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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육자배기 소리 끊겼지만, 담장도 구릉도 노란 꽃 찬란하네

영국신사77 2016. 12. 22. 18:56

[커버스토리] 육자배기 소리 끊겼지만, 담장도 구릉도 노란 꽃 찬란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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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이 잠들어 있는 언덕배기에서 내려다보면 미당이 태어나 자란 마을이 한눈에 담긴다. 왼쪽이 미당시문학관이고, 문학관 오른쪽으로 생가가 있다. 미당은 죽어서도 제 시를 떠나지 않았다.

 
 

미당의 흔적 ‘시의 부락’을 찾아서

미당 서정주(1915∼2000)는 100년 전 5월 18일(음력)에 태어나 15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죽었다.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다시 말해 질마재 마을에서 미당이 살았던 기간은 태어나서부터 열 살 때까지가 전부다. 그러나 그 10년의 기억은 그의 70년 시력(詩歷)에서 두고두고 우러나왔다. 그 기억이 쌓이고 쟁인 흔적이, 미당이 환갑에 엮어낸 『질마재 신화』이었음은 물론이다.

국화 만발한 계절을 골라 미당의 흔적을 되밟았다. 염려했던 대로 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시가 된 마을 - 질마재 마을
 

미당의 동생 우하 서정태 옹. 미당 생가 아랫집에서 홀로 산다. 우하(又下)는 ‘또 아래’라는 뜻이다.


질마재는 소요산(445m) 자락에 걸친 고개 이름이다. 질마는 ‘길마’의 전라도 방언으로, 길마는 소나 말 등에 얹는 안장을 가리킨다. 질마재 너머 질마재 마을의 행정 명칭은 선운리다. 진마마을·서당물·신흥마을, 세 마을이 모여 선운리를 구성한다. 세 마을 중에서 진마마을이 중심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질마’를 한자로 고쳐 ‘진마’가 됐다. 이 진마마을에서 미당이 태어났다. 시집 『질마재 신화』의 등장인물 대부분도 진마마을 주민이다. 『질마재 신화』에 수록된 시편이 서당·빨래터·우물 등 마을 곳곳에 조각상과 함께 걸려 있다.

미당 생가는 복원작업을 마쳐 깨끔하다. 초가 두 채가 우물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초가 앞에는 마침 만발한 국화가 꽃밭을 이루고, 미당의 시편과 조각상이 군데군데 놓여 있다. 미당은 이 초가에서 열 살까지 살았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자화상’ 부분)는 그 유명한 시구처럼 미당의 선친(서광한)은 인촌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다.

미당 생가 오른쪽 담장 너머에 깔끔한 초가 한 채가 앉아 있다. 이 낮은 초가에서 미당의 동생 우하(又下) 서정태(92) 옹이 혼자 산다. 방 한쪽 구석에 부엌이 딸려 있고, 한가운데에 앉은뱅이책상이 놓인 단출한 살림이다. 우하는 거동이 불편했다. 그러나 발음은 정확했다. 피는 속일 수 없는 법이어서 우하도 시를 쓴다.

‘다 떼어버리고/소요산 줄기 한 자락/그 밑/움막에 와서 살고 있다//두 평 남짓한 방에서 뒤척거리면/두고 온 피붙이 목소리/땅속에 파묻히고 나서도/따라올 목소리’(서정태,‘가지 마’ 부분)

진마마을에서 들러야 할 곳이 하나 더 있다. 미당의 외가 터다. 주인이 바뀌어 한때 정미소로 쓰였다는 미당의 외가는 복원이 안 된 상태다. 낡고 헐어, 외려 정취는 더하다. ‘해일’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등 『질마재 신화』의 주요 작품이 이 헌 집에서 태어났다. 실제로 미당의 화법은 외할머니를 빼닮은 것이라고 한다.

 
슬픈 자화상 - 미당시문학관
 

미당시문학관의 모습. 폐교를 고치고 6층 전망대를 세웠다.


미당시문학관은 미당의 생애를 그러모은 공간이다. 옛 봉암초등학교 선운리 분교 건물을 뜯어고쳐 문학관을 지었다. 교사(校舍) 사이로 우뚝 솟은 6층 전망대가 도드라진다. 건축가 김원(72)의 작품이다. 문학관도 진마마을 안에 있다. 생가에서 걸어서 2분 거리다. 서동진(62) 문화관광해설사에 따르면 지난해 약 12만 명이 문학관을 방문했다. 학교에서 미당을 외면한 지 한참인 형편을 생각하면 상당한 숫자다.

문학관에서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미당의 만년 모습이었다. 미당은 치매를 막으려고 아침마다 세계의 산 이름을 암송했다. 세계의 명산 1628개를 하나씩 호명했다. 육신을 움직여 산을 오를 수 없는 나이가 되자 정신만이라도 세상의 온 산을 올라다닌 셈이었다.
 

생전의 미당이 마지막에 신었다는 흰 고무신. 미당시문학관에 있다.


2000년 10월 10일 미당의 아내 방옥숙 여사가 떠난다. 미당은 아내가 떠나자 곡기를 끊고 맥주만으로 연명한다. 거기까지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당이 병원에서 신었다는 흰 고무신을 보고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미당은 아내가 떠난 18일 뒤 입원했다. 그리고 다시는 병원에서 걸어나오지 못했다. 흰 고무신은 더 이상 하얗지 않았다.

문학관에서 두고두고 눈에 밟힌 건, 사실 미당의 친일 행적이었다. 문학관은 미당이 쓴 친일문학 5편을 걸어두었다. 친일문학 뒤에는 미당이 남긴 변명도 있었다. ‘쓰라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고, …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젊은 그 시절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그것이 새삼 아픔으로 다가온다.’

한숨만 나왔다. 시인은 오로지 시만으로 말해야 하는지 솔직히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떨치지 못했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자화상’ 부분)는 시구만 자꾸 맴돌았다.

전망대 꼭대기에 올라섰다. 건너편 안현마을이 훤히 내다보였다. 안현마을 오른쪽의 구릉이 온통 노란색이었다. 만발한 국화 사이에 미당이 아내와 나란히 누워 있었다.


국화꽃 마을 - 안현마을
 

미당 묘소가 있는 안현마을은 담벼락마다 국화꽃 그림이 그려져 있다. 미당의 시 ‘국화 옆에서’가 남긴 흔적이다. 벽 그림이 그려진 담벼락 앞에서 마을 주민을 만났다. 왼쪽이 김정애(87) 할머니, 오른쪽이 고삼남(81) 할머니.


미당이 잠들어 있는 안현마을은 선운리 바깥의 마을이다. 하여 『질마재 신화』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현마을은 시방 미당의 시혜를 가장 톡톡히 받은 마을이다. 고창군은 2005년부터 국화 5만 송이를 심었는데, 대부분이 안현마을에 있다. 지금은 돋음별마을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린다. 2006년 농림수산식품부가 농촌체험마을로 지정하면서 마을 이름도 바뀌었다.

안현마을은 멀리서도 눈에 띈다. 길섶마다 심은 노란 국화꽃도 그렇거니와, 하얀 담벼락과 파란 지붕에 죄 그림이 그려져 있다. 꽃이 그려져 있으면 국화꽃이고, 사람이 그려져 있으면 동네 아낙이다. 동그란 손거울 옆에 선 아낙의 얼굴 그림도 있다. 이 모든 게 ‘국화 옆에서’ 시 한 수 때문에 벌어진 소동이다.

마을을 끼고 돌아 구릉 앞에 이른다. 구릉이 온통 노랗다. 햇볕을 받아 반짝이니 눈을 못 뜰 정도다. 노랗게 흔들리는 국화밭을 가로질러 구릉을 오르니 이윽고 미당 묘소다. 왼쪽 봉분에 미당이 누워 있고, 오른쪽에 미당의 아내가 누워 있다. 아내의 묘소 앞에 시비가 서 있다.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무등(無等)을 보며’ 부분)

미당은 아내와 68년을 살았다. 젊은 날의 미당은 어지간히도 아내 속을 썩혔던 모양이다. ‘나 바람나지 말라고/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 놓은/삼천 사발의 냉숫물.’(‘내 아내’ 부분)이라는 시편도 전해오니 말이다. 그러나 결국 지아비는 지어미에게 자식을, 아니 새끼를 기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세상 부모의 마음이 시구 몇 줄에 포개져 있다. 묘소를 등지고 돌아서면 질마재 마을이 훤히 보인다. 미당이 누운 자리에서 마을까지 거침이 없다. 문학관은 물론이고 생가도 한눈에 들어온다. 저승의 미당이 이승의 미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쩍새 우는 소리 - 선운사
 

단풍 내려앉은 선운사. 선운사 단풍은 유난히 짙다.


미당의 고향마을 선운리는 선운사와 지척이다. 그러나 마을 ‘선운(仙雲)’과 절집 ‘선운(禪雲)’은 닮은 듯하지만 다른 이름이다. 선(仙)과 선(禪)의 차이가 어렵다. 아마도 이승과 저승의 거리가 이 만큼이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선운리와 선운사가 자동차로 5분 거리도 안 되지만, 예전에는 사정이 달랐다. 선운리와 선운사 사이를 소요산이 가로막고 있는데다, 인천강이 흘러 내왕이 쉽지 않았다. 인천강에 다리가 없던 시절, 선운리에서 선운사로 들려면 질마재를 넘어 한참을 에둘러야 했다.

도회지에 터를 잡은 뒤에도 미당은 수시로 고향을 찾았다. 고향에 내려오면 미당은 꼭 선운사에 올랐다. 미당이 늘 묵던 숙소가 아직도 남아 있다. 옛날에는 동백장으로 불렸던 동백호텔이다. 지금은 관광단지에 있지만, 87년까지는 선운사 맞은편에 있었다. 동백호텔 황용성(79) 대표가 미당의 추억을 되새겼다.

“201호에만 묵으셨어요. 2층 맨 끝방이요. 선생이 ‘소쩍새 소리 잘 들리는 방을 달라’고 하셔서 그 방을 드렸어요. 우리 집이 선운사 앞에 있을 때는 동백 숲이 가까이 있었어요. 소쩍새 소리가 잘 들렸지요. 여기로 옮긴 뒤로는 소리가 끊겼지만 선생은 201호만 찾으셨어요. ‘나는 소쩍새 소리가 들리는데, 자네는 안 들리는가?’ 묻곤 하셨어요.”

선운사 동구에 다다랐다. 지금 시비가 놓여 있는 자리가 옛 동백장 터였다. ‘선운사 고랑으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읍디다’(‘선운사 동구’ 부분)

그러니까 동백꽃 피는 숲에서 소쩍새가 울고, 소쩍새 울음 소리 들으며 국화꽃 한 송이도 피어났던 것이다. 그렇게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치는 말고 조금 섭섭한 듯만 하게 만났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났던 것이다. 잔치는 진즉에 끝난 터여서, 육자배기 소리 끊긴 지 오래였지만 질마재 국화꽃만은 찬란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혼자 되뇌고 걸음을 돌렸다.

 
여행정보=서울시청에서 미당시문학관까지는 약 3시간 30분 거리다.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IC에서 나와 22번 국도를 타고 영광 방면으로 20분쯤 달리면 선운사 입구를 지나 질마재 마을이 나온다. 문학관에 해설사가 상주한다. 입장료 없음. 월요일 휴관. 063-560-8058. 선운사 앞 거리에 고창 명물 풍천장어 집이 모여 있다. 선운사 삼거리의 연기식당(063-561-3815)이 원조로 알려져 있는데, 다른 장어구이 집과 맛과 가격에서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장어 1인분 3만원선. 선운사는 주차비도 내고 입장료도 내야 한다. 주차비 승용차 2000원, 입장료 어른 3000원. 선운산 관광단지 안에 동백호텔(063-561-3377)이 있다. 1박 5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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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미당시전집 1』(서정주, 민음사) ▷『그냥 덮어줄 일이지』(서정태, 시와) ▷ 『미당 서정주 대표시 100선』 (윤재웅 엮음, 은행나무) ▷ 『문학기행 2』 (김훈·박래부, 따뜻한손) ▷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최재봉, 한겨레신문사) ▷『그리운 시, 여행에서만나다』(양병호 외, 박이정) ▷『문학터치 2.0』(손민호,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