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떠나고 살 길이 막막했다. 6개월을 누워만 있다 보니 은행 대출 이자도 못 갚아 당장 집이 경매로 넘어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때 육군사관학교 상담교관 시험에 합격해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근무시간은 오후 1시부터 밤 10시까지였지만 계속되는 생도들의 상담 요청에 밤 12시가 되어서야 퇴근했다. 젊고 패기 넘치는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면서 나의 슬픔도 조금씩 치유되는 것 같았다. 순수한 열정을 가진 생도들로부터 많은 위로와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중학생이었던 딸은 늦은 나의 귀가 때문에 어두운 집에 홀로 남아 사춘기를 보내야 했다. 늘 그것이 마음에 걸렸던 나는 결국 사표를 냈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남편의 2주기 추모 감사예배는 나의 신앙고백이었다. 고통 가운데 기도로 올려진 시집이 감사하게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한 마디에 베스트셀러가 됐고, 매월 받는 인세가 살아나가는 데 큰 보탬이 됐다.
또 한편에선 당시 함께 교제해온 기독여성 문인들의 기도와 격려가 힘든 시간을 이겨내는 힘이었다. 여성 문인들과는 1980년부터 성경 공부를 같이 했다. 김자림 윤남경 정연희 임성숙 김녕희 이건숙 나연숙 박강월 이진화 김부희 정화신 등과 함께 신성종 이재철 목사님으로부터 말씀을 배웠다.
10년 가까이 성경 공부를 해오다 우리는 간증극을 한번 올려보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작가들이 각자의 간증을 써냈다. 그 내용을 토대로 김자림 나연숙씨가 극본을 만들었고 여성 문인들이 모여 기도하면서 몇 달 동안 연습해 ‘하늘의 종소리’라는 간증극을 호암아트홀 무대에 올렸다.
반응은 대단했다. 당시 사람들이 “연극배우들이 다 굶어죽겠다”고 말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1주일 동안 매회 눈물을 흘리며 연기했다. 그 순간만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각본대로 움직이는 세상의 무대에 선 배우들이었다. 반응이 좋자 이듬해인 1989년 ‘죽으면 죽으리라’는 제목으로 내용을 전면 보완·수정해 다시 호암아트홀에서 공연했다. 이때 모은 수익금이 무려 1억5000만원이나 됐다.
그 가운데 제반 경비를 제외하고 1억2000만원을 종잣돈으로 ‘주부편지’를 발행하게 됐다. 가정이 바로 서야 나라가 살고, 가정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사회도 건강해진다는 여성 문인들의 생각에서였다. 내용과 표지 콘셉트를 정하는 데 나 역시 많은 의견을 전달했다. 그렇게 탄생한 ‘주부편지’는 오늘날까지 많은 이웃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돼주고 있다.
이 때부터 많은 일들이 밀려왔다. 극동방송의 간판 프로그램인 ‘하나되게 하소서’를 공부영 PD와 함께 진행했고 청소년 선도 잡지인 ‘주변인의 길’ 편집고문으로 활동했다. 또 지성인을 겨냥한 ‘낮은 울타리’, 해외 기독 교양지인 ‘광야’의 편집을 맡아 바쁜 일정을 보냈다.
90년 딸 서윤이의 의지를 더 이상 꺾지 못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후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낮에는 서울신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간증예배를 인도했다. 밤에는 주로 원고를 썼다. 몸은 바빴지만 별로 돈 되는 일은 없었다. 하나님의 일은 대부분 무료 봉사가 많아 딸의 유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KBS에서 밤 11시부터 2시간 동안 생방송으로 진행한 ‘밤과 인생 이야기’, 기독교방송의 ‘새롭게 하소서’는 어려운 나의 생활에 큰 보탬이 됐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반응은 대단했다. 당시 사람들이 “연극배우들이 다 굶어죽겠다”고 말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1주일 동안 매회 눈물을 흘리며 연기했다. 그 순간만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각본대로 움직이는 세상의 무대에 선 배우들이었다. 반응이 좋자 이듬해인 1989년 ‘죽으면 죽으리라’는 제목으로 내용을 전면 보완·수정해 다시 호암아트홀에서 공연했다. 이때 모은 수익금이 무려 1억5000만원이나 됐다.
그 가운데 제반 경비를 제외하고 1억2000만원을 종잣돈으로 ‘주부편지’를 발행하게 됐다. 가정이 바로 서야 나라가 살고, 가정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사회도 건강해진다는 여성 문인들의 생각에서였다. 내용과 표지 콘셉트를 정하는 데 나 역시 많은 의견을 전달했다. 그렇게 탄생한 ‘주부편지’는 오늘날까지 많은 이웃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돼주고 있다.
이 때부터 많은 일들이 밀려왔다. 극동방송의 간판 프로그램인 ‘하나되게 하소서’를 공부영 PD와 함께 진행했고 청소년 선도 잡지인 ‘주변인의 길’ 편집고문으로 활동했다. 또 지성인을 겨냥한 ‘낮은 울타리’, 해외 기독 교양지인 ‘광야’의 편집을 맡아 바쁜 일정을 보냈다.
90년 딸 서윤이의 의지를 더 이상 꺾지 못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후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낮에는 서울신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간증예배를 인도했다. 밤에는 주로 원고를 썼다. 몸은 바빴지만 별로 돈 되는 일은 없었다. 하나님의 일은 대부분 무료 봉사가 많아 딸의 유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KBS에서 밤 11시부터 2시간 동안 생방송으로 진행한 ‘밤과 인생 이야기’, 기독교방송의 ‘새롭게 하소서’는 어려운 나의 생활에 큰 보탬이 됐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