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는 고난의 연속이다. 많은 목회자가 바윗덩이처럼 묵직한 고난의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적당히 타협하거나 주저앉는다. 문제를 합리화하거나 잘못을 성도나 외부 탓으로 돌린다. 미워하고 증오하며 원수를 갚으려 하면 목회는 더욱 어렵게 된다.
지난 35년간 목회에서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험난한 가시밭길에서 길어 올린 진리는, 고난의 압력을 이겨낼 힘은 오직 무릎 꿇고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목회자가 영권(靈權)을 가지려면 인본주의를 멀리하고 자신의 야망을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함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2009년 인천 송도에 교회를 개척한 지 10년 만에 2000명이 넘는 성도들이 모였다. 11차례 ‘50일의 기적’ 기도회를 진행하며 전국 중소형교회에 영적 활력을 불어넣고 목회 희망을 제시하게 된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1960년 경남 거제도 송진포리에서 태어나 7남 2녀, 9남매 중 일곱째로 자랐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보건소장을 지냈다. 광복 후엔 미군정사령관 존 하지 중장의 통역을 했고 6·25전쟁 때는 야전병원 원장으로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아버지는 격변의 시대를 거치며 고향 거제도에 정착했지만 가정적이지 못했다. 신앙생활도 게을리 했다.
어머니는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신 마산 문창교회에서 훈련받았다. 매일 밤을 기도로 지새우곤 했다. 어린 나는 매일 어머니를 따라다녔다.
내가 출석한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소속 거제 송진교회였다. 초등학생 때 밤이 되면 교회 뒷동산에 올라가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과 별빛을 보며 세상을 비추는 목회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장목중학교 2학년 다닐 때 갑자기 교회에서 반주를 맡았다. 반주자가 도시로 떠난 것이다. “철아, 니가 반주해라.” 풍금을 만지고 놀던 나는 “예”하고 무조건 순종했다.
쉬운 찬송가 3곡을 골라 열심히 연습하니 기적같이 4부로 칠 수 있게 됐다. 문제는 주일날 발생했다. 어설프지만 연주가 가능한 3곡을 목사님께 드렸는데, 그만 다른 찬송을 부르시는 게 아닌가.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매일 풍금 연습을 했다. 1개월간 열심히 기도하며 연습했더니 놀랍게도 대부분의 찬송가를 칠 수 있게 됐다. 그때부터 주일학교와 학생회 예배, 대예배 풍금연주를 도맡아 했다.
그러던 중 목사님이 외지로 나가시고 후임자로 당시 부산 고신대 신학생이었던 김철봉 전도사님이 주말마다 오셨다. 그분은 난생처음 보는 세계지도를 펼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철아, 니는 지금 산으로 둘러싸인 동네에 살고 있지만 봐라, 세상 넓데이. 저 바다를 건너면 큰 도시도 있고, 비행기를 타고 가면 다른 나라도 있데이. 너는 세계를 꿈꾸며 살아야 한데이.”
그때부터 나는 세계를 다니며 선교하는 목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안타깝게도 김 전도사님은 신학교를 마친 뒤로는 거제도에 오시지 않았다.
외롭고 힘든 시간이 시작됐다. 청소년 시절 산과 바다밖에 없는 그곳에서 매일 밤 끝이 보이지 않는 적막감 가운데 울며 기도했다. 그곳에선 중·고등학교를 마치면 어부나 농부가 되는 길밖에 없었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 19세가 될 때까지 거제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을 정도로 낙후된 마을이었다.
공부를 마치면 산에 소를 풀어 놓고 소나무를 바라보며 내 맘대로 영어설교를 한다고 외쳤다. 비가 오는 날엔 한 손에 소고삐와 우산을 잡고, 한 손엔 영어단어장을 들고 공부했다.
그러나 내게 신학교에 갈 수 있도록 안내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상가상 아버지의 병환으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아, 어떻게 하면 신학교에 갈 수 있을까.’ 나무를 하러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가면 풀밭에 주저앉아 주르르 눈물만 흘렸다. “하나님, 이 작은 자를 기억해 주이소. 목사가 되고 싶은데 길이 없다 아임미꺼.” 그렇게 한참을 기도하는데 나를 찾는 방송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