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 시절부터 동정심이 많고 약자를 연민하는 유약하고 여린 감성을 갖고 있었다. 집에 동냥아치나 승려들이 오면 쌀을 한 바가지씩 퍼줬다가 어머니한테 혼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루는 휠체어에 앉은 창백한 소녀를 봤다. 그때 나중에 커서 휠체어를 탄 여자와 결혼해 기쁨과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어느 봄날에는 쑥 캐는 소녀를 훔쳐본 적이 있다. 그 아이는 형편이 아주 어려웠지만, 착하고 공부도 잘했다. 뒷동산을 넘으면 냇가가 있는데 냇가 건너편에 사는 아이였다. 그 소녀가 너무 좋아서 냇가 맞은편에서 그 소녀가 쑥 캐는 모습을 훔쳐보았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버들강아지를 끊어서 만든 피리로 구슬픈 사랑의 연가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 그 소녀를 위해 무얼 해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시험 볼 때마다 나보다 뒤져 속상해하며 눈물짓던 모습이 문득 생각났다. 그래서 그 소녀를 위해 시험을 일부러 못 본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 같은 순정이 있었다.
나는 그런 여리고 순수한 마음을 문학적 소양으로 발전시켰다. 어릴 때 백일장에 나가 상도 많이 받았다. 지내놓고 보니 어린 시절의 그런 순정이 성도들을 향한 목양 연가를 부르게 했고 문학적 소양은 목회자가 된 후에 시와 글을 통해 성도들뿐 아니라 시대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갖추게 해줬다.
나는 1962년 2월 22일 지리산 자락인 전북 남원 이백면 초촌리 오촌마을에서 태어났다. 남원은 판소리 문화가 오랫동안 서려 있는 곳이다. 덕분에 전통음악의 문화 속에 자라 문화예술적 소양을 갖게 됐다. 어린 시절 끼가 있어 콩쿠르 대회를 하면 한 번도 빠져본 적이 없을 정도로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목회자가 된 후에 우리 민족의 정서와 내면적 가락, 그리고 대중음악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잘 전달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음악적 소통의 설교를 할 수 있게 됐다.
장난꾸러기 기질도 많았다. 오이나 토마토, 수박 서리를 할 때는 앞장을 섰다. 골목에 숨었다가 친구들이 오면 “으악”하며 놀라게 하기도 하고 깊은 밤에 아이들에게 귀신 이야기도 잘했다. 이런 장난스러운 기질이 소탈함과 솔직함, 진정성으로 발전돼 목회자로서 성도들과 솔직하고 친근하게 소통하고 공감하는 목회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런가 하면 여리고 감성적인 면과 정반대로 승부욕이 강했다. 친구들과 동전 따먹기, 땅따먹기, 구슬치기를 해도 절대 지고는 못 살았다. 만약에 지면 해가 넘어갈 때까지 물고 늘어져서라도 꼭 이겨야 직성이 풀렸다. 옛날 시골에는 패싸움 문화가 있었는데, 패싸움을 하면 인정사정없이 그리고 끝까지 싸웠다. 내가 먼저 싸움을 걸지는 않았지만, 누가 싸움을 걸어오거나 내 자리에 도전하면 인정사정없이 패대기를 쳐서라도 내 자리를 지켰다.
그러면서 헤드십을 발휘했다. 마을 어른들이 깊은 저수지에 가서 멱을 감지 말라고 할 때 왜 그리도 멱을 감고 싶었는지, 하루는 애들과 함께 멱을 감으러 갔다가 마을 어른들이 우리 옷을 다 가져가 버린 적이 있었다. 나는 저수지 옆 밭에 있는 토란 잎사귀 하나를 뜯어서 하체를 가리고 마을회관으로 가서 어른들과 담판을 짓고 옷을 찾아다가 아이들에게 입혔다.
이러한 기질이 목회자가 돼서도 내 교회 목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기독교 사상과 맞서 싸우며 한국교회를 지키는 공적 사역을 할 수 있게 했다. 어렸을 때부터 축적해온 맷집이 좋아서 그런지, 그 어떤 오해와 욕을 먹어도 교회 공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에는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가며 행복하게 사역하고 있다.
그렇다고 정치적 욕망을 품거나 교권 야욕을 갖고 사역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 공익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쁘게 사역할 뿐이다. 그 어떠한 공격을 받고 오해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말이다. 이때를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이런 일이 나 혼자 한다고 되는 건 아니다. 성도들이 충분히 공감과 동의를 해 주고 장로님들이 전적으로 지원해 줘야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 지금까지 성도들과 정서적·감성적 소통과 공감을 해왔으며 영적인 감동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일체감을 이뤄왔다.
새에덴교회는 그래서 정서적·문화예술적으로도 소통과 공감을 이루고 영적인 소통과 감동 속에서 온전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온전한 공동체 교회가 한국교회의 공적 사역까지 감당하는 것이다.
▒ 왜 ‘생명나무 목회’인가
사탄 유혹 받고 선악과 따먹은 아담과 하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했다. 신화 중심의 그리스 사회에서 신화적 사상과 사고를 배격하고 신을 배제한 인간 중심의 사고를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이 인문주의나 문예부흥의 근원이라고 할 수도 있다.
훗날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중세까지만 해도 모든 사고가 신 중심, 종교 중심의 사고였는데, 인간 중심의 사고를 주장한 것이다.
더욱이 데카르트는 존재보다 사고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의 사고와 생각을 앞세웠다. 신의 존재까지도 인간의 사고가 가능케 한다고 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를 따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따 먹지 말하고 하셨다. 동산 가운데는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있었다. 성경에서 정확하게 서술하지는 않지만,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를 선택해야 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대로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고 장 칼뱅이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 혹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성만찬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탄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라고 유혹한 것이다. 하나님은 선악과나무를 선택하면 죽는다고 했지만, 사탄은 죽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다. 하나님은 선악과나무의 제한을 통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의존적 삶을 살고 하나님께 제한받는 삶을 살도록 하신 것이다.
그 제한적 삶을 삶으로써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주권 안에 살도록 하셨다. 다시 말해 선악 판단의 최종 권한을 하나님께 두고 살라는 것이다. 선악 판단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 안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 의존적 삶을 더 이상 살지 말라고 속였다. 하나님을 벗어나 스스로 독립된 존재로 살라고 했다. 사탄의 유혹을 받아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그들은 과연 하나님 없이도 생각할 수 있고 선악 판단을 할 수 있게 됐다.
프로타고라스의 말처럼 인간 자신이 만물의 척도가 될 수 있었고 데카르트의 말처럼 하나님 의존적 존재가 아니라 독립적 존재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자체가 하나님과 분리되는 죽음이었다.
오늘날도 하나님 없는 생각, 하나님 없는 판단은 선악과 영역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각과 판단은 독립적으로 돼선 안 된다.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해야 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어야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퀘르는 ‘해석의 갈등’이라는 책에서 이 세상에 온전한 해석은 없다고 주장한다. 어떠한 해석도 다 일리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을 온전하게 해석하고 규정하는 것은 진리라는 것이다. 그가 그의 책에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그 유일한 해석의 열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요 그분의 진리와 말씀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도 교회 분열과 다툼이 있는 곳을 보면 다들 자기 입장의 문제이고 자신의 해석 문제다. 그래서 교회 분쟁은 한마디로 일리와 일리가 충돌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한낱 일리가 동력이 되고 충돌의 원인이 돼서야 하겠는가.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이 동력이 돼야 한다. 그런데 선악과를 선택하는 성도는 일리를 추구하고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성도는 언제나 진리를 추구한다. 그래서 일리가 아닌 진리, 인간의 생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선악과가 아닌 생명나무 중심의 목회에 집중한 것이다.
소강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