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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의 전도, 너무 쉽습니다 <1>-<10>

영국신사77 2019. 7. 7. 20:25

조직을 위한 조직은 필요없다, 모든 자원을 전도에 써라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의 전도, 너무 쉽습니다 <1>

입력 : 2019-05-10 00:07 국민일보



  •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가 1993년 부임했을 때의 예배당.

    지금은 2016년 건축한 예배당에서 매주 3000여명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위부터). 세계로교회 제공


    한국교회 전도동력이 점점 식어가고 있다. 
    교회 본연의 선교 사명보다 교회 안의 ‘잔치’에 치중한 결과다. 
    이런 상황에 20명 모이는 어촌교회에서 
    3000명 이상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한 부산 세계로교회는 신선한 충격을 준다. 
    손현보 세계로교회 목사의 ‘전도, 너무 쉽습니다’ 시리즈를 통해 
    한국교회가 되찾아야 할 전도의 원형을 찾아본다.

    1993년 전도사 시절 바닷가 95㎡(29평) 자그마한 교회에 부임했다. 집사람과 나를 포함해 장년이 24명이었다. 

    1개월 후 남전도회에서 월례회가 있으니 설교를 해달라고 했다. 젊은 집사부터 할아버지까지 7명이 모였다.

    강아지 키우는 게 남전도회 사업

    총무가 남전도회 1년 사업을 보고했다. “예년과 달리 이번엔 큰 꿈을 안고 회비 5000원을 걷어 강아지 한 마리를 샀습니더. 지금 A집사님이 몇 개월 동안 그 개를 잘 키우고 있는데예. 이제는 살이 통통하게 쪄서 우리 계획대로 잘 될 것 같습니더.” 총무 보고 후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집사님, 그 강아지 키워서 뭘 하려고 합니까.” “아휴, 전도사님요. 강아지를 잘 키워야 이번 여름 남전도회 친목 모임에 쓸 거 아임니꺼. 그 개를 잡아먹고 교제하는 게 올해 남전도회 주요 사업입니더.”

    영혼 구원에 무관심한 남전도회원들을 보며 결론을 내렸다. 
    ‘이 교회 남전도회는 개판이구나. 
    이런 사람들이 교회의 주체가 되다니. 
    이대로 놔뒀다가는 교회 망하겠구나. 
    예수께서 피 흘려 세우신 교회에서 
    직분 받은 사람들이 고작 개 한 마리 사서 잡아먹는 게 1년 사업이라니.’

    이번엔 여전도회로 갔다. 
    회계집사가 하소연했다. 
    “여전도회에서 김 한 상자를 사서 회원들에게 나눠줬는데 
    아직도 원금이 안 걷히고 있습니더. 제발 돈 좀 내이소.” 
    한 집사님이 탁자를 치며 화를 버럭 냈다. 
    “아니, 팔리지 않는 것을 우짜라꼬. 도로 가져 가이소.”

    언쟁이 가라앉자 이번엔 젓갈 사업으로 넘어갔다. 
    여전히 팔리지 않아 어렵다는 얘기였다. 
    한 회원이 따졌다. 
    “생각 좀 해 보이소. 여기가 바닷간데 그게 팔립니꺼.”

    참으로 답답했다. 
    “교회에서 뭣 때문에 이런 장사를 하고 큰 소리 나게 싸우시는 겁니까. 
    꼭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휴, 전도사님이 뭘 모르셔서 그러시는데, 
    이렇게라도 해야 교회가 숟가락이라도 하나 사고 밥그릇이라도 하나 삽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누가 교회 살림을 마련합니까. 
    이렇게 해야 전도사님 생신 때 뭐라도 해드릴 수 있습니더.”

    얼마 후 내 생일이 됐다. 
    교회 집사님들이 생일상을 차렸는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아니 언제 제가 생일 밥상 차려달라고 했습니까. 
    아니 이런 것 하려고 김 팔고 젓갈 팔고 교회 안에서 싸우셨습니까.“ 
    상을 엎어버리겠다고 달려들자 모든 사람이 들고일어나 말렸다. 
    참 서글펐다. 왜 신앙생활을 하는지 모르는 이들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 하면 복음전파에 도움 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에는 
    확실하고 강한 능력이 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때문에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지만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면 
    그 말씀을 따라서 성령님이 들어가시고, 
    성령님이 그 마음을 바꾸면 
    그 영혼도 반드시 달라지고 변화된다.

    이 일이 이뤄지려면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자들을 만나야 한다. 
    만나서 전도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믿는 자들이 직접 나가서 이런 복음을 증거할 때 
    하나님은 참으로 기뻐하신다.

    남전도회와 여전도회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회개했다. 
    장사하고 사업하느라 전도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안타까운 일인데, 
    싸움까지 하니 마귀가 춤출 만한 행태였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마귀에게 속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고심한 끝에 남전도회와 여전도회를 모두 폐지했다. 
    조직과 명칭만 전도회일 뿐 
    실제로 복음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직을 위한 조직, 기관을 위한 기관이 세워지면 
    그곳은 교회가 아닌 거대한 조직 덩어리에 불과하다. 
    기존에 있던 조직과 충돌이 두려워 
    계속 놔둔다면 머지않아 그 교회는 쓰러지게 돼 있다.

    도무지 헌신하지 않고 
    걷힌 헌금만 갖고 뭔가 하려고 한다면 그 기관은 없어져야 한다. 
    이런 기관이 교회에 많을수록 교회는 죽게 된다. 
    자발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기관이라면 
    저절로 없어지게 내버려 두는 게 현명하다.

    세계로교회는 기관이나 성도 개인을 위해 헌금을 쓰는 대신 
    지역 주민을 위한 사업에 눈을 돌렸다. 
    그래서 시작한 게 
    노인 무료 개안수술과 어르신 여행 보내드리기였다.

    무료 개안수술은 
    부산 김해 진해 창원 마산 등 정해진 인원에 한해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혜택을 드렸다. 
    수술 개인부담금이 20만원 정도인데 
    그 비용을 전액 교회에서 부담했다. 
    그리고 평생 한 번도 해외에 나가지 못한 어르신들을 모시고 
    금강산 여행을 갔다. 
    어르신들이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른다.

    이처럼 기관이나 성가대에 편성된 예산으로 
    지역 주민의 개안수술을 지원하고 어르신 여행을 제공해준다면 
    한 영혼이라도 더 교회에 나오지 않겠는가.

    세계로교회는 기관이든 직분자이든 오직 하나, 
    복음전파에 집중한다. 
    회식비 같은 것은 교회가 일절 지원하지 않는다. 
    교회의 귀한 헌금이 
    성도끼리 밥먹는 데 사용된다면 우습지 않은가. 
    그 비용으로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데 말이다.

    ‘어떻게 하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갖고 
    지역주민을 섬기고 복음전파에 힘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 이웃들이 
    교회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궁금증을 갖기 시작할 것이다.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


    전도를 위한 대화 이렇게…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전도는 복음의 핵심내용을 간결하게, 그러면서도 주민들의 정서에 맞는 적절한 예를 통해 웃고 울다가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영접하게 하는 것이다. 부산 세계로교회가 사용하는 불신자 전도 노하우를 문답형식으로 소개한다.

    전도자: 원래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를 지음으로 이 행복을 잃어버리고 타락하게 됐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죄를 지었고 예외 없이 타락하게 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런 분은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얘들아, 너희들은 사람이 직접 살인을 해야 살인자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단다. 너희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이미 살인을 한 자와 같다. 너희들이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자와 같고 너희들이 탐심을 품으면 이미 도둑질한 자와 같다.” 이런 하나님의 법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사람일까요. 김 선생님, 부인에게 욕을 하거나 싸운 적이 있습니까?

    대상자 1: 네, 있습니다.

    전도자: 한두 번 정도 있었겠죠.

    대상자 1: 아니, 많습니다.

    전도자: 많다면 다섯 번 정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대상자 1: 아니, 그보다 훨씬 많죠. 셀 수 없습니다.

    전도자: 뭐라고요. 두 번만 미워해도 두 번을 죽인 것이고 다섯 번만 미워해도 다섯 번을 죽인 것인데 셀 수 없이 죽였다고요. 그럼 살인마잖아요.(익살 궂게) 선생님 알고 보니까 무서운 분이시군요.(웃으며) 물론 경찰서에 고발하지는 않겠습니다.

    전도자: 박 선생님, 아이들에게 혹시 욕을 한 적이 있습니까.

    대상자 2: 네, 있지요.

    전도자: 박 선생님, 박 선생님도 하나님의 법에 따르면 살인자인 줄 아시겠지요.

    대상자 2: 그러네요.

    전도자: 이 선생님은 얼굴이 온화해 보이시는데, 마음속으로라도 남편을 미워하신 적은 없으시지요.

    대상자 3: 많이 있습니다.

    전도자: 그렇다면 남편을 많이 죽인 것이 되네요. 남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대상자 3: 모릅니다.

    전도자: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하나님의 법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죄 없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착한 일을 아무리 많이 했어도, 성품이 아무리 좋아도 모두 죄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왜 교회는 죄에 대해서 말을 할까요. 교회에서 너무 자주 죄를 언급하기 때문에 불편하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교회가 죄를 중요하게 여기고 자꾸 이야기하는지 아십니까. 교회 밖 어디에도, 심지어 학교조차 죄에 대해 침묵하는데 유독 교회에서 죄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죄의 결과로 죽음이 오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죽는 게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죄를 짓고 나면 죽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김 선생님, 제가 며칠 전부터 눈물이 나고 콧물이 나고 재채기가 나옵니다. 혹시 왜 그런지 아시겠어요.

    대상자 4: 몰라요. 혹시 감기드신 것 아닙니까.

    전도자: 아니, 어떻게 아셨습니까. 혹시 의사세요.

    대상자 4: 아닙니다.

    전도자: 네, 의사가 아니시지만, 눈물 콧물 재채기가 나는 것을 보면 감기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감기 현상을 보고 감기에 걸렸다고 판단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감기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침투했기 때문입니다. 감기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현상을 보고 감기에 걸렸다고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죽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죄 때문입니다. 죄가 사람을 죽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한번 죽고 난 다음 끝이라면 죽음도 겁날 것이 없습니다. 내가 죽고 나서 공기나 흙이나 무(無)의 세계로 돌아가서 어머니도, 아버지도, 처자식도 모르는 그런 세계로 돌아간다면 자식을 위해 수고할 필요가 있을까요.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전도 꿈은 크게 꿔라”… 24명 출석 교회, 3개월 만에 100명으로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의 전도, 너무 쉽습니다 <2>

    입력 : 2019-05-17 00:06 국민일보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가 지난 4월 부산 강서구 교회에서 열린

     ‘150배 성장세미나’에서 참석자들에게 불신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세계로교회 제공


    5%의 꿈은 이루기 어려워도 30%의 꿈은 이루기 쉽다. 

    5%를 꿈꾸는 자는 항상 쩨쩨하게 생각하지만 

    30%를 꿈꾸면 생각의 혁신이 일어난다. 


    기업을 보라. 

    5% 성장 목표를 세울 땐 

    전기 사용과 인건비를 줄이는 등 

    소극적으로 대처한다. 

    하지만 30% 성장을 목표로 삼으면 

    그것만으론 안 되기 때문에 

    혁신적인 사고로 혁명을 일으킨다.


    전도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이 한 명 전도하여 배가하자’와 같은 구호로는 성장할 수 없다. 

    전도대상자로 한 명만 고르려 하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이래서 안 되고 이 사람은 저래서 안 된다. 

    그래서 전도를 할 수 없다.

    첫 예배 때 100명 출석 선포

    1993년 세계로교회에 부임하고 성인 신자 24명과 함께 첫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선포했다. “우리 교회의 목표는 100명의 성도들이 함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100명이 모이도록 전도합시다.”

    내가 이처럼 담대하게 선포한 것은 과거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경남 김해 무척산기도원 아래 생철리교회라는 작은 농촌교회에서 교회학교를 맡았다. 뭘 모르는 상태에서 교사를 맡다 보니 30명 모이던 아이들이 17명으로 줄었다.

    전도사님이 나를 불렀다. “손 선생이 반을 맡고 난 뒤 아이들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다믄서.” 얼마나 창피하던지 아이들을 불러놓고 설교를 했다.

    “오늘 17명이 나왔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선포하면 다음 주에 배가 될 거야. 다 같이 ‘아멘’ 하자.” 주중에 열심히 전도하니 그다음 주에 정확히 34명이 나왔다. “봤지. 정말 기도한 대로 주님이 이뤄주셨다. 다음 주는 68명이다. 알았지.”

    아이들과 통성으로 기도하고 주중에 열심히 전도했다. 그러나 주일 새벽부터 장대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68명은 고사하고 17명조차 나오지 않을 듯했다. 부끄러운 마음에 도무지 교회에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주위 시선을 피해 어른 예배에 나갔다.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전도사님이 불렀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손 선생, 아까 주일학교 예배에 왜 안 왔어? 오늘 몇 명 왔는지 알아?” “모르겠습니다.” “68명이 나왔어요.” “네?” 어린아이들을 모아놓고 반은 믿음으로, 반은 협박하듯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다.

    그때 나는 확신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는구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구하면 인간은 약할지라도 하나님 자신이 하신 말씀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시는구나.’

    안 되는 이유만 나열하는 성도들

    예배 후 강단에서 내려오는데 한 분이 나를 붙잡았다. “전도사님, 그렇게 했다가 안 되면 우짤라꼬 그러십니꺼. 우리 교회는 100명이 앉을 자리도 없다 아입니꺼. 글고 이 동네 사는 사람이 100명도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로 100명을 모읍니까. 절대 안 됩니더.” “되든 안 되든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전도에 매진합시다.”

    젊은 집사 두 사람을 불러 중학생 이상으로 교회에 한 번이라도 왔다간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달라고 했다. 대략 100명이 됐다. 그때부터 새벽예배 수요예배 철야예배 할 것 없이 강단 뒤로 가서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기도했다.

    작은 교회에서 얼마나 시끄럽게 기도했던지 일주일이 지나자 동네에 소문이 퍼졌다. “이번에 오신 전도사님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는지 고함을 그렇게 친다 카대.”

    교인들 사이에서도 원망이 높아졌다. “고마 기도하려는데 전도사님 소리 때문에 도무지 시끄러워서 기도도 못하겠다카이.” 나의 간절함을 몰라주는 성도들이 속상했지만 참고 계속 기도했다.

    밤에는 털외투를 입고 명단에 있는 사람들의 집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이 집에서 잠자고 있는 영혼을 구원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하시면 능히 되실 줄 믿습니다.” 그렇게 마을을 돌고 기도한 뒤 새벽 2시쯤 교회 강대상 뒤에서 눈을 붙였다.

    3개월 후 100명이 함께 예배

    교회 주변은 그린벨트로 35년간 묶여있었기 때문에 반경 4㎞ 안에 거주자가 거의 없었다. 비포장도로 길을 15㎞ 달려야 마을이 나왔다.

    권사님 한 분, 할머니 두 분과 전도를 가기 위해 승합차에 탔다. 중간쯤 갔을까. 운전하는데 뒤에서 안 좋은 얘기가 들렸다. “동네 사람들도 안 믿는데, 부산 사람들이 왜 여까지 오겠나.” 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아니, 권사님. 지금 무슨 소리입니까.” “아입니더.”

    조금 더 가니까 자기들끼리 또 수군거렸다. “머라 카노. 절대 안 온다. 니 같으면 오겠나. 안 온다 카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좀 조용히 하세요. 믿음 없는 소리 마시고.” “그래도 안 오는 것은 안 오는 거지요.”

    전도에 도움은커녕 방해가 될 게 뻔했다. 차를 갓길에 주차했다. 문을 열었다. “내리세요.” “와카는데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기적이 일어날 것인데 어쩌면 그렇게 믿지 않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함께 전도할 수 없습니다. 내리세요.”

    “여가 어디라고 내립니꺼. 돈도 없고 차도 없는데요.” 3명을 모두 내려주고 혼자 전도하러 갔다. 그 일을 계기로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된다’ ‘못한다’는 부정적 이야기를 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하나님께서는 전도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셨다. 도무지 교회에 나올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전도했는데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어, 그래요? 교회 한번 가볼까요.” 그렇게 교회에 나온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고 3개월이 지나자 정확하게 100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됐다.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


    전도를 위한 대화 이렇게… 인간은 영적 존재다

    전도자: 만약 인간이 죽고 난 다음 끝이라면 오래 살 필요가 있을까요. 환경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요. 죽고 나서 이 세계와 어떤 관계인지도 모르는 무(無)의 세계로 돌아간다면 모든 것이 허무하지 않습니까. 만일 죽어서 끝이라면 좋은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어차피 죽어서 끝이라면 말입니다.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은 죄 때문에 육체적으로 한번 죽고 그다음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김 선생님은 혹시 가축을 키워보신 적 있습니까.

    대상자1: 네, 소와 개를 키워본 적 있습니다.

    전도자: 개를 키워보시니 혹시 똑똑한 개 중에 아침에 일어나서 “오 할렐루야”하며 기도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는지요.

    대상자1: 네? 그런 개가 어디 있습니까.

    전도자: 그럼 혹시 소 중에 아침에 일어나 “오 아미타불” 하는 것을 본 적 있나요.

    대상자1: 그런 소는 못 봤습니다.

    전도자: 그럼 역사 가운데 소 말 개 돼지가 하나님을 믿었다거나 부처님을 믿었다거나 종교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대상자1: 없습니다.

    전도자: 그렇습니다. 소 말 개 돼지는 수천년이 지나도 하나님이나 부처님이나 신을 섬긴 역사가 없습니다. 역사 이래 고고학과 문화인류학의 모든 연구에서도 짐승이 신을 믿었다는 흔적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소 말 개 돼지는 살다가 죽으면 끝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영혼이 없으니 죽으면 끝입니다. 영혼이 없기 때문에 영혼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종교나 내세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 그 속에 영혼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죽고 난 다음에 다른 세상이 있을 거야’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만 영혼이 있기 때문에 영혼에 대한 개념과 내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박 선생님은 사람과 쥐의 DNA가 몇 퍼센트나 동일한지 아십니까.

    전도자2: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5% 정도 되나요.

    전도자: 아닙니다. 97% 이상 같습니다. 그래서 의약품을 개발할 때 쥐를 갖고 임상실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오랑우탄이나 원숭이를 갖고 실험하지 않을까요.

    대상자2: 글쎄요.

    전도자: 너무 비싸기 때문입니다.

    대상자2: 아, 그렇군요.

    전도자: 쥐가 인간과 비슷하다면, 모여서 하나님을 섬기거나 예배드리는 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대상자2: 쥐들이 어떻게 예배를 합니까.

    전도자: 그렇습니다. 쥐 소 말 개 돼지는 어떤 경우에도 종교를 갖거나 내세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인간과 DNA가 비슷해도 짐승 속에는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산다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영혼이 있습니다. 영혼이 있는 인간은 한국 미국 우간다 등 어디에 살든 종교를 갖고 신을 믿습니다. 신을 믿는다는 말은 내세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1950~60년대 모험가들이 카메라를 들고 브라질의 밀림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문명세계와는 단 한 번도 교류한 적이 없는 원시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조상신을 섬기고 해와 달과 숲의 정령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 보니 본능적으로 신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누가 말하지 않아도, 합의하지 않아도 신을 섬기게 돼 있습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왜 인간만 내세를 생각할까요. 인간에게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한번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인간이 죄를 갖고 있고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100명의 성도’ 마인드 바꾸자 총력전도주일에 976명 인도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의 전도, 너무 쉽습니다 <3>

    입력 : 2019-05-24 00:10 국민일보



    부산 세계로교회가 지난 1월 부산 강서구 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총회세계선교회와 공동으로 선교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세계로교회 제공


    교회가 4개월 만에 급성장하자 예배 공간이 부족하게 됐다. 반경 3㎞ 안에 주민이라고 해봐야 300명도 안 되는데 100명이 모인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이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고 나니 더욱 담대해졌다. “이제부턴 300명 성도를 목표로 하겠습니다.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합시다.”

    심각하게 말하는데 교인들이 웃었다. “아이고, 강도사님예. 이 동네는 아이들까지 합쳐서 300명이 안됩니더. 어떻게 모인다는 겁니꺼.” “그래도 믿고 기도합시다.” 얼마 후 집사람이 와서 말렸다. “여보, 제발 그러지 마세요. 어느 집사님이 그러던데 우리 교회 강도사님 별명은 ‘허풍쟁이’래요. 100명도 대단한 일이에요.”

    듣자 하니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에게 한계란 없다. 세례요한이 어디서 복음을 전했는가. 광야다. 광야는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니지만, 복음을 전할 때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수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 ‘성경에 적혀 있는 말씀이 사실이라면 이 사람들의 말에 기죽어 주저앉으면 안 되겠다.’ 한술 더 떠서 이렇게 선포했다. “한 달 뒤 총력전도주일을 하겠습니다. 그때 목표는 1000명입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을 보며 꿈에 한계를 짓지 말고 무엇에든 능하신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간구합시다.” 온 교회가 웅성웅성 시끄러웠다. “네? 1000명을 어디서 데리고 오란 말입니꺼.”

    교회에서 가장 가까운 아파트는 15㎞ 밖에 있었다. 김해까지는 22㎞였다. 구호를 외치며 전도를 시작했다. ‘오라, 우리가 세상을 바꾸자’ ‘오라, 우리가 1000명을 변화시키자.’

    동네 토박이였던 장로 한 분과 권사 한 분이 있었는데 50명을 데리고 오지 못하면 교회를 떠나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이 동네에서 자랐는데, 한 번만 교회 가자고 부탁해서 50명도 데리고 오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도대체 어떻게 살았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반드시 데리고 오십시오.”

    총력전도 주일이 점점 다가오자 하나님께서는 한 성도, 한 성도의 마음을 바꾸기 시작했다. 허리가 90도로 굽은 한 할머니는 파밭에서 밭 주인에게 “3일 동안 일을 도와줄 테니 딱 한 번만 교회에 가자”며 전도했다. 약속한 3일이 되자 밭 주인이 품값을 챙겨주는데 극구 사양했다. “돈보다도 제발 소원이니 한 번만 교회에 가입시다.”

    또 다른 집사님은 고민을 하다가 친구인 이웃 마을 통장을 찾아갔다. “친구야, 내가 돼지 두 마리 잡아서 잔치를 열어줄 테니 마을 사람들과 딱 한 시간만 교회 나오면 안 되겠나.” 동네잔치를 열어준다는 말에 친구는 흔쾌히 오케이를 했다. “그래, 고마 30명 데리고 가꾸마.” 융숭한 마을 잔치 후 친구인 통장은 스피커로 방송을 내보냈다. “아, 아. 세계로교회 가기로 한 사람들은 마을 입구로 나오십시오. 25인승 차량이 있다고 하니 그걸 타면 됩니데이.”

    가장 많이 전도한 사람은 196명을 초청한 우리 부부였다. 간호사 출신의 아내는 아픈 사람을 찾아가 링거 주사를 놔주면서 전도를 했다. 승용차 안에 주스를 가득 넣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마다 전도했다.

    복음도 어중간하게 전하면 통하지 않는다. 확실하게 딱 달라붙어서 전하면 생각이 달라진다. ‘아, 가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안 가면 안 되나 보다.’ ‘갈 바엔 혼자 가기 서먹서먹하니 누구라도 데리고 가야겠다.’

    열심히 전도한 결과 모두 976명이 예배에 참석했다. 온 동네가 뒤집혔다. 설교는 탕자와 지옥에 관한 말씀을 준비했다. 설교를 듣고 147명이 예수를 믿기로 했다. 그때 목표를 정하고 나아가기만 하면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경험했다.

    7부까지는 1000명 목표 총동원 예배로 드리고 8부 예배는 기존 성도들과 함께 감사예배로 드렸다. 예배 중 성도 가운데 누가 가장 많이 전도했는지 궁금해졌다. 젊은이들이 많은 성가대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성가대원 가운데 10명 이상 전도한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단 한 명도 없었다. 5명 전도한 사람이 하나, 3명 전도한 사람이 둘 있었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연로하신 어른들도 100명을 채우려고 그토록 전도에 힘썼는데, 정작 젊은 성가대원들은 전도를 게을리했다.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 찬양에 집중하느라 전도는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둘째, 성가대 연습을 하느라 시간이 없었다.

    ‘하나님은 찬양받으시기를 너무 좋아하시는 분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해도 본인이 직접 전도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문제 아닌가.’ 하나님의 명령과 부탁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입술로만 부르는 찬양을 하나님께서 과연 받으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찬양 잘하는 데만 신경 쓰느라 정작 본질인 복음 전하는 데 소홀히 한 찬양대원들을 향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실까. “네가 성가대 하느라 복음을 전하지 못했구나. 이해해주마”라고 말씀하실까. 절대 그렇지 않다. “내가 피 흘려 대신 죽은 그 영혼을 방치해놓고 너희는 어떻게 노래만 부르느냐.” 영혼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 느껴지며 마치 이렇게 질책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날로 성가대를 폐지했다. 지금도 우리교회는 성가대가 없다.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


    전도를 위한 대화 이렇게… 하나님이 만드신 구원의 방법

    전도자: 이 선생님, 따님을 무척 사랑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대상자1: 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하지요.

    전도자: 그런데 따님이 학교 갔다 오는 길에 하수구에 빠져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물이 묻으면 어떻게 될까요. 딸이 너무 착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워도 그대로 방에 데리고 가시겠습니까.

    대상자1: 아니요. 욕실로 데려가 씻겨야죠.

    전도자: 그렇지요. 아무리 사랑하는 딸이지만 깨끗하게 씻고 난 다음에야 방으로 들이겠지요. 하나님도 우리를 눈동자처럼 사랑하시지만 죄 있는 이대로는 천국에 데리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죄를 씻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죄가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을 구원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은 더더욱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운명은 육체의 죽음과 영적 심판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하나님은 구원의 방법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죄 없으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우리 죄를 대신해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대신 씻으셨다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을 딱 한 절로 줄인 성경구절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너무 중요해서 어릴 때부터 노래로 만들어 주일학교에서부터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우리는 다 죄 때문에 심판을 받아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죄의 빚을 대신 갚으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마다 십자가가 있습니다. 왜 십자가를 달아 놓았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마지막으로 외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였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라는 단어였는데, 이 단어는 상업적인 용어로 ‘값을 지불했다’ ‘영수증처리가 끝났다’라는 의미였습니다.

    김 선생님, 만약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는데 도저히 갚지 못해 신체포기각서를 쓸 지경이 됐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께서 김 선생님 대신 빚을 갚아줬다면 선생님은 사채업자에게 다시 갚을 필요가 있을까요.

    대상자2: 부모님이 저 대신 빚을 갚았기 때문에 다시 갚을 이유가 없죠.

    전도자: 부모님이 대신 빚을 갚았는데도 사채업자가 와서 또 빚을 갚으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상자2: 부모님이 빚을 갚은 서류를 보여주면 되겠네요.

    전도자: 그렇습니다. 이 영수증만 있으면 됩니다. 그 영수증이 바로 ‘테텔레스타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테텔레스타이’라고 외치신 것은 나를 믿는 자는 “죄의 빚이 청산됐다. 영수증 처리가 끝났다” “너의 모든 죄의 빚을 갚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라는 사실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받는 사람의 조건은 오직 하나,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그러면 의문이 생깁니다. 박 선생님, 도대체 얼마만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대상자3: 열심히 믿어야겠지요.

    전도자: 김 선생님, 얼마만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대상자2: 끝까지 잘 믿어야겠지요.

    전도자: 이 선생님, 열심히 믿거나 끝까지 잘 믿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대상자1: 글쎄요.

    전도자: 저는 스님의 도움으로 등록금을 받고 절에서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신학생인 저는 스님께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은 오늘 세상을 떠나시면 극락에 가실 수 있겠습니까.” 스님은 언제나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답답한 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님, 무엇을 해야 극락에 갈 수 있을까요.” 그제야 스님은 “자비를 베풀어야지”라고 했습니다. 저는 또 물었습니다. “스님, 얼마만큼 자비를 베풀어야 극락에 가지요?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여기까지 오면 스님은 언제나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가난했지만 간절했던 신학대 입학… 스님 도움으로 길 열어주셔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의 전도, 너무 쉽습니다 <4>

    입력 : 2019-05-31 00:07 국민일보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오른쪽)가 지난해 4월 교회에서 열린 세례예배에서 새신자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다.세계로교회 제공


    내가 태어난 곳은 경남 김해 무척산기도원 밑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4살 때 돌아가셨고 극심한 가난이 찾아왔다. 우리 다섯 식구는 봄에는 산나물을 뜯고 여름엔 남의 집 일을 도왔다. 겨울엔 무척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야 겨우 먹고 살수 있었다.

    불신가정에서 극심한 탄압을 받으며 교회에 다녔다. 형은 예수 믿는 나를 죽이겠다며 낫을 들고 덤벼들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신학대학에 시험을 쳐 합격했는데,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계산해봐도 우리집에는 등록금을 낼 돈이 없었다.

    용기를 내서 집안에서 가장 부자인 삼촌을 찾아갔다. 논 100마지기를 지닌 거부였다. “니도 알다시피 우리 아이들은 동아대와 부산대를 다녔다. 한 아이 보낼 때마다 논 30마지기가 들어가더라. 너그 집은 논 두 마지기도 없는데 우짤라고 그러노. 니는 어림도 없데이.”

    “삼촌, 제가 대학에 가는지 못가는지 두고 보십시오. 과정은 잘 모르지만 저는 반드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큰소리를 쳤지만 등록마감 하루 전까지 주머니에는 단돈 1만원도 준비되지 않았다.

    마음이 답답해 어디 가서 바람이라도 쐐야 했다. 부산 주례삼거리 철길 뒤로 올라가면 불현사라는 절이 있었다. 예전에 친구와 함께 놀러 갔다가 그 근처에서 우물물을 마셨던 적이 있다. 그때 한 스님이 나를 보고 자기 동자승이 되라고 한 적이 있었다. 친구가 이렇게 설명했다.

    “스님, 얘는 앞으로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된다는데요.” “그래? 그럼 나중에 놀러나 오거라.” 그때 생각이 나서 부산으로 향했다. 절에 갔는데 마침 그때 만났던 스님이 있었다.

    “어찌 왔는가.” “놀러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목사 된다고 하더만.” “시험은 쳤습니다.” “합격했나.” “했습니다.” “등록했나.” “아직 못했습니다.” “요새 등록금은 얼마나 하나.” “입학금하고 등록금까지 해서 60만원 정도 됩니다.” “그렀나. 마 놀다 가거라.”

    놀다가 내려가는데 절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불러 스님을 만나고 가라고 했다. “스님, 잘 놀다 갑니다.” “안으로 들어오니라.” 스님이 돈봉투를 내밀었다. “이 돈으로 등록하거라.” “아니, 제가 이 돈을 받아도 됩니까.” “열심히 예수 믿어서 나중에 부처가 되면 되지.”

    캄캄한 밤이 되도록 내가 들어오지 않으니 어머니가 걱정이 됐는지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도대체 어딜 갔다 오노.” “등록했다. 스님이 60만원을 줘서 신학대에 등록하고 왔다.” 그러자 어머니는 절을 향해 연신 “나무관세음보살”을 외쳤다. “엄마, 그건 부처님이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

    막상 고신대 신학과에 입학하고 나니 통학이 문제였다. 기숙사비는커녕 밥 사먹을 돈조차 없었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다시 절로 갔다.

    “스님, 덕분에 등록은 잘했습니다.” “집이 김해에서 더 들어간다고 했는데 어디서 생활할라꼬.” “아직 거할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갈 데가 없으면 다락을 내어줄 테니 거기서 먹고 생활하면 어떻겠노.” “오늘부터 말입니까.” “그럼.” 그렇게 그날로 절 생활이 시작했다.

    등록금이 60만원인 시절 49재를 지낸다고 사 온 과일 값이 30만원어치였다. 그때만 해도 파인애플 같은 수입과일은 구경도 하기 어려웠는데, 제일 비싸고 좋은 과일로 제사를 지냈다. 제사 후 일하는 분이 종류별로 과일을 갖고 다락으로 왔다. “저는 제사 지낸 것은 먹지 않습니다.”

    이튿날 스님과 겸상을 했다.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했다. “뭐하노.” “기도합니다.” “밥을 누가 주는데.” “하나님께서 주셔서 먹는 것 아닙니까.” “야, 내가 일해서 니한테 밥 주는데 무슨 소리고.” “스님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 아닙니까.” 사실은 스님도 일제강점기 때 교회 주일학교에 다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참 잘해주셨다.

    그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다락방에 과일이 올라왔다. “이 과일은 먹을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스님께서 손군은 제사 드린 음식은 먹지 않으니까 제사 전에 미리 담아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스님께 용돈도 받고 책값도 받고 등록금까지 받으면서 신학교에 다녔다.

    절에서 지냈지만 새벽마다 근처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드렸다. 새벽 4시가 되면 스님은 절을 한바퀴 돌면서 목탁을 두드리며 예불을 했다. 예불이 끝날 때쯤 나는 성경책을 들고 큰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면서 교회로 향했다. 그렇게 1년 동안 절에서 지내며 깨달은 것이 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만 가져도 하나님은 우리 삶을 기적적으로 인도하시는구나.’

    어머니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 삶을 직접 보셨기에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급기야 고향교회를 짓는 모습을 보며 그렇게 완고하던 마음이 우르르 무너졌다.

    어머니보다 더 놀라운 기적은 형님이다. 예수 믿는다며 나를 죽이려 하고 교회에 온갖 욕을 다 퍼붓던 형님이 나보다 먼저 목사 안수를 받았다. 누나도 얼마 되지 않아 예수를 믿게 됐다.

    ▒ 전도를 위한 대화 이렇게
    믿음이란 영접하는 것

    전도자: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구원의 기준을 분명하게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성경에서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했습니까.

    대상자1: ‘믿는 자’라고 돼 있습니다.

    전도자: 맞습니다. 성경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 앞에는 반드시 조건이 따라오는데 그 조건은 오직 하나 ‘믿는 자’입니다. 그런데 믿는다는 게 도대체 뭘까요. 말씀을 보니까 ‘영접하는 자=예수님을 믿는 자’라고 돼 있군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쉽게 말해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선생님, 만약 오늘 저희 부부가 이 선생님을 찾아가면 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대상자1: 목사님이시니까 당연히 문을 열어 드려야죠.

    전도자: 원래 아무에게나 문을 열어 주십니까.

    대상자1: 아닙니다.

    전도자: 이 선생님이 저희를 정확히 잘 아시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로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이기에 문을 열어 주신다는 그 말씀이죠.

    대상자1: 네, 그렇습니다.

    전도자: 이 선생님, 그것이 바로 저희를 영접하신 것입니다. 영접은 저희를 거절하지 않고 어서 들어오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얼마 전에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왔습니다. 우리나라 정부 요인과 군악대가 팡파르를 울리며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때 TV 화면 자막에 ‘공항영접’이라는 자막이 보였습니다.

    영접에는 ‘당신이 우리나라에 오는 것을 환영합니다’ ‘당신이 우리나라에 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라는 뜻이 있죠. 만약 테러범이나 마약사범이 한국에 들어온다면 정부 당국은 어떻게 할까요.

    대상자1: 당연히 추방하지요.

    전도자: 그렇습니다.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그들은 추방합니다. 영접의 반대말은 추방이고 거부입니다. 추방이란 ‘당신 같은 사람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합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받아들이고 영접하며 환영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믿습니다. 나도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싶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이것이 영접입니다. 거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마시리라.”(계 3:20) 이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구원받는 것이 이렇게 쉽단 말인가.’ 이런 질문을 예상하시고 하나님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에 비유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과 자녀를 낳아서 기르는 것이 너무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박 선생님, 최근 딸이 병원에서 출산했다면서요.

    대상자2: 네, 맞습니다.

    전도자: 갓 출산한 아기가 “아이고, 아버님 어머님 뱃속에서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던가요.

    대상자2: 네? 아기가 어떻게 부모를 알아보고 말을 합니까.

    전도자: 아니, 그럼 부모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알아보지도 못한 아기를 키운다는 말입니까.

    대상자2: 아기인데요.

    전도자: 부모도 못 알아보고 인사도 하지 않는 아기를 왜 키우는 거죠?

    대상자2: 말은 못 해도 내 자식이니까 그렇죠.

    전도자: 그렇습니다.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과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너무나 비슷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자녀는 태어나서 말도 못 하고 똥오줌 싸며 울기만 하지만 부모는 자녀를 보호하고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하나님을 아직 잘 모르고 찬양할 줄도, 기도할 줄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욕 먹을 각오로 교회 올 때까지 찾아가… 마음의 문이 열렸다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의 전도, 너무 쉽습니다 <5>

    입력 : 2019-06-07 00:08 국민일보



    지난해 5월 부산 세계로교회에서 열린 부활절 교구별 찬양대회에서 성도들이 춤을 추며 트로트 찬양 ‘참말이여’를 부르고 있다. 세계로교회 제공


    1993년 청빙 받아간 교회 주변엔 집이 별로 없었다. 교회가 있는 마을엔 모두 합해도 15가구가 전부였다. 시간을 정해놓고 전도하러 다녔다. “아이고, 전도사님. 우리가 교회는 나가지 않지만, 하나님은 믿습니다.” 한 이웃이 그렇게 말했다. 얼마나 반갑고 좋았는지 모른다. 저 사람은 반드시 교회에 데려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토요일 오후 3시 그 집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다음 주에도 갔지만, 집주인을 만날 수 없었다. 그래도 계속 토요일 오후 3시만 되면 그 집에 갔다.

    이번엔 시간을 바꿔 5시에 갔다. 다행히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참 반가운데 집주인이 정색하며 말했다. “인사치레로 한마디 한 건데 매주 오면 어떡합니꺼. 이제 쫌 고만 오이소.”

    나는 멈출 수 없어 그다음 주 오후 5시에 찾아갔다.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만나야 했기에 하루는 밤 9시에 갔다. 저녁에 어딜 가겠나 하는 마음에 예의에서 벗어난 줄 알았지만 무리해서 갔다.

    집안에 들어가 마당에서 주인을 불렀다. “선생님, 계십니까.” 방문 틈으로 텔레비전 불빛이 새어 나오는데 인기척이 없었다. 아무도 없나 싶어 “선생님” 하면서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19세 이상만 볼 수 있는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안에 있던 주인도 얼마나 놀랐는지 부인과 함께 이불을 덮어 가렸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급히 나왔다.

    다음 날은 주일이었다. 아침밥을 먹는데 술에 취한 남자가 사택에 와서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전도사, 이 새끼. 나온나. 니 죽이삐린다.” 문틈으로 바깥을 보니 장작을 팰 때 사용하는 서슬 퍼런 도끼를 들고 있었다. “여보, 당신이 대신 나가 봐.”

    아내가 밖에 나가서 보니 이 사람이 발로 대문을 차고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전도사면 전도사지 밤에 말도 없이 찾아와 들이닥치믄 어케 합니꺼. 내 죽이삘 겁니데이.”

    안 되겠다 싶었다. 얼른 밖으로 나가 그를 붙잡고 싹싹 빌었다. “정말 미안합니다.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대답을 하지 않아서 저도 모르게 방문을 열었습니다. 앞으론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한참을 빌고 달래자 겨우 흥분을 가라앉혔다. “내 이번만 용서하꾸마. 우리 집에 또 오믄 그땐 진짜 죽이삐린데이.”

    그러나 다음 주 토요일 나는 또 그 집을 향했다. “당신 또 왜 왔는데?”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을 믿어야 영원히 삽니다. 먹고 살기 바빠서 교회 못 나온다고 하지만 결국은 다 먹고 죽는다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거 참.”

    하도 어이가 없는지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그 주인은 교회에 나오게 됐고 지금은 든든한 성도가 됐다. 한계를 넘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한다. 이것이 바로 전도자에게 주시는 행복이다.

    한번은 철야기도회를 인도하는데 여집사님 한 분이 불쌍해 보였다. 아들이 예수를 믿지 않아 너무 고통스러워했다. 그래서 강단에서 선포해버렸다. “저 집사님 아들이 교회에 나올 때까지 따라 다니다가 나오면 함께 오겠습니다. 지금부터 철야기도는 각자 알아서 하시고 주일날 제가 오지 않으면 장로님이 인도하십시오.”

    강대상에 깔았던 침낭을 들고 그 집사님 아들 집으로 갔다. 밤 10시가 넘어 들어서자 그 집 아들이 놀라 물었다. “아니, 전도사님. 이 밤중에 웬일입니까.” “어머니가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데 선생님이 교회에 나오지 않아 제 마음이 아픕니다. 선생님이 교회에 나오실 때까지 기도하고 따라 다니겠습니다. 잠도 여기서 자겠습니다. 직장에 가면 직장까지 따라갈 테니 알아서 하십시오.” 나는 비장하게 이야기하고 거실에 앉았다.

    “아니,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데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어서 돌아가세요.” 그래도 꿈쩍하지 않았다. 급기야 욕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개와 소 등 온갖 동물이 등장하더니 10원짜리와 18원짜리가 남발했다. 그래도 요지부동으로 앉아 있으니 열을 받았는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펜치를 휘두르고 혼자서 욕을 해댔다.

    그러다 방 안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전도사님, 이번 일요일에 교회 갈 테니 그냥 집으로 가세요.”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자기 아내와 어머니까지 모시고 와서 구두로 맹세했다. 그래서 못 이기는 척하면서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오는 주일 그 가정이 모두 교회에 나와 등록했다.

    마귀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왜 나를 괴롭게 하십니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한 번만 교회에 가자고 권하라. 말씀 듣는 곳으로 데려오면 군대 귀신 들린 사람도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뤄질 것이다.

    어렵고 피곤하고 지칠지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라. 하나님을 위해 고난당할 기회, 하나님을 위해 일할 기회는 이 땅 말고 어디에도 없다. 예수 때문에 핍박받고 예수 때문에 눈물 흘리고 복음 전하다가 매 맞고 복음 전하다가 욕 얻어먹고 복음 전하느라 물질을 쏟을 기회는 이 땅밖에 없다.

    ‘예수님 때문에 핍박받아 봤으면….’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하나님 나라에 가면 더 이상 기회는 없다. 주를 위해 고난당하고 고생할 기회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이 땅 말고는 없음을 깨닫고 전도에 힘쓰자.

    ▒ 전도를 위한 대화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

    전도자: 얼마 전 어느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께서 위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할머니는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으로 기도하듯 입술을 움직였습니다. “주여.” 그리고는 숨이 멎었습니다.

    저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기도했습니다. “주여, 당신 딸의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그때 돌아가신 줄 알았던 할머니가 “휴”하며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아이고, 오메요(어머니).” 그리고는 숨을 거뒀습니다.

    저는 그 할머니를 잊을 수 없습니다. 여든이 다 됐던 그분이 마지막에 불렀던 어머니는 이미 수십년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에게도 수십년 전 떠난 어머니가 마지막 순간에 떠오를 정도로 사무치게 그리웠던 것입니다.

    그 할머니 집사님도 태어난 날이 있었을 겁니다. 태어났지만 부모님을 알아보지 못할 때도 있었을 겁니다. 자라면서 부모님의 은혜를 깊이 몰랐던 때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할머니의 기억 속에는 그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은혜는 살아갈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됐을 것입니다. 김 선생님은 군대를 다녀오셨나요.

    대상자1: 예, 만기제대 했습니다.

    전도자: 신병훈련은 어디서 받았나요.

    대상자1: 논산훈련소입니다.

    전도자: 아이고, 반갑습니다. 저도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럼 혹시 눈물고개라고 알고 계시나요.

    대상자1: 당연히 알지요.

    전도자: 논산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엄하게 받고 숙소로 돌아갈 때 눈물고개에 도착합니다. 그러면 조교가 외칩니다. “제자리에~ 섯. 뒤로 취침.” 그러면 모든 병사가 하늘을 향해 드러눕습니다.

    조교가 또다시 외칩니다. “하늘에 무엇이 보입니까.” “구름이 보입니다.” “하늘이 보입니다.” “이리 나와.” 그러면 한 대 얻어맞고 들어갑니다.

    “하늘에 무엇이 보입니까.” 그제야 병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칩니다. “어머니 얼굴이 보입니다.” 그러면 모두가 어머니 은혜를 부릅니다.

    “낳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모든 병사가 눈물을 흘립니다. 어떤 병사는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기도 합니다.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부모님의 은혜는 커갈수록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아이와 같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보면 울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릴 때는 몰랐던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나이가 들어 어머니의 이름만 불러도 눈물을 흘리는 어른들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기로 작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이 선생님, 자녀가 몇 분이지요?

    대상자2: 아들 하나, 딸 하나입니다.

    전도자: 그 아들이 이번에 대학을 졸업한 아들입니까.

    대상자2: 네, 그렇습니다.

    전도자: 제가 듣기론 그 아들이 부모님 결혼기념일에 제네시스를 한 대 사주셨다면서요.

    대상자2: 네? 아닌데요.

    전도자: 아, 제가 잘못 알았군요. 그럼 쏘나타를 한 대 사주셨다는 말씀인가요.

    대상자2: 아무것도 사준 것이 없습니다.

    전도자: 그래요? 그럼 27년 동안 자녀를 키웠는데 제네시스 한 대도 안 사줬다는 말입니까.

    대상자2: 네, 그렇죠.

    전도자: 이 선생님은 27년간 자녀를 키우면서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학교 보내고 등록금 해주고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잖아요.

    대상자2: 자녀니까 그렇게 해야죠.

    전도자: 27년간 그렇게 키워줬는데 어버이날 고작 카네이션 하나 받고 끝내서야 되겠습니까.

    대상자2: 뭐, 그래도 기쁘고 좋습니다. 능력만 있으면 도와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 아니겠습니까.

    전도자: 그렇습니다. 이것이 자녀의 권세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해주고도 더 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게 우리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신병 시절 “어느 부대라도 보내주시면 복음화시키겠습니다”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의 전도, 너무 쉽습니다 <6>

    입력 : 2019-06-14 00:09 국민일보



    부산 세계로교회는 2012년 6월 개최한 세례식에서

    701명에게 세례를 했다. 세계로교회 제공



    전도 이야기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군대 얘기다. 1983년 입대해 논산훈련소에 입소할 때 의기충천해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 있다. “하나님, 저를 어느 부대에 보내시더라도 그 부대를 완전히 복음화시키겠습니다. 대한민국 어느 부대든지 보내만 주십시오.”

    특공대에 차출됐다. 첫날 신병이 왔다며 소대 회식이 열렸다. 걱정했던 것처럼 술을 권했다.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합니다. 신학생입니다.” “야야, 하나님도 군대는 봐주신다. 행정반 김 일병도 신학생이라던데 잘만 마시더라.” “마실 수 없습니다.” 고참이 술잔으로 내리쳤다. 그렇게 첫날부터 맞았다.

    드디어 주일이 돌아왔다. 사병에게 휴일은 없었다. 특공무술을 한다며 전원 연병장에 집합하라고 했다. 오전 10시 30분 훈련을 받다가 말고 앞으로 나갔다.

    “특공! 이병 손현보. 용무가 있어 왔습니다.” “뭐냐.” “종교활동을 다녀와야겠습니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고참이 발로 내 가슴을 찼다. “사병 중에 교회 가는 사람이 어디 있나. 들어가!”

    5분이 지났다. “특공! 이병 손현보. 종교활동을 다녀와야겠습니다.” “이거 미친 거 아냐.” 목 뒷덜미를 맞았는데 머리가 흔들거렸다. 5분 후 다시 앞으로 갔다. “특공! 이병 손현보, 종교활동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교회로 뛰어갔다. “거기 서. 이 자식아.”

    우여곡절 끝에 연대 교회에 들어가니 얼마나 눈물이 흐르는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 흐른 눈물은 서러움의 눈물이 아니라 감사의 눈물이었다. ‘하나님, 자대 배치받고 처음 예배를 드립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 이런 믿음을 주셔서 예배드릴 수 있게 하시니 참 감사드립니다.’

    예배 후 자대로 돌아가 얻어맞았지만, 다음 주, 그다음 주 계속 교회에 갔다. ‘군대에서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봐야 죽는 것밖에 더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용감해지고 마음도 가뿐해졌다.

    하루는 소대 고참이 나를 불렀다. “야, 나도 옛날에는 교회 다녔다. 그런데 정말 너 때문에 죽겠다. 좋은 말 할 때 잠시만이라도 교회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냐.” “우리나라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저는 꼭 교회에 나가야 합니다.”

    하루는 작업하다가 고참이 교회 다닌다는 이유로 폭언을 퍼부었다. “저는 제가 가진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고참은 화가 났는지 들고 있던 삽을 휘둘렀다. 거기에 입술을 맞았는데, 닭똥집을 구워놓은 것처럼 뒤집혀 퉁퉁 부었다.

    그 일을 당하고도 다음 주일에 또 경례를 하고 교회에 갔다. 그렇게 6개월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갔다. 어느 주일 아침 사령이 나를 불렀다. “손현보. 차렷!” 그러더니 손바닥을 입 앞에 펴고 후 바람을 불었다. “이렇게 교회로 날아가라고.”

    장교들이 아무래도 저 녀석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교회에 보내주기로 의논한 것 같았다. 주일예배를 자유롭게 드릴 수 있게 된 그날부터 새로운 기도가 시작됐다. “하나님, 이 부대, 제가 있는 이 자리부터 복음화가 되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교회에 데려가기 위해 후임들에겐 온갖 편의를 봐줬다. 그들을 데리고 갈 수 있다면 뭐든 했다. 신기하게도 내가 후임을 데리고 가면 막지 않았다. 8개월이 지나자 고참 3명을 제외하곤 모두 교회에 나가게 됐다. 그중 2명은 나를 무척이나 괴롭혔다. 비아냥거리면서 총으로 머리를 툭툭 내리치고 인격적으로 모독했다.

    하루는 장대비가 쏟아졌다. 하필 악질 고참 중 하나와 텐트를 쓰게 됐다. 잠을 자는데 고참이 나를 툭툭 쳤다.

    “야!” “왜 그러십니까.” “이번 훈련 마치고 나도 교회 가면 안 되냐.” “아니, 허 병장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사실 나도 중고등학교 때 교회를 다녔다. 성가대도 섰는데 군대 와서는 논산훈련소 말고는 교회를 가보지 못했다. 그런데 네가 마음껏 교회를 다니니까 정말 밉더라. 그래서 더 괴롭힌 거야.” “그럼 저와 같이 가시죠.” 그날 빗소리를 들으며 텐트 안에서 기도를 했다.

    마지막 남은 2명의 고참도 어느 날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손현보, 사실 나도 세례를 받았다. 나도 오늘부터 교회를 가겠다.” 드디어 소대원 100%가 교회를 나가게 됐다. 그렇게 우리 소대는 주일 오전 예배는 물론이고 저녁 예배까지 빠지지 않고 드렸다. 우리 소대는 기독교 소대라는 별명이 붙었고 100%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다.

    나를 그렇게 괴롭히던 고참이 교회에 나갈 것이라고, 전 소대원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것이라고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미리 생각을 제한하지 말고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라.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될 때 도저히 믿을 것 같지 않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도 누군가 복음을 전해줘서 예수님을 믿었던 것처럼 그들도 복음을 전해 들을 때 예수님을 믿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전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데 누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않겠는가.

    많은 사람이 전도가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말씀 소리가 땅끝까지 이르렀다. 증거하지 않아서 그렇지, 증거만 하면 하나님을 믿게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중요한 점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의지다.

    삽날에 맞아 입술이 반이 날아가 꿰매기도 하고 총구에 턱을 맞아 흉터가 남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위해 힘써 나아갈 때 하나님께선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결과를 보여주셨고 놀라운 위로를 주셨다.

    ▒ 전도를 위한 대화 이렇게
    예수님을 영접한 자녀의 권세

    전도자: 얼마 전 미국에 있는 딸이 아내에게 전화했습니다. 고구마가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곁에서 들었던 저는 아내에게 “고구마 절대 보내지 말아요”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무슨 고구마요, 보내지 않을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심방을 다녀오니 현관에 고구마 두 상자가 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내에게 고구마를 왜 사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는 심방 때 쓸 고구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휴대전화로 문자가 왔습니다. “고객님이 보낸 고구마가 미국 시애틀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고구마를 보내지 않는다더니 이 문자는 뭐예요?” “아니, 여보. 우리 딸이 고구마 먹고 싶다잖아요.”

    이것이 자녀의 권세입니다. 미국에 거주하는 자녀의 전화를 받은 부모는 한국에서 고구마를 사서 씻고 삶고 말려서 보냅니다. 오늘 당신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죄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당신의 권세입니다.

    김 선생님, 선생님은 아직 예수님을 잘 모르시지만, 예수님을 영접해 죄 용서함을 받고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거부하며 사시겠습니까.

    대상자1: 아, 글쎄요.

    전도자: 만약 예수님을 거부한다면 “예수님, 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내 인생에 필요 없습니다. 내 죄 때문에 지옥에 가든 멸망을 받든 신경 쓰지 마십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김 선생님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거부하시겠습니까.

    대상자1: 예수님을 믿고 살겠습니다.

    전도자: 박 선생님은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거부하고 사시겠습니까.

    대상자2: 저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살겠습니다.

    전도자: 이 선생님도 지금까지 자신을 믿고 살아왔습니다. 이제부터 죄 용서함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사시겠습니까.

    대상자3: 저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살겠습니다.

    전도자: 여러분 모두를 축하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선 여러분을 눈동자처럼 보호하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들어주실 것입니다.

    저를 따라 영접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저는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돌아가셨음을 믿습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모시고 살겠습니다. 제 맘에 오셔서 저를 다스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자 이제,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어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 살려면 지켜야 할 두 가지 원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무엇보다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복 주시고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은 예배를 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예배하는 날로 구별해 지킬 때 신앙이 성장하고 예수 믿는 즐거움을 맛보게 됩니다.

    둘째, 예수 믿는 사람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자녀가 부모와 대화를 통해 친밀감을 느끼고 필요를 공급받는 것처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예배보다 고추밭? 권사님 위해 고춧대를 뽑아 버리다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의 전도, 너무 쉽습니다 <7>

    입력 : 2019-06-21 00:25 국민일보





    부산 세계로교회에서 2017년 4월 열린 임직감사예배에서 장로 권사 집사 임직자들이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다.세계로교회 제공


    초창기 기도·전도 사역이 사소한 일에 발목 잡히는 사례가 많았다. 어느 해 임직식을 마치고 직분자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세상에서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직분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니 새벽예배에 꼭 나와서 저와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지금도 그렇지만 교회는 부산의 끄트머리 마을인 데다 김해와 진해의 경계선에 있었다. 게다가 그린벨트 지역이라 주변에 집도 없었다. 당연히 교통편이 좋지 않아 연로하신 권사님들이 새벽예배에 나온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권사 임직자 중 절반 정도만 나왔다.

    새벽예배에 나오지 않는 모 권사님께 권면했다. “새벽예배 나오셔야죠.” “목사님 바빠서예.” “뭐가 그렇게 바쁘십니까.” “아들이 주차장을 하는데, 제가 그 일을 도와야 합니더.” “그 일은 아들이 알아서 하도록 하시고 권사님은 교회에 와서 기도하십시오.” “그래도 일이 너무 많아서….”

    하도 바쁘다고 하니 도대체 뭐가 그리 바쁜지 궁금해졌다. 성도들에게 물어봤다. “가보시면 알겠지만, 그 권사님이 고추 농사를 엄청 짓습니더. 얼매나 지극 정성으로 짓는지, 아마 이 근방에서 최고일 낍니더.”

    다시 권사님을 불렀다. “권사님, 고추밭엔 날마다 가신다면서요. 고추가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아이고 마. 목사님예. 아이들은 농사 짓지 말라고 합니더. 하지만 제가 아이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머 있겠습니꺼. 고춧가루 만들어주는 기 제 낙입니더.” “하나님 일에는 관심도 없고 자녀들에게만 관심이 있습니까.” 아무리 설득해도 통하지 않았다.

    날마다 권사님을 위해 기도하는데, 주께서 이런 생각을 주셨다. ‘네가 진짜 나의 종이라면 그 권사를 그대로 두면 안 된다. 고추를 모두 뽑아버려라.’ 하도 권사님의 고추밭에 신경 쓰다 보니 그런 마음이 드는 줄 알았다. 그런데 기도할수록 그게 아니었다.

    더운 늦여름 어느 날 권사님의 고추밭을 찾아갔다. 정말 소문대로 고추 농사가 잘되고 있었다. 옆에 있는 고추밭과 비교할 때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아, 이 고추밭을 없애야겠구나.’

    농사짓는 장로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농약과 제초기를 부탁했다. 뭔가 낌새가 이상했는지 장로님이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근방에 사는 집사님 댁에 가서 낫을 하나 빌렸다.

    고춧대를 얼마나 단단하게 세우고 줄로 꽁꽁 묶어놨는지 낫으로 베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웃통을 벗고 고춧대를 손으로 뽑기 시작했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물집이 잡혔다. 땀이 비 오듯 해서 더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분의 1 정도를 남겨두고 집에 돌아왔다. 돌아가는 길에 권사님 딸에게 전화했다. “집사님, 누가 고추를 뽑았냐고 물으면 제가 했다고 하십시오.”

    권사님이 주차장에 갔다가 고추밭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나하고 원수진 놈이 한 게 분명하데이.’ 기운을 차리고 실성한 사람처럼 동네 이웃에게 다니며 물었다. “누가 우리 고추밭 뽑은 거 봤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누가 우리 고추밭에 들어와 다 뽑아놨다. 니는 누가 그랬는지 아나.” 얼마나 흥분했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딸은 겁이 나서 엉겁결에 모른다고 했다.

    딸이 도저히 안 되겠는지 밤 9시가 돼 전화했다. “목사님, 아무래도 오늘 밤에 큰일이 날 것 같습니다.” 승합차를 타고 권사님 집으로 갔다. 권사님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았다.

    “권사님.” 목사가 들어갔는데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정신이 없습니까.” “어떤 죽일 놈이 우리 고추밭을 다 뽑았습니더.” “권사님, 제가 했습니다.” “아이고, 그런 말씀 마십시오. 목사님이 와 우리 고추밭에 손을 댑니꺼.” “권사님 제 손을 좀 보십시오. 죄다 뽑으려고 하다가 덥고 해서 조금 남겨놨습니다.” 내 손을 보더니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목사님이 와 고추를 뽑습니까.”

    “권사님은 수십 년 전 예수님을 믿고 이제 권사까지 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감격한 적이 있습니까. 권사님은 지금 고추밭 때문에 심장이 떨리고 치가 떨려서 말을 못 한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다가 죽을 영혼이 복음을 받아들여 너무 좋아 심장이 떨린 적이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 옆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게 너무나 안타까워서 오늘처럼 떨린 적이 있습니까.”

    권사님이 가만히 눈을 감더니 7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갑자기 내 앞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목사님, 제가 잘못했습니더. 이 고추가 머라꼬. 지금까지 이렇게 온갖 정성을 쏟았는지 모르겠습니더.”

    그 시간 하나님께서 권사님의 마음을 만지셔서 비로소 뭔가 중요한지 깨닫게 하셨다. 진심으로 권사님을 위로해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주일 새벽 권사님이 새벽기도에 나왔다. 그런데 교회 나온 지 3개월밖에 되지 않는 성도도 보였다. “아니, 어떻게 새신자가 새벽기도까지 나오시게 됐습니까.” “목사님, 지도 권사님 밭 옆에 고추를 심어놨는데요. 고추가 모두 뽑혔다는 소문을 듣고 나오게 됐심더.”

    그날 이후 권사님은 식혜를 만들어 페트병에 담아 다니면서 전도를 했다. 전도에 은사가 없다고, 전도는 젊은 사람이나 사업하는 사람이나 하는 일이라고 치부했던 권사님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정성 들인 고추밭이 뽑힌 그날 밤 회개했다. 비록 고추는 대부분 뽑혔지만, 그때부터 복음 전도자가 됐다. 그해 12월 권사님이 전도해서 세례받은 영혼이 11명이나 됐다.

    ▒ 전도를 위한 대화 이렇게
    불교엔 구도는 있지만 구원은 없다

    전도자: 세상에는 종교적으로 볼 때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하신 대로 메시아로 오셨고 우리 죄의 빚을 갚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란 예수님을 4대 성인 중의 한 분으론 인정하지만, 자신의 구원자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포함합니다. 김 선생님, 혹시 4대 성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대상자1: 예수님, 공자님, 부처님, 소크라테스 아닙니까.

    전도자: 대단하십니다. 누가 가르쳐주시던가요.

    대상자1: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전도자: 그럼 성인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대상자1: 인류가 본받을만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아닐까요.

    전도자: 그렇지요. 한마디로 말해 훌륭한 분들이라는 말씀이죠.

    대상자1: 네.

    전도자: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는 제가 볼 때도 성인인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한 분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석가모니는 마야왕국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어느 날 장례 행렬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왜 늙고 병들고 고통을 당하다가 죽는가.’ 그래서 그는 왕궁을 나와 도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힌두교에서 하는 것처럼 육체를 고통스럽게 함으로써 구원을 얻고 도를 깨우치려 했지만 이런 것을 통해서는 도를 깨우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힌두교에서 뛰쳐나갔습니다. 그래서 힌두교로부터 이단이라고 배척받게 됐습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인생의 108번뇌는 다 욕심으로부터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버리다 보면 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때가 오고 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무아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무아는 ‘나 자신도 없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니르바나, 즉 열반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이런 사실을 깨닫고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다 주는 욕심을 버리고 살기를 권고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믿으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었을 때 “내가 살아서의 일도 모르는데 죽고 난 다음의 일을 어떻게 알겠느냐”라고 대답했습니다.

    만행 스님의 책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에도 나와 있듯이 석가모니는 제자 목련에게 “나는 도를 찾아가는 구도자이지 구원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예언자나 신의 메신저라고 불리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석가모니는 숨을 거두기 직전 “모든 사물은 반드시 소멸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수행하라”고 말했습니다.

    불교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무의 세계입니다. 석가모니는 심지어 윤회설조차 부정했습니다. 윤회설의 교리는 원래 힌두교의 교리입니다. 윤회설이란 전생에 죄를 지으면 낮은 계급(카스트)에 태어나고 전생에 선을 행하면 높은 계급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석가가 살았던 사회는 카스트제도가 모든 것을 결정했습니다. 사회생활도, 결혼도 오직 카스트에 의해 결정됐습니다. 높은 카스트에 속한 사람은 전생에 선을 행해 높은 카스트에 태어났기 때문에 낮은 카스트의 사람을 도와주기보다 자신들의 권리만 주장했습니다.

    반면 낮은 카스트(천민)의 사람들은 죽고 난 다음 더 좋은 신분으로 태어나기 위해 “지금 자신이 속한 카스트에 불평하지 않고 만족하며 어떤 수치와 모욕도 받아들이고 순응할 때 더 좋은 신분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교리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석가가 볼 때 이 카스트 제도는 권력을 가진 자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었습니다. 카스트 제도에 의해 신분은 고착화되고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이 됐습니다. 석가모니는 카스트 제도를 인간이 만든 제도 중 가장 사악한 제도라고 선언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윤회설을 부정했습니다.

    윤회설을 주장하는 이상 카스트 제도가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가 윤회설을 부정하자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영혼은 어떻게 됩니까.”(계속)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교회 세우신 목적은 복음전파… 목사 등 직분 주신 목표는 영혼 구원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의 전도, 너무 쉽습니다 <8>

    입력 : 2019-06-28 00:01  국민일보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앞줄 가운데)와 장경동 대전중문침례교회 목사(앞줄 오른쪽)가 

    지난해 8월 세계로교회에서 개최된 하계수련회에서 통성기도하고 있다. 세계로교회 제공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 전파다. 
    따라서 교회 내 모든 기관은 복음 전파를 위해 운영돼야 한다.

    많은 교회가 성경공부 찬양모임 봉사활동 등의 사역을 하느라 바쁘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뤄지려면 
    기본적으로 복음 전파가 이뤄져야 한다.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 
    죽어서 지옥 가는 영혼들에게 영원히 사는 길이 있음을 보여주는 일은 
    이 땅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왜 성도에게 직분을 주는가.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사라는 직분을 
    하나님께서 주신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바로 영혼 구원이다. 
    그런데 직분자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소원에 도무지 관심이 없다면 
    예수님이 얼마나 섭섭해하시겠는가.

    복된 인생이 되려면 개인이든 교회든 가정이든 기업이든 민족이든 
    하나님의 소원에 관심을 둬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복이 저절로 임한다. 
    그런 교회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역사가 일어난다.

    반면 하나님의 사명을 다하지 않는 교회는 
    그 어떤 방법을 시도하더라도 새롭게 될 수 없다. 
    원래의 목적을 잃은 교회는 이미 죽은 상태와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가졌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왜 성경을 공부하는가. 
    왜 제자훈련을 하는가. 
    그 안에 복음 전파가 없다면 무익하다. 
    복음 전파를 가르치지 않는 성경공부, 
    복음 전파를 배우지 않는 제자훈련은 
    본질을 잃은 화려한 지식에 불과하다.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명령을 저버리니 
    아무것도 아닌 것, 주보에 오타가 하나 생긴 것, 
    이름 하나 바뀐 것 갖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나온다.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 왜 직분을 주셨는지,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복음에 헌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소한 것에 에너지를 집중하고 
    교만하게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교회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한번은 새신자 가정에서 구역 모임을 갖는다고 해 설교하러 갔다. 
    방문에서 강아지가 깽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목사님께서 개를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 
     방에 가둬 놓았더니 이렇게 난리를 치네요.”

    그래서 물었다. 
    “선생님, 혹시 1박 2일 어디 가려고 하면 제일 먼저 뭐가 생각납니까.” 
    “그야 물론 개밥이죠.” 
    “어디 갔다가 늦게 들어오면 제일 먼저 뭐가 생각납니까.”
     “개가 생각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인생에는 개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네요.” 
    “네, 그렇습니다.” 
    “인생이라는 판에 개가 큰 부분을 차지하면 뭐라고 합니까?”
     “개판이죠.”

    속이 답답했다. 
    “하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으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데, 
     선생님이 하나님께 대한 정성을 개만큼이라도 취급했습니까? 
     개에게 관심을 가진 것처럼 하나님께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못했습니다.”

    개를 위해서라면 목욕도 시켜주고 옷도 사주고 발톱도 깎아주는 사람들이 
    어찌 된 영문인지 예수님이 부탁하고 또 부탁하신 그 명령, 
    복음을 전파하고 증인 되는 일은 게을리한다. 

    “하나님인 내가 친히 너를 위해 대신 죽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는 이제부터 복음을 전파하라!” 

    이와 같은 주님의 명령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 
    개는 예뻐서 어쩔 줄 모르는 자들에게 
    성도라는 이름이 과연 걸맞은 것일까?

    우리교회는 어떤 모습인가. 
    지금까지 예수님의 소원에 관심을 갖고 살아왔는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명령대로 움직이고 있는가. 
    원래 목적대로 복음전파를 위해 사명을 다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명령은 쉬지 않고 내려오는데 
    거기에는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고 
    손에 쥐고 있는 것에만 관심을 쏟고 있지 않은가?

    “농촌은 원래 복음 전파가 힘듭니다.” 
    “도시 사람들은 강퍅해서 복음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말들에 절대 속지 말라. 
    모두 사단이 속삭이는 말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예루살렘에서도 
    기적과 이적이 나타났다. 
    예수의 ‘예’자만 꺼내도, 
    처형당한 사람을 추종하는 
    광신자나 정신병자 취급받던 험악한 분위기였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 복음의 능력이 임하면 
    영혼이 변화되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다.

    부흥과 교회 성장은 온 성도들이 목사님을 중심으로 
    피 묻은 복음에 헌신할 때 나타난다. 
    하나님은 당신을 삶의 중심에 둔 자들을 사용해 그 일을 이루신다. 
    그가 아무리 약하고 연약할지라도 
    하나님께선 친히 능력을 채우셔서 그 사역을 감당케 하신다.

    전도가 두려운가. 
    사도들을 기억하라. 
    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곧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적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갈릴리 촌놈이 
    만방에 다니며 복음을 전할 만한 능력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행하자 
    은혜와 기적이 일어났다. 

    기억하라.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는 분이시다.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


    전도를 위한 대화 이렇게… 
    영혼 존재 부정한 석가, 구원자 아닌 구도자

    전도자: 석가모니는 제자 아난과 춘다에게 “네가 영혼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석가가 다시 말하기를 “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라며 영혼의 존재를 부정했습니다.

    영혼을 믿지 않았던 석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극락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영혼도 없고 윤회설도 없다면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석가모니는 “영혼은 없지만, 재생은 있다”라며 망고나무를 갖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망고나무에 망고가 열리면 그 망고가 떨어져서 다시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떨어져서 또다시 열매를 맺으므로 원래 망고나무는 사라졌어도 망고는 계속 재생된다. 그러나 그 망고나무에 영혼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석가모니의 신앙 수호자로 불렸던 대표적인 제자는 사리불과 목련이었습니다. 사리불은 자신이 죽을 때가 가까워졌음을 알고 마지막으로 석가모니를 만났을 때 “우리는 환생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석존과 저 사이의 마지막 만남입니다. 더 이상의 만남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인도의 정치가 암베드카르는 간디와 동시대에 살았던 사회개혁운동가입니다. 그는 불가촉천민 출신임에도 봄베이대학교 엘핀스톤 칼리지를 졸업한 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석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영국 식민지인 인도에서 노동부장관을 시작으로 1947년 독립 인도의 법무부장관, 인도 헌법기초위원회 의장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암베드카르가 이룬 가장 큰 공헌은 일생 불교와 석가모니의 생애를 연구해 1950년대 20만명밖에 되지 않던 인도의 불자들을 1억명까지 개종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는 불교의 핵심진리를 정리해 ‘인도로 간 붓다- 그의 삶과 가르침’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 책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영혼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석가모니는 영혼에 기초하는 종교가 무가치한 것이고 단지 미신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확고하게 생각했습니다. 그의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붓다는 영혼을 믿었는가. 그는 믿지 않았다. 그의 영혼설은 아나타나, 즉 무영혼설로 불려지고 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석가모니는 단 한 번도 자신을 구원자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마지막 유언에서도 자신은 어디까지나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자라고 말하며 ‘내가 깨달은 것은 여기까지지만 더 좋은 진리가 있다면 거기를 찾아가라’고 제자들에게 권면했습니다. 자기의 신상을 만들지도 말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유언했습니다. 김 선생님, 선생님은 예전에 불교를 믿었다고 하셨죠.

    대상자1: 네, 그렇습니다.

    전도자: 윤회설도 믿었습니까.

    대상자1: 네, 당연히 믿었죠.

    전도자: 지금 보니 김 선생님은 불교를 믿은 게 아니고 힌두교를 믿고 있었군요.

    대상자1: 거 참, 알고 보니 황당하네요.

    전도자: 성철스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이런 열반송을 했습니다. “일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구나. 산 채로 불의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한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그리고 이런 유언도 남겼습니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은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죗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성철스님은 제자들과 잡지 기자가 보는 가운데 임종했습니다. 임종 직전 “석가는 원래 큰 도적이요, 달마는 작은 도적이다. 저 한없이 어리석은 남녀를 속이고 눈을 뜨고 당당하게 지옥으로 들어가네. 발밑의 지옥은 괴로움이 끝이 없도다. 석가와 미타는 뜨거운 구리 쇳물을 마시고 가섭과 아난은 무쇠를 먹는다”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이처럼 성철스님은 운명 직전 영계(靈界)를 직접 보고 지옥의 석가와 달마, 가섭과 아난이 지옥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시로 묘사했습니다. 영계를 직접 보지 않고는 자기가 평생 섬겼던 석가를 도적이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계속)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새신자도 회심할 수 있도록… 물 흐르듯 ‘감동의 예배’ 온힘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의

    전도, 너무 쉽습니다 <9>

    입력 2019-07-05 00:01 국민일보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오른쪽)가 2017년 3월 주일 대예배 시간에

    교회에 처음 출석한 새신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세계로교회 제공


    “어떻게 교회가 이렇게 급성장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해야 온 성도가 전도에 집중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물어볼 때마다 뭐라고 대답해야하나 곰곰이 생각해봤다. 변화를 계획하고 의도적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다 보니 콕 집어서 딱히 뭐라 답해줄 말이 없었다. 곤란해서 얼버무리다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했다.

    목회 여정을 뒤돌아보니 크게 예배, 직분자, 구역을 바꾼 뒤 폭발적 성장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먼저 예배다. 집에서 자발적으로 성경책을 읽는 가운데 ‘구원받아야지’ ‘예수 믿어야지’ 결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예배를 드리지 않고 스스로 교회 다니기로 작정한 사람은 100명 가운데 한두 명 있을까 말까 할 정도다. 때문에 예배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예배순서는 마치 몸에 잘 맞는 옷처럼 편안하고 익숙하다. 하지만 비신자의 시선으로 보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이 불편하고 어색하다. 그 가운데 가장 불편한 것이 예배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처음 나온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돌아올 수 있을지 고민했다. ‘예수 믿는 것이 참 좋구나’ ‘나도 그 예수 한번 믿어볼까’하는 생각이 들 수 있게 1시간 동안 감동이 임하도록 예배를 준비했다.

    전도를 받고 처음 예배당에 앉은 사람들은 예배 내내 머릿속이 복잡하다. ‘나를 어찌하려고 교회에 데리고 왔지?’ ‘교회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곳이지?’ 이런 마음으로 앉아 어색하게 예배를 드린다.

    이런 사람 3명 중 1명이 예배 후 마음이 변해 세례까지 받는 것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 가운데 대부분은 예수님을 믿을 마음이 전혀 없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으므로 성령님이 그 영을 건드리기만 하면 달라진다. 교회에 들어올 때는 예수님을 믿을 생각이 전혀 없었는지 몰라도 예배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된다.

    대다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의 ‘묵도-찬송-기도-찬송’과 같은 순서가 자칫 회중에게 지루한 느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배 시간 내내 일어섰다 앉았다 기도했다 찬송하는 것 역시 번거롭게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일 예배는 앉았다 일어서는 순서를 없앴다.

    예배 인도자가 “누가누가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처럼 중복되는 말을 하지 않도록 했다. 대표기도는 1분 30초를 넘지 않게 했다. 중언부언 기도하면 듣는 사람들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때문에 대표기도는 간결하면서도 성령님이 임재하시도록 강력하게 해야 한다. 정성을 다해 한 문장 한 문장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도록 기도할 때 회중도 은혜를 받는다.

    부산 세계로교회는 성가대가 없다. 대신 누구든지 1개월 전에 특별찬양을 신청하면 특송을 할 수 있다. 특송이 끝나면 청년 찬양팀이 나와 손뼉을 치며 회중들과 함께 힘있게 찬양한다. 설교 전 5분 동안 성도들이 간증하는데, 자신이 예수 믿기 전에 어떠한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예수를 믿었으며 믿고 난 후 어떻게 달라졌는지 말한다. 이 시간을 통해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는다.

    설교는 방송설교 시간에 맞춰 24분 동안 한다. 매주 30~50여명이 새가족으로 등록하는데, 찬양단이 화분을 주며 축하한다. 교회에서 화분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새신자이기에 온 성도가 정성으로 맞아준다. 그리고 헌금기도와 축복기도로 예배를 마친다.

    예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1초도 쉼 없이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이어져야 한다. TV 광고를 보면 한 회당 길어야 15~20초밖에 되지 않는다. 만일 2초간 화면이 하얗게 나온다면 방송사고다.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드리는 예배는 어떨까.

    간증이 주일 예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교회는 철야기도회가 없는 대신 수요일에 심야기도회를 갖는다. 기도회 설교를 마치면 3명이 올라와 간증한다. 특히 맨 마지막 간증자는 장로나 안수집사, 권사가 맡는다.

    간증의 내용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때론 예수를 믿게 된 계기를, 때론 은혜받은 간증을 하기도 한다. 어떻게 은혜를 받게 됐는지, 어떻게 신앙의 결단을 하게 됐는지 간증한다. 간증을 마치면 온 성도가 뜨거운 마음으로 손뼉을 쳐준다. 비록 새신자라 할지라도 간증을 한 사람이 기도회를 인도한다. 첫 번째 간증자가 기도회를 인도하고 내려오면 두 번째 사람이 바로 이어서 간증한다. 그렇게 간증을 나눈 후 또다시 통성으로 기도한다.

    많은 사람이 교회에 처음 왔을 때 말씀을 들으면서, 간증을 들으면서, 찬양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처럼 온 교인들이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세워주면서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 오늘도 예배를 통해 수많은 회심이 일어나고 죽은 영혼들이 살아난다. 은혜롭고 매끄러운 예배가 되도록, 명품 예배가 되도록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


    전도를 위한 대화 이렇게… 불교는 현존하는 것만 추구

    전도자: 선생님은 종교가 무엇입니까.

    대상자1: 불교입니다.

    전도자: 네, 불교를 믿으시는군요. 그런데 김 선생님, 고려 시대에 불교를 국가적으로 믿었잖아요. 하지만 고려 시대에는 제사를 지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대상자1: 네? 무슨 말씀입니까.

    전도자: 고려 시대에는 불교를 숭상했지만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석가모니는 내세나 윤회설을 믿지 않았습니다. 불상을 만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도 못 하도록 유언했습니다.

    조선 시대 들어와서 태조 이성계가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불교를 버리고 중국에서 유교를 도입했습니다. 이성계는 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세우고 왕이 됐지만, 또다시 난이 일어날까 두려워했습니다. 정도전을 통해 불교를 배척하고 힘 있는 자에게 충성하는 유교를 국교로 삼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제사를 지내게 됐습니다. 제사는 불교가 아니라 유교를 믿는 사람들이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성철 스님도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모르십니까.

    대상자1: 처음 듣는 말입니다.

    전도자: 그러나 사실입니다. 김 선생님, 알고 보니까 선생님은 불교를 믿은 게 아니라 유교를 믿고 있었군요.

    대상자1: 그건 아닌데요.

    전도자: 이 선생님도 불교를 믿는다고 하시던데 제사를 지내나요.

    대상자2: 예, 그렇습니다.

    전도자: 그렇다면 이 선생님은 불교를 믿는다면서 실제로는 윤회설을 주장하는 힌두교와 제사를 지내는 유교도 믿고 완전 짬뽕으로 믿고 살았군요.

    대상자2: 거 참, 알고 보니 짬뽕으로 믿고 살았네요.

    전도자: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한국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불교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영향력이 큽니다. 그렇지만 불교인들도 불교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붓다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시라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의 심오한 철학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도 아니요 구원자도 아니며 고통에서 허덕이는 중생을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애썼던 안내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불교도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요, 인간학이요, 휴머니즘입니다.

    불교를 연구하다 보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는 불교가 아니라 힌두교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정통 불교와 지금 한국불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일찍이 성철스님도 봉암사 결사를 통해 석가모니가 말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은 내용을 배척하자고 결의까지 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면 법당 운영이 되겠느냐며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으나 붓다가 말하지 않고 붓다가 가르치지 않은 것은 불교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국의 많은 개혁적인 불자들이 “우리가 믿는 바가 불교냐, 힌두교냐”라고 외치고 있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아직도 대다수가 침묵만 하고 있습니다. 불교 강남포교원의 성열 원장이 쓴 ‘붓다 다르마’와 수많은 인도인을 불교로 개종시킨 암베드카르의 ‘인도로 간 붓다’를 보면 붓다가 무엇을 말했고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붓다 다르마’에 보면 ‘불교는 흔히 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 개념이 없으니 불교는 인간학이요 휴머니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특징입니다. 붓다는 “나는 오직 여기 현존하는 것만을 추구하는데 너희는 여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해 슬퍼한다”고 말해 현존하는 것을 추구할 뿐, 과거의 문제나 사후의 문제와 같은 비현실적인 것들에 천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것은 붓다의 삶 전체를 통해 수도 없이 반복돼 설파됐던 말씀입니다.

    붓다는 자아니 영혼이니 하는 것은 유명무실한 것이니 그것에 매달리는 것은 망상이라 했습니다. 붓다가 형이상학의 문제에 침묵했던 것은 현실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선 그들보다 한 차원 높은 인식적 입장에서 볼 때 토론할 가치조차 없는 말장난이라고 봤습니다.(계속)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교회는 가정, 성도는 가족” 직분자들 낮은 자의 마음으로 섬겨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의 전도, 너무 쉽습니다 <10>

    입력 : 2019-07-12 00:01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가 2017년 3월 교회에서 열린 새신자반 졸업식에서

    수료생을 인터뷰하고 있다.세계로교회 제공



    교회는 처음부터 한 가정이며, 성도는 한 가족이다.
    예수님께서는 왜 교회를 일컬어 가족이라고 하셨는가.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피로 맺어졌기 때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산 세계로교회는
    어린이집 차량을 운전하는 분과 교역자 외에는
    유급직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교회의 그 많은 일은 누가 했을까.
    장로님들이 모두 맡아서 했다.

    새벽기도 차량운행도 장로님이 했고
    교구를 맡아 구역장을 섬기는 것도 장로님이 했다.
    특히 노인구역을 전문적으로 섬기며
    차도 제대로 못 타는 어르신들을 온천에 모셔가서
    자기 돈으로 목욕을 시켜드리고 맛난 음식도 대접했다.

    세계로교회는 새신자들이 워낙 많다 보니
    나온 지 1년이 되지 않아도
    회심의 경험이 확실하고 열심과 책임감이 있으면 구역장으로 세운다.
    그래서 예수 믿고 은혜받아 구역장이 되기는 했지만,
    성경이나 교회 전반의 일들은 잘 모르는 구역장이 많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분들이 역시 장로님이다.
    혹시 그런 구역장이 세워지면
    장로님들이 그 구역의 구역원으로 들어가
    구역장이 하라는 대로 순종하며 따라준다.

    간혹 잘못하는 것들이 보이면 잘 할 수 있도록 옆에서 격려해준다.
     “대단하십니다.”
    “너무 잘하십니다.”
    “장로인 제가 따라갈 수 없겠네요.”
    그렇게 계속 격려해주니
    신앙 생활한 지 1년만 되면 다른 교회 안수집사보다 일을 더 잘한다.

    명절이 되면 장로님들은 교구 성도들에게 양말을 돌리고
    어르신들에게는 돼지고기라도 한 근 사서 선물한다.
    장로님들이 이렇게 섬길 수 있는 원동력은
    교회는 한 가족이라는 마인드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 권력은 높이 올라갈수록 다스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과 완전히 거꾸로다.
    목사는 장로님을 섬기고,
    장로님은 성도들을 섬겨야 한다.
    세상 권력이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삼각형 구조라면,
    교회는 목사와 장로들이 아래로 내려오고
    성도들은 위로 올라가는 역삼각형 구조가 돼야 한다.

    따라서 우리교회는 장로나 안수집사 직분을 세울 때
    직분을 받는 분들이 돈을 내서 뭔가 하는 게 없다.
    일단 장로, 집사가 되면 ‘완전히 죽었다’는 생각으로 일한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시키는 것은 무조건 해야 하는,
    종 가운데 종으로 세워진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도 예산이 허락하는 한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직분자들은 교회에 일이 생기면 24시간 가리지 않고 달려온다.
    새벽 2시에 전화를 해도 5분 안에 달려와 일을 처리하고 전화로 결과를 알려준다.

    이처럼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다는 것은
    교회가 필요로 하면 뭐든지 다 하겠다는 헌신의 다짐이다.
    ‘나는 성도들의 발을 씻어주는 종’이라는 생각으로 뛰는 것이다.

    집안에서 부모는 자녀들을 철저하게 섬긴다.
    열심히 돈 벌어서 등록금을 대주고 밥도 해주고 옷도 사준다.
    때로 자녀들이 투정을 부려도 잘 타이른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있는 부모는 공감할 내용이다.
    아이가 아침 7시에 깨워달라고 하면 아무리 깨워도 늦장을 부리는 경우가 있다.
    도저히 못 일어나니까 안쓰러운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자라고 30분 뒤에 다시 깨운다.
    그러면 30분 늦게 일어났다고 성질을 부린다.
     “엄마, 왜 지금 깨워요!”
    자기 잘못은 오간 데 없고 다짜고짜 엄마 탓부터 한다.
    자녀가 늦장을 부려서 허겁지겁 뛰어가는데도
    엄마는 혹시나 배가 고프지는 않을까 걱정이 돼
    뭐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애가 탄다.
    이게 부모의 마음이다.
    이게 섬기는 어른의 마음이다.

    열심히 교회사역을 감당하시는 한 장로님이 계셨다.
    건축일을 하다가 그만 어려움을 당하게 됐다.
    다행히 장로님의 부인이 음식을 참 잘했다.
    어느 분이 황토로 지은 집을 무료로 빌려주고
    6개월 후부터 이익이 나면 약간의 돈만 달라고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게 자리는 얻었는데 음
    식점을 열 자본이 없었다.
    간판 하나 달 돈도 없었다.

    장로님은 혹시 구역 식구들에게 누라도 끼칠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구역원들이 자기 일처럼 장로님을 돕기 시작했다.
    몇몇 성도는 간판을 달아주고, 어떤 사람은 식당 집기를 사줬다.
    어떤 사람은 조리대를 설치해줬다.
    이런 성도들을 보면서 장로님이 감격해 눈물을 글썽였다.
    “손 목사님, 제가 이렇게 교인들의 사랑을 받아서 어떻게 합니까.”

    평소에 장로님이 교인들을 철저하게 섬겼기에
    이제는 교인들이 장로님을 떠받드는 것이다.
    이처럼 장로님과 성도들은
    마치 한 가족의 형님, 오빠와 같아야 한다.

    우리교회는 장로석을 따로 두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 교회에 온 사람들은
    6개월이 지나도 누가 장로인지조차 모른다.
    장로들은 예배 전 밖에 서 있다가 성도가 오면 뛰어가 반긴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은 장로이고
    그다음은 구역장, 그다음은 집사다.

    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성도들의 삶에 급속도로 변화가 일어난다.
    예수님을 믿은 자들이 감동을 받으면 믿음은 급성장한다.
    믿은 지 3~6개월이 되면 믿음이 급속도로 자란다.
    이때 초신자의 믿음이 꺾이지 않고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게 교회의 사명이고 직분자가 할 일이다.

    교회에서 섬기지 않으면 직분자가 아니다.
    직분자들은 절대로 사람을 비난하거나 비판해선 안 된다.
    ‘굴러온 돌이 어디 박힌 돌을….’
    이런 텃세는 부리지도,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교회는 시장터가 아니다.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




    전도를 위한 대화 이렇게…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믿는 것

    전도자: 붓다는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 없다는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붓다는 중생의 현실 문제와 동떨어진 사변철학을 멀리했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사변적인 문제는 “명분에도 맞지 않고 도리에도 맞지 않고 수행의 근본도 맞지 않고 지혜로 향하지도 않고 깨달음의 길도 아니며 열반으로 인도하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아들로 태어나 존재의 실상을 깨달아 생사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자유를 얻으려 했던 붓다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지 어떤 신이나 절대자를 떠받들지 않습니다. 붓다는 자신을 신격화하거나 절대화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던 인물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당시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불교를 원시불교 근본불교 초기불교라 부릅니다. 이게 정통불교입니다. 정통불교는 붓다의 성도(成道)로부터 입멸 후 30년까지의 불교를 말합니다. 경전으로는 ‘팔리삼장’과 ‘아함경’이 있습니다. 이는 구전되다가 1세기 중반에 문서화된 것입니다.

    붓다의 사상을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하느냐, 사회적 차원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뉩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전개되는 지역에 따라 남방불교 북방불교로 구분해 불렸고, 전개되는 국가에 따라 인도불교 중국불교 일본불교 한국불교 티벳불교로도 불립니다. 붓다가 깨달았던 경지를 이생에서 체득하려고 하는가, 지금보다 좋은 세상에 태어난 다음 생에서 성취하려는가에 따라 선불교와 정토불교로 나뉘게 됩니다.

    대상자1: 불교에 인격신 개념이 없다는 사실은 처음 듣습니다. 결국 불교는 인간학이자 휴머니즘을 중시하는군요. 그래도 불교에는 경전이 있지 않습니까.

    전도자: BC 486년 붓다가 세상을 떠나자 스승의 장례를 치른 비구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붓다의 가르침을 훼손하지 않고 잘 보존하기 위해 경전을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500명의 고승이 모여 만든 것이라 해서 오백결집이라 합니다. 이게 노래와 암송으로 구전되다가 최초로 문서화된 것이 BC 35년부터 AD 32년 사이라고 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450년이나 구전된 후 경전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붓다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난 뒤인 BC 386년, 최초로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 차이로 비구니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납니다. 이 분열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불교가 원시불교 초기불교 근본불교로 불리는 정통불교입니다. 정통불교는 붓다의 말씀을 대체로 그대로 전하고 있는데 붓다는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주력했습니다.

    붓다가 말한 것은 현실 세계입니다. 그 외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영혼이나 윤회 등은 “단지 말로 설명이 있을 뿐이요. 물어도 알 수 없고 의혹만 증폭시키는 것이니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붓다 다르마’라는 불교 전문서적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선이니 악이니 정의니 양심이니 신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들은 그런 것을 필요로 하거나 그것을 말해야 할 처지에 따라 말하는 것일 뿐 선악의 실체도 없고 정의나 양심의 실체도 없으며 신이나 영혼 같은 것은 구체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체가 없는데도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망상입니다. 불교인들이 기적을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불교적이지 못한 무지의 소치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불교의 사고로 말하는 세상에는 기적과 같은 현상이 있을 뿐이지 기적은 없습니다.”

    붓다는 힌두교의 윤회설에 대해 “알 수도 없고 증명되지도 않은 것이니 망상이며 카스트 제도만 공고화시킨다”면서 “인간이 만든 제도 중 가장 사악한 제도가 카스트제도와 윤회설”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붓다 다르마’라는 책에 나왔듯 오늘날 붓다가 말할 수 없다고 침묵했던 문제를 말하고 붓다가 유보했던 문제들에 대해 어떤 확정적 단언을 내린다면 그것은 불교일 수 없습니다. 붓다가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침묵했는데 그 문제를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사상은 될 수 있어도 불교는 아닙니다.(계속)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