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아트홀 이종덕 사장은 대한민국 문화예술 CEO의 대부로 불린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대한민국 관객의 ‘충복’이라고 말한다. 공연예술 담당 공무원으로 출발해 예술의전당 6대 사장, 세종문화회관 초대 민영 사장, 성남아트홀과 충무아트홀 사장까지, 48년째 관객을 섬기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오랜 종살이가 기뻤다”고 한다. 그가 받은 품삯은 무엇일까? 이종덕 사장은 “신뢰와 긍정 에너지로 촘촘하게 짜인 아름다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서울특별시 중구문화재단 충무아트홀 이종덕 사장은 1935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에는 부친의 고향인 경기도 시흥군 서면(지금의 광명시)에서 성장했다. 극작가 고(古) 차범석 선생은 이종덕 사장이 2004년에 펴낸 자서전 《내 삶은 무대 뒤에서 이루어졌다―예술 행정 40년 CEO 이종덕 이야기》에서 이 사장을 가리켜 “쫀득거린다”고 표현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일본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탓에 일본말투가 남아 있어서라고 했다. 차범석 선생은 쫄깃쫄깃 씹을수록 감칠맛 나는 말투가 꼭 이종덕 사장과 닮아서 혼자 슬며시 웃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소위 말하는 국내 최고의 명문 상아탑을 거친 엘리트다. 경복중·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1기 공무원으로 들어갔다가 1963년 공보부 문화과로 방향을 정했다. 처음에는 학창시절부터 좋아하던 영화에 대한 애정을 살려 영화과로 가고 싶었으나, 고종사촌 매형이 때 묻을 수 있다며 만류했다. 그때부터 공연예술 담당 공직만 21년을 담당했다. 이후 문화예술진흥원 상임이사를 거쳐 88서울예술단 단장, 예술의 전당 6대 사장, 세종문화회관 초대 민영 사장, 성남아트센터를 거쳐 현재의 충무아트홀 사장까지, 줄곧 국내 내로라하는 극장들의 대표를 맡았다. 대한민국 공연예술의 산증인이자 문화예술 경영의 선구자인 것이다. 그의 활동 무대는 비단 극장에 국한되지 않는다. 2001년에는 세종대학교 언론문화대학원 겸직교수로, 2003년에는 단국대학교 산업경영대학원 문화예술 최고경영자 과정 주임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을 쏟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차범석 선생은 그의 화려한 이력에 내심 거리감을 느꼈던 것 같다. 선생의 표현을 빌면 이종덕 사장과 가까워진 것은 이 사장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였단다. 알고 있던 사실보다 훨씬 더 많은 이면사를 알게 되자 스스로 낯이 붉어졌단다. 처음 다르고 두 번째 다른 모습, 암탉이 알 품듯 많은 사람들을 감싸주는 인간미, 그것이 차범석 선생이 아는 이종덕이란 남자였다.
할 일이 많으니 챙길 게 많고, 챙기다 보니 할 일이 많았다
이종덕 사장이 크게 보람을 느낀 시절은 두 번 있었다. 문화예술진흥원(과거 문화예술진흥위원회)에서 6년 동안 일할 때와 빈터에서 시작해 국내 3대 예술극장으로 성장시킨 성남아트센터 근무 시절이었다. 예술의 전당과 세종문화회관 사장직을 수행할 때 그가 가장 공들이면서도 뚝심 있게 밀고 나간 사안은 다름 아닌 노조와의 관계 개선이었다.
“사실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은 아주 쉬웠어. 예술의 전당에 갔을 때, 그 전 사장들은 2개월, 6개월 간신히 채우고 퇴임하곤 했지. 3년 임기를 제대로 채운 사람은 내가 처음이야.”
당시 예술의 전당은 노조와의 갈등이 심각했다. 이종덕 사장이 극장 로비에서 농성 중인 노조원들과 일일이 대화를 하며 협상을 타결한 것은 극장가에서 실제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극장 운영을 안정화시키자마자 그의 할 일이 끝없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관객과 멀고 문턱이 높은 예술전용극장’이라는 인식을 씻어내고 싶었다.
“(예술의 전당에서)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러운 게 뭔가 했더니, 거기가 워낙 넓으니까 와도 뭘 할 수가 없더라구. 빨리 공연 보고 나가기 바빴지. 그거부터 고쳤어. 극장 안에서 사람들이 즐기고 머물 수 있는 요소들을 만들기 시작했지.”
세종문화회관 민영화 후 초대 사장직을 맡았을 때, 이종덕 사장은 ‘사장’이라는 다소 경직된 직함 대신 서구 문화예술계에서 널리 자리 잡은 ‘예술총감독’의 개념을 도입하고자 했다.
“한 1년 반쯤 지나 극장에 불이 났어. 사태 수습을 위해 현장에 나가서 내가 예술총감독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러대? ‘사장 오라고 해!’ 아, 예술총감독이라는 개념을 이해시키려면 아직 이르구나 싶었지.”
2004년 성남아트센터 상임이사 취임 당시 그는 고희를 앞두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사회봉사활동이라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곧 다시 한 번 의지를 다지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당시 성남은 분당 신도시와는 별개로 여전히 후진 신도시의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모란시장의 보신탕이 더 유명했고, 문화 향유에 대한 시민들의 수준과 요구도 편차가 심했다. 성남아트센터가 지역의 문화적 교량 역할을 해야겠구나 싶어 단계별 프로젝트로 시민들에게 문화를 선보이는 것부터 시작했다. 경기도 성남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예술 동호회들의 모임인 ‘문화사랑방 클럽’이 대표적인 사례다. 문화를 사랑하고 즐기고 싶은 이들에게 활짝 개방된 지역 커뮤니티를 통해 클럽 간 교류를 자연스럽게 나누고 네트워크를 튼튼하게 형성하게 되었다. 공연장 운영과 성남시민을 위한 문화활동이 동시에 활성화되자 중앙부서에서도 벤치마킹을 하기에 이르렀다. 문화재단을 만들고자 하는 지자체는 더욱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2005년 아트센터 개관 무렵, 이종덕 사장은 그렇게 한 걸음 더 앞서나가고 있었다. ‘국내 초연’, ‘국내 단독’, ‘자체 제작’. 이 3대 모토는 이 사장의 핵심 경영논리인 동시에 성남아트센터를 돋보이게 한 차별점이었다. 바로 ‘이 극장에서 이번엔 뭘 할까?’ 하고 관객이 늘 궁금하게 만드는 전략!
“우리가 제일 먼저 초연한 다음 예술의 전당으로 가는 현상이 벌어졌지. 성남(아트센터)에서만 공연하고 출국하는 연주자들이 속출하니까 세종(문화회관)에도 오겠지 했던 관객들이 당황했어.”
실제로 2005년 개관 직후 길버트 카플란의 말러 연주회, ‘태양의 서커스’로 유명한 애크러배틱 서커스 <디아블로> 등이 한국 초연 및 단독 무대를 선보였다. 2006년에는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기념한 <모차르트 페스티벌>, 강수진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마커스 밀러, 데이비드 샌본, 리 릿나워 등 유명 재즈 연주자들이 펼치는 <올 댓 재즈 인 성남> 등이 국내 단독 무대의 뒤를 이었다. 자체 제작에도 공을 들였다. 오페라 <파우스트>에 이어 모차르트의 대표작 <마술피리>를 올렸고, 뮤지컬은 <남한산성>이 대표적이다. 전국적으로 클래식 열풍을 몰고 온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도 빼놓을 수 없다. 예술극장을 드라마 촬영장으로 개방한 것은 국내 최초였다. 이 또한 이종덕 사장의 파격적이고 개방된 경영 마인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화예술 CEO가 관객을 위해 다지는 꽃자리
2010년 이종덕 사장은 성남아트센터에서 퇴임하면 문화재단을 만들어 봉사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경기도 수지에 사무실까지 얻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정계의 한 인사가 이 사장에게 중구문화재단 사장직을 거론했다. “내 나이가 77세다. 퇴직 소식이 온 일간지에 났는데, 내가 여기로 오면 사람들이 어찌 생각하겠느냐”며 고사의 뜻을 밝혔다. 중구 구청장까지 삼고초려했다. 그를 필요로 하는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의지를 다잡았다. 기왕 할 거면 열심히 해야 하는 성격은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