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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영권(靈權)이다 <1>-<10> / 김의철 송도가나안교회 목사

영국신사77 2019. 5. 30. 00:54

중2 때 “세계 다니며 선교하는 목사가 되겠다”

목회는 영권(靈權)이다 <1>

입력 2019-04-11 00:01



김의철 송도가나안교회 목사가 1975년 장목중학교 2학년 시절 경남 거제 송진교회 앞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당시 김 목사는 세계선교를 펼치는 목회자가 되겠다며 기도했다.


목회는 고난의 연속이다. 많은 목회자가 바윗덩이처럼 묵직한 고난의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적당히 타협하거나 주저앉는다. 문제를 합리화하거나 잘못을 성도나 외부 탓으로 돌린다. 미워하고 증오하며 원수를 갚으려 하면 목회는 더욱 어렵게 된다.


지난 35년간 목회에서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험난한 가시밭길에서 길어 올린 진리는, 고난의 압력을 이겨낼 힘은 오직 무릎 꿇고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목회자가 영권(靈權)을 가지려면 인본주의를 멀리하고 자신의 야망을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함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2009년 인천 송도에 교회를 개척한 지 10년 만에 2000명이 넘는 성도들이 모였다. 11차례 ‘50일의 기적’ 기도회를 진행하며 전국 중소형교회에 영적 활력을 불어넣고 목회 희망을 제시하게 된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1960년 경남 거제도 송진포리에서 태어나 7남 2녀, 9남매 중 일곱째로 자랐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보건소장을 지냈다. 광복 후엔 미군정사령관 존 하지 중장의 통역을 했고 6·25전쟁 때는 야전병원 원장으로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아버지는 격변의 시대를 거치며 고향 거제도에 정착했지만 가정적이지 못했다. 신앙생활도 게을리 했다.

어머니는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신 마산 문창교회에서 훈련받았다. 매일 밤을 기도로 지새우곤 했다. 어린 나는 매일 어머니를 따라다녔다.

내가 출석한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소속 거제 송진교회였다. 초등학생 때 밤이 되면 교회 뒷동산에 올라가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과 별빛을 보며 세상을 비추는 목회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장목중학교 2학년 다닐 때 갑자기 교회에서 반주를 맡았다. 반주자가 도시로 떠난 것이다. “철아, 니가 반주해라.” 풍금을 만지고 놀던 나는 “예”하고 무조건 순종했다.

쉬운 찬송가 3곡을 골라 열심히 연습하니 기적같이 4부로 칠 수 있게 됐다. 문제는 주일날 발생했다. 어설프지만 연주가 가능한 3곡을 목사님께 드렸는데, 그만 다른 찬송을 부르시는 게 아닌가.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매일 풍금 연습을 했다. 1개월간 열심히 기도하며 연습했더니 놀랍게도 대부분의 찬송가를 칠 수 있게 됐다. 그때부터 주일학교와 학생회 예배, 대예배 풍금연주를 도맡아 했다.

그러던 중 목사님이 외지로 나가시고 후임자로 당시 부산 고신대 신학생이었던 김철봉 전도사님이 주말마다 오셨다. 그분은 난생처음 보는 세계지도를 펼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철아, 니는 지금 산으로 둘러싸인 동네에 살고 있지만 봐라, 세상 넓데이. 저 바다를 건너면 큰 도시도 있고, 비행기를 타고 가면 다른 나라도 있데이. 너는 세계를 꿈꾸며 살아야 한데이.”

그때부터 나는 세계를 다니며 선교하는 목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안타깝게도 김 전도사님은 신학교를 마친 뒤로는 거제도에 오시지 않았다.

외롭고 힘든 시간이 시작됐다. 청소년 시절 산과 바다밖에 없는 그곳에서 매일 밤 끝이 보이지 않는 적막감 가운데 울며 기도했다. 그곳에선 중·고등학교를 마치면 어부나 농부가 되는 길밖에 없었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 19세가 될 때까지 거제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을 정도로 낙후된 마을이었다.

공부를 마치면 산에 소를 풀어 놓고 소나무를 바라보며 내 맘대로 영어설교를 한다고 외쳤다. 비가 오는 날엔 한 손에 소고삐와 우산을 잡고, 한 손엔 영어단어장을 들고 공부했다.

그러나 내게 신학교에 갈 수 있도록 안내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상가상 아버지의 병환으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아, 어떻게 하면 신학교에 갈 수 있을까.’ 나무를 하러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가면 풀밭에 주저앉아 주르르 눈물만 흘렸다. “하나님, 이 작은 자를 기억해 주이소. 목사가 되고 싶은데 길이 없다 아임미꺼.” 그렇게 한참을 기도하는데 나를 찾는 방송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주님만 의지하고 따른다는 믿음으로 역경 버텨

목회는 영권(靈權)이다 <2>


김의철 송도가나안교회 목사가 1980년 2월 교육전도사 시절 서울 상록장로교회 중·고등부 수련회를 인도하고 있다.


“철아, 서울 사는 이모라 카더라. 30분 뒤에 전화가 올 끼다. 늦지 않게 오그라.” 마을 이장댁에서 수화기를 들었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이모가 서울로 올라오라 했다.

그렇게 1978년 난생처음 거제도를 벗어나 배를 타고 마산까지 간 뒤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철아, 서울 가면 사람들이 코 베어 간다 카더라. 조심해라이.” “예, 알겠습니더.” 어머니 말씀대로 나는 정말 사람들이 다가오면 코부터 잡았다.

서울에서의 삶은 모든 게 생소했다. 밤이 되니 자동차와 냉장고 소리가 났다. 신기했다. 창동 근처 하평교회에 출석했는데 청년 중 신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자신이 다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한신 교단 소속 직영신학교인 한양신학교에 나를 소개했다.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등록금으로 쓰라며 돈을 부쳐주셨다. 어려워진 가정형편에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만든 돈이었기에 쓸 수 없었다. 돈을 돌려보내며 편지를 썼다.

“어머니, 저는 목사님이 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보내셔서 엘리야를 먹이셨듯 학비도 주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독학이 시작됐다. 당시 신학교 교무처장인 김갑수 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 지금 당장은 등록금이 없습니다. 일단 입학을 시켜주시면 갚겠습니다. 주님께서 불러 주셨으니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과연 선지학교였다. 피아노와 영어가 가능했던 나는 김 목사님이 사역하던 성북교회 교육전도사로 특채됐다. 신학교 옆에 기숙사도 있었다. 주변의 사랑의 손길로 생활했다.

한양신학교 2학년 때 입대를 했다. 경기도 파주에서 군 생활을 했는데 연대 군종병으로 밤낮없이 복음전파에 힘썼다.


제대 직전 결혼했다. 아버지가 많이 아프시고 어머니를 비롯해 모든 가족이 서울에 온 상황이었다.

요즘은 신학대학원을 졸업해야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지만, 당시는 3년 단독목회를 하면 가능했다. 졸업하자 의정부의 한 교회에서 담임목회자 청빙이 들어왔지만 개척을 선택했다.

1986년 개척지를 찾기 위해 서울 변두리를 걷고 또 걸었다. 버스 탈 돈도 없었다. 당시엔 ‘교회 개척을 하려면 100군데 이상은 돌아봐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렇게 무작정 돌다가 상계동 들판까지 갔다.

낡은 옛집이 즐비했다. 쓰레기장 같은 빈터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터를 아주 싸게 빌렸다. 추운 겨울 눈을 맞아가며 보름간 쓰레기를 치웠다. 문제는 천막이었다. 기도 중 선배 목사님이 자기 교회에 와서 간증하라고 했다. 간증을 마쳤더니 5000원을 주시면서 교회개척에 보태라고 했다.

그 돈으로 천막을 샀다. 그리고 손수 천막을 치고 세계선교교회라는 간판을 달았다. 입당하는 날 목사님들이 오셔서 “세계선교교회가 아니라 빈민교회라고 해야겠다”고 했다. 그곳에서 1년간 고생하면서 목회하는데 상계동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교회는 결국 철거됐다.

그때 교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상가로 갈 전세금을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상가를 계약했다. 하지만 그는 돈을 주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는 돈도 없으면서 자기를 과시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계약은 파기됐고 빌려서 충당한 계약금마저 갚아야 했다. 방법이 없었다. 전세금을 뺐다. 신혼살림은 상계동 길바닥에 내놨다. 아내는 처가로 가고 나는 거리를 헤매는 신세가 됐다. 정말 사는 게 힘들었다. 그렇게 교회 문을 닫고 나니 돈 걱정 안 하는 목회를 하고 싶었다.

1987년 목회지를 수원으로 옮겼다. 보증금 100만원에 월 6만원 하는 지하 33㎡(10평) 공간을 빌려 예배를 시작했지만, 주님만 믿고 따라가야 한다는 철학은 바뀌지 않았다. 자립할 때까지 생활비를 지원하겠다는 교회가 있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목사님, 생활비를 신경 써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주님만 믿고 한번 살아보겠습니다.”

간이의자 10개를 놓고 시작한 교회에 1년 만에 10여명이 모였다. 2년 차엔 그 옆 새로운 건물 132㎡(40평)로 옮겨갔고, 3년 차엔 50명이 모였다. 개척 5년 차엔 전세 7000만원 하는 2층 공간을 단독으로 쓰게 됐다. 그러나 더 큰 고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무리하게 결정한 교회 건축으로 엄청난 시련

목회는 영권(靈權)이다 <3>

입력 : 2019-04-25 00:06

김의철 송도가나안교회 목사가 1991년 5월 경기도 수원 인계동으로 예배당을 옮긴 뒤 이전예배를 드리고 있다.


목사였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했다. 빨리 안정된 삶을 살고 싶었다. 아들과 딸 두 아이가 있지만, 인형 하나 사 주지 못하고 키웠다. ‘이러다가 아이들 대학이나 보낼 수 있을까’ 두려움이 몰려왔다. 빨리 성공해 그 힘으로 선교하는 목사가 되고 싶었다. 교회를 건축하고 싶어 부지를 달라고 기도하며 땅을 찾아다녔다.

교회개척 8년 차인 1996년 경기도 수원 영통에 991㎡(300평)을 매입하고 교회 건축에 들어갔다. 지하 1층, 지상 1층의 509㎡(154평)짜리 건물이었다. “수없이 이사했는데 이젠 내 교회가 생겼으니 이사 안 가도 된다. 세를 올려 주지 않아도 된다!” 매일 교회 주변을 돌았다.

성도도 100여명 모이고 번듯한 교회건물을 가졌다. 하지만 내 영은 지쳐가고 있었다. 너무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일까. 이해되지 않는 우울증이 찾아왔다. 기도해야 하는데 기도가 되질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불안하고 초초했다. ‘아, 내가 이걸 얻으려고 교회를 세웠나.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데 이것을 지켜내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이런 마음이 드니 영성이 점점 흐릿해졌다.

교회 건축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 토지 잔금을 치렀지만, 토지주가 근저당을 풀어주지 않았다. 땅을 분할해 우리 교회와 빌라건축업자에게 매매했기 때문이었다. 잔금을 받아 다른 곳에 쓰느라 근저당을 못 풀어 준다고 했다.

교회도 교회지만 빌라건축업자는 근저당에 걸려 빌라를 팔지를 못하고 부도가 날 상황이었다. 그래서 빌라건축업자와 땅주인이 찾아와 애원했다. “목사님, 교회 옆에 붙어있는 땅까지 사 주시면 근저당을 풀어드리겠습니다. 싸게 팔게요.”

돈이 없었지만, 그 방법 외에는 근저당을 풀 길이 없었다. 싸게 준다는 말에 땅 욕심도 생겼다. 성도의 집을 담보로 돈을 대출받아 495㎡(150평)를 당시 9000만원에 매입했다.

기도도 깊이 못하고 영적으로 바닥 상태에서 내린 결정은 훗날 엄청난 시련으로 다가왔다. 교회 재정이 부족해 은행 이자가 밀리기 시작했다.

그런 차에 성도들이 시험에 빠졌다. 교회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교인의 선행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목사님, 제가 돌침대 대리점을 하는 사람한테 돈을 빌려줬는데 돈을 갚지 않아 돌침대 3개를 가져왔습니다. 허리도 안 좋으신 것 같은데 하나 드리겠습니다.” 처음에는 미안해 사양했지만, 허리가 많이 아픈 차에 반복해서 권유하니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런데 여집사 한 분이 교회 옆 사택에 왔다가 돌침대를 보고는 시험에 들었다. “교회가 어려운데도 목사님이 비싼 돌침대를 사고 재정을 흥청망청 쓴대.” 성도들도 그때부터 시험에 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담보를 내준 성도들은 불안하니까 담보를 풀어달라는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믿음 없는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갔고 교회 내에 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다. 정말 그곳이 싫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교회를 매각해 부채를 갚는 길뿐이었다. 그래서 성도들과 의논해 교회건물을 매각하기로 했다. 아는 목사님께 이런 사실을 이야기했다.

“오, 김 목사. 마침 내가 아는 목사님이 교회건물을 사려고 준비하고 있었어. 그분을 소개시켜주지.” 얼마 후 그 목회자와 교회 건물 매매계약을 했다. 계약 조건은 계약금만 받고 잔금은 교회 땅과 건물을 담보로 돈을 빌린 뒤 받는 것이었다. 부채는 건물에 들어올 목회자가 책임지기로 했다.

계약이 체결된 뒤 재정을 맡고 있던 모 집사가 찾아왔다. “목사님, 저한테 돈 좀 빌려주십시오. 제 형편이 무척 어렵습니다.” 참으로 당황스러웠다. 안타까운 심정에 계약금 중 일부를 빌려줬다. 그랬더니 며칠 후 그 집사가 또다시 찾아왔다. “목사님, 사정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조금 더 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집사님,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이 돈은 하나님의 성전을 내놓고 받은 돈입니다. 부채를 갚고 남은 돈으로 다른 성전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 돈은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아닙니다.”

김의철 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교회도 돈도 빼앗기고 절망뿐이던 ‘눈물의 2년’

목회는 영권(靈權)이다 <4>

입력 : 2019-05-02 00:06

김의철 목사가 1997년 경기도 수원에 교회를 건축한 후 가족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그러나 교회건축의 기쁨은 잠시였고 건축과정의 문제로 우울증이 찾아왔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한 재정 집사가 나 몰래 교회를 매입한 목회자를 찾아갔다고 한다. 교회를 넘겨받은 목사는 잔금을 내게 주지 않고 재정 집사에게 주기로 약속했다는 게 훗날 경찰 조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순진하게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교회 담보대출로 수표를 받고 등기 이전을 해주기 위해 법무사 사무실로 갔다. 등기 이전에 필요한 서류를 넘긴 뒤 수표를 받았는데 교회를 매입한 목회자가 입을 열었다. “수표 좀 볼 수 있을까요.” 아무 생각 없이 보여줬는데, 그만 수표를 받아 채더니 문 앞에 대기시켜 놓은 차를 타고 도망쳐 버렸다. ‘아니, 목회자라는 사람이 지금 무슨 해괴한 짓을 한 거야.’

법무사 사무실의 등기 이전 절차를 중단했다. 그리고 서류를 가져왔다. 이런 사실을 노회에 보고했다. “김 목사, 당장 고소를 하시오.” 며칠 후 수표를 뺏어간 목사를 절도죄로 고소했다. 경찰 조사가 시작되자 그는 수표를 돌려주겠다고 했다. 노회도 문제를 잘 풀어보자며 중재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교회를 넘겨받은 목사가 돈을 빌려주지 않아 불만을 품은 재정 집사를 접촉한 것이다. 그 후부터 수표를 돌려주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않고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노회도 중재한다고 했지만, 재산 욕심 때문인지 일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어느 날 노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 목사, 교회를 매입한 목사와 이야기가 다 됐소. 수표와 교회 이전 서류를 교환하는 자리를 만들 테니 수원 모 대학 주차장으로 오시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하니 법무사 사무실이나 은행이 낫지 않겠습니까.” “어허, 그러면 일 처리가 복잡해져요. 나만 믿고 나오시오.” “그럼 교회 열쇠와 서류를 가져갈 테니 뺏어간 수표를 꼭 가져오라고 해주십시오.” “걱정하지 말고 서류와 열쇠만 가져오시오.”

주차장에 도착하니 노회 임원들이 한쪽에 서 있었다. 교회를 넘겨받은 목사가 다가왔다. “교회 열쇠와 서류를 가져왔소?” “네, 여기 있습니다. 이제 뺏어간 수표를 주십시오.” 하지만 그는 돈은 주지 않고 숲 쪽으로 갔다. 또다시 당할 순 없었다. “다 드렸으니 돈을 주셔야 할 게 아닙니까. 세상에 이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때였다. 갑자기 내게 돈을 요구했던 재정 집사와 불만을 품고 교회를 이탈한 몇몇 신도가 뛰쳐 나왔다. 교회를 넘겨받은 목사가 돈을 꺼냈다. “자, 김 목사. 돈 여기 있소.” 재정 집사가 나를 향해 돌을 들고 위협하더니 돈을 낚아챘다. 그리고 교회를 넘겨받은 목사도, 재정 집사도 황급히 사라졌다. 혼자 나오라고 했던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됐다.

다리가 풀렸다. ‘아, 도대체 이게 무슨 망조란 말인가. 교회 건물과 열쇠는 저 사람에게 넘어갔고 돈은 재정 집사가 가져갔다. 이제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목사가 됐다.’

수치스러웠다. 죽고 싶었다. 그때부터 빈털터리 상태에서 2년간 눈물 흘리며 경찰서와 검찰청을 오갔다. 속이 타들어 갔다. 그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돈을 사랑하며 안정된 삶을 위해 목회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말이다.

내 잘못을 절대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서 주님께 항의했다. “주님, 왜 제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제가 잘못한 게 있단 말입니까.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정말 제게 이러셔도 되는 겁니까!”

어둠의 터널이 계속됐다. 한 달이면 끝나겠지 하며 보낸 시간이 2년이나 흘렀다. 내가 경멸스러웠다. 사방이 온통 어두움뿐이었다. 모든 게 싫었다. 빨리 죽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광야에 던져진 존재처럼 모든 희망을 잃은 상황에서 마음 한구석에서 그럴싸한 생각이 떠올랐다. ‘20일 금식기도를 하면서 죽자.’ 경기도 수원 칠보산기도원으로 들어갔다. 정말 죽으려고 금식기도에 돌입했다. 마음의 분노 때문에 기도는 뒷전이었다. 혓바닥이 갈라지더니 기력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몸이 축 처졌다. 금식 17일째 되던 날이었다. 얼굴을 찡그린 채 힘없이 소나무길을 걷는 중이었다. 갑자기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김 목사, 네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하는지 아느냐?”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이젠 제 야망 아닌 주님 위한 목회하겠습니다”

목회는 영권(靈權)이다 <5>

입력 2019-05-09 00:08



2003년 12월 춘천 가나안교회 설경 사진. 김의철 송도가나안교회 목사는 1999년 춘천감사기도원장으로부터 이곳 부지를 받아 가나안교회를 설립했다.


“네가 왜 이 고통을 당하는 줄 아느냐.” 분명한 주님의 음성이었다. 1999년 10월 죽기 위해 금식기도를 했던 나는 아무런 답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또다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십자가를 아느냐.” 입을 열지 못했다.

“억울하고 부끄럽고 힘들지.”

“흐흐흑. 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모르면서 어떻게 십자가를 전하는 목회자라고 할 수 있느냐.

 십자가는 잘못한 다른 사람을 위해 억울함과 부끄러움, 고통을 끝까지 참는 것이란다.” “오, 주님….”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가슴의 답답함과 어둠이 스르르 사라졌다. 미움도, 증오도 사라지니 가슴이 뻥 뚫렸다.

“주님, 이제야 알겠습니다. 목회에서 가장 큰 행복은 주님을 얻는 것입니다. 이제부턴 야망을 위해 목회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주님을 위해서만 목회하겠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내가 꼭 붙잡고 있던 아집을 내려놓게 했다. 사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겪으신 처절한 희생 앞에 내 안의 미움과 분노는 모래 한 줌, 아니 티끌도 안되는 것이었다.

“목사님, 금식기도를 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금식기간이라도 오셔서 집회를 해주십시오.” 예전에 한두 번 갔던 춘천감사기도원에서 연락이 왔다.

금식 18일째 되는 날 기도원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춘천으로 향했다. 주님을 다시 뜨겁게 만나고 십자가가 내 삶에 들어오자 강단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집회를 하던 중 20일이 끝나 죽을 먹었다. 기도원장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목사님, 저희가 이 기도원 땅을 놓고 10년간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 ‘내가 준비된 사람을 보낼 테니 기다리라.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이 땅을 목사님께 주라고 하십니다.”

“네?” 지난 2년간 땅 때문에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던 것이 떠올랐다. “허허. 원장님, 제가 땅 때문에 죽음의 문턱까지 갔습니다. 혹시 부족한 제 설교에 은혜를 받으셨다면 제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크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그 감정은 일시적일 수 있습니다. 3개월간 냉정하게 기도해 보시고 그때도 맞다 싶으면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기도원 대지만 1만6528㎡(5000평)이 넘었다. 당시 시가로 60억원이었다. 일시적 감정에서 그런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땅만 생각해도 알레르기 반응이 났다. 토지대장은 더 이상 보기도 싫었다.

3개월 후 감사기도원에서 연락이 왔다. “목사님, 집회를 한 번 더 해주셔야겠습니다.” “그러죠.”

집회를 마치고 내려왔는데, 기도원 원장님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확실합니다. 3개월간 기도를 했는데, 이 땅을 목사님께 드리라고 합니다.” “원장님이 이 땅을 제게 주시면 원장님의 자녀들한테 버림받을 겁니다. 다시 기도해 보세요.”

그런데도 요지부동이었다. 내가 그 땅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주님, 도대체 이게 무슨 뜻입니까. 2년간 제가 땅 때문에 경찰과 검찰을 오갔습니다. 분명 저 땅을 제가 받게 되면 또다시 소송전이 벌어질 것입니다.’

기도 중에 주님의 다른 뜻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장님, 정말 이 땅을 제게 주실 생각입니까.” “예, 목사님이 어떻게 쓰시든지 드리겠습니다.” “제가 땅 때문에 고통을 당했던 것 아시지요. 그런데도 제게 주셔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이 드리라고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자필로 제게 땅을 넘긴다고 명확하게 써주십시오. 제가 땅을 받게 되면 법인을 만들고 교회를 개척한 뒤 선교사역을 할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땅은 기도원 원장님과 딸 4명의 공동명의로 돼 있었다. 그중 2명은 내게 소유권을 이전하는 데 찬성했지만 2명은 반대했다. 이는 재산권을 두고 복잡한 소송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유권 이전에 반대하는 딸들이 거세게 들고 일어났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네가 붙잡고 있는 것을 다 버리라”

목회는 영권(靈權)이다 <6>

입력 : 2019-05-16 00:05

김의철 송도가나안교회 목사가 2003년 춘천 가나안교회에서 밤 집회를 인도하고 있다. 김 목사는 목회사명을 회복하고 매일 영성집회를 인도했다.


2000년 12월 강원도 춘천으로 목회지를 옮겼다. 춘천 감사기도원을 개조해 가나안교회를 개척했다. 더 이상 예전과 같이 목회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인본주의를 철저히 버리고 오직 믿음과 영성으로만 목회하겠다.’ 그래서 매일 새벽과 저녁 두 번씩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복잡한 토지 소유권 문제를 푸는 실마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2년 동안 수원에서 교회를 뺏기며 겪었던 고통에서 나왔다. 그때의 치욕스러운 경험들이 땅 문제를 해결하는 데 모두 쓰인 것이다.

하나님께선 깊은 기도 중에 이런 질문을 하셨다. “내가 너에게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느냐.” 열심히 심방하고 전도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답을 못하고 망설였다.

그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네가 내 곁에 머무는 것이다.” 그 말씀이 내 가슴에 박혔다. 그 의미를 깨닫고 한참 동안 울었다.

그 전엔 내가 주의 일을 한다고 하다가 지칠 대로 지쳤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이 주님의 일이 아니라고 말씀해주셨다. 주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좋아서, 그냥 주님 곁에 머무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가능하면 내 생각대로 앞서서 일하려 하지 않았다. 그냥 교회에 머물며 기도하는 시간을 늘려갔다. ‘그래, 지금까진 세상을 얻기 위해 목회를 했다. 이제부턴 주님을 얻기 위해 하자.’

기도하는데 이런 감동을 주셨다. “지금까지는 네가 교회를 통해 먹고 살려고 했다. 지금부터는 교회를 위해 죽으라.” 그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고민했다. ‘교회를 위해 죽으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기도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 제가 40일 금식기도를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십시오.” 주께서 큰 감동을 주셔서 금식 작정을 했다. 그러나 막상 40일간 금식할 생각을 하니 두려움이 엄습했다. 금식하다 죽는 사람도 있었고 정신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 제가 금식하다가 죽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의 두 자녀와 아내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너의 아들딸, 아내는 너와의 관계 이전에 나의 아들딸이다. 왜 걱정하느냐.” “춘천의 교회를 이렇게 개척했는데 교회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너의 교회가 아니라 나의 교회다. 네가 할 일은 기도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마음이 편안해졌고 2001년 9월 1일부터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주님, 금식기도를 시작할 때 고통스럽지 않고 들것에 실려 다니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4일째 되는 날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뼈마디가 아프고 창자가 꼬였다. 속에선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럴수록 강단 앞에 나아가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해주세요.”

기도가 끝나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냄새나던 입 안쪽에서 달콤한 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침을 삼키니 머리부터 모든 고통이 스스르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음이 편안해졌고 고통이 줄어들었다. 그 은혜를 안고 금식하며 매일 두 번씩 예배를 인도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지팡이도 짚지 않고 매일 예배를 인도하며 40일 금식기도를 마쳤다.

금식이 끝나자 주님이 물으셨다. “너 왜 금식했느냐.” “주님을 얻기 위해서 했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붙잡고 있는 것을 다 버리라!”

그때 나는 수원 사건을 마무리하고 약간의 돈이 있었다. 그렇게 의지했던 돈, 그것 없으면 못살 것으로 생각했던 돈을 개척교회에 줘버렸다. 그리고 나니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40세가 넘어 무일푼 빈털터리가 돼 주님만 바라보는 훈련이 시작됐다. 주님은 금식 이후 1년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빈손으로 당신만 바라보며 살게 하셨다.

정해진 수입은 없었다. 오직 주님이 주시면 있고, 안 주시면 없는 상황이 됐다. 주께서 기적을 베풀지 않으시면 아이들 학교도 보낼 수 없는 처지가 됐다.

특히 생활비와 학비가 필요할 때면 가슴이 저렸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부탁하거나 빌리지도 않았다. 어차피 없으니 그냥 기도만 했다. 그러면 꼭 필요한 돈만 주셨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벼락같이 내린 축복

목회는 영권(靈權)이다 <7>

입력 : 2019-05-23 00:07

김의철 송도가나안교회 목사가 2007년 2월 강원도 춘천 경강교회에서 열린 가족초청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40일 금식이 끝나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훈련이 시작됐다. 꼬박 1년 동안 바깥에 나가지 않고 교회에만 머물며 기도훈련에 전념했다. 물질을 초월하는 믿음의 훈련도 3~4년간 철저히 받았다.

주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새벽기도 제단을 쌓고 밤 8시부터 11시까지 간절히 기도했다. 365일 그렇게 기도의 불을 이어가며 빈손으로 주님만 바라봤더니 교회에 축복이 오기 시작했다. 성도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고 교회 부지 문제도 모두 해결됐다. 교회 재산도 많아졌다.

‘아, 부르심을 받은 목회자는 정말 돈 걱정하면 안 되는구나. 빈손으로 주님만 바라보고 살았더니 축복을 주시는구나.’ 돈 때문에 노심초사했던 과거의 삶이 얼마나 큰 잘못이고 죄악인지 깨달았다.

2000년 12월 춘천가나안교회를 개척하고 5년쯤 지났을 때 자립했다. 너무 감사한 마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개척을 하든지 좋은 일을 하든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회 모임에 갔더니 경강교회 담임목사가 와서 하소연했다. “교회를 빼앗길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저는 해결할 능력이 없어 교회를 사임하겠습니다.” 예배당을 뺏긴 고통을 알기에 내가 좀 알아보겠다고 했다.

경강교회는 40년 된 농촌교회로 노인들이 많았다. 순박한 어르신들을 보니 어린 시절 자랐던 거제 송진교회가 생각났다. 가장 큰 문제는 교회 부지의 명의가 경강교회가 아닌 40년 전 임시당회장 이름으로 돼 있다는 점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분의 후손이 교회 땅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교회는 혼란에 빠졌다.

담임목사는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었다. 성도들과 사이도 좋지 않았다. 사임을 앞두고 퇴직금을 놓고 실랑이도 벌이고 있었다.

“김 목사님, 우리 교회 좀 제발 지켜주세요.” 할아버지 할머니 성도들이 애원했다. 그들에게 교회는 삶의 전부였다. 퇴직금을 받기 위해 노인 성도들과 대립하는 담임목회자, 얄팍하게도 토지소유권을 주장하는 목회자 후손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쌍한 시골 성도들이 보였다.

“목사님, 더 이상 성도들과 대립하지 마십시오. 퇴직금은 교회개척자금 형식으로 저희 교회에서 지급하겠습니다.” 그렇게 그 목사는 2000만원을 받고 교회를 떠났다.

남은 문제는 토지 소유권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경강교회는 40년 전 미국 선교사가 당시 3만원을 줘서 땅을 매입한 교회였다. 엉뚱하게도 임시 당회장을 맡았던 인사가 토지를 자신의 명의로 등기해놓아 문제가 생겼다. 그의 후손을 만났다. “제가 개인적으로 어느 정도 사례를 하겠습니다. 그 땅을 교회 명의로 바꿔 주시지요.” “법대로 하려면 하시오.”

어쩔 수 없이 소송이 시작됐다. 40년 전 사건을 바로 잡는 일은 쉽지 않았다. 증거를 찾아내고 증인을 세우는 게 만만치 않았다. 특히 증인으로 나선 초창기 개척 전도사가 이중적인 행동을 하는 바람에 고통을 겪었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어떠한 고통을 당하든 어떤 욕을 먹든 상관없습니다. 이 교회만 빼앗기지 않게 해주십시오. 시골 분들이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만 해 주십시오.”

과거 수원에서 교회 건물과 땅을 빼앗기고 2년간 겪었던 수치스러운 경험이 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됐다. 성도들은 내가 변호사비를 써가며 자신들의 교회를 지키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벌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2년간의 소송 끝에 2심에서 ‘경강교회가 존치하는 한 토지에 대한 재산권을 후손들이 행사할 수 없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사실상 승리였다.

이 일을 하면서 새벽기도와 밤 기도회를 쉬지 않았다. 매일 기도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 춘천가나안교회와 경강교회는 거리상 멀지않았다. 두 곳을 오가며 새벽기도를 인도했다. 주일이 되면 양 교회를 오가며 통합 예배도 드렸다.

정말 초대교회가 따로 없었다. 영적으로 회복되자 경강교회 성도들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목사님, 교회 생활이 참 행복합니다.” 여기저기서 행복하다는 고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매일 밤 기도회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늘어났다. 경강교회의 모든 문제가 마무리된 2007년 송구영신예배 때였다.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청빙받은 교회 원로목사-장로들 극심한 알력

목회는 영권(靈權)이다 <8>

입력 2019-05-30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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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철 송도가나안교회 목사(왼쪽 두 번째)가 2006년 춘천 가나안교회에서 미국 리젠트대 목회학 박사 학위 취득 감사예배 후 동창인 미 공군 채플린 군목 일행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춘천가나안교회와 경강교회의 문제가 정리되자 교회는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2007년 마지막 날 송구영신 예배 때 ‘새해의 말씀’으로 말씀 책갈피를 잡았다.

히브리서 6장 14절이었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나는 이미 결혼을 하고 자식까지 장성했는데 무슨 번성일까’ 궁금했다.

8개월 후 대신선교대학원장인 나성균 목사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김 목사, 인천의 중형교회가 담임 목회자를 청빙한다네. 내가 가고 싶지만, 상황이 그렇지 못해. 기도하는데, 자꾸 김 목사 얼굴이 떠오르는데 이력서를 넣어보는 게 어떻겠소.” “아이고, 목사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춘천에서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어허, 내가 기도를 많이 하고 어렵게 전화하는 거야.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일단 기도부터 하시게.” “예, 기도는 해보겠습니다.”

그날은 수요일이었다. 예배 후 기도를 하는데 세계선교의 환상이 보였다. 나 목사님께 전화했다. “목사님, 주님께서 인천에 뭔가 뜻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력서는 제출하겠지만, 그 외의 다른 것은 안 하겠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맡기겠습니다.”

3개월 후 해당 교회에서 전화가 왔다. “84명의 지원자 중 목사님이 최종 3명 안에 드셨습니다. 청빙위원들이 목사님 교회를 탐방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청빙위원들이 둘러본 뒤 다시 투표했는데 나에게 압도적 표를 줬다고 했다. ‘아, 이게 하나님의 뜻인가. 내가 만약 떠난다고 하면 성도들이 울고 불고 난리가 날 텐데….’

깊은 기도를 하고 강단에 섰다.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인천의 모 교회 청빙을 받고 거기로 가야 할 상황이 됐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선교만을 위해 달려왔습니다. 요셉처럼 저를 좀 그곳으로 보내주십시오.” 웅성거렸다.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인천 교회의 공동의회를 통과했다. 2009년 1월 세계선교의 관문에서 왕성한 선교활동을 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인천으로 이사했다. 600여명이 출석하는 교회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원로목사측과 장로측이 극한 대립을 빚고 있었다.

원로목사를 만났다. “다른 목사는 나를 찾아왔는데, 김 목사만 왜 청빙과정에서 인사하러 오지 않았는가.” “저는 인본주의나 사람에 의지하는 목회를 하지 않기로 다짐한 목사입니다. 결례했다면 용서해주십시오.” “그랬군. 그럼 장로들을 모두 제명하게.” “아니, 장로를 제명한다니요?” “나는 이 교회에 평생을 바친 사람일세. 이 교회를 절대 포기하지 못해. 자네가 목회를 편안히 하려면 세 가지 조건을 이행해야 하네. 첫째는 장로 전원을 제명할 것, 둘째는 교회 안에 내 사무실을 만들 것, 셋째로 내 생활비를 더 줘야겠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돈 문제는 제가 개인적으로 어떻게 해결해 드리겠지만 나머지는 제가 결정할 사항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기도에만 집중하겠습니다.” “뭐야? 내 말을 안 듣겠다는 거야. 참고로 나는 고소·고발을 80번 이상 해본 사람이야.”

장로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두 파로 양분돼 있었다. “원로목사를 더 이상 만나지 마십시오. 이곳에선 저희 말을 들으셔야 목회가 가능할 겁니다.” “목회는 하나님 보고 하는 것이지 장로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건 아니지요.”

원로목사는 소속 노회에 압박을 넣어 내가 위임목사가 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결국 위임목사 청원이 부결됐다. 그러자 성도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두 패로 나뉜 장로들도 나를 음해하기 시작했다. 서로 자신의 편에 설 것을 요구했다.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자 협박까지 했다. “김 목사님, 밤길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심지어 예배시간에 꽹과리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곳은 교회가 아니라 지옥이었다. 강단에서 설교하면 공동묘지 앞에 선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의 얼굴엔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어느 주일 밤 예배를 마치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교회 재산 놓고 싸우느니 빈손으로 나가겠다”

목회는 영권(靈權)이다 <9>

입력 : 2019-06-06 00:07
김의철 목사가 2009년 4월 인천 연수구 송도동에 개척한 송도가나안교회. 김 목사는 극심한 분쟁을 겪던 인천의 모 교회를 사임하고 월세로 2층 상가를 얻어 개척했다.

“내 영이 이곳을 떠났다!”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그렇다면 제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제가 떠나겠습니다.”

이날 반대파들이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느라 꽹과리를 쳤다. 신학교도 나오지 않은 가짜 목사라고까지 나를 음해했다. 졸업장과 졸업앨범까지 보여줘도 위조라며 괴롭혔다. 심지어 허위 고소까지 했다. 교회 개혁과 갱신이라는 이름으로 기득권과 재산에 눈이 먼 사람들의 추악한 행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진리를 위한 싸움이라면 목숨이라도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재산을 두고 싸우는 것이라면 더 이상 싸우지 않겠습니다.”

2년 전 춘천에서 기도하다가 경제의 관문인 송도국제도시에 선교의 관문이 되는 교회를 세워야겠다는 꿈이 생각났다. 이튿날 월요일 아침 송도로 차를 몰았다. 송도에 교회를 세우라는 하나님의 뜻이 계신다면 예비한 장소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송도로 들어가는 첫 다리를 건너자 부동산이 있었다. 교회 자리를 알아봤다. 예비된 장소는 없었다. 다 돌아보고 허탈한 마음으로 뒤돌아가던 중 마지막 모퉁이에 비워진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그 건물 1층에 부동산이 있었다. “이 건물 2층이 비어 있던데 교회가 가능할까요?” 부동산 주인이 바로 건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증금 2억원에 월 250만원을 달라고 합니다.” “그럼 등기부 등본 확인을 좀 해주십시오.”

3일 전에 건축 회사에서 공사비를 받지 못해 26억원의 가압류를 걸어놓은 게 확인됐다. 그 결과 보증금을 많이 넣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됐다. 그래서 보증금 2000만원에 월 450만원으로 잠정 결정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장로 한 분이 나를 찾아왔다. “김 목사님, 저희 장로들끼리 의논을 좀 했습니다. 어쨌든 교회에서 이탈하는 쪽에 30억원을 주기로 했습니다. 이곳에 남겠습니까. 아니면 30억원을 받고 나가시겠습니까.” “필요 없습니다. 저는 숟가락 하나도 갖고 나가지 않습니다. 나가되 빈손으로 나갑니다.”

그러자 나를 지지하던 성도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 악한 놈들에게 교회 재산을 다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헌금을 더 많이 했습니다. 목사님, 개척하시려면 여기서 가까운 곳에 해 주십시오.”

그때 이렇게 말했다. “교회 재산을 나누지 마십시오. 나는 여기에서 가까운 곳에 개척도 하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교회 재산을 나눠 나오신다면 다른 목사님을 청빙하고 교회를 세우십시오. 나는 그 돈을 받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한 것은 현실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크게 두 가지를 생각했다. 첫째, 장로들이 주는 돈을 받으면 또다시 ‘바지사장’이 돼 소신 있는 목회를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싸워서 재산을 나눈 그 자금으로 교회를 개척하면 당장 처음에는 편할 수 있겠지만 과연 하나님의 축복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10년 뒤를 생각해보니 그 돈을 받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길바닥에 나앉는 일이 있더라도 빈손 들고 오직 복음의 능력으로 교회를 세운다.’ 세상 앞에 돈 없어도 개척할 수 있고 복음의 능력으로 교회가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성도들에게 선포했다. “여러분, 제발 싸우지 마십시오. 나는 이곳을 떠납니다. 하나님의 영이 이곳을 떠났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시는 것입니까.” “송도국제도시로 갑니다.”

송도국제도시는 그곳에서 버스를 타면 1시간, 택시로 40분 거리에 있었다. 그러자 나를 지지하던 성도들이 교회 버스라도 가져가게 해달라고 했다. 그때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깨끗하게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거부했다. 성도들이 수십년 신앙생활을 한 교회가 바로 집 앞에 있는데 그것을 다 버리고 송도까지 오시라고 할 순 없었다. 그것도 상가교회로 말이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너는 왜 꿈을 점점 줄여가느냐” 질책하신 주님

목회는 영권(靈權)이다 <10>

입력 : 2019-06-13 00:03
김의철 송도가나안교회 목사가 2011년 인천 연수구 송도동 상가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2009년 4월 인천 연수구 송도동 이안상가 2층에서 송도가나안교회 첫 주일예배를 드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120명이 넘는 성도들이 버스와 택시를 타고 몰려든 것이다. “왜 가까운 교회를 두고 이 먼 곳 상가교회까지 오셨습니까.” “목사님을 따라가야 영혼이 살 것 같아서 왔습니다.”

이분들은 분쟁 중인 인천 모 교회에서 수년간 영적 갈급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내 아픔에 지쳐 있을 겨를이 없었다. 이분들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줘야만 했다. 춘천에서처럼 매일 새벽예배와 밤예배를 드렸다.

춘천의 교회는 성도가 많지 않았지만 대지가 5000평이 넘었다. 3개월 만에 사임한 인천의 교회도 제법 큰 건물을 갖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목회하다가 작은 상가에서 다시 시작하려니 쉽지 않았다. 그래도 행복했다. 첫 예배를 드리고 송도 안에 성전 건물을 달라고 기도를 시작했다. “주님, 송도가나안교회가 세계 선교를 하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건물을 주십시오.”

하지만 송도의 상황을 알면 알수록 마음이 힘들어졌다. 송도는 종교부지 외에선 교회를 지을 수 없도록 법으로 묶어놨다. 나는 매주 한 건물을 지정해 놓고 교회로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처음 땅 밟기 기도를 했던 곳은 송도전시관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연수구에서 어린이도서관으로 사용하기로 한 곳이었는데 당시는 비어 있었다. 그래서 그 땅을 밟으며 3년 가까이 기도했다. 그러나 3년 후 예산이 편성돼 도서관으로 꾸며졌다. 2012년 어느 겨울밤 11시가 넘었는데 눈이 내렸다. 성도들과 금요성회를 마치고 눈을 맞으며 그곳을 도는데 유리창 너머로 도서관 집기가 보였다. ‘이제 이곳을 더 이상 돌 수 없겠구나.’ 성도들은 잠잠해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대로 헤어지면 안 될 것 같았다. “자, 성도 여러분.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찬양을 힘차게 부릅시다.” 성도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누웠는데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희망을 붙잡아야만 했다.

이튿날부터 다른 건물을 찾았다. 주인도 모르게 그냥 밤마다 돌았다. 그러다 현실이 보이기 시작하면 또 다시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송도는 땅값도, 건물가격도 비쌌다. ‘송도를 벗어나 다른 곳을 찾을까’ 생각해 실제로 알아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기도를 하는데 주님께서 물으셨다.

“너는 왜 꿈을 점점 줄여가느냐. 꿈을 갖는 게 돈이 드냐, 힘이 드냐.“ 주님은 내가 현실과 타협하는 걸 원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추슬렀다.

그러던 차에 상가 건물주가 교회를 비워달라고 했다. 마침 송도 근처 한 교회가 건축 후 어려움에 부닥쳐 예배당을 매각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 교회 목회자를 만났다. “조만간 1억원을 입금하지 않으면 70억원짜리 교회 건물이 경매로 넘어갑니다. 김 목사님이 맡아 주시지요.” 은행에 확인해보니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 건물을 넘겨받기로 했다. 계약서를 쓰고 계약금으로 우리가 가진 전 재산인 1억원을 입금했다. 성도들은 좋아했다. ‘아, 이제 예배당이 생기나보다.’ 그런데 이틀 후 그 교회 목회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계약을 해지해야겠습니다.”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이제 갈 곳이 생겼다고 다들 좋아했는데 계약이 파기됐다니.’ 교회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성도들도, 나도 힘이 쭉 빠졌다. 하지만 주저앉아 있을 순 없었다. 예전에 하는 대로 매일 예배를 드렸다. 상가를 비워줘야 할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갈 곳이 없었다. 진퇴양난이었다.

“주님,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주님의 교회이니 주님이 알아서 하세요. 이제부터 저는 아무것도 안 하겠습니다. 교회 문을 닫으라고 하시면 닫겠습니다.”

그렇게 매일 기도하고 예배만 드렸다. 불안한 마음으로 1주일을 보내는데, 당시 안양대 신대원에 다니던 아들이 달려왔다. “아빠, 이것 좀 보세요.” 컴퓨터 화면을 보니 송도 국제신도시 안에 있는 한 교회가 건축 후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채권자인 은행에 의해 경매가 신청됐다는 내용이었다. 경매일까진 딱 5일이 남아 있었다.

김의철 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83078&code=2311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