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聖地 · 선교사/1.國內 성지순례歷史교회文化탐방

◇ 공주 영명학교 ◇-한국기독교회사-

영국신사77 2013. 6. 15. 12:38

 

◇ 공주 영명학교  ◇



* 학교명 영명(永明)은 ‘Eternal Brightness' 즉 ’영원한 광명‘이라는 뜻이다. 영명의‘永’은 오래되고 긴 것을 의미하지만 영명학당에서는 기독교인들이 희구하는 ‘영생’<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明’은 한자에서는 ‘밝음’과 ‘분별함’과 ‘총명함’을 뜻하나 여기에서는 <창세기 1장 1-5절> 구절에 명시된 ‘빛’ 즉 ‘광명’을 의미한다.

 

 

PICE2.jpg

 

 

PICE3.jpg

 

 * 1906년 10월 15일 선교사 우리암씨와 스트란돈씨와 노병선, 오성근씨가 함께 학교를 세우며 교명을 중흥(中興)이라 칭한다. 열심히 교육하다가 1909년 6월 26일 교명을 영명이라 개칭하고 심상(尋常), 고등 양과를 병치하는 실립 인가를 얻은 후 학교 상황은 점점 발전한다. 1916년 재정부족으로 인하여 보통과는 폐지하고 학생은 공립학교로 보냈다.

 

  1919년 4월 1일 공주시에서 영명학교 학생이 독립만세 호창에 참가함으로 학교가 일대 불운을 만나 교문을 굳게 잠그고 있다가 같은 해 가을에 개학을 하였다.

 

 

PICE4.jpg

 

PICE5.jpg

* 우리암(Williams) 교장

1883년 미국 콜로라도주 뉴윈저에서 출생. 1907년 공주교회 담임목사, 영명학교의 설립자이며, 1934년 영명 남여학교 통합 교장이 됨.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당하고, 1962년 미국 센디에이고에서 별세. LA 프레스트 공원묘지 안장.

 

 PICE6.JPG

* 영명남학교 설립자 우리암

 

PICE7.jpg

* 우리암 가족
우리암 부부는 모두 3남 2녀를 낳았다.

두 딸은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

 

PICE8.JPG

우리암의 선교활동 모습(1907년경)

 

PICE9.JPG

* 영명 여학교 설립자 사애리시

 * 한국인들 사이에 ‘사애시리’부인으로 불렸던 샤프 부인은 명선여학교의 후신인 영명여학교에서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그는 우선 병천의 시골 소녀 유관순을 데려다 가르치다가 서울 이화학당으로 보내 ‘3.1 운동의 영웅’이 되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그 외에 해방 후 자유당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서울 중앙대학교를 설립한 임영신, 한국 최초 여자 경찰서장을 역임한 노마리아, 한국 감리교 최초 한국인 여자 목사 전밀라 등이 영명여학교에서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PICEA.JPG

* 초창기 영명여학교 교사

여학교는 이 건물을 사용하다가 1918년 3층 양옥을 짓고 옮겨 갔다.(현 기독교 사회복지관)

 

PICEB.JPG

* 1910년대 학교전경 및 공주시가지

 

PICEC.JPG

* 1930년대 학교전경

 

PICED.JPG

* 의병들을 붙잡아서 거리에서 즉결 처형하는 장면(당시 시대상황)

 

 

PICEE.jpg

* 구한말 시대 상황

(선교사 핸드북에 실린 사진)

PICEF.jpg

* 학교 다닐 나이에 여자 아이들은 주로 가사에 매달렸다. (테일러 선교사가 찍은 사진)

 

 

PICF0.jpg

 

PICF1.jpgPICF2.jpgPICF3.jpgPICF4.jpgPICF5.jpg

 

* 사선교사는 공주에 도착한지 1년도 안되어 장티푸스로 영면하였다.

 

 * 샤프 선교사는 하리동 언덕 위쪽에 지하 1층, 지상 2층짜리 벽돌 건물을 지었다. 1905년 11월 충청도에서 처음보는 서양집 즉 양관이 완성되었다. 공주 사람들은 이 집을 구경하려고 몰려들었다. 그들은 부러운 듯 집안을 둘러보았다. “목사, 당신은 천당에 갈 필요가 없겠소.” “이렇게 깨끗하고 좋은 집에서 사니 천당인들 이보다 더 낫겠소?” 그러나 샤푸가 ‘천당 같은’ 이 집에서 산 기간은 삼 개월도 되지 않았다.

 

샤프는 1906년 2월 말, 사경회를 인도하기 위해 논산 은진 지방으로 갔다가 이질에 걸려 손도 못 써보고 3월 15일 별세하였다. 길 가다가 진눈깨비를 피해 들어간 집이 하필 상여를 본관하는 곳간이었고 그 곳에서 얼마 전 이질로 죽은 시체를 담았던 상여를 만진 것이 화근이었다. 샤프의 무덤은 그가 지은 천당 같은 집 뒤편 산 속에 마련되었다.

 

* 우리암의 두 아들 올리브와 죠지의 무덤이 샤프 무덤 앞 쪽으로 나란히 있고 그 아래쪽으로 테일러의 딸(Ester Marian, 1911-1916)과 아멘트의 아들(Roger, 1927-1929) 무덤이 있다. 자신이 태어난 곳이자 형의 무덤이 있는 공주에 묻히기를 원했던 죠지(우광복)의 경우를 빼고는 모두 병들거나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희생된 어린 2세들이었다.

 

 

PICF6.jpg

 

 

PICF7.jpg

* 조병옥 박사(가운데 줄 왼쪽 두 번째)와 우리암 선교사 부부

 

PICF8.jpg

PICF9.jpg

 

 

PICFA.jpg

PICFB.jpg

* 황인식 교장

PICFC.jpg

* 조병옥 박사

PICFD.jpg

* 유관순 열사

PICFE.jpg

                         

PICFF.jpg

PIC100.jpg

PIC101.jpg

 



 

PIC102.jpg

 

PIC103.jpg

* 사선교사가 1905년에 지은

공주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이다.

PIC104.jpg

PIC105.jpg  PIC106.jpg  PIC107.jpg

PIC108.jpg

 

PIC109.jpg

* 사애리시 선교 기념비

사애리시는(Mrs.Alice J.Sharp) 1905년 영명여학교의 전신인 명선여학당을 설립하였다.

 

* 영명 출신 또는 당시 영명에 재직한 교사들의 독립운동 참여는 타 학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공주영명학교 출신으로 독립 유공자 표창은 받은 사람은 다음 과 같다. 유관순, 조병옥, 유우석, 윤창석, 노명우, 안창호, 김현경, 강 윤, 오익표, 조화벽, 정환범, 신현창, 안신영, 이규남, 이규상, 현석칠이며, 그 밖에 교사 출신 유공자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이규갑, 이애일라, 신현구 등이 있다.

 

 

PIC10A.jpg

 

 

* 영명학교가 배출한 저명 인사로는 영명학교 교장, 해양대 학장과 충남 도지사를 지낸 황인식, 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 박사, 동경 2.8 독립선언을 주동한 윤창석, 소설가 방인근, 전 주일대사 정한범, 기독교 감리회 총리원 감독과 연세대 재단 이사장을 지낸 변홍규, 홍콩 총영사 이요한, 공주 지역 3.1 운동을 주동한 유준석 등이 있다.

  여성으로는 유관순, 임영신 외에 한국전쟁 때 피난처 대구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여자 경찰서장이었던 노마리아,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목사이며 무의탁자의 보호자인 전밀라 등이 있다.

 

PIC10B.jpg                             PIC10C.jpg

 


* 주소: 충남 공주시 중동 318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