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이 글은 어느 애달픈 신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니, 어느 서러운 인연에 관한 기록이다. 이 짧은 글에서 이승과 저승 넘나드는 신화를 읽고 가도 좋고, 병든 수캐처럼 헐떡거리며 왔다가 간 인연을 읽고 가도 좋다. 다, 괜찮다.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에 관한 이야기이어서이다. 그 바람결에서 소쩍새 울음소리, 국화꽃 향기 배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괜찮다. 다, 괜찮다.
국화 흐드러진 고창 ‘질마재’
어쩌면 이 글은 서해안 모퉁이에 틀어박힌 한 갯마을의 이야기이다. 칠산바다 바라보고 들어앉은 후미진 부락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라 해야 옳지만, 지금도 마을에서는 질마재라 부른다. 질마재는 본래 고개 이름이었다. 마을 뒤로 소요산(445m)이 가로막고 있고, 왼쪽으로 풍천장어 올라오는 인천강이 흐르고 있어 마을 사람은 소요산 자락에 얹힌 고개를 넘어 세상에 나갔다 돌아왔다. 이따금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풍문처럼 마을은, 그렇게 고개 너머에 옹크린 채로 국화꽃 향기만 바람에 실려보냈다. 이제는 자동차도 거침없이 내달리는 이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조기떼 울어대는 칠산바다 아래로 지붕 낮은 농가가 옹기종기 모여앉은 부락이 내려다보인다.
그러나 이 글은 결국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질마재에서 태어나 질마재를 노래하다 질마재에 묻힌 어느 질마재 부족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마냥 반길 수만은 없는, 생각하면 할수록 아프고 시린 어느 떠돌이 인생에 관한 이야기이다. 2008년 한 시인이 ‘지나는 길인데/안 올 수는 없고/오기는 왔는데/너무 좋은데/좋아할 수만은 없고(손세실리아, ‘방명록’ 부분)’라며 마을 어귀에서 주저앉았던 것처럼, 그를 추억하는 일은 한 번도 편안한 적이 없었다. 어떤 이는 그를 두고 ‘부족 방언의 요술사’라 했고(유종호), 어떤 이는 그를 ‘시의 정부(政府)’라 일렀다(고은). 어떤 이는 그에게서 우리 언어가 다다를 수 있는 어느 경지를 읽어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지식인의 겁먹은 얼굴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소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것이어서, 오늘도 바람은 두 갈래에서 불어온다.
그래, 나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련다. 아름다운 것은 슬픈 것이므로, 한없이 한없이 슬픈 것이므로 그를 잊지 못해 나선 걸음을 나는 뉘우치지 않으련다. 흐드러진 국화 옆에서 이제는 멀어진 젊음의 뒤안길을 슬쩍 돌아만 보고 와도 좋다며 떠난 걸음이었다. 단풍 내려앉은 선운사 동구에서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고만 와도 좋다고 다독인 마음이었다. 먼 옛날 다섯 살 소년이 외할머니 집 툇마루에서 맞았던 그 바람, 그가 잠든 언덕배기 무덤 위에서 맞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어느새 나도 귀신이 와 서는 것이 보이는 나이가 되고 말았다.
DA 300
올해는 미당 서정주(1915∼2000)가 태어난 지 백 년이 되는 해이자, 미당의 여섯 번째 시집 『질마재 신화』가 출간된 지 40년 되는 해이다. 질마재에서 태어나 자랐고, 무시로 질마재를 노래했던 시인은 시방 질마재에 묻혀 있다. 이 작은 마을 안에 그의 생가와 무덤이, 그의 작품 무대가 되었던 이웃집과 그의 아호를 빌린 문학관이 엉켜 있다. 질마재는 한 시인의 이승과 저승을 붙들고 있는, 세계에서도 드문 시의 부락이다.
이제 와 고백하지만, 한참을 고민했다. 선운사 동백꽃을 보려면 4월이 좋았고, 생일을 기념하려면 여름 들머리가 맞았다. 긴 궁리 끝에 이제야 질마재에 들었다.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 저기 저 꽃자리도 궁금했지만, 내 누님 같이 생긴 국화꽃 마주하고픈 바람이 마음을 흔들었다.
8년 전 이맘때도 질마재는 국화로 온통 환했다. 2007년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문인수(70) 시인이 노란 물결 일렁이던 들녘 내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허허, 시 한 수가 세상을 바꿨구나. 그놈의 국화 한 송이, 많이도 새끼쳤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