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 전 대령이 언급한 인물은 한국계 신대용(67) DSE 회장이다. 신 회장은 총탄뿐 아니라 지하 25m까지 뚫고 폭발하는 '벙커 버스터'를 만들어낸다. 그가 지난 10년간 미 국방부와 체결한 공급 계약은 12억달러(약 1조3450억원). 이를 통해 연간 2억달러의 매출을 올린다.
세계를 움직이는 미국의 심장부에 들어가 야전 군인이 목숨을 의지하는 무기를 공급하는 한국인. 신 회장의 미 주류사회 진출 과정은 드라마틱하다. 1달러를 주고 공장을 사서 현재의 DSE를 일궜다.
◆믿을 수 있는 사람
1971년 그가 미국으로 건너올 당시 수중엔 현금 200달러뿐이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는데 병원 갈 돈이 없고, 냉장고가 텅 빈 '절대 가난'을 경험했다. 1979년 자동차 부품공장을 인수하고, 1980년 현재의 DSE를 창업할 때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듯 지나온 시간과 단절돼 비약하는 결정적인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를 그도 맞는다. 그는 "그 순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이 성숙해질 때 찾아온다"고 했다.
1979년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신 회장에게 미국 변호사 에드워드 콜먼씨가 갑자기 전화했다. 플로리다 템파 집으로 와달라는 것이다. 콜먼은 그가 자주 나가던 볼티모어시 아시아문화센터에서 만난 변호사였다. 정작 도착한 곳은 작은 자동차 부품공장이었다. 콜먼 변호사는 두툼한 법률 문서와 펜을 건네고 받아 적으라고 했다.
'나, 신대용은 이 공장을 1달러에 인수하는 데 동의한다.'
망설이는 신 회장에게 콜먼 변호사는 말했다. "농담이 아니다. 너는 충분히 이 일을 할 수 있다." 그는 신 회장이 장기에 걸쳐 대금을 치를 수 있도록 보증했다. 신 회장은 "나중에 콜먼에게 '왜 나를 도왔느냐'고 물었지만 명확히 대답하지 않았다"며 "문화센터에서 나를 지켜보면서 성실한 사람으로 본 것 같다"고 말했다.
1여년 뒤 콜먼 변호사는 방산업 분야로 눈을 돌려보라고 조언한다. 그는 지역 신문에 20달러를 내고 경험자를 찾는 구인 광고를 싣는다. 돈이 없어서 '은퇴자 선호'라고 단서를 붙였다. 한 달 뒤 하얀 캐딜락을 탄 피터 디켐프라는 이름의 백발노인이 찾아왔다. 공장을 둘러보며 디켐프씨는 질문을 던졌다. "국방부 일을 할 수 있는 기술이 있느냐?" "자금은?" 신 회장의 대답은 거의 모두 "노(no)"였다.
국방부 컨설턴트이면서 수백만달러의 재산가인 디켐프씨는 시간당 6달러의 보수를 제시한 신 회장에게 일주일 뒤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면서 승낙한다. '내가 커피 마시자고 하면 언제든지 마시고, 내가 점심 먹자고 하면 군말 없이 같이 먹을 것이며 내가 돈을 달라고 하기 전까지 기록만 해둘 것.'
그는 만 4년간 신 회장에게 국방부 계약서 작성과 기술 습득, 인맥 형성, 문제 해결 통로 등 방산업체 운영의 노하우를 가르쳤다. 디켐프씨는 7살 때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신문 배달을 하면서 포드 비행기 부사장이었던 양아버지를 만나 대학에 가고 성공했다. 그는 신 회장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했고, 양아버지에게서 받은 은혜를 자신이 베풀 차례라고 느꼈던 것이다. 신 회장는 "이제는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베풀 차례"라고 말했다.
◆조국과의 불화와 화해
신 회장은 연세대 기계공학과 재학 중 월남 파병에 반대하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항했다. 졸업 후 한국베어링에 근무하던 시절 중앙정보부 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2005년 미국 지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가난과 고문이 싫어 한국을 떠났다"고 밝혔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생각은 변했다. "저는 6·25전쟁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피란길의 어머니들은 양손에 아이들의 손을 쥐고, 등에 또 하나의 애를 업고, 머리에는 살림을 이었죠. 그 피란길에서 살기 위해서 비정하지만 아이들의 손을 놓아야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박 대통령이 바로 그 어머니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반대했던 월남 파병이 한국 경제의 동력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벌어들인 달러 가치보다도 우리 기술자들이 체득해서 돌아온 기술력이 그 후 건설산업 등을 일으키는 데 밑거름이 된 것 같아요."
신 회장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면 사회가 거꾸로 자신을 돌본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백석꾼이 아니라 만석꾼을 꿈꾸라"고 당부했다.
1986년 카다피 겨눈 주니 로켓 포함, 포탄·미사일 등 모두 10여종 생산
"팡! 팡! 팡! 팡!"
지난 8일(현지시각)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샬럿공항에서 자동차로 50분쯤 떨어진 사우스캐롤라이나 개프니타운. 미국 방산업체 DSE 공장 '건룸(gun room)'에 있는 MK19 기관총에 40mm 자동기관총탄이 장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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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 공군 소속 군인들이 2.2t짜리 벙커 버스터 2기를 무기 이동트럭에 싣고 있다. 벙커 버스터는 지하에 숨은 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만든 폭탄이다. /로이터
머리 부분이 둥근 후추병 크기의 40㎜ 총탄은 한 박스에 32발씩 들어갔다. '징~'. 기계가 움직이는 짧은 준비음에 이어 총구가 불을 뿜자 200m 지점에 약 60~70도 각도로 기울여 놓은 모래더미가 하늘로 튀었다. 불꽃이 튀며 맞은 자리엔 연기가 가라앉자 움푹 팬 젖은 모래 속이 드러났다. 지름 15피트(약 4.5m) 이내는 모두 섬멸한다는 엄청난 파괴력의 총탄이다.
신대용 DSE 회장이 만드는 미군 무기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지하에 숨은 적을 소탕하는 벙커 버스터다. 1991년 걸프전 당시 난공불락이라던 후세인의 지하 벙커가 이 폭탄에 맥없이 무너졌다. 북한의 지하 핵시설 및 동굴 속 장사정포가 가장 두려워하는 미군의 무기다.
벙커 버스터는 미국 내에서 DSE를 포함해 단 두 곳에서만 생산된다. 이밖에도 DSE에서 생산하는 무기는 1986년 카다피를 노린 리비아 공습 때 사용됐던 5인치 주니 로켓, 155㎜ 포탄, 25파운드 폭탄, 미사일 등 10여 종에 달한다.
신 회장은 이들 무기를 플로리다주 5개, 사우스캐롤라이나주 1개 공장에서 생산한다. 그가 만들어낸 무기는 미 국방부, 미 의회 내 수많은 소위원회 등 미국의 권력 장치에서 수없이 검증하고 승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