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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주요 왕

영국신사77 2017. 4. 13. 22:10

아르다시르 1세 [Ardashir I]

 

?~?

3세기 중엽에 활동한 고대 페르시아에 있던 사산 제국의 창시자(224~241 재위).


사산의 아들이거나 후손이며 페르시스의 주요군주인 고키르의 가신이었던 바바크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바크가 아르다시르를 다라브게르드(지금의 이란 다라브 근처)라는 도시의 군사령관인 '아르가바드'(argabad)라는 자리에 앉히자, 그는 주위로 세력을 확장해 여러 이웃도시를 장악했다. 한편 바바크는 고키르를 죽이고 왕을 자처했다. 맏아들 샤푸르가 왕위를 계승하도록 허락해달라는 바바크의 요청을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 5세는 거부했지만, 샤푸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페르시스 왕이 되었다. 그후에 벌어진 샤푸르와 아르다시르의 투쟁에서 샤푸르는 죽고, 아르다시르가 208년에 페르시스 왕위에 올랐다. 그는 다라브게르드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뒤 이웃한 케르만 지역과 페르시아 만 연안의 땅을 점차 정복했다. 그는 구르(지금의 피루자바드)에 도읍을 정하고, 도시 이름을 아르다시르콰라로 바꾸었다.

그후 아르다시르는 이란 서부로 진격해 이스파한·케르만·엘리마이스·메세네 등을 점령했다. 다시 페르시스로 돌아온 그는 224년 호르미즈다간(위치는 알려지지 않음)에서 파르티아 군대와 싸워 아르타바누스를 죽이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 직후 그는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에 입성해 '이란의 왕중왕'이 되었다. 아르다시르는 아들이자 후계자인 샤푸르 1세와 함께 사산 제국을 세웠다.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그가 무자비하고 위대한 군인이었으며 유능한 왕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많은 도시를 세우거나 재건했으며, 운하와 다리를 건설했다고 알려져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여러 개의 거대한 암석 비문에 그의 통치를 찬양하는 기록이 있다. 그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지정했고, 조로아스터교 승려인 토사르와 함께 조로아스터교 경전을 집대성하여 통일된 교리를 확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르다시르 성서 The Testament of Ardashr〉·〈토사르의 편지 The Letter of Tosar〉 등은 그들이 쓴 것이다. 아르다시르는 사원 후원자로서, 조로아스터교의 전설에는 현인으로 등장한다. 파흘라비 문자로 씌어진 5세기의 책 〈카르나마기 아르다시르 Karnamag-i Ardashr〉에서 그는 사산 왕조의 창시자로 칭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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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푸르 1세 [Shapur I]
 
(아)Sbr (라)Sapor.

?~272.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 1세, 동전(3세기)
아버지 아르다시르 1세가 세운 제국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샤푸르는 아버지가 시작한 로마와의 전쟁을 계속하여 나시비스(지금의 터키 누사이빈)와 카레(터키의 하란)를 정복하고 시리아 깊숙이 진군했다. 243년 레사이나(지금의 터키에 있음)에서는 패했지만 244년에 체결된 휴전조약을 유리하게 마무리지었다. 256년에는 로마 제국의 내부 혼란을 틈타 시리아·아나톨리아·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 안티오크를 빼앗는 데는 성공했지만 발레리아누스 황제에게 격퇴당했다. 그러나 260년 에데사(지금의 터키 우르파)에서 발레리아누스와 싸워 이겨 그를 사로잡아 감옥에서 일생을 마치게 했다. 발레리아누스가 사로잡히는 모습은 그후 사산조시대 암각화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샤푸르는 동로마 지역을 계속 점령하려 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막대한 보물들과 인력을 노획하여 가져갔을 뿐이다. 안티오크 출신 포로들은 뒤에 학문의 중심지로 유명해진 곤데샤푸르 시를 건설하는 데 강제 동원되었다(→ 고덴샤프르 아카데미). 또 페르시아인들보다 뛰어난 기술을 소유했던 포로들을 강제 동원하여 그뒤 '카이사르의 댐'(Band-e Qeyar)으로 알려진 댐을 슈슈타르에 건설했다.

그는 선왕이 사용했던 '이란의 왕 중 왕'이라는 칭호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를 '이란과 비이란의 왕 중 왕', 즉 페르시아 지역 이외에서도 '왕 중 왕'이라고 칭했다. 자신의 제국에 속하는 모든 민족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종교를 찾으려 했던 것 같으며, 마니교의 창시자인 마니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다. 비문에 따르면 조로아스터교의 불[火]신전들도 건립했으며, 그리스와 인도에 기원을 둔 여러 요소들을 더하여 새롭게 부활된 조로아스터교의 기반을 넓히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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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르미즈드 1세 [ Hormizd I]

 
  별칭은 Hormizd the Brave. Hormizd는 Ormazd, Ormizd라고도 씀.

  ?~?

  3세기에 활동한 사산 제국의 왕(272~273 재위).

 

  샤푸르 1세의 아들이며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호르미즈드 아르다시르로 알려졌고 페르시아의 아르메니아 주 총독직을 수행했다. 샤푸르가 256년 이후 동로마로부터 안티오크를 점령하는 전쟁중에 호르미즈드는 중요한 지휘관 역할을 했다. 아마 이때 '용감한 호르미즈드'라는 별칭을 얻은 듯하다. 짧은 재위기간 동안 그는 마니교의 창시자며 종교지도자였던 마니의 활동에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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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 1세 [Bahram I]

 

  ?~?

  사산 왕조의 왕(273~276 재위).

 

  샤푸르 1세의 아들로, 아버지가 재위하고 있는 동안 아트로파테네 지역을 다스렸다.

 

  형인 호르미즈드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에는 조로아스터교 사제들, 특히 최고 사제인 카르테르의 지위를 강화했다.

 

  이들의 요구로 바람은 반(反)유물론적이며 금욕적인 마니교의 창시자 마니를 투옥했다. 이어 마니교도뿐 아니라 그리스도교도와 불교도들에게까지 종교적 박해를 가했다.

 

  바람 왕의 초상은 비샤푸르(남부 이란)의 암벽 조각에 새겨져 있다. 나중에 사산 왕조의 왕 나르세스가 이 조각에 새겨진 바람 왕의 이름을 지워버렸지만, 특유의 빛나는 왕관이 그의 초상임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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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르세스 [Narses]
 
  Narseh라고도 씀.

  ?~302경.

  사산 제국의 왕.

 

  그의 재위기간(293~302)에 로마와의 40년에 걸친 평화가 시작되었다.

 

  선왕(先王) 샤푸르 1세의 막내 아들로 바람 2세가 죽자, 당시 아르메니아의 부왕이었던 그는, 바람의 아들 바람 3세와 왕위쟁탈전을 벌인 끝에 사산 제국의 왕위를 차지했다.

 

  뒤에 아르메니아의 독립지역을 점령한 후 로마에 대항했으나, 이듬해에는 실패하여 군자금과 하렘(왕의 처첩)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로마와 평화조약을 맺었고(296), 이 조약에 따라 아르메니아는 로마의 속국이 되어,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스텝(대초원 지대)은 고르디에네까지 이르는 티그리스 강 왼쪽 제방에 있는 구릉지대, 싱가라와 함께 로마 제국에 양도 되었다. 대신 나르세르는 하렘을 비롯해 잃었던 왕실을 되찾았다.

 

  40년 동안 지속된 이 평화조약에 의해, 사산인은 이 분쟁지역을 완전히 포기하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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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즈데게르드 1세 [Yazdegerd I]

 

?~?

5세기에 활약한 사산 제국의 왕(399~420 재위).

귀족들과 마기(여러 종교에 봉사하는 승려계급)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노력한 높은 지성을 지닌 통치자였다. 이때문에 그에 대해 그리스도교와 마기의 자료가 각기 다르게 평가하고 있다. 그가 그리스도교도들에 대한 박해를 중단시켰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측은 그의 인자함을 칭찬하지만 마기의 전승에 근거한 사료들은 그를 '죄인 야즈데게르드'로 표현한다. 또 그는 귀족들의 권한을 제한하려고 시도했고 귀족들의 저항이 격렬해지자 이에 무자비하게 대처했다. 그는 로마 제국과 평화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했으므로 비잔틴의 저술가들은 그를 격찬했다. 그는 호라산에서 살해된 것으로 보이며 그의 아들 중 하나인 바람 5세가 그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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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스로우 1세 [Khosrow I]

 

    (그)Chosroes Ⅰ (아)Kisr Ⅰ. Khosrow는 Khosrau, Khosru, Khusrau라고도 씀.

    별칭은 Khosrow Anshirvan(페르시아어로 '불멸의 영혼 호스로우'라는 뜻).

    ?~579

    사산 제국을 통치한 페르시아 왕(531~579 재위, 48년간).

 

                                            개요

호스로우 1세, 크리스털 메달리온(6세기), 파리에 있는 Bibliotheque Nationale ...

  위대한 개혁자이고 예술과 학문의 후원자였다.

 

                      권좌에 오르기까지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전설로밖에 전해지지 않는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호스로우의 아버지인 카바드 왕이, 이란 동쪽 지역의 헤프탈족에게 피난가던 도중에 (니샤푸르 시 가까이에서) 농부의 딸과 결혼하여 호스로우를 낳았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호스로우는 바로 그를 계승하지 못했다. 그후 왕위다툼에서 성공하여 형제들을 처형했다. 그의 아버지의 치세가 끝날 무렵, 마즈다크라는 종파의 종교혁명으로 사회적 혼란이 발생했다. 호스로우는 우선 질서를 회복하고, 이후 쇠퇴하는 사산 제국을 변혁시키려고 개혁에 착수했다.

               

 

                                     개혁

  세제개혁이 가장 중요한데, 이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도입한 로마 제도에서 본뜬 것 같다. 종전까지 사산 제국의 세금은 토지의 수확량에 따라 징수되었던 듯하다. 호스로우는 매년 변동되지 않는 고정된 세액을 확립했다. 그리고 다른 세금도 도입하여 국가수입에 안정을 기했고 납세자들에게도 공정하게 했다. 호스로우의 세금정책은 이슬람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호스로우는 관료기구도 제정비했는데 총리 아래 여러 장관들, 즉 디완을 두는 제도는 그가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재위기간 동안 보조르그메르라고 하는 유능한 수상의 보좌를 받았는데, 소설과 전설로 전해진 이 수상의 지혜와 능력은 유명하다.

 

  호스로우 치하에서 왕권의 지방분권화 과정은 역전되었고 전대에 강력한 권한을 가졌던 봉건 대영주들의 세력이 약화된 반면, 디칸이라 불리는 하급 귀족들의 중요성이 증대했다. 얼마나 많은 변화가 호스로우의 통치시기에 이루어졌고, 또 그의 역사적 위상으로 얼마나 많은 것이 임의적으로 그의 공로로 돌려졌는지 알기는 어렵다. 몇몇 사료들에 의해 주장되는 것처럼 사회계층을 성직자·전사·관료·일반백성으로 나누는, 종교적으로 인정된 이 분류법이 그의 통치하에서 법전으로 성문화되었는지 아닌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군사활동

  호스로우는 군대를 재조직했다. 4명의 총사령관을 임명하여 각각 이란의 국경선 4곳을 지키게 했다. 비잔틴 제국 및 시리아 사막에 있는 그들의 아랍 동맹국들과 접한 국경, 카프카스 산맥과 카스피 해 사이 데르벤트 시 부근에 있는 남부 러시아의 스탭 지대 인종들과 접해 있는 국경, 지금의 투르크멘 스텝 지대 부근의 카스피 해의 동쪽에는 방어성벽을 건설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으로 유명한 호스로우 통치시기에, 그의 군대는 수세만 취하지는 않았다. 호스로우는 540년 대도시 안티오크를 점령하여 잠시 동안 지배했다. 그는 수도인 크테시폰 근처에 옛 안티오크를 모방하여 새 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에 많은 죄수들을 안티오크에서 데려와 살게 했다. 호스로우는 동부에서 중앙 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인 투르크족과 연합하여 헤프탈족을 격파하고 그들의 여러 공국들에 대한 패권을 장악했다. 사산 제국의 동쪽 변경은 그의 통치기간에 옥수스 강까지 이르렀다. 또한 그는 카프카스 산맥의 아르메니아와 라지카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렀고 예멘도 정복했다. 호스로우는 그의 선임자들보다 더 직업군인에 의존했는데, 선임자들은 전쟁을 착수할 때 봉건 영주의 군대를 불러들였다.

 

                                   문화의 후원

  호스로우는 위대한 문화의 후원자였다. 529년 아테네에서 학원이 문을 닫았을 때, 수많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사산 제국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그들은 이 통치자에게 좋은 대접을 받았다. 후대에 유명하게 된 곤데샤푸르의 유명한 의학학교는 아마도 호스로우의 통치 기간중에 시작된 것 같다(→ 고덴샤푸르 아카데미). 또 유명한 내과의 부르조에를 인도로 보내 산스크리트학 문서를 수집하여 중세 페르시아어로 번역하게 했다. 체스 게임도 그가 인도에서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천문학·점성학도 호스로우의 궁전에서 번영했으며, 한 성좌표(zj-i Shahriyr라고 함)는 나중에 수많은 이슬람 성좌표의 기초가 되었는데 호스로우 통치기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아르다시르의 행동지침서 Krnmak〉와 같은 중대 필라비어로 된 몇몇 저서들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마찬가지로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베스타〉를 편찬한 것과 이 경전을 기록하기 위해 특별히 아베스타 알파벳을 만든 것도 모두 호스로우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 한다. 나아가 고대 이란의 이야기와 전설을 수집해 〈왕들의 서(書) Khwaty-nmak〉로 편찬한 것도 호스로우 시대였다고 하며, 이것이 후에 페르도우시의 불멸의 서사시의 자료로 제공된 것으로 추측된다. 페르도우시의 〈샤나메 Shh-nmeh〉에서 발견되는 몇몇 이름은 호스로우 왕가에서도 사용했는데, 이것으로 보아 호스로우가 고대전설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호스로우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의 이름을 역사상에 사실 이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 같다. 이슬람 이전의 이란 건축물로 그 기원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면 단순한 일반서민들은 호스로우가 만든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가 많은 다리·길·궁전을 건설한 것도 사실이지만, 전설 속에서 그가 지은 것으로 된 경우가 더 많다. 지금의 바그다그 근처 크테시폰에 있는 거대한 아치를 갖고 있는 유명한 궁전 타크 키스라도 호스로우 1세 때부터 내려온 것으로 보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그의 명언집과 일화집 몇 권이 아랍어와 신페르시아어 본으로 보존되어 있다. 그 안에는 그의 정의와 지혜에 대한 명성이 인용되어 있다. 그의 궁전의 화려함과 통치의 영광은, 이후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의 모범이 되었고 호스로우가 세운 많은 기구들은 이슬람 시대에도 지속되어, 이슬람 시대의 이슬람교도 군주들은 그를 이슬람 이전의 모범적 통치자로 보고 그를 본받기 위해 노력했다.

 

 

R. N. Frye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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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르미즈드 4세 [ Hormizd IV]

 
  Hormizd는 Ormazd, Ormizd라고도 씀.

  ?~590.

  사산 제국의 왕(578/579~590 재위).

 

  호스로우 1세의 아들이며 그를 이어 왕이 되었다. 고대 사료에 의하면 호르미즈드는 그의 군대와 궁전에서 가혹한 규율을 유지한 반면에 평민을 보호했다. 승려들이 그리스도교도의 박해를 요구했을 때 그는 왕관과 정부는 두 종교를 선의로 다룰 때만이 안전할 수 있다는 근거로 거절했다. 아버지를 이어 비잔틴 제국과 투르크족에 대한 전쟁을 계속했다. 비잔틴 황제 마우리키우스와 평화협상을 벌였지만 호스로우 1세가 정복한 땅 가운데 어떤 것도 양도하기를 거부했다. 588년 바람 추빈 장군은 투르크족을 물리쳤지만 다음해 동로마군에게 패배했다. 호르미즈드가 바람을 해고하자 그는 자기 부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호르미즈드는 폐위되어 살해당했다. 그의 아들이 호스로우 2세로 등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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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스로우 2세 [Khosrow II]

 
(그)Chosroes Ⅱ (아)Kisr Ⅱ. Khosrow는 Khosrau, Khosru, Khusrau라고도 씀. 별칭은 Khosrow Parvz(페르시아어로 '승리자 호스로우'라는 뜻).

?~628.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 말기의 왕(590~628 재위, 38년간).

 

                                           개요

호스로우 2세, 동전(590~628)

  치세중 사산 제국을 최대로 확장시켰다. 그러나 비잔틴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왕실 내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폐위·처형당했다.

 

                    제국의 확장

  호르미즈드 4세의 아들 호스로우는, 혼란기인 590년에 왕이 되었다. 호르미즈드의 장군 바람 쿠빈은, 라지카에서 비잔틴 군대에게 패한 뒤에 공개석상에서 국왕에게 모욕당했다. 왕의 암살로까지 치달은 보스탐과 빈도에(호르미즈드의 매형들)의 궁정반란중에, 바람 쿠빈은 왕에 대한 그의 군대의 충성서약을 철회했다. 새 왕 호스로우는 부득이 메소포타미아로 도망가지 않을 수 없었다. 호스로우의 추격자들은 그의 삼촌 빈도에의 군사전술로 더 추격하지 못했고, 마침내 비잔틴 황제 마우리키우스가 호스로우에게 군대를 보내어, 그의 적대자를 패배시켰다. 바람 쿠빈은 후에 암살당했다(→ 비잔틴 제국).

 

  불안정하고 인기 없는 호스로우는, 자신이 의존했던 빈도에를 포함하여 아버지의 살해와 관련된 사람들을 제거했다. 그는 비잔틴 군단으로 형성된 호위병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할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아르메니아에 비잔틴 사람들이 들어오는 데 대해 분개했다. 마우리키우스가 살해되고(602) 포카스가 비잔틴 황제로 즉위한 것을 구실로 이용하고, 또 비잔틴 군을 지휘하여 호스로우를 왕위에 올린 나르케스가 포카스를 승인하지 않는 사실에 용기를 얻어, 호스로우의 군대는 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를 침입했다. 메소포타미아의 비잔틴 군대는 나약하여 다라·아미다·에데사는 곧 함락되었다(604). 호스로우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히에라폴리스와 베로이아(알레포)를 점령했다.

 

  내부의 불화로 인해 동부 비잔틴 지역은 쉽게 정복되었고,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 중앙부도 페르시아군에게 짓밟혔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항구적으로 점령당하여 통치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610년 헤라클리우스가 황제가 되어 화평을 요청했을 때까지 페르시아의 진격은 계속되었다.

 

  613년 호스로우의 가장 뛰어난 장군 샤르바라즈는 메소포타미아를 다시 침공했다. 다마스쿠스가 그해에 점령되었고, 614년 예루살렘도 함락되었다. 그는 예수의 성묘를 파괴하고 예수가 못박힌 십자가를 크테시폰까지 옮겨왔다. 호스로우 자신은 그리스도교에 대해 관대했지만, 샤르바라즈는 수천 명의 그리스도교 포로가 유대교 지원군에 의해 고문당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616년 알렉산드리아가 점령되었고, 617년 호스로우의 장군 가운데 한 사람인 샤힌에게 오랫동안 포위되어 있던 칼케돈(비잔티움 반대편)이, 페르시아군에게 마침내 함락되었다.

 

  승승장구하던 페르시아인의 기세는, 헤라클리우스가 622~627년에 세운 몇 차례의 화려한 전공으로 반전되었다. 헤라클리우스는 해상권을 장악한 후, 이수스로 진출하여 아르메니아 경계선 근처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패주시켰다. 카프카스 산맥 북쪽 하자르 왕국과 동맹한 그는, 623년 다시 아르메니아를 침공하며, 칸자카 근처에서 페르시아 왕의 군대와 싸워 이겼다. 이 도시와 배화교 사원은 전통적으로 조로아스터교에 관련된 우르미아 호에 있는 사원 등과 함께 파괴되었다. 624, 625년에는 북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전투가 벌어져, 결국 사라스 강가에 있던 샤르바라즈의 군대가 퇴각했다(→ 팔레스타인).

 

  호스로우는 626년에 군대를 집결시켜, 그당시 비잔티움과 사이가 좋지 않던 아바르족과 동맹을 맺어, 한편으로는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헤라클리우스에 대항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샤힌이 패배했다. 또한 군대는 628년 헤라클리우스가 크테시폰 북쪽 113km에 위치한 왕의 도읍지 다스타기르드를 급습해 선수를 빼앗겼다.

 

  니네베 근처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지만, 비잔틴 군대가 다스타기르드에 다시 접근하자 호스로우는 도망갔다. 샤르바라즈의 도움을 요청하는 그의 편지를 비잔틴 군대가 중간에서 가로채 재원이 크게 고갈되었지만, 그는 평화조약을 거절했다.

 

  호스로우는 권위도 실추된데다 병까지 났다. 궁정반란이 일어나 샤르바라즈가 처형되고 샤힌의 시체가 모독되었다. 호스로우에게도 사형선고가 내려져 집행되었으며(628), 그의 막내 아들이며 세자인 마라단샤는 그의 눈앞에서 살해당했다. 맏아들 카바드(코바드) 2세 셰로에가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문화적·경제적 영향

  호스로우는 예술을 크게 후원했다. 그의 재임기간 중 은세공과 카펫 직조가 최고의 수준에 다다랐다. 정원을 구도로 한 거창한 카펫 '호스로우의 봄'이 여러 사료에 언급되어 있다. 파리의 프랑스 독립도서관에 있는 화려한 은접시에는 호스로우로 여겨지는 왕이 전통적인 사산 왕조의 사냥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전문가들은 타크에보스탄(케르만샤)에 있는 석굴들을 호스로우 2세 시대의 것으로 보고, 그것들을 그의 재위기간이 암석조각의 부활기였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내세웠다. 여기에는 왕의 사냥하는 모습과 하프를 켜는 사람들을 향해 꼼짝하지 않고 듣고 있는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특히 하프를 듣는 모습은 유명한 음악가 바르바드와 사르카시가 호스로우의 궁궐에서 생활했던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당시의 건축물은 주로 카스르에시린(하나킨 근처)과 하우스크쿠리 근처의 거대한 이미라트 에 호스로우 궁궐 유적지에 의해 알려졌다. 지방의 궁전으로는 요르단의 카스르 알 무샤타가 있다.

 

  호스로우는 노획물과 세금으로, 수천 마리의 코끼리·낙타·말 및 많은 여자들을 거두어들여, 거대한 부를 얻게 되었다. 아랍의 역사가 앗 타바리(9세기 활동)는 가단주금(可鍛鑄金)과 석면 냅킨 외에 루비로 다리를 받친 황금옥좌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광범위한 무역망과 개인재산의 축적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번영했다는 증거는 없다.

 

  많은 세금과 전쟁으로 인한 사회불안은, 상인계급에게 불리한 여건으로 작용했다. 무관 귀족계급의 출현으로 인해 호스로우 2세의 왕권이 약화되었고, 그의 행정개혁과 중앙집권으로 지방왕조들과 그들의 봉건 군사력이 제거되었으므로, 그가 죽은 지 12년 후에 침략해온 아랍족에 대해 대항하지 못했다.

 

  이미 611년에, 아랍족은 두카르에서 사산 왕조의 군대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라크 서부의 라흠 왕조와 시리아의 가산 왕조 등 그리스도교 아랍국이, 호스로우 2세에 의해 파멸된 것도, 이란이 아랍족의 공격에 노출하게 된 주요요인이 되었다. 아르메니아인 그리스도교도 아내에 대한 호스로우의 애정이, 12세기 시인 네자미〈호스로우와 시린 Khosrow-va-Shrn〉을 비롯해 여러 시인들의 시에서 다루어졌다.

 

                                                                                     브리태니커 백과   W. Culican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