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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왕조 페르시아 (1)

영국신사77 2017. 4. 13. 22:05
사산왕조 페르시아[Sasanian Persia]

 

  아르다시르 1세가 정복시기인 208∼224년에 세워 651년에 멸망한 중세 페르시아의 왕조.

 

  명칭은 이 왕조의 선조()이며 배화교(:조로아스터교)의 제주()인 사산(Sāsān)에서 유래한다고 하며, 왕조의 발상지는 옛날의 아케메네스왕조(페르시아제국)와 같이 파르스 지방이다.

 

 따라서 이 왕조는 고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왕조의 중세적 재흥()을 나타내는 동시에, 배화교의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신정국가()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이란민족의 전통적 실력을 가장 잘 발휘한 시대이기도 하다.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정치

 

 사산왕조 페르시아아르다시르 1세(재위 224~241)는 파르티아 제국 최후의 황제 아르타바누스 5세를 패사()시키고, 그 수도 크테시폰을 그대로 새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 서변(西)의 여러 소국과 도시에 대한 쟁탈과 제패()가 이 왕조의 역사를 통하여 로마 내지 비잔틴제국과의 사이에 수없이 되풀이되었는데, 샤푸르 1세(재위 241∼272)의 전승기념조상()은 유명하다.

 

 바람 2세(재위 277∼293)는 세이스탄을 정복하여 인도에까지 세력을 뻗쳤지만, 그가 죽은 뒤 수십 년간은 카루스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의 침입을 받아서, 때로는 수도가 위협받기도 하였다. 나르세(재위 293∼303)는 굴욕적 강화조약을 맺고 국가의 소강()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샤푸르 2세(재위 309∼379) 때는 아라비아인과 투르크족의 침입을 받고, 또 아르메니아 영유권 문제로 비잔틴제국과 싸웠다. 야즈다기르드 1세(재위 399∼420) 때부터는 동북 변경에 투르크계의 에프탈족의 위협이 가중되어, 카바드 1세(재위 488∼531) 때는 통혼()과 조공()을 통해 그 침략을 회피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쇠퇴한 왕조를 소생시킨 황제가 호스로 1세(재위 531∼579)이다. 그는 선왕() 이래의 배화교에 의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 외적의 침입을 일소시킨 뒤,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이 왕조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당시의 제국 경계는 서쪽은 안티오키아에서 동쪽은 중앙아시아, 남쪽은 예멘까지 미쳤다.

 

 그러나 왕조 말기가 되자 재차 비잔틴제국과 이민족의 침입에 직면한 데다, 궁정() 내의 세력 갈등이 곁들여 국력이 갑자기 쇠미해지고, 야즈다기르드 3세(재위 632∼651) 때 아라비아군의 침입을 받아 주권을 상실하였다. 그의 아들 페로즈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국의 회복을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문화

 

동물모양의 용기 / 300~400년 사산왕조페르시아. 고대 이란의 전통적인 형태의 술잔으로 라이톤이라고 한다.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국가체제는 잘 정비되어 모범적인 것으로서, 후세의 무굴제국과 이슬람 국가에 의해 계승되었다. 카바드 1세 때 착수한 토지대장()의 정비로, 호스로 1세인두세()와 지조()의 조세제도를 새로 제정하였는데, 이것도 여러 나라에 의해 채택 ·실시되었다.

비잔틴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아테네 학림()을 폐쇄시킨 뒤, 많은 신()플라톤파의 그리스 학자가 내조()하여 호스로 1세의 보호를 받았는데, 이 왕조에서의 철학()과 과학()의 유행은 이슬람 세계의 학문진흥의 전초가 되어 매개적인 구실을 하였다. 또, 인도의 문학서() 《판차탄트라》가 번역되고, 다시 아라비아어로 중역()되어 후세의 설화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옛날부터 이란의 민족종교()인 배화교는 이 왕조에서 국교()로 되어 국민의 정신생활을 지배하는 문화적 기반이 되었으나, 당시 존재한 다른 많은 종교사상 등의 영향을 원용()하여 자교()의 독자적인 신학()체계를 수립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호스로 1세 때는 아베스타 성전()이 편찬되고, 그 고대어적() 표현으로 아람계() 문자를 모체로 하는 구어()인 팔라비어()의 번역 ·주석() 또는 종교문학이 출현하였다.

다수의 민족을 포함하는 제국인 만큼 국내적으로 여러 종교가 유행하였다. 페르시아인 마니가 창시한 마니교는 배화교에서 파생()된 종교로 한때 궁정 내에도 신봉자가 있었으나, 국교인 배화교로부터 배척을 받아 금지되고 마니는 사형되었다. 비잔틴제국의 수차에 걸친 종교회의의 결과 이단()으로 지목된 그리스도교도에게는 페르시아 제국이 그 도피장소로 적합하였지만, 페르시아와 비잔틴제국의 대립관계에 의한 정치적 압력이 어떠한 형태로든 이들 교도의 생활에 영향을 끼쳤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파[]는 그 본산()을 이 나라의 수도 테시폰에 두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멀리 중국에까지 교세()를 떨쳤다.

이 왕조의 조형적() 문화는 당시 세계 제1급의 것으로, 그 영향은 사방에 파급되었으며 경탄()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이슬람과 비잔틴 건축에 미친 양식상의 공헌, 뛰어난 공예()와 그림무늬의 도안() 등은 특기할 만하다. 동방에서는 주로 소그드인()과 투르크인의 교역에 의해 실크로드를 경유하여 중국에도 전해졌는데, 벽걸이 ·보석 ·직포() ·동기() ·화장품 등이 서역(西)의 진품()으로서 중국인의 환영을 받았다. 회화 ·건축 등의 유례()는 적지만, 조각과 공예에는 걸작이 많이 남아 있다.

조각작품의 대표적인 예는 대부분 마애()한 부조()로 《샤푸르 1세의 전승도()》 《아르다시르 1세의 서임도()》(둘 다 서남부 이란의 나크시에로스탐)와 타크이부스탄(서부 이란의 케르만샤)의 《호스로 2세의 서임도》 등이 있다. 회화에는 《호스로 2세의 제왕저록수렵도(鹿)》(타크이루스탐)와 같은 《박육부조도()》 외에 비샤푸르궁전터[殿]에서 출토된 모자이크 인물상() 등이 있다. 공예작품은 특히 금은기()를 중심으로 한 금속공예품이 우수하다. 이밖에 유리 ·조석 ·염직면에서도 고도의 수준이었음이 작품과 그밖의 회화 ·조각, 그리고 문헌 등을 통하여 널리 알려졌다.

 

동물모양의 용기
800*600, 79kb

452*600, 45kb
사발
800*600, 91kb
타원형 용기
800*600, 81kb
타원형 용기
800*600, 87kb
타원형 용기
800*600, 92kb
물주전자
353*600, 45kb
접시
800*600, 90kb

 네이버 백과사전

 

                    사산왕조 페르시아(Sasanian Persia)

 

아르다시르 1세가 정복시기인 208∼224년에 세워 651년에 멸망한 중세 페르시아의 왕조.

 

 명칭은 이 왕조의 선조(先祖)이며 배화교(拜火敎:조로아스터교)의 제주(祭主)인 사산(Sāsān)에서 유래한다고 하며, 왕조의 발상지는 옛날의 아케메네스왕조(페르시아제국)와 같이 파르스 지방이다.

 

  따라서 이 왕조는 고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왕조의 중세적 재흥(再興)을 나타내는 동시에, 배화교의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신정국가(神政國家)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이란민족의 전통적 실력을 가장 잘 발휘한 시대이기도 하다.

             

 

 

               사산 왕조 [Sasanian dynasty]

 
  Ssnian은 Sssnian, Ssnid라고도 함.

  정복시기인 208~224년에 아르다시르 1세가 세워 637~651년

  아랍인들에 의해 멸망한 고대 이란 왕조.

 

  이 왕조명은 아르다시르 1세의 선조인 사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사산인들은 아르다시르 1세(224~241 재위)의 지휘 아래 파르티아인들을 멸하고 제국을 세웠는데, 서쪽으로는 로마와 비잔틴에 대응하고 동쪽으로는 쿠샨 왕조와 에프탈족에 대응하여 그 영토가 끊임없이 변화했다. 샤푸르 1세(241~272 재위) 때 왕국은 북쪽으로는 소그디아나와 이베리아(게오르기아)로부터 남쪽은 아랍의 마준 지역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또 이당시 동쪽의 영토는 인더스 강에, 서쪽은 티그리스 강 상류와 유프라테스 강 계곡에까지 이르렀다.

 

  사산 왕조의 통치하에서 이란의 민족주의가 부활했다. 조로아스터교가 국교로 인정되었으며, 다른 종교의 지지자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공공연히 박해를 받아야 했다. 정치는 중앙집권적이어서 지방관리들은 왕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을 졌으며 도로와 도시 건설, 그리고 농업까지도 정부의 직접적인 재정지원을 받았다.

 

  또한 사산 왕조하에서 이란 예술은 다양한 분야에서 르네상스를 경험했다. 그중에서도 크테시폰과 피루자바드, 사르베스탄의 궁전들처럼 어마어마한 크기의 건축물들이 자주 지어졌다. 사산의 예술품들 중 가장 특징적이고 뛰어난 유물은 아마 샤푸르(비샤푸르)와 낙슈 에 로스탐, 낙슈 에 라자브에 있는 험준한 석회암 절벽에 새긴 조각일 것이다. 금속세공과 보석세공 기술도 대단히 세련된 수준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학문을 장려하여, 동양과 서양에서 가져온 책들이 사산조의 언어인 팔라비어로 번역되었다.

 

 

                               브리태니커 백과 > 국가와 지리 > 아시아 > 서남아시아 > 이란 > 왕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를 굴복시키고 조공을 받아낸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왕은 누구입니까?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무릎을 꿇인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왕은 누구인가?

 

 동로마와 휴전 협정을 하며 금화를 조공으로 받치게 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최고 영웅 중에 한명이라고 합니다. 이사람은 누구인가요?

 

raifen (2005-04-13 20:06 작성)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재위 기간은 527년부터 565년까지 입니다.

 

이 당시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은 호스로 1세(재위 531∼579)입니다.

 

호스로 1세는 당시 기울어 가던 사산조 페르시아를 부흥시킨 인물입니다.

 

 

 562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호스로 1세 간에 맺은 평화협정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평화협정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굴복한 결과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네요.

 

 

gkra1203 (2005-04-10)

 

호스로 1세(?~579)입니다.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에데사에서 사로잡은 샤푸르 1세와 함께, 가장 유명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 중 한명이죠. 그는 여러면에서 매우 유능한 황제였고, 만년에 기력이 떨어진 유스티니아누스로써는 그를 만난 것이 불행이었죠.

 

  호스로는 세제 개혁을 통해 안정적인 세수를 확보했고, 대영주들의 권한을 축소시키는 한편, 디칸이라 불리는 하급 귀족들의 중요성을 증대시켰습니다.

특히 그가 유명한 것은 일단의 문화 후원인데 유명한 크테시폰의 조영을 설치한 것을 비롯, 아베스타를 비롯한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을 편찬하고 여러 건축활동을 후원했습니다.

 

  문제는 그의 실제 역사적 위상이 얼마나 되느냐인데, 이것은 상당히 모호합니다. 대신 그의 명성은 엄청나 각종 전설이나 설화에서 정의롭고 지혜로운 인물로 묘사되어 있고, 이후 이슬람 세계는 그의 통치를 이슬람 이전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보고 그를 본받기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사실 유스티아누스가 호스로에게 굴복한 것은 비잔틴의 군사력이 페르시아에 비해 열세였다기 보다는, 지나친 확장으로 비잔틴의 국력이 쇠약해져 있던 상황에서 강적인 페르시아와 싸우는 것보다는 강화를 맺는 것이 더 싸게 먹히고 효율적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유스티니아누스는 페르시아 뿐만 아니라, 아바르나 슬라브족을 비롯해서 주변 민족도 모두 돈으로 주물러 놓았습니다.

 

  실제로 호스로 대왕이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것은, 정복이 목적이 아니라 약탈이 목적이었죠. 이탈리아나 각종 이민족과 싸우느라 병력이 분산되어 있던 제국은, 제대로 훈련 받지도 않은 수비병 6000명을 파견하는게 고작이었습니다. 그가 552년 이탈리아로는 정예병 4만을 파견한 것과 비교해 보면 별것 아닌 전력이죠  

 

  대신 그의 조카인 유스티누스 2세는 이런 공물을 전면 부정했는데, 덕분에 비단 페르시아 뿐만 아니라 롬바르드, 아바르, 슬라브를 비롯 사방에서 침입을 받고 제국은 크게 약화됩니다. 여기서 호스로 대왕이 동로마의 동부 지역을 휩쓸어버렸죠.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파르티아 왕조·사산왕조 페르시아가

                                   공통적으로 세계사에 공헌한 것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는 아시리아의 통치를 이어받아 중앙 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전국을 20주로 분할하고 주마다 총독,군사령관,정세관을 임명하여 지방 행정과 질서 유지를 담당하게 하였으며, 수시로 "왕의눈","왕의귀"라고 불리는 감찰관을 파견하여 그들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도로를 정비,확장하고 해안지역에 항만,선박,그리고 우편제도를 확장하여 도량형,교통,통신의 효율적인 연결 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한편,각 정복지의 관습을 존중하고 자치를 인정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또한, 바빌론에 잡혀 온 유대 인들을 돌려 보내는 등 이민족 통치에 대해 관대 하였다.

 

                                    파르티아 왕조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알렉산더 제국이 붕과된 후, 서아시아에서는 그리스의 셀레우코스 왕조가 시리아를 지배하였다. 이 시기에 그리스 인들이 서아시아로 이주하여 그들의 문화를 전파하였다.

기원전 3세기 중엽에 그리스 인은 박트리아 왕조를 세우고, 카스피 해 동쪽에 살던 이란계 유목민은 파르티아 왕조를 세웠다.

 

  파르티아 왕조는 기원전 2세기경에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영토를 지배하였다. 그리고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중국의 한과 로마 제국간의 중계 무역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3세기 초에 파르티아 왕조는 아츠메니아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로마제국과 공방전을 전개하면서 쇠약해져, 이란고원에서 일어난 사산왕조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하였다.

 

                                 사산왕조 페르시아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이란계 민족이 아케메네스왕조의 부흥을 내걸고 세운 나라이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동서 교통의 중앙을 차지함으로써 중계무역으로 번영하였다.그러나 비잔티움 제국과의 계속된 싸움과 궁정의 내분으로 국력이 쇠악해져, 마침내 이슬람 세력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사산왕조 페르시아에서는 동방에서 들어온 불교,서방에서 들어온 크리스트교,조로아스터 교가 융합되어 마니교가 성립하였다. 이 나라에서는 공예,금,은,세공,청동기를 비롯하여 궁전 건축 등이 발달하여 유럽 세계는 물론 중국의 문화에도 많은 영항을 끼쳤다.

                             

                                 

skyaro (2005-06-26 20:13 작성)

 

 아르케메네스 , 사산조 페르시아, 파르티아는  지금 이란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나라였잖아요.. 이들 나라는 나중에 유럽이 대서양 항로를 발견하기 전에는 인도나 중국과의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었거든요..

 

  서양은 이들 나라가 막고 있어서 인도나 중국이 어디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해요.. 그래서 동양의 문물을 서양에 전달했다는 세계사적 의미를 가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