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와 文學 그림/文化공연文學그림讀書

[소설가 은미희의 마실] 이브의 사과

영국신사77 2012. 4. 13. 00:07

2012.04.11 18:21

[소설가 은미희의 마실] 이브의 사과
 
요즘 들어 자꾸만 쫓기는 기분이다. 삶에 있어서도 그렇고, 글 쓰는 일에 있어서도 그렇다. 만만치 않은 나이가 주는 조급함이겠지만 컴퓨터 앞에 앉아서도 오래 버티지를 못한다. 예전에는 한번 쓰기 시작하면 서너 시간은 족히 꼼짝도 하지 않고 글을 썼지만 요즘은 삼십분을 집중하기가 힘들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쓸데없는 생각으로 허비하는 시간이 많다. 잡념을 없애려 책을 들지만 역시 몇 장 넘기지 못하고 생각에 사로잡히고 만다. 왜 그럴까?

주필 맡아달라는 달콤한 유혹

반성하고, 또 반성하지만 그때뿐이다. 아마도 심리적 요인이 클 것이다. 이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 그 시간 안에 무언가 남은 일들을 정리하거나 이뤄놓아야만 한다는 거. 그게 가장 큰 이유인 듯싶다.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일이란 무엇일까.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으니, 보다 더 좋은 글을 쓰는 일이 나에게 주어진 숙제이겠지만 어디 지금 세상이 글쓰는 일로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시대든가. 욕망을 줄이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임을 알면서도 나는 번번이 그 행복을 놓치고 만다. 아직 내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최근 그런저런 일로 심사가 복잡하기만 했다. 헌데 얼마 전 나에게 달콤한 유혹이 들어왔다. 다른 종교에서 발행한 신문의 주필을 맡아달라는 일이었다. 꽤 괜찮은 제의였다. 그 신문을 만드는 구성원들과 신문을 만들게 된 배경도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물론, 그 제의가 들어왔을 때 나는 기뻤다. 그래, 이제 제대로 일을 한번 해보자. 하지만 무언가 마음이 찜찜했다.

천직이 글쟁이라 청빈한 삶이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순수한 영혼을 지키는 올곧은 사람처럼 나를 여기며 살아왔지만 그래도 세상의 빛나는 것들은 어쩔 수 없이 나를 유혹하고 나를 상실감에 빠트렸다. 그 제의를 받고 찜찜했던 이유가 ‘세상의 빛나는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나’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요즘 세상이야 누구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누구의 강요 없이 자신의 의사에 따라 종교를 선택한다지만 밥벌이를 위해서 나는 개종할 수 없었다. 아니, 그쪽에서는 개종까지 원하지 않았다. 단지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글쓰는 달란트였다.

나는 고민했다. 내 은행잔액을 위해서 가야할까. 아니면 얄팍한 지갑일지라도 마음만 부자로 살까. 그때 나는 나가사키의 ‘후미애’를 떠올렸다. 예수를 밟고 지나가라던 그 회유에 신부는 어떻게 했던가. 나에게 주는 달콤한 유혹을 후미애로까지 연결짓는 게 비약이지만 내 고민은 그만큼 깊었다. 지갑이 두툼해지고, 두툼한 지갑만큼이나 기름지고 폼나게 살 수 있는 생활이 보장된다지만, 그래도 나는 하나님의 십계명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못해도 그것마저 저버리기에는 나는 되바라지지도 못했다. 게다가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해주신다고 했으니 당장 지갑이 비어 있더라도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뜻하신 일이 있을 거라 여겼다.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하심 믿어

나는 전화를 걸었다. 아쉽지만 그 일은 나에게 맞지 않는 일이라고 정중히 거절했다. 그 말을 하고 나니 빵빵하게 부풀어 있던 풍선이 팡 터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런 내가 대견했다. 비록 예수를 밟고 지나가면서 예수를 부정하라는 시험은 아니더라도 나는 한차례 시험을 당한 기분이었다. 당연한 일을 가지고 이렇게 떠벌리는 것이 옳은 일인가 부끄러운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 나는 그 심정이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열심히 앞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내가 좌절하지 않도록, 넘어지지 않도록 나를 일으켜 세우고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해주실 것이다. 나는 믿는다. 나를 더 높고 좋은 곳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나를 담금질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다시 힘내서 가야할 것이다. 내가 계획하고 있는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는 아실 것이다. 내가 의지하고 내가 기댈 곳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자 내가 손을 내밀었으니, 하나님께서 잡아주실 것이다. 아니? 벌써 잡아주셨나? 그러니 일어서서 다시 걸어가자. 아자! 아자!! 파이팅!!!

은미희

* 소설가 은미희씨는 1996년 ‘누에는 고치 속에서 무슨 꿈을 꾸는가’로 지방 일간지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1999년 단편 ‘다시 나는 새’로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그 이후 2001년 장편소설 ‘비둘기집 사람들’로

삼성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나비야 나비야’, ‘인당수에 빠진 심청’ 등 다수의 작품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