게 베풀어 주신 은혜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노만 가이슬러 편, 박일민 역.『어거스틴 사상』. 1994. 성광문화사. 참고.

 

 

어거스틴의 신학사상에 대해..

yho5958 (2004-04-02 16:32 작성)이의제기 | 신고하기
질문자 평 
감사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는, 이교도 부친과 크리스챤인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저는 초기에 어거스틴의 생애 라는 책을 통해 동감을 느끼고 신앙 첫걸음에 도움이 됐습니다.

그는 수사학을 배워 법률가가 되려고 했으나 373년 키케로의 Hortensius를 읽고 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9년간 마니교를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니교 지도자 파우스트에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384년 밀라노로 가서 신풀라톤주의에 접함과 동시, 암부로 시우스 주교의 설교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로마서13:13을 보는가운데 회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히포주교로 있었는데 마니교의 악의 문제 해석에 대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모든 피조물의 선함을 변증했고 도나투스파의 논쟁을 통해서 교회론과 성례전 및 섭리론을 정리 했습니다.

펠라기우스논쟁을 통해서는 인간타락과 원죄 및 예정론에 대한 교리를 발전 시켰습니다.

대표적 작품은 400년경 저술된 '고백론'과 예수교 최초의 역사철학사인 '하나님의 도성(신국:신의 도성)으로 이책은 신학생들이 필독하도록 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의 사상은 13세기 아퀴나스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재해석되어 가톨릭신학으로 정착되기 까지 중세의 보편적 신학으로 영향을 주었습니다.

16세기에는 루터,칼빈등 종교개혁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다른점은,
인간 영혼기원에 있어서 유전설을 따랐고,창조설은 토마스아퀴나스와 개신교에서 따르고 있습니다.

종말론에서 천년왕국 견해는 후천년설(천년기 후 재림설)을 따랐습니다.
이는 무천년설과 유사하여 무천년설을 따랐다고도 합니다.
그의 신의도성에서,'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기간동안에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가 교회를 통하여 실현되는것'으로 규정한 이후 계속되온것이 무천년설임.
즉 천년기간을 신약시대로 보는 것임.

 

 

 

 

 

                어거스틴의 신학중 도나투스 논쟁의 핵심은?

step1970 (2005-06-09)

도나투스 논wod

 

 

도나투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은 초기 교회사에서 매우 중대한 사건 중에 하나로 손꼽힌다. 이 논쟁으로 인해 초기 어거스틴의 신학이 좀 더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아래에 자세히 도나투스와 어거스틴 논쟁의 초점을 언급하였다.

 

 도나투스파는 4세기 초, 곧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대박해가 끝날 무렵에 일어났다. 이 파는 일찍이 몬타누스파와 노바티아누스파가 가지고 있던 청교도적 성향을 띠고 있었는데 이들 역시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도나투스파가 직접 생긴 원인은 박해 기간 중에 강압이나 두려움에 의해 성경을 버리거나 부인하는 자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도나투스파는 교회는 이런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범죄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교회는 하나님이 떠난 교회이므로 참 교회로 인정할 수 없으며 이런 범죄를 저지른 지도자들로부터 세례를 받거나 가르침을 받는 것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르타고의 대부분의 감독들은 관용 정책을 써서 박해시에 범죄한 자들을 비호하고 반대로 도나투스파와 같은 강경론자을 탄압했다. 그래서 강경론자들은 새 감독을 세웠는데 316년에는 도나투스가 카르타고의 강경론자들이 세운 새 감독 자리에 올랐다. 이렇게 되어서 카르타고에는 두 사람의 감독이 있게 되었고 북아프리카의 교회는 그후 약 100년간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도나투스파는 급속히 발전하여 로마 제국의 다른 지방에도 전파되었다. 그들은 콘스탄틴 황제에게 자기들을 보호하고 후원해 달라고 호소하였으나 콘스탄틴은 처음에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박해했다. 그러나 박해를 당하자 도나투스파는 더 광신적인 열정으로 세력이 확장되었다. 그러자 콘스탄틴은 태도를 바꾸어 321년에 그들에게 완전한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주는 새 법을 선포했고 카톨릭에 대해서는 인내와 관용으로 그들을 대하라고 권고했다.

 

 도나투스파는 우선 엄격한 교회 규칙의 적용과 교인의 순결 유지에 대해 강조했다. 그러고 세속적인 사람을 교회 지도자로 세우는 것을 절대 반대했다. 교회 일에 대해 세속 권력자가 간섭하는 것을 단호히 배격했다. 그러나 제도는 카톨릭적인 감독 정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그들도 카톨릭의 일반적인 관습을 따라 세례에 의한 중생 곧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인정했고 유아세례도 시행했다.

 

 하지만 정작 어거스틴과 도나투스의 논쟁이 바로 세례와 성례전에 관한 사항이었다. 로마의 박해가 한참이던 시기에 기독교를 버리고 배교한 무리들이 다시 교회에 돌아오는 것에 반대하며, 특히 배교한 성직자가 베푼 세례는 무효라며 다시 세례를 받으려는 도나투스파와 세례는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의 성호로 받는 것이니 베풀어진 세례는 유효함을 논증한 어거스틴(히포의 어거스틴)과의 논쟁을 말한다. 당시 어거스틴과의 논쟁에 의해 도나투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나 이단이라고 하기 보다는 교회의 또 다른 모습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마치 신사참배로 인해 갈려진 기장과 예장의 모습이 연상되어진다.)

내용출처 : myrodem.com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 <시간편>에서 시간의 의미란?

swatch712 (2005-05-28 19:08 작성)이의제기 | 신고하기
질문자 평 

어거스틴의 『고백록』1~9장 까지는 대체로 자신의 타락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찾아가는 과정 즉, 회심의 과정을 심도있게 다룬 반면, 10장 부터는 세계 창조의 섭리와 시간이론에 대해서 다룹니다. 

 

일반적으로 과거와 우리 인간의 시간 개념은 과거, 현재,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 이론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어거스틴에 따르면 시간은 항상 현재만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과거와 미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어거스틴의 시간 이론에 따르면 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현재만 있고 과거는 현재의 의식 속에서 '기억'의 방법으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과거라는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그 순간이 바로 현재라는 것이지요.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 하지 않는 미래는 다만, 현재의 사실과 우리의 의식속에 과거라고 간주되는 그 관념이 현재의 의식 속에서 작용을 하여 우리의 정신 속에서 미래라는 관념이 생기는 것입니다.

 

핵심은 어거스틴에게는 오로지 현재만 있습니다.

 

P.s] 그리고 고백록은 최근에 CLC 출판사에서 나온 텍스트가 가장 정확한 번역을 했다고 평가받습니다.

 

 

 

 

 

 

                                           성 어거스틴 사진 모음집

 

 

 

성 어거스틴의 고향, 다가스데의 한 언덕에 위치한 가장 오래된 올리브 나무. 아마도 성 어거스틴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었을 나무이기도 하다.

      마다우라의 원형 경기장. 여기서 초등 교육을 받았다.

카르타고의 유적지. 여기서 그는 욕망에 넘친 청소년기를 보냈다.

성 암브로시우스가 사역했던 밀라노 대 성당

성 암브로시우스가 성 어거스틴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터 (밀라노, Italy)

성 어거스틴이 회심 후에 아프리카로 돌아가기 이전에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묵으며 신비 체험을 한 곳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비(오스티아, Italy)

아프리카로 가는 배(모자익, 오스티아)

성 어거스틴이 사역했던 히포 교회(Souk-Ahres, 알제리)

히포에 위치한 성 어거스틴 수도원 전경

성 어거스틴의 성묘(파비아, 이탈리아)

그의 유해가 이곳으로 옮겨졌다

성 어거스틴 성묘 하단 부분(Pavia)

성 어거스틴 성묘 전경(Pavia)

성 어거스틴(6세기 경)

이 그림은 현존하는 것 중, 최고 오래된 것이다.

보티첼리의 성 어거스틴

'비너스의 탄생'으로 유명한 보티첼리가 1480년에 그린 '성 어거스틴'

(Ognissanti 성당 벽화, Florence, Italy)

 

 

 

 

... 오스티아) 성 어거스틴이 사역했던 히포 교회(Souk-Ahres, 알제리) 히포에 위치한 성 어거스틴 수도원 전경 성 어거스틴의 성묘(파비아, 이탈리아) 그의 유해가 이곳으로 옮겨졌다 성 어거스틴 성묘 하단 부분(Pavia) 성 어거스틴 성묘 전경(Pavia) 성...

http://www.klmc.de/churchfathers/augustine.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