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수에로[Ahasuerus: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
(BC 486~BC 465, 재위 21년간)
성경의 아하수에로(Ahasuerus) 왕
BC 519경~465 페르세폴리스.
페르시아의 왕(BC 486~465 재위, 21년간).
개요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이자 계승자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BC 480)
테르모필라이·살라미스·플라타이아 전투 등을 통하여,
대규모 그리스 침공을 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전쟁에서 그가 결정적으로 패배한 결과,
아케메네스 왕조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즉위
크세르크세스는 다리우스 1세와 고레스(키루스2세)의 딸 아토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다리우스가 즉위한 뒤 처음으로 얻은 아들이었다.
다리우스는 크세르크세스를 그의 형 아르타바자네스보다 더 편애해 후계자로 지명했다.
페르세폴리스 왕궁의 남쪽 현관과 트리필론(장식 계단)의 동쪽 문에 새겨진 부조에서,
크세르크세스는 후계자의 모습으로 옥좌에 앉은 아버지 뒤에 서 있다.
BC 486년 다리우스가 죽었을 때, 크세르크세스는 35세였고,
이미 12년 동안 바빌로니아를 통치한 경험이 있었다.
즉위와 더불어, 그가 가진 첫 관심사는
지난 2년 동안 반란자의 수중에 있는 이집트를 평정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 그는 다리우스 때보다 훨씬 강력한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
재위 2년째인 BC 484년, 이집트의 델타 지방을 파괴하고, 이집트인들을 징벌했다.
이때 바빌로니아에서 반란 소식이 전해졌다(→ 메소포타미아).
그곳에서 자칭 민족주의자가 반란을 일으켰고,
곧 그 후계자가 나타나 이를 계속 지도했다.
바빌로니아의 2번째 지도자 샤마시에리바는 크세르크세스의 사위에게 정복되었고,
바빌로니아는 난폭한 보복을 받았다.
바빌론의 성벽은 허물어졌고, 사원들은 약탈당했으며,
마르두크 신상은 파괴되었다.
이 행동들은 커다란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
즉 크세르크세스는 더이상 바빌로니아 신의 '가호'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리우스대제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를
페르시아 제국과 사적인 관계로 결합된 왕국으로 다루었던
(비록 총독령으로 다스렸지만) 반면,
크세르크세스는 강경한 태도로 행동했다.
사적인 결합이라는 의제(擬制)를 일단 거부한 후부터,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을 단순히 '페르시아인과 메디아인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바빌로니아의 왕과 이집트의 왕이라는 칭호를 뺐다.
다음과 같은 비문에서 크세르크세스가 암시한 것은
아마도 바빌로니아의 반란일 것이다(일부 학자는 박트리아의 소요라고 주장함).
"이들 나라(반란을 일으킨) 중에 이전부터 데바를 숭배해온 나라가 있었다.
나중에 내가 아후라 마즈다의 은총을 받아, 데바의 신전을 파괴하고 선언했다.
'데바를 경배하지 말라!' 전에 데바를 경배하던 곳에서, 나는 아후라 마즈다를 경배했다."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을 데바 신(조로아스터교 이전의 고대 신)의 적으로 선언하고,
아무런 의심없이 이들 아리안족 종교의 몰락한 신들과 바빌로니아의 신들을 동일시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존재한다. 즉 마르두크 신상의 파괴는 위의 비문에서 언급한 데바 신전의 파괴와 반드시 관련이 있는 것인가?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 다리우스보다도 더 열성적인 조로아스터교의 추종자였는가? 또는 그 자신이 참으로 조로아스터교의 신자였는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종교와 조로아스터교 사이의 관계를 묻는 것은 난해한 문제이다.
M. 몰레와 같은 학자는 문제 설정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그때의 종교는 3가지 다른 종류, 즉 엄격한 의식의 종교, 아케메네스의 비문에서 말하는 왕실 종교,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일반 민간 종교가 있었다는 것이다.
대(對)그리스 전쟁
다시 제국이 평온을 되찾자, 크세르크세스는 평화로운 활동에 전념하려 했으나,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전쟁을 부추겼다(→ 페르시아 전쟁). 추방된 그리스인의 강력한 파당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던 크세르크세스의 사촌이자 매제인 마르도니우스는, 부왕 다리우스가 생전에 마라톤에서 그리스인에게 당한 모욕(BC 490)을 복수하자고 선동했다.
감동 잘하는 성격인 크세르크세스는 측근들의 압력에 약했다. 그는 전쟁을 위해 3년에 걸쳐(BC 484~481), 외교적·군사적 준비를 꼼꼼하게 추진했다. 헤로도토스는 이때의 전쟁준비는 일찍이 없었던 대규모의 것이었다고 기록했다. 병력은 모든 속주로부터 징집되었다. 군대의 병참선 역할을 위해 해군이 만들어졌다. 왕이 이 계획에 쏟은 아낌없는 배려를 볼 때, 그가 이 전쟁을 결코 작은 싸움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원정의 진정한 목적에 대해서 후세에 많은 설명이 있었는데, 경제적인 목적은 아닐 것이라고 여겨진다. 당시 그리스는 중요한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군주 절대주의의 표현으로 보인다.
크세르크세스의 성격은, 나중에 그리스의 전설에서 왜곡되었지만, 결코 어리석거나 지나치게 낙관적이지는 않았다. G. 글로츠에 의하면, 그는 비록 분별있고 똑똑했지만, "신권(神權)에 의한 군주로서 자신에 대한 반대를 신성모독과 같이 귀찮아했고…… 흥분하기 쉬운 성격이었으며, 젊은 열정을 가지고 있던 그는, 나태함에 빠져 있었고, 자기가 싫어하는 전쟁을 일으키도록 부추김을 받았다."
재위 6년째인 BC 480년 군대의 선두에 서서 사르디스를 출발한 그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기 위해 2개의 배다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폭풍이 다리를 날려버렸고, 크세르크세스는 그 벌로 바다를 채찍질하도록 했다.
다리가 다시 만들어진 후, 그는 7일 동안 군대의 해협 이동을 감독했다. 군대 수를 헤로도토스는 500만 명이라고 했지만, 700~800척의 배가 동원된 것으로 보아, 현재는 36만 명으로 추산한다. 거대한 토목 작업으로 군대가 이동하는 길을 놓았다. 악티움의 이스트무스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파서, 험준한 아토스 산을 피해갔다.
그렇지만 이같은 대규모 병력도 소용이 없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적지에 대한 정보 부족이 원인이었고, 그리스인의 민족적 감정이 나타난 것도 한 이유였다. 몇 차례의 승리를 거둔 후(BC 480년 8월의 테르모필레 전투등), 크세르크세스는 아티카를 점령하고, 9월 21일 아테네를 약탈했다.
그러나 9월 29일 그가 먼저 싸움을 건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했다. 병참을 보급할 함대를 상실하자, 군대는 퇴각해야만 했다. 테살리아에 마르도니우스를 남겨두고, 그는 아시아로 다시 건너왔다.
다음해인 BC 479년 8월 27일 플라타이아 근처에서 벌어진 작은 전투에서 마르도니우스는 전사했고, 이때문에 점령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13년을 끌었지만, 그때 이후부터 크세르크세스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페르시아로 철수
이때의 패배를 현대 역사가들은 아케메네스 왕조 몰락의 시작으로 간주하지만, 당시로서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패배에 불쾌해진 크세르크세스는 수사와 페르세폴리스에 틀어박혔다. 이때부터 일찍이 무거운 과세로 긁어모은 막대한 자원과 부를, 그는 방대한 건설계획을 추진함으로써 더욱 소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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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의 재위 기간(1장 1절, 8장 9절)은 헤로도투스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페르시아 왕들의 역사에서는 유레가 없는 일이다.
또한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 제 3 년에 열린 대연회(1장 3절)의 기록도, 헤로도투스가 그의 책에, 페르시아 왕이 그리스를 정벌하기 위하여 회의를 소집했다고 기록한 그 날짜와 시각이 일치한다.
수산궁에 관한 묘사도(1장 6절) 고고학에 의하여 그 사실성이 입증되었다.
아하수에로 왕이 제7년(BC 479년)에 새 왕비를 맞아들인 사실(2:16)은, '아하수에로가 그리스 원정(BC 480년)에 실패한 후에 후궁(後宮 harlem)의 환락에 빠졌다'고 전하는 헤로도투스의 보고와 일치한다.
출처:톰슨성경 에스더서론의'역사성의 문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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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페르세폴리스에서는, 다리우스 때부터 대규모의 단일화된 계획에 따라, 아파다나의 거대한 테라스(청중 홀), 궁전인 트리필론, 보물창고 등이 이미 건축되고 있었다. 크세르크세스가 왕이 되었을 때, 아파다나의 외벽에 법랑 벽돌이 붙혀짐으로써 다리우스의 궁전은 완성되었다. 이때 그는 또다른 기념물, 즉 자신의 궁전을 세웠다.
다리우스의 궁전 남동쪽에 그것과 매우 비슷한 설계로 자신의 궁전을 세웠고, 또한 고고학자들이 *하렘이라고 부르는 신비로운 건물을 세웠다(크세르크세스의 보물창고로 보이는 작고 똑같은 방들이 줄지어 있음). 그리고 일백열주(一百列柱)의 홀, 즉 알현실이라는 홀 건축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의 재위 시에는 단지 벽면의 기단과 포장공사만 끝났다(벽면들과 이 거대한 다주 홀의 장식은 그의 아들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아닥사스다] 때 완성되었음). 이러한 건축물들의 양식은 다리우스 시대의 전형적인 양식보다 더 화려하고 거대화하는 추세를 보여준다.
크세르크세스의 만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리스에서 귀환한 뒤 그는 하렘에 칩거했고, 그 곳에서 벌어지는 음모 속에서 그는 사실상 하나의 볼모에 불과했다.
그는 왕비가 요구하자 자기 형제의 전 가족을 제거했다. 그러다 재위 21년째인 BC 465년, 그 자신이 장남과 함께 그의 대신 아르타바누스가 포함된 궁전의 살인집단에 의해 쓰러졌다. 다른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아닥사스다]가 그의 뒤를 이었다.
브리태니커 백과 J. -L. Huot 글
* 하렘 [harem] |
이슬람 국가들의 집에서 여자들이 분리되어 기거하던 곳.
하리미라는 단어는 여자들 자신을 가리키는 집합명사로 사용되었다. 인도에서는 하렘을 '자나나'(Zanna : '여성'이라는 뜻의 페르시아어 zan에서 유래)라고 했고, 이란에서는 안다룬(andarn : 페르시아어로 '내부'라는 뜻)이라고 했다.
서구인들은 보통 이것을 이슬람 풍습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중동에서 이슬람 문명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여성들은 공적인 생활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하렘을 안전하고 개인적인 거처로 사용했다. 마호메트는 하렘을 만든다거나 여자들을 격리시키고 베일로 가리는 것을 처음으로 생각해낸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것을 지지했고, 이슬람이 퍼져나가는 지역마다 이러한 시설이 생겨났다.
여성들에게서 공적인 생활을 박탈하는 현상은, 그 이전 시대보다 이슬람 시대의 하렘에서 더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이슬람 이전의 아시리아·페르시아·이집트에서 대부분의 왕궁 내에 하렘을 두었고, 통치자의 부인들, 첩, 시녀와 환관들이 거주했다.
이러한 왕실의 하렘은 사회적 역할뿐만 아니라, 중요한 정치적 역할도 수행했다. 통치자들은 종종 정치적 동맹관계를 굳건히 하기 위해, 하렘에 부인의 숫자를 늘렸다.
부인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아들들이 권좌에 오르도록 책략을 쓸 때면, 하렘은 궁정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경쟁 파벌간의 싸움터가 되었다. 이러한 여인들은 보통 유력한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하렘의 음모는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고, 때로는 왕조의 몰락까지도 가져오는 경우가 있었다.
20세기 초반까지, 아라비아 국가의 부유한 집안에서는 보통 넓은 하렘을 설치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부유한 집안에서는 각 부인마다 전용의 룸셋과 하인들을 거느렸고,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집에서는 거처도 작았고 개인 생활의 자유도 적게 누렸다. 그러나 아주 가난한 아라비아의 가정에서조차, 남자와 여자들을 위해 구분된 생활공간이 마련되었다. 아라비아 사회의 보수적인 요소 가운데, 하렘 제도만이 유일하게 20세기 후반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투르크 제국에서 술탄은 모든 이슬람교도들의 현세적·정신적인 지주였으며, 훈련관·행정관리 들을 두고 술탄의 어머니인 왈리데 술탄의 감독 아래 정교하게 지어진 하렘, 또는 궁전(seraglio : '울타리'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serraglio에서 유래)을 소유했다.
1926년 이후 터키에서 일부다처제를 불법화하자, 여성들을 격리시키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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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제국 제4대 왕(재위 BC 486∼BC 465) 다리우스 1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대왕이라고도 한다. 선왕 때부터 끌어 온 이집트 ·바빌로니아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BC 483년 이후로는 아토스곶[岬]의 지협(地峽)에 운하를 만들고 또 다르다넬스해협에 선교(船橋)를 가설하는 등 그리스원정(제3차 페르시아전쟁) 준비를 하였다.
BC 480년 봄 육해군을 이끌고 사르디스를 출발하여 각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살라미스의 해전에서 그리스군에 패배하자 급거 귀국하였다. 이듬해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이 플라타이아이전투에서 대패하고, 나아가 미카레에서도 패배하였으나, 페르시아 영토 그 자체는 빼앗기지 않아 국위는 여전히 융성하였다.
그러나 만년에는 왕궁에서 호화생활을 누리다가, 하렘의 음모에 휘말리어 신하에게 암살당하였다. |
네이버 백과사전
* 마르도니우스[Mardonius]
?~BC 479 보이오티아 플라타이아이.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 출신 장군이며 다리우스 1세의 조카.
다리우스의 딸 아르타조스트라와 결혼했다. BC 492년 아테네 및 에레트리아를 공격하라는 특명과 함께, 아르타페르네스의 뒤를 이어 이오니아의 사트라프(지방장관)가 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가 취해왔던 여느 정책과는 달리, 그는 '전제'정치를 일소하고 이오니아에 민주주의를 회복시킴으로써 소요의 근원을 제거했다.
그뒤 헬레스폰토스 해협(지금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아토스 산 근처에서 난파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이 때문에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페르시아 전쟁).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는 다리우스 1세의 뒤를 이은 왕 크세르크세스 1세를 부추겨 그리스를 침공하도록 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아케메네스군이 살라미스에서 참패하자, 그는 왕을 설득해 아시아로 돌려보낸 뒤,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에 남았다.
아테네를 다른 그리스 동맹국들로부터 고립시키려 했으나 실패한 뒤, 아티카에서 철수하다가 BC 479년 9월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패해 죽었다.
* 아르타바누스[Artabanus]
Ardaban이라고도 함.
?~BC 465/464.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크세르크세스 1세의 관료.
기원전 465년 왕을 시해했다. 그리스의 자료에 따르면, 아르타바누스는 먼저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다리우스를 죽이고, 그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복수할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그는 먼저 크세르크세스1세를 죽였고, 그후 다리우스가 죽인 것처럼 꾸미고, 다리우스의 형제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근친살해'를 복수하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아르타바누스는 아케메네스 왕국을 7개월 동안 지배하고, 이집트로부터 왕으로 인정 받았다. 그러나 결국에는 공모자인 메가비주스에게 배반당하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아닥사스다]에게 살해당했다.
< 크세르크세스의 문 >
< 크세르크세스의 문 > - 페르세폴리스, 기원전 5세기
대기단 북서에 있는 완만한 경사의 넓은 계단을 올라가면, 사람의 얼굴에 날개가 달린 모우상(牡牛像)이 지키는 열주문 앞으로 나온다.
이 사진은 반대측에서 찍은 것으로, 전방에 마르브·다 슈트 평야가 보인다. 문에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 만국의 문은 내가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帝國 내의 諸國에서 모인 민족대표자가 여기를 통해 알현전으로 향했다고 한다.
- 헨델의
라르고 |
헨델의 '라르고(Largo)'로 더욱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곡, '그리운 나무 그늘이여 (Ombra mai fu)'.
이 곡은 원래 1739년 런던에서 처음 공연된 헨델의 오페라
'세르세(Serse)'중에 나오는 아리아이다.
(참고로 '세르세(Serse)'는 영어로
'크세르크세스(Xerxes)'라고 쓴다.)
오페라 제1막이 시작되자마자 플라타너스 그늘에서 쉬고 있던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Xerxes)가 부르는 이 아리아는 "너만큼 정답고 달콤한 그늘을 드리운 나무는 없도다" 라고 감탄하는 내용의 가사로 되어
있는데, 남쪽 나라의 더위와 노곤함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이 노래의 선율이 뒤에 헨델의 '라르고(Largo)'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 곡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그 가사를 제외하고 기악곡 형태로 새롭게 편곡하여
연주되면서부터이다
세르세 (Serse)
독일 출생의 영국 작곡가 게오르크 헨델의 오페라.
작곡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Georg Friedrich Handel)
종류 오페라
제작연도 1738년
영어로는 크세르크세스(Xerxes)라고 쓴다. 풍부한 음악성으로 헨델의 작품 목록 중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오페라 작품이며, 또한 헨델의 오페라 작품을 이해하는 데 가장 적합한 곡으로 꼽힌다. 니콜라 미나토(Nicola Minato)의 원작에 의거하여 1737년부터 2년에 걸쳐 작곡되었으며, 1738년 런던의 킹스시어터에서 초연되었다.
전설적인 인물을 주역으로 전형적인 성격을 띠며, 매우 빠른 템포로 진행되고, 유머와 생동감 있는 동작 등의 희극적인 요소와 작곡가에 의하여 야기되는 진지함이 잘 어우러져 극적인 감동을 준다.
헨델이 쓴 46편의 오페라 가운데 《파르테노페 Partenope》《리날도 Rinaldo》와 함께 가장 주목받는 작품인 동시에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다. 가장 먼저 나오는 유명한 아리아 ‘그리운 나무 그늘이여 Ombra maifu’는 일명 ‘헨델의 라르고’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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