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 새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해 건설회사와 계약했다. 성전건축 위원들이 어느 날 부목사에게 이런 요청을 했다. “목사님, 새 성전 건축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꺼?” 그 말을 전해 듣고 이렇게 부탁했다. “아닙니다. 제가 살아야 성전 건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습니다. 저를 위해 먼저 기도해 주세요.”
하나님은 내게 이런 마음을 주셨다. ‘성주가 무너지면 그 성은 함락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담임목사가 무너지면 교회도 무너진다.’ 성전 건축을 위해서는 내가 먼저 살아야 했다. 쉽지 않았지만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에 성도들은 흔쾌히 따라 주었다. 모든 성도가 릴레이 금식 기도에 들어갔고, 원망이나 불평 하나 없이 잠잠한 가운데 건축이 진행됐다.
그런 다음 성전 건축 위원과 공사를 진행하는 업체에 이런 부탁을 했다. “건축 과정에서 모든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담임목사인 제 말을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예배당 건축 과정에서 의견 충돌과 이해관계 때문에 마찰을 빚고 갈등을 겪은 사례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나의 말을 보증해주셨다. 내가 제시하지 않은 방향으로 공사가 진행되면 번번이 일이 어긋나게 하신 것이다. 건축 현장에서 직접 일하는 인부들조차 이를 인정했다. “순복음진주초대교회 공사는 무조건 담임목사님이 하라는 대로 해야 수월하데이. 안 그라믄 꼭 어려운 일이 생긴다 아이가.”
이런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건축 과정 내내 계속됐다. 재정이 준비된 상황에서 시작한 것도 아닌데, 모든 공사비를 하루도 어기지 않고 약속한 날짜에 정확히 지급할 수 있었다. 물론 매일 매일 가슴앓이를 하며 하나님께 눈물로 매달려야만 했다.
그 과정에 너무 과도하게 신경을 쓰다가 한쪽 눈의 혈관이 터졌고, 안압 상승으로 급기야 녹내장 진단까지 받았다. 그 어떤 희생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성전 건축임을 절감하게 됐다. 들리는 말에 성전 건축을 마치면 담임목사들은 장기가 성한 곳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다행히도 한쪽 눈만 터지고 건축을 마쳤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성전 건축을 하면서 어찌 좋은 일만 있겠는가. 건축이 시작되면서 교회로 찾아와 항의하며 방해하는 주민들이 있었다. “보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놈의 레미콘이랑 굴착기 소리 때문에 못 살겄소. 우리 집 갓난애가 이 소리 때문에 경기가 들려서 잠도 못 잔다 아입니꺼.”
당시 교회 바로 옆에는 기찻길이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기차가 오가고 있었다. 기차가 지나가면 그 소리에 집이 들썩일 정도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 성도들은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굴착기 소리에 경기가 들면 여태 지나다니는 기차 소리에는 우째 경기가 안 들었는지 모르겄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레미콘 차량이 드나드는 공사장 입구에 자리를 깔고 드러눕기도 했다. “교회는 절대로 안 된데이. 내 죽기 전에는 절대로 못 들어간데이.” 그렇게 방해를 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목사님, 자기 죽기 전에는 절대로 못 들어간다 하던 그분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두려웠던 순간이었다.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이 명령을 변조하면 그의 집에서 들보를 빼내고 그를 그 위에 매어달게 하고 그의 집은 이로 말미암아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스 6:11)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소문 때문인지 이후로는 망경동 주민 중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았다.
성전 건축을 시작하면서 모든 성도가 다윗같이 복 받기를 소원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전을 건축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만으로도 놀라운 축복을 약속받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양 저금통’이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동전이 생길 때마다 하나씩 넣어서 양 저금통 하나는 드릴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에 성도들에게 간절히 호소했다. 이때부터 집집마다 양 저금통에 동전을 채우는 손길이 바빠졌다.
“목사님, 평소에는 동전이 그리 흔하더만 요새는 서로 자기 저금통에 넣는다꼬 동전 구경이 억수로 어렵습니더.”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주일마다 양 저금통이 줄지어 강단에 올라왔고, 나는 진한 축복 기도를 드렸다. 어느 날, 한 집사님이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목사님, 세상에 제가 새 아파트에 거의 공짜로 들어가게 됐어예!” 오랫동안 셋방살이를 하던 분이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양 저금통을 드린 후 새 아파트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사정은 이랬다. 경남 진주시 인근 사천시에 2000세대 대단지 아파트가 완공되었으나, 건설회사가 두 번 부도를 맞는 바람에 입주자가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누구라도 들어와서 불이라도 켜 달라며 입주자를 모집했고 그 집사님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 집사님을 시작으로 우리 성도들이 그 아파트를 줄줄이 얻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일로 성전건축을 통한 축복을 생생히 증명해 주셨다.
▒ ‘아바드리더시스템’이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기도 말라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 성령 받은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축복 가운데 첫째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얻게 되는 또 다른 유익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 6:6)고 말씀하신다. 또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묻는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어떤 기도를 하라고 하셨는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기도할 때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제자들에게 해야 할 기도가 무엇인지 가르치시며 하지 말아야 할 기도 또한 가르쳐주셨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이방인처럼 중언부언 기도하지 말라고 한다. 중언부언 기도란 무엇인가. 한 말을 또 하고 한 말을 또 하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기도라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성경이 말하는 중언부언 기도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찾고 또 찾았지만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런 내게 하나님께서는 남편 목사님을 통해 깨닫게 하셨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 6:31~32)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하여 구하는 기도가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는 기도라는 것이다. 가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가족 구성원은 늘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염려해야 한다. 하지만 든든한 보호자가 있는 가족 구성원은 이를 염려하지 않는다. 이처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걱정하여 구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이방인들은 이를 염려하고 구하는 것이다.
예전에 예수 믿지 않는 한 친구가 있었다. 친구와 나는 100일 동안 똑같이 자녀를 위해 기도했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친구는 절에서 기도했고 나는 교회에서 기도했다. 친구는 자신이 믿는 신에게,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기도하는 장소가 다르고 부르는 대상이 다를 뿐 이방인인 친구와 예수 믿는 나의 기도 내용은 같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염려하여 이방인과 같이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마 6:7)
한편 이 말씀을 두고 많은 말로 반복해서 구하는 것을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는 기도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말을 많이 하는 기도가 이방인의 기도는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먼저 구약시대 기도의 사람 엘리야를 보자. 이스라엘에 오랜 가뭄이 있었을 때, 엘리야는 무려 850명의 바알, 아세라 선지자와 갈멜산 기도 대결에서 승리했다. 그때 이미 하나님께 비를 내려 주실 것이라는 응답을 받았지만, 그는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기까지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왕상 18장) 이런 엘리야의 기도를 중언부언 기도라 할 수 있겠는가.
또 신약성경 누가복음 11장 5~8절의 떡을 빌리러 간 친구의 비유를 보라.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8절)고 말씀한다. 그 친구는 무엇을 간청하였겠는가. 오직 떡을 달라 요청하지 않았겠는가.
따라서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는 기도란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하는 기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이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성령을 선물로 주셨다.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 이를 아시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여 주신다는 것이다.(롬 8:26~27)
한 시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우리가 아닌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여 내 뜻대로 구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 이런 우리를 성령께서 도와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