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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지 않는 떨기나무 (上, 下)

영국신사77 2018. 8. 2. 18:03

 

             

 [신학과 과학의 만남] 불타지 않는 떨기나무 (上)

 

                                                       

-하나님의 구원 역사-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사위가 돼 40년 동안 양떼를 치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양 무리를 이끌고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러 ‘기이한 현상’을 목격한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나무가 타지 않는 신기한 현상을 본 것이다. 맑은 정신상태에서 시각적 자극이 주어지는 불꽃은, 아무리 살펴봐도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출 3:1∼3). 불에 타지 않는 기이한 현상을 신학과 과학의 관점에서 상·하로 나눠 분석한다.

떨기나무가 빛을 발하면서 타는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그것이 연소되지 않았다는 것에 과학자들은 주목하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모세가 목격한 기이한 현상은 다음 세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초자연적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무가 타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와,

  △떨기나무 주변의 성분 가운데 일부가 공기 중에서 형광이나

     인광과 같은 냉광(冷光)을 내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그리고

  △발광생물이 떨기나무에 붙어서 냉광을 방출했을 것으로 보는 분석

 

  등이 그것이다.

첫번째 견해에 접근하기 위해선, 모닥불의 경우가 이해를 돕는 한 사례일 수 있다. 모닥불이 활활 탈 때 주위를 밝게 비추는 빛 에너지와 함께 열 에너지도 격렬하게 발산되는데, 이런 현상을 산화반응이라 한다. 산화반응은 공기중의 21% 정도를 차지하는 산소가 특정 물체와 결합하는 반응으로써, 여기에는 느린 산화반응과 빠른 산화반응으로 나타난다.

전자의 경우, 철이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해 산화철이 되는 반응 즉, 철이 녹슬어가는 반응과 같다. 오랜 시간 동안 반응이 진행되기 때문에 빛이 발생하지 않는다. 후자는 촛불이나 모닥불처럼 빠르게 빛과 열을 내면서 반응이 진행되는 경우를 말한다. 이 반응은 강력한 빛과 격렬한 열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 특징이다. 활활 타고 있는 모닥불에 종이나 옷과 같은 천조각을 집어넣으면 열에너지에 의해 타버린 후 검은 재만 남게 된다. 나중에는 모닥불 자체도 한 줌의 재로 변한다. 열에너지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뜨거운 불속에 들어갔다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열에너지에 의해 화상을 입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옷자락 하나 타지 않은 사람들이 성서에 등장한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바로 그들이다(단 3:20∼21).

당시 느부갓네살 왕은 금 신상을 세운 후 백성들로 하여금 섬기게 하였는데, 다니엘의 세 친구들만은 우상에 절하는 것을 거절했다. 이를 지켜본 왕은 화가 나서 풀무를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겁게 달군 뒤 이들을 결박해 산 채로 불속에 던져넣도록 명령했다(단 3:20). 풀무란 어떤 물질을 가열하기 위해 벽돌로 만든 일종의 용광로(blazing furnace·NIV)를 말한다.

왕의 명령에 따라 세 사람을 결박한 후 풀무불에 던져넣는 과정에서 이들을 붙잡았던 사람이 풀무에서 뿜어져나온 열에너지에 의해 타죽고 말았다(단 3:22). 풀무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대목이다. 왕은 주변 신하들과 함께 그들이 풀무 속에서 결박이 풀린 채 걸어다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겼다. 더욱 놀란 것은 분명히 불속에 던져진 사람은 세 사람이었는데, 불속에서 걸어다니는 사람은 네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단 3:25). 세 사람과 함께 있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사자’로 성서신학자들은 보고 있다. 성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 네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단 3:25)

이를 지켜본 왕은 불속에서 급히 나오라고 외쳤다. 당시 왕의 심리적 상태에 대해 성서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단 3:26)

이들은 피부에 화상도 입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머리카락도 그을리지 않았고 겉옷의 빛깔도 변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불속에 던져졌으나 격렬한 열에너지에 의해 타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모세가 목격했던 불 붙은 떨기나무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떨기나무에 비록 불이 붙었으나 불에 타지 않았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과학이 이 견해에 동의한다면, 이는 열역학 제1법칙(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어긋나는 현상으로써 기적에 해당되는 영역이다. 떨기나무가 불에 탄다는 것은 빛에너지와 열에너지를 동시에 발생시킨다는 의미이고, 따라서 여기서 발생되는 열에너지에 의해 떨기나무는 당연히 연소돼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열에너지가 제로의 상태를 유지했다는 뜻이다.

불붙은 떨기나무와 풀무 속 세 사람의 사건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하나는 불이 붙었으나 떨기나무가 타지 않았고, 풀무 속에서 세 사람은 화상도 입지 않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양쪽에 ‘하나님의 사자’가 현현했다는 것이다. 전자는 불 붙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타나셨고(출 3:4), 후자는 풀무 속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출현했다(단 3:25).

 

 

 



  * 호렙산과 시내산은 


모세는 양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해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착한다(출 3:1). 그곳에서 떨기나무와 ‘신묘 조우’가 이뤄진다(출 3:2). 여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산 호렙 즉, 호렙산은 흔히 시내산과 혼용되는 경우가 많다.

호렙산은 시나이 반도 남서쪽 끝에 위치한 해발 2290m의 지금의 ‘예벨 무사’(Jebel Musa)로 추정된다. ‘모세의 산’이란 뜻이다. 모래 투성이의 황무지 건너편에 위치한 비옥한 초원이 펼쳐진 시내산 근방의 고원지대를 일컫는다. 이곳은 가뭄 때 유목생활을 하는 베두인족이 즐겨 찾는 지역이다.

호렙산과 시내산에 대해서는 대략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이 두 산은 명칭만 다르고 지역은 같은 이명동지(異名同地)라는 설이 있다. 둘째,동일한 산맥 줄기에 솟은 2개의 큰 산이라는 견해도 있다. 셋째,호렙은 넓은 의미에서 지칭할 때 사용되고 시내는 호렙 중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를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따라서 호렙과 시내산은 서로 다른 2개의 산이 아니라 적어도 한 산을 지칭하되 서로 다른 명칭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호렙산이 특별히 ‘하나님의 산’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그 산이 원래 신성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그곳에 나타나셔서(출 3:4∼5) 모세에게 출애굽의 소명을 부여했고 율법을 수여했기 때문에 히브리 민족이 성별해서 부른 데서 비롯됐다.

 

여기에 등장하는 떨기나무는, 시내 광야 전역에서 흔하게 자라는 아카시아 종류의 키 작은 가시덤불을 가리킨다. 키 작은 가시덤불은 애굽에서 노예로 비참한 굴종의 삶을 살았던 히브리 민족을 상징하는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떨기나무에 여호와의 사자가 임한 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탄식을 들으시고 구원해주실 것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남병곤 편집위원  2005-12-13 오후 7:12:05

 

 

 

[신학과 과학의 만남]불타지 않는 떨기나무 (下)

 

                   -한낮의 냉광은 성령의 작품-

 

 





떨기나무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으나 ,나무는 불에 타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양떼를 치던 모세에 의해 목격됐다.
 
이른바 ‘타지 않는 불’에 대한 과학적 접근으로서 초자연적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는 견해(본보 14일자 33면 참조)에 이어, △떨기나무 주변의 성분 가운데 일부가 공기 중에서 형광이나 인광과 같은 냉광(冷光)을 분출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 △발광생물이 나무에 붙어서 냉광을 방출한 것으로 보는 주장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촛불이 타면서 빛을 내거나, 전기 에너지가 빛에너지로 바뀌는 백열등과 같은 발광체는, 빛에너지 뿐만 아니라 열에너지도 함께 방출한다. 그러나 빛을 내는 발광현상 중에서 열에너지를 동반하지 않는 발광현상도 있는데, 이를 냉광이라 한다. ‘차거운 빛’이란 의미다. 대표적인 것으로, 형광이나 인광 등을 들 수 있다. 형광은 물질이 빛의 자극에 의해 발광하는 현상이고, 인광이란 어떤 물체에 빛을 발사된 뒤 그 빛(원인)이 제거된 후에도 장시간 발광하는 것을 말한다.

떨기나무 주변에서 냉광을 분출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는, 비록 떨기나무에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으나 그 나무가 불에 타지 않았다는 데 중점을 두는 과학적 접근이다. 모세가 목격한 대로 떨기나무에 불꽃이 피어올랐다면, 반드시 떨기나무는 불꽃이라는 열에너지에 의해 연소됐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연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떨기나무 자체의 연소반응에 의해 빛이 생성되지 않았고 주변의 냉광에 의해 빛이 방사됐을 것이란 주장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모세는 떨기나무에서 분출하는 빛을 본 것이 아니라 그 나무 주변에 있던 냉광의 발광체가 방사하는 빛을 보았다는 해석이다. 

여기서 모세가 목격한 빛은 구체적으로 파장이 0.4∼0.75㎛ 의 영역에 해당하는 빛이다. 빛은 비교적 파장이 짧은 전자기파의 일종으로 0.4㎛보다 짧은 파장을 통상 자외선이라고 하고 0.75㎛보다 긴 것을 적외선이라고 한다. 사람의 눈으로는 자외선과 적외선이 보이지 않는다.

냉광을 통한 발광은 빛의 세기가 비교적 약해 어두운 밤에는 잘 보이지만, 해가 떠 있는 낮에는 식별하기가 사실상 곤란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세가 불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목격한 시간은 분명히 낮이었다. 양떼를 이끌고 광야 서쪽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향했다는 기록(출 3:1)은 당시 시간이 낮이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를 목격한 시간이 밤이 아닌 낮이었기 때문에, 이 견해는 ‘과학의 적절성’ 확보에 다소 어려움이 뒷따른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반면 발광생물이 나무에 붙어서 냉광을 방출했을 것으로 보는 주장도 과연 과학의 적절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열을 동반하지 않고 빛을 내는 냉광 중에는 형광과 인광 외에도 생물체에 의한 ‘생물발광’도 있다. 생물발광에는 반딧불이, 조개물벼룩, 물똥꼴뚜기 등이 있다. 이들은 하등동물에서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100여종에 달할 만큼 다양하게 분포돼 있다. 식물에는 버섯 등 균류가 대부분이며 전체 50여종이 존재한다. 생물발광이란 동·식물의 체내 유기화합물이 효소작용에 의해 산화되면서 방출되는 에너지가 빛에너지 형태로 분출되는 현상을 말한다. 일종의 광화학반응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발광생물이 떨기나무에 붙어서 냉광을 방출했다고 보는 견해에 동의한다면 미생물이나 세균류, 버섯이나 균류,혹은 반딧불이 등이 떨기나무에 붙어서 그것들이 방출하는 빛을 모세가 보았을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문제는 촛불이나 모닥불과 같이 연소반응에 의해 생기는 빛은 그 세기가 비교적 크기 때문에 밤에는 물론 낮에도 식별이 가능하지만 ,냉광 즉,생물발광은 빛의 세기가 작기 때문에 낮에는 사실상 구분하기 힘들다는 데 있다. 아무튼 떨기나무 주변의 냉광이든 그 나무에 붙은 냉광이든, 그것을 식별하는 것이 낮에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떨기나무 불꽃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타지 않는 떨기나무의 과학적 요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두 가지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타지 않기 위해 냉광이 필요했다면, 특히 그것이 낮에도 식별되기 위해서는 증폭이 뒷따라야 한다. 냉광은 자연현상에 의해 가능하나, 증폭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견해에 동의하는 과학자들은, ‘냉광의 증폭’에 성령께서 특별히 개입했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도움말 주신 분 △김영호 연구원(한국표준과학연구원 유기분석 그룹)

                                          남병곤 기자 
nambgon@kmib.co.kr[2005.12.20.]

 

 

 

 


                                      

 * 모세가 선택받은 이유는? 


이드로의 사위로서 장인의 양떼를 돌보게 된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출 3:4·God called?NIV)을 받기까지 거의 40년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목자일에 충실했다. 애굽의 왕자 신분으로 교육 받고 양육된 모세에게 이런 목자의 생활은 사실상 견디기 힘든 ‘비천한 수모’였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애굽의 위대한 지도자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크리스천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세에게 있어서 40년의 세월은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하나님의 계획(출 3:7∼9)을 성취하기 위한 연단의 과정이었다. 그분의 계획은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모세처럼 지극히 낮은 데에서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며 자신의 일에 충실하다가, 소명을 받은 인물들이 성서에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다. 모세와 비슷하게 양치기를 하다 부름 받은 다윗(삼상 16:11∼13)을 비롯, 타작 마당 가운데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기드온(삿 6:11∼24)도 있다. 그런가 하면 엘리사는 밭을 갈다가(왕상 19:19), 베드로는 어부로서 고기를 잡다가(마 4:18) 선택 받은 인물이다. 마태는 세리로서 세금 징수에 충실하다가(마 9:9) 소명을 받기도 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인물들을 살펴보면, △어떤 직종에 종사했는지 △직업은 무엇이었는지 △사회적 신분은 어느 정도였는지 △혈통적으로 가문의 맥을 잇고 있는지 △학문의 지평은 깊고 넓었는지 △가진 것은 어느 정도나 되는지 등에 대한 점은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일에 대한 감사와 충성의 정도가 잣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살전 5:18)이야말로, 바로 그분으로부터 소명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임을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남병곤 편집위원 2005-12-20 오후 3:3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