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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CEO의 48년 종살이 충무아트홀 이종덕 사장

영국신사77 2012. 4. 19. 00:34

           문화예술 CEO의 48년 종살이 충무아트홀 이종덕 사장

 

충무아트홀 이종덕 사장은 대한민국 문화예술 CEO의 대부로 불린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대한민국 관객의 ‘충복’이라고 말한다. 공연예술 담당 공무원으로 출발해 예술의전당 6대 사장, 세종문화회관 초대 민영 사장, 성남아트홀과 충무아트홀 사장까지, 48년째 관객을 섬기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오랜 종살이가 기뻤다”고 한다. 그가 받은 품삯은 무엇일까? 이종덕 사장은 “신뢰와 긍정 에너지로 촘촘하게 짜인 아름다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서울특별시 중구문화재단 충무아트홀 이종덕 사장은 1935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에는 부친의 고향인 경기도 시흥군 서면(지금의 광명시)에서 성장했다. 극작가 고(古) 차범석 선생은 이종덕 사장이 2004년에 펴낸 자서전 《내 삶은 무대 뒤에서 이루어졌다―예술 행정 40년 CEO 이종덕 이야기》에서 이 사장을 가리켜 “쫀득거린다”고 표현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일본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탓에 일본말투가 남아 있어서라고 했다. 차범석 선생은 쫄깃쫄깃 씹을수록 감칠맛 나는 말투가 꼭 이종덕 사장과 닮아서 혼자 슬며시 웃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소위 말하는 국내 최고의 명문 상아탑을 거친 엘리트다. 경복중·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1기 공무원으로 들어갔다가 1963년 공보부 문화과로 방향을 정했다. 처음에는 학창시절부터 좋아하던 영화에 대한 애정을 살려 영화과로 가고 싶었으나, 고종사촌 매형이 때 묻을 수 있다며 만류했다. 그때부터 공연예술 담당 공직만 21년을 담당했다. 이후 문화예술진흥원 상임이사를 거쳐 88서울예술단 단장, 예술의 전당 6대 사장, 세종문화회관 초대 민영 사장, 성남아트센터를 거쳐 현재의 충무아트홀 사장까지, 줄곧 국내 내로라하는 극장들의 대표를 맡았다. 대한민국 공연예술의 산증인이자 문화예술 경영의 선구자인 것이다. 그의 활동 무대는 비단 극장에 국한되지 않는다. 2001년에는 세종대학교 언론문화대학원 겸직교수로, 2003년에는 단국대학교 산업경영대학원 문화예술 최고경영자 과정 주임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을 쏟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차범석 선생은 그의 화려한 이력에 내심 거리감을 느꼈던 것 같다. 선생의 표현을 빌면 이종덕 사장과 가까워진 것은 이 사장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였단다. 알고 있던 사실보다 훨씬 더 많은 이면사를 알게 되자 스스로 낯이 붉어졌단다. 처음 다르고 두 번째 다른 모습, 암탉이 알 품듯 많은 사람들을 감싸주는 인간미, 그것이 차범석 선생이 아는 이종덕이란 남자였다.

 

                             할 일이 많으니 챙길 게 많고, 챙기다 보니 할 일이 많았다

이종덕 사장이 크게 보람을 느낀 시절은 두 번 있었다. 문화예술진흥원(과거 문화예술진흥위원회)에서 6년 동안 일할 때와 빈터에서 시작해 국내 3대 예술극장으로 성장시킨 성남아트센터 근무 시절이었다. 예술의 전당과 세종문화회관 사장직을 수행할 때 그가 가장 공들이면서도 뚝심 있게 밀고 나간 사안은 다름 아닌 노조와의 관계 개선이었다.

“사실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은 아주 쉬웠어. 예술의 전당에 갔을 때, 그 전 사장들은 2개월, 6개월 간신히 채우고 퇴임하곤 했지. 3년 임기를 제대로 채운 사람은 내가 처음이야.”

당시 예술의 전당은 노조와의 갈등이 심각했다. 이종덕 사장이 극장 로비에서 농성 중인 노조원들과 일일이 대화를 하며 협상을 타결한 것은 극장가에서 실제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극장 운영을 안정화시키자마자 그의 할 일이 끝없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관객과 멀고 문턱이 높은 예술전용극장’이라는 인식을 씻어내고 싶었다.

“(예술의 전당에서)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러운 게 뭔가 했더니, 거기가 워낙 넓으니까 와도 뭘 할 수가 없더라구. 빨리 공연 보고 나가기 바빴지. 그거부터 고쳤어. 극장 안에서 사람들이 즐기고 머물 수 있는 요소들을 만들기 시작했지.”

세종문화회관 민영화 후 초대 사장직을 맡았을 때, 이종덕 사장은 ‘사장’이라는 다소 경직된 직함 대신 서구 문화예술계에서 널리 자리 잡은 ‘예술총감독’의 개념을 도입하고자 했다.

“한 1년 반쯤 지나 극장에 불이 났어. 사태 수습을 위해 현장에 나가서 내가 예술총감독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러대? ‘사장 오라고 해!’ 아, 예술총감독이라는 개념을 이해시키려면 아직 이르구나 싶었지.”

2004년 성남아트센터 상임이사 취임 당시 그는 고희를 앞두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사회봉사활동이라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곧 다시 한 번 의지를 다지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당시 성남은 분당 신도시와는 별개로 여전히 후진 신도시의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모란시장의 보신탕이 더 유명했고, 문화 향유에 대한 시민들의 수준과 요구도 편차가 심했다. 성남아트센터가 지역의 문화적 교량 역할을 해야겠구나 싶어 단계별 프로젝트로 시민들에게 문화를 선보이는 것부터 시작했다. 경기도 성남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예술 동호회들의 모임인 ‘문화사랑방 클럽’이 대표적인 사례다. 문화를 사랑하고 즐기고 싶은 이들에게 활짝 개방된 지역 커뮤니티를 통해 클럽 간 교류를 자연스럽게 나누고 네트워크를 튼튼하게 형성하게 되었다. 공연장 운영과 성남시민을 위한 문화활동이 동시에 활성화되자 중앙부서에서도 벤치마킹을 하기에 이르렀다. 문화재단을 만들고자 하는 지자체는 더욱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2005년 아트센터 개관 무렵, 이종덕 사장은 그렇게 한 걸음 더 앞서나가고 있었다. ‘국내 초연’, ‘국내 단독’, ‘자체 제작’. 이 3대 모토는 이 사장의 핵심 경영논리인 동시에 성남아트센터를 돋보이게 한 차별점이었다. 바로 ‘이 극장에서 이번엔 뭘 할까?’ 하고 관객이 늘 궁금하게 만드는 전략!

“우리가 제일 먼저 초연한 다음 예술의 전당으로 가는 현상이 벌어졌지. 성남(아트센터)에서만 공연하고 출국하는 연주자들이 속출하니까 세종(문화회관)에도 오겠지 했던 관객들이 당황했어.”

실제로 2005년 개관 직후 길버트 카플란의 말러 연주회, ‘태양의 서커스’로 유명한 애크러배틱 서커스 <디아블로> 등이 한국 초연 및 단독 무대를 선보였다. 2006년에는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기념한 <모차르트 페스티벌>, 강수진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마커스 밀러, 데이비드 샌본, 리 릿나워 등 유명 재즈 연주자들이 펼치는 <올 댓 재즈 인 성남> 등이 국내 단독 무대의 뒤를 이었다. 자체 제작에도 공을 들였다. 오페라 <파우스트>에 이어 모차르트의 대표작 <마술피리>를 올렸고, 뮤지컬은 <남한산성>이 대표적이다. 전국적으로 클래식 열풍을 몰고 온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도 빼놓을 수 없다. 예술극장을 드라마 촬영장으로 개방한 것은 국내 최초였다. 이 또한 이종덕 사장의 파격적이고 개방된 경영 마인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화예술 CEO가 관객을 위해 다지는 꽃자리

2010년 이종덕 사장은 성남아트센터에서 퇴임하면 문화재단을 만들어 봉사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경기도 수지에 사무실까지 얻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정계의 한 인사가 이 사장에게 중구문화재단 사장직을 거론했다. “내 나이가 77세다. 퇴직 소식이 온 일간지에 났는데, 내가 여기로 오면 사람들이 어찌 생각하겠느냐”며 고사의 뜻을 밝혔다. 중구 구청장까지 삼고초려했다. 그를 필요로 하는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의지를 다잡았다. 기왕 할 거면 열심히 해야 하는 성격은 어쩔 수 없었다.

  • 충무아트홀 사장을 맡고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처음 왔을 때, 뚝심 있게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활동가로 유명한 이 사장 앞에 난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마음으로 일을 해도 녹록치 않은 게 공연장 운영사업이었다. 하지만 문화예술경영 CEO 이종덕은 결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얼마 전 그는 노사 문제를 성공적으로 타결했다. 이제 공연장 문화를 개성있게 만들고, 관객들로 북적이는 극장을 만들기 위해 해야 할 무수한 일들이 다시 한 번 이 사장의 눈에 들어왔다.

    문화예술 CEO 이종덕 사장은 자신을 믿고 지지해준 이들에 대한 애정이 신앙처럼 깊고 두텁다. 구상 시인이 와병 중에 이 사장에게 선물한 ‘꽃자리’ 시 액자에는 두 사람의 아름다운 인연이 담겨 있다.

    “사람이란 어디서든 마감을 잘해야 해. 국가의 녹을 먹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사업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시민들의 삶의 수준을 높이는 일을 열심히 해야지. 문공부 공무원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국민의 세금과 항상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거품 없이 최선을 다해서 관객들에게 최대의 혜택으로 돌려주자는 게 내 철학이야.”

    요즘 충무아트홀은 문화에 대한 다양한 욕구를 적극 수렴하는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 중이다. 지난해 리노베이션을 거쳐 300석 규모의 대극장과 중극장 블랙, 소극장 블루, 충무갤러리, 컨벤션센터, 강의실을 갖췄다. 더불어 일반인들이 음악, 연극, 뮤지컬을 체계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운영해 ‘관객 참여성 예술극장’이라는 인지도를 더했다. 고급 예술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이종덕 사장은 충무아트홀이 뮤지컬 전용 극장으로서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했지만 고급 예술 공연장으로서의 이미지는 아직 미흡하다고 판단했다. 그것이 지난 5월 취임 후 첫 공식 기자회견 때 이종덕 사장이 “앞으로 공연의 절반은 뮤지컬로 하되 30%는 클래식, 나머지 20%는 이벤트성 공연으로 채워 종합공연장으로서의 면모를 되찾겠다”고 계획을 밝힌 이유다. 한국뮤지컬협회와 공동으로 <서울 뮤지컬 페스티벌>을 개최하는 한편 PMC 송승환 대표와도 외국인 대상 뮤지컬 프로그램을 더욱 긴밀하게 개발할 예정이다. 한편 발레아카데미를 신설하고 국악·클래식·재즈·대중음악 등 다양한 연령층에서 즐길 수 있는 장르를 적극 선보이겠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 또 국립발레단과 업무협약을 맺어 내년부터 <백조의 호수>, <돈키호테>를 작품 라인업에 올렸으며, 얼마 전에는 금난새가 이끄는 유라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상주 단체로 선정해 클래식 음악의 수준을 체계적으로 업그레이드할 예정이다.

    이종덕 사장의 집무실 한쪽 벽에는 붓글씨로 쓴 시 한 편이 걸려 있다. 구상 시인의 ‘꽃자리’ 시구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문화교류센터 이길상 소장이 쓴 ‘작품’이다.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오랜 사연이 묻어 있다.

    “어느 날 한국박물관협회 김종규 회장이 저 액자를 건네주더라고. 당시 구상 선생께서 와병 중이라 그네가 문병을 갔는데, 선생께서 ‘이거, 이종덕이 갖다줘.’ 그러시더라는 거야. 내가 잘나가는 예술의전당에서 할 일 많은 세종문화예술회관으로 가게 되니까 선생께서 쓸쓸해할 내 마음을 헤아려주신 거지.”

    액자를 보며 감상에 젖어드는 건 비단 회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시회장에서 뵐 때면 이 사장 곁에 다정히 서 계시던 정신적 스승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으리라. 예술을 사랑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CEO 이종덕 사장의 ‘48년 종살이’의 품삯은 바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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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덕 사장의 문화예술인 네트워크

    1 정명훈

    1974년 문공부 문화과 근무시절이었다.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정명훈이 1등 없는 2등(사실상 1등)에 입상했다. 이종덕 사장은 단숨에 국장실로 달려갔다. “우리의 정명훈이 해냈습니다. 금메달을 땄단 말입니다!” 그리고 국위 선양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환영 카퍼레이드를 하자고 제안했다. 당시에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국가대표 선수들에게만 주어지던 국가적 영예였다. 귀국하던 날, 정명훈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정명훈을 태운 카퍼레이드가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 앞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 일은 예술가의 사기를 국가적으로 한껏 드높여준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2 박칼린

    1997년 당시 이종덕 사장은 예술의 전당 사장이었고, 박칼린은 촉망받는 뮤지컬 음악감독이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뮤지컬 작품이 올려지게 됐다, 윤호진 대표가 이끄는 에이콤과 예술의 전당이 5억 원씩 공동 투자하는 파격적인 제작운영방식 등 여러 면에서 한국 창작뮤지컬사상 최대 작품이 될 거라고들 했다. <명성황후> 이후 박칼린에게 ‘대한민국 대표 뮤지컬 음악감독’이라는 타이틀을 안겨준 작품
    <겨울나그네>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올여름 충무아트홀에서 박칼린 연출의 뮤지컬 <렌트>로 그들은 또 한 번 뜨거운 재회를 나누고 있다.

    3 이어령

    후일 문화부의 어느 국장을 통해 들은 얘기라고 했다. “이종덕 단장(당시 ‘88서울예술단’ 단장 재임 중)은 일을 위해서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내게 찾아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야 마는 강한 추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이종덕 사장은 국회 본회의 기간이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어령 장관을 만나게 위해 본회의실 복도에서 진을 쳤다. 그가 이끌고 있던 예술단을 문화부 산하의 정식 재단법인으로 승격시키자는 안건 때문이었다. 끝내는 의원식당까지 동행해 보고를 마쳤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예술단은 정식 재단법인으로 등록되었다.

    4 이세중

    이세중 변호사가 알고 있는 이종덕 사장의 모습은 어떨까. “나는 이종덕 씨가 대학생 시절, 한때 광화문 주먹패들과 어울려 지냈다는 사실을 안다. (중략) 단언하건대 그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명색이 법조인인 내가 그런 말을 할 정도면 그의 인간성은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인 셈이다. 그런데도 그는 대학생 시절을 풍운아처럼 보냈다.” 그 이유에 대해 이세중 변호사는 “의리 때문”이라고 나름의 해석을 붙였다. 예술경영 CEO 이종덕의 가장 큰 덕목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리더십’이라고 말이다.

    5 김수환

    추기경이 작고하시기 전 독일 방문길에 동행한 적이 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세계 나환자를 위한 자선음악회 참석차였다. 그때도 참 인상 깊었지만, 타계하시기 얼마 전에 찾아뵈었을 때 “나는 바보”라고 말씀하신 것이 가슴 먹먹해지도록 깊이 각인되어 있다. 생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잊지 못할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은 이종덕 사장의 마음 속 큰 어른이다.

    6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 김동호 위원장은 이종덕 사장을 가리켜 ‘마당발’이라고 말한다. “경복고등학교와 연세대를 나온 유명인사 치고 그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심지어 내가 나온 경기고 출신들도 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다”고 했다. 또 김 위원장은 이종덕 사장을 ‘돌쇠’라고도 한다. 신의에 강하고 한결같고 최선을 다하는 돌쇠 같은 우직함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김 위원장은 이종덕 사장을 ‘봉사자’라고 칭찬한다. 이 사장을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자 몸을 낮추는 종교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7 금난새

    지휘자 금난새와의 인연은 길고도 한결같다. 예술의 전당 10주년을 기념한 특별공연 때 이종덕 사장이 정명훈과 금난새 투톱을 세운 것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지휘자에 대한 극진한 예우였다. 그 인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금난새가 이끄는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중구문화재단 충무아트홀의 상주 예술단체로 선정된 것이다. 뮤지컬 전용 극장 특성이 강한 충무아트홀의 이미지에 순수 클래식 음악공연을 활성화시켜 보다 다채로운 종합예술공간의 면모를 갖추고자 하는 ‘예술 다변화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성남아트센터 시절, 주부들 대상의 <마티네 콘서트>로 원정대를 거느릴 만큼 관객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지휘자 금난새의 새로운 구상이 기대된다.

    8 장한나

    ‘첼로 신동’의 여린 체구에서 마에스트로로서의 가능성을 본 이가 바로 이종덕 사장이었다. 2007년 장한나는 제1회 성남국제청소년관현악 페스티벌에서 지휘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이 무대는 이종덕 사장과 장한나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베네수엘라의 빈민층 아이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불러일으킨 기적 같은 음악교육의 힘, 일명 ‘엘 시스테마’를 성남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뜻이 서로 통한 것이다. 이후 장한나는 남다른 관심과 열정으로 성남국제청소년관현악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한편, 성남 지역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오케스트라를 직접 지도하고 공연도 함께하고 있다.

    9 강수진

    1999년 당시 강수진은 이미 세계 최고의 발레리나였다. 이종덕 사장은 말했다. “강수진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세우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환영했지만 ‘설마 세계적인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우리나라에?’ 라고 반신반의했다. ‘강수진 고국 무대 세우기 프로젝트’는 2000년부터 본격 가동되었다. 독일 측과 결코 적지 않은 비용문제를 해결할라치면 공연 작품의 제목 때문에 고민해야 했다. 아직 국내 인지도가 낮은 현실을 고려해 MBC에다 강수진에 대한 특별 프로그램을 제작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강수진의 뭉그러진 발’은 그렇게 해서 세상에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감동했다. 2002년 강수진이 연기한 <카멜리아의 여인>은 한 신문사에서 선정한 그해 ‘가장 성공적인 공연’에 뽑혔다.


    / 여성조선
      취재 김정원 기자 | 사진 방문수 | 자료 조선일보 DB,
     《내 삶은 무대 뒤에서 이루어졌다―예술 행정 40년 CEO 이종덕 이야기》(도서출판 어떤이의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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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1.10.27 0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