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맹헌실(孟憲實)
장손황후(600-636). 아명은 관음비(觀音婢). 개황20년(600년)에 태어나, 정관10년(636년)에 사망했으니, 향년 36세이다. 13살때 이세민에게 시집갔으니, 대업9년(613년)이다. 당시 이세민은 16세였다. 일생동안 당태종 이세민과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 이승건(李承乾), 차남 이태(李泰), 삼남 이치(李治)가 그들이다.
장손황후의 가족은 원래 북위(北魏)의 황실인 탁발씨(拓拔氏)였다. 나중에 종실의 장손이 되면서 "장손(長孫)"이라 한 것이며, 결국 이것이 성으로 굳어져 버렸다. 황후의 증조부는 장손유(長孫裕)인데, 일찌기 평원공(平原公)의 작위를 받은 바 있다. 부친은 장손성(長孫晟)인데, 역사서에는 그가 작위를 승계했다는 기록이 없다. 아마도 그는 작위를 승계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장손성에게는 형이 있는데 장손치(長孫熾)이다. 장손치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수나라때 호부상서에 오른다. 장손성은 수나라때 우효위장군(右驍衛將軍)을 지내는데, 수나라때 돌궐을 이간시키는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모친은 양주자사(揚州刺史) 고경덕(高敬德)의 딸이다. 그녀의 외삼촌은 정관시대에 아주 유명했던 인물로, 이름이 고사렴(高士濂)이다.
장손성의 관직은 우효위장군에 이르렀는데, 이세민의 부친인 이연은 대업9년때 관직이 위위소경(衛尉少卿)이었고, 대업12년이 되어서야 우효위장군이 되었다. 이로써 볼 때 장손성의 관직은 이연보다 높았다. 그렇지만, 이연에게는 작위가 있었다. 7살때 당국공(唐國公)의 작위를 승계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볼 때, 두 집안은 서로 집안이 대등했다고 볼 수 있다.
양가의 혼인은 장손집안에서 이씨집안을 잘 보아서 이루어진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이세민의 모친인 두씨(竇氏)에게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씨의 부친인 두의(竇毅)는 정주총관(定州總官)으로 작위가 신무공(神武公)에 이르렀다. 주나라 무제의 누나인 양양장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두씨가 출생한 후, 주무제가 그녀를 아껴서 궁중에서 길렀다. 주무제때의 북주(北周)는 이미 북제(北齊)를 통일할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돌궐을 모시는 일에 아주 조심스러워했다. 주무제는 돌궐공주를 황후로 맞이하였다. 이런 정치혼인은 당연히 사랑의 감정에 기초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주무제는 이 돌궐황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에 그녀에게는 냉담하게 대했다. 이를 나이어렸던 두씨가 눈치채었다. 그녀는 어린아이였으므로 말에 거리낄 것이 없었기도 하지만, 그녀의 정치적인 식견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외삼촌인 주무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중국은 아직 통일되지 않았다. 그러나 돌궐은 아주 강대하다. 외삼촌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돌궐황후를 잘 대해주어야 한다. 돌궐의 지지를 받아야만, 강남과 북제를 손쉽게 상대할 수 있다" 어른이 보기에 이런 것을 간파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황제에게 말해주기는 어렵다. 이 어린 여자아이는 외삼촌과의 관계가 밀접하여 뭐든지 말할 수 있었지만, 이런 말까지 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주무제는 일대의 효융이었으나, 어린 조카의 말을 잘 들었다. 이 일이 일어난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장손황후의 큰아버지인 장손치는 이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동생인 장손성에게 "두씨는 이처럼 지혜를 가진 여인이니 분명히 아들을 잘 길렀을 것이다. 방법을 강구해서 혼인관계를 �도록 하자" 장손성도 형의 말에 동의했고, 사람을 보내어 이 결혼을 성사시켰다. 이 당시 이세민과 장손씨의 나이가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손치의 관점이 중요하다. 그가 중요시 한 것은 이연의 가문이 아니었다. 이연의 앞날을 본 것이 아니라 두씨의 정치적인 지혜와 예지를 본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모친이라면 분명히 좋은 자식을 길러낼 것이라고 본 것이다. 나중의 결과는 이런 판단이 아주 정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이 모친은 아주 뛰어난 아들을 길러냈을 뿐아니라, 뛰어난 남편도 길러냈다. 이연이 처음에 잘 모르고 있을 때, 그의 부인인 두씨는 이미 수나라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남편에게 수양제에 대적할 기본전략을 제시한다. 나중에 이연은 천천히 깨닫게 되고 결국 그 길을 가게 된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이었다. 이연은 스스로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부인의 선견지명을 그리워했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일찌감치 네 어미의 말을 들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두씨를 이왕 얘기했으니 다 얘기해보기로 하자. 양견은 북주의 정권을 찬탈하여 수나라를 세웠따. 두씨는 양견이 황제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두 눈에서 눈물을 쏟아내고 침대에 엎드려, 한스럽게 말하였다고 한다 "남자로 태어나서, 외삼촌의 집안을 구해주지 못하는게 한스럽다." 그러자, 그녀의 부친인 두의는 얼른 그녀의 입을 막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 우리 집안이 몰살당할 수도 있다" 37년후, 그녀의 원한은 풀 수 있었고, 바로 그녀의 남편과 아들에 의하여 실현되었다. 이것은 보통 백성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치의 핵심을 이루는 가족들 사이에 있어서는 정치를 훨씬 중시하는 경우가 많다.
장손황후의 유년기때의 알려진 이야기는 많지 않다. 그저 그녀의 명운에 부귀함이 있다는 정도이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 지어낸 말이기 때문에 소개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그녀와 당태종간의 정혼은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일 것이다. 최소한 9살이전이다. 대업5년에 장손성이 사망하니 나이 58세때의 일이다. 이때 장손씨는 겨우 9살이었다. 부친이 돌아가시켠서, 그녀의 유년기는 중대한 변고를 맞이한다. <<수서.장손성전>>에 따르면, 그의 장남은 장손행포(長孫行布)이고, 차남은 장손항안(長孫恒安)이라고 되어 있다. 장손무기(長孫无忌)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장손황후에게는 또 하나의 오빠인 장손안업(長孫安業)이 있다. 장손행포는 수나라때 사망하였는데, 장손항안에 대하여는 이런 기록이 없다. 장손항안과 장손안업이 어떤 관계인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형제이거나, 아마도 동일인일 것이다. 장손성이 사망한 후, 장손황후와 오빠인 장손무기는 자기의 이복형/오빠인 장손안업에 의하여 집에서 쫓겨난다. 두 어린아이는 할 수 없이 외삼촌집으로 가서 생활한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장손황후의 모친은 장손성의 후실일 것이며, 전실소생인 이복형제들로부터 차갑게 대접받았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전실소생이 후실소생들을 냉대한 사례는 당나라때 아주 보편적이었던 것같다. 유명한 사례는 무측천이다. 그녀는 무사획이 사망한 후 이복오빠에게 대우를 잘 받지 못해서, 서로 원수지간이 되었다. 장손황후는 무측천과는 같은 문제지만 처리의 원칙과 방법에 있어서 모두 달랐다. 당나라의 여성세계에서 이 두 여인은 당시의 정치에 모두 큰 영향을 미치던 인물들이다. 여러 면에서 비교될 수 있다.
장손씨와 당태종의 혼사는 <<구당서. 고사렴전>>에 보면 다른 이야기가 기재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첫째는 장손황후의 모친이 장손성의 후처라는 것이 증명되고, 둘째는 이 혼인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사렴전에 따르면, 장손성이 죽은 후에, 고사렴은 "누이와 조카를 집으로 데려왔고, 정이 깊었다. 당태종이 잠룡으로 있을 때 비상한 사람인 것을 알고, 장손성의 딸을 처로 주었으니, 바로 문덕황후이다" 이를 보면, 혼인을 주도한 사람은 장손성이나 장손치가 아니라 고사렴이라는 것이다. 이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필자의 견해로는 장손성이 생전이 이 혼사를 정해두었고 그가 죽은 후에 고사렴의 주도하에 혼인을 하게 된 것으로 본다.
이렇게, 우리는 장손씨가 혼인하기 이전의 상황에 대하여 아주 기본적인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의 모친은 후처로 장손성에게 시집갔고, 그녀와 그녀의 오빠인 장손무기가 출생하였을 때는 집안에 이미 이복형/오빠가 있었다. 그녀의 나이많은 부친은 아마도 그녀에게 잘 대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원래 문제를 많이 안고 있는 법이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나이많은 부친은 모친보다 먼저 사망하게 되고, 전처의 이복형들은 원래부터 우월한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부친의 작위도 계승하고, 가업도 계승할 것이다. 그러나 후처와 그 자식들은 아무런 지위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이복형제가 얼마나 잘해주는지에 따라 그들의 입지가 달라질 것이다. 장손안업의 지위로 보면, 장손성이 죽은 이후, 장손안업이 호주가 되었을 것이다. 분가하지 않는 한 그녀, 오빠 및 그녀의 모친은 모두 장손안업의 눈치를 봐야 한다.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 장손황후와 모친, 오빠는 모두 외삼촌집으로 갔는데, 신구당서는 모두 장손안업이 장손황후와 장손무기에게 나쁘게 대하였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장손성이 죽었을 때, 황후는 겨우 9살이었다. 장손안업의 집에 얼마나 있다가 떠난지는 모르지만, 고사렴의 집에서 살 때, 역사서에서는 비록 고사렴이 여동생과 조카들에게 잘 해주었고, 심지어 큰 집을 팔아 작은 집을 사서 여동생에게 나눠주었다고 되어 있지만, 장손황후나 장손무기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외삼촌의 집에 빌붙어 사는 입장이었으니, 어느 정도 남의 밑에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역사서에 기재된 어릴 때의 장손황후는 책읽기를 좋아했다고 되어 있다. 고대의 책에 흥미가 많았고, 한번 보면 잊지 않았으며, 스스로 예법을 잘 지켰다고 되어있다. 규칙을 잘 지켰다는 것은 분명히 훈련을 잘 받아서일 것이다. 장손씨가 어려서부터 규칙을 잘 지켰다는 것은 어려서 집안구조나 경력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아마도 모친이 어려서부터 그녀에게 엄하게 교육시켰거나, 아니면 버릇없이 굴다가 장손안업에게 혼난 일이 있다거나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외삼촌의 집에 와서는 규칙을 잘 지켰다. 장손황후가 어려서부터 규칙을 잘 지켰다는 것은 아마도 자아보호의 본능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나중에 이세민에게 시집가서, 운명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나중에 이연이 천하를 얻고 나서, 그녀는 왕비가 되었고, 나중에 황후까지 되었다. 여러해 후에, 우리는 황후의 행동에서 여전히 어렸을 때의 생활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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