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강렬] 한국판 ‘엘 시스테마’를 만들자

2011.04.25 18:00

[여의춘추-이강렬] 한국판 ‘엘 시스테마’를 만들자

1997년 4월 어느 날 미 동부 펜실베이니아 주 남동부에 있는 항구도시 필라델피아에 미국 전현직 대통령을 비롯해 VIP들이 대거 모였다.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을 비롯해 조지 W 부시, 지미 카터,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과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부인 낸시 여사가 자리를 함께해 ‘미국 장래를 생각하는 대통령들의 회동’을 가졌다. 전현직 대통령들은 이날 미국정부가 청소년 정책을 최우선에 둘 것과 청소년들을 위한 ‘5가지 약속’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5가지 약속은 콜린 파월 전 미 국무장관이 만든 ‘미국의 약속(America’s Promise)재단’이 청소년 문제를 어른들의 책임으로 보고 어른이 지켜야 할 5개 항을 정해 이를 실천하자는 것이었다. 탈선 청소년 ‘움직이는 폭탄’ 다민족 국가인 미국의 청소년 문제는 심각한 사회현안이다. 청소년들이 총기, 마약, 알코올 등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고교 3학년까지 마약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학생이 전체의 53.9%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이런 미국을 걱정한 전현직 대통령과 파월 전 국무장관이 미래의 희망인 청소년들을 어른들이 지켜야 한다고 나선 것이다. 이 운동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미국에서 가장 큰 NGO가 되었다. 미국 전현직 대통령 회동보다 22년 앞선 1975년, 남미 빈곤국가인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어느 허름한 차고에 교도소를 제집처럼 드나들던 빈곤층 문제아 11명이 모여 악기를 잡았다. 범죄와 마약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이 나라 상당수 아이들은 늘 총을 장난감처럼 들고 다녔다. 이 나라 경제학자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가 청소년 보호를 위해 음악을 사용하자는 발상 아래 ‘음악을 위한 사회행동’을 조직했다. 많은 감동을 불러 일으킨 영화 ‘엘 시스테마(El Sistema)’는 국가지원을 받는 베네수엘라 음악교육 재단 이름이다. 36년이 지난 지금 베네수엘라에는 102개 청소년 오케스트라와 55개 유소년 오케스트라를 엮은 네트워크가 구성돼 있고 여기에 청소년 10만명이 참여하고 있다. 2015년까지 참여 청소년을 50만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우리나라도 최근 청소년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최근 급격히 늘어난 다문화 가정과 북한이탈 청소년들이 학교와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상황이 빚어지면서 청소년 문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들을 ‘돌아다니는 시한폭탄’이라고 부른다. 다문화가정의 한 아이가 쓴 일기에서 “내게 총이 있다면 모두 쏴 죽이고 싶다”는 글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들의 가슴에는 늘 소외와 분노가 가득하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사회의 관심은 늘 뒷전이다. 존경받지 못하는 전직 대통령과 싸움질만 하는 정치인들에게 청소년 정책은 안중에 없다. 음악, 빈곤과 체념의 치료제 다행히 곳곳에서 음악을 통해 ‘분노를 품고 사는’ 이들 청소년들을 끌어안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한국판 엘 시스테마’ 운동이다. 부산지역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동아대학교 인재뱅크(이사장 조규향 총장)가 중심이다. 지금까지 다문화 가정 청소년들로 구성된 3개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향후 50개까지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부산을 넘어 경남, 울산, 제주 등 전국으로 넓혀갈 예정이다. 문제는 재원과 관심이다. 최근 정부는 초·중·고 학생들의 오케스트라 교육지원 사업을 위해 65개 학교를 선정, 1억원씩의 운영비 및 악기 구입비용을 지급하기로 했다. 여기에 다문화가정, 탈북자 청소년 오케스트라 지원은 빠져 있다. 음악은 빈곤과 체념의 대물림을 막는 데 아주 유용한 수단이다. 이태석 신부의 일대기를 그린 ‘울지마 톤즈’가 입증해 준다. 다문화 가정과 탈북 청소년들을 통해 ‘한국판 엘 시스테마’가 곳곳에 만들어질 때 우리 사회는 보다 희망으로 가득 찰 것이다. 이강렬 논설위원 ry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