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꺼져가는 몸을 이끌고 벽제에 있는 남편 묘소를 찾았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아무리 통곡을 해도 그 사람은 다시 살아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치 다시 돌아올 것만 같고 죽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나님을 원망하다 못해 돌이킬 수 없는 그의 죽음이 의사의 잘못인 것도 같고, 나의 잘못인 것도 같아 죄책감을 씻어 낼 수 없었다.
사람의 몸속 어디에 그렇게도 많은 눈물이 숨어 있을까.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운전을 하면서도 줄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밤에는 앞차의 브레이크 등이나 마주 오는 차의 불빛이 눈물에 어려 운전이 어려웠고 내 눈은 짓물렀다.
그가 가고 난 후 100일이 된 어느 가을 날, 큰 조카 세영, 딸 서윤이와 함께 산소를 찾았다. 방금 지나간 소나기로 산소는 젖어 있었고 내가 심어 놓은 장미꽃이 진 자리에 코스모스가 피어 슬프게 흔들리고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뒤돌아서 맞은편 산을 보았을 때 우리를 중심으로 쌍무지개가 높이 떠 있었다.
이게 웬 일인가.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해 주시려고 징표를 주신 것 같았다. 홍수 이후 ‘다시는 너희를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고 징표를 주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시는 슬픔을 주지 않겠다’는 징표를 주신 것 같았다. 무엇인지 모를 하늘의 소망을 주신 것 같아 큰 위로가 됐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가 피와 땀을 다 쏟으시고 난 후 육체의 고통을 참다못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부르짖은 그 대목이 바로 시편 22편에 있었다. 그간 내가 부르짖은 그 대목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외쳤던 것이다. 나는 비로소 깊은 묵상에 들어갔다. 그 외아들의 절규를 들었을 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을까.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겪었을 아픔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아들이 피와 땀을 다 흘리고 완전히 순명하시기까지 그 몇 시간의 고통은 억겁의 세월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못하실 일이 없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을 희롱하는 로마 병정과 바리새인들 앞에서 보란 듯이 예수님을 살릴 수도 있었는데, 왜 그리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을까. ‘왜, 왜입니까?’라고 나는 외쳤다.
“우리 신촌교회 성도들과 신앙의 동지들이 남편을 살려 달라고 기도했을 때 왜 당신은 침묵하셨습니까. 아프리카의 아무 죄 없는 어린이들이 하루에도 수십명씩 굶어서 죽어나가고 있는데 당신은 뭐하십니까. 의인이 고난 받고 피 흘리는 것을 당신은 왜 기뻐하십니까. 왜 당신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당신의 신실한 종을 준비만 시켜놓고 그렇게 빨리 데려가셨습니까. 도대체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이 되고 있었다. 그 심문관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 하고 있었다. 이런 반항을 가르고 조용히 찾아오신 침묵의 하나님은 바로 우주적 아픔의 고통을 감내하시는 하나님으로 내게 오셨다. 아들의 마지막 절규에도 끝까지 침묵하신 하나님, 침묵 속에 들어 있는 엄청난 하나님 사랑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외아들을 산제물로 바침으로써 우리에게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증거하게 하신 것이다.
십자가란 하나님의 우주적 아픔과 아들 예수님의 온전한 순종이 만나서 이뤄낸 더할 수 없는 찬란한 사랑의 꽃인 것이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