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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왕조 페르시아 (2)

영국신사77 2017. 4. 13. 22:08

 [고대] 사산조페르시아 (한메)

                    사산조 페르시아 (Sassanian Persia)

 

 이란 왕조(226∼651). 이란 남서부 파르스지방에 있는 오아시스국가 이스타푸르(고대의 페르세폴리스) 제사장인 사산의 손자이며 군주인 파파크의 아들 아르데시르 1세가 창시하였다.


[역사]


 아르데시르는 226년 파르티아를 무너뜨리고 수도를 크테시폰에 정하여 <이란 제왕(諸王)의 왕>이라고 칭하였다. 그의 아들 샤푸르 1세는 쿠샨제국(帝國)을 공략하여 260년에 시리아에서 로마황제(P.L.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잡는 등 사산조의 기초를 굳혔으며, <이란과 비(非)이란의 제왕(諸王)의 왕>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뒤에 사산조 황제의 정식 칭호가 되었다.

 샤푸르 2세 때 발전기를 맞이하였고, 쿠스루 1세 때는 인도의 굽타왕조와 국경을 맞대고 교역을 활발히 하였으며, 시리아·예멘을 점령하여 사산조 최대의 영역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 동쪽으로는 에프탈·돌궐 등 유목민족과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서쪽으로는 시리아·아르메니아의 귀속을 둘러싸고 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간에 항쟁과 평화의 시대가 반복되었다.

 그 항쟁은 종교전쟁의 성격을 띠었는데,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자 사산조는 그때까지 보호하였던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하고, 이미 로마제국과 연합하여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아르메니아에 대해서는 조로아스터교로의 개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비잔틴제국에 패배하자 신앙의 자유를 승인하였다.

 한편, 북위(北魏)시대의 중국에는 11차례에 걸쳐 사절(使節)을 파견하였다. 쿠바드 2세 이후에는 4년 동안에 8명의 황제와 여제(女帝)가 즉위할 정도로 혼란기를 맞아, 이 시기에 아랍인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받았다. 예즈디기르드 3세가 642년 네하벤드싸움에서 패전함으로써, 이란 전국토가 이슬람 교도에 의해서 정복되어 갔다. 예즈디기르드 3세는 호라산의 메르프로 망명하였지만, 651년에 암살되었다.

 


[사회와 문화]



 왕가인 사산가(家)를 비롯한 7가문(家門)이 세습영지를 소유하였고, 황제의 대관(戴冠), 군대의 총지휘, 정세의 최고 책임 등 세습적 특권을 분담하였다. 귀족으로는 대지주 귀족과 기사(騎士)를 포함한 소지주귀족이 있어서 정치상·경제상의 특권을 독점하였고, 조로아스터교의 제사계급(祭司階級)도 광대한 영지와 권한을 획득하였다.

 지방행정은 파르티아식 신종왕제(臣從王制)를 폐지하고, 아케메네스 왕조식 속주제(屬州制)로 바꾸었으며, 중요한 주의 장에는 왕족, 그리고 그 밖의 주의 장에는 대소귀족을 임명하였다. 황제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후계자임을 강조하고 중장기병(重裝騎兵)을 중심으로 하는 군대와 향상된 무기와 병술을 사용함으로써 행정기구·군사조직·종교정책에서 파르티아보다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초기의 기본방침은 파르티아 체제의 답습이었고, 그 뒤에도 세습의 특권을 가진 귀족과 제사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분권 체제가 뿌리깊게 남아 있었다. 언어는 아랍어 외에 그리스어도 사용되었지만, 왕족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페르시아인은 현대의 페르시아어로 이어지는 팔라비어를 사용하였다.

 화폐는 은화가 주류였고, 그밖에 금화와 동화도 주조하였는데, 황제의 초상 둘레에 새긴 황제 이름은 파르티아 때처럼 그리스 문자를 쓰지 않고 팔라비 문자를 썼다. 경제면에서는 많은 도시를 건설하여 시리아의 기술자를 이주시켰으므로 중계무역과 수공예품 생산이 발달하였다.

 특히 해상무역이 발달하여 페르시아인은 인도의 동해안에 도달했을 뿐만 아니라 실론섬(지금의 스리랑카)을 근거지로 삼아 멀리 동중국해를 왕복하는 한편, 예멘을 기지로 하여 비잔틴제국의 홍해무역(紅海貿易)에 대항함으로써 세계사상 독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사산조 은화는 이란 본토는 물론 동으로는 인더스강 유역·중앙아시아·중국, 서로는 메소포타미아·지중해에 이르는 국제적 통화가 됨으로써 비잔틴 금화와 더불어 동서교역의 기본화폐를 이루었는데, 오늘날에도 그것이 사용되었던 각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종교로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고, 현재의 아베스타경전이 성립되었으며, 불을 숭배하였고 아후라마즈다의 예배를 강조하였다. 조로아스터교 신학의 주요이념은 일신론적 경향을 나타냈지만, 철학상으로는 역시 빛과 어둠이 투쟁하는 이원론적 이념이 기초를 이루었다.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은 것은 동서의 정치·종교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종교 통일에 의한 이란 세계의 정치통일을 의도하였기 때문이며, 이것은 이란의 전통이 부활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그리스도교나 불교의 영향을 받은 마니교 외에 그 지류로 생각되는 마즈다크교, 유대교,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 불교 등이 있었다.

 미술에서는 파르티아 미술의 특징인 인물의 정면묘사를 계승하였으며, 전반적으로 아케메네스조와 파르티아의 전통, 그리고 헬레니즘의 영향 등으로 독특한 이란 미술을 형성하였다. 나크슈이로스탐 등 중요지점의 절벽에 새겨진 즉위식 광경·전승(戰勝)·사냥·연회(宴會) 등을 그린 마애부조(磨崖浮彫)와 그 밖에 크테시폰의 궁전을 비롯한 건축물의 구조나 장식, 금은 세공·장신구·견직물·석조(石彫)·유리그릇·악기·화폐 등의 공예품에서 그 특색을 볼 수 있다.

그 것들은 서방으로는 비잔틴제국과 그리스도교회를 통하여 유럽 각지로, 동방으로는 인도·중앙아시아·중국,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김원모>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출처: 세계고대사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